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0(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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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월간지에 실려 있는 밀레의 <만종>에 눈이 끌리면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가!’ 어쩌다가 내가 <만종>과 이렇게도 멀리 떨어져서 살게 되었을까 하고.

 

1940,5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보통사람들에게 그래도 익숙한 서양화가 있었다고 한다면, “밀레만종이 고작이었을 것. 내가 자란 인구 35천의 읍()에서는 적잖은 집들에서 <만종>이나 <이삭줍기>를 만날 수 있었다. 아니다 밀레의 <만종><이삭줍기> 말고는 서양미술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물론 서울이나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명색이 인텔리겐챠들은 자신이 그러한 고장에 살고 있다는 불편함을 기껏 수치스럽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으로 자위했을 터이고.

 

더러 손끝이 야무진 아낙들은 당시 막 유행하기 시작했던 서양자수 수법으로 한 뜸, 한 뜸 정성을 기울여 자수 작품으로 환생시켜놓곤 했다. 또 화가 지망생이었지만 간판 집 심부름꾼으로 머물고 있어야하는 젊은이는 합판 자투리나 캔버스 조각에 제법 그럴듯한 <만종>의 모작을 그려놓기도 했다. 그것들은 나름대로 그림을 걸 수 있는 공간을 가진 집 벽을 차지하게 되고.

<인간의 조건>, <동서미술론>등으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프랑스의 작가 로망 롤랑은 말했다. “<만종>에는 <만종>만이 가지고 있는 음악적인 매력이 있다.” 그리고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해준다. “밀레는 시골 저녁의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그 그림에서 들려주려했다. 인간과 대지의 투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올 즈음의 고즈넉한 시적미각과, 석양의 광막한 들판에서 기도하는 소박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감명 깊게 표현하고 있다.”

월간지에서 본 <만종>이 로망 롤랑의 글을 읽으면서 얻었던 그 감명을 되살려 준 것이리라. 그림 오른 편 멀리 지평선에 보이는 교회로부터 잔잔하게 울려 퍼지면서 화면을 채워주고 있는 그 소리, 그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간 지금, 보청기의 도움으로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이 귀로, 다시 그 종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리라.

밀레가 어렸을 적, 저녁 종소리가 울리면, 할머니는 농사짓던 손을 멈추고 모자를 벗어 죽은 자를 위하여 안젤러스(L'Angelus)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습관이었다고 했다. 그런 추억을 그린 것이 이 <만종>이었다는 해설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던가. 회중시계나 손목시계가 없었던 시절, 아침, , 저녁에 울리는 교회의 종소리는 나날의 삶에서 길잡이 역할을 했다지 않는가.

 

스페인에서 살바도르 달리가 태어난 것은 <만종>이 그려진 후 40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이다. 달리의 생가에도 <만종>의 모작이 걸려 있었다. 화가지망생 달리는 틈이 나는 대로 <만종>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던 달리도 어느덧 <만종>의 마력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데. 훗날 기행을 즐기는 슈르레알리스트 화가가 된 달리는 밀레의 <만종>을 모티프로 숱한 오마주 작품을 발표한다. 밀레 만종의 비극적 신화라는 논설도 발표한다. 거기 이런 대목이 있단다. “부부의 발밑에 있는 감자 광주리는 부자연스럽다. 사실인즉 처음에는 어린아이의 관을 그렸다. 매장하기 전에 기도하는 부모의 모습을 그리려 했던 것을 밀레는 생각을 바꾸어 지금 우리가 보는 모습으로 바꾼 것이다.”

 

달리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모습이라고 일컬어 말하려는 것은 <만종>에 그려진 남자와 여자는 부부가 아니라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것. 어머니의 자세는 비는 벌레라는 별명을 가진 사마귀(당랑)가 공격하기 직전에 취하는 자세와 같다는 것. 다시 말해서 그녀는 곧 아들에게 덤비려하고 있다는 것. 미리 이를 눈치 챈 아들은 근친상간이라는 에로틱한 기대로 해서 이미 발기해버린 터라 모자를 벗어 앞을 가리고 있다는 것. 또 사마귀의 암컷이 교미를 마친 후에는 수컷을 물어 죽인다는 사실도 알고 있기에 공포에 떨고 있다는 것...

 

인간의 상식과 이성을 허물고 잠재의식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작품화하기에 골몰하고 있었던 달리에게 밀레의 <만종>이 창작의욕을 불러 일으켜주는 쏘시개가 되어 준 것은 사실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달리는 <만종>을 자료로 삼아 덧칠하고 비틀어 통째로 주제까지 바꾸어버린 것이다. 그런 유의 모작들이 수도 없이 남아있다니.

달리는 달리 찾아볼 수 없을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동원해서 <만종>을 비틀었어도, 결코 밀레의 <만종>에 결정적 손상을 입힐 수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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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범 칼럼] 밀레의 [晩鐘] 그리고 달리의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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