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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4:8). 성경은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마13:35)라고 말합니다. 만물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감추어 있습니다. 그래서 잠25:2는 말합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살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살피고 찾는 일입니다. 코로나사태를 맞이하여 저 역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 찾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코로나 역시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마10:29), 하물며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온 코로나19사태가 그냥 우연히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지구 전체, 특별히 기독교인들에게 경고하는 말씀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껏 신앙의 자유가 있는 국가에서 이만큼 예배에 제한을 받은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예배의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하는 상황에 왔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저는 맨 먼저 우리와 같은 민족인 북한 주민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 국무부가 매년 지정하는 ‘종교자유특별우려국 명단’에 북한이 또다시 포함됐습니다. 북한은 2001년 이후 19년 연속 종교자유특별우려국으로 지정되고 있으며, 박해감시단체인 오픈도어즈가 매년 발표하는 박해국가순위에서도 19년 동안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을 믿는 그곳에서 기독교나 다른 종교는 일체 허락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순교를 당하거나 정치범 수용소에 들어가게 되며 그곳에서도 가장 혹독한 곳 가장 깊은 갱도에서 강제 노역을 당합니다. 우리의 제한 된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신앙의 자유가 없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조금이나마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북한주민들을 생각하라는 것임을 알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더욱 기도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보다는 사람을 가까이 하고 세상을 가까이 하지 않았나 생각해봐야 합니다. 물론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모임도 중요하지만 그 모임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보다는 사람을 사귀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나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사귐, 모임은 주님께 이르도록 하는데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몬:6). 취미나 흥미 위주가 된다면 육신이 자랄지언정 영혼은 유익을 보지 못합니다. 야곱에게는 열 두 아들과 딸 디나가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세겜에 머무를 때 디나가 그곳에서 추장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창34:1). 디나가 강간을 당한 것은 바울처럼 기도처를 찾기 위하여 가다가 당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는 곳을 찾기 위하여 간 것도 아닙니다. 그곳에서 또래 친구를 사귀러 나가다가 당한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을 찾기 위하여 간 것이 아니라, 기도처를 찾다가 여인들을 만나 전도하였고 그곳에서 루디아를 만났습니다(행16:11~15). 디나는 친구를 찾다가 세겜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했던 바울은 하나님을 만났을 뿐 아니라 전도대상의 여인들도 만나게 되었지만 친구를 찾으러 간 디나는 세겜에게 잡히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멀리하면 이처럼 사나운 환경을 만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을 받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떠난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탕자는 스스로 잘 살기 위하여 떠났다가 결국은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애굽은 떠나야 할 곳이지만 가나안은 가야 할 곳입니다. 세상은 멀리해야 할 곳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지향해야할 곳입니다. 버렸던 세상에 대하여 자꾸 애착을 가지면 다시 세상 신 마귀에게 잡히고 맙니다. 반면 주님께 소망을 두고 주님을 위하여 옛 사람을 버리고 떠난다면 필요한 모든 것을 주께 공급받습니다. 환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새 해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 곧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음성을 듣고 기도와 말씀에 착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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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3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성탄절의 선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2:11) 사람들은 흔히 생일에 선물하거나 축하 파티를 합니다. 생일 선물을 받는 주인공은 파티에 참석한 사람이 아니라 생일 당사자 입니다. 김씨 생일에는 김씨가 선물을 받습니다. 이씨의 생일에는 이씨가 받습니다. 간혹 다른 사람을 통하여 전할 수 있지만 종착점은 생일을 맞이한 그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탄 선물은 그렇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주인공인 예수님이 아니라 모두의 생일처럼 선물을 주고받고 싶어 합니다.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우리가 새겨야 할 것은 가장 먼저 예수님께 드려야 합당한 생일 선물이 되며 성탄절 의미와도 잘 부합됩니다. 성탄절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예수님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보다 자신들의 기분이나 내며 흥청망청 즐긴다면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오신 예수님의 정신과는(마1:21) 전혀 상관없는 성탄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은 예수님께 드릴 성탄 선물을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본을 보인 사람들은 동방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서 왕권의 상징인 황금과 신성의 상징인 유향, 십자가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몰약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연인들에게 준 것도 아닙니다. 친구에게 준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께 드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동방박사들이 생일의 주인공인 예수님께 드린 것처럼 성탄절은 예수님께 선물을 드려야 합니다. 롬12:1 이하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말합니다.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선물 가운데 하나는 신자들 자신입니다. 지금껏 우리 자신의 몸을 우리가 주관하고 살았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순간부터 자신의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자신의 뜻대로 마음대로 살아갈 권리를 상실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마음이 새로워집니다(롬12:2). 