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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옳고 그름을 정하지 못할 때 청탁(淸濁)은 없다
- 얼마 전에 끝난 2024년 파리 올림픽에서는 때아닌 성별 문제가 불거졌다. 여자 복싱 분야에 출전한 알제리의 이마네 켈리프와 대만의 린위팅 선수가 남성 호르몬인 XY염색체 검출 문제가 있었으나,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문제없다며 그들의 출전을 허락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금메달을 따게 된다. 그러나 지난해 3월 국제복싱협회(IBA)는 이들에게 XY염색체가 검출되었기에 출전을 허락하지 않았었다. 이 선수들이 경기하는 것을 많은 세계인들이 보고 놀랐다. ‘저것이 어떻게 같은 여자끼리의 게임이라고 볼 수 있는가?’ 켈리프 자신은 여자로 태어나 여자로 살았다며 항변했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불공정한 게임으로 보았다. 그야말로 맞붙어 경기를 치른 선수들은 쩔쩔매는 모습이었다. 켈리프와 16강전에서 경기를 치른 이탈리아의 안젤라 카리나는 1라운드 46초 만에 기권하면서, ‘살면서 그런 펀치를 맞아 본 적이 없다’는 유명한(?)말을 남겼다. 물론 여성이면서도 ‘성 발달’ 이상 질환인 ‘안드로겐 무감응 증후군’도 있다. 이런 경우에도 10만명 당 2~5명의 아주 극소수에게서만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놓고 자기 의견을 말했던 사람들이 ‘괴롭힘 혐의’로 피소를 당했다. 그 피소자 명단에는 ‘해리포터’의 저자 조앤 롤링과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 경영자도 포함되어 있다. 또 미국의 스포츠 전문 채널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샘 폴더도 프로그램 진행자에서 갑자기 해고되었다고 한다. 급기야 미국의 대선 후보로 활동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남성을 여성 스포츠에서 배제하겠다’고 하여, 또 다시 이 문제는 주목을 받고 있다. 오죽하면 최근 미국의 연방대법원에서는 동성애자를 지칭하는 LGBTQ(여성 동성애자, 남성 동성애자, 양성애자, 성전환자, 성소수자 전반-이들이 주장하는 사회적 성, 혹은 성소수 분류는 수십 가지가 넘는다)에 대한 행정부의 과잉 보호에 대하여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지금 전 세계는 ‘성소수자’의 문제, 동성애자의 문제, 그 동성애를 옹호하고 보호하고 지지하면서, 그에 대한 비판이나 반대 의견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차별’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치권에서는 끊임없이 동성애를 위한 ‘포괄적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고 한다. 최근에는 대법원에서 동성애자 동거인을 보험 피부양자로 인정하여, 사실상 동성애 부부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이에 국민들은 대법관들에 대한 ‘탄핵’ 의견을 모으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200여년 간 서구에서는 기독교에 기반을 둔 전통적인 결혼과 가정, 성규범, 성윤리를 무너뜨리려는 역할을 활발히 해 왔다. 이것이 ‘성혁명’(sexual revolution)이다. 첫 번째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인간 중심의 혁명-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마구 죽였으며, 국가를 무질서 상태로 만듬)이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역시 프랑스에서 1968년에 일어난 ‘68혁명’(부정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여, 전통적인 결혼, 가정을 해체)을 꼽는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들은 성규범의 해체, 가정의 해체, 기독교의 해체를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한다. 당시에 활동했던 사상가나 지성인은 자신이 의도하든지, 의도하지 않든지 간에 이런 조류(潮流)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때의 인물로는 장 자크 루소, 어거스트 콩트, 샤를 푸리에, 프리드리히 니체, 지그문트 프로이드, 칼 융, 빌헬름 라이히, 알프레드 킨제이, 존 머니 등이다. 그리고 20세기에 이런 운동에 정신적 기원을 불어넣은 사람은 공산주의 사상을 만든 칼 막스(K. Marx)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썼던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에서 ‘성스러운 가족(성부, 성자, 성령-삼위일체)의 비밀은 지상의 가족이다. 전자를 사라지게 하려면 이론과 실제에서 후자가 먼저 파괴되어야 한다...일부일처제는 기생충과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가정을 해체하려면 동성애, 일부다처, 일처다부, 복수 연애, 다중섹스 등을 감행하는 것이 공산주의 혁명의 의도 가운데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70년 만에 막을 내렸다. 이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알고 공산혁명을 다시 주도면밀하게 완수하기 위하여 네오-막시즘을 만들었다. 이는 마르크스의 사회과학적 분석(노동력에 의한 자본주의 착취)과 여기에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인간정신적 분석(성충동에 대한 기독교 윤리의 억압)을 융합시킨 것이다. 그래서 네오 막시즘은 인간의 성욕을 사상적,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이런 네오-막시즘의 최고봉으로 꼽는 사람은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그람시이다. 그는 정통 공산주의에서 표방하는 프롤레타리아 하부 구조의 계급투쟁을 통한 혁명이 아닌, 상부 구조를 제압하여 정치, 문화, 교육, 사법, 종교, 교육, 언론, 학술 부문의 지식층에 침투하여 진지(陣地)를 구축하고, 헤게모니를 장악한다는 전략을 통해 기독교 신앙과 자본주의 국가를 전복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 서구 사회와 좌파 세력의 전략지침서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도 진행되는 차별금지법이나 평등법, 각종 인권조례, 인권선언, 퀴어축제, 심지어 퀴어신학이나 동성애 행사를 축복하는 성직자들의 행위에 대한 기독교의 분명한 입장이 있어야 한다. 또 그에 따른 행동이 있어야 한다. 근래에 심각하게 벌어지는 동성애 옹호와 반동성애 제재와 탄압에 대한 움직임은 즉흥적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저들은 이미 오랜 동안 준비해 왔으며, 이들이 각 분야에 구축해 온 진지가 견고함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차지하고 있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진지들을 다시 점령해야 한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면 깨끗하고 더러움을 분간할 수 없으며, 우리가 가진 전통적 가치를 지킬 수 없게 된다. 무엇보다 기독교 진리를 담보하고 전할 수 없게 됨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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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옳고 그름을 정하지 못할 때 청탁(淸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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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왜 건국절이 문제가 되는가?’
