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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좋은 추억이 좋은 삶을 만든다
    요즘 딸과 함께 외손녀를 키우는 집사람을 볼 때마다 저는 집사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외손녀를 정성스럽게 돌보는 집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문득 외할머니가 생각납니다. 저의 외할머니는 딸만 셋을 두셨습니다. 그래서 딸이 자녀를 낳을 때마다 가서 애기를 받아주고 애 키우는 일을 도와주셨다고 합니다. 그런 외할머니가 저도 키워주셨는데 정말 따뜻한 사랑으로 키워주신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100점 맞은 시험지를 집으로 가져가면 외할머니가 저를 얼마나 칭찬해주셨는지 모릅니다. “우리 강석이는 어쩌면 그렇게 영특하고 영리한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목회하기 바쁘고 여러 가지 일을 하느라 그동안 외할머니의 사랑을 까마득히 잊고 산 것이죠. 그런데 손녀를 돌보는 집사람을 보면서 마침내 외할머니의 아련한 사랑이 떠오른 것입니다. 저의 외할머니는 참 불쌍하신 분입니다. 아들이 없었으니 돌아가실 때 저의 아버지가 장례를 치러 드렸습니다. 그때는 가족이 교회를 안 다녔을 때니까 아버지가 묘를 만들어 드리고 묘 앞에 제사상을 차려드리고 절을 하던 기억이 납니다. 저 역시 그때는 교회를 안 다녔을 때니까요. 그런데 외할머니는 아들이 없으니까 딸들에게 제삿날도 기억되지 않고 잊혀 갔습니다.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서 저도 외할머니 장례를 치러드렸던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시간이 나면 외할머니 묘를 한 번 찾아가 보려고 합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더듬으며 꽃다발이라도 하나 들고 가서 헌화 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드는 것은 손녀딸을 지극히 보살피고 사랑하는 집사람의 모습이 옛날 저를 사랑으로 보살펴 주신 외할머니의 모습으로 제 안에 반사되고 투영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외할머니의 사랑이 저의 무의식에 저장 되어서 이해심과 포용력도 있고 남을 배려하고 섬기는 심성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무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 외할머니의 사랑과 격려가 오늘날 저로 하여금 사랑과 섬김의 목회를 할 수 있게 되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요즘 저는 나이를 먹으면서 자꾸 옛날 일들이 많이 생각납니다. 물론 저는 어린 시절의 나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좋은 기억, 아름다운 추억들을 끄집어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의 이러한 심리현상이 감정의 순화와 정서의 건강에 굉장히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심리학 용어 중에 ‘므두셀라 증후군’과 ‘희생자(순교자)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므두셀라 증후군은 과거의 나쁜 기억은 지우고 좋은 기억만 남기려는 심리 현상을 말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아 인류 중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인데 그는 살면서 과거의 아름답고 행복했던 추억들을 많이 떠올리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아름답고 행복한 추억만을 떠올리려고 하는 그런 심리현상을 므두셀라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희생자 증후군은 자꾸 과거의 나쁜 기억만 떠올리며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심리를 말합니다. 왜 내가 이런 부모 밑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살고 고생만 했는가 하고, 항상 피해의식에 갇혀서 슬픈 생각만 하고 자기연민에 빠집니다. 그런데 무드셀라 증후군은 반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릴 지브란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추억이란 희망의 길에서 만나는 돌멩이와 같다. 추억이 있기에 길을 걷다가 넘어지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를 회상할 때 상처와 아픔이 아닌 사랑과 용서, 행복과 위로를 떠올릴 수 있다면 그러한 기억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쉼을 주는 안식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니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무드셀라증후군 속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늘 좋은 추억, 좋은 감정만 떠올렸기 때문이지요. 목회에 대한 추억도 좋은 것만 기억하려고 합니다. 이 마저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도 옛날 일이 떠오르거나 기억이 날 때는 무드셀라증후군의 영역 안에서 나쁜 추억, 나쁜 기억은 흐르는 강물에 던져 버리고 아름다운 추억, 행복한 기억을 떠올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함께 건강한 정서와 아름다운 감성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건강한 정서에 건강한 신앙과 영성이 자라날 것이고 그런 건강한 영성과 신앙을 가지고 건강한 교회를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추억이 좋은 삶을 만들고 신앙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며 좋은 교회까지 만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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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19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시인은 어머니를 가슴에 묻는다
    몇 달 전 정호승 시인께서 저에게 개인적으로 특강해 주시던 중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의 시의 근원은 어머니였습니다.” 정호승 선생님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신 권사님이셨고, 정호승 선생님 역시 유아세례를 받고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새벽기도 가려고 개울을 건너는데 보름달이 비취더라. 그런데 그 달빛이 너무 슬프더라.” 정선생님 보시기에 어머니의 그 한 말씀, 한 말씀이 모두 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께서 아궁이에 군불을 때실 때 아궁이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시로 보일 정도였다는 것이죠. 시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모성을 통한 사랑과 인생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너무 연세가 많으셔서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선생님, 혹시 어머님께서 돌아가시면 꼭 연락을 주셔야 합니다. 제가 해외를 나가지 않은 이상은 꼭 조문을 하러 가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정호승 선생님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가족끼리 조용히 장례를 치르고 어느 누구에게도 연락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조문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나중에야 알고 제가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연락을 주지 않으셔서 전혀 몰랐습니다. 