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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IC 데일리 기도] 김호연 목사의 ‘국가와 민족의 치유 회복을 위한 기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오늘날 우리가 전대미문의 코로나를 경험하면서 이 가운데 주의 음성을 듣게 하심을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주께서 역사를 휘저으시고 일대 변화를 일으켜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코로나가 일상이 되는 새로운 시대, 개인화와 단절이 더욱 극단화될 미래를 생각할 때, 우리는 연결하고 하나 되어 상생하는 천국 공동체를 세워 나가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예배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정부는 하루가 멀다 하고 교회가 마치 코로나 확산의 주범인 것처럼 몰아가고 언론도 여기에 같이 춤을 춥니다. 대통령은 정부가 예배를 멈출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방역은 과학의 영역이고 신앙은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합니다. 마치 랍사게가 히스기야 왕 앞에서 하나님을 모독한 것처럼(왕하 18, 사 36), 대통령조차 서슴없이 교회를 힐난하고 하나님은 세상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평안을 줄뿐 코로나로부터 생명을 구할 능력은 없는 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매일 저녁이면 새벽이 맞게 흥청대며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클럽이며 술집이며 불야성을 이루던 저들이 이제는 교회 때문에 못살겠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코로나를 극복할 수 있으니 하나님은 이쯤에서 멈추어 달라고 합니다. 주여, 저들의 참람함을 보옵소서. 저들의 무지와 오만을 깨닫게 하시고 이 깊은 “인간의 질병”에서 구원하여 주옵소서. 예배를 목숨처럼 지키게 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주의 능력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이러한 가운데 일부 국회의원들은 여전히 동성애를 조장하는 차별금지법을 발의했다고 합니다. 주께서 죄라 하신 그것을 성적 “소수자”를 자칭하며, “피해자”로 포장하고, “인권”을 등에 업어 자신들의 죄악을 정당화하려는 이 사악하고 어리석은 시도를 멈추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이것은 오히려 인권을 유린하고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참혹한 죄악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후대에 안전하고 복된 나라를 물려주기를 소망합니다. 주여, 이 나라, 이 민족이 세계에 본이 되어 저들에게 하나님의 참 뜻을 전하여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나라와 민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말씀하시는 주님,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도록 날마다 새 힘과 능력을 부어 주시고 마침내 주의 나라와 뜻이 이루어지는 주의 역사를 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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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4
  • [의사의 설교] 한재혁 목사의 ‘염려가 없어야 병이 낫는다’(마 6:24-34)
    “그러므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심기혈정(心氣血精)’이란 원리가 있습니다. 마음(心)에서 에너지(氣)가 나오고 생명력(血)의 변화를 일으키면 결국 물질(精)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몸과 마음은 분리된 것이 아닌 연속적인 하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결국 몸에 생기는 질병의 최초 원인은 마음이며 그 중에서도 마음의 걱정이나 염려가 상당부분을 차지합니다. 성경에는 아래와 같이 나옵니다. 마음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합니다.(잠언 17:22) 이 말씀은 마음(心)에서 시작된 근심이 결국 기와 혈을 거쳐 물질(精)의 세계에서 뼈를 마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 6:25)” 그런데 우리들은 왜 목숨과 몸을 위해서 계속 근심과 염려를 하는 걸까요? 바로 앞 구절에 답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돈을 사랑할 수는 없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한자든 부자든 일단 돈에 마음을 주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근심의 노예가 되어 근심이 떠나가질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병의 근원인 근심과 염려가 떠나가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돈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마 6:33) 주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보다 나은 아이디어를 제시하는데. 바로 완벽하게 통제하려는 생각을 그만두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다스릴 수 없지만 하나님께 맡길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풍부하고 수가 많으십니다. “너희는 내 나라를 걱정해라. 내가 너희들을 걱정하겠다. 내가 너희들을 걱정하면 너희는 염려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둘째로, 염려에 대한 가장 확실한 치료약은 믿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고, 염려의 시작은 믿음의 끝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편 23:4) 두려운 환경에서 두려움 없이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환경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대개의 경우 하나님은 우리가 처한 환경을 바꾸어 주시지 않고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키십니다. 가끔 우리가 가는 길을 막고 있는 산을 옮겨주시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 산을 넘어갈 수 있는 힘을 더하여 주십니다. 셋째로, 하루의 일을 내 능력껏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 됩니다. 내일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오늘 행복의 씨앗을 뿌리십시오. 내일 비참해지기를 원한다면 오늘 염려에 빠지십시오. 