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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말씀을 지키며 간직하라’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명령을 네게 간직하라. 내 명령을 지켜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 판에 새기라.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잠7:1-5) 말을 지킨다는 것은 말을 빼앗으려 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씨 뿌리는 비유가 있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 돌밭에 떨어진 씨, 가시밭에 떨어진 씨, 옥토에 떨어진 씨, 그 중에 가장 좋지 않는 상태는 길가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씨들은 그래도 싹이라도 틔우지만 길가는 싹을 틔우기도 전에 새가 와서 먹어버리기 때문입니다.(눅8:11) 새는 곧 마귀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지키고 간직하기 위하여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자신의 마음이 길가와 같은 것인지 아니면, 옥토와 같은 것인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길가와 같은 마음이라면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간직할 수 없고 간직할 수 없기 때문에 지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면 왜 길가와 같은 마음이 됩니까? 길가는 사실 밭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밭이라면 우선 갈아엎어야 하고 돌멩이를 추려 내야하며 때때로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거름도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길가는 갈아엎을 필요가 없습니다. 갈아엎는다면 오히려 다니는데 불편한 것입니다. 이처럼 길가는 한 번도 갈아엎어보지 않는 마음입니다. 호10:12는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묵은 땅을 갈아엎으라고 하십니다. 묵은 땅은 딱딱하게 굳은 땅입니다. 누구 밑에도 있지 못하고, 순종해보지 않은 자기 뜻, 자기 고집, 자기 마음대로 살아간 완고한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이 길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옥토가 되기 위하여 먼저 땅을 갈아엎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내 고집, 내 생각 부인하고 순종하는 것이 갈아엎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순종할 수 있는 환경을 주십니다. 갈아엎도록 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가정에는 남편, 아내를 주셨고 자녀들에게는 부모님을 주셨으며 회사에는 상관과 동료들을 주셨습니다. 경작된 밭 곧 순종적인 마음밭에 성령께서 말씀의 씨를 뿌려주십니다. 그러면 마음이 그 씨를 간직하게 됩니다. 간직하기 위하여 두 번째 해야 할 일은 말씀을 눈동자처럼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 신체 구조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이라면 눈일 것입니다. 손이나 발에 티끌이 묻으면 예민한 사람이라면 바로 느끼겠지만 보통은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치아에 음식찌꺼기가 있으면 다소 불편하겠지만 그래도 말을 할 수 있고,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또 코에 먼지가 조금 끼면 딱지가 생기고 불편하겠지만 그런대로 숨을 쉽니다. 그런데 눈동자 안에 먼지나 작은 티끌이 들어가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몹시 불편하여 온갖 수단을 사용하여 어떻게 하든지 그것을 빼내려 애를 쓸 것입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릴 것입니다. 그것은 눈동자가 그만큼 예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키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32:10). 신앙인들을 눈동자처럼 보호해주시고 지켜 주신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주님이 신자들을 사랑하셔서 눈동자같이 보호하시니 우리도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눈동자처럼 지키려고 애를 써야합니다. 눈동자처럼 말씀을 지키지 못하여 망한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말씀을 지키지 못하여서 에덴 낙원을 잃어버렸고(창3:24), 사울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버렸으므로 왕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삼상15:22-23). 아버지 다윗을 저주하였던 시므이에게 솔로몬은 그가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하지만 시므이는 삼 년 째 되는 해에 가드왕 아기스에게 달아난 종을 잡으러 기드론 시내를 건너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왕상2:36-46). 이처럼 말씀이 곧 예수님이며 우리가 말씀을 놓치면 곧 생명을 놓치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눈동자 같이 지키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눈동자처럼 말씀을 지킬까요? 요14:15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영, 곧 성령을 풍성하게 주시고 그 성령께서 지키게 해주십니다. 자신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지키고 행하게 하십니다.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세 번째 할 일은 손가락에 매며 마음 판에 새기는 일입니다. 손은 우리가 행동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밥 먹을 때 손이 필요하고 일을 할 때 손이 필요하며 몸을 씻을 때 필요합니다. 사람과 교통할 때 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손가락에 말씀을 매라고 합니다. 