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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나라를 사랑한다면’(사 32:15-20)
- 지금 대한민국은 큰 위기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혼란스럽습니다. 본문을 보면,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그 숲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가 활동할 때 유대 나라는 약소국으로서 내외적인 침공으로 존망의 기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라 안보를 위해 하나님의 백성이 할 일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셨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영이 백성에게 부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15절)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면 파멸과 불안의 시대를 평화와 정의의 시대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영은 ‘정의의 영’이며 ‘공의의 영’입니다.(16절) 여기서 말하는 정의와 공의는 사회의 약자를 배려하고 약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찾아주고 그들에게 피난처를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즉 정의와 공의의 삶이란 약자 돌봄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 즉 정의의 영과 공의의 영으로 약자들을 돌보면 화평과 평안과 안전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7절) 공의의 삶, 즉 약자 돌봄의 삶이 나라에 평화와 평안과 안전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나라 안보는 공의의 열매이며, 그것은 가난한 자를 돌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즉 주변의 약자를 돌보는 것이 나라 안보를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알려주신 나라 위기의 탈출구는 세상의 권력과 무기에 있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 굳건한 믿음을 갖는 것이 위기 극복의 길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사 7:9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떠나 다른 힘을 의지하는 것은 죄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거역하는 자식들아, 너희에게 화가 닥칠 것이다. 너희가 계획을 추진하지만, 그것들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동맹을 맺지만, 나의 뜻을 따라 한 것이 아니다. 죄에 죄를 더할 뿐이다.”(사 30:1)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나라 안보는 강한 무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역을 행하실 때 성령님과 함께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 끝까지 공의를 이루실 분입니다. 주님은 약하고 힘들고 포로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시고 자유를 되찾아주시며 힘을 북돋워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 정의는 성령께서 함께하셔야 가능합니다. 주님은 정의를 이루실 때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다투지도 않으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힘없고 연약한 자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뽑은 나의 종, 내 마음에 드는 사랑하는 자,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것이니, 그는 이방 사람들에게 공의를 선포할 것이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외치지도 않을 것이다.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의가 이길 때까지,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이방 사람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 것이다.”(마 12:18-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정의를 세우신 주님을 따라가며 우리는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선 기도해야 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나의 백성이 스스로 겸손해져서, 기도하며 나를 찾고, 악한 길에서 떠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며, 그 땅을 다시 번영시켜 주겠다.”(대하 7:14)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이 회개하며 하나님을 찾고 악한 길에서 떠나 주님께서 다시 번영시켜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유다 왕 아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습니다.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실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라는 조용하였고 주님께서 그 나라와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아사 왕은 백성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찾았으므로 평안을 주셨다고 말했습니다.(대하 14장) 우리 민족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을 때 성령께서 평화와 평안과 안전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한 모세는 백성의 우상 숭배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 백성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말씀하신 재앙을 백성에게 내리지 않으셨습니다.(출 32장) 모세야말로 백성을 사랑한 애국자이지요. 우리도 모세처럼 우리 민족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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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나라를 사랑한다면’(사 32: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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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이 시대, 성품의 중요성’ 딤후 3:1~5
-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어려운 때를 만날 것이라고 본문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때를 말할 때면 보통 지진이나 전쟁 등이 떠오르는데, 디모데후서는 마지막 시대에 사람들이 겪는 고통 중에서도 파괴된 성품에 대해 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5절의 내용은 모두 말세에 겪게 되는 고통에 대한 내용입니다. 먼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고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동성애를 몹쓸 죄악으로 이야기하곤 합니다. 물론 동성애는 비성경적이고 우리 사회와 문화에 전혀 맞지 않으며, 인륜에 반대됩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별로 경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사랑’은 자아를 존중하는 그런 긍정적인 사랑이 아닌, 극히 이기적일 뿐만 아니라, 사랑의 방향과 본질이 빗나가 있는 그런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속성상 어떤 대상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대상의 첫 번째는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며, 그 다음은 이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사회만 보더라도 모든 구조가 타인을 위하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고 존중하며 인격적으로 대하는 그런 구조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개인이 돈을 버는 일조차, 다른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필요를 충족하는 대가로 지급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점점 자기를 사랑하는데 집착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도 아니고, 이웃이나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된 것입니다.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매우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사랑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맞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아야 하고, 이웃들로부터 사랑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하고 엔돌핀이 생기며, 생기가 돌게 됩니다. 