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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IC 데일리 기도] 김우상 학술이사의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기도’
    하나님! 항상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지 않으면, 항상 성령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지 않으면 어느샌가 저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하나님! 또다시 코로나 감염자가 창궐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첫번째 창궐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돈을 벌고 권력을 누리는 집단인 신천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두번째 창궐은 쾌락을 좇아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춤추고 난잡한 행위를 일삼는 곳인 클럽, 주점, 블랙수면방 등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신천지로 인해서는 주로 대구에서 확진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클럽을 다녀간 젊은이들은 주로 서울 경기도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인구수를 감안한다면 서울, 인천, 경기도에서 앞으로 대구보다 10배 이상 많은 확진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교회는 문을 열지 못할 것이고 경제는 다시 침체될 것이고 겨우겨우 버티던 수많은 우리의 이웃들이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하나님! 아직도 대한민국의 백성들과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 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손을 거두지 않는 것이겠지요? 지금 여기를 사는 대한민국 백성은 거의 대부분 정도가 심하든 덜 심하든, 이웃은 어찌 되든지 말든지, 자신의 쾌락과 욕망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를 살고 있습니다. 이태원클럽에서의 제2의 코로나 창궐은 정확히 그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여기를 사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상황은 비슷해 보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기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랑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세상 쾌락과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 우리들의 죄를 회개합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겠습니다. 나의 욕망을 추구하는 일에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이태원클럽 코로나 사태가 일파만파 퍼져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목숨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하나님! 염치 불구하고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긍휼과 자비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 우리에게 안식의 은혜를 내려 주심에 감사를 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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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1
  • [WAIC 칼럼] 임우성 목사의 ‘목사안수 쓴 소리’
    한 후배 목사님이 교회 개척을 했다. 신학교 동기 목사님이 와서 돕는 다 해서 참 감사한 일이라고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교회 문을 닫게 되었다고 했다. 참 안타깝고 슬픈 일이었다. 그 와중에 이런 애기를 한다. 돕기로 하고 오신 목사님이 자신보다는 연배가 높고 사역 경험이 많으신 분이라 1부 설교를 맡겼단다. 1부 설교에 열정, 열정, 다 하시고 설교내용은 '믿음과 행함으로 가득 찬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행함 없는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진노와 껍데기신앙에 대한 회개의 선포 한 마디로 부흥회식 설교를 하셨단다 졸거나 집중하지 않는 성도는 용납지 않고 무서운 책망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어서 2부 담임목사인 자신의 설교시간엔 맨 앞자리 앉아 아예 잤고. 십일조도 안 했다 한다. 교회 문을 닫아서 마음이 아프나 이 분을 안 보게 돼서 시원한 마음도 있다는 애기를 들었다. 주인의 눈에 매운 연기 같은 일꾼이라면 같이 일 할 수 없다. 신학교에서 초청받을 때가 있다. 이때 목회지망생들에게 늘 강조하는 단골메뉴가 있다. 섬기는 교회 담임목사님이 이단이 아닌 한, 충성을 다하라. 하나님이 그분을 세우셨다. 부교역자로서 종의 마음으로 섬기기를 다하십시오, 부교역자인 신분에서 충성과 헌신을 다하시면 당신들이 담임목회자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 강조 한다. 하지만 내가 봐도 반응도 없고 인기는 없다, 그래도 계속 한다 어딜 가든. 사실 전도사로 3년간 사역을 했지만 새벽기도 철야기도 예배참석 전도만 열심히 했다. 사역이 맡겨지지 않았다. 3년 후 처음으로 찬양 인도를 하라 해서 두렵고 떨림으로 여러 번 사양 후 시작했다.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단에 선다는 자체가 두려웠다. 목사안수 받고도 두려워 강대상에 올라가지 못하고 강대상 아래 사회상에서 설교했지만, 또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감히 내가....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강대상 앞에 두렵고 떨렸다. 1996년 남산 순환도로 초입에서 개척했으니, 목회도 어언 24년이 넘어서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다. 떨린다. 주머니 한쪽에 손을 넣고 설교 하는 분들 강대상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아 앉아 계시는 분들도 있다 휜다리 골반 척추 하지정맥류에 좋지 않다고 하니 걱정도 된다. 