늦게라도 조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목사님,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심지어 동창들에게까지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목사님께도 누가 될까 싶어 알리지 않았죠.” “계좌번호라도 알려주시면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닙니다. 어머니가 천국 가신 것과,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저희 어머니를 위해 기도해 주신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그 후에 정호승 선생님께서 추천사를 써 주신 저의 시집 ‘사막으로 간 꽃밭 여행자’가 출간 되어서 이번에는 문자로 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 추천사를 써 주신 시집이 나왔습니다. 한 번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런 답문을 보내셨습니다. “바쁘신 목사님, 저는 저희 어머니가 얼마나 주의 종을 잘 모셨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돌볼 양도 많으시고 하실 일도 많으실 텐데 왜 기어이 오시려고 하십니까? 그냥 제 작업실로 시집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데 한 이틀 후에 정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온 것입니다. “목사님, 저도 목사님을 왜 안 만나고 싶겠습니까? 저도 목사님을 만나면 영광이지요. 그러나 제가 목사님의 바쁜 시간을 안 뺏으려고 그랬던 것이죠.” “정선생님, 저 같이 한참 아래 있는 시인이 대기권 밖의 시인을 만나보고 싶은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겠습까?” “하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몸 둘 바를 모르죠. 저도 목사님을 만나 뵈면 영광이지만 저희 어머니가 주의 종을 천사처럼 생각하며 얼마나 존중히 여기셨는 줄 아세요? 그러니까 저희 어머니를 봐서라도 제가 목사님을 편안하게 해 드리려는 마음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정호승 시인을 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모습과 어머니 장례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하시는 것입니다. 과연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어머니를 가슴에 묻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한참 후 화제가 저의 시집으로 옮겨졌습니다. “선생님께서 추천사를 써 주시고 언론에서도 많이 다뤄주어서 서점에서 저의 시집이 제법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출간된 지 일주일 밖에 안 되었는데 저 같은 사람의 시집도 벌써 재판을 찍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선생님께서 추천사를 써 주신 덕분이고, 선생님의 명성 값일 것입니다.” “아닙니다. 목사님께서 시를 사랑하고 시에 대한 애절함과 아픔을 가졌기 때문이죠. 목사님의 설교야말로 한편의 고통스러운 시가 아니겠습니까?” 정호승 선생님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고 가슴을 때렸습니다. “아, 정호승 시인은 어머니를 가슴에 묻어왔기에 더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위대한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이구나. 그런데 나는 내 감성의 끝에 서서 나의 시심과 시성을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봐 왔어. 내가 아직 정호승 시인 옆에도 가지 못하는 것은 시에 대한 열정과 고통, 비극적 황홀을 느끼는 경험이 부족한 것도 있겠지만, 어머니를 가슴에 묻지 못했기 때문이었구나. 그러나 나는 이제부터라도 어머니뿐만 아니라 주님을 가슴속에 더 깊이 모시고 시를 쓰리라. 아니, 사랑하는 성도들과 세상에서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시를 쓰리라. 그리고 꽃밭도 거닐지만 사막으로 가리라. 사막에 꽃밭의 향기를 날리고 사막의 침묵을 꽃밭으로 가져 오게 하는 시를 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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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12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비와이 스타일
    얼마 전 우리 교회에서 비와이 공연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비와이가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막연하게 요즘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뮤지션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으로 비와이에 대해서 강하게 인각이 된 것은 우리 교회 방송실에서 제작한 비와이 공연 홍보영상을 보고 나서였습니다. ‘쇼미더머니’라는 음악경연 대회에서 우승한 비와이의 수상소감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비와이는 한 치의 망설임이나 주눅 든 모습도 없이 당당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꿈을 하나 이루고 내려가려고 합니다. 제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기서 말하고 싶어요. 많은 분들이 제가 하는 음악과 제 신념을 되게 많이 비웃으시지만 저는 이게 멋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을 오늘 말하고 내려가려 합니다. 태초에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저는 그의 수상소감을 듣고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당당하게 공중파 방송에서 성경 말씀을 외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수상소감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또 한 가지 감동을 받은 것은 그의 노래 가사 중에 나오는 한 대목이었습니다. 그의 노래 ‘Forever’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스물넷인 난 매달 십일조 봉투에 100만원짜리 수표를 100장씩 넣을 거야” 저의 상식으로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가사가 공중파 방송에 그대로 나가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가사를 듣는 사람들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오히려 열광을 한다는 것입니다. 비와이는 실제로 2017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십일조로 1억 원을 봉투에 넣었다고 고백하였고 회계사가 롤스로이스를 끌어도 된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축복을 받았으며 지금도 십일조 만큼은 반드시 지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얼마나 기특하고 아름다운 청년입니까? 저는 이번에 비와이 공연을 보면서 ‘지금까지 나의 음악적 감성과 예술적 로맨스가 너무 아날로그적 향수에 머물러서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문화적 대세와 충격을 감지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다시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비와이 스타일’을 새롭게 입고 디자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첫째, 비와이의 스웩(당당함)입니다. 