그런데 점점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다 보니 이상한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기 사랑에 집착하다 보니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우울증이 따라다니는 삶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엔돌핀이 아닌 우울과 불안을 동반한 호르몬이 분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생활 속에서도 나타나지만, 교회 안에서 비롯되는 많은 불편하고 빗나간 관계들도 사실상 자기를 위주로 사랑하는 모습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자기 사랑과 자기 의지가 굳어져서 나오는 완고한 모습이 발현되는 순간 많은 불협화음이 교회 안에 일어나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는” 모습(2절)도 모두 자기를 사랑하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이웃을 돕기 위해서 돈에 눈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아는 자가 교만할 수 없으며,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자가 부모를 사랑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사랑의 방향이 자기만을 향하는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도, 거룩한 마음도 들기 만무한 것입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웃을 향해 원통함을 풀지 않고 모함하며 사나운 데에(3절) 전문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굳이 애걸복걸할 필요 없이 여전히 무정하고 타인을 쉽게 모함하거나 사나운 기질을 고수할지라도 충분히 잘 먹고 잘살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기만을 사랑하는 삶으로 스스로 고립되어 갑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괴롭습니다. 디모데후서의 말씀은 2천 년 전에 오늘날의 현상을 한치의 오차없이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마치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나열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것은, 어떤 종교적인 모습이 아닌, 제대로 된, 본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순전한 인간의 모습과 성품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그대로의 성품을 소유한다면, 그러한 삶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러한 사람은 이 시대가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성품을 닮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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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이 시대, 성품의 중요성’ 딤후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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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성령충만과 상’(출 31:1-5, 고전 9:18)
- 사울은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춤추며 예언을 하였습니다.(삼상 10:10) 그러나 사울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 주님의 영이 떠났고, 악한 영이 사울을 괴롭혔습니다.(삼상 16:14)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찾아왔을 때 뉘우치며 “주님의 성령을 나에게서 거두어 가지 말아 주십시오.”(시 51:11)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항상 함께 계시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성령충만은 사역과 관계가 있습니다. 성막을 지을 때 브살렐은 성령충만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도 직분을 감당할 때 성령충만하였습니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에게 지혜의 영이 넘쳤다.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잘 듣고 그를 따랐다.”(신 34: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영적인 안목이 밝아져 복음의 진리를 알게 되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백성의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트집을 잡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어디서든 나의 구원을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충만 특징은 정상적인 삶 속에서 나타납니다. 성령충만하면 부부관계, 자녀관계, 고용주 관계 등 모든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엡 5-6장)성령충만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갈 5:22-23) 성령의 열매(fruit)는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하나입니다. 그 방법이 여덟 가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하려면, 첫째,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이 믿음 없음을 깨달을 때 믿음이 돈독해집니다. 믿음은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막 9:24)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사 55:8) 셋째, 회개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회개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행 2:38-39) 회개하면 성령님은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사모하는 사람은 바울처럼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고후 12:9)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를 드리도록 인도하시며,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도록 도와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롬 8: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기도해주시는 성령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상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사역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 1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존재를 믿고, 상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로 있어야 상을 주시는데, 사역을 통해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상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전 9: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상은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칭찬받을 수 있는데 칭찬을 안 받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주신 사명 위해 충성하는 것이지요. 바울은 자기 인생을 마라톤으로 보았습니다. 인생을 달려가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명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행 20:24) 바울은 지나간 것으로 만족하거나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앞으로 해야 할 복음 전파와 계속 성장해야 할 자신의 신앙을 추구하였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성령충만함으로 미래지향적인 삶을 추구하며 주님의 상을 바라보고 복음 전파와 자신의 신앙 성장에 집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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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성령충만과 상’(출 31:1-5, 고전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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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예수의 흔적’(갈 6:17-18)