그런 일들을 할 때 무작정하지 말고 먼저 말씀에 합당한지 그렇지 못한지 살피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행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이 마음에 새겨지고 우리의 피가 되고 살이 되기 위해서는 지식을 넘어서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에 새기려면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행한 그 말씀이 우리 마음 판에 새겨집니다. 새겨질 뿐 아니라 점점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마음 밭을 살피고, 눈동자처럼 지키며, 행함으로 마음 판에 새기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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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0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우물가의 여인’(요 4:10~17)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서 갈릴리로 가시는 중에 사마리아를 통해서 지나가십니다. 해가 쨍쨍 내리쬐는 한낮 12시경입니다. 여행길에 지쳐서 야곱의 우물이 있는 우물가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거기서 만나셨습니다. 여인은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그 여인은 뭔가 사연이 있어 보입니다. 인생의 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입니다. 게다가 아무도 물을 길러 나오지 않는 시간에 저런 모습으로 나온걸 보니 사람들과 마주치는 게 싫어서 스스로 고립되어 살아가는 여인인 것 같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물을 좀 달라’고 먼저 말을 건네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녀는 알고 보니 심히 목마르고 허기진 여자였습니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심한 공허함과 무엇으로도 가시지 않는 목마름으로 결핍된 여자였습니다. 목마르고 심하게 굶주린 상태를 상상해 봅시다. 고통스러운 목마름에 모든 에너지를 다 쏟고 있으니 자기의 허기와 목마름을 채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존재 자체가 결핍되어 있으니 잘해줘도 고마운 줄도 모르고 가진 게 있어도 좋은 줄을 모릅니다. 누가 무엇으로 이런 여자를 만족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보니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운 여자입니다. 평범한 여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사는 일상을 사는 게 어려운 여자입니다. 여인의 목마름은 남편이라는 대상으로 무너지고 부서져 버린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너무나 목이 말랐지만 여인의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물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존재적인 목마름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목마름입니다. 존재적인 목마름은 내 안에서부터 해결되어야 한다. 속으로부터 채워져야 합니다. 근원자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문제입니다. 존재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목마름입니다. 어떤 다른 피조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인생문제는 방법이 없다고 그럭저럭 체념하고 삽니다. 해결할 수 없는 곳에서 찾으려고 헤매다 찢기고 상처받고 아프니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물이 있다고 말씀 하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네게 물 좀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 4;10)” 주실 수 있는 분에게 와서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은 분명히 주십니다. 그물이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여인은 자기가 목마른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런 물이 있다면 내게도 주소서’ 물을 달라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왜 이런 아픈 부분을 건드리시는가, 피하는 게 예의인데... 물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자신의 가장 부서지고 무너진 부분을 직면하고 인정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남편이었습니다. 여인은 자기의 심한 결핍을 해결할 수 있는 게 남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직면하니 남편은 자기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애통의 과정을 지나서 비로소 여인은 고백합니다.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여인은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죽어서 바싹 말라 비틀어져서 목마르고 굶주린 여인에게 예수님으로 부어졌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부어질 때, 그 생명이 닿으면서 영혼이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성령이 나에게 부어질 때 그때 비로소 다시는 목마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구하는 자에게 분명히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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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4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역대하16:1-10)
