• 최종편집 2024-10-12(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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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들아 내게 들으라 먼 곳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드사 그의 화살통에 감추시고 ”(<이사야> 49:1-2)
주님은 사람을 사랑하셨다. 그러나 사람은 연약하였다. 사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죄의식으로 인해 슬퍼하였다. 그래서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 사람의 잘못을 가르쳐 주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람은 온전한 회개를 하지 못하였다. 의롭게 살려고 하다가도 쉽게 넘어지기를 반복하였다. 그리하여 죄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이 죄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다. 그것은 바로 성령이 개인에게 들어가 사람이 의롭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님은 성령이 개인에게 임재하는 길을 열어 주어야 했다. 그래서 주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친히 세상에 내려왔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이심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나귀는 그 뒤뚱거리고 걷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더구나 그 새끼의 모습은 얼마나 우스꽝스럽겠는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낮은 자세로 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 모습은 구세주의 진정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허황됨을 풍자한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병을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권능자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참 모습은 그런 권능자에만 있지 않았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재하시는 기회를 주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필요했다. 예수님의 몸을 제단 위에 올려 놓는 의식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일이었다. 예수은 십자가에서 죽은 후 다시 부활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이해시켜야 했다. 그리하여 제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다시 사신 모습을 보여주고,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함을 알려 주셨다. 주님은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찾아갔고,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보고 상심하여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부활하셨음을 과학적으로 입증하여 달라는 제자에게 직접 창에 찔렸던 자국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당신의 진정성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제자들을 찾아나섰다. 그리고 주님은 사람들이 부활과 성령을 이해하도록 당신이 다시 사신 모습을 직접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다. 하나님의 나라에 무지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진정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이 풍자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몰랐던 민중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들은 그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성을 몰랐던 것이다.
나도 한때는 성령이 임재하심을 몰랐던 때가 있었다. 나 스스로의 힘으로 영감을 얻어 글을 쓰는 줄 알았다. 그래서 세상 책들을 열심히 읽고 습작도 많이 하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좋은 글이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아침마다 영감의 만나를 내려놓고 가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었다. 아침 일곱 시가 되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꿈에서 깨려는 찰나에 주님이 내려 놓고 가신 영감의 만나를 보았다. 그것은 나를 더 성숙한 작가의 위치로 나아가게 하는 주옥같은 모티프였으며, 담론이었다. 나는 그 모티프를 주워 담아 사색하고 글을 써 나갔다.
주님은 영감의 만나만 주시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사탄의 유혹에 빠지려 할 때마다 그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아 주셨다. 그리하여 나는 순수한 마음을 지켜 나가고, 하나님의 의대로 살아가려고 하며, 그분이 계획한 대로 기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기도를 통해서 내가 살아 있음과 가족과 형제가 건강하고 평안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그분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나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전하는 참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민중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진정성을 모르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다. 나의 작가 정신을 모르고 원고료를 제대로 못 받는다고 무시하는 사람, 내가 그분께 드리는 찬양의 참모습을 모르는 사람,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벌이가 신통찮다고 무시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서운함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은 나에게 다가와 작가로서의 길을 인지하시고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고 걸어 가라 하시었다. 주님은 나에 대한 지인들의 멸시를 믿음의 방패로 막아 주시고, 나에게 현실을 풍자하는 글을 쓰라고 진리의 창을 내어 주셨다. 그리하여 나는 그분이 함께 하는 현재의 삶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며, 집필을 하고 가족과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인도하시는 그분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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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행복론 -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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