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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마 1:18~25)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청년요셉이 살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아니지만 다윗왕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있는 성실한 청년입니다. 요셉의 약혼녀 마리아는 착하고 순종적이며 순결한 처녀입니다.(눅 1:38) 요셉의 눈에는 그런 마리아가 사랑스럽고 아름다웠습니다. 요셉은 율법대로 혼전 순결을 지키며 이제 마리아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나가려는 꿈으로 부풀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날벼락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리아가 임신을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충격은 말로 다 할 수 없었겠지요, 마리아와 함께 할 미래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으니 기가 막힙니다. ‘순진하고 착하고 예쁜 나의 마리아가 이렇게 방탕한 여자였던가....’ 더구나 이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마리아는 돌로 맞아 죽어도 합법적입니다. 마리아가 그렇게 죽는 것은 차마 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두렵습니다. 그 두려움이 상실감과 배신감과 분노 그리고 슬픔들과 함께 얽혀 주체할 수 가 없었을 텐데.. 요셉의 그 힘든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 왕가의 경건한 청년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창녀 같은 마리아와 결혼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요셉은 마리아와 헤어지기로 결심했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이 사건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습니다.(마 1:19) 이제 결론은 나왔으니 어떻게 일을 잘 처리해야 할지만 남아 있습니다. 실수하면 큰 일 납니다. 어떻게 감쪽같이 잘 처리해야 하나...그 일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그의 사자를 친히 보내셔서 천사가 꿈으로 찾아 와서 말을 합니다. “요셉,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하지 말아요, 마리아가 임신한 아이는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테니까 이름을 예수라고 하세요, 이것은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미리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잠에서 깨어 났습니다. 너무나 생생해서 꿈인 것 같기도 하고 실제인 것 같기도 합니다. 천사의 강한 메시지가 요셉의 마음에 박혀 버렸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말씀하신 ‘처녀가 낳을 아들 임마누엘’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재’라고 요셉에게 해석해 주었습니다. (눅 1:23)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는 구원이니 임마누엘은 구원자이십니다. 그래서 천사는 요셉에게 아기의 이름을 “예수(구원자)”라고 지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는 ‘자기백성을 각자 자기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자’ 이십니다. 할아버지 다윗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요셉이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던 구약의 성경이 그대로 완벽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마리아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서 아기로 오신 하나님, 그렇다면 그 아기는 육신의 관계로 들어올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러면 성령으로 잉태 되시는 것이 맞지 않은가....’ 꿈에서 천사에게 들은 한마디 한마디가 요셉의 지성을 건드리며 감정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요셉의 의지는 마리아 데려오는 것을 실행 했습니다.(눅 1:24) 경건하고 의로운 요셉은 성령으로 잉태된 마리아가 아이를 낳을 때 까지 동침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신혼을 보내면서 마리아는 아기를 낳았습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낳은 아기의 이름을 꿈에서 천사가 말한 대로 잊지 않고 ‘예수’ 라고 지었습니다.(눅 1:25) 자칫하면 요셉의 의로움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끊어질 뻔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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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7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내 앞에 계신 주님’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마17:24-27). 성전세는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로 드리는 ‘생명의 속전’으로서 20세 이상의 남자들이 성전 유지와 관리를 위하여 일 년에 반 세겔씩 바치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받으러 다니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세금을 내시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일이니 베드로는 당연히 예수님께 여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저하지 않고 “내신다.”하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세상 임금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는지 묻습니다. 아들에게인지 또는 타인에게인지 묻습니다. 그제야 베드로는 세관에게 자신이 한 대답이 잘 못인 줄 깨닫습니다. 베드로의 태도는 오늘 우리 자신의 태도와 같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면 주님께 여쭙지 아니하고, 기도드리지 아니하고 우리 자신이 먼저 나가는 그런 모습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에서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시몬을 향하여 이 전 약속했던(요1:42),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본문에는 베드로라고 부르시지 않고 다시 시몬이라고 하십니다. “너 여전히 옛 사람 시몬을 써 먹는 구나.”