새로운 마음이라야 분별력이 새로워집니다. 신앙인들이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들과 분별이 같은 이유는 하나님께 몸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몸 드리는 사람은 구약시대 제물에 불이 내려와 하나님께 상달 되었던 것처럼 성령의 은사를 주셔서 새롭게 하십니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면 다소 시련은 있을지라도 평강의 길을 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목자로 삼고 살아가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시23:1). 구원함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하게 됩니다(사33:6). 신자들이 영원히 추구해야 할 길입니다. 이 성탄절에 신앙인들이 예수님께 드려야 할 선물은 무엇일까요? 시50:14는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선물 가운데 하나는 감사입니다. 사람들이 제 마음에 드는 일을 만나면 누구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에 안 드는 일을 만날 때 감사드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원망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환경이 좋을 때나 안 좋을 때나 하나님을 믿음으로 감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십니다. 제사는 상처가 있습니다. 피 흘림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마음에 상처가 있고 마음의 피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참 제사일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세 번째 선물은 이웃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예수님께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5:40).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는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눈에 소외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이 누구에게 선물을 받으려 할 것이 아니라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자녀는 부모님을, 형제는 형제를, 친구는 친구를, 직장인은 직장 동료를 예수님이라 생각하는 것 역시 예수님께 드리는 귀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 서로의 겉모습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고 서로를 귀히 여기는 복 된 성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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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2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신앙인들의 자유의지’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 가끔씩 신앙인들은 ‘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도록 그대로 두셨을까?’ 하는 의문을 품습니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대형 식당 운영진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과일을 어느 때 주는 것이 좋은가?”하는 문제였습니다. 식전에 주어야 한다는 사람이 있었고, 식후에 주어야 한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식전에 주어야 한다는 사람은 과일과 밥은 소화속도가 달라서 과일을 나중에 주면 위 속에서 밥 위에 있는 과일이 부패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반면 식후에 주어야 한다는 사람은 끓인 음식물은 소화효소가 파괴되기 때문에 식후에 생과일을 먹으면 과일에서 나오는 소화효소들이 소화를 돕는다는 것입니다. 과일이 먼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밥이 먼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다툴 때 한 종업원이 나서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식후에도 식전에도 주지 말고 식사 때 과일도 함께 보내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면 식전에 먹는 것이 편한 사람은 과일부터 먹을 것이고 식후에 먹는 것이 편하다면 식후에 먹을 것입니다.” 그러자 모두 그 의견에 찬성하였고 다시는 그런 문제로 의견충돌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슬하에 자녀가 없이 단칸방에 사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부부에게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추위에 약하지만 아내는 추위에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남편은 더위에 강하지만 아내는 더위에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금슬이 좋은 이 부부도 겨울이 되면 항상 온도가지고 티격태격하였습니다. 아내는 21도, 남편은 23도가 적당하다고 하며 서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방이라도 따로 있다면 난로나 선풍기로 서로 온도를 조절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도 못한 형편이었습니다. 이 날도 부부는 온도 때문에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원하는 23도로 하면 당신이 아무리 옷을 얇게 입는다고 해도 벗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21도는 체감할 수 없겠군요.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21도로 하고, 내가 옷을 두껍게 껴입는다면 나는 23도를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내가 양보하지요.” 그리하여 부부 사이에 온도 문제는 해결 되었습니다. 동서 냉전이 한참 진행되던 때에 K라는 나라(가상의 나라)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할 것인지 공산주의를 선택할 것인지 국회에서 격렬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한 의원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나라를 공산주의로 만든다면 공산주의 속에 자유가 말살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자유 민주주의를 선택하면 자유 안에 공산주의도 포함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공동체를 이루어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념적으로 공산주의를 택하는 순간 우리는 물질 취급을 받게 되고, 이념을 위하여 개인의 인격은 말살 될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의 말을 모두가 수긍하였고 그 나라는 지금까지 국가적으로 채택 된 자유민주주의 속에서 개개인이 모여 다양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이 세 예문에서 보시다시피 문제 해결의 가장 합리적인 길은 자유 의지를 누릴 수 있는 길에 있습니다. 식전이든 식후든 개인이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조절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온도상태, 개인의 의지에 따라 다양한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이념, 이 모든 것들의 핵심은 자유 의지입니다. 자유와 사상을 억압하는 이념이 있다면 그것은 그런 사람들끼리 따로 모여 살지언정 한 국가의 이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려고 할 때 그의 손을 마비시키지 않는 이유입니다. 