비와이의 별명이 ‘지저스웨거’(Jesuswagger)입니다. 이 말은 Jesus와 Swagger의 합성어입니다. 스웩이라는 말은 원래, 약탈품, 전리품이라는 뜻인데 힙합에서는 ‘본능적인 자유로움’이나 ‘자신감’, ‘자기 과시’ 등을 나타날 때 쓰는 말입니다. 원래 힙합이 1970년대 미국의 할렘가에서 주로 흑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음악이었는데 사회적 불만이나 저항, 신념들을 자유롭게 랩을 통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힙합에서 스웩은 생명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비와이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과 신앙을 스웩있게 발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저스웨거’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입니다. 비와이의 이런 스웩 있는 모습은 서로 비난하고 공격하며 교회와 신앙을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현 시대에 큰 도전과 울림을 줍니다. 비와이처럼 어떤 자리에서든, 누구를 만나든 당당하게, 스웩있게 예수님을 전하고 자신의 신앙을 자랑할 수 있는 멋짐을 지녀야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둘째, 비와이의 뉴 패션 입니다. 청소년들과 청년들은 비와이의 헤어스타일, 옷, 스피치, 몸짓 하나 하나에 소리를 지르고 열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만큼 비와이는 최신 문화감각과 흐름을 읽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노래와 공연은 단순하고 가볍고 스피드 했습니다. 일방적으로 가르치려거나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함께 즐겁게 이야기하며 소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뉴 페이스, 뉴 리더를 기다리고 있고 젊은이들은 그런 사람에게 열광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셋째, 비와이의 톱클래스 실력입니다. 비와이는 공중파 방송 경연대회에서 우승할 정도로 최고의 실력을 평가 받은 우리나라 톱클래스 힙합 뮤지션입니다. 그가 최고의 실력을 갖춘 뮤지션이기에 공중파 방송이나 무대에서 당당하게 신앙을 이야기하고 자랑해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런 모습을 멋짐으로 받아들입니다. 저 역시 마이너리그였지만 메이저리그에 오르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였는지 모릅니다. 밤 늦도록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기도하고 책을 읽으며 영성과 지성, 예술적 감성을 쌓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그랬기에 지금은 누구도 저를 향하여 실력 없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 어느덧 아웃라이어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이번 비와이의 공연은 저에게 신선한 충격과 도전이었습니다. “나도 지금까지 노력한다고 했지만 아니다. 더 새로워져야 한다. 더 젊어져야 한다. 더 아웃라이어가 되어야 한다.” 앞으로도 비와이라는 아름다운 청년이 하나님께 더 위대하게 쓰임 받고 이 땅의 수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도구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교회에서도 비와이같은 지저스웨거가 많이 나오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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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05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꽃이 진다고 잊으랴
    봄이 깊어가면서 어디를 보아도 다 꽃입니다. 산과 들에도, 거리와 공터에도 다 꽃이 피어납니다. 꽃은 아름다움의 절정이요, 생명의 향기로운 노래입니다. 아무리 기분 나쁜 사람도 꽃을 발로 차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꽃을 보면 누구나 마음이 따뜻해지고 잠시나마 행복한 상념에 잠기게 될 겁니다. 요 근래에 뒷산을 몇 번 다녀왔습니다. 뒷산을 갈 때마다 화사하게 핀 진달래를 보는 행복이 보통 크지가 않습니다. 누군가가 그랬던가요, 꽃에도 마음이 있다고요. 그래서 제 마음 속에 피어있는 영혼의 꽃이 연분홍 진달래꽃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곤 합니다. 가장 먼저 피었지만 가장 오래까지 시들지 않고 꽃잎을 자랑하고 있는 진달래에 눈길이 갔습니다. 그 진달래를 축복 하곤 했지요. 그러나 가장 수명이 긴 꽃도 언젠가는 지고 말 것입니다. 아니, 비가 오고 바람이 세차게 불면 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여유도 없이 금방 져 버리겠지요. 그래서 화무십일홍 권불십년 (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교인들도 꽃처럼 화사하게 빛나던 젊은 성도들이 이제는 어느덧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되어가는 모습을 봅니다. 저도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맬 때마다 탱탱하고 생기 있던 목이 어느덧 주름이 지고 조금씩 쳐지는 것을 보면서 서글픈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아, 내 인생의 꽃도 지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아닙니다. 저의 전성기는 이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꽃이 져도 잎사귀가 무성해지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제 인생도 이제 시작입니다. 그래서 제가 쓴 ‘꽃밭 여행자’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황무지를 거닐며 꽃씨를 뿌릴 때 / 눈물이 바람에 씻겨 날아갔지 / 봄을 기다리는 겨울 나무처럼 / 가슴에 봄을 품고 황야의 지평선을 바라보았어 / 잠시 꽃밭을 순례하고 싶어 / 벚꽃나무 아래서 하얀 꽃비를 맞으며 섰을 때 / 꽃잎은 나에게 보내어진 연서였음을 알았던 거야... (중략) 꽃잎들의 연서를 손에 쥐고 / 홀로 먼 길을 떠나온 외로운 꽃밭 여행자 / 어느새 해가 저물어 붉은 노을이 질 때 / 문득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진다 / 눈물은 이슬이 되고 / 이슬은 다시 꽃잎으로 피어나리니 / 나도 하나의 꽃잎이 되어 그대의 창가로 날아가고 싶어 / 노을 물드는 꽃밭에 꽃잎으로 떨어지고 싶어.” 그렇습니다. 꽃이 진다고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봄꽃이 지면 다시 여름꽃이 피고, 가을꽃, 겨울꽃이 피어납니다. 그리고 다시 봄이 되면 봄꽃들이 만발하지요. 아니, 그 봄꽃들이 다시 떨어진다 하더라도 꽃밭에 떨어지고 꽃잎으로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꽃잎은 또 다시 다른 꽃잎을 만들어내지요. 그래서 정호승 시인은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 별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노년이 되고 제 인생의 꽃잎도 다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꽃잎은 또 다른 꽃잎을 만들어 낼 것이고 또 다른 꽃밭 세상을 만들어내어 더 많은 꽃밭 여행자가 찾아오게 할 것입니다. 