는 질책입니다. 우리에게도 옛사람 있고 거듭난 후에 새로 받은 영적인 이름이 있습니다. 옛 사람을 장사지냈다고 하지만 여전히 “내신다.”라고 대답하는 육신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시행착오를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돌아서면 그제야 주님으로부터 강한 책망을 듣습니다. “그 일을 그렇게 처리하면 안 되는데, 너 또 네가 먼저 나갔구나......” 순간은 옳아보여도, 순간은 좋아보여도, 상식적으로 생각 되어도, 기발한 일 같아도 주님께 기도로 여쭙지 아니하면 잘 못 되기 일쑤입니다. 시몬이 먼저 나갔던 베드로는 자신이 한 말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가지 않아도 될 바다를 가야 했으며, 고기를 낚지 않아도 되는데 낚시질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럭비공처럼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육신, 이거 제어 못하면 사망을 체험하게 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8:6).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주님께 버림받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주님보다 자신을 앞세웠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 같은 사람은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16:8) 말씀처럼 자신보다 주님을 항상 앞에 모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자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는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자신보다 주님을 항상 앞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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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2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삭개오의 회심’(눅 19:1~10)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 질문한 부자 청년을 만나시고 예수님은 여리고쪽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는 삭개오가 살고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며 부자였습니다. 삭개오는 로마가 규정한 세금만 걷으면 되는데 그것 보다 더 많이 걷어서 중간에서 가로채 자기 주머니를 채웠습니다. 명백한 도둑질입니다. 게다가 같은 동족의 돈을 속여 빼앗았으니 삭개오를 아는 사람들에게 그는 천하에 몹쓸 인간입니다. 삭개오는 돈 하나만 건지고 나머지는 다 무너진 인생 이었습니다 정당하게 벌어서 합당한 곳에 쓰는 것은 누구든 할 말이 없지만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면서 속여 빼앗아 받은 돈으로는 무슨 일을 해도 인정받지 못합니다.(신 23:18) 새리가 나쁜 게 아니라 그 직업을 악용해서 많은 사람에게 행한 그 악이 나쁜 것입니다. 새리라도 양심껏 걷을 만큼만 걷고 조금 벌면 됩니다.(눅 3:13) 삭개오는 죽기 살기로 오직 돈만 벌기로 작정하고 양심을 굳게 해서 마비시켜 놓았습니다. 삭개오는 돈에 한이 맺힌 사람 같습니다. 돈에 목숨을 건 인생입니다. 돈에 붙잡혀 노예가 되어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지요. 예수님은 이런 삭개오를 불쌍하게 보셨습니다. 삭개오는 자기 동네에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앞으로 달려가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때 지나가시던 예수님이 뽕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올려 보셨습니다. 예수님과 삭개오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때 삭개오가 바라본 눈은 하나님의 눈이었습니다. 긍휼함의 눈, 어느 누구에게서도 받아 보지 못했던 시선입니다. 사람들의 눈은 혐오와 적개심의 눈이었는데 예수님의 눈은 긍휼함의 눈이었습니다. 가장 불쌍하고 긍휼함을 받을 자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눈동자, 하나님의 동공 속에 삭개오가 들어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하나님의 눈에 가장 불쌍하고 가련한 영혼이었습니다, 진짜 불쌍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삭개오 같은 부자입니다. 그때 삭개오의 마음에 빛이 들어오니 그동안 안보이던 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이 보였습니다. 삭개오의 굳어있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할 때 예수님이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빨리 내려와라, 오늘 네 집에 들어 가서 묵어야겠다” 삭개오는 기쁘게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창고를 다 열어라, 최고의 음식을 내어 놓아라, 넘치고 풍족하게 대접하라...’ 그런데 이렇게 즐겁고 기쁜 날, 갑자기 왜 이리 눈물이 나는지.... 멈출 수가 없습니다. 돈만 생기면 무슨 일이든 못할 게 없던 자신의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도 싫은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선 자신의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도 초라해 보이는지,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남들처럼 먹고살 것만 있으면 되는데...눈물이 멈추질 않습니다. 회심의 눈물입니다. 그때 삭개오의 마음속에는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말씀대로 내가 누구 것을 속여 빼앗은 것에 대해서 4배로 보상하겠습니다.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주인 이신 하나님 앞에 반납 하겠습니다“ 삭개오는 영원한 생명을 만났습니다. 그 생명을 보니, 천국이 보이고 영생이 보입니다. 영원한 생명 앞에 서니 모든 게 진짜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실상이 보입니다. 삭개오는 거듭났습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난자입니다. (눅 18:27) ‘그렇게 내 열심 으로 돈을 모았지만 나는 한 번도 행복한 적도 없었고 마음에 만족이 없었는데 지금 이 평안은 뭐지? 왜 이렇게 행복하고 좋을까?’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반납했습니다. 계산으로 하면 잃은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회복입니다, 영혼구원의 회복은 이런 것입니다. 진짜 옳은 길로 가는 것, 옳은 삶을 사는 것, 옳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어서 돈 많이 버는 게 옳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옳음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회심해야 회복됩니다. 회복은 회심의 결과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회개가 생명길입니다. 삭개오에게 일어났던 이 사건이 구원입니다 (눅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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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18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부자 청년 이야기’(눅18:18~30)