- 지난 8월 15일은 우리나라 국경일 가운데 매우 중요한 날이다. 79년 전 광복을 맞은 날이고, 76년 전 대한민국 정부를 세워 사실상의 건국을 이룬 것이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로 이런 중요한 행사에서 늘 빠지지 않던 ‘광복회’가 정부 행사에 불참하고, 자기들끼리 행사를 하게 된 것이다. 광복회가 만들어진 1965년 이후에 처음 일어난 기이한 사건이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최근에 새로 임명된 독립기념관장을 둘러싼 논쟁이다. 광복회장인 이종찬 씨는 신임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을 반대하였다. 그가 뉴라이트 친일 사관을 가졌다는 이유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에 의하면 그를 뉴라이트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그러자 광복회장은 정부의 건국절 제정 추진 불가 방침을 밝히라고 하였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건국절은 애초에 검토하지도 않았고, 그럴 의사도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랬더니 김 관장의 사퇴를 들고 나왔다. 이를 정부에서 거절하니,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부정적인 여러 언론의 보도도 눈길을 끈다. 결국 광복회장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정부의 광복절 행사에 불참하는 대신, 자기와 함께하는 단체들과 야당 국회의원 100여 명과 함께 정부가 주관하는 행사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별도의 행사를 치루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자리에서 현 대통령을 물러나라는 타도의 목소리도 있었다. 현 대통령을 일본 총독으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는 마당이니, 그런 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건국에 대한 시각이 달라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광복회장 등은 1919년 4월 중국 상해 임시정부와 9월의 상해임시정부, 한성정부, 노령정부의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건국으로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이때의 정부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정부였고, 특히 근대 국가로서 인정받기 위한 영토, 국민, 주권이 없었으므로 제대로 된 건국(建國)의 원년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우리가 일본에 의하여 주권과 영토를 빼앗기고, 심지어 국민들의 이름조차도 일본식으로 지어지는 마당에, 그것도 남의 나라 한 모퉁이에서 임시로 세워진 것을 온전한 정부나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일본의 강제와 침략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불법이라는 주장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싸웠는가? 그런데 광복회가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을 ‘뉴라이트’로 몰아세우면서, 뉴라이트 판별법 9가지를 발표했는데, 그중에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부르는 것, 1948년을 ‘건국절’로 부르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숨은 의도가 있는 것 같다.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 대통령으로 인정하면, 김구 등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인사들이 빛을 잃기 때문이다. 또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으로 인정하면 그전의 임시정부 활동들이 묻힌다는 생각인 것 같다. 그러나 1919년 상해에서의 대통령도 이승만이었고, 1948년 8월 15일 세워진 건국 정부에서의 대통령도 이승만이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지칭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1919년 상해 임시정부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독립운동가들뿐만 아니라, 순국선열과 애국자들이 많이 있다. 그분들 모두의 희생과 헌신을 국민들은 결코 잊지 않고 있다. 그러나 건국에 대한 것은 좀 생각해 봐야 한다. 국가가 되려면 앞에서도 설명한 대로 국민, 주권, 영토 등을 갖추어야 하고, 또 국민들의 지지와 총의(總意)를 모아야 한다. 1948년 8월 15일 세워진 대한민국은 완전한 국가를 이루기 위하여, 그해 5월 10일 국민 총선거와 7월 17일 헌법제정과 대통령을 선출하고, 공식적으로 국가를 이룬 것이다. 이를 후에 유엔으로부터 한반도 유일의 합법적인 정부로 승인을 받았다. 우리는 반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지만, 1948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국가, 즉 국민이 주권을 갖는 국가로는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전에는 왕이나 황제가 다스리는 전통적인 전제주의 국가였다. 