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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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22:20-21).

 

유대인들의 집권 세력 가운데 하나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인기가 점점 오르자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어떻게 하여야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22:15) 서로 의논하였습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지, 예수님의 말씀이 성경에, 양심에 맞는지 살피지 않고 행여나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영광을 예수님께 빼앗길까 노심초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자신이 한 말에 걸려 넘어지도록 올무를 놓은 것입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22:16b). 그들의 말은 맞는 말이기는 하나, 그들이 중심에서 존경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하는 척 하면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들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올무에 걸리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진달래는 봄에 피는 꽃인데 종종 계절을 숨긴 늦가을에도 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머잖아 계절이 발톱을 드러내 잔인하게 서리를 쏟아붓고 맙니다. 그러면 늦게 핀 꽃은 물론이거니와 아직 싱싱하게 붙어 있는 잎사귀까지도 바짝 마르고 맙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한 나중 질문 곧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라는 질문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위장술임이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라.”고 말씀하시면 세금 내는 것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미움을 사는 대답일 것입니다. 반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 정부를 반대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힐 수 있는 대답이었습니다. 이 대답에도 저 대답에도 빠져나갈 수 없는 교묘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속을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의도를 뻔히 알아차리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그들 속을 환희 들여다보시지만, 대답을 피하시지 않고 모두에게 교훈할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2:21)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13:7). 여기 공세는 조세를 말하고, 국세는 관세를 말합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어야 합니다. 국가가 마땅히 받아야 할 세금이라면 기꺼이 내야 합니다. 그래야 질서와 치안, 복지를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나 연보 등도 감사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간혹 십일조나 헌금을 구제로 대신 하거나, 구제에 쓸 돈을 십일조나 헌금으로 대신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십일조는 십일조이며 구제는 구제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이 혼돈되어서는 안 되듯, 연보나 구제는 드리는 대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세금이나 십일조와 같은 금전과 관련된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앙인들은 살아가면서 육신의 것과 성령의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육신과 성령은 서로 원수이며 대적의 관계이지 화평의 관계는 아닙니다(5:17). 육신의 것이 하나님의 것처럼 등장할 때가 있고 하나님의 것이 육신의 것으로 비난 받을 때가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는 다른 불로 하나님께 분향하려 하다가 둘 모두 하나님의 불에 의하여 살라지고 말았습니다(10:1~2). 하나님께 분향할 때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하신 단의 불로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정에서 밥할 때 사용하는 불을 사용한 것입니다. 불은 열심을 상징합니다. 육신의 열심이 하나님께 드릴 열심을 대신한 것입니다.

 

신약에서 단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제단에서 하나님께 드려졌기 때문입니다. 제단에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는 증거로 불이 내려진 것처럼 십자가에 우리 자신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불을 내려주십니다. 신앙인들의 열심은 십자가를 통과한 열심이어야 합니다. 육신에서 나오는 열심은 하나님이 주신 열심이 아니라 자기 열심입니다. 이런 마음은 은혜 받은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성질을 펄펄 내는 사람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령이 주신 열심은 속에서부터 나오는 능력입니다(1:29).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마땅히 멸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을 취하여 하나님께 제사하러 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결과 사울 왕가는 멸망을 초래하고 맙니다(삼상15:17~23). 아말렉은 육신을 상징합니다. 육신의 소욕에서 나오는 것은 선한 것이 없습니다. 육신은 다 멸해야 할 것인데 멸하지 않아서 결국 사울 역시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것과 육신의 것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영이 예민한 사람은 이것을 분별할 수 있지만 대개는 하나님의 것과 육신의 것이 함께 묻어 나갑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 하지만 거기에는 자기 영광이 섞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선을 행하고도 혹시 섞여 있을지도 모를 자기 의를 보혈로 씻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목욕탕에 다녀온 사람이 집에 들어와서 다시 발을 씻는 것과 같습니다(13:10).

 

우리 모두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기도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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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크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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