- 한평생 주님의 사도로 신실하게 살았던 바울에게는 입으로만 복음을 전하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전도자들과 달리 예수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17절)며 깊은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흔적이라는 말은 ‘스티그마’라는 단어인데 고대사회에서 주인들이 자기의 소유임을 표시하기 위해 노예의 어깨나 엉덩이에 화인을 찍은 데서 유래했습니다. 불에 달군 쇠를 노예의 살 위에 찍어 자기의 소유임을 나타냈습니다. 이것을 낙인(烙印)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만큼 그리스도의 종임을 당당하게 말했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인 사실에 긍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여기고 당당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의 흔적이란 그리스도의 소유됨과 고난의 상처로 대변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도 아니요, 마귀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사 43:1).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면서 하나님의 것이지(고전 3:23) 그 외에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그리스도께 속했으면 주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이고 또 유업을 이을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음을 감사하며 최대의 기쁨과 최대의 영광으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 삼아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다음으로 예수의 흔적은 고난의 상처를 의미합니다. 예수의 흔적은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에 동참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따라가느라 얼마나 고생하고 얼마나 핍박을 당했습니까? 바울의 몸은 고난의 상처투성이였습니다. 그는 희생적인 복음의 사자로서 숱한 고난의 흔적 영육 간에 증표로 가지고 있었습니다(고후 11:23-27). 고후 4:10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임 당하심을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대속의 희생으로 내어 놓으신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을 예수님을 위해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가느라 상처투성이가 된 바울은 도리어 그것을 기쁘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고 말했습니다. 그 해답은 마 5:11-12절에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우리들도 주님을 위하여 매 맞는 것 주님을 위하여 욕먹는 것 주님을 위하여 원망 듣는 것 주님을 위하여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광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가운데 고난과 눈물과 희생이 따를지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손과 발에 못 박힌 상처, 주님의 옆구리에 난 창자국 가시관을 쓴 자리에 난 주님의 머리의 상처는 누구를 위한 상처입니까? 모두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주님의 사랑의 흔적이요 눈물의 흔적이요 매 맞은 흔적이요 찔린 흔적이요 피의 흔적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를 흘렸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했느냐”고 묻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나는 발자취를 더욱 빛나게 만들고 죽든지 살든지 주님의 발자취를 존귀케 여기며 예수님의 흔적을 지녀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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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예수의 흔적’(갈 6: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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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시선을 주님께’(마 2:1-18)
- 시선을 주님께 드릴 때 우리는 살아 계신 주님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동방박사들의 시선을 살펴보고, 베드로의 시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시선, 가나안 여자의 시선, 바울의 시선을 살펴봅니다. 그들이 주님께 시선을 집중했을 때 어떤 일이 있었고, 시선을 집중하지 못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살펴봅니다. 첫째, 동방박사들의 시선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경배드리기 위해 멀고도 험한 길을 찾아온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찾아간 그 아기는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아기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이것이 동방박사들의 시선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천사가 전하여준 구주이신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듣고 별을 따라서 가다가 그만 잠시 별을 보지 않고 헤롯 궁을 바라보았습니다. 왕궁에서 왕이 태어나실 줄 알고 생각의 시선대로 찾아간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자 당황한 헤롯은 결국 베들레헴과 가까운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에서 잠깐 시선을 떼자 바라보지 않아야 할 곳을 바라본 것이 큰 화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 생각의 시선대로 나아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다가 잠깐이라도 다른 곳을 바라보지 않도록 시선을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둘째, 베드로의 시선입니다. 마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가 저물 때에 제자들이 탄 배가 육지에서 멀리 떠나서 강풍으로 고난당함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인 줄 모르고 유령이라며 무서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자신이 물 위로 걸어가도록 예수께 부탁하고,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시선을 주님께 집중하고 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께 시선을 떼는 순간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다가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시며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가벼운 사람은 풍랑을 만날 때 쓰러지게 됩니다. 그래서 시선을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셋째,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시선입니다. 누가복음 24장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날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 떨어져 있는 엠마오 마을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으나 두 제자는 주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시선이 얼마나 무디던지, 예수님이 그들의 집에 들어가셔서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빵을 떼어주실 때야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두 제자처럼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면서 말씀해주시고, 들어주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얼마나 무디게 살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넷째, 가나안 여자의 시선입니다. 마태복음 15장을 보면,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을 때 가나안 여자가 와서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라고 외쳐 말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께 무릎을 꿇고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이 옳지 않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여자는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자신의 간청에 거절당하자 더욱 주님께 시선을 집중하고 다가가 마침내 딸의 병을 치유받았습니다. 이것이 가나안 여자의 시선입니다. 가나안 여자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시선을 집중할 수 있습니까? 다섯째, 바울의 시선입니다. 바울은 성령님이 가라고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갔고, 가지 말라고 하는 곳이면 가고 싶어도 가지 않았습니다.