그것을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국가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1948년 8월 15일에 공포한 국가야말로, ‘건국’(建國)이 아닌가! 광복회를 이끄는 정신이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고 한다. 이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포용하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화합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동이불화(同而不和)라는 말이 있다. 분별없이 동조하고 이익을 좇고 반대편을 무시하고 편 가르기에 몰입하는 것을 말한다. 국가의 존망 앞에 초개같이 목숨을 버렸던 선조들이 오늘의 모습을 본다면 어떤 평가를 내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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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시평] 심만섭 목사의 ‘왜 건국절이 문제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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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국가인권위원회, 인권 정책을 균형 잡아야
- 최근 대통령실은 국가인권위원장 후보에 전 헌법재판관 안창호 변호사를 지명하였다. 그는 2012년부터 2018년까지 헌법재판관으로 있으면서, 사회적 약자를 위해 소신 있는 행보를 보여왔고, 법무부에 있을 때에도 법률 복지 향상에 기여했다는 것이 국가인권위원장으로 내정한 이유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2001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진 기구이다. 설치 목적은 민주적 기본질서 확립과 모든 개인의 인권 보호 향상을 위한 것이다. 또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가 해 온 일들을 보면, 지나치게 편향되어 끊임없이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인권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소수자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다수의 인권을 무시하고, 역차별을 하는 정책들을 펼쳐왔다. 즉 동성애, 성소수자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동성애를 확산시키는 일을 해 왔고, 가정과 사회가 해체되고 무너지는 것을 조장하였다. 또 언론사들과 ‘인권보도준칙’을 만들어 언론들의 입을 틀어막아, 국민들의 알권리를 봉쇄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 보니, 동성애와 깊은 연관성이 있는 에이즈와 같은 무서운 질병의 문제점을 제대로 알 수가 없도록 가리는 역할을 해 왔다. 그리고 인권위의 모든 제재 조항들이 ‘포괄적차별금지법’을 비롯하여, 학생인권조례와 온갖 인권조례, 인권헌장 등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모든 국민들이 보호받아야 할 실제적이고 천부적인 인권들은 오히려 침해를 받게 되었다. 그야말로 소수자를 위한 것이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니, 다수의 인권에 대한 것이 역차별을 받게 된 것이다. 또 인권위는 지구상에서 가장 극심한 인권 탄압을 받는 북한 인권에 대하여 오랫동안 함구하였다. 헌법상으로는 북한도 우리의 영토이며, 우리 국민인데도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외면하여, 결과적으로 지독한 공산독재 3대 세습을 묵인한 셈이 되었다. 이제라도 인권위는 모든 국민들이 인정할 수 있도록, 모든 개인의 인권 보호와 향상을 가져오는 국가 인권 기관이 되어야 한다. 성소수자를 비롯한 소수자만을 위한 인권 정책을 강조한다면, 이는 국가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될 것이다. 안창호 국가인권위원장 내정 후에 여러 가지 이유로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국가인권위원장은 특정 정파, 특정 이념 세력, 특정인들을 대변하는 사람만이 차지하는 자리인가? 지금까지도 인권위는 충분히 편향되고, 편중되고, 편파성을 띠어왔다. 따라서 새로운 국가인권위원장은 우리 국민 모두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는데, 소홀함이 없는 국가 기관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안창호 전 헌법재판관의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체제하의 활동에 기대를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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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국가인권위원회, 인권 정책을 균형 잡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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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목사인가? 잡인(雜人)인가? 간첩은 아닌가?