    한 청년 관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신앙의 교육을 잘 받아서 모든 율법을 다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재물도 많은 부자입니다. 교회 다니면서 이정도면 다 갖춘 성도입니다. 그 청년관리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예수님 믿고 영접해서 구원 받고 천국 갑니다. 그것은 흔들리고 변할 수 없는 기초입니다, 그의 질문은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을 다 지켰습니다. 사람이 살려면 지켜야 하는 율법을 다 지켰는데 이정도면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겠지요?’ 무엇을 해야 천국갈 수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 모두의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여기에 무엇이 더 있어야 하는 것인가? 천국에 들어가는 데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이것을 채워야 한다고 하십니다.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아~! 이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왜 영생에 돈 문제를 연관시키시는지요...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지키면 사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십계명으로 요약해서 돌판에 새겨서 직접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십계명 중 절반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나머지는 그로 인한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당연히 십계명만 잘 지키면 영생을 얻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자청년은 사람과의 관계는 신앙의 훈련을 잘 받아서 다 지켰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땠을까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내 이름을 망령되게 하지 말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키는 율법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요? “네가 있는 것을 다 팔아...” 하나님께 반납하면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으로 증명합니다. 부자청년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킬 법들은 다 지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킬 것은 그분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 재물인가, 하나님인가, 모든 것은 댓가를 치르는 원리로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버려야 합니다. 생명을 얻으려면 우상을 버리는 게 당연 합니다. 하나님 한분만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키는 법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물인가, 하나님인가? 이것을 확실하게 하고 나서야 하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회심입니다.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과 재물을 연관 시키시는 이유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직 주인은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부자 청년은 큰 부자였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근심 했습니다. 버릴게 너무 많으니 그렇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많아서 못 버리고, 돈이 없는 사람은 없어서 못 버립니다. 너무 없으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한분만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내가 가진 재산을 하나님께 반납할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주인이신 것이 증명됩니다. 현재 여기서 하나님이 주인이신 것을 증명할 수 없으면 후에는 어떻게 천국까지 이어 지겠습니까? 그러니 재물이 있는 자는, 즉 마음에 재물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사람으로 부터 난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으로 부터 난 사람은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거듭한 사람, 성령의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행동의 교정만으로는 안됩니다. 천국은 존재의 변화를 받은 사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발길을 돌리셔서 여리고 쪽으로 가십니다. 그곳에는 삭개오가 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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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12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포도원 주인과 농부 이야기’(마21:33~41)