    남왕국 유다 왕 아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잘 섬기는 왕이었습니다. 구스 사람 세라가 군사 백만과 병거 삼백 승을 거느리고 침입하였을 때, 유다와 베냐민은 군사 오십팔만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을 의뢰하고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구스 사람을 아사와 유다 사람 앞에서 패하게 하셨습니다(대하14장). 이렇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맛본 아사였지만 북 왕국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전략적 요충지인 라마 성읍을 건축하여 사람을 그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했을 때 전처럼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취하여 다메섹에 거한 아람 왕 벤하닷에게 주며 구원병을 청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좋아보였습니다. 벤하닷이 아사의 말을 듣고 그 군대 장관들을 보내 이스라엘 두어 성읍과 국고성을 치자, 바아사가 라마 성읍 건축하는 일을 그만두고 물러갔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아사왕은 온 유다 무리를 거느리고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운반하여 그것으로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기까지 하였습니다(대하16:1-6). 어떻게 보면 외교적으로 성공한 일 같았습니다. 그런데 선견자 하나니가 나타나서 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 한고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대하 16:7) 하나니의 이 말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사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 왕을 의지함으로 아람왕이 이스라엘에서 벗어난 것처럼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이 우리 손에 벗어난다는 사실을, 우리가 돈을 의지하면 돈이 우리에게서 벗어날 것이며, 자녀를 의지하면 자녀가 우리에게서 멀어질 것입니다.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면 지혜가 점점 달아나 어려운 일을 당할 것이며, 권력을 의지하면 권력이 달아나게 됩니다. 명예를, 가문을, 아름다움을, 학벌을 의지하면 그것들로 인하여 망신을 당할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러한 것들이 필요한 것만큼 달라붙습니다.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한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붙이셨나이다.”(8절). 손에 붙이셨다는 것은 주관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9절). 전심으로 주님께 마음을 향하는 것입니다. 향한다는 것은 마음의 방향을 주님께 정하고 주님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아사왕은 이 책망을 견디지 못하고 크게 노하여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몇 명의 백성을 학대하였습니다. 아사는 이 후에도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인간 방법을 의지하다가 발에 병이 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잘 믿었던 아사왕이 왜 그렇게 되고 말았을까요? 그것은 스스로 잘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의 지혜로 인하여 라마성 건축하는 일이 파해졌을 뿐 아니라, 오히려 미스바까지 새롭게 건축하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를 교만케 만든 것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17:5). 이처럼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이 우리에게서 떠날 뿐 아니라 저주까지 받습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7절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히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8절) 신앙인들이 영원토록 의지할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사막 가운데서도 물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어떤 환난에도 견디고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20년 한 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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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9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장자의 복’(창 28:10~17)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쌍둥이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장자 에서와 둘째 야곱입니다. 장자는 집안의 기업을 이어가는 맏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안은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영원한 기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입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별거 아닌 것처럼 무시했습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한끼 배불리는 죽 그릇의 가치보다 못한 것으로 계산 했습니다. 오히려 둘째 아들 야곱은 장자권을 빼앗아서라도 갖고 싶을 만큼 탐냈습니다. 야곱의 눈에는 장자권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였나 봅니다. 정말 탐이 날정도로 가치가 있으면 갖고 싶겠지요,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투자합니다, 재능, 시간, 돈, 나의 목숨까지도...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 나라에 걸 수 있는 사람이 기업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사냥 잘하고 강하고 힘 있는 것만 가지고 기업을 이어 갈 수 없습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무시하면서도 장자의 복은 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히 12:17) 에서는 장자의 복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을까요? 