특별히 제 가슴 속에 새겨진 그 수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가락동 23평 지하상가에서 처음 교회를 개척하였을 때 저를 믿고 따라와 주고 눈물로 헌신하며 오늘까지 함께 해 준 교인들을 제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지나온 목회 여정을 돌아보면 아슬아슬한 부분도 있었고 풍비박산 날 위기도 있었지만, 함께 비를 맞고 눈보라를 맞으며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새에덴의 전성기는 이제 시작되고 있습니다. 새에덴의 개척기와 부흥기를 함께 이끌었던 성도들도 대부분 중 · 노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백설희의 노래를 다시 리메이크해서 불렀던 이선희의 ‘봄날은 간다’의 가슴저미는 대목처럼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져도 같이 울던” 성도들을 어떻게 제가 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가 항상 가슴에 인각 되어 있는데 가사를 이렇게 역설적으로 바꾸어 부르곤 합니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져도 같이 웃는 알뜰한 그 헌신에 봄날은 온다.” 그때 마다 지금까지 저와 함께 했던 성도들을 가슴 속에 안고 부릅니다. 언젠가 우리 성도들도 꽃처럼 지는 날이 오겠지요. 그렇다고 제 가슴에 꽃으로 피었던 성도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죽을 때까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잊지 못하였던 것처럼, 저도 함께 헌신해 주었던 성도들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혹시 저보다 먼저 떨어진 꽃잎들이 있다 하더라도 저는 그 꽃잎들을 가슴에 품고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제 인생의 마지막 꽃잎이 떨어지는 날이 온다 해도 제 눈동자에는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보냈던 그 화사하고 아름다운 봄날이 어른거릴 것입니다. 오직 사랑과 감사의 회상만이 눈동자에 이슬처럼 고일 것입니다.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별이 진다고 그대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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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21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저는 지난 주 화요일 국립묘지에 있는 고 김대중 대통령의 묘역에서 추모기도회를 인도하였습니다. 그 분이 국립묘지에 안장된 이후부터 동교동계 가신들과 참모들은 한 주도 안 빠지고 화요일 오전이면 묘역에 와서 추모모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동교동계 정치인이요, 국회의원을 하신 배기선 장로님께서 간절하게 부탁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모모임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기도회 형식으로 하려고 하는데 꼭 한 번 와서 기도회를 인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가가서 보았습니다. 제가 간다고 하니까 각종 언론사에서 취재를 오고 일본 NHK방송까지 온 것입니다. 그리고 국회부의장을 비롯해 현직 국회의원들만도 12명이 오셨고, 당대표도 두 명이나 오셨습니다. 저는 몇 십 명 정도 올 줄 알았는데 권노갑 고문을 비롯, 전직 국회의원들과 비서관까지 어림잡아 150명 이상이 온 것 같았습니다. 전부 검은 양복을 입고 서 있는데 순간 저는 쫄아버렸습니다. 저는 그런 긴장 속에서도 정치적이지 않으면서 제 나름대로 신앙적인 중심을 가지고 고 김대중 대통령을 추모하고 그 곳에 오신 분들을 격려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봉독한 히브리서 3장 1절 말씀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도 복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는 고 김대중 대통령을 생각하면 곧 바로 예수님이 생각납니다. 아니 김대중 대통령을 좀 깊이 아는 사람은 그분을 통하여 예수님이 생각나게 되어 있습니다. 제 입장에서 말씀을 드리긴 하지만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김대중 대통령님의 또 다른 별칭이 DJ이기 때문입니다. 고 이중표 목사님은 DJ를 “Death of Jesus”라고 연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니셜대로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정신으로 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목을 이루시고, 또 우리와 이웃과의 화목을 이루신 것처럼 김 대통령께서도 평생을 자기를 죽이려는 정적들과 원수들을 용서하며 화해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중략) 그러니까 그분을 생각하면 예수님이 생각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재임시절에 대한민국 역사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의 물꼬를 여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의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갖게 한 것도 다 DJ대통령께서 선구자적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한미동맹을 철저하게 강화하는 전제 조건에서 말입니다. (중략) 그래서 평화의 사 도로 인정받아서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까. 셋째,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 때문에 저는 예수님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어느 대통령의 참모들이 매주 화요일이면 이렇게 주군의 묘역에 모일 수 있단 말입니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화요일 오전만 되면 이곳에 모여서 대통령님을 추모한다는 것은 기네스북에 등재되어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DJ대통령께서 한 종교의 창시자나 교주도 아닌데, 화요일이 되면 이곳에 오셔서 가신 님을 추모하고 그분의 삶과 정신을 기리는 여러분들이야말로 저로 하여금 다시 예수님을 생각해 보게 합니다. “과연 나는 목사로서 예수님이 여기에 누워계신다면, 매주 화요일 이곳에 찾아올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무덤이 없지만 나는 예수님을 이토록 지성스럽게 잘 섬기는가. 특히 저는 권노갑 고문님, 박지원 대표님 윤철상 전 의원님들로부터 신앙적이고 목회적인 도전을 받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희 교회 교인들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와 세계를 다니면서 가끔씩 여러분들을 거론하며 도전을 받자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 과 DJ대통령님은 저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에게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살아생전에 ‘예수님은 나의 형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가장 존경하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도 DJ대 통령께서 그토록 좋아하셨던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주인으로 섬기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남북 간의 진정한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고, 머지않아 피 흘림이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러한 말씀을 드린 후에 한미동맹 강화 안에서 남북평화와 통일의 꽃길이 열리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그 분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현 정부도 부디 한미동맹을 더 강화하면서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가지고 남북평화의 길을 지혜롭게 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와도 소통하며 함께 가면 더 좋겠습니다. 아니, 우리 모두는 살아서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4-14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고통의 극지에서 쓴 설교