염려 자체는 피할 수 없지만 염려에 빠지고 갇히는 것은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우리가 할 일은 희미한 내일 일을 걱정할 게 아니라 눈앞에 확실하게 있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오늘도 못살면서 내일을 염려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Horatiu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자만이 행복하리라. 오늘을 내 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만이 행복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병이 낫고 건강해지기를 원하십니까? 만병의 근원인 근심과 염려가 사라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담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고 주어진 하루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고, 강하고 담대하며 건강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한마음사랑교회는 성경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고 배우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힐링센터이기도 합니다. 한재혁 목사는 연세대 의대 출신의 의사로 연세바른의원과 소아청소년 상담센터를 운영하며, 자연 치유 교육과 NLP 심리 코칭 교육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복음을 전하면서 육신의 치유를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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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빠른 다리 때문에’
    “그곳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아사헬의 발은 들노루 같이 빠르더라.”(삼하2:18). 성경에는 신체적인 특징에 대하여 종종 나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신체적인 장점 때문에 유익보다는 오히려 고난을 당하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더러 있습니다. 많은 경우 신체적인 장점이 나올 때는 자신에게나 혹 그와 관련된 사람에게 험난한 일을 예고하는 복선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일을 볼 때 자신의 장점이나 달란트 관리를 잘 못할 때 차라리 단점 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속의 아사헬의 다리는 들노루처럼 빠르다고 했습니다. 마라톤 대회만 있으면 이 사람은 싹쓸이 할 만큼 빨랐던 모양입니다. 그는 빠른 다리를 의지하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신하 중 최고의 용사인 아브넬을 추격하였습니다. 아브넬은 이미 그가 이스라엘을 다윗에게 넘겨줄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싸움에 잔뼈가 굵은 그가 젊지만 경험이 적은 요압의 아우 아사헬을 죽인다면, 요압에게 원수가 될 것을 알고 그를 쫓던 아사헬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하지만 큰 공을 세우려는 욕심이 앞선 아사헬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아브넬을 추격하다 아브넬이 뒤로 내민 창 끝에 찔려 죽고 말았습니다. 아사헬이 조금만 늦었다면 아브넬을 추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5분 빨리 달렸던 그는 50여 년 빨리 가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빠른 다리를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 역시 외모적으로 걸출한 사람이었습니다. 삼하14:25 이하에는 “온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저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그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 머리털을 깎을 때에 달아 본즉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 이었더라.”(왕실 세겔로 계산하면 4.56kg이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외모를 등에 업고 이스라엘 인심을 도둑질한 압살롬은 마침내 아버지를 반역하고 맙니다. 그의 반역에 동참한 사람 가운데는 뛰어난 모략가 아히도벨도 있었습니다. 아히도벨은 일만 이천의 용사를 주면 자신이 직접 이끌고 지쳐있는 다윗을 공격하겠다고 말했습니다(삼하17:1). 반면에 아히도벨의 모략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왔던 후새는 압살롬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모두 모은 후 직접 전쟁에 나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러자 거기 모인 백성들이 모두 후새의 모략이 아히도벨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압살롬 역시 온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진격하는 것에 훨씬 매력을 느꼈을 것입니다. 마침내 그 날이 왔습니다. 그들의 욕망과는 달리 압살롬의 군사는 점점 다윗의 용사에게 쫓기는 형세가 되었습니다. 압살롬이 탄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나갈 때 그의 머리카락이 상수리나무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공중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 나가 그야말로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였습니다. 이에 요압이 다가가 그의 심장을 찌르고 맙니다(삼하18:14). 그토록 자신이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머리카락 때문에 죽고 맙니다. 왕상1:3 이하는 “이스라엘 사방 경내에 아리따운 동녀를 구하다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이 동녀는 심히 아리따운 자라 저가 왕을 봉양하며 수종하였느나 왕이 더불어 동침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나옵니다. 아비삭을 데려왔다고만 하여도 되는데 “심히 아리따운 자라.”라고 강조합니다. 신체적으로 특별히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후에 있을 일이 예고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다윗의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 여인과 동침하지 아니하고 정결을 지켰습니다. 