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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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제기

죽음이란 모든 인간이 겪어야 할 필수적 과정이다. 태어남이 있는가 하면 죽는 것도 인간이 가야 할 길이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하나의 학문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하나의 학문 분야가 만들어질 때는 그것이 다루는 고유한 주제와 범주가 있는데 죽음학이 담당하는 영역은 더욱 넓고 깊어서 ‘죽음학은 과학이기도 하고 예술이기도 하다.’ 라는 식으로, 완전하게 결론지을 수 없다.
과학은 구체적으로 관찰하고 검증할 수 있는 현상을 연구하라고 강조하는데, 죽음학은 바로 인간의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여정’에서 나타나는 각종 현상의 특징들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 점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죽음학은 과학이다. 그러나 과학은 탄생 이전- 죽음 이후의 ‘죽음의 여정’을 포함하여 종교나 철학적 주제의 영역을 다룰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들 영역을 주된 관심 대상으로 삼는 죽음학은 과학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Ⅰ. 죽음학의 이해

육체의 질고와 정신적 고통이라는 씨줄과 날줄 사이에서 죽음의 실체를 몸으로 겪는 골짜기를 지났다. 그러나 여기에 놓여나와 새로운 생명을 체험하였을 때 ‘죽음의 죽음’이라는 소망의 미학(美學)을 가슴 밑바닥에서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죽음에 대한 학문적 접근(學問的接近)을 시도하며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에게 하나의 모티브를 제공하려는 의도에서 이 연구를 추진하였다.1)

1. 죽음학의 영역
죽음학이 다루는 영역이 무엇인지 규명하는 것은 죽음학을 연구하는 기초가 된다.
(1) 죽음학의 기원과 함의
죽음학은 각 학문 영역 간의 경계를 허물고 세대와 문화를 뛰어넘는 복합과학이라 할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사회 체계의 삶과 죽음에 대한 현상 및 관념은 ‘죽음학’(Thanatology) 혹은 ‘생사연구’(Studies of Life-and-Death)의 중요한 대상이다.
생사학의 기원은 30여 년 전 미국에서의 시작된 ‘죽음학 연구’이다. 죽음학에서 연구하는 핵심 과제는 정신의학 및 죽음학 전문가인 퀴블러 로스 박사의 말을 빌리자면 ‘성장의 마지막 단계’(the final stage of growth)로서의 죽음이다. 당시 미국의 행동과학자들이 많은 미국인들이 죽음을 올바로 대면하지 못하여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는 점을 발견하고 ‘죽음 각성 운동’(Death Awareness Movement)을 전개하면서 죽음학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 운동이 마침 당시 영국에서 일어난 호스피스 운동과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죽음교육, 호스피스, 죽음 상담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죽음학의 연구가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죽음학의 주된 관심사는 호스피스, 죽음교육 및 죽음과 연관된 현상들의 연구에 머물러 ‘삶의 차원’(dimension of life)이 결핍되었고, 이에 따라 타이완의 푸웨이쉰 교수가 1993년 종교의 죽음에 대한 관심 및 임종정신의학을 결합하여 삶의 차원을 포함하는 죽음학을 연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생사학(Life-and-Death Studies)이라는 단어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2)
즉 죽음학 혹은 죽음교육은 생사학의 전신이고 생사학은 죽음학이 확충되어 이루어진 영역이다. 타이완 생사학계에서 생사학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는 푸웨이쉰 교수는, 생사학은 다음과 같은 삶의 10대 차원과 가치관을 아울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① 신체 활동 ② 심리 활동 ③ 정치 사회 ④ 역사 문화 ⑤ 지성 탐구 ⑥ 심미적 경험 ⑦ 인륜 도덕 ⑧ 실존 주체 ⑨ 궁극적 관심 ⑩ 궁극적 진실.
1994년 난화(南華)대학에서 타이완 최초로 생사학 대학원을 개설하여 생명윤리학, 참살이(well-being), 생사교육, 호스피스 및 장의 관리 등 5대 영역을 중심으로 죽음학 연구와 교육에 힘쓰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학부과정이 만들어졌다.3)
(2) 죽음학의 종류
생사학이 포함하는 내용을 순수과학과 응용과학을 표준으로 분류한다면 푸웨이쉰의 분류처럼 ‘학문의 생명’과 ‘생명의 학문’으로 나눌 수 있고, 좀 더 통속적인 말을 빌리자면 차이서린(豺麝) 교수의 주장처럼 ‘일반생사학’ 과 ‘응용생사학’ 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푸웨이쉰은 학문의 생명은 ‘순수 객관적인 학술 연구 혹은 이론 구성’을 말하고 생명의 학문은 ‘우리 실존 주체성의 생명에 대한 체험과 탐구 및 그 이론적 심화’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전자는 생사학 고난 이론의 연구와 구성, 즉 순수과학 혹은 일반생사학의 영역에 속하고 후자는 실천적인 측면을 포함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지혜를 포함하는 응용과학 혹은 응용생사학의 범주에 속한다.
① 학문으로서의 생명: 학술적 탐구 혹은 이론 구성
학문으로서의 생명 혹은 일반 생사학은 생사 현상과 관련된 학문을 구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종교, 철학 혹은 과학 연구자들이 기존의 이론을 바탕으로 삶과 죽음에 관한 현상들을 탐구하기도 하고, 현장 종사자들이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이나 이론을 구성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면의 생사학자들의 주요 임무는 생사학의 성격, 연구 영역 및 방법론의 확립 등을 포함하는 학문상의 문제 해결을 통한 학문적 특색을 드러내는 데 있다. 생사학의 연구 과제, 대항 및 범주 등은 매우 광범위한데 일반생사학에서는 아래에 열거하는 주제들에 대한 이론 구성을 포함한다.4)
첫째, 죽음과 관련된 질병에 대한 연구와 죽음에 대한 정의하기: 현대 의학은 최신 의학의 연구 성과 및 생명 과학적 지식을 끌어들여 심장병, 암, 에이즈 등을 근절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동시에 생사학의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최근의 학계와 의학계, 법조계 등 실무 계통에서의 죽음의 정의에 대한 변화는 죽음과 관련된 현상에 대한 이해를 드높였고, 뇌사, 식물인간 등의 심신 상태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이끌어 내었다.