왠지 주님과 너무 친근하셔서 인가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제가 감히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사도바울은 예수님 믿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백한다, 자신이 목회자 중 가장 작은 자라고, 그 다음 더 시간이 가니 성도 중 가장 작은 자라고 했고, 말년에는 자신은 죄인 중 괴수라고 고백했다. 믿음의 연조가 있을수록 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어느 여 집사님이 찬양을 부르는데 감동받았다. 지금도 여운이 깊다. 가창력이 좋고 스킬이 좋아서가 아니다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라는 가사가 들어가는 곡 인데 이 여 집사님은 '주 예수 나의 당신' 이라 부르지 않고 '주 예수 나의 주님이여' 라고 부르셨다. 이유는 어떻게 예수님을 당신이라 호칭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영어로는 어른에게도 YOU 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우리는 어르신을 당신이라 부를 수 없는 것 같이, 감히 하나님을 당신이라 부를 수 없기에 '주 예수 나의 주님이여' 라고 부른다고 하신다. 요즘 십일조 설교 하면 돈 욕심이나 내는 한심한 시대에 뒤 떨어진 속물 목회자라고, 헌신과 충성 순종을 강조하면 지금이 어느 때 인데 구닥달이 애기나 하고 있어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 말씀이 뒷전이 되어버린 것이다. 예례미야 35장. 레갑족속은 하나님께서 포도주를 마시라 했는데도 선조 요나답 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니 마시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집을 짓지 말고 포도원과 밭을 사지 말고 장막에서 살라고 한 명령을 계속 지키고 살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에게는 재앙을, 이에 대조되는 세상시류에 섞이지 아니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레갑족속에게는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칭찬하시며 복을 선포하셨다. 십 수년 전, 십여 분의 목사님들과 해외에서 해마다 행사가 있어 보름 정도 일정으로 몇 년을 같이 다녔었다. 비행기 안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와인서비스를 요청하여 얼굴이 벌게 지신분도 계시고. 캐나다 아이스와인 공장 방문 때는 와인 한 잔씩을 돌리며 와인공정에 대해 설명을 해 주는데 목사님들의 한 잔만 더 달라는 요청으로 설명회 진행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목사님들인 줄 다 알고 있는데. 예수님 믿기 전 잘 마셨었지만, 믿고 난 후 술을 끔찍하게 여기고 결별한 터라 거절하니 제 것을 낚아채가는 목사님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그분들이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셨고 지금도 그렇다. 적어도 하나님께 부름 받은 목회자라면 와인 한 잔 정도는 괜찮다고 세련되게 살지 말자. 세상과 섞여 살지 말자 술까지 마시려면 세상 직업을 가지라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막중한 위치에 있지 않은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1:16) 목회자를 목회자답게 보지 않고 존경하여 섬기는 전통도 사라지고 있다. 담임목사님의 생일을 아시냐고 물어보면 요즘 촌스럽게 그 딴거 챙기는 시대가 아니란다, 그 교회 중직들의 반응이다. 제가 섬기는 교회는 전혀 아니지만. 하지만 시대가 이렇게 되어 버렸다. 직장에서도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당연히 지시 할 사항인데도 항의 한단다. 노동법, 근로기준법, 운운하면서 일 열심히 하는 직원보다는 베짱이 같은 직원이 특히 그렇단다. 요즘은 그대로 그냥 놔둘 수밖에 없단다. 자칫하면 고발당한단다. 교회에서도 똑같은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충성은 없고, 주중예배와 새벽예배에는 참여도 안하고 헌금도 제대로 안하는 분들이 불평과 불만을 많이 한다. 마치 교회를 무너 뜨릴려는 신천지의 수법과 같다. 방송에는 잘 나와서 복음 허무는 말, 교회 흠만 족집게 같이 찾아내서, 발표하는 그런 분들 같이 말이다. 이런 현상은 남의 일이다,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나와는 상관없다고 나단의 책망을 받기 전 다윗같이, 실상은 나 자신을 돌아볼 때다. 최근에 일어난 일이다 가족 없이 홀로 계신 분이 소천하시기 전 바른말 잘하기로 소문난 유명목사님께 억대의 유산을 공증까지 해서 다 드리면서 목사님 제 장례식에는 부조금을 절대 받지 말아주세요, 신신 당부 하면서 눈을 감았다. 눈 감자마자 부조금부터 받더란다. 적잖은 분들이 실망했다고 한다. 돈 된다면 무슨 일이든 하는 발람이 생각난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25:21) 교회 돈 쓰고 남의 돈 받는 건 조자룡이 헌 칼 쓰듯 하면서, 자기들은 착하고 여리단다, 소심하단다. 그래서 당하기만 하고 남을 돕기만 하는 성품들이란다. 욕심이 없단다. 정작 하나님의 거울에 나 자신을 봐야 하지 않을까. 저의 장모님은 장인어른이 믿기 전까지 월급에서 몰래 십일조를 떼며 열심히 신앙생활 하셨다, 실상 쫓겨 날 각오로 신앙생활 하신 거다. 평신도가 믿음이 더 좋은 경우가 수다하다. 적어도 평신도는 예배에 순서 안 맡겨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예배드리러 나온다. 목회자들 중 행사에 자기를 순서 안 맡겼다고 평생 원수 맺는 사람들 많이 봤다. 거동도 제대로 못 하시고 축도도 잃어버리고 못 하시면서, 자신을 강사로 안 세워 준다고 이를 가는 분도 봤다. 박조준 목사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발음에 문제 생기면 대중설교 안 한다. 자신에게 치매가 오면 절대 자신을 세우지 말라는 부탁이셨다. 너무 절제가 몸에 베어 계신다 서슬 퍼런 군부 에게도 다 거절하시다 그 어려움, 수치 다 당하셨는데도 지금도 여전하시니 독야청청이 어울리는 의복같이 여겨진다. 유명한 분들 중 죽을 때까지 원수 관계 못 풀고 가는 분들, 이름 대기도 바쁘다. 이유는 자기 순서자로 안 불렀다, 자기 안 세워 줬다는 것이다. 차라리 행사에 헌신도 하고 재정적 공헌도 하면서 순서를 바라는 것이 오히려 양심적이고 정직하다 받으려고만 하기에 그렇다. 그래서 목사와 중직자 자녀와는 결혼시키지 말라는 속설까지 생겼단다. 다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난 아이들이 받을 줄 만 아는 습성을 본받아 고질병으로 자리 잡아 일생 베짱이 같은 신앙으로 살아간다. 