그 사실을 아도니아가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이미 스스로 왕이 되려 했던 아도니아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참회하며 죄를 짓지 않고 선한 사람이 되었어야 하는데 그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밧세바를 충동시켜 자신을 위하여 솔로몬 왕에게 아비삭을 요구하도록 것입니다. 아도니아가 이 여인에게 홀딱 반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 다윗의 여인을 구한 것은 패륜이며 부도덕한 행동이었기에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삼손은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제대로 관리 못하고 들릴라에게 실토한 나머지 블레셋 사람들에 의하여 눈이 뽑히고 구경거리가 되고 맙니다(삿16:25-27). 사라는 자신의 뛰어난 외모 때문에 한 때 아브라함 곁에서 애굽 왕에게 팔려가는 일을 당합니다. 이처럼 달란트나 외모는 그것을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사용하면 참으로 유익하지만, 조심하고 관리하지 못하면 그것 때문에 곤욕을 치르거나, 심지어는 죽음을 맛보게 됩니다. 레26:26 이하는 “내가 너희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의뢰하는 양식을 끊습니다. 바울이 자기를 의뢰하므로 아시아에서 심한 고생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로 알게 하셨습니다(고후1:8). 높고 견고한 성벽을 의뢰하면 그 성을 허십니다(신28:52). 칼을 의지하면 칼로 망합니다(마26:52). 신앙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나 장점들이 모두 있습니다. 그것으로 겸손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으면 교만하여 영혼이 멸망의 길을 가게 됩니다. 있을수록 더욱 겸손하여 자신은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눅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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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3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예수님께 미친 사람’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3~15). 지금은 학생 수가 적어 폐교 직전까지 놓여 있다고 들었지만, 저의 초등학교 시절 교실은 한 반에 50명이 넘는 콩나물 교실이었습니다. 제가 다녔던 중학교는 사립이었는데 누구나 지원하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초등학교에서 입학을 지원하기 때문에 입학시험 결과 각 초등학교 수준을 알아볼 수 있어서 6학년 담임을 맡았던 선생님은 방학도 주일도 없이 공부를 시켰습니다. 주일학교 때 저를 가르쳤던 분이 숙부님이셨는데 주일에는 성경과 신앙서적 외에는 다른 공부를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주일날 다른 공부를 하면 하나님께서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게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왼쪽 귀로 들어왔다가 오른 쪽 귀로 나간다고 하셨습니다. 주일에는 공부를 해도 소용이 없다고 하시니 해도 득이 없는 공부를 할 바엔 차라리 안하고 하나님께 상 받자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6학년 담임선생님은 주일학교를 마치고 학교에 오도록 하였지만, 이런 이유로 전 주일에는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또한 열정이 대단한 분이어서 그냥 두지 않고 뒤에 앉아있는, 싸움 꽤나 잘하는 학생들을 교회에 보내 절 데리고 오도록 하였습니다. 신앙이 그리 없었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유로 친구들 사이에 "예수에 미친 놈"이라는 별명이 생겼습니다. 당시만 해도 우리 고장은 유교사상이 깊이 뿌리박혀있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드물던 때였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우리 반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저 혼자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별명이 너무 싫었습니다. 누가 그렇게 부르면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에 미친 놈"이라는 별명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이후로 불리지 않았지만, 점점 자라면서 그때의 별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정말 듣고 싶은 별명입니다. 신앙인들이 종종 세상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미쳤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조차도 당시 유대인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막3:21). 특히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그렇게 비난하였는데 이유는 자신들과는 너무 거리가 먼 말씀을 하시거나 예수님의 많은 기적들을 하나님의 역사로 인정하기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총독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이 회심하게 된 계기와 복음의 핵심을 증거하자 베스도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행26:24). 이처럼 사랑은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과거에 귀신에 미쳤지만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예수님께 미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여인의 몸으로 새벽 미명에 죽은 시체라도 보고파 무덤을 찾아간 것입니다(마28:1).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 역시 세상 사람이나, 믿어도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기엔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가 300데나리온의 값어치(당시 근로자 1년의 품삯)를 하는 순전한 나드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렸을 때, 그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요12:4~5). 본문 말씀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는 사실과 둘째는 그리스도께 미친 사람은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미친 사람은 착한 양심 쓰는데 미친 사람이며 참 사랑하는데 미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미친 사람은 진리에 미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로자는 성실하게 일하며, 학생은 학생 신분에 맞게 공부에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님께 미쳤다고 해서 가정주부가 살림살이를 팽개치고 예배당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가정생활에 모범을 보입니다. 