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요저녁예배를 마치고 모처럼 곤지암 기도원에 올라갔습니다. 다음 날 특별한 손님 몇 분이 오셔서 밤을 줍는다고 하셔서 미리 간 것입니다. 원래 전날이나 그날 오후에 한번 기도원을 다녀오려고 했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 나서 늦은 밤에야 고성능 플래시를 가지고 밤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밤나무에 밤이 얼마나 달려 있는가를 확인했습니다. 제법 산 깊은 곳까지 가서 확인을 했습니다. 플래시가 워낙 고성능이어서 땅에 밤이 얼마나 떨어져 있고 밤이 얼마나 달려 있는가가 다 보였습니다. 그렇게 확인하는 중에 밤이 하나씩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밤 떨어지는 소리가 그날따라 너무 신기하게 들렸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보다 더 신기하게 들렸습니다. 더구나 아직 채 익지 않은 밤이 익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했습니다. 방에 들어와서 왜 그런 소리가 들리는가 생각해 보았더니, 그걸 들리게 하는 것은 바로 바람의 언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람의 언어는 벌써 단풍을 물들게 하는 소리까지 들려주었습니다. 아직은 숲이 파릇파릇한데 그 바람의 언어가 단풍 만드는 소리를 들려준 것입니다. 창문을 열어놨더니, 계속해서 바람의 언어에 동글동글 여문 밤알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머지않아 가을바람에 우수수 떨어질 가랑잎들은 떨어진 밤알들을 덮어줄 것입니다. 그리고 또다시 바람의 언어는 꿈을 꾸는 밤알들에게 내년 봄 나무의 새싹으로 태동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날 밤바람의 언어를 들으며 잠이 들었습니다. 잠이 든 후에 꿈속에서도 떨어지는 밤알과 바람에 굴러가는 마른 잎새들이 나의 삶과 같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런 꿈을 꾸다가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약속한 대로 특별한 손님들이 기도원을 방문하였습니다. 정신없이 밤을 줍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산에서 밤을 주웠던 추억이 아련하게 스쳐갔습니다. 그리고 밤을 줍는 순간에도 밤알이 이따금씩 툭툭 떨어졌습니다. 어제저녁 들었던 바람의 언어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 바람의 언어는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 구절이 생각나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장석주 시인의 시를 마음속으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저 밤이 저절로 익을 리는 없다 / 저 안에 태풍 몇 개 / 저 안에 천동 몇 개 / 저 안에 벼락 몇 개 / 저게 저 혼자 둥그러질 리는 없다 /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숱한 밤들 /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 저 안에 초승달과 보름달 몇 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순간에도 붉은 태양 아래 아직 채 익지 않는 밤알이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저들은 땡볕과 무서리를 더 맞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얼마만큼 밤을 줍고나서 바비큐 런치를 즐겼습니다. 우리 교회 김요한 집사님이 오셔서 천막을 설치해 주어서 특별한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천막을 안 쳐도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천막을 쳐 놓으니까 가을 소풍을 온 것 같고, 잔칫집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 주었습니다. 어린 시절 가을 소풍의 추억이 떠오르며 동심 세계를 이루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손님들과 자리를 함께했던 부목사 몇 분들도 같은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순간에 바람의 언어가 제 귓전을 스쳐갔습니다. 다음에 오면 저 나뭇잎사귀들은 단풍이 될 것이며 한동안 단풍잎으로 온 산은 불타오르는 모습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서로의 삶의 얘기를 나누는 즐거운 시간도 지나갔습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죠. 아니, 만날 때부터 헤어질 결심을 하고 만나는 것이 우리의 삶이지요. 아직은 땡볕이 맹렬히 타오르는 여름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밤 떨어지는 소리도 그칠 것이고 나뭇잎들이 밤알들을 소복소복 덮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이게 되겠죠. 겨울이 오면 저는 또 다른 바람의 언어를 들어야 합니다. 그 바람의 언어는 다름 아닌 성령의 감동과 교훈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삶을 살다 보면 언젠가 궁극적인 인생의 겨울도 맞이할 것입니다. 삶과 죽음이 악수하는 그 겨울 말이죠. 그때 저는 바람의 영원한 새 언어를 듣고 저 산 너머에 있는 새로운 영토의 세계에서 다시 영원한 삶을 사는 꿈을 꿀 것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제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