    포도원을 만든 주인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만든 포도원을 위하여 울타리를 치고 포도즙 짜는 틀 놓을 곳도 만들고 망대도 만들어서 준비를 다 완벽하게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유능한 농부들을 뽑았습니다. 농부는 주인이 뽑아서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목적은 포도원을 잘 관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인이 자신이 고용한 농부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좋은 열매를 많이 얻는 것입니다. 주인은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겨 두고 멀리 여행을 갔습니다. 이제 수확할 때가 가까워졌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에서 자기의 소출을 얻으려고 자기 종들을 포도원에 보냈습니다. 얼마나 열매를 많이 거두었을까... 마음이 많이 쓰입니다. 자기의 비즈니스이니 당연하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농부는 주인의 종들에게 소출을 건네 주기는 커녕 붙잡아 죽이고 때리고 돌로 쳤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반역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주인은 더 많은 종들을 보내었는데 마찬가지로 때리고 죽이고 돌로 치면서 그전의 종들처럼 똑같이 했습니다. 주인은 종들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인의 아들을 아예 포도원의 밖으로 던져서 죽여 버렸습니다. 아들을 죽인 이유는 아들이 주인의 대를 이어 포도원의 주인이 될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죽여야 자기들이 포도원을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마21:38) 상식적으로 농부들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농부들은 주인의 자리를 빼앗아 자기들이 주인이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농부들입니다. 어리석은 게 악입니다. 주인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주인이 되려고 하는 게 이렇게 막무가내의 악입니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기자리의 범위를 넘어서는 게 악입니다.(유1:6) 마땅히 지켜야할 선을 넘어서는 게 악입니다. 주인은 언젠가는 자기포도원으로 돌아오실 텐데... 그때 주인과 얼굴을 맞대고 만날 날이 있을텐데...그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농부들은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주인이 와서 어떻게 할까요?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반역과 악행을 한 농부들을 가만두겠습니까? 다 잡아서 판결을 하실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벌을 받고 죽게 될 것이 뻔합니다. 결국 주인은 돌아오셔서 악한 농부들을 다 진멸해 버렸습니다. 여기까지 생각 못하는 어리석음이 악입니다. 이 비유를 들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눈치 빠르게 이 스토리의 악한 농부가 자기들을 비유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마 21:45) 악하고 어리석은 농부들은 자기들이 왜 뽑혔는지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주인을 위한 포도원 관리자로 고용되어 뽑혔습니다. 농부는 주인에게 뽑혀서 주인에게 고용되었으니 주인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부르심 받은 인생은 사명입니다. 그것을 못해서 힘든 것입니다. 그 목적을 잃으면 삶이 다 망가집니다. 주인을 반역하고 자기가 주인이 되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가 무너지면 전체가 다 무너지는 원리입니다. 이제, 주인은 포도원을 비워 둘 수가 없습니다. 제 때에 주인에게 열매를 잘 갖다 바치는 농부들을 새롭게 뽑았습니다.(마21:41) 새롭게 뽑은 농부들은 교회입니다 (행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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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3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마 15:21~28)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지나가실 때 만나신 가나안 여자 이야기입니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며 수로보니게 족속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소리소리 지르며 예수님을 부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자기가 알고 있는 가나안 신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그녀는 누구에게 전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그 여자의 사연은 어린 딸이 귀신이 들렸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 여자는 예수님께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청합니다. 귀신들려 문제가 생긴 건 딸인데 그것 때문에 어머니가 불쌍합니다. 딸의 문제가 어머니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여자가 울부짖으며 예수님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 여자가 얼마나 고통 스러운지를 봅니다. 그런데 가나안 여자의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고통이 제자들에게는 단지 시끄럽고 귀찮은 일 밖에는 안되었습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마 15:23)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공감 능력이 없을까요? 공감능력이 없으니 누군가의 죽을 듯 한 고통을 보고도 긍휼한 마음이 안 생깁니다. 오히려 자신들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개처럼 무시하고 있는 가나안 여자가 소리를 지르니 시끄럽다고 합니다. “빨리 보내버리세요!” 이 장면을 보시면서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을지 그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여자를 위해서 하늘보좌에서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게다가 이런 제자들에게 교회를 맡기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계속 침묵하십니다.(23절)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 15:24)” 그 침묵을 깨고 하시는 첫마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구약에 예언된 대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오신 것이 맞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마 15:26)” 예수님이 오신 목적으로 보면 표현이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들어도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대언해서 역설적으로 표현하십니다. “너희들의 마음의 생각이 그렇지 않느냐...” 