둘째. 죽어감 혹은 죽음의 인간관계 및 정신 상태: 정신의학, 정신치료학, 의료 윤리 등을 종합하여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환자 및 그 가족들의 정신 상태에 대한 문제를 고찰하고 개선하는 것도 생사학이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영역 가운데 하나이다. 죽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릴 것인가? 죽음에 직면해 있는 환자 및 가족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가? 등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의료인과 환자 상호관계를 통해 연구한다,
셋째, 연령층에 따른 죽음에 대한 개념 혹은 심리 상태: 아동들의 죽음에 대한 이해, 태도 및 심리 상태는 성인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점은 많은 연구 결과에 이미 나와 있다. 생사학자는 연령층에 따른 죽음에 대한 개념 및 심리 상태에 대해 더욱 깊이 연구해야 하고 문화나 사회적 요소에 따른 차이 등에 대해 확대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방면의 연구 추세는 반드시 심리학, 교육학, 사회학 혹은 문화인류학 등의 지식들을 결합하여 발전시켜, 아동이나 노인 등 서로 다른 연령층에서의 죽음과 관련된 담론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
넷째, 비탄 혹은 애도에 대한 상담 및 치료: 지금까지 생사학자들의 관심의 중점 및 형성된 이론들을 보면 비통 혹은 애도에 대한 상담이나 치료 방법에 대한 연구 성과가 가장 풍성한데, 이러한 연구 성과는 인류의 비탄 행위에 대한 이해에 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의 급속한 변화와 각종 천재지변과 인재 등의 빈번한 발생에 따라 기존 이론은 사회문화 및 경험의 차이에 따른 검증을 받아야 할 것 이다.
다섯째, 죽음 관련 전문 인력과 조직에 관한 연구: 죽음 관련 전문 인력에 관한 연구는 전문 업종의 정의, 전문화 과정, 전업 발전의 사회문화적 요소, 전문 인력과 당사자 간의 관계 맺음, 전문 인력의 배양 혹은 생애 등의 담론을 포함한다. 조직에 대한 연구는 정규적 조직과 비정규적 조직, 조직의 기능과 운용, 조직 간의 상호 관계 등을 포함한다.
여섯째, 죽음과 종교 혹은 철학과의 관련성 문제: 종교적 지식의 영역에서는 과학이 처리할 수 없는 많은 담론들에 대하여 해답을 제시한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삶(life after death)의 존재 여부 등의 기본적 문제에 대해 여러 종교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나타내고 있고, 철학적 지식의 영역에서도 동양과 서양을 불문하고 학자나 학파 간에 이론적 차이가 드러나기 때문에 진일보한 정리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일곱째, 죽음에 관한 의식: 거의 모든 인간의 사회 조직에서 죽음에 대한 경험과 처리 방식에서 문화적 차이에 따른 각종 형태의 죽음에 관한 의식이 행해진다. 인류학, 민속학, 신학, 철학, 역사학 및 일반 과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문분과에서 의식의 의의와 기능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으며, 세계 각지의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죽음과 대면하여 드러내는 태도나 변화 과정 등을 파악하려고 애쓰고 있다.
여덟째. 죽음교육: 미국에서는 여러 해 전부터 죽음교육을 실시하고 있지만 한국이나 타이완에서는 아직도 걸음마 단계에 있다. 죽음교육은 연령층의 차이나 학력에 따른 교육 내용과 교재 개발, 교육 방법과 교과과정 설계, 평가 방법, 학생들의 사회화 과정에 대한 연구, 교육의 공헌도와 영향 등의 연구를 포함한다.
아홉째, 죽음 관련 윤리와 법률: 자살, 낙태, 안락사, 사형제도 등에 관한 연구는 법률, 종교, 윤리 문제 등을 수반하며 생사학 영역에서도 중요한 담론 가운데 하나이다. 반드시 법률, 신학, 철학, 의학, 윤리학 및 사회 과학(심리학, 사회학 등) 등 유관 학과들이 서로 힘을 합쳐 연구해야 한다.
열째, 죽음의 문학 및 예술: 죽음에 관한 문학이나 예술작품의 표현 형식이나 의의, 불치병 환자들의 정신적 조절과 승화에 관한 묘사 등도 생사학이 추구하는 새로운 지식의 영역으로서 미적 감각 차원의 가치관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들 외에도, 삶의 마지막 단계와 관련되어 인간 사이에서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 모두가 생사학의 영역에 속한다. 예를 들어 지진이나 홍수 혹은 전염병 등의 천재지변, 전쟁이나 학살 혹은 집단적 자살 등으로 인한 집단사망(megadeath) 현상도 죽음과 더불어 생사학의 중요한 연구 주제가 괸다,
② 생명의 학문: 실존 혹은 실무적인 관심
생사학 혹은 죽음학은 극히 복잡한 현대인들의 죽음 현상과 관련을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학문 영역의 연구와도 밀접하게 관련 되어 있다. 서구나 일본과 비교하여, 한국의 생사학 연구는 아직 초보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생사학 연구의 길을 개척하고 토착화하여 우리 자신의 사회 실정에 맞는 생사학을 내놓아야 한다,
다른 사회와 달리 한국은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전통을 지닌 까닭에 생명을 돌보는 실무적인 방면에서 비교적 구체적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생명의 학문이란 생사학의 응용과학적인 면을 지칭하는 것으로 인간의 삶 내지는 죽어감에 대한 실무적 관심의 표현이다. 생명의 학문이란 학제간 결합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의학(정신의학, 정신치료 등), 철학, 종교와 일반과학(인류학, 심리학, 사회학 등) 등과의 관계를 통한 생사학 정립을 의미한다. 이러한 학문 영역의 도움을 받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에 이르면서도 존엄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실천적 의의를 달성해야한다.5)
생명의 학문 혹은 응용생사학은 생사학적 지식으로 삶과 죽음과 관련된 담론에 대해 연구하고, 그로부터 나오는 개념, 방법론 등의 연구 성과를 이용하여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나 방침을 제공함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응용생사학자의 첫 번째 임무는 공공정책을 제공함에 있고, 생사학 이론을 정립하는 것은 부차적이기 때문에 이론가나 순수학자로 자임해서는 안 되고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고문 혹은 기획자의 역할을 담당해야 마땅하다. 응용생사학자들의 생사학 및 실무에 관한 공헌은 다음과 같은 여러 방면에서 드러난다.