장자권에 대한 가치를 모르니 그 복이 어떤 복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장자권과 복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장자권이 복 그 자체 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 집안의 기업을 맡기시면서 주신 말씀에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땅을 주겠다, 너에게 준 복을 통해서 온 민족이 그 나라를 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나는 너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겠고 나는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겠다, 온 세상의 모든 민족이 내가 너에게 준 복을 통해서 함께 그 복을 받을 것이다 (창 12:2~3)‘ 보통 복이 아닙니다, 어마 어마 합니다. 이 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야곱은 막연하게 생각했던 장자의 복을 벧엘 에서 만난 하나님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날 밤, 두렵고 외로운 그 밤에 돌 베게를 베고 자는 데 꿈을 통해서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야곱은 땅에서 부터 세워진 사다리를 보았는데 그 위가 하늘 문 까지 닿아 있었습니다.(요 1:51) 하늘의 문이 열어집니다. 영적 존재들이 하늘과 땅으로 오가는 문입니다. 하늘과 땅이 연결 됩니다. 그 위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으로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기업을 잇는 자인 야곱에게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천국을 주었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받은 축복에 들어와서 함께 네가 받은 복을 얻을 때 천국에 함께 들어갈 수 있다. 이일을 이룰 때 까지 널 떠나지 않을 것이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서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여기 계시는 것을 나는 몰랐구나,’ 하늘의 하나님이 여기에 임재하십니다. 이곳이 성전이며 하늘의 문이 열리는 곳입니다. 야곱은 여기서 예배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고 너는 나의 백성이다’는 영원한 언약이 확인됩니다. 야곱은 이 하나님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받았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 기업을 이어가는 장자의 복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축복이었습니다. 야곱은 그 복을 보았습니다. 장자의 복이 어찌 에서의 죽 한그릇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온 세상 중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이어가는 장자입니다. 온 세상은 교회의 복에 들어와 함께 그 복에 참여하여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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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8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하나님의 기업’(창 25:27~34)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리브가와 결혼을 해서 쌍둥이를 임신했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는 리브가의 태속에서 부터 서로 밀쳐내면서 싸웠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리브가의 태 안에 다른 두 민족이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육으로 난 생명과 성령으로 난 생명이 한 태안에 함께 들어있습니다. 때가 차서 리브가는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에서가 장자이고 후에 야곱이 나왔습니다. 큰아들 에서는 사냥을 잘합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온 고기를 먹으면서 큰아들이 자랑스럽고 든든합니다. 집안의 대를 이어 기업을 맡겨도 안심일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든든한 큰아들을 사랑했습니다. 한편, 야곱을 보니 소심하고 겁도 많고 조용한 기질로 하루 종일 집안에만 박혀 있으니 걱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야곱이 더 강하고 담대해서 오히려 에서가 야곱을 섬길 것 이라고 예정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과 다릅니다. 야곱과 에서가 살면서 무엇을 선택하는 가를 보면 하나님의 예정이 더 확실해 집니다. 어느날, 야곱은 언제나처럼 집안에서 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에서는 들에서 사냥을 하다 왔는지 무척이나 피곤해서 들어왔습니다. 심하게 허기가 져서 곧 죽을 것만 같습니다. 때마침 야곱이 죽을 쑤고 있으니 빨리 먹고 싶었겠지요, 그때 야곱은 자기가 만든 죽을 에서의 장자명분을 받고 팔겠다고 합니다. “내가 지금 배고파 죽게 되었는데 그까짓 장자명분이 뭐가 중요해, 빨리 죽이나 내놔라” 야곱은 에서의 맹세를 받고 장자의 명분을 얻었습니다. 야곱에게는 탐이 나서 빼앗고 싶을 정도로 흠모하는 장자의 명분이 에서에게는 별 게 아니 었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선택이 하나님의 예정을 더 분명하게 합니다. 장자의 명분은 집안의 기업을 잇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안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신 영원한 기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천국입니다. 이것은 인생을 통틀어 놓치면 안 되는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이것을 겨우 죽 한 그릇의 가치보다 못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에서는 지금 당장 배가 고파 죽겠는데 그깟 장자의 명분은 먹고 사는 것에 별 유익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가치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더 가치를 두는 자를 하나님은 악하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정말 심각한 일입니다. (히 12:16) 우리는 살면서 자기가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야곱은 천국의 가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 가치를 알기 때문에 탐이 나서 빼앗고 싶을 정도로 갖고 싶었던 것입니다. 거룩한 욕심입니다. 