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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행복으로 가는 길’(시 32:1~6)
-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본문은 신앙의 교훈이 담긴 다윗의 시입니다. 잘못을 용서받고 하나님이 죄를 덮어 주신 사람은 행복하다는 내용으로 말씀이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후에도 죄의 문제는 늘 사람을 따라다닙니다. 가인의 경우를 그 예로 들을 수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알았으며, 하나님과 대화하는 관계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이 이에 대해 안색이 변하고 몹시 분해하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그러므로 성도는 평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긴박감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이 용서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의 죄가 떠올라야 합니다. 자기의 잘못이 생각나지 않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지른 죄가 있는데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을 자기 내면에 방치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죄는 문득 문득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죄가 떠오르는 것, 자기의 잘못이 떠오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순간 그 사람에게 그 사람의 죄를 떠올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은혜이며 축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냄새의 원인을 잡으면 그 냄새를 없앨 수 있습니다. 통증의 원인을 찾으면 통증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 것이며, 질병의 원인을 찾게 되면, 질병을 근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어 회개하게 되면, 어둠의 권세가 더 이상 그 사람을 잡고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의 고백과 회개는, 그래서 치유이고 회복이며 자유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죄 없는 자로 여겨주시는 그 사람, 즉 마음에 속임수가 없는 그 사람은 복되고 복되다고 말씀합니다(2절). 천국 백성이라 함은 반드시 진실함의 문을 통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대하며 관계할 때도 와 비슷한 상황들이 펼쳐집니다. 진실한 사람을 인정하게 되고 진실한 사람을 믿게 됩니다. 사람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 그 인생에 무언가 신호가 옵니다. 소화가 잘 안 된다든지, 잠이 안 온다든지, 마음이 무거워 괴롭다든지 기타 원인 모를 일들이 펼쳐지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을 때 종일 신음하다가 지치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죄가 회개되지 않고 남아있으면 반드시 티가 나는 법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밤낮으로 주의 손이 나를 무겁게 누르시므로 여름의 뙤약볕에 물이 말라버리듯 내 기력이 쇠하였습니다.”(4절) 즉 자기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자기를 짓누르시며, 고뇌와 환난이 다가오고, 기력이 완전히 다 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기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자기가 자기의 죄를 고백하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잘못과 죄를 숨김없이 다 털어놓았더니, 하나님께서 자기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감추거나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는 방식으로 다루게 되면, 그러한 삶은 자기에게 계속 남아있는 죄로 인해 죄에 찌든 모습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주를 만날 수 있을 때에 주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환난의 홍수가 밀어닥칠지라도 그들에게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주님께 고백하여 우리 삶에 은혜와 소망이 가득 넘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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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행복으로 가는 길’(시 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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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방송법 개정이 정치적 중립인가? 악법인가?