(행 20장) 이것이 바울의 시선입니다. 바울은 생명보다 사명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고후 5:14-15) 바울은 다양한 불신자들을 전도하기 위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 9:19) 모든 사람의 종이 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약한 것 때문에 기도를 더 많이 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시선입니다. 이처럼 바울의 시선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행동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시선도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시선을 주님께 집중하여 우리를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시는 주님의 역사에 힘을 다해 동역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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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시선을 주님께’(마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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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반석에서 생수를 주신 교훈과 의미’(출 17:1-7)
- 모든 인생들은 광야를 지나는 나그네와 같습니다. 험악한 인생행로에서 목마르고 갈증 난 인생들은 저마다 갈증에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인생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공허합니다. 본문을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던 중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물이 없어 아우성치며 원망한 사건을 일어났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켜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기도하니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샘을 파라하지 않으시고 반석을 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에게 신앙의 사고력을 길러주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여호와의 명령대로 나갔음에도 물이 없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주어진 사명에 충실함에도 불구하고 시련을 만납니다.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사람이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이 갈증의 고통입니다. 인생행로에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이나 고통이 있을지라도 성급하게 불평하거나 원망치 말고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깊은 뜻을 분별해나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시고 반석을 쳐서 생수를 얻게 하신 데에는 단순히 기적으로 물을 먹게 했다는 뜻 이외에 깊은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모세가 친 반석은 호렙산에 있는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반석이었습니다. 이 반석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여 주신 반석입니다. 이스라엘이 마신 그 물은 신기한 기적의 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전 10:4에서는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해석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영적 갈증에 허덕이는 인생들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명수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영혼의 갈증을 풀어 줄 물을 얻기 위해서 세속적인 쾌락의 강을 찾기도 하고 철학의 시내를 찾기도 하며 부의 샘물을 파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들에게 멸시와 배척을 받고 슬픔과 애통을 맛본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영적인 생수가 나오며 그 생수만이 영혼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요 7:38-39). 사 55:1에서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값없이 와서” 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면 누구든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하는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요 4:14). 이 세상의 향락이나 물질이나 아름다움이나 명예나 사상의 물은 마시면 마실수록 바닷물처럼 더욱 심한 갈증을 가져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시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십니다. 혼미해지고 배고프고 목마를 때마다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으로 만족하려 하지 말고 차라리 때리시더라도 어루만져 주시는 주님의 품을 찾아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양식으로 충족함을 얻고 참된 생수로 만족함을 얻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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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반석에서 생수를 주신 교훈과 의미’(출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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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자비하신 예수님’(마 4:23-25)
- 예수님의 성품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자비를 떠오르게 됩니다. 우리가 긍휼을 받을 만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받을 자격이 없는 데도 주시는 것이지요. 죄인인 우리는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죄와 사망을 다스려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는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모든 환자를 데리고 예수께로 왔습니다. 자비하신 예수께서는 그들을 긍휼히 보시고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으로부터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자비하다’는 ‘긍휼히 여긴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긍휼히 여김은 ‘함께 고통을 당함’이라는 의미입니다. 긍휼은 섬기는 마음입니다. 긍휼은 불쌍한 자에 대한 동정심을 넘어 그 사람의 입장에서 같은 감정으로 공감하는 마음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 9: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비와 사랑이 부족한 형식뿐인 제사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며, 예수께서는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소외되고 억눌린 자들에게 자유와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은 죄인인 자신이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받은 은혜대로, 나도 다른 사람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공감하며 함께 나눌 수 있는 자비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힘없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긍휼한 마음으로 도와준 것을, 주님을 섬긴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자비의 마음으로 기쁘게 섬겨줍니다. 약자나 장애인을 섬기는 삶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레 19:13-14)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나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제사장과 레위인은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도 만난 사람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여기서 포도주는 말씀을 상징하며(렘 23:9), 기름은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즉 상처는 말씀과 성령님의 도움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긍휼이란 자기를 희생하면서 불쌍한 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을 보면, 바울은 주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 아그립바 왕을 긍휼히 여겨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그러자 아그립바 왕이 “그대가 짧은 말로 나를 설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고 하는가!”