야곱은 세상에서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천국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치를 알아서 그것이 탐이 난 사람 이었습니다. 그 인생이 완전해서 하나님의 기업을 이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의 기업을 이어가십니다. 야곱은 무너지고 부서진 시간 속 에서도 천국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알고 그것을 붙잡고 놓치지 않았던 인생이었습니다. 에서는 기업을 잇는 것 보다 한 끼 배불리 먹는 게 더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에서의 핵심신념은 이땅 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에서는 기업을 이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한계가 있습니다. 온 세상의 하나님, 온 우주의 왕이 자기 나라를 인간의 역사 속에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 나라를 이어가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리 이 땅의 강하고 능력 있는 자라도 그 나라를 모르면 이어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가는 사람들은 교회입니다. 내 인생이 아무리 깨지고 부서졌어도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갑니다. 이 존재감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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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31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마 1:18~25)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청년요셉이 살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아니지만 다윗왕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있는 성실한 청년입니다. 요셉의 약혼녀 마리아는 착하고 순종적이며 순결한 처녀입니다.(눅 1:38) 요셉의 눈에는 그런 마리아가 사랑스럽고 아름다웠습니다. 요셉은 율법대로 혼전 순결을 지키며 이제 마리아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나가려는 꿈으로 부풀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날벼락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리아가 임신을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충격은 말로 다 할 수 없었겠지요, 마리아와 함께 할 미래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으니 기가 막힙니다. ‘순진하고 착하고 예쁜 나의 마리아가 이렇게 방탕한 여자였던가....’ 더구나 이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마리아는 돌로 맞아 죽어도 합법적입니다. 마리아가 그렇게 죽는 것은 차마 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두렵습니다. 그 두려움이 상실감과 배신감과 분노 그리고 슬픔들과 함께 얽혀 주체할 수 가 없었을 텐데.. 요셉의 그 힘든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 왕가의 경건한 청년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창녀 같은 마리아와 결혼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요셉은 마리아와 헤어지기로 결심했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이 사건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습니다.(마 1:19) 이제 결론은 나왔으니 어떻게 일을 잘 처리해야 할지만 남아 있습니다. 실수하면 큰 일 납니다. 어떻게 감쪽같이 잘 처리해야 하나...그 일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그의 사자를 친히 보내셔서 천사가 꿈으로 찾아 와서 말을 합니다. “요셉,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하지 말아요, 마리아가 임신한 아이는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테니까 이름을 예수라고 하세요, 이것은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미리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잠에서 깨어 났습니다. 너무나 생생해서 꿈인 것 같기도 하고 실제인 것 같기도 합니다. 천사의 강한 메시지가 요셉의 마음에 박혀 버렸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말씀하신 ‘처녀가 낳을 아들 임마누엘’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재’라고 요셉에게 해석해 주었습니다. (눅 1:23)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는 구원이니 임마누엘은 구원자이십니다. 그래서 천사는 요셉에게 아기의 이름을 “예수(구원자)”라고 지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는 ‘자기백성을 각자 자기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자’ 이십니다. 할아버지 다윗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요셉이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던 구약의 성경이 그대로 완벽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마리아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서 아기로 오신 하나님, 그렇다면 그 아기는 육신의 관계로 들어올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러면 성령으로 잉태 되시는 것이 맞지 않은가....’ 꿈에서 천사에게 들은 한마디 한마디가 요셉의 지성을 건드리며 감정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요셉의 의지는 마리아 데려오는 것을 실행 했습니다.(눅 1:24) 경건하고 의로운 요셉은 성령으로 잉태된 마리아가 아이를 낳을 때 까지 동침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신혼을 보내면서 마리아는 아기를 낳았습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낳은 아기의 이름을 꿈에서 천사가 말한 대로 잊지 않고 ‘예수’ 라고 지었습니다.