- 목사(牧師)는 기독교의 성직자를 말한다.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예배를 이끌거나 교회를 관리하고, 신자의 영적 생활을 지도하는 성직자로 표현된다. 영어로는 ‘Pastor’라고 하는데, 성경에서의 목양(牧羊)이라는 직능을 감당하는 것을 말한다. 즉 목사는 언제나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말씀 가르침을 통하여, 영적인 훈도와 양육을 위한 일에 하나님께 쓰임 받는 직임을 말한다. 그런데 몇 년 전에 미국에서 왔다는 자칭 어느 목사가 정치권을 기웃거리면서, 나라가 온통 시끄럽다. 최근에는 국회에까지 나가서 대통령 부인과 관련된 청문회에서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엉뚱한 답을 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목사가 맞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는 1995년 도미(渡美)하여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지난 2018년 한국에 들어오면서부터 소위 목사의 신분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해가 안 되는, ‘국가보안법’과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으로 경찰의 조사를 받는 등의 물의를 일으켰다. 그런데 웬일인지 2020년 당시 문재인 정권에서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그가 국내에서 만나고 다니는 사람 등의 행적에서 문제점들이 누적되었다. 그리고 대통령 영부인 김건희 여사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선물을 주는 것을 몰래카메라로 찍었다가 1년 정도 지난 시점에서, 한국의 총선이 다가오는 2023년 12월 말에 편파적 이념을 가진 유튜브 방송에 공개하면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올해 7월 26일에는 국회 청문회까지 참석하여 궤변 수준의 말들을 늘어놓았다. 모 의원이 ‘당신 목사가 맞느냐?’ ‘예수님이 이 자리에 오신다면 증인을 보시고 뭐라고 하실까?’라는 질문에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여당과 대통령 집무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할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였다. 그에게서는 목사라는 성직자의 모습도, 성직자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태도도 양심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예수님은 정치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이란 말을 쓰신 적이 없다. 당시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렇다면 그가 1995년 도미한 이후의 행적은 어떤가? 2013년 7월 27일에는 북한의 전승절 기념행사에 참석하였고, 2014년에는 김일성의 생일인 태양절 행사에 참석하였고, 북한의 통일전선부 소속 공작원과 여러 차례 접촉하였다. 그는 여러 차례 방북하여, 철저하게 북한을 옹호하고 반미주의 행동을 보였다. 그는 북한에 대하여, 그곳이 정당한 나라이며, 미국을 비롯한 서구가 왜곡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후계자는 인민이 추대하고 수령이 낙점한다는 것으로, 북한의 3대 세습을 옹호하였다. 또한 북한은 종교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되고 있으며, 이를 인권 문제로 보면 안 된다는 주장도 하였다. 북한이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되뇌이고 있다. 사실과는 너무나도 상반된 내용이다. 그리고 북한에서 대남전략의 최고 권력을 가진 통일전선부의 부위원장(한국의 장관급으로 본다)을 만난 일도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주요 인사들도 만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북한 당국의 대남 정책에 대한 지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만남은 이뤄지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 그의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친북한, 대남 활동가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그의 여러 가지 행동을 놓고 볼 때 결코 목사라고 보기 어렵다. 그의 지금까지의 친북 활동은 말할 필요도 없으려니와, 진짜 목사라면 남의 허물도 덮어주고, 실수도 용서하는 것인데, 의도하고 계획적으로 대통령 영부인에게 접근하여 몰래 카메라를 찍은 수법은 세상의 잡인들도 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또 그는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목사로서 활동한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 목사라면 적어도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사랑과 용서로 죽으심을 본받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말씀을 자가당착(自家撞着)식으로 해석하면서도 자신이 목사라고 강변하는 모습에서 섬뜩한 생각이 든다. 그가 목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참된 목회자들이 세상으로부터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고, 조롱을 당하고, 성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키우게 되었는가? 목사라는 신분을 가진 한 사람으로 인하여 한국교회 전체가 매도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속히 그가 어느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지금 속한 교단은 어디인지를 밝혀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 가짜 목사, 사기꾼 소리는 면치 않겠는가? 이렇게 말함은, 많은 목회자들이 당신을 가짜 목사요 사기꾼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목사라는 이름으로 무도하게 한 행위는 사죄해야 되지 않겠는가? 최재영, 당신이 목사라고 주장하지 않으면 한국교회가 말할 가치도 없었을 것이지만, 굳이 목사라고 하니 이르는 말이다. 이제 미국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그렇게도 좋아하는 북한으로 들어가기 바란다. 아니면 하나님께 철저하게 회개하고, 북한의 실상을 전 세계에 올바로 알려, 평화 통일의 디딤돌이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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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목사인가? 잡인(雜人)인가? 간첩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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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25만원으로는 결코 민생 회복이 안 된다