지금도 신앙인들의 자유 의지는 법과 질서를 해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침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보혈로 우리를 사시고 죄와 마귀로부터 구원하여 주셨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든지 내 마음대로 살든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저의 자유 의지까지 주님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제 뜻대로 살면 마귀에게 사로잡힐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자신을 주님께 드리면 주님의 보호가 따를 뿐 아니라 심령에 평강과 진리의 자유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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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19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시 91편’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합니다. 거한다는 말은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새 사냥군의 올무가 있고, 극한 염병이 있고, 밤에 놀람이 있고, 낮에 흐르는 화살이 있고,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이 있을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곳이 있습니다. 천 사람이 내 곁에서, 만 사람이 내 우편에서 엎드러지지만 이 재앙이 내게 가까이 못하는 곳이 있습니다(7절). 그 은밀한 곳이 나의 피난처가 되고, 나의 요새가 되며, 나의 의뢰처가 됩니다(2절). 그 은밀한 곳은 어디입니까? 성전에는 성전 뜰이 있고, 거룩한 성소가 있고,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가 있습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은 지성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지성소 안에는 보통 사람들은 가까이 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일반 제사장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차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던 곳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있던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눅23:45). 아무나 가까이 할 수 없었던 지극히 거룩한 곳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개방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지성소 안에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있고, 언약궤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을 새긴 비석들이 있습니다(히9:4). 지성소 안에 들어가야 주님을 만날 수 있고, 더불어 깊은 교제를 할 수 있으며, 말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성전은 구약의 성전과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장소로서의 성전도 있지만 신앙인들 자신이 성전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주님을 믿는 성도들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성도들 자신이 성전입니다. 성전이 바깥 뜰과 성소와 지성소가 있듯이 오늘날 성전인 신자들도 바깥 뜰 부분과 성소 부분 지성소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과 혼과 몸이 있는데(살전5:23), 몸이 바깥 뜰이라면, 혼은 성소, 영은 지성소에 해당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육신의 정과 욕심을 따라 살아가거나, 혼 부분인 자신의 생각과 지혜를 따라 살아가지 아니하고 영을 따라 살아가는 것 곧 거듭난 착한 양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지성소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 착한 양심을 통하여 주님과 은밀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롬9:1, 고전9:1). 착한 양심이 지존자의 은밀한 곳이며, 거기서 나오는 세미한 음성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분 감정을 따라, 생각을 따라 살아간다면 결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신앙인들의 양심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양심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양심은 보통 양심입니다. 경우 가르는 양심, 도덕적인 수준의 양심이지만 신앙인들의 양심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고요하고 안정 된 심령 가운데 감지할 수 있는 감각입니다. 신앙인들이 자신의 영 부분인 지성소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매일 깊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깊은 기도 없이는 주님의 음성, 주님의 느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대제사장은 일 년 한 차례 지성소에 들어갔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매일 매시 원하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도록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장막을 찢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이전 대제사장도 못 누렸던 특권을 매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15절에는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매일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가 간구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응답하실 뿐만 아니라 영화롭게 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영화는 하나님의 영화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화는 사람의 차원과 다른 영화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본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행7:2~4). 영광의 하나님을 본 바울은 그가 과거에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빌3:7~9). 버린다는 것은 관심을 갖거나 집착하지 아니하고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믿고 맡겨 버린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버릴 능력이 생깁니다. 명예 영광 허영심을 버릴 능력이 생깁니다. 하나님 한 분 영화롭게 할 마음이 생깁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보호해주십니다. 시27:5는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시기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은밀한 곳은 초막속입니다. 초막을 장막으로도 말하고 있습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하면서 초막 생활을 했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초막은 주님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고 고난 받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검소하고 겸손한 생활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부르면 당장 떠나야 할 이 세상에 영원히 살 것처럼 쌓아두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것이 초막 생활입니다. 그곳이 바로 지존자의 은밀한 곳입니다. 전자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코로나보다 무서운 것은 영적인 코로나입니다. 보이는 코로나가 신앙생활을 멀어지게 한다면 우린 심각한 영적 코로나에 전염 된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방역을 철저히 하되 지존자의 은밀한 곳, 착한 양심을 따라 살아가며, 기도에 더욱 힘쓰며, 하나님 앞에 철저히 낮추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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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14