(눅 1:25) 자칫하면 요셉의 의로움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끊어질 뻔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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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7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내 앞에 계신 주님’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마17:24-27). 성전세는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로 드리는 ‘생명의 속전’으로서 20세 이상의 남자들이 성전 유지와 관리를 위하여 일 년에 반 세겔씩 바치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받으러 다니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세금을 내시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일이니 베드로는 당연히 예수님께 여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저하지 않고 “내신다.”하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세상 임금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는지 묻습니다. 아들에게인지 또는 타인에게인지 묻습니다. 그제야 베드로는 세관에게 자신이 한 대답이 잘 못인 줄 깨닫습니다. 베드로의 태도는 오늘 우리 자신의 태도와 같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면 주님께 여쭙지 아니하고, 기도드리지 아니하고 우리 자신이 먼저 나가는 그런 모습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에서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시몬을 향하여 이 전 약속했던(요1:42),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본문에는 베드로라고 부르시지 않고 다시 시몬이라고 하십니다. “너 여전히 옛 사람 시몬을 써 먹는 구나.”는 질책입니다. 우리에게도 옛사람 있고 거듭난 후에 새로 받은 영적인 이름이 있습니다. 옛 사람을 장사지냈다고 하지만 여전히 “내신다.”라고 대답하는 육신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시행착오를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돌아서면 그제야 주님으로부터 강한 책망을 듣습니다. “그 일을 그렇게 처리하면 안 되는데, 너 또 네가 먼저 나갔구나......” 순간은 옳아보여도, 순간은 좋아보여도, 상식적으로 생각 되어도, 기발한 일 같아도 주님께 기도로 여쭙지 아니하면 잘 못 되기 일쑤입니다. 시몬이 먼저 나갔던 베드로는 자신이 한 말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가지 않아도 될 바다를 가야 했으며, 고기를 낚지 않아도 되는데 낚시질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럭비공처럼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육신, 이거 제어 못하면 사망을 체험하게 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8:6).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주님께 버림받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주님보다 자신을 앞세웠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 같은 사람은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16:8) 말씀처럼 자신보다 주님을 항상 앞에 모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자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는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자신보다 주님을 항상 앞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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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2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삭개오의 회심’(눅 19:1~10)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 질문한 부자 청년을 만나시고 예수님은 여리고쪽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는 삭개오가 살고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며 부자였습니다. 삭개오는 로마가 규정한 세금만 걷으면 되는데 그것 보다 더 많이 걷어서 중간에서 가로채 자기 주머니를 채웠습니다. 명백한 도둑질입니다. 게다가 같은 동족의 돈을 속여 빼앗았으니 삭개오를 아는 사람들에게 그는 천하에 몹쓸 인간입니다. 삭개오는 돈 하나만 건지고 나머지는 다 무너진 인생 이었습니다 정당하게 벌어서 합당한 곳에 쓰는 것은 누구든 할 말이 없지만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면서 속여 빼앗아 받은 돈으로는 무슨 일을 해도 인정받지 못합니다.(신 23:18) 새리가 나쁜 게 아니라 그 직업을 악용해서 많은 사람에게 행한 그 악이 나쁜 것입니다. 새리라도 양심껏 걷을 만큼만 걷고 조금 벌면 됩니다.(눅 3:13) 삭개오는 죽기 살기로 오직 돈만 벌기로 작정하고 양심을 굳게 해서 마비시켜 놓았습니다. 삭개오는 돈에 한이 맺힌 사람 같습니다. 돈에 목숨을 건 인생입니다. 돈에 붙잡혀 노예가 되어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지요. 예수님은 이런 삭개오를 불쌍하게 보셨습니다. 삭개오는 자기 동네에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앞으로 달려가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때 지나가시던 예수님이 뽕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올려 보셨습니다. 예수님과 삭개오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때 삭개오가 바라본 눈은 하나님의 눈이었습니다. 긍휼함의 눈, 어느 누구에게서도 받아 보지 못했던 시선입니다. 사람들의 눈은 혐오와 적개심의 눈이었는데 예수님의 눈은 긍휼함의 눈이었습니다. 가장 불쌍하고 긍휼함을 받을 자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눈동자, 하나님의 동공 속에 삭개오가 들어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하나님의 눈에 가장 불쌍하고 가련한 영혼이었습니다, 진짜 불쌍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삭개오 같은 부자입니다. 