- 2016년 스위스에서는 일을 하든, 하지 않든지 간에 정부에서 성인에게는 월 약 300만원, 청소년에게는 약 78만원을 주는 기본소득 지급에 대한 국민 투표를 했다. 그때 스위스 국민들은 유권자의 77%가 정부에서 기본소득금을 주는 것을 반대하였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재정 부담이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정부가 국민들에게 기본소득금을 무상으로 준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국민들의 주머니를 끌러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공짜인가?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한 소위 ‘민생회복지원금법’이 지난 2일 야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하였다. 그 금액은 소득 수준에 따라 25~35만원 정도이다. 이는 이재명 대표가 대표 발의한 ‘당론 1호’ 법안이다. 이에 대하여 여당이 필리버스터로 맞섰으나, 24시간 만에 힘에 의하여 강제로 종료시키고, 표결로 들어가 야당 중심으로 통과시켰다. 여기에 들어가는 재원(財源)은 13조원이다.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국민들이 낸 피 같은 세금을 이런 식으로 날려도 되는 것인가? 또 과연 국민들에게 25만원씩 준다고 민생이 회복되는 것인가? 마치 우리 국민들을 25만원으로 낚으려는 저질스러움과 또 이러다 전 국민들을 국가에서 배급처럼 받아 먹는 것에 익숙하게 하여,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어 놓고 국가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마저 든다. 위에서 예로 든 스위스와 우리나라는 여러 모로 상황이 다르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이다. 스위스 국민들이 기본소득금액을 받아도 결국은 스위스 국민들의 세금에서 나가야 하는 것이고, 그에 따른 예산을 맞춰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 25만씩을 준다고 하여도, 13조원의 엄청난 재원을 결국은 국민들이 부담해야 하는 부채다. 한 마디로 야당은 25만원으로 국민들의 환심과 표를 사서, 그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드는데 이용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차라리 13조원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마땅한 정책을 마련하여 젊은이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도록 하라. 우리 국민들은 25만원에 넘어가거나 흔들릴 국민들이 아니다. 마치 국민들의 세금에서 선심은 자기들이 쓰고, 국민들의 마음을 훔쳐 가고, 그 주머니를 털어가겠다는 정책은 결코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이제라도 정치권은 정신 차리기를 바란다. 이런 얄팍한 수준이 당 대표와 제1 공당의 당론 법안이라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이제는 이런 소모적이고, 국민들의 마음을 너무나도 불안하게 하는 입법 독주를 멈추고, 진정으로 국민들을 위한 정당과 정책을 펼쳐 나가기 바란다. 민주당은 이미 여러 번에 걸쳐 수권정당으로 국가를 운영해 왔었다. 그렇다면 이런 꼼수로 국민들이 넘어올 것이라고 함부로 대하는 태도부터 바꿔야 한다. 국민들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신뢰도와 효율성이 뒤떨어지고,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야 할 정치권, 특별히 ‘입법독재’를 일삼는 정치 권력들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걱정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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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25만원으로는 결코 민생 회복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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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존엄사인가? 안락사인가? 자살방조인가?
- 정치권에서 2년 전에 폐기된 소위 ‘안락사’를 시행할 수 있는 법률안을 발의하였다. 지난 7월 5일 더불어민주당의 안규백 의원이 발의하고, 같은 당의 정진욱, 문대림, 김준혁, 안도걸, 권칠승, 이건태, 박홍배, 양부남, 문금주 의원과 조국혁신당의 조국 의원이 공동 발의하였다(의안번호: 1412) 이들이 발의한 ‘조력존엄사에 관한 법률안’에 보면, 현재 법률로는 말기 환자들이 극심한 고통 속에서 오랜 시간 보내야 하는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의사의 조력을 통하여 환자 스스로 삶을 종결할 수 있도록 함으로, 삶의 질을 고려한 존엄한 죽음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상은 본인의 의사(意思)로 담당 의사(醫師)의 조력(助力)을 통해 스스로 삶을 종결하는 것으로 정의한다고 한다. 또 이는 ‘형법’에 따른 ‘자살방조죄’의 적용을 배제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것을 법제화하고 그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이다. 물론 오랫동안 질병으로 말기 환자처럼 고통을 당하는 것을 환자들이 경험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수명은 신(神)의 영역인데, 이를 사람들이 법률로 정하여 시행한다는 것은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면 ‘살인’이 된다. 비록 의사라 할지라도 죽는 것을 도와주는 것은 일종의 살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18년부터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소위 말하는 ‘소극적인 존엄사’는 허용되고 있다. 그러나 환자가 약물 처방을 받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조력 존엄사’나 의사가 환자에게 직접 약을 투여하여 죽게 하는 ‘안락사’는 금지하고 있다. 세계에서는 조력 사망이나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들도 약간 있다. 콜롬비아, 우루과이는 안락사를, 캐나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포르투갈, 스페인, 뉴질랜드, 호주의 일부 주에서는 조력 사망과 안락사를 모두 허용한다. 