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회자로서 지역교회사 연구에 선도적 역할
- ‘경북기독교회사’ ‘영남교회사’ 등 지역교회사 발굴 정리
경북 상주 출신... 현장 목회자로서 지역교회사에 관심
세천 박창식(細川 朴昌植)은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남적리에서 아버지 박동개(朴洞介)와 어머니 윤일선(尹一善) 사이에 9남매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호 세천은 그가 태어난 마을 앞에 흐르는 낙동강 지류의 이름을 딴 것인데, 그의 학자적인 모습이 연상되기에 걸맞는 아호이다.
박창식은 고향에서 초등학교 1학년 무렵에 가정의 우환으로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그는 상주 부원교회를 중심으로 학생회 활동 등 신앙생활에 진력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목사로서 소명을 가지고 자랐으며, 계명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 후, 대구노회 목사후보생으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진학해 1989년에 M.Div 과정을 졸업하고, 1990년 동부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부산에서 짧은 부목사 생활을 거쳐 1993년부터 김천서문교회와 1999년부터 대구 달서교회 담임목사로 목회했다.
그는 목회현장에서도 건강한 교회는 지나온 역사를 바탕으로 현재를 성실히 살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교회사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신학대학 재학 시절부터 교회사 연구에 관심을 가진 이후 체계적인 역사공부를 위해 일반대학과 신학대학을 오가며 수학한 다음, 2005년 모교인 계명대학교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신학박사(Th.D)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신학대학에 출강하며 꾸준히 후학양성에 힘을 쏟으며, 특히 지역교회사 발굴과 기록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나아가 교계와 교단에서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교단 소속 대신대학교 기독교역사문화연구소 초대소장을 지냈으며, 대구경북기독교역사연구회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본 필자는 그의 회갑 기념논총<목회와 교회사> 가운데 축사의 글을 기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그와의 인연은 40년 전 부산삼일교회에서 고신대학교 이상규 박사와 함께 <한국개혁주의교회사학회>를 설립하는 총회에서 만나 회장에 장희종 목사, 부회장에 본 필자, 총무에 이상규 박사로 조직을 구성했는데, 그때 필자가 학술연구부장에 박창식 목사를 추천한 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학문의 동년배로, 목회일선에서 같은 신학교인 대신대학교에서 연구실을 함께 쓰면서 목화와 학문에 전력을 다해 교회사학자로 성장해 왔고, 대구 경북 지방교회사 연구에도 함께 힘을 모아왔다.
뿐만 아니라, 그는 총회역사위원회가 간행하는 학술지 <장로교 역사와 신앙>과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학술지 <한국성지순례연구>에도 꾸준히 연구논문을 발표하고 있으며, 한국교회사 분야 특히 경북 지역의 교회사 연구로 향토교회사 연구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소장 학자이다.
"교단의 역사 지킴이"란 닉네임 얻어
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 김남식 박사는 박창식 목사를 "공부하는 목사"로 평가하였다. "그는 목회라는 소명에 순명하였고, 학문이란 바다에서 진주를 캐내었다. 이 두 가지 영역을 균형있게 하기란 어려운 일인데, 이것을 무난히 감당해가고 있는 모습에서 그의 순수와 열정을 읽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같은 책, p.45).
또 예장합동측 총회장 배광식 목사는 그에게 '교단의 역사 지킴이'란 닉네임을 붙였다. "그는 대신대학교의 학교사를 정리하고, 지역교회사를 두루 섭렵하더니 급기야는 교단의 역사 지킴이로서 다대한 역활을 보여주었다. 우리 교단은 한국장로교의 장자교단으로 그 역사에서도 뒤지지 않지만 그동안 역사작업은 많이 미진했다. 제100회기 총회를 맞이하여 총회역사위원회가 조직되었고, 박창식 목사는 처음부터 그 위원회에서 중심적인 역활을 감당해 왔다. 숨겨진 역사들을 발굴하는 일에 열심이었고, 또한 기독교 역사 사적지와 순교 사적지 발굴과 지정에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었다. 무엇보다 <총회역사관>의 설치 위원장을 맡아 어려운 여건에서도 무에서 유를 창조해 냈다. 이제 빅창식 목사를 일컬어 교단의 역사 지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사료된다"라고 치하했다.(같은 책, p.34).
전 총신대와 대신대 총장을 역임한 정성구 박사도 박창식 목사를 '학자로서의 품위를 지키고'라는 글에서 "인류 역사의 최초 최고의 역사가는 성 누가였다. 흔히 의사 누가로 알고 있지만, 그는 당대의 지성적이면서 논리적인 교회 역사가였다. 그는 예수님의 12 제자가 아니면서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 헬라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철저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바울과 선교 동역자가 되었다. 그러면서 누가는 바울의 옥중생활을 끝까지 보살핀 주치의였다. 그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역사가로써 예민한 필치로 영감을 받아 위대한 기록을 남겼다. 누가는 초대교회의 오순절 성령의 사역으로부터 베드로의 설교,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 바울의 선교의 발자취를 따라서 동행하면서 기왕의 자료들을 정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증거하는 초대교회의 기막힌 역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만에 하나 누가가 초대교회의 생성과 발전 그리고 사도 바울의 이방전도 사건을 기록하지 않았다면 복음서와 바울서신 사이에 다리를 놓지 못했을 것이다" 라며, 이번에 박창식 목사의 회갑을 맞이하여 그동안 여러 지면에 기고한 논문들을 묶어 <목회와 교회사>란 회갑 기념논문집을 발간한데 대하여 치하하였다.(같은 책, p.35).