이제 그 말에 반응하는 가나안 여자의 믿음과 제자들의 저급한 행동이 비교될 것입니다. 예상대로 가나안 여인이 그 말을 믿음으로 뒤집어 버렸습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아! 이 말을 들으니 마음이 먹먹해 집니다. 이 구절에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합니까? 감동이 훼손될까봐 설명하기도 아까운 구절입니다. 그냥 느껴야 합니다. “내 딸이 귀신 들렸습니다. 주님” 자기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는 그분만이 참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시라면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지금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그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은혜라도 받아야 합니다. 내 딸 귀신들린 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내 딸이 귀신이 들렸는데 내가 자녀가 아니고 개면 어떻습니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비록 가나안 여자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그것을 받아야 내가 살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가 나를 살릴 것을 믿습니다. 우리 집 개도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습니다. 내게도 그 은혜를 주소서.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자기를 증명할 필요도 없고 변호할 필요도 없고 부당함을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들이 관계없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들 괜찮습니다. 다만 살기위해 그분이 주시는 은혜만을 구합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여자를 이방인이라고 무시했던 제자들 앞에서 이것이 큰 믿음이라고 선포 하십니다.(마 15:28) 예수님이 주시는 기적을 받는 믿음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믿음대로 딸이 나았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하나님을 정말 하나님으로 대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믿음이 시작됩니다. 그녀가 믿었던 하나님은 결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그분은 진짜 하나님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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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27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희년의 축복’(레 25장)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먹고사는 일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로 신을 찾는 종교도 시작됩니다. 사람이 먹고사는 근본은 토지인데 그 토지는 원래 하나님이 주인 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그 땅을 빌려서 임시 거주자로 동거합니다.(레 25:23) 그렇게 땅을 빌려서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곳간에 곡식이 점점 쌓입니다. 쌓아지면 더 쌓고 싶은 게 인간의 욕심입니다. 한 개를 가지고 100을 채우기는 어렵지만 99개를 갖고 있으면 하나를 빼앗아서 라도 100을 채워야 합니다. 채워진 100을 보면서 그것이 내 것 인줄 압니다.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고 죄가 커지면 사망입니다.(약 1:15) 욕심은 이렇게 생명의 길에서 이탈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7년째를 안식년으로 정하셔서 원래 주인이신 여호와 앞에서 땅을 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레25:4) 안식년은 땅도 쉬고 사람도 쉽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때 인간의 욕망도 쉽니다. (희년과 복음, 장진광) 땅이 쉬면서 사람이 수고하지 않았는데도 사람과 짐승들이 모두 먹고 삽니다.(레 25:6~7)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땅이 쉬는 동안 명령하여 먹고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조정하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레 25:20~21) 먹고 사는 주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안식년의 7년을 지나고 50년째 되는 날은 희년입니다. 하나님께 공평하게 먹고 살 것을 받았어도 부자와 가난한자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부자는 받은 것으로 불리고 불려서 더 많이 쌓은 사람입니다. 가난한자는 어쩌다 보니 빚을 지고 급기야는 갚을 수가 없어 자기 몸이 종으로 팔려가게 되는 지경까지 된 사람입니다. 희년은 부자도 가난한 자도 처음 자기가 받은 원점으로 다시 돌아갑니다.(레25:10) 하나님께 빌려서 살면서 쌓아놓았던 모든 걸들을 다 반납하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한 모든 것을 다 반납하고 무로 돌아가는 희년은 너무나 불공평하지 않은가요? 아닙니다.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드리는 것이 합당합니다. 어차피 사람은 언젠가는 다 이 세상을 떠나면서 지금까지 빌려 살았던 것들을 내어놓고 가야 할 시간이 옵니다. 그때는 누가 주인인지 알게 되겠지요. 희년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자유의 해로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레 25:10) 자유는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진짜 자유는 무엇일까요? 부자든 가난한 자든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의지하는 것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스스로 매여 그것의 종이 됩니다. 부자가 가진 것에 매이지 않고 자기 권리를 반납하고 내어 놓는 것이 자유입니다. 가난한 자는 벗을 수 없는 종의 결박이 풀어지는 것이 자유입니다. 희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매인 모든 세상 결박을 풀어 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하나님의 종입니다. 다른 것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레 25:55) 하나님의 종이 되기 싫어서 거부하면 세상의 종이 되어 버립니다. 