그리고 조력사망을 허용하는 나라는 미국의 10개 주,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 등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인간의 생명을 인간이 주도적으로 마감하려는 것은 신에 대한 도발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제22대 국회에서도 전에 보다 적극적인 살인의 방법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물론 말기 환자들의 고통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고통까지도 신이 내린 인간의 수명이라면, 그것을 함부로 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것은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22대 국회가 개원한 지 불과 2달밖에 안 되었는데, 법안 발의가 2,353개가 된다. 그중에 탄핵안, 증언 출석안을 뺀, 일반 법안만도 2,289개에 이른다. 의원 1명이 1주일에 한 개의 법안 발의를 양산하고 있다(선진국에서는 불과 몇 십개 정도의 법안만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도대체 그 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이나, 공동 발의한 국회의원들은 그 내용과 후에 나타날 문제점을 알기나 하면서 법률안을 발의하고 제정하고 있을까? 그런 가운데 ‘조력존엄사’에 관한 법률안도 그 속에 들어간 것이라면 끔찍한 일이다. 법률안은 한번 만들어지면 다시 고치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사람의 생명에 관한 것은 당장에 어떤 분위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법이 악용되거나 남용되었을 때의 부작용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신의 영역을 도발하여 진노를 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전 세계가 다 ‘존엄사’나 ‘안락사’를 허용한다고 하여도, 우리나라만은 그런 법률이 만들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인간의 참된 존엄이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인위적으로 중단시키고,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에 있다는 확증이 어디 있는가? ‘조력존엄사’ 법률이 만들어진다면, 우리나라는 광범위하게 자살과 살인을 방조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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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존엄사인가? 안락사인가? 자살방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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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영적·종교적으로 더 피폐해진 파리 올림픽
- 지난 26일부터 프랑스 파리에서는 제33회 ‘파리올림픽’이 열렸다. 전 세계 206개국에서 10,500명의 선수들이 참가하여, 32개 종목에서 329개 경기가 열리는 세계적인 스포츠 축제이다. 이번 올림픽은 8월 11일까지 계속된다. 그런데 세계인의 축제에서 기독교를 한껏 모독한 장면들이 나와 기독교계를 분노하게 하여, 저질 올림픽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이번 올림픽 개회식에서는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작품이 선보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분장한 뚱뚱한 드래그퀸(여장 남자)을 등장시켰고, 주위에도 비슷한 인물들을 배치시키고 있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남자, 여자, 동성애자가 도서관에서 만나 의기투합한 듯, 한 방으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도 연출하였다. 파리 올림픽은 다양한 성 정체성을 평등하게 대우하고, 포용성을 앞세워 ‘열린올림픽’을 표방하지만, 수 많은 세계인들이 믿는 기독교를 가장 저질스럽게 표현하는 것이 열린 시각인지 묻고자 한다. 전 세계에 25억 명의 기독교인들이 있는데, 이들을 모욕하고, 조롱하고, 부정하는 것이 열린 자세인가? 이번 파리 올림픽은 심각하게 기독교에 대하여 폐쇄적이고, 영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가장 타락하고 피폐하여, 볼품없는 올림픽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 밖에도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는 오륜기를 거꾸로 건다든지, 공연에서 프랑스 마지막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머리가 잘린 모습을 무대에 등장시키고, 헤비메탈 음악과 함께, 프랑스 혁명 당시 단두대를 연상하는 피가 사방으로 튀는 것과 같은 모습이 연출되었다. 폭력적인 방법이 어찌 평화를 지향하는 올림픽과 매치 된다는 것인가? 거기에다 거의 나체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있어 그 장면은 여러 나라에 송출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개막식에서 한국을 북한으로 소개하고, 우리나라의 펜싱 부분 금메달리스트인 오상욱 선수를 오상구로 표기하는 등 상식 이하의 모습들이 파리 올림픽에서 드러나고 있다. 세계인의 화합과 만남과 새로운 기록과 승리의 순간을 위해, 그리고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한 모든 선수들을 위로하는 것이 올림픽이다. 또한 세계인들이 스포츠 정신을 통하여, 건강한 삶과 인간 승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재미를 더하는 것이 올림픽이다. 그러나 이번 제33회 파리 올림픽처럼 전 세계인 가운데 1/3을 차지하는 사람들이 믿는 기독교를 모독하고, 결과적으로 부정하여, ‘당신들 기독교인들은 필요 없다’는 식의 스포츠 행사는 올림픽에 대한 거부감만 커질 뿐이다. 동성애는 우대하고, 기독교는 박대하는가? 파리 올림픽 관계자들과 세계올림픽위원회는 전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정중히 사과해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 대표적 단체들도 이 점에 대하여 올림픽위원회에 강력히 항의하여, 다시는 이런 악행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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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영적·종교적으로 더 피폐해진 파리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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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대법원의 ‘종교의 자유’에 대한 해석이 잘못 되었다