그때 삭개오의 마음에 빛이 들어오니 그동안 안보이던 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이 보였습니다. 삭개오의 굳어있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할 때 예수님이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빨리 내려와라, 오늘 네 집에 들어 가서 묵어야겠다” 삭개오는 기쁘게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창고를 다 열어라, 최고의 음식을 내어 놓아라, 넘치고 풍족하게 대접하라...’ 그런데 이렇게 즐겁고 기쁜 날, 갑자기 왜 이리 눈물이 나는지.... 멈출 수가 없습니다. 돈만 생기면 무슨 일이든 못할 게 없던 자신의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도 싫은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선 자신의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도 초라해 보이는지,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남들처럼 먹고살 것만 있으면 되는데...눈물이 멈추질 않습니다. 회심의 눈물입니다. 그때 삭개오의 마음속에는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말씀대로 내가 누구 것을 속여 빼앗은 것에 대해서 4배로 보상하겠습니다.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주인 이신 하나님 앞에 반납 하겠습니다“ 삭개오는 영원한 생명을 만났습니다. 그 생명을 보니, 천국이 보이고 영생이 보입니다. 영원한 생명 앞에 서니 모든 게 진짜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실상이 보입니다. 삭개오는 거듭났습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난자입니다. (눅 18:27) ‘그렇게 내 열심 으로 돈을 모았지만 나는 한 번도 행복한 적도 없었고 마음에 만족이 없었는데 지금 이 평안은 뭐지? 왜 이렇게 행복하고 좋을까?’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반납했습니다. 계산으로 하면 잃은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회복입니다, 영혼구원의 회복은 이런 것입니다. 진짜 옳은 길로 가는 것, 옳은 삶을 사는 것, 옳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어서 돈 많이 버는 게 옳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옳음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회심해야 회복됩니다. 회복은 회심의 결과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회개가 생명길입니다. 삭개오에게 일어났던 이 사건이 구원입니다 (눅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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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18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부자 청년 이야기’(눅18:18~30)
    한 청년 관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신앙의 교육을 잘 받아서 모든 율법을 다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재물도 많은 부자입니다. 교회 다니면서 이정도면 다 갖춘 성도입니다. 그 청년관리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예수님 믿고 영접해서 구원 받고 천국 갑니다. 그것은 흔들리고 변할 수 없는 기초입니다, 그의 질문은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을 다 지켰습니다. 사람이 살려면 지켜야 하는 율법을 다 지켰는데 이정도면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겠지요?’ 무엇을 해야 천국갈 수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 모두의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여기에 무엇이 더 있어야 하는 것인가? 천국에 들어가는 데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이것을 채워야 한다고 하십니다.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아~! 이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왜 영생에 돈 문제를 연관시키시는지요...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지키면 사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십계명으로 요약해서 돌판에 새겨서 직접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십계명 중 절반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나머지는 그로 인한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당연히 십계명만 잘 지키면 영생을 얻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자청년은 사람과의 관계는 신앙의 훈련을 잘 받아서 다 지켰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땠을까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내 이름을 망령되게 하지 말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키는 율법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요? “네가 있는 것을 다 팔아...” 하나님께 반납하면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으로 증명합니다. 부자청년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킬 법들은 다 지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킬 것은 그분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 재물인가, 하나님인가, 모든 것은 댓가를 치르는 원리로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버려야 합니다. 생명을 얻으려면 우상을 버리는 게 당연 합니다. 하나님 한분만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키는 법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물인가, 하나님인가? 이것을 확실하게 하고 나서야 하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회심입니다.