  • [WAIC 설교] 권희자 목사의 ‘참된 부흥’(행 2:43~47)
    사도행전 2장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한 초대교회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르매 12사도들과 모든 믿는 자들이 한 곳에 약 120명쯤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이라는 곳에 함께 모여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이 이르러 그들 가운데 놀라운 성령 강림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집에 가득하였습니다. 강력한 성령 강림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 나라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순절에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살다 모여든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사는 각 나라 말로 하나님의 큰일을 듣게 되니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웠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술 취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무리들을 향해 때가 제 삼시인데 무슨 술 취하겠느냐고 이것은 선지자 요엘이 예언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말세에 부어 주시기로 한 성령이 부어진 역사임을 증거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들을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사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37절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양심의 찔림을 받고 사도들에게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물었습니다. 38절에 보면 베드로는 이런 그들에게 너희가 각각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제자의 수가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로 말미암아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많은 자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떡을 떼며 기도하기에 전혀 힘썼습니다.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먼저 43절에 보면 사도들로 인해 많은 기사와 표적이 나타남으로 인해 사람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놀라운 삶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44-47절을 보면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성전에 모여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기에 힘썼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힘썼습니다. 또한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교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성령 강림으로 성령 충만함을 덧입게 되었을 때 이런 삶의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삶의 변화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구원 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부흥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부흥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역사입니다. 진정한 부흥은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경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을 뜻을 좇아 행하게 됩니다. 둘째, 진정한 부흥이란 삶의 변화입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이것은 삶의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진정한 부흥이란 이처럼 삶의 변화입니다. 교회가 숫자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부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방언을 하고 능력을 행하지 않으면 부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교회로 채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실제 삶의 변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방언을 하고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고 전도를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불신자와 다를 바 없이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불법을 행합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미워하고 정욕을 좇아 행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부흥은 큰 교회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을 하고 능력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실제 삶이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셋째, 진정한 부흥이란 예배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하나님을 찬미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과 존귀를 돌려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과 존귀를 돌려 드리는 것은 우리 인생이 창조된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미하며 예배가 회복되는 것이 진정한 부흥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성령 충만함을 덧입게 되었을 때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회개하며, 삶이 변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친교가 회복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예배가 회복되었습니다. 이처럼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을 때 불신자들이 이런 변화된 제자들의 삶을 보고 칭송하였습니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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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6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이 분하여”(행17:16). 아덴은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를 말합니다. 그곳은 신전이 많은 곳입니다. 희랍신하에 등장하는 신들로 가득하였으며 그 외에도 셀 수 없는 각종 신들과 우상을 위한 신상들이 거리, 광장, 마을마다 널려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문화니, 문명이니 하며 감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바울은 달랐습니다. 속에 의분이 솟구쳤습니다. 성경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고 하나님께서 탄식하시는 것을 탄식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하나님의 심정으로 책망할 수 있고, 긍휼히 여길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25장에 보면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술사 발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자, 거금을 주고 그를 초청한 모압왕 발락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지 이스라엘이 망하는 법을 발락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음행이었습니다. 