첫째, 호스피스 정책의 수립: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의료, 간호 및 불치병 환자의 수용과 돌봄은 사회복지제도를 중시하는 국가에서는 반드시 서비스의 대상과 내용을 기획하고 있다. 이것은 가정상담, 의료적 돌봄, 조직의 운용, 규범제도 등 전반적이고 종합적인 기획과 설계에 관련되는데, 사회 변화의 수요와 문화적 의의 등에 부합하여 진실로 죽어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좋은 죽음’이 되도록 해야 한다.
둘째, 장례 관리 제도의 수립: 연구를 통한 각 사회문화에 합당한 죽음 처리 방식의 정립이 필요하다. 서구사회에서는 이미 최선의 장례 관리 회사를 기획하여 국가제도의 규범, 죽음에 관한 의식 등에 맞추어 삶과 죽음 모두에서 안락함을 달성하고 있으니 참고하여 배울 가치가 있다.
셋째, 생명교육과 죽음교육의 확충: 죽음교육 종사자들은 생명교육과 죽음교육을 효과적으로 확충하기 위해서 애도 상담이나 죽음교육기관을 건립하거나 자살 방지 시스템 등을 건립하는 등의 구체적인 실천을 통한 성과를 이루어야 한다.
넷째, 죽음을 규정하는 유관 법률에 대한 협조: 생전 유서, 낙태, 안락사, 사형, 동물권 등 생명의 권리 혹은 법률과 연관된 실제적인 문제는 탁상공론으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여러 학문 분야의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참가하여 토론하고 기획하여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규범을 제정해야 한다.
다섯째, 공공위생 정책의 재건에 대한 협조: 생사학자들은 필요할 경우 반드시 공공정책 입안의 기획에 참여하고 협조해야 한다. 특히 전염병이나 중대한 총기 사고 등 집단적인 죽음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위생 정책의 재건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연구 결과 발견한 문제 등은 위생 정책이나 재건 정책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여섯째, 평가: 생사학의 또 다른 취지는 일반 공공정책에 대한 평가와 연구에 있는데 주로 정책의 실시가 원래의 목표에 도달하였는가? 실시 상황, 어려운 점과 문제는 무엇인가? 정책이 지금의 사회, 문화 시스템과 충돌하지는 않는가? 등의 물음을 담고 있다. 평가와 그에 대한 연구 결과, 발견된 문제에 대해서 진일보한 개선책을 내놓아야 한다.
순수과학과 응용과학의 각도에서 생사학을 일반생사학과 응용생사학으로 나눌 수 있다. 그 내용에 대해 소개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대부분의 생사학자들은 두 영역에서 균형을 이루어 이론과 실무가 상호보완적인 관계임을 잘 보여 준다. 생사학의 원리로 죽음과 관련해 드러나는 실제적 문제를 해결하여 학문의 생명이 성취되고, 문제해결 과정에서 새로운 이론을 발견하여 생명으로서의 학문을 창조하여야 할 것이다.

2. 죽음학의 태동
죽음학(Thanatology)6)이란 철학·종교학·의학·생물학·사회학·심리학·인류학·문학·예술 등 여러 학문들이 다학제적인 방식으로 죽음과 관련된 주제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학문 분야를 의미한다. 이러한 죽음학이 바람을 불러일으키게 된 것은 1951년 미국에서 헤르만 파이펠(H. Feifel)이『죽음의 의미』(The Meaning of Death)를 통해 죽음 현상을 탐구해야 한다고 천명하면서부터다. 이후 1963년 로버트 풀턴(R. Fulton) 교수가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죽음을 주제로 한 최초의 정규 강좌를 개설하면서 죽음학이 발전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파이펠과 풀턴의 강좌에 이어 여러 학자들-칼리시, 카스텐바움, 레비톤, 슈나이드만, 와이즈만 등-이 대학을 중심으로 죽음 관련 교과목을 개설하면서 죽음학은 하나의 정규 과정이 되었다. 또한 풀턴이『죽음과 정체성』(Death and Identity)을, 글레이저와 스트라우스가 『죽어감의 자각』(Awareness of Dying)을, 코어가『죽음, 비관, 애도』(Death, Grief and Mourning)를 각각 출판했는데, 이 세 권의 책은 죽음교육(death deucation 죽음에 대한 준비 교육)의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7)

3. 죽음학·생사학의 지향점: 존엄한 삶과 존엄한 죽음
죽음학·생사학의 지향점은 존엄한 삶과 존엄한 죽음, 쉽게 말하자면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well-living)과 인간답고 행복하게 죽는 죽음(well-dying)이다.8)
혹자는 죽음에 대한 준비 교육이라 하면 당장 죽을 각오를 하라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준비 교육의 진정한 의미는 예고 없이 불현 듯 찾아올 수 있는 죽음을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행복하고 평온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평소에 마음의 준비를 잘 해두라는 것이다. 또한 건강할 때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 지금 자신이 삶을 살아가라는 뜻이기도 하다. 즉 죽음 준비를 통해 삶을 더욱 유의미하게 변환시킴으로써, 죽음 준비는 곧 삶을 준비하라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죽음 앞에서 미리 죽음을 준비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차이는 확연히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은 제대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날 인간의 평균 수명은 의학과 생명공학이 급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편승하여 현대인들은 삶의 진정한 의미와 내적인 가치를 추구하기보다는 단순히 젊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에만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오락과 안락, 향락과 쾌락을 즐기는 현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해 깊이 성찰할지라도 죽음이라는 현실을 변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어서 인간의 힘을 변경할 수 없는 죽음을 미리 생각하면서 불필요한 슬픔에 빠질 필요가 없다고 결론 내린다. 즉 죽음에 대한 성찰은 삶의 기쁨과 의욕을 손상할 뿐 현실의 삶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현대인들은 당장 해결해야 할 보다 중요한 문제는 죽음이 아닌 삶의 문제라고 말하면서 삶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데 죽음의 문제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생각도 이런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진지한 사고를 꺼리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점차 눈에 보이는 삶의 현실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세속적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는 경향을 보인다. 일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안에는 ‘사는 데까지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하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