알뜰하게 살림살이를 합니다. 남편 역시 직장에서 가장으로서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님께 미친 사람은 하나님께 전심전력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전심전력하는 사람은 신앙과 생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신앙을 결부시킵니다. 따라서 자신의 위치에서 성실과 사랑이 곁들여진 사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미친 사람은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고 한 면으로는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습니다(롬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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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5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손에 빠진 교회’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나이다.”(대상21:13) 사무엘하 24장과 역대상 21장에는 다윗이 인구 조사한 내용이 나옵니다.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국가들은 재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세금을 부과하였고 세금을 위하여 인구조사가 꼭 필요하였습니다. 또한 군대 모집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후 크게 자책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21:8).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한 후에도 이렇게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12:13) 정도였습니다. 인구 조사한 것이 무슨 잘 못이기에 이렇게 큰 죄가 될까요? 표면적인 이유는 그들이 인구를 조사할 때마다 내야 할 생명의 속전을 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출30:11-12). 생명의 속전이란 죄를 사해주시고 구원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연보입니다. 다윗은 그 헌금을 망각하고 백성들에게 내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지나치게 헌금을 강조하는 것도 문제지만, 가르치지 않는다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내면적인 이유는 인구조사의 동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은 싸우는 곳마다 승리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 영역이 넓어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방에서 이방인들이 귀화하여 인구 또한 많아졌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직접 수치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커졌는지, 이전 사울 때보다 얼마나 좋아졌는지, 부국강병이 되었는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인구조사 동기가 명예영광심 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의 영광으로 돌린 죄였습니다. 영적인 죄 곧 교만 죄였던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7만 명이 죽는 참혹한 결과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오늘, 지구상 대부분의 국가는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염병은 하나님의 손에 빠진 징계입니다(13절). 하나님의 손에 빠졌다는 것은 하나님만 치료해주실 수 있는 병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병은 회개 외에 고칠 길이 없습니다. 백신을 개발하면 된다고요? 일순간 막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회개하지 않는 채 개발 된다면 둑이 무너져 가는데 그것을 막기 위하여 윗돌을 빼서 아랫돌에 넣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이런 전염병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였으며 무엇을 회개하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이 눈을 들어보매 여호와의 사자가 천지 사이에 섰고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예루살렘 편을 가리켰는지라. 다윗이 장로들로 더불어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아뢰되 명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내니이다.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16-17절). 다윗은 첫째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둘째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셋째 온역의 원인을 자신의 악으로 돌리고, 그 죄 값을 백성에게서 자신에게로 옮겨 자신과 자신의 아비집이 당하게 해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러자 온역이 그쳤습니다. 굵은 베옷은 겸비함을 뜻합니다(왕상21:27). 땅에 대고 엎드리는 것은 온전한 순종과 복종을 뜻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아비집이 당하게 해달라는 것은 희생을 의미합니다. 그의 교만을 회개하고 겸비와 복종과 희생을 보인 다윗을 보고 주님께서 온역을 거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회개한 다윗에게 오르난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고 합니다(18절). 하나님을 위한 제단은 신약에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속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코로나 19를 직면한 우리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일은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드리는 것입니다(롬12:1-2). 그것이 영적 예배입니다. 천사가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오기 전에 여러 곳을 거쳤을 것입니다. 오르난은 어떤 태도를 취하였기에 하필 천사의 칼이 그곳에서 멈췄습니까? “때에 오르난이 밀을 타작하다가 돌이켜 천사를 보고 네 아들과 함께 숨었더니”(대상21:20). 