모압왕은 발람의 말을 그대로 따랐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민25:1~3). 하나님의 진노로 염병이 시작되었고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습니다. 염병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이스라엘 한 족장이 모세와 온 이스라엘 회중의 목전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자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에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자 염병이 그쳤습니다. 백신으로 전염병이 그친 것이 아니라 죄를 처리하니까 전염병이 그친 것입니다(민25:6~9).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민25:12~13)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질투하였다는 것은 사람의 더러운 속성의 질투가 아니라, 부모가 타락한 자녀를 대할 때 안타까워하고, 탄식하는 마음과 같습니다. 이처럼 비느하스 정신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비느하스 후손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열왕기상 12장에는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이스라엘 열 지파를 다스리게 된 여로보암이, 다윗의 행함같이 하나님의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집을 세워주시겠다는 약속(왕상11:37~38)을 끝까지 의지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제사 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다가 마음이 돌아서서 유다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갈까 두려워 벧엘과 단에 각각 금송아지를 두었습니다. 그의 잘못으로 인하여 선지자의 강한 책망을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까운 곳 벧엘에 늙은 선지자가 있는데도 그 선지자를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멀리 유다 땅에 있는 선지자를 북왕국 이스라엘에까지 오게 하여 여로보암을 책망하게 합니다(왕상13:1~3). 그 이유는 벧엘에 사는 선지자의 심상한 마음 때문입니다. 금송아지를 보고도 그는 전혀 분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반면 멀리 유다에 있는 선지자는 이스라엘에 두 금송아지를 세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이 탔습니다. 바울처럼 분이 일어나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상에 대하여 분이 가득한 유다의 선지자를 쓰신 것입니다. 겔9:4는“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라고 말합니다. 성읍 중에 모든 가증한 일을 보고 탄식하며 우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가증한 문화에, 풍조에 동요되어 같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과 함께 가는 그런 사람을 쓰실까요? 결코 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쓰임 받는 것은 결코 숫자로 입증되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 땅에 일어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울며 전하는 사람은 듣는 수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하고 다윗을 쓰신 것도 하나님의 마음과 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13:21~22). 그가 골리앗을 죽인 이유 역시 하나님의 백성을 모욕한 것에 대한 분노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쓰신 이유도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 지금도 하나님께서 찾아 쓰시는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은 탄식하며 우는 마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빌1:8).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 역시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자칫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는 조선 땅에 복음을 전했던 수많은 선교사들이, 영혼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었다면 결코 행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보고, 하나님이 느끼는 것처럼 느끼는 사람을 쓰십니다. 그 마음은 탄식과 긍휼과 사랑과 겸손(빌2:5~11) 등이 포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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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IC 칼럼
    2020-12-05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은총’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삼하9:1).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블레셋을 이스라엘에서 완전히 쫓아내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모셔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변 여러 나라들을 복속시키고, 공과 의를 행함으로 적당한 사람을 적당한 장소에 배치시키는 행정조직을 완비하게 되었습니다(삼하9:15이하). 그러자 그동안 미루었던 일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사울의 아들이자, 목숨처럼 다윗을 사랑해준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너는 나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 나로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버리지 말라. 하고”(삼상18:14~15). 비록 요나단은 전쟁 중에 죽었지만 그 후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있느냐?”하고 물은 것입니다. 요나단을 인하여 은총을 베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월요일 70대 후반인 한 성도로부터 간증을 듣게 되었습니다. 감사주일 아침 예배당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갑자기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했습니다. 그런데 몸이 바닥에 부딪히기 바로 직전 갑자기 누군가 그분의 몸을 껴안고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인지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분명히 일으켰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분의 입에서 감사가 터져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의 도움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 성도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 세상에 대한 집착이 쓸모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 한 분이 나와 함께 계시는 이상,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분은 평소에도 구제와 성도 섬기는 일을 잘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타내주시니 영광의 하나님을 본 아브라함처럼 버릴 권세가 생긴 것입니다. 다윗이 요나단을 인하여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인하여 그 자매를 보호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면 다윗이 요나단에게 베푼 은총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시바가 왕께 고하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절뚝발이니이다.”