- 2일, 국회 과방위(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위원회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방송의 지배구조를 변경하는 소위 ‘방송3법’(방송법, 방송문화진흥회법, 한국교육방송공사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공영방송인 KBS, MBC, EBS를 겨냥한 것이다. 현행 KBS 이사는 11명에서 15명으로, MBC와 EBS는 9명에서 13명으로 늘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중에 국회 추천은 물론, 시청자위원회, 방송 종사자, 학회, 법조계를 포함시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거기에다 공영방송과 보도 전문 채널(YTN, 연합뉴스TV)의 보도 책임자를 임명할 때, 직원 과반수 동의를 받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사장을 임명할 때도 새롭게 구성된 이사 5분의 3 찬성으로 통과하도록 규정하는 내용이다. 결과적으로 방송의 지배구조를 현 정권과 노선을 같이하는 노조와 그 세력들이 방송을 지배하도록 하는 구조로 변경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도 한국의 공영방송은 일방적으로 치우친 이념과 사고(思考)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도 모자라 방송을 현 정부와 여당이 영구적으로 차지하며, 장악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이 방송3법을 강행으로 처리하려는 시도는 벌써 세 번째인데, 이미 두 차례는 국회를 통과했지만,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으로 국회에서 폐기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방송3법’을 개정하려는 민주당의 의도는 무엇인가? 방송3법 개정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담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방송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할 수 있는가이다. 진영 성향이 강한 시민단체나 노조가 다수를 점하는 이사회의 지배구조로는 이를 담보하기 어렵다고 본다. 또 다양한 의견이라며, 공영방송의 조직과 운영이 비효율적으로 잘못 나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방송의 공정성과 다양성과 객관성과 진정성은 보장되기 어렵다고 본다. 더불어민주당측에서는 ‘방송이 정권에 의해 좌지우지된 시대를 쐐기 박고, 국민 참여로 방송이 온전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역할을 하겠다는 취지’라고 한다. 그런데 그 말을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이며, 진심인가? 오히려 외형적으로는 다양성을 갖췄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편향과 왜곡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더 힘을 얻는다고 본다. 어느 권력이든 언론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보장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정치의 개입 차단을 막겠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언론들이 독립과 공정성을 지키고 있는가? 이를 믿는 국민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이런 식의 방송법 개정으로는 오히려 국민들에게 괴리감(乖離感)만 더할 뿐이다. 이제라도 정치권은 자기들 입맛에 맞는 ‘방송 길들이기’를 위한 입법을 강제할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사랑하고, 인정할 만한 방송이 되는 길을 보장하도록 힘써야 한다. 다수의 권력으로써, 억지로 방송법을 바꾸려는 태도는 오히려 방송을 망치려는 책동으로 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많다. 이것이 잘못된 판단인가? 지금은 방송법 개정이 시급한 것이 아니라, 방송의 공정성 담보를 위한 거대 여당의 노력이 훨씬 중요하고 필요하다. 정치권이 방송을 내 편으로 만들려고 억지를 부릴 때, 방송의 순기능은 죽는 것이며, 국민들로부터 방송을 아예 빼앗아가는 악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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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방송법 개정이 정치적 중립인가? 악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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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방송법 개정이 정치적 중립인가? 악법인가?
- 2일, 국회 과방위(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위원회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방송의 지배구조를 변경하는 소위 ‘방송3법’(방송법, 방송문화진흥회법, 한국교육방송공사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공영방송인 KBS, MBC, EBS를 겨냥한 것이다. 현행 KBS 이사는 11명에서 15명으로, MBC와 EBS는 9명에서 13명으로 늘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중에 국회 추천은 물론, 시청자위원회, 방송 종사자, 학회, 법조계를 포함시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거기에다 공영방송과 보도 전문 채널(YTN, 연합뉴스TV)의 보도 책임자를 임명할 때, 직원 과반수 동의를 받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사장을 임명할 때도 새롭게 구성된 이사 5분의 3 찬성으로 통과하도록 규정하는 내용이다. 결과적으로 방송의 지배구조를 현 정권과 노선을 같이하는 노조와 그 세력들이 방송을 지배하도록 하는 구조로 변경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도 한국의 공영방송은 일방적으로 치우친 이념과 사고(思考)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도 모자라 방송을 현 정부와 여당이 영구적으로 차지하며, 장악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이 방송3법을 강행으로 처리하려는 시도는 벌써 세 번째인데, 이미 두 차례는 국회를 통과했지만,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으로 국회에서 폐기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방송3법’을 개정하려는 민주당의 의도는 무엇인가? 방송3법 개정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담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방송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할 수 있는가이다. 진영 성향이 강한 시민단체나 노조가 다수를 점하는 이사회의 지배구조로는 이를 담보하기 어렵다고 본다. 또 다양한 의견이라며, 공영방송의 조직과 운영이 비효율적으로 잘못 나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방송의 공정성과 다양성과 객관성과 진정성은 보장되기 어렵다고 본다. 더불어민주당측에서는 ‘방송이 정권에 의해 좌지우지된 시대를 쐐기 박고, 국민 참여로 방송이 온전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역할을 하겠다는 취지’라고 한다. 그런데 그 말을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이며, 진심인가? 오히려 외형적으로는 다양성을 갖췄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편향과 왜곡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더 힘을 얻는다고 본다. 