    저는 시인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인 한 명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정호승 시인을 꼽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에는 예술적 시대혼이 담겨 있으면서도 대중과 소통하는 따뜻한 서정과 감성이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이야말로 이 시대 최고의 시인이요, 감성언어의 연금술사라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께 개인적인 강의를 한 번 듣고 싶었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에서 열린 토요 인문학 강좌 강사로 오셔서 특강을 하신 적이 있지만 그런 일반적인 강의가 아닌 그만이 갖고 있는 시 창작의 비기를 깊이 배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광현 목사님과 함께 그 분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맨 먼저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시를 쓸 때 제목부터 정하고 내용을 씁니까? 아니면 내용을 쓴 후 제목을 정합니까? 그리고 시를 쓸 때 정말로 아픔과 고통을 느낍니까?” 사실 저는 목회자이면서 시를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시를 쓰는 시간보다 말하는 시간이 더 많고 때로는 광장에서 수많은 군중 앞에서 사자후를 토하는 검투사형 웅변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선생님 같은 전문 시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삶이 너무 치열하고 바빠서 주로 비행기나 차에서 이동 중에 씁니다. 그러다 보니 시 쓰는 고통을 많이 느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랬더니 먼저 본인이 느끼는 시 쓰는 고통에 대해서 토로를 하는 것입니다. “시 창작의 지름길은 없습니다. 시의 스승은 자기 자신일 뿐이며 끊임없이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를 쓰는 것이야말로 고통입니다. 시작을 위한 메모 과정부터 그것을 시로 옮기고 다시 수정하고 또 수정하면서도 이 시가 과연 얼마나 독자의 심금을 울릴 것인가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그래서 저도 언제쯤 시 쓰기의 고통에서 해방될 것인가를 생각하며 끊임없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시집 한 권을 내기 위해서 1년을 품고 고치고 또 고칩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는 더 이상 고칠 수 없을 때 책을 냅니다. 목사님께서도 사람의 마음을 더 감동시키고 시의 꽃밭을 이뤄주기 위해서는 그만큼 고통의 극지를 경험하셔야합니다.” 그러면서 시에 관한 이론적인 강의가 아닌 본인의 실제적인 시 창작 기법을 자상하고 상세하게 설명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정말 뜻 깊은 강의였고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강의였습니다. 강의를 듣고 와서 출간을 준비 중이던 시집 원고를 보니 고칠 것이 제법 많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수정해 출판사에 최종 원고를 넘겼습니다. 탈고를 하고 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나는 시를 쓰기 위해 그 정도의 고통을 겪진 않지만 매주 설교 한 편, 한 편을 준비하면서는 얼마나 온몸의 진액을 짜는 고통을 느끼고 있는가.” 그래서 정호승 시인을 다시 만나게 되면 이렇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선생님만큼 시를 쓰기 위해 고통을 느끼지 않지만 설교 한 편을 쓰기 위해서는 정말 고통의 극지를 건너고 고독의 강을 건넙니다.”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자의 삶과 인격을 통과해서 전달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뛰어난 설교라 해도 설교자의 인격과 영성, 삶의 모습이 묻어있지 않으면 그 설교는 소리만 나는 꽹과리요 허공의 메아리가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매 번 똑같은 설교를 할 수도 없고 끊임없이 새로운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특별히 저는 우리 교회 목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생태계와 건강한 사회를 지키기 위한 다양한 공적 사역도 하기 때문에 다양한 주제와 현안에 대한 설교를 많이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 고통의 극지를 걷고 또 걸으며 설교를 준비합니다. 아마, 제 인생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설교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지난 주 수요저녁예배 때 서륜 목사님이 설교 중에 간증한 것처럼, 저는 미국을 가는 비행기나 호텔에서도 계속 설교 원고를 고치고 또 고쳤습니다. 제 설교가 방송과 인터넷으로 나가기 때문에 무슨 흠이나 책잡힐 것이 없는지 끊임없이 꼼꼼히 수정을 합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설교 준비를 마치고 나면 끝난 줄 알았는데 또 다시 다음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 고통의 극지가 기다리고 있고 고독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고통스럽고 고독한 설교자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가 우는 것처럼, 설교자도 고통의 극지를 걷지 않고 고독의 강을 건너지 않으면 성도들의 심령을 울리고 삶을 변화시키는 감동적인 설교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사람 발자국 하나 없고 풀 한 포기 없는 저만의 외로움과 고독의 극지를 찾아 걷고 있습니다. 그 고통의 산실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아픔이 담긴 말씀을 거룩한 언어의 퍼포먼스로 전달하기 위하여 설교 원고를 쓰고 또 쓰며 고치고 또 고칩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4-07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사막으로 간 꽃밭 여행자