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 마음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며, 자신은 전달자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은총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조부 사울의 밭을 므비보셋에게 다 줄 뿐만 아니라(7절), 그가 장애인임을 들어 경작할 종들까지 주겠다는 말이었습니다(9~10절). 왕조가 바뀌면 이전 왕조는 멸문지화를 당하기 쉽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고려라고 하겠습니다. 고려 왕조가 무너지자 후환이 두려운 이성계는 직접 나서지 않고 정도전을 통하여 이전 왕족들을 없애는데 바빴습니다. 강화도나 거제도에 모여 살도록 하겠다고 하면서 그들을 불러 모아 배에 구멍을 뚫어 놓고 중간쯤 가다가 침몰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남아있는 왕씨들은 숨어 지내거나 옥씨나 전씨처럼 한자 획을 더하여서 성을 바꿔 지내기도 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면 사울 후손들을 남겨두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불씨가 남아있다면 언제든지 복귀운동을 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었고 또한 요나단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재산을 몰수하지 않고 그대로 므비보셋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것이 큰 은총이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베푼 하나님의 은총은 므비보셋으로 하여금 항상 그의 상에서 식사를 함께 하도록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므비보셋을 자신의 친 아들처럼 귀히 여기겠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에 감동된 사람입니다. 다윗은 악기를 잘 다루는 사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은총입니다. 행3:1 이하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이를 일어서게 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는 돈을 바랐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 때 앉은뱅이에게 돈 만원을 전해주었다면 좋아하고 인사를 꾸벅하였을지 모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이라고 말했을 때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가장 좋은 것을 앉은뱅이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은과 금을 그에게 주었다면 결코 일어서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를 서게 만들었습니다. 다시는 구걸하지 않고도 스스로 일하여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은총 중에 가장 큰 은총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성도들이 자손들에게 물려줄 가장 중요한 은총은 집이 아닙니다. 돈이 아닙니다. 차도 아닙니다.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이 앉은뱅이를 걷게 하신 것처럼 그 이름이 살아가게도 하고, 되게도 하고, 필요한 것만큼 건강하게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유산으로 물려줄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현실에서는 집을 장만하여 주는 것이 가장 큰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많은 유산을 물려준들 자녀가 하나님을 모른다면 그야말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성도 개개인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가장 소중한 기업이고 또 자손들에게 물려줄 유산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자녀를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기르는데 힘을 써야 합니다. 주일학교 시절에는 비교적 잘 출석하던 학생들이 대학에만 가면 출석률이 저조해집니다. 그만큼 자아가 자라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자녀가 자원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도록 부모는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갈4:19). 가장 중요한 교훈은 본입니다. 부모님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데 자녀가 그렇게 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이 힘을 써야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고 부모의 마음과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셔서 사랑하게 해주십니다(신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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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9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12:30).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는 서유럽의 카톨릭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하여 8회에 걸쳐 원정을 감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의 명칭은 십자군 전쟁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들의 명목은 성지 회복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유익을 위하여 참여하였던 것입니다. 곧 봉건영주와 하급기사들은 새로운 영토 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를 걸고 싸운다고 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대적하고 미워하고 핍박하는 자들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하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예수님을 위하여 모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온갖 일을 한다고 해도 그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 하실 수 없다면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이요, 예수님께로 오는 사람들을 흩어버리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암3:3은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말씀은 뜻이 예수님과 일치함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나 행위가 아니라, 그 일에서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지 그렇지 못하는지에 있으며, 많이 모으거나 적거나가 아니라 그 모임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하시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있습니다. 천사의 말을 하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고 구제하여 자신의 것들을 내어줄지라도 그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하실 수 없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온통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 되느냐.’에 두어야 합니다. 엘리가 제사장으로 있던 시대에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하기 시작하자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진으로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승리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패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 중에 죽었고 언약궤를 빼앗겼던 소식을 들었던 엘리는 충격으로 의자에서 넘어져 죽고 말았습니다(삼상4).