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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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얘기를 종종들을 때가 있다.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야’ ‘됨됨이가 인간답고 훌륭한 인물이다’ ‘아주 꽃보다 향기로운 사람이다’ 등. 그들은 외로움과 고통을 극복하고 주변을 품어 안는 향기를 뿜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향기는 저마다 다르다. 피워나는 모양도, 빛깔도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결같은 것은 그 향기가 사람을 사랑하게 하고 믿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얼마 전 친구인 전 신 태인중앙교회 당회장 주호연 목사님을 통해 한국의 수필가요, 문학 평론가인 하재준 장로님의 수필집 ‘천국의 미소와 어머님의 눈물기도’ 라는 책을 받아 펼쳐 보았고, 그 후 그와 만남을 통하여 사람 향기를 느끼게 되었다. 즉 어머님에 대한 지극한 효성, 눈물어린 고학이야기, 수필 등이다. 이러한 하 장로님의 수필을 읽으면서 오물이 뒤섞인 더러운 물속에 뿌리를 내리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 올리는 아름다운 수련화와 연꽃, 또한 상처 많은 나무가 아름다운 무늬를 남긴다는 말을 생각했다.
그리고 “한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어린 시절을 살펴라”라는 정신 분석자 프로이드의 말이 떠올랐다. 이제 한 권의 책, 한 편의 드라마, 한 편의 영화와 같은 그의 가난하고 험난했던 여정, 고독과 가난 속에서 부서지고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 일어났던 그의 삶의 자취를 생각해 본다. 하재준(1941.11.22.). 그는 전북 신태인에서 부 하명용님과 모 김귀례님의 4남으로 태어났으며, 11남매 중 아홉째였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부의 단위이자 상징인 천석꾼의 거부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초대 농림부 장관 조봉암의 농림정책인 토지 개혁 정책으로 그 많은 토지가 실제 농사에 종사한 농민들에게 분배됨에 따라 지주몰락사태로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아홉째로 태어 낳기에 부모의 여력이 미치지 못하여 가난의 이력은 그의 생애에서 떨쳐낼 수 없는 그림자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자력으로 학교를 다니기 위해 6.25 직후 열 살인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피 눈물 나는 신문배달로 고학이 시작된다.
당시 가난이 심각할 때라 대부분의 서민들은 초근목피로 생계를 유지하던 때로 신문구독자들이 많지 않아 인근 면까지 배달해야만 했다. 그런 관계로 불과 6, 70부를 배달한다고 해도 3, 4시간을 뛰어야만 했다. 그런데도 피곤하다는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고 월급이 적다고 불평할 수도 없었다. 당장 그만둔다 해도 뒤를 이어 배달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새벽 4시 남들이 단잠에 취한 그 시간 신문을 옆에 끼고 문전 문전을 돌아다니며 “신문이요, 신문이요”하고 소리를 높여야 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에도, 강추위가 휘몰아치는 거리에도 비옷 하나 내복 한 번 입은 바 없이, 어둠을 헤치며 뛰고 또 뛰어야만 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학비도 초등학교 사친회비(당시납입금명칭)에 비하여 많고 써야 할 용돈도 필요해서 밤 10시경에 광주에서 온 신문을 배달했다. 새벽에 조간과 함께 배달하면 다른 아이를 써야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지국장의 위협적인 말에 꼬박꼬박 밤에 배달하고 보니 밤 11시 30분경에야 집에 돌아오곤 했다.
잠이 부족하나 새벽 4시 으례 퍼뜩 잠에서 깨어 신문을 배달하러 나가지만 졸림은 여전할 때가 많았다. 기차에서 신문을 받아 지국에 오면 지국장이 이부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내가 신문을 세며 순간순간 조는 것을 못 보겠는지, 그렇게 졸리면 내일부터 그만 두어라, 좀 큰 애를 시켜야 하겠다, 너의 사정만 봐줄 수 없지 않느냐는 등 이런 저런 말을 할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신문배달을 그만 두면 학교도 그만 두어야 하기 때문. “졸지 않겠어요. 동작을 빨리 할게요. 잘못 했어요. 앞으로 잘 하겠어요” 이렇게 사과하며 주섬주섬 신문을 들고 지국 문을 나설 때 피가 어린 눈물이 쏟아지고 시간의 아쉬움이 너무나도 절절함을 14세 때부터 피부로 가슴으로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이 후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시험에도 합격했다. 하지만 입학금이 없어 다음해로 미루고 등록금 마련을 위해 공장 직공으로 1년간 일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신문배달을 계속하며 여러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다.
11년간의 신문배달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그는 1964년 전주대학교 국어국문과에 입학하였으나 일 년도 채 되지 못한 2학기 등록금이라는 벽에 부딪쳤다. 할 수 없이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어머니 고학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를 새삼 절절히 느끼는 순간입니다. 등록금 마련이 도저히 불가능하여 부득이 휴학하려고 합니다”(생략). 곧 10장이 넘은 어머니의 간절한 격려의 회답이 도착했다. 그는 어머니의 편지에 자극을 받아 용기를 내 교무과장과 학장을 찾아갔다. 다행이 교무과장인 이 교수의 도움으로 등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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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의 사람- 문학평론가 하재준 장로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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