어느 권력이든 언론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보장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정치의 개입 차단을 막겠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언론들이 독립과 공정성을 지키고 있는가? 이를 믿는 국민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이런 식의 방송법 개정으로는 오히려 국민들에게 괴리감(乖離感)만 더할 뿐이다. 이제라도 정치권은 자기들 입맛에 맞는 ‘방송 길들이기’를 위한 입법을 강제할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사랑하고, 인정할 만한 방송이 되는 길을 보장하도록 힘써야 한다. 다수의 권력으로써, 억지로 방송법을 바꾸려는 태도는 오히려 방송을 망치려는 책동으로 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많다. 이것이 잘못된 판단인가? 지금은 방송법 개정이 시급한 것이 아니라, 방송의 공정성 담보를 위한 거대 여당의 노력이 훨씬 중요하고 필요하다. 정치권이 방송을 내 편으로 만들려고 억지를 부릴 때, 방송의 순기능은 죽는 것이며, 국민들로부터 방송을 아예 빼앗아가는 악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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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방송법 개정이 정치적 중립인가? 악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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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논평] 하미자 목사의 ‘마땅히 할 일’(신 30:14)
-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은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우리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히 4:12) 둘째, 사람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말씀 속에 깨달음과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시 119:32) 본문을 보면,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는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은 바로 우리의 입에 있고, 마음에 있어서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야 합니다. 구약의 율법은 수만 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수만 가지 율법을 써 주었으나, 자기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여겼다.”(호 8: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그 많은 율법 중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열한 가지로 말합니다. 주님의 장막에서 주님과 영원토록 함께 살 자격이 있는 사람은, 1) 깨끗한 삶을 사는 사람, 2)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3)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 4) 혀를 놀려 남의 허물을 들추지 않는 사람, 5) 친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6) 이웃을 모욕하지 않는 사람, 7)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를 경멸하는 사람, 8)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 9) 맹세한 것은 해가 되더라도 깨뜨리지 않고 지키는 사람, 10) 높은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않는 사람, 11) 무죄한 사람을 해칠세라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님, 누가 주님의 장막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깨끗한 삶을 사는 사람,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 혀를 놀려 남의 허물을 들추지 않는 사람, 친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이웃을 모욕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를 경멸하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맹세한 것은 해가 되더라도 깨뜨리지 않고 지키는 사람입니다. 높은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않으며, 무죄한 사람을 해칠세라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시 15: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정의와 진리와 이웃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웃과의 약속을 쉽게 파기하거나 뇌물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도 영원히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사야는 그 율법을 여섯 가지로 말합니다. 1) 의롭게 사는 사람, 2)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 3) 권세를 부려 가난한 사람의 재산을 착취하지 않는 사람, 4) 뇌물을 거절하는 사람, 5) 살인자의 음모에 귀를 막는 사람, 6) 악을 꾀하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 사람입니다. “의롭게 사는 사람,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 권세를 부려 가난한 사람의 재산을 착취하는 일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 뇌물을 거절하는 사람, 살인자의 음모에 귀를 막는 사람, 악을 꾀하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 사람”(사 33:1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안전과 먹거리가 끊어지지 않게 된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안전한 곳에 산다. 돌로 쌓은 견고한 산성이 그의 은신처가 될 것이다. 먹거리가 끊어지지 않고, 마실 물이 떨어지지 않는다.”(사 33: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미가는 그 율법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1) 공의를 실천하며, 2) 인자를 사랑하며, 3)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 뜻대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며,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겸손하게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박국은 그 율법을 한 가지로 말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합 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폭력과 다툼과 불의가 판을 치는 상황 속에서 하박국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 주신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히 11:6)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고,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행 16:31)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히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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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논평] 하미자 목사의 ‘마땅히 할 일’(신 3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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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할렐루야로 찬송하라’(계 19:1-5)