"끊임없이 공부하고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목회자"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지도했던 고신대학교 이상규 박사는 축하의 글<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란 제하의 글에서, 첫째, 그는 신실한 목회자로 살아왔다. 계명대학교를 졸업하고,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고, 예장합동 소속 목사로 부산과 김천에 이어 대구에서 목회자로 헌신했다. 둘째, 그는 연구하는 학자였다. 그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하고 자신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던 목회자요 학자였다. 목회훈련 과정을 이수한 후에도 부산 경성대학교에서 한국근대사를 공부하였고, 고신대 대학원에 입학하여 한국교회사를 공부했다. 대구에서 목회하게 되자 계명대학교 대학원에 입학, 교회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여러 분야를 연구했지만, 특히 대구경북지방 기독교 연원을 추적하는 개척자적 연구로<경북기독교회사>를 발행하였다. 셋째, 그는 문필가이자 저술가였다. 칼럼, 수필, 논설, 설교문, 논문 등 다양한 글을 신문이나 학술지에 발표하고 방송에 출연해 강의하기도 하였다. 넷째, 그는 사랑과 의와 신의를 겸비한 신앙인격자이다. 이 점을 해설적으로 말하면 교회에 대한 사랑이 깊고, 공사간의 일처리에 공정하고, 인간 관계에서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란 점을 말한다. 그와 교류 한지 30년이 지났지만 그는 항상 교회 우선적인 교회에 대한 애정을 가진 목회자임을 보게 되었고, 여러 기관이나 위원회에서 일하면서 공의를 추구하며 바름(正)에 대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동시에 그는 인간 관계에서 신의를 지키는 분이었다 라고 치하했다. (같은 책, pp.49-50).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위의 글귀 '도리불언 하자성혜'를 인용, "복숭아 나무와 오얏 나무는 스스로는 말하지 않지만 그 꽃과 열매가 향기로워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그 나무 아래 저절로 길이 생긴다" 라는 말로 박창식 목사의 군자다운 모습을 그리었다.
한국교회사를 지역중심의 미시사적 연구 초석
현재 대구경북기독교역사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영남대학교 손산문 교수의 평을 들어보자. 그는 박창식 목사에 대해 학여역수(學如逆水)의 연구자라는 제하에 "운전 증에 자동차의 후시경을 보는 것은 뒤로 가고자 함이 아니라 올바로 가고자 함이다. 마찬가지로 역사는 단순히 지나온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고, 나아가 보다 바람직한 미래까지도 조망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전문교회사 연구자로서 박창식 목사의 교회사 연구 특징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첫째로, 한국교회사 연구의 관심을 학문의 장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현장에까지 확장시켰다는 점을 들었다. 근자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사 연구는 대부분 전문학자들에 의해 학계 안에서의 담론으로만 주로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박창식 목사는 신학교 교수로서 학계 뿐 아니라 목회자로서 교회와 교인들에까지 한국교회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다.
둘째로, 주목할 공헌은 지역교회사 연구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동안 한국교회사 연구는 중앙중심의 거시사적인 연구가 주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박창식 목사는 일찌기 지역중심의 미시사적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경북교회사와 영남지역교회사를 탐사해 이 분야에 초석을 놓았다.
셋째로, 예장총회 역사관 설립 및 교단 산하의 신앙유산 발굴 및 보전에 끼친 영향이다. 유적지 발굴 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 사적지를 전국에 25개 처를 지정 발굴에 큰 역활을 하였다. 그의 학위 논문 제목에 예시된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대구 경북지역의 역사고찰이란 것만 보아도 중앙에서 관심을 두지 않았던 미개척분야를 발굴한 것은 박 목사의 노력이라 할 것이다. 이처럼 교회사 연구에 의미있는 족적을 남긴 박창식 목사는 바쁜 목회일정 가운데서도 '학여역수'의 자세로 끊임없이 연구에 매진해 온 것은 그의 큰 업적이라 할만하다.(같은 책, pp.53-54).
박창식 박사는 자신의 연구 면모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목회자가 본질에서 벗어나 교회사에 기웃거리는 것은 외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나는 그 길에서 갈할 때마다 용천수를 마셨으며, 나태할 때마다 일깨워주는 수많은 영적 거장들을 만났다. 그들의 삶과 고뇌는 나의 생애와 사역의 지로(指路)였고 지남(指南)이었다. 나는 목회의 길에서 교회사 연구에 드린 시간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는다. 나같은 천학비재한 사람이 그나마 목회의 길에서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한 길로 걸어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같은 책, p.25). 박창식 박사의 역사 연구 방법론은 일반적이긴 하지만 굳이 표현한다면 실증주의적인 역사관이라고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