많은 분들이 어디서든지 설교를 하고 싶어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헌신 봉사 십일조 주일성수 회개하라고 목청 높인 설교와 기도는 감정까지 고조 되어 울먹이면서까지 너무 잘한다. 그러나 설교는 설교자 자신에게 제일 먼저 적용되어야 한다. 설교대로 살아내야 한다. 이때 더욱 목사안수가 중요함을 절감한다, 안수 받아 서는 안 되는 분들을 거절치 못할 분 추천이라고, 스승의 자녀라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분이라고, 많이 배운 고학력 박사라고, 유명연예인이라고, 또는 유명깡패 출신을, 자질과 인성이 안 되는 분들을 목사안수하면 안 된다. 십 여년 전 일이다. 타 단체에서 임원으로 실무에 몸담고 있을 때였다. 최고 학력과 외국 유수의 대학 박사학위 소지자가 목사고시 청원했다. 더구나 그분 아버지가 소천 하셨지만 한국에서 존경받는 최고의 신학자 중 한 분이셨다. 면접 때 보니 자세가 면접관이 반대로 그분 같았다 왜 목사가 되려 합니까? 질문에 라이센스가 여러 개 있는데 목사 라이센스도 필요해서란다. 저는 불합격판정을 내렸다. 그런데 합격해서 신학교 강의도 하고 자신의 가족에 대해 부정적으로 쓴 책을 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합격 이유는 면접관인 임원분들과 그 분의 아버님 신학자와 친한 사이였단다. 그래서 합격시켰단다. 가끔 공통된 문제를 가지고 문의 하는 분들이 있다, 소위 제일 크다는 양대 교단 출신자 중에서 자기 교단에서 목사 고시, 강도사고시까지 통과했는데 외국 시민권자라 안수가 안 된다 등등의 이유이다. 안수 신청할 수 있냐는 것이다. 문의 가능하다, 고시 청원도 가능하다. 하지만 자기는 큰 교단에서 목사고시 강도사고시 합격했으니 여기서는 그냥 목사고시 없이 안수 해 달라는 분들이 상당수다. 너무 무례하다 큰 교단에서는 뺨을 맞고 생면부지 타 기관에는 그것도 전화로 생떼를 부린다. 예수 믿는 것은 자기의 권을 쓰지 않는 것을 모르는 분은 아예 목회자가 되어 서는 안 된다. 강자에 무릎 꿇고 약자에 갑질 하는 자는 목회자가 되지 말자. 십자가 없이 부활 영광 누리겠다는 분들은 목회를 꿈도 꾸지 말라. 또 한 분 잊혀 지지 않는 분이 있다. 미국 신학교 교수인데 한국 신학교에서 교수로 러브콜을 받았는데 한국서는 박사학위 외에 목사 안수증을 원한다고 목사안수를 서류로만 받을 수 있냐는 기상천외한 신학교 교수도 있었다. 호통을 쳤더니 다른 단체로 갔다. 이런 분들이 교회개혁 외치는 모습 보면 가슴이 저리다 못해 통증까지 온다. 목회자로 부르신 분에 마음에 들어야 한다. 세상 조건이 아무리 훌륭해도. 최근 국제독립교회연합회 목사고시와 면접을 마쳤다. 엄격하게 한 다 소문이 나서, 지원자가 적다. 하지만 남은 자와 같이 알곡들이 모인다. 우리 모두가 하늘나라를 두렵고 떨림으로 준비하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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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8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미완성된 바벨탑’(창 11:1~8)
    함의 아들 구스가 니므롯을 낳았습니다. 니므롯은 영웅 이었습니다. 시대마다 영웅들이 있습니다. 사람 중에서 가장 뛰어나서 보통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이런 탁월한 자들이 있습니다, 니므롯과 그를 따르는 무리 들은 동방의 시날에 가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돌로 성을 쌓던 시대에 벽돌을 발견하고 진흙을 쓰던 시대에 역청을 만들었습니다. 대단한 발견입니다. 그들은 사람 중에서도 뛰어난 위대한 사람들인 것은 분명합니다.위대한 사람들이 발견한 그것으로 무엇을 하는가 보니 그들은 자기들의 세상을 만듭니다. “자, 벽돌을 견고하게 구워서 무너지지 않는 하늘까지 닿을 수 있는 도시를 만들자. 그 도시에 인류를 하나로 묶어 우리의 세상을 만들고 그들을 다스리는 한 사람을 세우자!” 자기들이 발견한 뛰어난 실력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세상을 창조합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 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창조주가 되어 인류를 다스리며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합니다. 더 높이 더 높이 올라가다 보니 가장 높은 자리가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그곳이 가장 높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곳만 접수하면 이제 다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만드는 성을 보려고 내려오십니다. 위대한 인간은 창조주의 자리를 대신하여 자기들이 하나님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지만 그들 위에는 분명히 하나님이 계십니다. 창조주 하나님만 자기가 만든 피조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자리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모순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인류의 가장 뛰어난 이들이 사실은 가장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결국은 시날에서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인류 역사 속에서 교회와 대적하고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창조주의 한 번의 움직임으로 결국 그 성은 완성하지 못하고 그들은 성 쌓기를 그치고 온 땅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 성의 이름이 바벨입니다. 바벨탑은 결국 쌓지 못했습니다, 그 영웅의 후손들은 여전히 인류 중 에서는 가장 탁월한 영웅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겠지요, 자기들의 세상을 창조하겠다는 조상들의 유업을 계속 충실하게 이어나갈 것입니다. 인간은 창조주처럼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만든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입니다. 보이지 않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세상인데 힘을 실어주니 진짜 현실이 되어 버려서 존재하지도 않는 사이버 세상이 현실에서 힘있게 존재합니다. 실제는 없는 세상인데 접속만 하면 현실이 되는 세상입니다. 학교도 될 수 있고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곳, 모임장소, 매매가 이루어 지는 곳, 탁월한 인류는 인간이 만든 자기들의 세상 안으로 창조주가 만든 땅의 세상을 끌어 들였습니다. 