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4(화)

칼럼
Home >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칼럼 기사

  • 서정주의 ‘가을에’를 읽는 가을
    이렇게도 눈부신 가을 햇살이 슬픔일 줄이야! “본시 평탄했을 마음 아니로다 / 구지 톱질하여 산산 찌저노았다”(김영랑 ‘한줌 흙’)데자뷔(Dejavu)라 했던가? 시인 박이도는 그의 시 ‘데자뷔’에서 ‘전도서’를 인용한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 이미 한 일이 후에 다시 한지라.” <전도서 1:9> 그래, 지금 보고 있는 슬프디 슬픈 가을 햇살은 결코 처음 보는 풍경은 아닐 지도 모른다. 시인의 말처럼 “결국 나의 시적 사유나 오감을 넘어 육감에 이르기까지의 감관은 시공을 넘나드는 착시현상의 즐거운 낙원”일지도. 6.25라 부르던 전쟁은 끝났다지만, 실감과는 거리가 먼 허탈 속을 해매든던 청춘은 서정주의 ‘가을에’를 읊었다. 막 생겨난 음악 감상실을 드나들며. “쫓겨나는 마당귀”를 두고 입씨름을 벌이면서, 저마다의 공책에 옮겨 적은 시구가 서로 틀렸어도, 감상실에 죽치고 있는 시인들의 해석이 서로 엇갈려도, 그냥 ‘가을에’를 읽었다. “오게 /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 아는 이, /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 여린 문(門)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오게 / 저속(低俗)에 항거(抗拒)하기에 여울지는 자네, / 그 소슬한 시름의 주름살들 그대로 데리고 / 기러기 앞에서 떠나가야 할 / 섧게도 빛나는 외로 운 안행(雁行)- / 이마와 가슴으로 걸어야 하는 / 가을 안행(雁行)이 비롯해야 할 때는 지금일세. // 작년에 피었던 우리 마지막 꽃- / 국화(菊花)꽃이 있던 자리, / 올해 또 새것이 자넬 달래 일어나려고 / 백로(白鷺)는 상강(霜降)으로 우릴 내리 모네. //오게 / 헤매고 뒹굴다가 가다듬어진 구름은 / 이제는 양귀비(楊貴妃)의 피비린내 나는 사연으로는 / 우릴 가로막지 않고, / 휘영청한 개벽(開闢)은 또 한번 뒷문(門)으로부터 / 우릴 다지려 / 아침마다 그 서리 묻은 얼굴들을 추켜들 때 일세. //오게 /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 이 /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 여린 문(門)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데자뷔라 했던가. 그날의 청춘이 오늘 다시 ‘가을에’를 읽는다. 이마저 없다면 무엇으로 안주를 할꼬. 그래 그날 들었던 그 재촉소리도 들려온다. “저기 저기 저, 가을 꽃가지 /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 눈이 내리면 어리하리야 /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미당의 시 ‘푸르른 날’ 말이다. 더듬거리다 보면 모두 되살아나 줄지 아는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가지 /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 눈이 내리면 어리하리야 /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어이하리야”를 읊조리던 그리운 벗, 그는 그냥 그리운 사람이 되고 만 터에, <푸르른 날>을 부르다가 목이 멘다. 그라도 곁에 있어준다면. 아니다, 차라리 가길 잘 했지 푸념하면서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며 다시 목이 멘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꼬. 지난 해 백내장 수술을 한 탓으로 푸르른 하늘이 더 눈부셔 진 탓일까. 코헤렛의 탄식을 되씹는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전도서 1:8-10)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11-24
  • 죽은 후에도 기억될 만한 삶을 살아라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곳은 어디일까? 미국 켄터키주 포스트녹스에 있는 금괴 보관소인가? 아니다. 중동인가? 아니다. 남아프리카의 금광이나 다이아몬드 광산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구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곳은 공동묘지이다. 쓰지 못한 사업, 이루지 못한 관계 등 온갖 보화가 땅 밑에 묻혀 있다. 어마어마한 잠재력이 무덤 속에서 사라져 가니 안타깝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전하지 않으면 미국 어느 마을에 살았던 노처녀 낸시존스의 인생처럼 무미건조할 것이다. 미스 존스가 사망했을 때 그곳 지방 신문 편집자는 그녀의 부고난에 쓸 말이 없어서 고민에 빠졌다. 그녀는 결혼한 적도 없고 자녀도 없었고 특별한 사건에 연루된 적도 없었다. 한참 고민하던 편집자는 마침 사무실에 들어온 스포츠 기자에게 일을 맡겼다. 스포츠 기자는 낸시 존스의 부고 난에 이렇게 적었다. ‘여기 낸시 존스의 유골이 누워 있다. 그녀는 평생 두려움을 피했다. 노처녀로 살다가 노처녀로 죽었다. 안타도 도루도 에러도 없었다’ 우리들의 묘비에 이런 글이 새겨진다면 어떨까? 그런 운명을 피하려면 삶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세상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착실하다. 약속한 것은 꼭 지키고 사람들을 늘 성심성의껏 대하며 크던 작던 목표를 향한 계획을 성실하게 즉 끈질기게 실천하였다. 외국계 회사에서 임원 자리에 오른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그녀가 임원이 된 것은 경영 전략이나 카리스마가 아닌 신입 사원시절 정성스런 복사 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지방 대학 졸업 후 상경해 처음 맡은 일은 복사였다. 