라고 바울에게 말하였습니다. 이처럼 아그립바는 애매한 대답으로 바울의 질문을 피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짧거나 길거나 간에, 나는 임금님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결박을 당한 것 외에는 꼭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뵙니다.”(행 26:28-29)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긍휼의 마음을 갖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8장을 보면, 굶주리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면, 즉 동정함으로 선행을 행하면, 죄악과 고통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항상 든든하게 지켜주시고, 영혼육의 건강함과 풍성한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10-1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와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구원받은 자들이 마땅히 행할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서로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엡 4:32) 진정한 긍휼은 실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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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자비하신 예수님’(마 4: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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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재림을 준비하는 신앙’(눅 12:35-40)
- 인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더 살기 좋은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역사의 수례 바퀴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시계는 종말이 가까웠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재림을 준비하며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35절)고 말씀하심으로 다가올 심판을 준비하는 제자의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를 대비하여 믿음으로 굳게 서서 맡기신 일을 열심히 감당하며 깨어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으라는 뜻입니다(출 12:11). 예수님께서 재림하시어 이 세상을 심판하고 성도들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함으로 하나님의 인류구원 계획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지금 인류의 역사는 인류의 심판 즉 예수님 재림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받게 될 복을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주님의 재림이란 더 없이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것보다 재림에 대해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한국 초기 교회 목회자나 성도들은 지진이나 천둥 번개 소리나 전쟁의 포성의 소리를 듣고도 주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냐고 집이나 교회 밖을 나아와 하늘을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너무 세상적인 관심에 깊이 빠져 있어서 그만큼 주님의 재림에 대한 관심이 훨씬 멀어졌습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확고히 서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아간 종들에게 주인이 돌아왔을 때 놀랍게도 주인으로부터 종이 수종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37절). 그들은 단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깨어서 기다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귀하게 여겨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섬김이 만만찮은 순간도 있을 것이고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는 주인을 마냥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도착했을 때 그렇게 깨어서 기다리는 종들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38-40절). 분명히 오신다는 것은 예고되어 있지만 그 정확한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때와 기한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예비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항상 예비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언제 오시든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오늘처럼 풍요로운 세상에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의 쾌락과 염려가 우리의 천국 소망을 가로막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 물질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재림에 대한 준비 자세가 아닙니다. 세상의 평안과 성공 세상의 안일한 삶이 목표인 사람은 술에 취한 사람과 같이 주님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라면 영적인 영원한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그때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믿음의 발걸음을 옮기십시다. 자신이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며 재림을 준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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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재림을 준비하는 신앙’(눅 12: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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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천국 갈 준비’(수 23:14-16)
- 천국 갈 생각을 하고 살면, 오늘이 가장 소중한 선물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잘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을 배우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을 살았는지 죽은 후에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여호수아는 천국 가기 전에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여 알려주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제 온 세상 사람이 가는 길로 갈 때가 되었으니, 당신들은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이 명하신 언약을 꼭 지키도록 당부하였습니다. 이어서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기면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 반드시 망하게 된다는 사실도 알려주었습니다. 이처럼 여호수아는 천국 갈 준비를 잘하였습니다. 우리도 여호수아처럼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혜롭게 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끝이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산 소망을 갖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벧전 1:3) 우리가 가진 산 소망은 모든 고통과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역동적인 힘이 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 죽음이란 형벌이 아니라 오히려 형벌적인 요소가 죽음에 의해서 제거된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로 변화시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히 12:23) 그래서 죽음은 성도에게 종말이 아니라 완전한 새 생활의 시작입니다. 성경을 보면, 죽은 자를 잠든 자로 말씀하셨습니다.