    요즘 저는 남성 갱년기가 지났을 텐데도 자꾸만 마음이 여려지고 다치곤 합니다. 원래 저의 캐릭터는 맨땅에 헤딩을 할 정도로 강인한 의지와 불굴의 사나이라고 할 수 있지요. 어떤 시련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또 어떤 상황에서도 상처를 받지 않는 이미지를 풍기는 목회자였습니다. 물론 타고난 심성은 아주 여리고 부드러운 부분도 많이 있지요. 그러나 저의 젊은 시절은 강인함과 불굴의 의지 그 자체였지요. 그런데 나이가 먹으면서 여려지는 부분이 많고 눈물에 약한 면을 보이곤 합니다. 거기다가 제가 하는 일이 많고 활동 영역이 넓어지다 보니까 불필요한 오해와 비판도 받곤 하잖아요.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교회 조직도 커지고 제 활동 영역이 넓어지면서 더 그렇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앞서 일하신 조용기 목사님을 비롯해서 많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생각하면 더 애처로운 마음이 들고 울먹일 정도로 감사한마음이 듭니다. 최근 저는 어느 대학교 집회에 다녀왔는데 거기서도 정말 말도 되지 않는 오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일일이 해명할 수도 없고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쓴 ‘꽃밭 여행자’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황무지를 거닐며 꽃씨를 뿌릴 때 / 눈물이 바람에 씻겨 날아갔지 / 봄을 기다리는 겨울나무처럼 / 가슴에 봄을 품고 황야의 지평선을 바라보았어 / 잠시 꽃밭을 순례하고 싶어 / 벚꽃나무 아래서 하얀 꽃비를 맞으며 섰을 때 / 꽃잎은 나에게 보내어진 연서였음을 알았던 거야 / 바람에 한 점, 한 점 날리는 꽃잎을 두 손에 모아 / 젖은 눈동자로 바라볼 때 / 꽃잎들은 거울이 되어 내 얼굴을 비추어 주는데 / 꽃 거울에 비친 / 나의 시들어가는 고달픈 초상 / 꽃향기를 따라 날아가는 나비처럼/ 꽃잎들의 연서를 손에 쥐고 / 홀로 먼 길을 떠나온 외로운 꽃밭 여행자 / 어느새 해가 저물어 붉은 노을이 질 때 / 문득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진다 / 눈물은 이슬이 되고 / 이슬은 다시 꽃잎으로 피어나리니 /나도 하나의 꽃잎이 되어 그대의 창가로 날아가고 싶어 / 노을 물드는 꽃밭에 꽃잎으로 떨어지고 싶어.” 여기서 저의 시적 화자는 ‘황무지’를 꽃밭으로 가꾸어야 할 사명자의 이미지로 형상화했습니다. 즉, ‘꽃밭 여행자’는 목회자에 대한 시적 은유요 저의 시적 자아에 대한 이미지인 셈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사랑하는 한 목회자의 모습을 꽃을 사랑하는 꽃밭 여행자로 은유한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꽃잎을 저에게 보내진 연서로 은유화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적 화자는 꽃 거울에 비친 자신의 시들어가는 고달픈 초상을 바라보며 어느새 해가 저물어 붉은 노을이 질 때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꽃밭 여행자도 먼 길을 걸어왔기에 몸도 지치고 마음도 고달파 눈물이 쏟아지고 마는 겁니다. 꽃밭 여행이라고 해서 순탄만 하겠습니까? 꽃 가운데는 장미꽃도 있고 찔레꽃도 있고 아카시아꽃도 있을 수 있었기에 말입니다. 보기에는 화사하고 코에 향기는 진동할지라도 몸과 마음이 가시에 찔릴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꽃밭 여행자의 눈물은 이슬이 되고 이슬은 다시 꽃잎으로 피어날 것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먼 훗날 노을 물드는 꽃밭에 다시 꽃잎으로 떨어지기를 소망하고 있는 거지요. 꽃 뒤에 숨어 있는 영혼의 가시 때문에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다하더라도 다시 꽃잎으로 피어나고 그대의 창가로 날아가 다시 노을 물드는 꽃밭에 꽃잎으로 떨어지기를 소망한 것입니다. 제가 쓴 시이지만 이 시를 보고 또 봐도 마음이 애처롭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이 시로도 만족치 않아 ‘사막으로 간 꽃밭 여행자’라는 시를 썼습니다. “꽃밭을 여행했으면 사막으로 가라 / 사막을 다녀왔으면 다시 꽃밭으로 가라 / 꽃밭의 향기를 사막에 날리고 / 사막의 침묵을 꽃밭에 퍼뜨리라 / 꽃밭에는 사막의 별이 뜨고 / 사막에는 꽃밭의 꽃잎이 날리리니.” 이제 저의 시적 화자는 꽃밭을 여행한 자에게 사막으로 갈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막을 다녀왔으면 다시 꽃밭으로 가라고 권면하지요. 왜냐면 꽃밭의 향기를 사막에 날리고 사막의 침묵을 꽃밭에 퍼뜨리기 위해서죠. 꽃밭 여행자의 가슴 속에는 꽃밭과 사막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오해나 비판을 받을 때마다 이 시를 읽곤 합니다. 그래서 곧 출판될 시집의 제목도 ‘사막으로 간 꽃밭 여행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 특별히 우리 새에덴 성도들은 저와 함께 사막으로 간 꽃밭 여행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3-17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나의 전성기는 어떻게 올까?
    얼마 전 국회에서 ‘3 · 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포럼이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연세대 명예교수이신 김형석 교수님께서 ‘3 · 1정신의 현재적 의미와 우리의 과제’라는 발제를 하셨습니다. 김형석 교수, 그 분이 누구입니까? 그 분은 대학자 중의 대학자로서 70,80년대에 책을 내면 기본으로 70만, 80만부를 기록했던 분이었습니다. 이어령 교수는 인문학자로서 에세이스트라면 이 분은 철학자로서 에세이스트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분의 발제에 대한 논찬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발제 원고를 받고 보니까 대학자의 원고치고는 너무 수수하고 밋밋한 것 같았습니다. 물론 급하게 원고를 보내셨겠지 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원고를 바탕으로 해서 논찬 원고를 작성했고 부족한 부분을 첨가했습니다. 교수님에 대해서는 책과 말씀으로만 접했지 실제로 제가 뵌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포럼 현장에서 뵙고 인사를 드리니 교수님은 이미 TV를 통해서 저를 많이 대했고 제 설교를 많이 보셨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교수님께서 발제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원고와는 달리 정말 깊고 광범위한 내용으로 강연을 하시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100세나 되신 분이 그 깊은 내용을 한 마디도 버벅거리지 않으시고 일목요연하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3.1운동의 역사적 의미에서부터 정신,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사회적, 정치적인 상황들까지 말입니다. 순간 저는 논찬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냥 준비한 원고대로 하면 마네킹의 논찬 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그 분의 발제를 메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메모를 한다 하더라도 메모한 내용과 제가 준비한 원고를 어떻게 잘 연결해서 논찬을 할 것인가가 염려 되었습니다. 논찬이란 발제 내용을 정리하고 자신의 비평적 생각과 대안을 보충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그 분이 하신 말씀을 요약하고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연히 청중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지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어르신의 반응이 아닙니까? 다행히도 그 분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발제보다 논찬이 훨씬 더 훌륭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즉석에서 강연을 잘 요약할 뿐만 아니라 원고에 없는 내용까지 정리를 잘하고 부족한 부분을 잘 보충하셨습니까? 소목사님 말씀대로 선교사에 대한 부분을 좀 더 이야기 했어야 하고 한국교회의 역할을 좀 더 강조했으면 좋았을텐데 그 부분을 보완해주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 분이 가시는 길을 배웅해 드렸는데 100세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건강하게 걸어가실 수가 없었습니다. 배웅을 한 후, 그 분이 가신 뒷모습을 보는 동안 문득 ‘100년을 살아보니’라는 그 분의 저서가 생각났습니다. 