중립은 없습니다. 세상의 종이 되면 사람에 매이고 돈에 매이고 환경에 매여 두려워 벌벌 떨면서 삽니다. 비참하지요, 착취는 하나님 밖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면 자유가 옵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어 그분에게 매여야 세상 모든 것들이 나를 풀어줍니다. 하나님 한분만 섬기면 나를 착취하는 결박에서 벗어나는 자유가 옵니다. 그때 비로소 세상의 모든 것들 앞에서 당당해 질 수 있습니다. 희년은 자유를 선포하는 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축복을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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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21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신자들에게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창13:12). 아브라함과 롯이 함께 있었던 시절에도 소돔과 고모라성은 타락한 곳이었습니다(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창13:13). 그래서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 유할 곳을 택할 때도 소돔을 피하여갔습니다(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창13:11). 롯은 소돔을 택한 것이 아니라 소돔과 경계지역이었던 요단 온 들을 택하였습니다. 그것까지는 좋았지만 그는 소돔에서 멀리 떠나지 못하였기에 자신도 모르는 새 소돔까지 이르렀고 나중에는 소돔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신자들이 거룩함을 향하여 점점 마음 쓰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새 세상으로 한 발짝, 한 발짝 가까워지게 됩니다. 조금씩, 조금씩 유행과 풍속 습관을 따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그 땐 나오기 힘든 상태로 빠져듭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는 왜 그렇게 하였을까요? “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쌔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눅22:54).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지 아니하고 멀찍이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와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그 때가 추운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요18:18). 그들과 함께 쬐면서 예수님께 대한 여러 왜곡된 말들을 들었을 것입니다. 불평불만을 품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그만 물들고 만 것입니다. 또한 험악하고 살기등등한 분위기에 그만 압도당하고 만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과 멀어지면 세상과 가까워지게 됩니다. 롯이 하나님을 잘 믿는 아브라함을 멀리하면서부터 소돔과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은 안 된다.”라고 말했을 때 롯은 “걱정 마세요. 제가 잘 알아서 할게요.”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한 발 한 발 소돔 땅에 접근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성문에 앉아 재판할만큼 유지까지 됐습니다. 무너지는 것은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맹독성은 사람들이 피하지만 서서히 죽어가는 것은 사람들이 대수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신자들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선이 있어야 합니다. 가야 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 분명한 선이 있어야 합니다. 그 선은 성경에 합당한 선입니다. 이런 것을 하나하나 무너뜨리면 롯이 자신도 모르는 새 소돔 땅에 들어가 살았던 것처럼 신자들도 무감각해지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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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17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내가 그의 옷 자락을 만지면···’(막 5:25~43)
    회당장 야이로의 어린 딸이 위독하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이 야이로의 간곡한 부탁으로 그 딸을 만나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때 큰 무리가 따라 가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밀치면서 갑니다. 그 무리 중에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혈루병이 그 인생에 끼어 들어오면서 삶이 망가지기 시작한 여자입니다. 12년 전 일입니다. 그동안 병을 고치려 별의별걸 다 해보았지만 결국 많은 의사들에게 괴로움을 당하고 병은 못 고치고 돈은 다 날리고··· 그러다가 몸과 마음은 더 상하고··· 병으로 시작된 일이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려서 여인이 지금 있는 곳은 완전 밑바닥입니다. 그곳에서 여인은 절박하게 살기 위해 구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많은 무리 중에 바로 이 여자가 끼여 있었습니다. 무리에 떠밀려 길을 가던 예수님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시더니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에워싸고 미는 것을 보시면서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까?”(막 5;31)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을 만지고 그 옷자락에 닿으면서 지나갔습니다. 무리 중에서 떠밀려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것은 별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누군가 한사람은 군중사이로 들어와 두렵고 떨리는 손으로 절박하게 그 옷자락을 붙잡았습니다. 그가 붙잡은 그 옷자락은 하나님의 옷자락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느끼셨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누가 나를 만졌느냐?” 예수님이 그 사람을 찾으시려고 멈추어 둘러보시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더 이상 자신을 감출 수 없는 것을 알고 한 여인이 두려워 떨며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고백 합니다.