그러나 비록 현대인들이 죽음에 대해 깊이 성찰하기를 거부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변경할 수 없다. 사람들은 평소에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회피하다가도 불현 듯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가공할 만한 공포감을 느끼는 가운데 외롭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많은 사람이 죽음에 맞닥뜨릴 때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 죽어가는 것을 직간접으로 경험하게 된다. 죽어가는 사람은 이 세상의 사랑하는 모든 것들과 영원히 이별해야 한다는 생각과 아울러 평소에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사후세계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생의 여정에서 어려운 일에 봉착하게 되면 다양한 종류의 상담을 통해 도움을 받는 등 많은 노력을 하지만, 정작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죽음의 순간에는 두렵고 외로우며 불행한, 곧 준비 안 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그냥 간과하고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죽음에 직면한 사람으로 하여금 전혀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두려움과 외로움, 당혹스러움을 경험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비인간적인 일이라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화자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본 한 의사의 말은 우리가 왜 죽음에 앞서 많은 준비를 해야 하는지 잘 일깨워준다. 예일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인 셔윈 눌랜드(S. B. Nuland)는 50여 년간 각종 질병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환자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이들이 반(半)가사 상태나 완전한 혼수상태에서 “무의식적이면서도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말한다. 또한 운이 좋은 사람들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또렷한 의식 속에서도 평온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고, 수천의 사람들이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즉사하거나, 치명적 외상을 입어 마지막 공포에서 해방된 채 편안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감안한다고 해도 다섯 명 중 한 사람보다도 적은, 훨씬 적은 수만이 축복 속에 눈을 감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행운을 가진 사람들조차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는 순간에만 평온함을 느낄 수 있을 뿐, “죽음의 순간에 도달하기까지는 며칠 혹은 몇 주씩 정신적 고뇌와 육체적 고통으로 몸부림을 친다”고 토로한다.9)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바쁜 세상에서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는지 의아심을 품는 사람들도 많지만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말은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죽음이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결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평소에 미리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사람이 너무 뒤늦게, 실제로 죽음이 임박해서야 비로소 지나간 삶을 후회하면서 매우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물질적 부와 사회적 성공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들은 끊임없이 앞만 보고 나아가다가 죽음의 준비를 전혀 못 한 채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행복한 죽음, 평화롭고 아름다운 죽음은 물질적 부와 사회적 성공만큼이나 많은 사람이 소망하는 것이지만, 그런 죽음은 좀처럼 맞이하기 어려운 행운이 되어 버렸다. 누구나 존엄하고 행복하고 평온한 죽음을 희망하지만 대다수 사람은 존엄하지도 행복하지도 평온하지도 못한 모습으로 후회와 슬픔을 가슴에 품고 한 많은 생애를 마감한다.
모든 사람이 존엄하고 행복한 죽음을 소망하건만 왜 세상에는 존엄하지 못하고 불행한 죽음만 넘쳐나는 것일까? 존엄하고 행복한 삶이 아무런 노력 없이 저절로 주어지지 않듯이 존엄하고 행복한 삶이 아무런 노력 없이 저절로 주어지지 않듯이 존엄하고 행복한 죽음 역시 저절로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학·생사학 전문가들은 죽음이 우리의 삶을 성숙시키는 ‘마지막 선물’이자 ‘최후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10)
일련의 사람들은 죽음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으로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존재라고도 말하기도 한다.11)
우리가 죽음의 불가피성을 항상 유념하면서 살아간다면, 무의미한 활동에서 벗어나 유의미한 일로 삶의 시간을 채우면서 현재의 삶을 더욱 충실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도록 노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의미한 삶, 충실하고 아름다운 삶의 끝자락에서 맞이하는 죽음은 존엄하고 행복한 죽음, 평화롭고 아름다운 죽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존엄하고 행복한 죽음이란 생전의 삶을 유의미하고 충실하게 보내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이는 존엄하고 행복한 삶과 직결되는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Ⅱ. 영혼 불멸에 관한 논의

일반적으로 로마 가톨릭이나 신학자들은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일부 신학자들은 전통적 견해와 다른 교훈을 하고 있지만12) 성경은 죽음이란 죄의 결과임을 강조하고 있다. 창세기 2:16-17에서 이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죄의 결과인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이 죽음은 극복되어야 하며, 또 극복되는 것이며, 또 장차 완전히 극복될 수 있다. 바울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신자들의 죽음의 극복을 교훈하고 있다. 또 마지막 원수인 죽음의 권세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정복되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침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역사를 모두 이룬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고전 15:24-26).
그러므로 신자들에게 죽음을 해석하는 문제보다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문제이다. 어떻게 죽음을 극복할 것이며, 죽음의 권세에서 어떻게 해방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비해야 한다. 또 다른 문제는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느냐? 라는 점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우리들이 어떤 대답을 하여야 할지를 논의코자 한다.