오르난과 네 아들들은 숨었습니다. 천사 앞에서 숨는다고 숨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애굽의 장자를 칠 때 양의 피로 이스라엘 장자를 숨겨준 것처럼 하나님이 숨겨 주셔야 합니다. 시27:5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여호와의 은밀한 곳은 초막속입니다. 초막이란 자기를 낮추는 곳입니다. 만일 화려하고 웅장한 곳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예루살렘 궁전에 오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으로 오신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본을 받아 낮추고 검소하게 사는 사람을 하나님이 보호해주십니다. 성경은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호10:12)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어떤 행동도 구원의 조건은 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코로나19라는 거대한 재앙 앞에서 더욱더 겸비와, 온전한 복종, 선한 희생,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의 단을 쌓고, 검소한 생활 등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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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11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산 위에 오르신 예수님’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마5:1). 마태복음 5-7장을 산상보훈이라고도 하고 산상수훈이라고도 합니다. 산 위에서 베푸신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이전 산 아래서 교훈 하실 때 허다한 무리가 따랐던 것(마4:24-25)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산 위에 오르시자 제자들만 따라왔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면 예외도 있겠지만 무리 앞에 서기를 원할 것입니다. 12명 보다 70명 앞에 서기를 원하고, 70명 보다는 100, 1000, 10000명 앞에 서기를 원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많을수록 듣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복음 전파에 효과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산에 오르면 몇 명의 제자들만 따라올 것을 아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길을 택하십니다. 만일 군중들의 환호와 영광을 좋아하셨다면 예수님께서는 가파른 산에 오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들의 병을 고치고, 약한 것을 강하게 하고,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일들, 곧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들에 머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명예 영광이나 사람들의 환호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가파른 산에 오르기 시작하자 따르던 무리들이 예수님을 떠나기 시작합니다. “여긴 너무 힘들어” “땀 흘리긴 싫어” “편하자고 믿는데 고난 받을 필요가 어디 있어?” 하며 떠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제자로 택함을 받을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만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고생하며 믿을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빌1:29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은혜는 좋아하지만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은 싫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은혜 주신 목적 중에는 주님을 위하여 고난 받게 하는 것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위로는 주님을 위한 고난과 비례합니다(고후1:5). 주님이 베풀어주신 떡만 먹을 것이 아니라 거기서 받은 힘으로 산에도 올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허다한 무리들에게 산상보훈을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산에 오른 제자들에게 비로소 전하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왜 산 아래 무리들에게는 그러한 귀중한 말씀을 전하지 않고 제자들에게만 전했습니까? 다음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6:66). 여기 있는 제자들은 열 두 제자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따르던 사람들을 총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자 열심히 따라다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푹 빠져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라고 말씀하시니까 도저히 함께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육신적인 것인데 예수님은 육은 무익하다고 하십니다. 육신적으로 잘 되고, 육신적으로 복 받는 일을 좋아하는데 육은 무익하다고 하니 비전이 없어 보였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산상보훈에서도 주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관점과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은 부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데, 주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5:3). 세상은 연락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5:4). 세상은 강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데, 주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5:5). 세상은 환영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데 주님은 욕을 먹고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5:10-11). 