- 할렐루야는 구약에서 시편에 많이 나오고,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 19장에 나옵니다. 할렐루야의 ‘할렐’은 ‘노래하다, 송축하다’라는 히브리말 ‘할랄’의 강조형태이고, ‘루’는 2인칭 복수명령형, ‘야’는 여호와의 축약형입니다. 그래서 할렐루야는 ‘너희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반드시 찬양하여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왜 할렐루야를 불러야 할까요? 첫째, 구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영광은 하나님만이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찬양해야 합니다.(1절)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2a절) 하나님 심판이 왜 참되신가를 보면, 첫째, 하나님만이 사람의 깊은 속마음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만이 바른 판단을 하실 수 있는 지혜가 있으시기 때문입니다.(계 7:12)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2b절) 하나님은 순교자들의 피를 반드시 갚으십니다.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계 6: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갚아 주시지만, 수가 차기까지 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작정한 수가 찰 때까지 순교자들이 계속 생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끝까지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처럼 우리도 끝까지 믿음 지키기를 소망합니다.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합니다.(4절) 여기서 이십사 장로는 구원받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네 생물은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인 사자(용맹성 상징), 송아지(힘), 사람(지능), 독수리(빠름)입니다. “하나님 종들”(5절)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인 선지자와 순교자를 의미합니다.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두 사회 계급 차별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의 찬양 핵심은 어린양, 즉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찬양 내용은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희생적인 죽음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것을 찬양합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서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이루어졌음을 노래하는 것이 찬양의 핵심입니다. 다음으로 천사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소유하신 일곱 가지를 찬양합니다. 즉 능력, 부, 지혜, 힘, 존귀, 영광, 찬송입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계 5:11-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찬송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찬송’, ‘복’입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 3:10)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 1:3) 우리가 드리는 찬송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면서 거기에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나머지 우주가 찬송하는 것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입니다.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동격으로 찬양받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 5: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연이 아멘하고, 우리는 경배해야 합니다. 예수의 보혈로 구원받은 우리는 평생 할렐루야로 주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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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할렐루야로 찬송하라’(계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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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다’ (계 19:11~16)
- 요한계시록의 내용에는 상징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잘 읽으면서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 상징하는 언어가 나타내는 의미가 반드시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를 찾는 것이 성경말씀 해석의 관건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요한의 눈을 열어주셨고, 주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이 사도 요한을 통해 기록되었으니, 이는 요한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후대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과 그 뜻을 나타내 보여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된 책을 덮어만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치유받고, 말씀을 읽을 때마다 그 말씀이 믿어지고 깨달아지며 지혜가 임하는 놀라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여야 될 줄 믿습니다. 요한은 하늘이 열리고 거기 흰 말 위에 ‘충신’과 ‘진실’이라고 부르는 분이 앉아서 정의로 심판하며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을 위해 변호해 주고, 몸소 싸워준다면 얼마나 큰 은혜가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러한 분이십니다. 주님은 완전히 신실하시고 진실하십니다. 그리고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주님께서는 우리도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하늘문을 열어놓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열고 오직 주님을 먼저 생각하며, 생사를 주께 맡기며,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에 신실한 마음으로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싸움은 선과 악의 싸움이며, 진실과 거짓의 싸움이고,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며,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과 어둠의 영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도, 정치권에도, 사회 속에도, 가정과 개인의 마음 안에도 이러한 선과 악의 싸움과 진실과 거짓의 싸움과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싸움은 결국 하나님 안에 거하는가, 어둠과 정욕에 거하는가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거기에서 이겨야 할 줄 믿습니다. 