우리는 인간의 죽음 뒤에 오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영혼불멸론과 중간상태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이들은 영혼불멸 사상이 기독교 신앙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특히 18세기의 계몽주의 시대의 활기띤 사상이다.13)
그러나 몸이 죽은 후에도 영혼은 인간의 비물질적 측면은 계속 존재한다는 영혼불멸 사상은 기독교에만 나타나는 고유 개념이 아니다. 이 사상은 고대 종교와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이것에 철학적 특성이 가미되어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칼빈은 아담이 불멸의 영혼을 가졌다고 가르치면서14) 영혼불멸론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교리라고 말하고 있다.15) 그러나 영혼의 불멸설은 영혼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부여된 것이라고 했다.16) 아키발트 A. 핫지(Archibald A. Hodge)는 그의 저서에 영혼불멸론의 논의들을 소개하였고17) 월리암 쉐드(William G. T. Shedd)도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18)
이에 반해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영혼불멸의 교리를 articulus mixtus라고 부르는데, 즉 이 교리의 진리성은 계시(啓示)에 의해서라기보다 이성(理性)에 의해서 더 많이 논증되어질 성질이라는 것이다.19) 벌카우워(G.C. Berkouwer)도 바빙크의 이론에 동조하고 있다.20)
성경이 인간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내용과 영혼불멸론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느냐에 대하여 안토니 후크마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21)
① 성경은 ‘영혼불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불멸’이란 단어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활시의 인간의 완전한 존재 상태에 대하여, 썩지 아니할 면류관에 대하여, 말씀의 씨앗 등에 대하여 사용된 단어이지 결코 인간의 영혼에 대하여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다.22)
② 성경은 영혼이 본래적으로 파괴될 수 없는 본체이기에 영혼의 계속적 존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야만 존재를 영위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 속에는 어떠한 종류의 본래적인 것이 있지 않고, 혹시 인간을 불멸의 존재처럼 보이게 하는 측면 속에서도 본래적인 것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23)
③ 성경은 죽음 후에 단순히 계속되는 존재가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과의 교제의 삶이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선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삶이란 죽음이며, 하나님과의 교제와 친교만이 진정한 삶을 구성하고 있는데, 이러한 참된 삶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요 3:36, 5:24, 17:3).24)
④ 중심적 메시지는 육체의 부활이다. 이 점에서 기독교 인간관과 헬라 철학 특히 플라톤의 인간관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전체성으로 창조하셨고, 육체를 성령의 전이라고 하였다. 부활은 신자들이 영광 속으로 이전된다는 뜻이며, 그 영광 속에서 우리의 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될 것이다(빌 3:21).25)
안토니 후쿠마의 이론을 보다 상세히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26)
사람들은 종종 영혼 불멸의 개념은 기독교 신앙의 일부라고 말해 왔다. 이 말은 계몽주의와 계몽주의의 종교적 파트너인 이신론의 세기인 18세기에는 특별히 사실이었다. 계몽주의에 따르면 모든 진리의 원천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이성에서 찾아야 한다. 이성이 발견할 수 있는 ‘자연신학’의 세 가지 위대한 진리는 하나님의 존재, 미덕의 중요성, 영혼불멸이라고 일컬어졌다. 영혼 불멸의 개념은 임마누엘 칸트(1724-1804년)가 이런 논증들을 파괴적인 비판에 굴복시키기 전까지는 이성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칸트조차도 여전히 이 개념을 이른바 실천 이성의 선결 조건으로 고수했다.27)
(1) 타 종교와 철학에서의 영혼 불멸의 개념
우리는 먼저 영혼 불멸의 개념(몸이 죽은 뒤에도 영혼 내지 인간의 비물질적인 측면은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개념)은 기독교에만 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바벨론, 페르시아, 이집트, 고대 그리스 등을 포함한 수많은 민족들이 이런저런 형태로 영혼 불멸을 믿었다. 사실 18세기에 계몽주의의 지도자들이 강력하게 변호한 영혼 불멸의 개념은 기독교 특유의 교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 교리를 일부로 삼아 형성된 ‘자연 종교’를 기독교와는 구별되고 기독교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영혼의 불멸성 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신비 종교에서 발전되었고 플라톤(주전 427-347년)의 저작에서 철학적으로 표현되었다. 여러 대화록들 중에 특히『파이돈』에서 플라톤은 몸과 영혼은 별개의 두 실체로 생각해야 한다는 견해를 개진한다. 사유하는 영혼은 신적인 반면 물질-열등한 실체-로 구성된 몸은 영혼보다 가치가 열등하다. 이성적인 영혼, 즉 ‘누스’는 ‘하늘’에서 내려온 인간의 불멸하는 부분이며 하늘에서 영혼은 더없이 행복한 선재(先在)를 향유했다. 영혼은 이 선재 상태에서 그 날개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몸속에 들어와 머릿속에 머물렀다. 죽을 때 몸은 단지 분해될 뿐이지만 ‘누스’, 즉 이성적인 영혼은 그 행동 방침이 올바르고 고결했다면 하늘로 돌아간다. 그렇지 않으면 영혼은 다시 또 다른 인간이나 동물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영혼 그 자체는 파괴될 수 없다.28)
플라톤의 견해에 따르면 영혼의 불멸성은 합리주의적 형이상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합리적인 것은 실재하는 것이며 비합리적인 것은 무엇이든 열등한 종류의 실체를 갖는다. 그러므로 영혼은 본래부터 파괴될 수 없고 따라서 불멸하는 우월한 실체로 간주되는 반면 몸은 죽을 수밖에 없고 완전히 파괴될 운명에 처한 열등한 실체이다. 따라서 몸은 영혼의 무덤으로 여겨지고 영혼은 몸이 없는 편이 실제로 더 낫다. 그러므로 이런 사고 체계에서는 몸의 부활 교리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2) 성경은 영혼 불멸을 가르치는가
그러나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성경은 ‘영혼 불멸’이라는 표현을 과연 사용하는가? 성경은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다고 가르치는가?