그 분의 책을 보면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인생의 전성기가 60세에서 75세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65세에 연세대 교수를 은퇴하셨는데 오히려 그때부터 더 왕성한 활동을 하셨습니다. 물론 작년 한 해만 해도 160회의 강연을 할 정도로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시지만, 자신의 인생 가운데 가장 의욕적이고 활발하게 활동했던 인생 황금기가 60세에서 75세였다는 것이죠. 그분의 말씀대로라면 저는 이제 전성기를 준비하고 있는 때입니다. 저는 제 인생의 전성기를 40대로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40대에는 지칠 줄 모르는 패기와 열정이 있었고 건강도 뒷받침 해 주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지금은 일단 체력부터가 40대와는 다릅니다. 하지만 김형석 교수님은 육신의 건강만 팔팔하다고 해서 전성기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분을 뵙고나서 저는 다시금 인생의 클라이맥스로 가는 준비를 제대로 해야겠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그때를 향하여 체력을 비롯한 지적, 영적 능력, 기타 리더십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전성기가 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어떻게 전성기를 맞고 그 전성기를 보내느냐 일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 나의 전성기는 어떻게 올 것인가. 행여 잠깐의 전성기를 맞다가 날개 상한 새처럼 추락하게 된다면 차라리 전성기를 맞지 않는 게 더 낫겠지. 그렇게 추락할 바에는 차라리 클라이맥스를 향하여 오르지 않는 것이 나을 거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전성기를 미루면서 여전히 나를 단련시키고 계시는 거야. 최고의 전성기가 왔을 때도 추하게 추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국교회 연합과 공적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말이야. 그래서 어쩌면 올해도 봄부터 소쩍새가 다시 울겠지.” 그런 생각을 할 때 다시 가슴이 시리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는 저의 전성기를 생각하면 가슴이 콩닥거렸는데 지금은 이토록 가슴이 시린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3-10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사죄, 화해의 다리
    지난 주 수요일은 일본의 오야마 레이지 목사님을 비롯하여 17명의 일행이 우리교회에 직접 방문해 ‘한일 사죄와 화해 선교협력을 위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설교 말씀을 전한 오야마 레이지 목사님은 역사를 전공하신 분인데 29세에 QT를 하다가 일본이 우리 대한민국에 너무나 큰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런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과거에 한국에 행한 만행을 사죄하는 운동을 벌여야 한다. 그런데 진정한 사죄와 화해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가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마음으로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면 물질적인 배상도 해야 한다. 그렇게 진정성을 갖고 사죄하고 피해자가 그 사죄를 받고 용서 할 때 진정한 화해를 이룰 수 있다.” 그런데 당시 나이가 어린 29세 청년이 이런 운동을 하고 다니니까 일본에서 ‘또라이나 미친놈’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줄기차게 기독교적인 양심을 갖고 사죄 운동을 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제암리교회의 재건에 대한 사명을 느낀 것입니다. 일본은 제암리 주민들이 3.1운동을 했다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제암리교회로 불러다 놓고 문을 잠근 채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정말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암리라고 하는 곳은 원한과 통곡이 메아리친 동네입니다. 그래서 1년이 넘도록 부지런히 모금운동을 해서 천만 엔을 모았습니다. 그때 돈으로 천만 엔은 큰돈이죠. 그런데 그 돈을 가지고 제암리로 오니까 유족들이 난리인 것입니다. “왜 교회만 짓느냐, 그 돈을 우리에게도 주라” 오야마 레이지 목사님은 너무 마음이 찢어지고 아팠습니다. 다방에 4시간 동안 감금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상이 지은 죄를 생각하면 자기가 당한 수모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눈물로 용서를 구한 것입니다. 이듬해에 교회를 다 지었다 해서 왔더니 자기를 그렇게 미워하던 사람들이 감사하다고하고,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원수처럼 여겼던 여자도 화해를 하고 용서해 주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작년에는 그렇게 저를 반대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이렇게 저의 사죄를 받아주고 용서해 준단 말입니까” 생각해보니,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은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암리교회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매년 한국을 방문해 사죄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만 해도 몇 번을 방문해 사죄의 절을 하였고, 2010년과 2015년 8.15 평화기도회를 할 때도 수십만 명 앞에서 사죄를 구하고 용서를 빈 것입니다. 그러다가 올해 또 온 것입니다. 이 분들은 우리가 만족하고 한일 간의 진정한 화해와 용서가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초청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자기들 돈으로 온 것입니다. 그런데 92세나 되는 목사님이 처음에 설교를 할 때는 좀 딱딱했는데 나중에는 목이 메여가지고 갈수록 감동이 오는 것입니다. 저도 그 분의 설교를 들으면서 눈물을 참느라 혼났습니다. 막상 강단에서 일본인 사절단이 무릎을 꿇고 사죄의 절을 하는 모습을 볼 때 저도 울컥해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모든 게 교회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일본이 과거 한국에 저지른 만행은 역사의 비극이고 참상입니다. 우리 세대는 진정한 화해와 용서를 통해서 역사적 비극을 끝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사죄를 하는 것이 아무 흔적도 안 남을지도 모르지만, 여러분들이야 말로 현해탄에 화해의 다리를 놓는 사람들입니다. 저 바다위에 무작정 꽃씨를 뿌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을 통하여 현해탄에 화해의 다리가 놓아질 것이고 아름다운 평화의 꽃이 피어날 것입니다.” 한국교회 목사로서, 기독교인으로서 그 분들이 자진해서 와서 일본을 대표해 사죄의 절을 하니까 미안한 마음도 있고 고마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특별히 함께 온 요시다 목사님은 아베 총리에게 “역사의 잘못을 인정하고 한국에 사죄하는 것이 일본의 도리”라고 편지를 여러 차례 보냈다고 합니다. 행사가 끝나고 그 분들에게 선물을 하나씩 드리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자기들이 고맙다는 것입니다. “아무 교회에서나 이런 것을 받아 줍니까? 새에덴교회는 한미우호와 남북평화, 도이 선생님과 함께 한일 평화 사역까지 한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큰 교회에서 우리들의 사죄를 받아주시고 언론을 통해서 일본의 만행을 사죄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릴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그들이야말로 이 시대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진정한 덕을 보여준 사람들입니다. 식사를 하면서도 3.1운동 할 때 일본 경찰이 여인들을 성고문 하였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일어나서 머리 숙여 사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쌓이고 또 쌓여서 언젠가 화해의 다리가 완성되리라고 봅니다. 유럽에 EU가 생긴 것처럼 아시아에서도 한중일이 하나가 되어서 윤동주의 시에 나오는 간판 없는 거리와 같은 평화의 세상이 오리라고 믿습니다. 이런 화해와 평화의 사역이 우리 교회에서 있게 되어서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3-03
