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1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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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저희는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삼하1:23)

 

위 내용은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쓴 애가 가운데 한 구절입니다. 다윗이 요나단을 아름답게 본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나단의 다윗에 대한 사랑은 우정의 진수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를 죽이기 위하여 특별히 뽑은 3000명의 용사까지 동원하여 온 이스라엘을 수색하였던 사울까지 아름답게 본 것은 보통 사람으로는 볼 수 없는 눈입니다. 사울보다 사울을 그렇게 본 다윗의 눈이 아름답습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심한 화상을 입고 몸과 얼굴이 망가졌던 주바라기 이지선 자매의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차츰 회복하고 있을 때, 오빠와 찍은 자신의 사진을 홈페이지에 올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저는 솔직히 지선씨가 여전히 징그럽고 무섭고 혐오스러워요"라고 댓글을 달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볼 때는 귀엽다고 생각되고 자꾸 보면 정들 수 있는 얼굴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던 차에 나온 글이어서 현실은 여전히 이렇구나.’ 라고 생각하며 적지 않게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신 말씀은 "너의 눈이 그 사람의 눈과 같지 않다는 것에 감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댓글을 단 그 사람의 눈 같았다면 아마 하루도 살 수 없었을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아무 죄 없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울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아름답게 보았습니다. 그가 사울을 아름답게 본 것은 사울의 많은 단점과 흠점을 본 것이 아니라 좋은 점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첫째는 그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었다는 점에서 좋게 보았을 것입니다. 둘째는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한 모습일 것입니다. 셋째는 갓 시골 목동에 불과하였던 자신을 왕의 측근에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에 대하여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넷째는 그가 골리앗과 싸우러 갈 때 자신의 옷을 벗어 다윗에게 입혔던 것에 대하여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비록 다윗은 그 옷이 불편하여 벗고 말았지만, 왕이 입는 옷은 왕만 입을 수 있었을 터인데 자신의 옷을 벗어 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다윗에 대하여 호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많이 있겠지만 이상은 우리가 쉽게 찾아볼수 있는 것들입니다.

 

누가복음 1134절에는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라고 나와 있습니다. 사람의 분별력이 그 사람의 앞길을 좌우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바로 판단하고 바로 분별해야 합니다. 무조건 좋게 봐서도 안 될 것이며 무조건 나쁘게 보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 사실 그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고 분별하되 대하는 일에 있어서는 사랑으로 대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우리 모습대로 평가하지 않고, 사랑의 눈으로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분별력을 가질 수 있습니까? 신앙인들의 분별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그것과 달라야 합니다. 신앙인들의 분별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면 그것은 영은 새로워졌지만 마음은 아직 새로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새로워지면 이 전에 부, 명예, 사치, 유행을 추구하고 세대 본받고 살았던 일 등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마음을 바꿀 수 있습니까? 거듭난 사람들이 마음까지 새로워지려면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12:1). 드린다는 것은 목회의 길로 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순종, 온전한 순종을 의미합니다(6:16). “평생 제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하는 서원을 의미합니다. 몸 드릴 때 비로소 마음이 새로워지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며, 올바른 분별을 할 수 있습니다(12:2).

 

분별력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야곱과 에서의 삶, 룻과 오르바의 삶, 여호수아와 갈렙과, 다른 열 족장들의 삶이 그들의 분별력의 결과입니다. 부언하지만 신앙인들의 올바른 분별은 몸 드리는 일, 곧 온전한 순종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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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아름다운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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