영어 성경에서는 ‘아타나시아’와 ‘아프타르시아’라는 두 헬라어 단어가 일반적으로 ‘불멸’로 번역된다. ‘아타나시아’는 신약에서 세 번밖에 발견되지 않는데 한번은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서, 두 번은 고리도전서 15장 53-54절에서 발견된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서 이 단어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여기서 불멸성은 명백히 단순한 끝없는 존재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부여받은 불멸성과는 구별되는 원래적인 불멸성을 뜻한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다른 모든 불멸성의 원천이라고 가르친다. 이런 의미에서는 하나님에게만 불멸성이 있다. 다른 존재들은 오직 하나님께 의존해서만 불멸성을 얻으며 소유한다. 하나님은 자신 안에 생명이 있으신 것처럼(요 5:26) 자신 안에 불멸성이 있다.
‘아타나시아’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다른 두 곳은 서로 연이어 등장한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다”(고전 16:53-54).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52절을 보라). 앞에서 인용한 말씀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아직 살아 있는 신자들의 변화와 그때 발생할 죽은 자들의 부활 둘 다에 적용된다. 바울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기 때문에(50절) 이런 종류의 변화는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이제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불멸성에 관한 다음 세 가지 점을 주목해보라. (1) 여기서 말하는 불멸성은 오직 신자들에게만 해당된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불신자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2) 이 불멸성은 우리가 미래에 받게 될 선물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런 종류의 불멸성은 모든 사람, 심지어 모든 신자의 현재적 소유가 아니라 재림 때 발생할 증여물이다. (3) 이 구절에서 묘사하는 불멸성은 영혼만의 특징이 아니라 전인의 특징이다. 어딘가에 강조점이 있다면 그 강조점은 몸에 있다. 이 본문은 몸의 부활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영혼 불멸의 개념에 대한 어떤 암시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불멸’로 번역되는 또 다른 단어인 ‘아프타르시아’는 신약에 일곱 번 등장한다. 이 단어는 로마서 2장 7절에서는 참된 신자들이 추구하는 목표, 디모데후서 1장 10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밝히 드러내신 것을 지칭하는데 사용된다. 또 이 단어는 바울 서신의 부활에 관한 위대한 장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네 번 사용된다. 50절에서 이 단어는 썩거나 부패할 수 있는 것이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것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42절에서 이 단어는 몸이 썩을 것으로 심겨지지만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전달하는데 사용된다. 53절과 54절에서 이 단어는 여기서 썩을 것이라고 불리는 현재의 몸이 부활 때 덧입어야 할 부패하지 않는 불멸성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이 단어는 이런 본문들 가운데 어느 본문에서도 “영혼”에 대해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이와 관련된 형용사인 ‘아프타르토스’도 신약에서 일곱 번 사용된다. 이 단어는 하나님(롬 1:23; 딤전 1:17), 부활한 몸(“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고전 15:52), 바울이 얻으려 애쓰는 면류관(고전 9:25),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않을 보석(벧전 3:4), 우리가 그로부터 거듭나게 된 썩지 않을 씨(벧전 1:23), 우리를 위해 하늘에 간직된 썩지 아니할 유업(벧전 1:4) 등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어느 경우에도 이 단어는 ‘영혼’을 묘사하는 데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서는 ‘영혼의 불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제기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성경은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다고 가르치지 않는가?
(3) 영혼 불멸에 대한 개혁신학자들 간의 불일치한 해석
일부 개혁신학자들은 ‘영혼의 불멸’이라는 표현을 성경의 가르침과 상충되지 않는 하나의 개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하고 변호해 왔다. 예컨대 칼빈은 아담에게는 불멸하는 영혼이 있었다고 가르치며29) 영혼의 불멸성을 받아들일 만한 교리라고 말한다.30)  그러나 그와 동시에 칼빈은 불멸성은 영혼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혼에 나누어 주신 것임을 인정한다.31)
아치볼드 알렉산더 하지는 1878년에 처음 출판된 한 책에서 영혼의 불멸성 교리를 변호하는 여러 논증을 제시한다.32) 월리엄 셰드는 1889년에 처음 출판된 한 저작에서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혼의 불멸성과 죽은 뒤에 몸에서 분리된 영혼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신약의 경륜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구약의 경륜의 특징이기도 했다.”33) 이와 비슷하게 루이스 벌코프도 이렇게 말한다. “이 영혼 불멸의 개념은 성경이 인간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 .”34)
ej 나아가 벌코프는 이 개념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반 계시와 성경을 근거로 여러 가지 논증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한 헤르만 바빙크의 입장은 휠씬 더 신중하다. 바빙크는 영혼 불멸 교리를 그 진실성이 계시보다는 이성으로 입증되는 “혼합된 신조”(articulus mixtus)라고 부르면서 이에 덧붙여 신학이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서 성경보다도 영혼의 불멸성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고 논평한다.35)
바빙크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성경은 결코 영혼의 불멸성을 그렇게 많은 말로 언급하지 않는다. 성경은 결코 이 개념을 신적 계시로 선포하지 않으며 어디서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이 개념의 진위를 논하거나 논적에 맞서 이 개념을 주장하려는 시도는 더더욱 하지 않는다.”36)
G. C. 베르카우어도 바빙크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영혼불멸의 개년이 기독교 특유의 교리임을 부정하며 이렇게 단언한다. “성경은 어떤 상황에서도 죽음에 저항하고 죽음에도 살아남으며 우리가 인간과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와 상관없이 고찰할 수 있는 인간의 한 일부의 불멸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와 같은 불멸성에 대한 독립적인 관심과도 결코 관련이 없다.”37)
(4) 영혼 불멸에 대한 성경적 결론
개혁신학자들의 이와 같이 명백히 상충되는 반응들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우리는 성경이 인간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과 영혼 불멸의 개념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는 데 동의하는가? 이 질문과 관련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성경은 ‘영혼 불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불멸’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과 부활 때의 인간의 전 존재, 썩지 않을 면류관이나 썩지 않을 말씀의 씨 같은 것에는 적용되지만 인간의 영혼에는 결코 적용되지 않는다.