이런 말씀을 어떻게 육신적인 사람이,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산상보훈을 하시기 전에 미리 말씀을 받을 수 없는 자를 걸러내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은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전하시고 내려오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마8:1). 예수님께서 산 아래로 내려오시니, 다시 허다한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산 위에 오를 때 흩어졌던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처럼 산상보훈은 아무나 듣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위한 신앙에서 한 걸음 나아가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각오하는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겔43:12은 “전의 법은 이러하니라. 산꼭대기 지점의 주위는 지극히 거룩하리라. 전의 법은 이러하니라.”라고 나옵니다. 산은 거룩한 곳을 의미합니다. 산에 오른다는 것은 성결에 소망을 두고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에도 산에서 주셨습니다. 믿어서 구원 받는 것은 시작입니다. 자녀로 태어났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니라 더욱 자라가는 일이 남은 것처럼, 신앙인들도 허다한 무리에서 나아가 거룩함에 소망을 두고 주님께서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성도가 되는 일이 남았습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주님께서는 보배로운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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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3
  • [WAIC 데일리 기도] 김호연 목사의 ‘국가와 민족의 치유 회복을 위한 기도’
    하나님 아버지 코로나로 인하여 오랜 동안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예배가 중단되고 일상이 파괴되고 우리의 삶이 고됩니다. 이 고통 가운데서 우리를 속히 구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주님, 코로나로 인하여 감사할 것이 많습니다. 인생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시고 더욱 주님을 의지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신천지와 같은 사이비 종교집단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도 주의 섭리요 뜻인 줄 앎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교회로서 더욱 본이 되고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코로나로 인하여 동성애와 같은 죄악이 드러남도 감사를 드립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다시는 발의되지 않도록 하시고 저들이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여 주옵소서. 위정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권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깨닫고 주의 뜻을 따라 나라와 민족을 인도할 수 있도록 바른 믿음과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코로나로 인하여 교회가 미래를 준비하게 하심도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의 진입을 앞두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시대와 같이 우리는 변화의 소용돌이 가운데 있습니다. 개인화가 더욱 진전되고 사람마다 자기주장대로 사는 것이 옳다고 믿는 이 시대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바른 세계관, 물질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지금도 불철주야 코로나 퇴치를 위하여 수고하는 당직자들과 의료진의 노고를 위로하시고 교회가 더욱 본이 되고 기도하고 코로나 예방에 힘써 속히 코로나를 극복하고 일상이 회복되며 예배가 회복되고 주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 생명을 살리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케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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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3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간절함’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그 몸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죽고, 살고, 부끄러움을 당하고 안 당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신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문제는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가? 그렇지 않는가에 있습니다. 간절함과 유사한 말은 절실함입니다. 절실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소원은 ‘이루어진다면 좋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절실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에서 문제로 얍복강 나루에서 밤새 씨름하던 야곱의 기도를 들어주셨고(창32:29), 브닌나로부터 심한 멸시를 받았던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사무엘을 주셨습니다(삼상1:20).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말을 전해들은 히스기아왕은 눈물로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눈물을 보시고 15년의 수명을 연장해주셨습니다(사38:15). 예수님 당시 많은 병자들 역시 그들의 간절한 소원만큼 고침을 받았습니다. 사도시대에는 헤롯이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마저 죽이고자 옥에 가두었을 때, 마가의 집에서 성도들이 모여 일심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그를 겹겹이 지키는 파수꾼들을 뚫고 나오게 하였습니다(행12:1~19). 이처럼 하나님으로 하여금 침묵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간절한 기도입니다. 간절함은 어디서 만들어집니까? 삼하13:39는 “다윗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라고 말합니다. 간절함은 마음을 향할 때 일어납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향하면 예수님께 대하여 간절함이 일어납니다. 세상으로 향하면 돈에 대한 간절함, 명예에 대한 간절함이 일어납니다. 