(레 15:11) 그 여인은 예수님이 지나가신 다는 소식을 듣고 에워싸며 밀치는 군중들 사이로 목숨 걸고 숨어 들어온 사람이었습니다.(레15:31) 절박한 여인이 목숨 걸고 원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옷에 손을 대었을 때 혈루근원이 마르면서 병이 나은 줄을 여자의 몸이 깨달았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가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 능력이 여인에게 흘러가서 혈루근원이 마르면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구원입니다. 단순한 병고침만이 아닙니다. 구원은 총제적인 문제를 해결합니다. 모든 인생문제의 해결은 오직 예수님에게서만 나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무리중의 그 여인은 오직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겠다는 생각하나로 목숨 걸고 들어갔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병이 나음을 입을 것이라고 기록된 게 아니라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 5:28) 자기의 문제는 병고침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 할지어다” 구원이 임하는 곳에 병고침이 일어났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으로 이 모든 일들을 받았습니다.(눅 5:34) 그 여인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에워싸고 밀치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그분을 하나님으로 알고 하나님으로 만난 단 한 사람의 믿음에 하나님이 반응하셨습니다. 그때 저주인 줄 알았던 혈루병 조차도 축복이 되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손으로 하나님의 옷자락에 감히 손을 대는 한 여인의 가녀린 손과 군중들에게 떠밀려 걸어가는 제자들의 장면이 겹칩니다.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냐고 물으십니까?(막 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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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12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험한 시험 물속에서 나를 건져주시고’ (마8:23~27)
    제가 꿈속에 “험한 시험 물속에서 나를 건져주시고.......” 이 찬송을 부르다가 깨었습니다. 꿈에 불렀던 것을 깬 후에도 계속 이어 마지막까지 마무리했습니다. 꿈에서 생시로 이어지는 이 기가 막힌 찬송가가 하루를 벅차오르는 감동 속에 살게 해주었습니다. 이 가사는, 1949년 1월에 편찬 된 합동찬송가 이래(이전 찬송가는 잘 모르겠음) 지금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새찬송가까지 거의 바뀌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1949년 1월 육이오 전에 편찬 된, 합동찬송가에 수록 된 가사입니다. 1 험한 시험 물속에서 나를 건져주시고, 노한풍랑 지나도록 나를 숨겨주소서 후렴; 주여 나를 돌아 보사 고이 품어주시고, 노한풍랑 지나도록 나를 숨겨주소서 2 권세 능력 무한하사 모든 시험이기고, 풍랑조차 복종하는 내 주 앞에 비나니 3 사망 길에 빠진 몸이 캄캄한데 헤매며, 부르짖는 나의 애원 들으소서 내주여 가사를 만든 사람과 곡을 만든 사람이 찬송가에는 모두 무명으로 되어 있지만, 가사 속에는 작사가의 심정이 아마도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절절한 사연이 있어 보입니다. 이 가사는 또한 우리의 형편이기도 합니다. 1. 작사가는 시험의 바다 속에 빠져 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기 전에 헤엄칠 자신이 있었습니다. 헤쳐 나갈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생각과는 다릅니다. 폭은 예상보다 훨씬 넓고 거기에다 방해하는 세력들이 집채만큼 밀려옵니다. 그 시험이 자신 안의 유혹이든, 아니면 시련이든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환경입니다. 더 이상 헤쳐 나갈 수 없는 지경, 자기 힘이 모두 소진 된 상황,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필사적으로 주님을 부릅니다. “험한 시험 물속에서 나를 건져 주시고/ 노한 풍랑 지나도록 나를 숨겨주소서. 주여 나를 돌아보사 고이 품어주시고 / 노한 풍랑 지나도록 나를 숨겨주소서.” 2. 말씀으로나 양심으로나 상식으로나 모든 부분에서 잘 못 된 일인데도, 부당한 권세 아래서, 중우정치 아래서 정의가 야합과 다수에 의해 묻히고 소수가 힘을 쓰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신앙인들은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기 때문입니다(골2:10). “권세 능력 무한하사 모든 시험 이기고 풍랑조차 복종하는 내 주 앞에 비나니. 주여 나를 돌아 보사 고이 품어주시고 험한 풍파 지나도록 나를 숨겨주소서.” 3. 사울의 창을 피하여 도망 나온 다윗이 친구 요나단을 만나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 왕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요나단이 그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진실로 여호와의 사심과 네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삼상20:3)라고 요나단에게 말합니다. “사망 길에 빠진 몸이 캄캄한데 헤매며 부르짖는 나의 애원 들으소서. 내 주여 주여 나를 돌아 보사 고이 품어주시고 험한 풍파 지나도록 나를 숨겨 주소서.” 후에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모든 찬송이 주님을 높이는 찬송이지만 굳이 나눈다면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송, 둘째는 곡조 있는 기도입니다. 이 찬송가는 두 번째 해당 됩니다. 이 찬송을 부름으로써 우린 하나님을 높임과 동시에 기도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깊은 시험에 빠진 분이 있습니까? 주님께 아뢰십시오. 너무 기가 막혀 무엇을 아뢰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까? 이 찬송가로 대신 부르십시오. 한 번 부르고 두 번 부르고 세 번 부르면 마음이 진정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임재입니다. 그 때부터 구체적으로 아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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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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