백마를 타신 분이 충신과 진실이며, 피 뿌린 옷을 입으신 것으로 보아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피는 예수님께서 박해와 순교로 인해 흘리신 피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요한복음 1장 초두에 나오는, 이른바 말씀이 곧 예수님이신 것을 나타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읽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과 같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좌우에 날선 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오늘날 주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행함을 통해서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인해 크고 놀라운 은혜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16절). 우리는 이 사실을 온전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말씀과 권능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심판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뜻에 합당하도록 선하고 공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뜻과 그 말씀에 맞추어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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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다’ (계 19: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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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욥의 고백’(욥 42:5)
-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1:1) 사탄은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9절)라고 하며 욥의 모든 소유물을 치면 주님을 욕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11절) 하나님께서는 욥을 신뢰하심으로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하시며 사탄에게 욥을 맡기셨습니다.(12절) 그래서 욥은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사탄의 전략을 다 보게 되었습니다. 욥은 고난 중에도 중보자가 계심을 믿었습니다.(19:25) 본문을 보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그동안 하나님을 귀로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 눈으로 하나님을 보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닫고, 고난 문제를 단순한 죄로만 본 것을 회개하며 하나님 섭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욥이 매우 심한 고난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스발이 찾아왔습니다. 나중에 엘리후가 등장합니다. 세 친구는 욥의 고난을 죄의 값으로 보았습니다. 엘리후는 욥을 훈련하기 위해서 고난을 주신다고 말하지만, 나중에는 죄의 값으로 보았습니다. 고난은 죄의 값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의 세 친구들의 그런 주장에 노하셨습니다. 사람 자체만으로도 우주를 다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섭리와 무궁한 지혜를 사람이 다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욥의 네 친구가 욥의 고난을 보며 말한 내용을 살펴봅니다. 엘리바스는 고난에 대한 지혜를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5:27) 엘리바스의 태도는 잘 관찰하고 스스로 판단하겠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빌닷은 고난에 대한 지혜를 과거 전통으로 보았습니다.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8:8) 전통과 격언은 참고는 되지만, 사람의 것이므로 한계가 있습니다. 소발은 고난에 대한 지혜를 자기 느낌, 즉 즉감으로 보았습니다. 자기 생각이 옳으면 옳은 것입니다. 소발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12:12) 소발은 자신의 지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지혜의 근본 된 것이 문제입니다. 엘리후는 욥에 대해 심각하게 비난하지 않지만 세 사람이 놓친 것, 즉 고난은 사람을 사람되게 만들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33:17) 그러나 엘리후가 잘못 생각한 것은, 고난을 이기면 반드시 번영과 축복이 온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견해입니다.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요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36:11-12)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고난에 대한 지혜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28:28) 우리도 고난을 이기는 지혜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세 친구들이 고난에 대해 말한 것이 욥의 말처럼 옳지 못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42:7)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세 친구가 욥의 고난을 죄의 값으로 본 것은 맞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단순화시킨 것이 잘못입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한 것이 잘못입니다. 세 친구 생각에 교훈이 될 말한 지혜는 사람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겼는데,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종적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안다고 한 것이 잘못입니다. 세 친구는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 욥의 기도를 통해 어리석게 말한 것을 용서받게 되었습니다.(42:8) 한편, 엘리후는 책망에서 제외됩니다. 사람 만들기 위해 고난이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죄의 값이기도 하지만, 회개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보상해 주신다고 본 것이 문제입니다. 죄의 값의 결과가 이 세상에서 꼭 일어난다고 볼 수 없으며, 회개하더라도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지혜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섭리를 다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참다운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신뢰하며 경외하는 자에게 주님께서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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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욥의 고백’(욥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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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순간 촬영되는 우리 신앙’ (빌 2:12~18)