향한다는 것은 방향을 정하고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바라봄은 생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간절함을 불러일으킵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7:11).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자신에 대한 불만에서 나옵니다. ‘내가 이렇게 믿어서는 안 되는데’ ‘내가 이렇게 게을러서는 안 되는데’ ‘내가 이렇게 예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데’ 등과 같은 불만에서 비롯됩니다. 환경이나 하나님께 대한 불평불만은 멸망을 자초하지만 자신에 대한 불평불만은 간절한 마음을 일으킵니다. 간절한 마음은 의를 사모하는 자에게 일어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63:1). 목마르고 주린 심령이 간절한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게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인들의 간절함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환난을 허락하십니다. “여호와여 백성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사26:16).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기한(400년)이 가까웠는데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움직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역을 시키도록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제야 조상들이 섬기던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하였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인도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환난은 간절한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께 대한 간절함은 하나님께 마음을 향할 때,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할 때, 의에 주리고 목마를 때, 환난 때 일어납니다. 처음부터 세 번째까지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일으키는 간절함인 반면, 네 번째는 하나님께서 교만하고 태만한 사람을 징계하심으로 일으키는 간절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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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27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아드리엘과 발디엘’
    “그 남편이 저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 왔더니 아브넬이 저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삼하3:16). 다윗은 사울왕의 딸 미갈과 혼인하기 위하여 블레셋 용사의 양피 일백을 사울에게 바쳤습니다. 미갈은 엄연한 다윗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도망자 신세가 되자 사울왕은 그를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 줍니다(삼상25:44).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미갈은 발디엘의 아내로 지냈습니다. 그 후 사울과 요나단이 블레셋과 싸움에서 죽임을 당한 후,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이미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다윗에게 온 이스라엘을 넘기기 위하여 다윗 왕을 찾아가겠다고 기별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우선 자신의 아내 미갈을 데려오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은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정이 듬뿍 든 발디엘이 미갈을 울며 보내는 내용입니다. 아무리 본 남편이었던 다윗에게 다시 보낸다고 하지만 참으로 이 순간만큼은 발디엘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다윗이 사울의 신하였을 때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딸 미갈을 다윗에게 주기 전 먼저 미갈보다 나이가 많은 메랍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딸을 다윗에게 줌으로써 다윗을 싸움에 나가 죽도록 할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였는지 사울은 다윗에게 줄 시기에 메랍을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줍니다. “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준 바 되었더라.”(삼상18:19). 사울은 자신의 딸까지도 다윗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삼으려 했는데 아마도 그럴만한 기회를 찾지 못하자 아드리엘에게 준 것 같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는 배우자가 정해지면 쉽게 바뀔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은 더욱 엄격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일을 겪은 다윗의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겠지만, 메랍을 차지한 아드리엘 입장에서는 왕이 당시 떠오르는 별 다윗보다 자신을 선택한 일에 대하여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입니다. 비록 시대는 차이가 있지만 사울의 두 딸을 두고 아드리엘과 발디엘의 감정의 희비가 교차합니다. 아드리엘은 큰 기쁨, 발디엘은 큰 슬픔........, 그 후 다윗의 통치가 한창일 때 이스라엘에 연이어 3년 기근이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무슨 연유로 이런 기근이 임하는지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삼하21:2). 원래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닌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였습니다. 이스라엘 족속들이 가나안 칠족을 멸할 때 그들을 죽이지 않기로 하나님 앞에 맹세하였는데, 사울의 이스라엘에 대한 잘 못 된 열심이 그들의 일부를 죽게 하였습니다(삼하21:2). 다윗은 기브온 족속들을 불러 그들에게 어떻게 보상해야 그들이 재앙 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복을 빌어줄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사울의 자손 일곱을 내어 주면 하나님 앞에서 목매어 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절친 요나단의 후손 므비보셋은 아끼고, 대신 사울의 다른 자녀나 그의 후손을 내어 주었습니다. 