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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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여리고 함락, 아간의 죄, 그리고 궁극적으로 아이 성 점령에 관해 읽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모든 것이 중단되고 북쪽으로 거의 30km 이동해서 세겜 근천에 있는 에발 산에서 예배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직후에 다시 가나안에서 일어난 충돌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마치 TV에서 영화를 보고 있다가 중간 광고를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흥미로운 이야기에 끼어들어서 우리가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말해 주는 그 무엇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이는 본문이다. 그것이 율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또한 지금까지 나왔던 줄거리를 중단시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것은 매우 선명하게 줄거리를 중단시킨다.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주력 부대가 여전히 길갈 지역에 있는 것을 보여주며 그래서 에발산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본문의 위치는 사본마다 다르다. 쿰란에서는 이 본문이 5:15:2 사이에 있는 반면, 칠십인 역에서는 9:2 다음에 나온다. 이런 사본들은 여호수아가 아이를 점령한 후에 가나안 영토를 지나 위험한 북쪽으로 여행을 하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인식한다. 특히 세겜의 주요 중심지에 그렇게 가까이 갔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간 이야기를 대략 연대기적으로 말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순서대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저자는 연대적 순서를 어길 수 있다. 바로 그것이 핵심 요점을 강조하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정복 전쟁 후기에 일어난 예배의 때에 대한 묘사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여기에 나오는 것은 그렇게 하면 본문이 전개하는 중심 주제를 강조하고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가기 전에 여호와는 여호수아에게 모세가 명령한 토라에서 떠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모세를 통해 주신 여호와의 명령에 대한 신실함이 이스라엘의 삶을 형성해야 한다. 아이 성 전투에서 문제가 생긴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명령에 신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이것을 깨닫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르자 아이 성은 점령당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신실함에 헌신하지는 않았다. 에발 산에서 있었던 이 예배의 시간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헌신을 하는 때다. 아이 성에서 죄로 인해 유발된 실패가 있은 후에 필요한 것은 그 백성이 여호와의 뜻을 알고 행하는 일에 다시 한 번 헌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의 표시가 되어야 하며, 여기에서 일어난 일이 모세가 명령한 그대로 된 것이라고 거듭 반복해서 나 올 때 바로 그 점이 부각된다. 실로 이 구절은 본문을 형성하는 후렴구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인 토라가 하나님의 백성을 형성해야 한다. 그리고 예배는 그에 반응하는 적절한 방식이다. 실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삶으로 구현할 때 그들에게 소망을 주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예배는 이스라엘의 삶의 핵심에 있어야 했다. 신명기 27장은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갔을 때 에발 산에 가서 사실상 언약 갱신 식을 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때 레위인들이 언약의 축복과 저주들을 선포할 것이다. 에발 산이 이스라엘의 중심 산지에 있는 것과 비추어 볼 때, 이것이 그 땅에 들어가자마자 처음으로 할 일이라고 기대했을 리는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신속하게 행해야 했던 것은 분명하다. 여호수아가 다듬지 않은 새 돌”(31)로 단을 쌓을 때 성취한 것은 바로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이 명령이다. 이런 구조는 신명기 27:5-6에서 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출애굽기 20:25에서 나온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일어난 일이 모세가 요구한 것에 따른 것이라는 단언이 두 번에 걸쳐 나온다는 사실이다. 에발산은 북부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그 지역의 주요 무역로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 땅 대부분을 내려다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중요했다. 그래서 그곳은 전략적이고 상징적인 장소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이 중 어느 것도 강조하고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단과 제사가 여호와가 모세를 통해 계시하신 것에 따라 시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명기에서 요구한 대로 번제와 화목제물을 드린다. 번제는 죄를 속하기 위한 것인 반면, 화목제는 하나님 및 공동체와의 관계를 재차 공고히 다지려는 것이었다. 아이에서의 사건들 바로 뒤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그곳에서의 실패가 최종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은 죄 사함 받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죄 사함은 궁극적으로 또한 하나님 및 그분의 백성들과의 교제로 이어진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사실상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그 선물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서 이미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여호수아의 행동은 신명기 27장에 기초하고 있지만 기록 된 순서가 같지 않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 이유는 이 본문이 아이 성에서의 사건들 직후에 나오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희생제사는 죄 사함과 새롭게 된 교제를 가리킨다. 이 두 가지는 거기에서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에 비추어 필요했던 것들이다. 마찬가지로, 성만찬을 기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죄 사함, 그리고 그리스도 및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교제를 둘 다 상기하게 된다. 동시에 우리는 이것도 하나님이 이미 예수님을 통해 계시하신 것을 순종하는 데서 나온다는 것을 상기한다. 죄 사함과 교제는 형태가 다르지만 메시지는 같다. 우리는 죄를 사하시고 새롭게 하시고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 수단을 이미 계시하신 하나님을 섬긴다. 우리의 삶 가운데 예배가 중심이 되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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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18 - 에발 산에 한 제단을(8: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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