- 대법원이 헌법 제20조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에 대하여, 지자체의 행정명령보다 못한 것으로 해석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사건의 개요를 살펴보면, 지난 2020년 9월 당시 광주시의 모 교회에서 성도들이 예배 드린 것을 지자체장이 행정명령을 어겼다며 ‘종교의 자유’를 현격하게 침해한 것을, 1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을 내렸다. 당시 광주시는 코로나19 상황에서 관내에 있는 모든 교회에서 대면 예배를 금지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해당 교회는 성도들 30~40명이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다. 이것이 예배 준비를 위한 9명까지의 입장 제한을 어겼다는 것으로, 담임 목사 등에게 벌금 처분을 내린 것이다. 이에 해당 교회는 지자체의 행정명령이 부당함을 호소하며 행정소송을 벌였는데, 1심 재판부는 각하(却下-법원이 심리하지 않고 사건을 끝냄)를 했고, 2심 재판부는 기각(棄却-법원이 판단하는 것을 물리침)을 하였다. 그런데 대법원에서는 교회측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하였다. 즉 제대로 된 심리도 없이, 종교의 자유보다 공익의 목적이 중하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지역 주민의 건강을 위하여, 그리고 공공의 목적을 위하여, 지자체가 행정명령을 내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여도(물론 이것도 문재인 정권하에서의 행정편의주의라고 본다) 법원의 판결은 달랐어야 했다. 즉 ‘종교의 자유’에 관한 것은 헌법적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들은 철저하게 정부에서 주문하는 대로 ‘방역수칙’을 지켰고, 나중에 알려졌지만, 교회에서 정기 예배를 통한 코로나 확진자는 없었다. 그런데 교회만 유독 ‘고위험군’으로 지정하여 현장예배(대면예배)를 제한한 것은 형평성, 공정성, 평등성, 비례원칙, 정교분리원칙, 종교의자유 등을 크게 제한한 잘못이다. 헌법에는 여러 가지 국민의 기본권인 ‘자유’가 있다. 그래서 기본권이 충돌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에는 어떤 자유가 우선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자유의 개념’은 성경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고 있고, 이를 헌법에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자유 가운데 ‘종교의 자유’가 으뜸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각급 법원들이 이에 대한 정확한 심리나 판결 대신 각하와 기각을 하고, 대법원마저도 ‘집합 금지로 제한되는 종교의 자유가 공익보다 중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은 과연 우리나라의 대법원이 ‘종교의 자유’에 대한 의미나 제대로 이해하는지 모르겠다. 지난 2021년 6월 서울행정법원에서는 교회들이 서울시장과 은평구청장이 내린 대면 예배 금지 명령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 결정에서 ‘교회의 대면 예배 전면 금지는 위법하다’는 판결을 한 적도 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귀한 권리로 인정받아야 할 ‘종교의 자유’를 소송을 맡은 법원들이 서로가 미루고, 떠다밀고, 그것을 끝내 용인해 주는 사법부의 태도는 실망 그 자체이다. 차후에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면, 무조건 ‘밀어붙여’식으로 ‘종교의 자유’를 아무렇지도 않게 유린하겠다는 것인가? 법원이 지나치게 정치적이 되고 법의 정신과 정의를 외면하고 그저 두루뭉술하게 그 판단과 결정을 미루는 것은 국민의 기본권마저도 무시하는 처사로 보인다. 이를 어찌 ‘법치주의 국가’에서 가장 법률적 권위를 가져야 할 법원의 태도라고 할 수 있는가? 유사한 사건들이 남아 있는데 대법원의 판결을 지켜볼 것이다. 법관들의 치열한 법리적 해석과 판결로 국민들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 특히 대법원은 말 그대로 ‘법 정신’을 명확히 할, 법원 조직의 최고 상급심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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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대법원의 ‘종교의 자유’에 대한 해석이 잘못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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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대법원의 과심(過審)이 헌법 체계를 마구 뒤흔든다
- 7월 18일 대법원은 이상한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이 동성 커플에게 건강 보험상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라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 제36조에서는 혼인을 ‘양성 평등’에 기초하여 성립한다고 하였다. 즉 결혼은 남녀, 양성에 의하여 이뤄짐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법원은 동성(남성)끼리 결혼을 하고 동반자로 사는 사람을, 이성간 결혼을 하고 사는 사람들과 똑같이 피부양자로 인정하지 않는 건강보험공단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대법원의 판결은 ‘피고(건강보험공단)가 이성 동반자와 달리 동성 동반자인 원고(남성 동성애 커플)를 피부양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합리적 이유 없이 원고에게 불이익을 줘 사실상 혼인 관계에 있는 사람과 차별하는 것으로 헌법상 평등원칙을 위반하여 위법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나라 최고 법원인 대법원 판결에서 무엇이 평등원칙을 말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현재 우리나라는 동성결혼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헌법 제36조에서 분명히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성간 결혼을 한 부부 사이에서 어떤 사람은 피부양자로 인정하고, 또 다른 사람은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평등원칙’에 분명히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정상적 혼인이 될 수 없는 동성 동반자에게 동일한 권리를 주라는 대법원의 판결은 ‘평등의 원칙’을 과심(過審)하는 것이다. 아무리 대법관이라고 하여도 우리 법의 가장 근간이 되는 헌법(憲法)을 무시하면 온당한 판결을 할 수 없게 된다. 