② 성경은 영혼의 본래적인 파괴 불가능성으로 인해 영혼이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이는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주된 철학적 논증 가운데 하나다-가르치지 않는다.38) 이 논증은 특정한 형이상학적 인간관과 관련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예컨대 플라톤 철학에서 영혼은 몸보다 더 고상한 형이상학적 실재에 참여하기 때문에 파괴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영혼은 창조되지 않은 영원한 실체이며 따라서 신적인 실체로 여겨진다. 그러나 성경은 영혼에 대한 그와 같은 관점을 결코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며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계속해서 하나님께 의존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이나 인간의 어떤 측면에 있어서 인간을 파괴될 수 없는 존재로 만드는 어떤 본질적인 성질도 지적할 수 없다.
③ 성경은 단순히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는 존재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 인간의 가장 큰 선이라고 주장한다. 그와 같은 영혼 불멸의 개념은 죽음 이후의 삶의 질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런 개념은 단지 영혼은 계속해서 존재한다고 단언할 뿐이다. 그러나 이는 성경이 강조하는 바가 아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과 동떨어져 사는 것이 곧 죽음이며 하나님과의 교제와 친교가 곧 참된 삶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그와 같은 참된 삶을 이미 누리고 있다(요 3:36, 5:24, 17:3). 바울이 빌립보서 1장 21-25절과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가르쳐 주듯이 신자들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누릴 것이다.39) 성경이 우리 앞에 가장 바람직한 상태로 제시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죽음 이후의 실존이다. 성경은 또한 이 참된 영적 생명이 없는 이들도 죽은 뒤에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지속되는 그들의 존재는 행복한 존재가 아니라 고통과 고뇌로 가득한 존재일 것이다(벧후 2:9, 눅 16:23, 25도 보라).
그러므로 성경은 미래의 삶에 대한 우리의 사고에 새로운 차원을 도입한다. 성경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영혼이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그 존재의 질이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로 나오고 그로 인해 다가올 진노에서 피하라고 촉구한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 안에 빠지는 것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발한다. 성경은 또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심각성을 가리거나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 대한 영원한 형벌의 진리를 부정할 만한 ‘영혼 불멸’에 대한 어떤 개념에 대해서도 경고한다.40)
④ 인간의 미래에 대한 성경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몸의 부활에 대한 메시지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기독교적인 인간관과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 철학에서 일반적인 인간과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본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인들은 몸의 부활에 대해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몸은 영혼의 무덤으로 간주되었고 죽음은 같힌 상태에서의 해방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성경의 가르침과 매우 다르다. 성경에 따르면 몸은 영혼 못지않게 실재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몸과 영혼으로 창조하셨다. 몸은 영혼에 비해 열등하지 않으며 인간의 참된 실존에 있어서 비본질적인 것도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삼위 하나님의 두 번째 위격은 참된 인간의 몸을 지닌 참된 인간 본성을 결코 취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성경적 사고에 따르면 몸은 영혼의 무덤이 아니라 성령의 전이다. 인간은 몸을 떠나서는 완전하지 않다. 그러므로 신자가 미래에 누릴 복은 단순히 영혼의 지속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가장 부요한 측면으로 몸의 부활을 포함한다. 그러한 부활은 신자에게는 영광에 이르는 변화가 될 것이며 그 속에서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될 것이다(빌 3:21).
우리는 영혼 불멸의 개념이 기독교 특유의 교리가 아니라고 결론짓는다. 오히려 성경적 종말론에서 핵심적인 것은 몸의 부활 교리이다. ‘불멸성’이라는 단어를 인간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싶다면 인간의 영혼이 아니라 인간이 불멸한다고 말하도록 하자. 그러나 인간이 그런 불멸성을 완전하게 누릴 수 있으려면 그전에 인간의 몸이 부활을 통한 변화를 겪어야 한다.41)

Ⅲ. 죽음을 이기는 죽음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의 극복이란 매우 중요한 명제이다. 이것은 죄의 정복과 연관되어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 실현과 병행된다. 죽음의 극복은 죄의 정복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바울의 표현처럼 아담의 범죄로 이 땅에 사망이 왔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이 왔다(롬 5:17).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많은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며(막 10:45, 14:24), 그의 부활을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결정적 계기이다.42)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 자신의 죄로 인한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죄 때문에 정죄 당하신 것이며(고후 5:21, 롬 8:3, 갈 3:13), 우리 죄를 대신하여,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죽음이다. 그리스도의 부활도 우리의 의를 위한 것이며(롬 4:24),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에게 부활을 보증해 주는 첫 열매이다(고전 15:20-22).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으며(마 28:18),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주관하는 자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엡 1:20, 빌 2:10).43)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정복하시고 생명과 죽지 아니할 것을 확보하셨다. 그리스도는 마귀 권세를 멸하셨고, 하나님의 백성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셨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위한 죽음과 부활이며, 죽음 자체의 정복이며(고전 15:26), 흑암의 권세잡은 자 마귀의 정복이며, 하늘에 있는 것을 다 통일하는 것이며(엡 1:10), 만물의 으뜸이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종말론적 사건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44)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자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다(롬 6:5, 8, 골 2:10, 딤후 2:11).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도 장차 나타날 영광과(롬 8:23)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전 15:49).45)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 또는 동물적 생명의 종결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죽음관은 점진적 발전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구약 성경 초기 사상은 죽음을 육체적 생명의 종국으로 이해했으나 인간 존재의 완전한 소멸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죽은 자는 음부에서 그림자 같이 존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구약시대 후기에는 부활에 대한 소망이 제기되고 영혼과 육체의 분리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약성경은 죽음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에 의한 생명 중단 또는 새 삶의 영역으로의 전환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육체와 영혼을 대립적으로 취급하는 헬라 사상의 이원론을 거부했다.
죽음은 인간에게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이질적이요, 적대적인 것이다.46) 일종의 원수이다(고전 15:26). 그것은 죄의 결과이며 아담의 타락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에서부터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신앙 항목이었다.