(살전 4:13-14) 야이로의 딸이 죽어서 모든 사람이 울며 통곡할 때 예수께서는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눅 8:5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어서 많은 사람이 슬퍼할 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는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요 11: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죽는 것은 잠이 드는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단지 쉼표일 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고를 그치고 참 안식을 얻기 때문입니다.(계 14:13) 그 안식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아주 없어지는 멸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앞에 두고 가장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구원의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시고 떠나실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으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삶이 되어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혜롭게 준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천국 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약 4:14) 요셉은 천국 가기 전에 자손들에게 이집트를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행해 가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해골도 이집트 땅에 매장하지 말고, 가나안 땅에 묻으라고 당부했습니다. 즉 요셉은 자손들에게 현재의 삶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도록 유언한 것입니다.(창 50:24-26) 우리도 요셉처럼 자손들에게 확실한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 있을 때 장차 상속받을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9-10절을 보면, “불의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음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나, 간음을 하는 사람들이나, 여성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나, 도둑질하는 사람들이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이나, 술 취하는 사람들이나, 남을 중상하는 사람들이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의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말씀대로 순종해야 하며, 불의한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와 회개하고 구원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며,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천국 갈 준비를 잘하는 것입니다.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신 6:5),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천국에 갈 준비를 가장 잘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고난도 당하지만 주님께서 그들을 모든 악으로부터 건져주셔서 천국에 들어가도록 보호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딤후 4:18) 천국은 눈물이 없고,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 기쁨이 넘치는 곳입니다.(계 21:4) 그래서 천국에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소망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활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살리기 위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 때문인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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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천국 갈 준비’(수 23: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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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예수님만 바라봅시다’(히 12:2)
- 인생을 살면서 자기 한계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기의 한계에서 조금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좌절하고 주저 않습니다. 그래서 실패를 하고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떠한 한계에 부딪힌다 하더라도 무한한 능력을 소유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낙심하고 좌절하며 무기력해지나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생명과 능력을 얻습니다. 은혜를 받습니다. 평안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으면 어떤 도전 앞에서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세상 사람과 다르게 승리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또한 인생에서 방향을 잃어버려 방황할 때에 세상을 바라보면 안 됩니다. 스티븐 고비가 쓴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란 책에 보면 ‘시간관리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관리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성공을 좌우하는 것은 ‘얼마나 바쁘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일어설 수 있으며 방향과 길을 찾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 62:1에서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죽음의 위협을 받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다윗처럼 하나님만 바라볼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까? 마음이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 5:8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이라고 하셨습니다. 두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정함이 없어 주님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다른 생각에 미혹을 받습니다. 똑같은 광야의 길을 걸으면서 모세는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약속을 굳게 믿고 기적을 보면서 살았는데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환경만 보고 현실만을 보게 되니 육신의 생각이 나오며 거기에 미혹이 되어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부나 명예, 혹은 안락함을 추구하다 보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 방황하는 삶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아름답고 선한 목표를 이루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오직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로만 향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은 예수님을 본을 삼아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항상 다른 것을 바라보게 역사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육신의 생각이 일어나서 시험에 들게 됩니다(약 1:4). 여러 가지 악한 생각이 나는 것은 주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경주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달려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다하고, 가고 싶은 곳 다 가고, 먹고 싶은 것 다 먹는 등 절제가 없다면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힘듭니다. 힘든 자기와 싸움을 해나가야 합니다(고전 9:24-25). 예수님만이 우리 신앙의 푯대이십니다. 우리 삶의 목표이고 중심이며 시작이시고 생명이며 최고의 가치와 구원이시며 축복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시며 믿음으로 승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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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이상길 목사의 ‘예수님만 바라봅시다’(히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