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1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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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께서는 복음 사역을 시작하며 열두 제자들을 불러 세우셨다. 그리고 자신이 성령의 권능으로 악령의 우두머리, 바알세불을 내쫓은 분이며, 그를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자신의 가족이라고 선언하시며, 제자들을 그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신다. 이어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치셨다. 바쁜 시간을 보내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시려고 배를 타셨다.
항해 중 얼마 가지 않아 갑자기 폭풍이 몰아쳐 예수님 일행을 태운 배는 파도가 몰아치고 배에 물이 차올라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이 상황을 제자들은 자기들이 죽게 되었다는 말을 한다. 죽게 되었는데 선생님은 자기들을 돌봐주시지 않는다고 말한다(38). 죽음의 파도가 몰려오는 이 상황 속에서 두렵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마도 폭풍이 몰아칠 것을 예상했다면 배를 타지 않았을 것이고, 꼭 배를 타야할 상황이라면 이를 대비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폭풍이라는 것을 당시 사람들이 예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예기치 않게 갑자기 사람을 죽음의 코너로 몰아넣는 이 상황은 우리들이 일상 겪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갑자기 몰아치는 태풍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 상실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온통 마음이 얼어붙고, 우리의 두뇌 활동이 마비되어 꼼짝할 수가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마치 구렁이 앞에 떨고 있는 쥐새끼와 같은 상황이 우리에게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비상시에 더 정신을 차려야 살아남을 수가 있다. 정신을 놓으면 게임은 끝나는 것이다.
폭풍이 몰아치자 제자들은 두려운 가운데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다. 그들은 예수께 도움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 불평을 털어 놓는다. “선생님, 저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으십니까?” 라고 말한다. 그러자 예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다. 이때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선생님”(διδα、σκαλοV) 이라고 부른다. “주” (The Lord) 라는 말을 쓴 것은 아니다. 제자들은 “주여! 우리를 살려주십시오.” 라든지 “선생님!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청했어야 할 자들이, 왜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십니까? 라고 도와주지 않는 선생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다. 결국은 예수께서 이들을 살려 주시기는 했지만 예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노를 젖거나 배에 차오르는 물을 함께 퍼주시기를 기대한 것이지 바람과 바다를 꾸짖고(ε’πιτιμα、ω) 잔잔하게 하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이들의 상상을 초월한 지혜와 능력으로 자연을 다스리시는 창조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제자들의 상상을 초월한 기적을 행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그렇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동행한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잘 모른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지만 천지창조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별로 실감있게 믿지를 못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태풍이 몰려오면 예수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부모나 가까운 형제, 친구, 오빠를 먼저 찾기 마련이다. 예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기에 이 태풍 속에서 나를 건져 주시리리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설령 생각이 난다 할지라도 이처럼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할 만큼 큰 기적을 내게 가져다 주리라고 기대하지 못한다.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 항상 피상적으로 머릿속에서 왔다 갔다 하는 성경 이야기를 좀 아는 수준이지, 그것이 내 손과 발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힘이 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 머릿속의 위기 대처 프로그람 속에 예수님이 빠져 있는 것이다. 설령 성능이 좋은 프로그람이 들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작동시킬 방법이 서툴거나 우선순위가 틀려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내 곁에 게시지만 예수님은 주무시고, 나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지냈지만 예수님을 정확하게 잘 모른 것 같다. 예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해주셨으면 제자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지르며 만세를 부르면서 배가 뒤집힐 만큼 높이 뛰며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배 안이 오히려 적막하다. 그들에게 두려움, 아니 무서움이 엄습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들이 말했다. “도대체 이 분이 누구이시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복종하는가?” 본문의 상황을 보면 제자들은 폭풍이 몰려올 때보다 더 큰 두려움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제자들은 폭풍도 두려웠지만 예수님도 두려운 것이다. 이들은 온통 두려움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제자들은 죽게 되었어도 두렵고, 살려놔도 두렵다. 그렇다면 이들이 두려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이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신다(40).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하신다. 하나님을 믿어도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이 없으면 인생은 항상 두려운 것이다.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을 불안한 존재로 인식한다. 삶 그 자체가 불안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이 없고, 구원자가 없는 인생들에게는 무엇을 해도 두려울 수밖에 없다. 내일 일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내일 이 세상이 어떻게 될지? 내일 전쟁이 터지는 것이 아닌가? 내일 우리 자식이나 가족들에게 무슨 변이 생기는 것이 아닌지? 나도 암에 걸리는 것이 아닌지? 등등 이런 확실치 않는 정체불명의 불안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살다 보면 어떤 때는 가슴이 뛰고 숨이 막혀서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이러한 일은 우리가 믿음을 갖고 교회 생활에 충실해도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면 불신자와 다를 바 없이 인생은 불안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태풍이 불고 역풍이 분다. 이때 예수님께 대한 바르고 깊은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해 주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내 마음 속에 예수님이 자리 잡고 계시지 않으면 예수께서 내 옆에 계시고, 내 옆에 누워 계셔도, 불안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과 동행해야 한다. 그보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말씀이 내 안에 거해야 한다. 내 속에 바알세불이 있어도 안 되고, 가시덤불이 차 있어도 안 된다. 말씀이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해야 이런 불안의 씨, 태풍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마가가 이 사건 앞에 바알세불 문제와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언급한 것은 바로 성령과 말씀을 통한 예수님과의 동행을 말하고 싶은 목적이 있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과의 동행은 예수님과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 폭풍 속에 주무시는 예수님과 함께 잠이 들 수 있는 사람이 진정 불안의 문제를 이긴 사람이다. 폭퐁 속에 잠을 못 자고 제자들처럼 아우성치는 사람은 몸은 예수님과 함께 한 배를 타고 예수님 곁에 있어도, 그 속마음은 예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다 깊고 성숙한 믿음과 불안을 초월한 동행을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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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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