인간이 만든 세상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땅의 세상을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가상의 세계는 그 안으로 영적인 예배 까지 끌어 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합리적인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가상세계의 예배도 좋다’라고 안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다 동원해서 최고의 것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가를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분 이시며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믿음도 그 어려운 시대에 비례해서 더 강해야 지킬 수 있습니다. 그게 계산이 맞지요. 인류는 자기 나라를 만들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갑니다. 바벨탑은 완성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역사 속에서 인생들이 자기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해도 최종결제는 그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 사인을 하셔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그때는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으신 가상의 세상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것만 존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만 남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에 들어오라, 그 나라에 들어와야 산다,’고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경기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장애물이 있더라도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까지 끝까지 완주하여 승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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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6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습니다’
    누가 이런 사람 모르시나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람을 찾습니다. 1.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5:1). ‘공의’는 하나님께도 옳고 타인에게도 옳고 자신의 양심에도 옳은 것을 뜻합니다. 2.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는 사람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겔22:30). 여기서 성은 ‘거룩함’을 의미합니다. ‘거룩함’의 성을 쌓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찾습니다. 3.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13:22).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같이 기뻐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같이 싫어하는 마음입니다. 공감입니다. 4.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사람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겔9:4). 두 종류의 탄식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한 탄식과 타락한 세상으로 인한 탄식입니다. 롯은 소돔성의 죄로 인하여 날마다 의로운 심령이 상했지만(벧후2:6-8) 자신의 죄로 인한 탄식은 하지 않았습니다. 겨우 불 가운데서는 구원을 받았지만 두 딸과 함께 굴에서 살면서 술로 여생을 보냅니다. 5. 전심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는 사람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16:9). 우리 마음을 나누게 하는 것, 전심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염려와 재리와 일락입니다(눅8:14). 그것들로 인해 기도해야 합니다. 6.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행하는 사람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인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 하리라”(창18:32). 하나님은 자신이 경건치 못하는 것을 깨닫고 주님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믿는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십니다(롬4:5). 7.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사람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14:2-3). 지각으로 하나님을 찾는 행위는 거듭난 양심, 곧 선한 양심을 힘 있게 쓰는 것입니다(벧전3:21). 8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는 ‘성령과 진심’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뜻합니다. 9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 나의 거룩한 기름으로 부었도다.”(시89:20). 종은 자기 뜻대로 살지 않고 주인 한 분의 뜻을 찾아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습니다. 10 길 잃어버린 사람 “인 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목자의 입장에서 잃어버린 것은 ‘양’이지만 양의 입장에서 잃어버린 것은 ‘목자와 길’입니다. 양의 입장에서 온 우주에 충만하신 주님을 왜 잃어버릴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골1:21). 회복하기 위해서는 순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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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6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모세의 설교’(신 8:11~20)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땅을 목전에 두고 건너편에서 그 땅을 바라보고 섰습니다. 40년동안 광야에서 참 길고 먼 세월을 지나서 왔습니다. 