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 강성률 목사(신촌예배당)

강성률 목사.jpg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1:6).

 

얼마 전에 제가 사는 빌라 3층과 2층 사이 계단에 반려견 한 마리가 묶인 채로 있었습니다. 아랫집 청년이 그 옆에 앉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왜 강아지가 그곳에 있는지 몰랐습니다. 11세대 가운데 그런 강아지를 기르는 집은 없었습니다. 분명 누군가 그곳에 버리고 간 것으로 보였습니다. 강아지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그를 만지는 사람들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버려진 상태가 아니고 분명 주인이 자신을 데리러 올 줄 굳게 믿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보아 주인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강아지로 보였습니다.

 

이런 강아지를 누가 왜 버렸을까?’ 의문이 들었는데 다음 날에야 풀렸습니다. CCTV 확인 결과 버려진 강아지가 아니라, 주변에 연로하여 정신적인 장애가 생긴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길을 지나다가 강아지가 밖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노끈으로 목에 채운 후에 끌어다가 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주인이 그를 학대하였다면, 그는 사람을 경계하거나 심하게 짖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불안한 기색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던 강아지,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강아지였습니다. 알고 보니 어떤 목사님 가정에서 기르는 반려견이었는데, 주인이 잠시 한 눈판 사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강아지가 낯선 환경에서 조금도 요동도 없이 평온하게 지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들입니다. 임금이나, 주인을 위하여 대신 죽은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는 종종 들은 바가 있지만, 왕이나 주인이 종의 죗값을 죽음으로써 대신 치러 주었다는 말은 결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온 우주를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주님께서 저 같은 죄인을 위하여 대신 돌아가신 것입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7-8).

 

그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감사 감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보답하는 마음을 가지고 형제들에게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을 깨닫는 것, 사랑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 수 있을까요?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1:6). 듣는 사람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39:3). 묵상하는 것은 읽고 듣고 기억하고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합니다. 묵상할 때 감사 감격으로 뜨거워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읽고 들을 뿐만 아니라 묵상해야 깊게 깨달아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겸비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10:12). 겸비케 하기로 결심만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마음이 둔해지는 것은 겸비치 못하고 높은 마음을 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현자도, 철학자도 아닌 겸비한 마음을 가지고 배우려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작은 것부터 사랑을 실천해 나갈 때 사랑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한 것만큼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7:47). 자신의 죄악을 깨달은 사람은 죄 문제는 보혈공로 아니면 해결될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보혈을 흘려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보답하는 자세입니다. 그 보답하는 자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우리에게 사랑받는 사람에게 어떤 인심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주님께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열매입니다.

 

저를 비롯하여 이 글을 읽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가 어떠한 것임을 알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태그

전체댓글 0

  • 75817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사랑을 깨닫는 날부터’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