그럼에도 죽음의 원인에 대한 반론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죽음을 자연적인 것, 인간의 본래의 조건으로 보는 견해이다. 펠라기우스, 소시누스, 바르트가 그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펠라기우스와 소시누스는 도덕주의자요, 합리주의자였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이성의 능력에 대한 신뢰에 기초하여 인간은 죄를 짓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며 완전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원죄 교리를 부정하고 육체적 죽음을 죄의 결과가 아닌, 인간의 생명의 자연적 결과로 간주했다. 바르트는 말년의 저서인 「교회 교의학」에서 죽음의 원인을 죄로 보지 않고 하나님으로 보았다. 그는 죽음을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요, 생명의 자연적 종료로 취급했다.47)
죽음을 인간 본성에 속한 자연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큰 문제점은 성경의 증거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죄와 관계없이 죽도록 운명 지어졌다면, 왜 성경은 죄와 죽음을 철저히 연결시키고 있는가? 펠라기우스와 소시니우스주의의 주장은 성경 계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합리주의적 추론에 근거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바르트는 성경의 증거 대부분이 죽음을 저주로, 인간의 원수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성경적 증거가 좁고 가는 선에 매달려 죽음을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로, 또는 인간 본성에 속한 자연적인 것으로 주장했다.48) 이것이 바르트 신학의 한계이며 약점이다.
죽음이란 죄의 결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음을 이기는 죽음’을 체험하게 되며,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게 된다.
그러면 죽음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죽음은 단절인 동시에 새로운 상태로의 이전이다.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죽음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극복하고 천국 백성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축복을 소유하였기에 우리들의 일상(日常)은 승리의 기록이어야 한다.

1.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영원한 집이 기다리고 있다(고후 5:1). 그러기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고백한다(빌 3:20). 비록 연약하고 부족하며, 허물로 가득하였을지라도 ‘이미’ 받은 구원의 감격을 안고 ‘아직’ 성취되지 못한 완성을 향해 달음질하며 나아간다.
다윗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고 고백한 것처럼 죽음의 깊은 수렁에서도 죽음을 극복하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바라보며 영원한 삶으로서의 죽음을 준비한다.49)   

2. 바른 죽음을 위한 바른 삶의 연습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나는 이 죽음을 맞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의 마지막 날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대해서 빌리 그레함(Billy Graham)의 말에 귀를 기우릴 필요가 있다.50) 우리들의 마지막 여행, 즉 영원한 여행을 시작하기 전의 첫 번째 준비단계는 중요한 일들을 처리, 정돈하는 일이다. 자신에 관계된 모든 일들을 정리하여야 한다(왕하 20:1).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생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이다(딛 2:1).
진정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살 준비를 갖춘 사람이다. 우리는 죽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사는 법을 배우기를 원한다. 언제 우리 앞에 마지막 시간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51)
우리에게 죽음이 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국의 소망과 기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소망과 완전에의 미학(美學)”을 가슴에 품고 새로운 여행을 준비한다.

결론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자 생명의 원천이시다(시 36:9, 민 27:16). 인간의 생명은 원천이신 하나님의 최상의 은사이므로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자산이다(욥 2:4). 생명에 대한 이러한 이해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현세의 생명(삶)을 강하게 긍정하고 유복한 삶, 건강과 장수를 누리는 삶을 강렬하게 희구함으로써(신 5:33; cf. 출 23:25-26; 신 4:40) 현세 중심적인 삶과 신앙을 견지하였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지향한 영육 합일적 이해와 이에 근거한 인생관 및 신앙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바라보는 시각은 인생관과 가치관, 죽음관의 향방을 결정한다.
생명에 대한 강한 긍정과 함께 현세 중심적인 신앙관 혹은 인생관 때문에 성경은 본질적으로 죽음과 관련된 모든 개념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성경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유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다가 늙어서 맞이하는 죽음을 삶의 자연적 끝이자 종결로 이해한다. 대표적으로 아브라함의 죽음을 예로 들 수 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받은 목숨대로 다 살고 아주 늙은 나이에 기운이 다하여서 숨을 거두고 세상을 떠나 조상들이 간 길로 갔다”(창 25:8). 이삭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창 35:29). 욥도 마찬가지로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욥 43:17). 다윗도 “백발이 되도록 부와 영화를 누리다가 수명이 다하여” 죽었다(대상 29:28).
이러한 죽음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속하는 자연적 순리로서 이해되기도 한다. 즉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유복한 삶을 향유하다가 천수(天壽)를 누린 죽음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속하는 자연적 죽음(자연사)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다(전 3:1-2; 시 49:10-12; 시 90:1-6). 이러한 자연적 죽음은 피조물의 유한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죽음이기도 하다. 하나님 한분만이 불멸하는 영원한 존재이시고, 인간을 위시한 모든 피조물은 사멸하는 유한한 존재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의 생사(生死)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권한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삼상 2:6; 시 31:15; 잠 4:27; 10:27). 생명의 자연스러운 종결로서의 죽음은 전도서에서 다음과 같이 아주 분명하게 표현된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3:1-2).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전 3: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죽음이 하나님께 이반되는 반신적(反神的) 존재, 생명에 적대적인 세력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한다. 특별히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요절하거나 비명횡사하는 비자연적 죽음(비자연사)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또는 형벌로 간주되기도 한다. “내가 네 딸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삼상 2:31-33). 그러므로 성경은 죽음의 인과관계에 대한 확신을 견지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잘 드러난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 30:15-16, 19 개역개정판, 참조 시 90:7-9, 겔 18:21, 28).52)
죽음은 단순히 삶의 마지막에 도래하는 사건이 아니라 이미 삶 속에 존재하는 현실, 삶과 분리될 수 없는 한 구성요소로서 이해된다. 특히 질병과 노화와 극심한 가난과 절망 속에서, 또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과 슬픔과 고독 속에서 죽음을 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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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언론포럼/ 김남식 박사(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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