법관이 법률을 외면하면 그것은 사법부의 권한을 벗어나는 것이며 오심(誤審)의 원인이 된다. 대법원은 이 판결에서 건강보험공단의 조치에 대하여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사생활의 자유, 법 앞에 평등할 권리를 침해하는 차별 행위이며, 그 침해의 정도가 중하다’고 했다. 그럼 최고 법원이 헌법을 무시한 결정을 내릴 때, 국가 전체적으로 오는 혼란과 법의 체계가 무너지는 위험은 누가 책임지는 것인가? 오히려 소수 의견을 낸 4명의 대법관들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이들은 ‘국민건강보험법에서 직장 가입자의 피부양자로 인정하는 배우자는 이성 간의 결합을 본질로 하는 혼인을 전제로 하는데, 동성 간의 결합에는 혼인 관계의 실질이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헌법에 맞는 판단이 아닌가! 실체적 하자가 없는 것을 ‘평등 원칙’을 들먹여서 선명한 헌법에 덧칠을 해 버리면, 법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가 되는 것을 모르는가? 개인의 행복이나 자유는 충분히 보장되어야 하지만 헌법의 규정과 혼인의 가치를 벗어난 사람들을 위한 ‘차별 논리’로 법의 질서를 무너뜨린다면 이것은 대법원의 심각한 모순이 되며 그 권위와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심각한 과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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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대법원의 과심(過審)이 헌법 체계를 마구 뒤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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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평화 뒤에 도사린 전쟁을 살펴야 한다
- 제22대 국회가 시작되면서 다수당에 의하여 ‘입법독주’ ‘입법독재’ ‘입법횡포’를 우려했는데, 그런 염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 17인은 ‘국가정보원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대표발의: 이기헌, 공동발의: 윤건영, 박해철, 박민규, 김남근, 김성회, 복기왕, 김원이, 박상혁, 이용우, 강준현, 조계원, 박홍근, 박희승, 김 현, 윤종군, 안태현 의원) 이들은 지난 7월 2일 국가정보원에 관련된 법률개정안을 제출했는데(의안번호: 1323호) 그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가히 기가 막힌다. 이들의 소속 국가는 어느 나라인지, 누구를 위하여 국민의 대표가 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 내용을 보면 ‘국가정보원이 내란죄, 외환죄, 국가보안법위반죄, 군사기밀보호법위반죄 등 안보범죄에 관한 정보업무 수행을 위해 다른 국가기관에 대해 사실 조회, 확인, 자료 제출 등의 권한을 삭제한다’는 것과 ‘국가정보원이 안보 업무에 관련된 정보업무 수행을 위한 현장조사, 문서열람, 시료채취, 자료제출 요구와 진술요청 등 방식의 조사권을 삭제한다’는 것이다. 또 ‘국가정보원이 취득한 정보를 대공수사권을 가진 수사기관에게 범죄 정보를 제공할 것과, 국가정보원이 수집한 정보를 신원조회를 위하여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가정보원의 권한을 크게 축소 시켜 정치적 개입과 정략적 이용을 막겠다는 의도가 있다고 백번 양보해서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대한민국의 안보와 보안, 그리고 국가 중앙 행정 기관의 존립을 위한 것이 맞는지 의아스럽다. 지금 전 세계는 소리 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 그중에 정보(情報)는 가장 중요한 국가의 자산이며, 국가를 지키는데 필요한 수단이 된다. 국가에도 필요하고 정확한 정보가 없이는, 국가 간 교류와 통상, 외교와 심지어 전쟁에서의 위험을 막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2020년 국가정보원으로부터 ‘대공수사권’을 박탈하여 국가 최고 정보기관의 손발을 자르더니, 이제는 아예 국가를 위한 정보 수집과 그에 따른 수사권을 모두 박탈하여 목까지 치겠다는 것인가? 그러려면 왜 막대한 국민의 세금에서 국가정보원을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는가? 한낱 권력자들의 이용 도구로만 생각하는 것인가? 더불어민주당 방식대로 한다면 우리나라는 모든 정보에서 밀려 고도의 정보 수집이 어렵게 되고, 우리나라를 위태롭게 할 간첩 활동이나 중요한 기밀의 유출 등을 획책하는 세력들을 붙잡을 수 없게 된다. 혹시라도 정보기관에 의하여 국민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면, 이는 적극적으로 막아야 한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손익 계산에 의한, 국가의 보안과 방첩 기능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보 수집과 활용의 용도는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정치인들이 국가정보원으로부터 가장 중요한 ‘대공수사권’을 빼앗더니, 이제는 대부분의 중요한 권한과 역할마저 박탈하여 유명무실한 국가 정보기관으로 추락시키려는가? 이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누구를 이롭게 하려는가? 파수꾼이 없는 병영(兵營)은 이미 적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겠다는 실책이다. 국가정보원의 역할과 책임은 어떠한 적의 도발과 음모로부터 방비하고, 국가의 안위를 위해 최일선에서 일할 수 있도록 재량을 주어야 한다. 국민과 국가를 위하여 일하지 않는 행정기관은 불필요하지만, 그 행정기관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을 가로막고 나서는 행위야말로 국민들의 지탄을 받아야 한다. 평화는 내가 힘이 있어야 상대편이 함부로 달려들지 못하는 것이며, 지피지기(知彼知己)일 때, 우리의 안위는 지켜지는 것이다. 그런데 왜 특정 정당의 국회의원들은 이를 모를까? 목욕물을 버리겠다며 아이까지 버리려는가? 사실 제22대 국회는 정식으로 아직 개원식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마구잡이식으로 ‘입법폭주’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국민들은 ‘악법’과 ‘떼법’과 ‘국가망할법’을 양산하려는 국회의원들을 잘 감시해야 한다. 이제는 밖으로부터 도전해 오는 세력뿐만 아니라, 안에서부터 국가를 허물려는 세력들에게서도 국가를 지켜내는데, 신경을 써야 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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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회 논평] 평화 뒤에 도사린 전쟁을 살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