사울의 큰 딸 메랍의 후손, 곧 사울의 사위 아드리엘의 아들은 다섯이나 희생자 명단에 포함되었습니다. 다윗과 경쟁하여 사울의 딸 메랍을 차지한 아드리엘, 그 때의 감격이 아직도 생생한데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때를, 순전히 사울의 사위 된 연유로 아들 한 명도 아니고 다섯이나 잃게 될 줄을, 금쪽같은 아들을 잃은 서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미갈과 이별을 아쉬워하며 울었던 발디엘의 후손은 아무도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발디엘은 아마도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입니다. 인간지사 세옹지마라고, 미갈과 헤어지는 발디엘의 눈물이 자손의 죽음을 면할 씨앗이 되고, 왕의 딸 메랍을 차지한 아드리엘의 환호가 후에 자녀를 잃는 설움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5:14). 슬픔에 처한 자, 고난 당하는 자는 낙심하지 말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위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아야 합니다. 즐거움에 처한 자는 기쁨에 도취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사탄이 틈타지 않도록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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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20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왕다움이 없는 왕’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우로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바 됨이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음 같이 됨이로다.”(삼하1:21).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후에 다윗이 쓴 애가에 나온 한 구절입니다.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음 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표현은 원래 칼이나 창, 화살 같은 무기가 방패에 닿았을 때 잘 미끄러져 나가도록 방패에 기름칠을 하던 옛 전사들의 행동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즉 사울의 방패가 사울을 막아주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사울에게 사무엘은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3b). 하지만 이 후에도 사울은 여전히 왕의 신분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왕의 지위는 있었지만 왕으로서 권위는 없었습니다. 그가 왕다움이 없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입증됩니다. 첫째, 그는 전혀 자신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 안에 악신이 들어오면 번뇌하거나 야료하였습니다(삼상18:10). 기름부음을 받은 왕은 다른 사람을 다스리기 전에 자신을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떠나고 대신 악신이 임한 그는 악신이 충동하는 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부여받은 왕으로서의 신분을 망각하였습니다. 그가 왕이 된 것은 하나님께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백성들은 주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도록 다스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데 마음 쓰고,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보다 여생을 다윗 죽이는 일에 몰두합니다. 셋째, 본문말씀처럼 그의 방패가 무용지물이 된 점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1-2). 무려 8가지 유사한 말을 빌려 하나님이 그의 방패이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이 그의 방패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일에 마음 쓰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전쟁 가운데서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전혀 다릅니다. “사울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있는 자나 용맹 있는 자를 보면 그들을 불러 모았더라.”(삼상14:52).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힘 있고, 용맹 있는 자를 의지한 것입니다. 그가 왕이 된 후 줄곧 의지한 것은 자신의 지혜나 사람의 말이었습니다. 자신의 지혜와 사람을 의지한 삶이 그를 지켜주지 못 한 것입니다. 사울이 왕으로서 지위는 있지만 왕의 권위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신자들 역시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벧전2:9). 자기를 다스리는 왕입니다. 자신의 죄를 위하여 기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하여 중보 기도하는 제사장입니다. 그런 지위를 받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범인 같이 죽으며 방백의 하나 같이 엎더지리로다.”(시82:6).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기고 팥죽 한 그릇에 판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 됨이 얼마나 큰 은혜인 줄 모르고 육신을 따라 살아가니 마귀의 지배를 받고 환경의 지배를 받는 약한 신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소유하고 있습니다(눅10:19). 전능하신 분이 그의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아니하고 여전히 옛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 살아가는 영적 식물인간이 되고 맙니다(계3:1).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은 성도들이 범인처럼 살아갈 것이 아니라 아들의 영, 곧 성령을 따라 살아서 육신과 세상과 마귀를 다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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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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