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과 재물을 연관 시키시는 이유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직 주인은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부자 청년은 큰 부자였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근심 했습니다. 버릴게 너무 많으니 그렇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많아서 못 버리고, 돈이 없는 사람은 없어서 못 버립니다. 너무 없으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한분만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내가 가진 재산을 하나님께 반납할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주인이신 것이 증명됩니다. 현재 여기서 하나님이 주인이신 것을 증명할 수 없으면 후에는 어떻게 천국까지 이어 지겠습니까? 그러니 재물이 있는 자는, 즉 마음에 재물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사람으로 부터 난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으로 부터 난 사람은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거듭한 사람, 성령의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행동의 교정만으로는 안됩니다. 천국은 존재의 변화를 받은 사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발길을 돌리셔서 여리고 쪽으로 가십니다. 그곳에는 삭개오가 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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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12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포도원 주인과 농부 이야기’(마21:33~41)
    포도원을 만든 주인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만든 포도원을 위하여 울타리를 치고 포도즙 짜는 틀 놓을 곳도 만들고 망대도 만들어서 준비를 다 완벽하게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유능한 농부들을 뽑았습니다. 농부는 주인이 뽑아서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목적은 포도원을 잘 관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인이 자신이 고용한 농부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좋은 열매를 많이 얻는 것입니다. 주인은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겨 두고 멀리 여행을 갔습니다. 이제 수확할 때가 가까워졌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에서 자기의 소출을 얻으려고 자기 종들을 포도원에 보냈습니다. 얼마나 열매를 많이 거두었을까... 마음이 많이 쓰입니다. 자기의 비즈니스이니 당연하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농부는 주인의 종들에게 소출을 건네 주기는 커녕 붙잡아 죽이고 때리고 돌로 쳤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반역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주인은 더 많은 종들을 보내었는데 마찬가지로 때리고 죽이고 돌로 치면서 그전의 종들처럼 똑같이 했습니다. 주인은 종들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인의 아들을 아예 포도원의 밖으로 던져서 죽여 버렸습니다. 아들을 죽인 이유는 아들이 주인의 대를 이어 포도원의 주인이 될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죽여야 자기들이 포도원을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마21:38) 상식적으로 농부들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농부들은 주인의 자리를 빼앗아 자기들이 주인이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농부들입니다. 어리석은 게 악입니다. 주인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주인이 되려고 하는 게 이렇게 막무가내의 악입니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기자리의 범위를 넘어서는 게 악입니다.(유1:6) 마땅히 지켜야할 선을 넘어서는 게 악입니다. 주인은 언젠가는 자기포도원으로 돌아오실 텐데... 그때 주인과 얼굴을 맞대고 만날 날이 있을텐데...그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농부들은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주인이 와서 어떻게 할까요?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반역과 악행을 한 농부들을 가만두겠습니까? 다 잡아서 판결을 하실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벌을 받고 죽게 될 것이 뻔합니다. 결국 주인은 돌아오셔서 악한 농부들을 다 진멸해 버렸습니다. 여기까지 생각 못하는 어리석음이 악입니다. 이 비유를 들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눈치 빠르게 이 스토리의 악한 농부가 자기들을 비유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마 21:45) 악하고 어리석은 농부들은 자기들이 왜 뽑혔는지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주인을 위한 포도원 관리자로 고용되어 뽑혔습니다. 농부는 주인에게 뽑혀서 주인에게 고용되었으니 주인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부르심 받은 인생은 사명입니다. 그것을 못해서 힘든 것입니다. 그 목적을 잃으면 삶이 다 망가집니다. 주인을 반역하고 자기가 주인이 되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가 무너지면 전체가 다 무너지는 원리입니다. 이제, 주인은 포도원을 비워 둘 수가 없습니다. 제 때에 주인에게 열매를 잘 갖다 바치는 농부들을 새롭게 뽑았습니다.(마21:41) 새롭게 뽑은 농부들은 교회입니다 (행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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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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