  • [소강석 목사의 목양칼럼] 21세기 자아를 깨워라
    교계 어느 신문사에서 저에게 인터뷰를 하는 중에 마지막 부분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요즘 왜 그렇게 한반도 평화를 강조하십니까? 옛날에는 보수 라인에 있었는데 지금은 진보라인으로 옮긴 것이 아닙니까?”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성경적인 진리나 기독교적인 가치를 지키는 데는 철저하게 보수적이지만 한반도 평화나 통일의 관점에서는 진보적인 성향도 없잖아 있지요. 한반도 평화나 통일에 대한 생각은 변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초지일관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김정은 위원장 안에 있는 두 자아를 설명 하였습니다. 제 분석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 안에는 두 개의 자아가 존재하고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고 시간 벌기를 하며 미국을 농락하려는 자아입니다. 어떻게든 대한민국을 적화시키고자 하는 야욕으로 가득한 자아가 존재하는 것이죠. 왜냐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3대에 걸쳐 세습을 해 왔으니 지독한 공산주의 사상이 무의식 속에까지 뿌리박혀 있을 수밖에요. 이러한 자아는 기독교를 증오하고 한국과 미국을 적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핵을 포기하는 척 하지만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 안에는 또 하나의 자아가 있습니다. 본능적으로는 핵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핵을 포기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고 고민하는 자아지요. 세계정세 흐름상 어떻게 더 이상 공포 정치나 철통 정치가 가능하겠습니까? 이대로 가다가는 아예 북한이 자멸할 수 있기 때문에 그도 어쩔 수 없이 미국과도 대화를 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핵을 포기하는 대신 북한의 체제를 보장 받고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한 국가의 지도자로 인정받으며 국제사회에 나와서 활동하고 싶은 욕구도 있을 것입니다.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 최진 박사는 전자를 ‘19세기의 자아’라고 표현하고 후자를 ‘21세기 자아’라고 표현합니다. 전자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내려오면서 태생적으로 공산주의 사상과 주체사상을 지니고 태어난 자아입니다. 그러나 그는 세계 최고의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복지가 잘 되어있는 선진국에 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가 어떠한 것인가를 후천적으로 경험한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는 21세기 자아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 극단적 우파사람들은 김정은 위원장 안에 있는 19세기의 자아만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경우에도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남한을 향한 적화야욕에만 급급할 것이기에 대화할 가치도 없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극단적인 좌파 사람들은 오로지 김정은 안에 있는 21세기 자아만 바라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그가 핵을 포기할 것이라고 확신을 합니다. 무조건 그를 믿으려고 하고 그의 대변인 역할만 하려고합니다. 우리 대한민국 안에도 이런 두 시각과 주장이 양립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가애국자라고 하면서 그것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키거나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는 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저는 김정은 위원장 안에 있는 두 자아를 동시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19세기의 자아에 대해서는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그 자아는 얼마든지 위장 평화 전술 전략을 행사할 수 있고 대남 도발과 적화야욕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분을 경계하고 대비해서 국방력을 더 튼튼하게 하고 어떤 경우에도 전방의 경계 태세를 이완시키거나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한미동맹을 강화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 안에 있는 21세기의 자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자아를 깨우고 각성시키고 설득해서 핵을 포기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남북정상회담도 더 많이 해야 하고 북미정상회담도 많이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국제사회의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서 개혁 개방을 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물론 김정은 위원장이 단번에 핵을 포기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군부도 설득하고 인민들도 설득을 해야 하기 때문에 단계적으로 포기하겠죠. 그럴때 단계적으로 대북 제재를 풀어주면 되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정부와 미국이 잘만하면 김정은 위원장 안에 있는 21세기의 자아를 잘 깨울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백악관에 갔을 때도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곧 있을 북미정상회담도 잘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국방력을 강화하고 한미동맹을 더 굳건히 하는 토대 위에서 말입니다. 그것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길이며 전쟁을 막고 복음적 평화통일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이죠.
    • 칼럼
    •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니즘
    2019-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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