- 성도는 언제든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 매우 허영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나타나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특별한 사건이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상시 물건을 나르는 모습에서, 일상적인 걸음걸이에서, 눈빛과 머리를 흔들어 보이는 과정에서 그러한 모습이 묻어나 보이게 됩니다. 사진을 촬영할 때 쓰는 용어로 ‘스냅샷’(snapshot)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는 순간적인 장면을 촬영한 사진으로, 인물 사진에서는 자연스러운 동작이나 표정을 재빠르게 포착한 사진을 뜻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 나타나는 0.1초의 순간적 동작과 모습 속에 휙 하고 지나가는 몸동작이지만 그 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기만의 현실과 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게 됩니다. 그러한 모습은 대개 과거로부터 이어져 오는 습관적인 것들입니다. 때로는 평소 감사를 잃어버린 채 불만족스러워하던 습관적인 모습이, 때로는 자신의 우월함을 은근히 나타내 보려는 모습으로, 때로는 무능력함의 뒷모습으로, 때로는 자기의 이익을 애써 감추며 생활이 어려운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는 모습으로, 때로는 상대방을 속으로 조소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자기만의 연약하고 부족한 허영심의 모습은 자기 내면에 숨어있는 과거의 모습이며,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연약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나 믿음의 부모와 같이 신앙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그렇게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뤄나가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작은 일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구원과 관련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일은 그렇게 ‘값싼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요,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값싼 은혜는 교회의 철천지 원수입니다. 값싼 은혜란, 회개가 없는 사죄요, 교회의 권징이 없는 세례요, 죄의 고백이 없는 성만찬이요, 개인의 참회개가 없는 용서입니다. 값싼 은혜란 뒤따름이 없는 은혜요, 십자가가 없는 은혜입니다.” 즉 하나님과 구원이 가장 귀한 것인데도, 실상은 은혜와 신앙을 쉽고 값싼 것이라고 생각해서 하나님도 교회도 하찮고 쉬운 존재로 여기는 잘못된 신앙, 빗나간 교인의 모습을 뜻하는 말입니다. 기도회에 곧잘 나오지만, 막상 참된 회개는 없는 그런 기도를 하는 모습이라든지, 하나님과 교회 앞에 분명히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교회는 권징하지 못하고, 잘못을 행한 자들은 여전히 교회의 주요 활동에 참여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쉽게 여긴다든지, 참된 회개가 없는데도 형식적인 용서를 받은 것처럼 예배드리며 마당만 밟고 자리를 떠나는 모습 등에 대해 ‘값싼 은혜’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값싼 은혜로 무장된 마음이 우리 안에 있게 된다면, 그러한 모습은 하나님과 신앙과 교회를 등한시하는 내면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실상은 이런 값싼 은혜가 아닌, 순전하신 예수님의 보혈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값진 은혜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에 따른 진정한 값진 은혜를 체험하고 그것을 끝까지 소유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값진 삶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순간의 동작이 회개를 이룬 고귀한 마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자신의 말 한마디, 한 동작이 그 사람의 신앙의 현주소를 정확히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 자신과 하나님의 현재의 관계를 나타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귀한 뜻을 위해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도록 하신다고 하셨습니다(13절). 그러므로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며(14절), 이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우리의 양심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놓여 있는 우리의 모습과 마음이 더욱 값진 은혜를 사모하는 자의 모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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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순간 촬영되는 우리 신앙’ (빌 2: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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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전 16:21-24)
-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친필로 문안합니다. 바울은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실제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저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 승천과 재림에 관한 복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구원과 복을 받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믿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한 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라고 축복합니다. 바울은 저주와 축복 사이에 왜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마라나 타)라고 말했을까요? ‘마라나 타’는 고린도전서 16장에 한 번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b)는 ‘마라나 타’가 아닙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2:20a)에 대한 응답입니다. 고린도전서의 ‘마라나 타’는 같은 의미의 아람어 음역이고, 요한계시록의 응답은 헬라어 표현입니다. ‘마라나 타’는 세 가지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첫째,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재림을 기다리는 간구입니다. 둘째, 우리 주님이 오셨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살려 주는 영”으로 재림하신 것을 확실하게 말한 것입니다. 