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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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7장에 나오는 지시들은 희생 제사를 언급하기 전에, 이스라엘에게 큰 돌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고 규정했다. 그래서 토라(아마도 신명기)를 그 위에 필사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 돌들은 단과 분리된 것으로, 아마 십계명이 새겨져 있던 돌판들 혹은 공개적 전시물 역할을 할 수 있는 입석 같은 것이었다. 이 본문은 피상적으로 읽으며 토라가 제단 돌에 새겨져 있는 것을 시사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신명기에 나오는 배경으로 미루어 볼 때 별개의 돌이 사용되었고, 그 위를 석회로 발라 토라를 그 위에 새기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읽고 쓰는 수준은 아마 별로 높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장소가 존재하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백성들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 및 예배와 분리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어도 일부를 옮겨 썼다는 기록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드리는 예배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 하나님의 백성은 이방인들과 본토인들을 둘 다 포함한다. 이 시점에 이스라엘은 이미 여러 인종이 섞인 백성이다. 이집트에서 이미 여러 잡족”(mixed multitude)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합의 집이 포함된 것은 이미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적에 동조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토라를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바로 그 때문에 이 모든 백성이 언약궤 주위에 모였다. 절반은 에발산에 절반은 그리심 산에 모였다. 다시 한 번 이것은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 여호와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신명기 27장은 언약의 축복과 자주 둘 다에 대해 기록하지만 33절에서는 오로지 복에 대해서만 강조한다. 돌들이 있었으므로 저주 역시 선언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아이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공동체가 성찰해 본다면 이미 겪었던 그들의 경험을 통해 그 저주가 무엇인지 알 것이다.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축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호와의 토라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호수아가 모인 사람들 앞에서 토라 전체를 낭독했다고 나온다. 거기 있는 사람들의 모임 역시 포괄적인 것으로 여자들, 아이들,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을 포함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하는 사람들이 단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 전체는 예배 안에서 하나로 합쳐지며, 그들은 여호수아가 율법의 축복과 저주 전체를 그들에게 낭독하는 것을 들으면서 그렇게 하나가 된다. 토라가 기록되긴 했지만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것을 포함하게끔 제시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여호수아는 모인 사람 모두에게 그것을 낭독한다. 그들은 말씀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예배의 여러 활동, 특히 제사를 드리는 것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성장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보다 공식적인 예배 행위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행동의 결합이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포함하는 예배는 또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포함한다. 그 말씀에는 축복과 저주가 둘 다 포함된다. 그래서 33절에서는 축복만 언급된 반면, 34절에서는 백성들이 축복과 저주의 모든 말씀을 들었다고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다는 것은 우리가 더 어렵다고 느끼는 본문들, 특히 하나님의 진노나 심판에 대해 말하는 본문들과 씨름하는 것도 의미한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포함하는 예배는 또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포함해야 한다. 결국 이것은 사실상 백성 전체가 여호수아가 1:8절에서 명령받은 일을 하는 것, 그리고 지도자들이나 백성들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건전한 지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보여 준 순종이 오늘날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은 교회들은 성경을 읽는 것과 해설하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정기적으로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아마 그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굳이 읽으려 하지 않았을 본문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에발산에서의 예배가 이방인과 본토인을 포함하는 백성 전체가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이 말씀의 의미를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예배를 사람들의 생생한 경험이 되도록 구성하는 방법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어떤 수단을 쓰든 하나님의 백성 전체로 하여금 반드시 순종의 축복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예배가 살아있는 예배가 되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예배가 되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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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웅 교수의 선교칼럼] 여호수아와 선교19 - 축복과 저주선포(수8: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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