많은 일들을 함께 겪고 드디어 그 땅에 들어가기 바로 직전, 백발이 성성한 모세가 그 앞에서 당부하고 또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모세의 말을 듣는 청중은 20대입니다. 20여년 동안 자기가 겪고 보고 아는 것 이상으로는 알 수 없는 세대에게 노인 모세가 120년 동안 자기가 겪고 보고 아는 것을 쏟아놓는 주옥같은 설교입니다. 그 내용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자 이제 가나안의 그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분명히 복을 주실 것이다. 그때 너희는 ‘하나님을 잊고,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않는 일이 없도록 삼가라 (신 8;11)’ 고 합니다. 세상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은 가장 중요한 삶의 원칙으로 세웁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냥 자기가 열심히 성실하게 사는 것 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번성하게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라’ 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자기 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그 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모든 피조물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존재하고 번성합니다. 하나님이 피조물 중의 인간을 특히 교회를 자기 것으로 삼으시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이 나를 상대해 주시는 것입니다, 좀 더 가까이에서 느껴지도록... 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으로 대한다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가장 기본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들에게는 삶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이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합니다. 잊지 않기 위해서 의지적으로 기억을 붙잡아서 흘려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어떻게 홍해를 갈라 그 백성을 빼내어 오셨는지, 광야에서 어떻게 인도 하셨는지... 불뱀과 전갈이 있는 위험한 광야에는 물도 먹을 양식도 없었습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40년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반석에게 물을 내라고 명령 하셔서 거기서 나오는 물을 마셨고, 아무도 몰랐던 신비한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주셔서 먹이시면서 그곳을 지나게 하셨습니다. 기적입니다. 광야는 내가 누구인지가 분명하게 보이는 곳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나, 그래서 하나님이 절실하게 필요한 나, 하나님이 아니면 내 힘으로는 살 수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이 보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나의 본질이 다 드러나서 처절하고 비참한 광야가 저주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라 (신 8:16)” 하나님의 본심은 마침내 광야가 나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장소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복은 광야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야 복인데 광야에서는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그 말씀이 들리니 순종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을 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복은 비로소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모세는 말합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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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8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2:3). 제가 시골에 살았을 때는 동네에 보일러를 설치해 놓은 집은커녕 연탄을 피우는 가정도 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마른 솔잎과 잔솔가지들을 모아다가 불을 지피기 마련인데 그런 나무들에는 구들이 쉽게 달궈지지 않았습니다. 도끼로 장작을 패서 아궁이에 집어넣어야 달구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구들이 얇을수록 방은 쉽게 따뜻해졌지만 반면에 두꺼운 구들은 어지간한 장작에도 반응이 없었습니다.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벌써 몇 번은 일어섰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을 지피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반드시 달궈진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확신이 있기에 멈추지 않고 장작을 넣었던 것입니다. 벌써 오래 전의 일입니다. 친구가 당시 잘 나갔던 회사에서 사표를 쓰고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아니, 왜 그렇게 좋은 직장을 그만 두고 나왔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너무 쉽게 들어갔기 때문이랍니다. 