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통하여 승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지만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을 통하여 엘리 집안에 대하여 선고한 심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삼상3:13-14). 엘리가 하나님보다 그의 아들들을 더 사랑한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죄악을 고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언약궤를 모신다고해도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 됩니까? 요8:29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뜻이 없습니다. 스스로 가지 않습니다. 주님의 보냄을 받아, 주님의 지시를 받아 행동합니다. 예수님께서 서울로 가라고 하시면 서울로 가고, 예수님께서 대전으로 가라고 하시면 대전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살아가면 먹고 입고 쓸 것을 일절 공급 받습니다. 부모님이 자녀에게 심부름을 보낼 때 여비와 쓸 것을 마련하여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3:34).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살아가면 성령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살아가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은사를 주시므로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 스스로 하면 모든 것을 자신 스스로 공급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또 거듭나게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결코 생명을 넣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살아가려고 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 뿐 아니라 직장 또한 주님이 보내시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지도 않았는데 가는 사람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다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렘23:21-22).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이 보내지 않았어도 달음질한다고 나옵니다. 열심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 행합니다. 자신의 양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감각을 살핍니다. 성령이 기뻐하시는지 아니면 싫어하시는지를 살핍니다. 이런 사람은 혹 영적인 지각이 부족해서 잘 못 된 길을 갈지라도 하나님께서 돌이키게 하십니다. 하지만 성령의 느낌을 전혀 헤아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계획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 대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라고 하실 때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마3:17)와, 변화산상에서 십자가를 지시기로 작정하셨을 때와(마17:5), 비록 아들이시지만 종과 같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때였습니다(사42:1).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난의 자취를 따라오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 고난의 자취는 자기를 낮추는 자, 십자가 지는 자, 순종하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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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IC 칼럼
    2020-11-21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감사의 종류와 신앙의 수준’ (눅 17:11~19)
    누가복음 17장 11절 이하에는 나병 환자 열 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한 촌에서 예수님을 만나 자신들을 긍휼히 여겨달라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들을 보신 예수님은 제사장들에게 가서 그들의 몸을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깨끗하게 해주시고, 나병환자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그들은 아무런 이유를 달지 않고 떠났습니다. 가다가 모두는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와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개 취급하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17절) 열 사람 가운데 자신들은 선민이며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했던 9 명의 유대인들은 아무도 감사하지 않았으나 그들이 개 취급했던 사마리아인은 한 명 뿐이었는데 감사한 것입니다. 9명은 믿음은 있었지만 감사는 없었습니다. 감사를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사람에 따라 세 가지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나병에서 건짐 받은 9명의 유대인들처럼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들 생각에는 ‘정말 그럴 수 있을까?’하지만 우리도 그 안에 포함되는지도 모릅니다. 이웃 간에는 작은 친절도 감사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이나 부모님의 사랑에는 당연한 것으로 알고 감사하지 못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나를 구속해 주신 주님의 사랑,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사랑, 이를 깨닫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며, 부모님께 효도하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많은 사람이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도 ‘우리 부모님께서도 나를 이렇게 사랑하였겠구나.’라고 생각을 못 합니다. 그래서 보답할 마음을 쓰지 못 합니다. 감사의 또 하나는 보이는 감사입니다. 자신 보기에 잘 된 일, 자신의 뜻에 맞는 일에는 감사할 수 있지만 자신의 뜻에 맞지 않을 때는 바로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단 감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감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 비하여 한 단계 올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요나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다시스, 지금의 스페인 쪽으로 떠납니다. 그로 인하여 바다에 심한 풍랑이 임하고 결국 요나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그를 바다에 던집니다. 그러자 풍랑은 멈추게 됩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죽게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고래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만듭니다. 죽을 줄 알았던 요나는 고래 뱃속에서 삼일 밤낮 지내며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욘2:9). 고래는 요나를 육지에 토해 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니느웨로 가서 “사십일이 지나면 이 성이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외칩니다. 그의 외침을 들었던 니느웨 사람들은 금식을 선포하고, 왕을 포함하여 남녀노소가 회개하게 됩니다. 애초에 니느웨 전도에 대한 반감이 컸던 요나는 그것이 싫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소리를 듣지 않고 그대로 망하기를 원했는데 모두가 회개하여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노하여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 달라고 떼씁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고 금새 원망 불평을 쏟아내고 맙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적이거나 육신적인 사람은 자신의 뜻대로 될 때는 감사하지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원망 불평을 쏟고 맙니다. 