재림 원어는 ‘와 계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에 임한 영 곧 살려 주는 영이 되어 오순절에 순식간에 임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우리 주님이 오신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지금 예배와 성만찬 가운데 임재하시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위와 같이 ‘마라나 타’의 미래, 완료, 현재형의 번역은 모두 합당합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알파와 오메가로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시공간 지평 융합 속에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입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7-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저주와 축복 사이에 말한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그러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도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라고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바울이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한 것은, 우리 죄를 씻기 위해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어주시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바울의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간구는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심을 증언한 것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살려 주는 영, 즉 다른 보혜사 성령으로 이미 오셔서 우리 가운데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 것을 믿기 바랍니다. “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그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행 2: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몸은 살려 주는 영이 되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곧 다른 보혜사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고전 6:19)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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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하미자 목사의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전 16: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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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에벤에셀의 하나님’(삼상 7:12~14)
-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이긴 후에 도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사무엘이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운 기념비의 이름이 에벤에셀이며, 이는 그 지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일궈낸 승리는 단번에 시원하게 얻은 승리가 아닙니다. 사무엘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은 아벡에 진을 치고 있던 블레셋을 상대로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했던 전적이 있습니다(삼상 4:1-3). 그 뒤에도 이스라엘은 승리를 위해서 실로에 있던 언약궤를 이곳으로 가져왔지만, 재차 패배하고 언약궤마저 탈취당하게 됩니다. 즉 에벤에셀은 과거에 실패했던 자리였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치욕의 장소였고 적국인 블레셋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블레셋에게 참패해서, 이스라엘군 3만 4천 명이 죽었고,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던 하나님의 법궤마저 빼앗겼던 곳입니다. 인생으로 말한다면 커다란 상처와 약점이 있는 치욕스러운 부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뼈아픈 실패의 자리가 기도의 자리로 되었고, 주님의 전적인 도우심으로 인해 승리의 자리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큰 변화의 이면에는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을 통해 중요한 작업이 선행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여호와의 궤를 옮겨 언덕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두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해서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기 위해 세상과 세속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과 교회를 잘 섬기고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온 집에 말하기를 “만일 너희가 여호와께 전심으로 돌아오려면, 너희 중에서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오직 그분만을 섬겨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내실 것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바알은 하늘의 폭풍과 비, 기후 등을 다스리는 신이며, 아스다롯은 땅의 곡식과 가축, 사랑과 전쟁을 다스리는 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현재 자기의 모습에서 제거해야 될 바알과 아스다롯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계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사무엘의 선포를 따라, 자신들이 숭배하던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게 됩니다. 이에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미스바로 모이게 해서, 그 날을 금식하면서 여호와께 범죄했음을 고백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어린 양을 잡아 여호와 하나님께 온전한 번제로 드린 후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 목놓아 기도드리자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응답하십니다. 얼마 후 다시 칼을 들고 찾아온 블레셋은 하나님이 일으키신 큰 천둥소리로 인해 어지럽게 되어, 결국 이스라엘에게 대패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천둥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최근 한국의 일부 지역에 여름철인데도 불구하고 콩알 반쪽만한 우박이 내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상식을 넘어 자연만물을 통해 역사하시기도 합니다. 이것이 에벤에셀이 승리의 장소로 되기까지의 내용입니다. 여기까지 우리를 도와주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기적과 같은 큰 도움을 주실 것을 믿고 소망합니다. 그러한 승리를 위해 우리는 잘못한 부분에 대한 인식과 해결, 죄의 회개, 그리고 간절한 기도와 결심을 통해 하나님과 긴밀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고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의 길로 행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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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독립교회연합회 칼럼] 박준형 목사의 ‘에벤에셀의 하나님’(삼상 7: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