쉽게 들어갔기 때문에 회사에 대한 애착이 가지 않아 더 공부해서 자신의 마음을 쏟을 수 있는 직장을 찾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인들 가운데는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거나 믿음에서 떠난 주변 사람을 위하여 애타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배우자를 위하여, 혹은 가족이나 친척을 위하여 오랫동안 기도를 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수고와는 무관하게 그들이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소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는 약속은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구들에 불을 지피면 반드시 달구어지리라는 확신처럼 구원에 대한 소망을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구원은 가족단위입니다. 노아의 의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반항심이 많았던 함도 구원을 받았습니다(창7:6-7).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들을 숨겨주었기 때문에 그와 그의 부모 형제들이 구원 받을 수 있었습니다(수6:25). 사도행전에 나오는 간수 또한 그의 온 집이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행16:33). 내가 믿기 때문에 다른 형제들도 구원을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로 믿으면,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면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형제들에게도 생명이 역사하여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실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시작한 지 1년 안에 결실을 거두지만 다른 사람은 10년 혹은 20년이 되어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심지어 기도한 사람이 고인이 되어서야 나타나기도 합니다. 더디거나 느리다 해도 기도를 멈추지 말고 계속해야 합니다. 쉽게 달구어진 구들은 곧 식어버리지만, 오랜 시간 동안 달구어지는 돌은 쉽게 식지 않듯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어간 후에 응답 받은 기도는 그렇지 못한 내용들보다 감사와 기쁨이 더 크며 오래 지속됩니다. 본문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2:3)는 말씀은 구원의 때만 의미하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모두 적용 됩니다. 육신은 조급한 특징이 있지만 영혼의 성장은 인내할 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역시 사랑의 감정이 없을지라도 의지를 써서 사랑을 묵상하고 말씀을 믿고 순종해 나가면 분명히 마음의 할례를 베풀어 주셔서 사랑의 감정까지 주실 때가 있습니다.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와 간구의 불을 지피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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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8
  • [WAIC 데일리 기도] 문철진 회장의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아무리 생각해도 날 위한 당신 사랑 알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 많은 희생 감수하면서까지 날 사랑하시는지요? 그만큼 가치 있는 내 존재인가요?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할 이유가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닌 게지요. 사랑은 사랑하기에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코로나19라는 한낱 미물인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혼란의 도가니로 빠트리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당신의 사랑인 고귀한 생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의료진들의 헌신과 가슴 아픈 사연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사랑한다던 저희에게 이 비극을 허락하신 이유도 사랑하기 때문인지요? 닥칠 때는 고난이지만 지나고 나면 축복이었던 때가 많았음을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고 개개인의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습니다. 잘 감당하였을 때 당신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긍휼의 하나님 아버지! 저희에게 회개의 영을 내려주시옵소서. 가슴치고, 무릎 꿇고 눈물로 회개하는 당신의 영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간악한 저희로선 당신의 은혜 아니면 그 어떤 거룩에도 속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의 은혜에 의한 회개와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는 문입니다. 회개합니다. 구원받은 자녀답게 살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당신에 대한 믿음을 저 자신의 안위와 출세에 이용했음을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이웃 사랑은 말뿐이었고 실천은 저 자신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이 먼저였습니다. . . . 긍휼하신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죄인이었던 바울에게 내려주신 은혜를 저희에게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당신 사랑 아니고는 전혀 변할 수 없는 저희입니다. 염치없게 당신 사랑에 의지합니다. 돌아온 탕자만큼도 못한 저희지만 그래도 당신이 자녀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승리의 하나님 아버지! 저 멀리서 승리의 나팔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보내주신 불 병거와 천만대군이 마귀들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육안으론 코로나19의 공포를 보지만 영안을 열면 당신 사랑이 충만함이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당신 사랑에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립니다. 죄 많은 저희지만 그래도 사랑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감격으로 환희로 세상에 나아갑니다. 거룩한 성결의 삶, 구별된 삶을 살겠습니다. 성령으로 인도하여 주시고 기드온의 300 용사 삼아주시옵소서. 날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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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7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신앙인에게 고난이란?’(벧전 4:15~16)