세 번째 감사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믿음으로 하는 감사입니다. 욥이 자녀와 자신의 전 재산을 모두 잃었을 때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0-21).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신앙의 정도를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없지만 감사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은혜에도 감사를 모르는 사람,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일에만 감사할 줄 아는 사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음에도, 불행처럼 보이는 일에도 믿음으로 감사할 수 있는 사람 신앙 수준이 다릅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중심으로 감사를 잃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높은 경지에 이른 신앙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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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IC 칼럼
    2020-11-1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드러난다. 모두’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눅12:2~3).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에 주의를 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아무리 외식을 해도 속에 있는 것이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말씀입니다.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약 육 개월 전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려고 나서는데 교회가 포함되어있는 건물 뒤, 아파트 부속 어린이 놀이터에서 몇 몇 학생이 저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아저씨 혹시 축구공 보셨나요? 방금 전 저희들이 축구하다가 공이 그곳으로 넘어간 것 같은데 좀처럼 보이지 않아요.” 전 주차장을 두리번거리며 둘러본 후 “없는데? 정확하게 어디쯤이야?” 하고 되물었습니다. “그곳이요.” 하면서 정원 쪽을 가리켰습니다. 그러더니 한 학생이 담을 훌쩍 뛰어 넘었습니다. 그리고는 주변을 살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축구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담을 넘은 학생에게 주의를 주고 집으로 갔습니다. 지난 번 비가 많이 내리면서 건물 맨 아래층 창고에 빗물이 줄줄 세었습니다. 업자를 불러 그동안 정원처럼 사용했던 공간의 초목들을 파내고, 흙을 퍼내고 방수 작업을 하였습니다. 다 완료된 후 전 그곳에 들어와 주변을 살폈습니다. 살피다가 어느 한 곳에 눈이 꽂혔습니다. 뾰족한 쇠로 된 울타리와 놀이터 구조물 사이에 축구공이 끼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마음먹고 숨기려고 해도 힘든 그곳으로 공은 날아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감춰진 것은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때가 되면 반드시 알려지게 됩니다. 사람이 이 사실을 믿는다면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기 치거나 횡령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 자주 들려오는 소식들 곧 라임, 옵티머스나 성추행 사건들이 그것을 말합니다. 엡5:12은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우리 조상들은 호연지기를 이루기 위하여 신독 곧 혼자 있을 때에 더욱 삼갔습니다. 그래야 지극히 크고 넓은 마음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감찰하시고 사탄도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 6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아니하고 여리고 큰 성을 점령합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만 함께 계시면 어떤 대적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기충천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라는 작은 성쯤이야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싸움에는 만 명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삼 천 명이면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지없이 패하고 맙니다. 그 싸움에서 36명이 죽임을 당합니다. 최고 사령관 여호수아는 장군들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줄줄이 책임을 따지며 문책인사를 단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한 것은 하루 종일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드린 것뿐입니다. 그러자 해저물녘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하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수7:10~12). 도적하고 사기한 자를 제비 뽑은 결과 아간이 뽑혔습니다(7:18). 아간은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무게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그의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감쪽같이 숨겼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온 천하에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은밀한 일은 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행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선행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6:3!4). 선행도 반드시 드러납니다. 은밀한 중에 계시는 아버지가 갚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드러나기보다 하나님 나라에서 드러나기를 바라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갚음 받는 선은 일시적이지만, 하나님께 받는 선에 대한 상급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남의 은밀한 일에 대한 것입니다.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또 수욕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잠25:9~10). 상대방과 변론하다가 불리해지거나 일방적으로 몰리게 될 때 그들의 과거를 들춰냄으로 복수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종종 그렇게 하는 사람을 보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그 자신과 그에게 속한 사람들이 비슷한 일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참으로 두렵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은밀한 일에 대하여 세 가지 예를 들어 말씀 드렸습니다. 첫째는 은밀한 죄, 두 번째는 은밀한 선행, 세 번째는 남의 은밀한 죄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은밀한 것들은 반드시 드러난다는 것을 깨닫고 죄일 경우 참회로써 주님의 긍휼하심을 힘입어 사하심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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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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