    신앙인에게 고난은 여러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 4장을 통하여 고난의 종류와 그것이 가져다주는 유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오는 고난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15절). 신앙인이든 아니든 이러한 죄로 인한 고난은 형벌에 해당 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아담과 하와를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 결과 영이 죽게 되었고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게다가 아담은 땀을 흘려야 땅의 소산을 먹게 되고 하와는 잉태의 고통을 더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죄의 결과입니다(창3:16-19). 우리 하나님께서는 어떤 종류의 죄라도 회개하면 용서해주지만 죄의 값은 받아야 합니다. 둘째는 죄를 그치기 위한 고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1절).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고난을 갑옷으로 삼아야 합니다. 왜 고난을 갑옷으로 삼으라고 할까요? 예를 들어 알코올에 중독되지도 않고 처음부터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 금주는 고난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알코올에 중독된 사람이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고난입니다. 고난이 특별한 고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내게 익숙한 것을 하지 않는 것이 고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로 우리는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을 따라 육신대로 살아가는데 중독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육신대로 살아가지 않으려고 하니까 고난인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니 고난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갑옷으로 삼으라고 한 것입니다.셋째는 믿음의 시련을 위한 고난입니다(12절). 우리 하나님은 자녀 된 신앙인들을 그냥 두지 않고 자라갈 수 있도록 교육하고 훈련하십니다. 요셉처럼, 욥처럼, 다윗처럼 시련하십니다. 욥은 이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넷째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입니다(14절). 믿음을 지키기 위한 고난입니다. 다니엘과 다니엘의 세 친구,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핍박을 받은 많은 성도들, 주님을 부인하지 않기 위하여 끝까지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이 이에 해당되는 분들입니다. 신앙인들이 고난을 받을 때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받는지 알기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자신의 잘 못 때문에 받는 고난을 하나님의 훈련이라고 생각한다면 회개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믿음의 시련을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위에 소개한 어떤 종류의 고난이든 신자들에게는 유익하다는 것입니다(시119:71). 죄 값으로 받는 고난은 회개하기에 유익하며,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받는 고난이나, 하나님의 특별한 훈련이거나, 끝까지 믿음을 지키기 위한 고난은 성도를 거룩하게 하며 또 위로가 따르기 때문입니다(고후1:5). 고맙게도 주님께서는 죄 때문에 받는 형벌을 제외한 위 세 가지 고난들을 모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여겨주십니다(벧전4:12-13).신촌예배당은 안병모 목사가 개척한 교회입니다. 세상을 떠난 안 목사의 뒤를 이어 강성률 목사가 신앙의 공동체를 이끌고 있습니다. 청교도 정신과 말씀 중심, 세속에 물들지 않는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온 성도가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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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4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하나님의 손’(창 39: 1~6)
    본문은 요셉이 바로의 신하 보디발 장군의 집에 노예로 팔려간 비참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은 이 비참한 스토리와 연결이 안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절 ‘요셉은 형통한자가 되어’ 상식적으로 어떻게 노예가 형통할 수가 있습니까? 성경은 노예 요셉이 형통한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노예가 형통 할 수 있는 것은 주안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요셉의 형통은 살면서 가장 무너진 곳 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형통한 사람 요셉에게는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었습니다, 상처가 가족 입니다. 요셉은 열 일곱 살 때 형들이 죽이려다 노예로 팔아서 애굽 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가해자가 가족입니다. 살다 보면 내 잘못도, 내 선택도 아닌 불행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원한 것도 아닌데 남에 의해서 내 삶이 처절하게 무너지기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겨야 하나요? 생각하고 분석해 봐도 억울한 것 밖에는 없습니다. 자기를 죽이자고 하면서 음식을 먹고 있는 형들의 소리를 듣고 있던 우물 속, 노예로 거래가 되어 집을 떠나 멀리 이집트로 끌려가는 길, 애굽에 도착해서 보디발 저택의 대문을 처음으로 본 그날, 요셉은 어느 날 갑자기, 일생일대 위기가 정신없이 착착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무엇을 했을까요? 계속해서 여호와를 붙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나와 함께 계셔 주세요, 나를 놓지 마세요, 내가 두렵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형통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시 50:15)” 하나님은 말씀대로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부르는 요셉과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집에 들어갈 때 이미 형통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예였던 요셉에게 이미 총리대신의 자리를 주셨고 요셉은 자기가 받은 복을 일생을 통하여 취하여 마침내 총리대신으로 받은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노예소년 이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는 노예소년 요셉 안에 총리대신이 들어 있었습니다. 시간보다 크신 하나님은 시간의 밖에서 보십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꺼번에 다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재 모습이 구원의 기준에 미달 되는 형편 없는 모습일지라도 하나님은 미래에 구원받은 완전한 나의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십니다. 형통한 요셉은 마침내 우여곡절을 다 겪어내고서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저는 요셉이 하나님을 믿고 성공하고 잘되었다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택하신 소명을 이룬 것입니다. 그 소명을 위하여 총리대신 이라는 자리를 주셨습니다. 요셉은 이것을 알고, 자기가 받은 것을 자신의 소명을 위해서 쓴 것입니다. 요셉은 이미 주신 축복을 받아서 취하였고, 그 자리에서 소명을 이루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절망은 환경이 아닙니다. 소명을 잃어버린 것이 절망입니다. 우리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처참하게 불행한 요셉의 가족으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만드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다면 얼마나 불완전하고 비뚤어진 인생인지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미래를 믿고 소망을 가진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집니다. 흑암 같은 요셉의 잔혹한 가정사에도 하나님을 믿는 한 사람이 있으면 빛나는 영광으로 변화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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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2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하신 일’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요11:6). 아직은 젊고 건강하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어느 날 갑자기 병들었습니다. 병은 의원을 찾아갈 틈도 없이, 간호할 틈도 없이 빠르게 악화되었습니다. 목숨이 경각간에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38년 된 불치 병자를 고치시고, 시각 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며, 중풍병자를 고치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생면부지의 사람도 부탁하면 고치시는 예수님께서, 특별한 관계에 있는 두 자매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위해서라면 열 일 다 제쳐 놓고 오실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처럼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함을 들으시고도 그들의 기대처럼 곧바로 오시지 않고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십니다. 그리고는 마치 나사로가 죽는 날을 기다리기라도 하신 것처럼 나사로가 죽은 후에 비로소 베다니를 향하여 떠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육안으로 보기에 모두가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도 나사로처럼 갑자기 병들 수도 있고, 또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는 일도 어그러지고 풍비박산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기도가 즉각 응답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요단 건너편에 머무시는 동안 마르다, 마리아의 집에서는 애타게 예수님을 기다렸지만, 오히려 상태가 더 악화 되어 죽음까지 가게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타나는 현상이 간혹 우리의 기대에 맞지 않는다 해도 신자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 일을 노래하였느니라.”(욥36:24). 신자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우리의 지각을 초월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고전2:9). 마르다 마리아 자매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야곱 생각에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나타날 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신의 뜻대로 안 되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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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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