당시엔 대형 복사기가 귀했다. 그녀는 종이를 대는 판과 덮개를 약품과 걸레로 깨끗이 닦고 종이를 제자리에 놓았다. 복사하면서 나오는 검은 잡티를 없애기 위해서다. 스테이플러도 정확한 위치에 찍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복사 서류만 보고도 그녀가 한 것임을 알았다. 하루는 사장에게 제출할 중요 서류를 복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퇴근 시간이 지나가고 복사를 하다 그만 복사기가 고장이 났고, 비상 연락망을 통해 퇴근한 복사기 회사 직원에게 심야수리를 부탁, 결국 새벽 3시 무렵에야 복사를 마쳤다. 이런 사정을 안 사장은 복사를 이처럼 정성스럽고 책임 있게 하는 직원이라면 무슨 일을 맡겨도 잘할 것이라는 신뢰를 표하며 그녀를 희망 부서에 배치해 주었다. 그녀는 더 열정적으로 일했고 결국 임원의 자리에 올랐다. 정성스럽게 일 하는 사람이 인정 받고 승진 하는 법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하루를 성실하게 살았다면 일생을 성실히 산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늘 하루가 일생이다. 어떤 날은 열심히 했다가 또 어떤 날은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성실이 아니다. 남의 탓, 환경 탓을 하는 것은 가장 불성실한 자세다. 다른 누구의 평가 때문에 성실해서는 안 된다. 정해진 계획대로 꾸준히 일관성을 갖고 일을 전개해나가는 것이 성실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선한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정직하고 솔직하게 자신을 평가하면서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축복하신다. 하지만 탁월한 지식과 재능과 경험이 있어도 성실함과 겸손함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결국 실패하고 만다. 타성에 젖어 대충대충 하거나 주먹구구식으로 ‘잘하자’ ‘열심히 하자’ 구호에 그쳐서도 안된다. 반드시 무엇을 어떻게 해서 어떤 결과를 얻는다는 구체적인 목적과 방향을 정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허공에 뜬 모호한 목표는 달성할 수 없다. 이런 사람에게는 기회조차 오지 않는다. 성공하는 사람은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한다. ‘대박’ 이란 말을 잘 쓰는 사람은 대박과는 거리가 멀다. 이 세상에 대박이란 없다. 자잘한 것들이 쌓여 대박이 된다. 그런데 우리들은 한계를 인정하는 습관이 있다. 해결 방법을 찾다가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바로 포기한다. 필자도 타인과 대화할 때 ‘그것 안됩니다’ 말을 하거나 자주 들을 때가 있다. 왜 안 되느냐? 사람들에게 물어 보거나 나 자신에게 질문해 보면 지금까지 해봤지만 안 되었다는 것이다. 남들이 한두 번 해서 안된 일이라면 열 번, 스무 번 하자. 남들이 두세 달 해서 안된 일이라면 일년, 이년 동안 물고 늘어지자. 1%의 가능성이라도 보이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근성이 있어야 한다. 하고 싶은 일에는 방법이 보이고 하기 싫은 일에는 핑계가 생긴다. 변명이 보이기 때문이다. 안되는 수십 가지 이유와 변명으로는 되는 일이 없다. 회피하는 것에 길들여진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어려운 일을 시도해 성취감을 맛보기 보다는 행여나 일을 하다가 망신을 당하면 어쩌나 자존심이 상하면 어쩌나 하면서 철저히 자신을 보호하려고만 한다. 그런 사람은 성공 가능성이 99%라도 1%의 실패 가능성에 연연해야 할 것이 분명하다. 떠밀려서 억지로 한 일이 설령 성공하더라도 흥분하고 감격하기 보다는 ‘휴 다행이다’ 하며 안도감을 갖는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6-11-24
  • 당신의 습관을 고쳐라
    어떤 분이 사람의 습관을 말하기를 ‘나는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하인이고 또한 모든 사람들의 실패한 사람들의 하인이다. 위대한 사람들은 사실 내가 위대하게 만든 것이다. 실패한 사람들도 사실 내가 실패하게 만든 것이다. 나는 기계처럼 정확하게 움직이지만 또한 인간의 지성을 가지고 있다. 나를 변화시키는 사람은 이득을 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파멸을 맞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내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만일 내가 필요하다면 나를 훈련시켜라 엄격하게 대하라. 그러면 나는 이 세상을 다 줄 수 있다. 그러나 나를 쉽게 대하면 당신을 파멸시킬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바로 ‘습관’이다 라고 했다. 왜 나쁜 습관을 고쳐야 할까? 인간의 부와 행복, 마음의 평화는 모두 습관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습관은 제2의 천성으로 제1의 천성을 완전히 파괴한다’고 말했다. 아무리 나쁜 성품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좋은 습관을 기르면 천성이 바뀐다는 것이다. ‘습관’(habit) 이란 단어는 원래 의복이나 옷감을 의미했다. ‘승마복’, ‘복장’과 같은 단어가 그 예이다. 습관은 우리가 입고 있는 의복과 같다. 그것은 생각지도 않는 일이나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자신에게 딱 들어맞기 때문에 우리는 그 것을 입고 있는 것이다. 맥스웰 몰츠 박사는 ‘새로운 습관을 만들려면 어른의 경우 최소한 21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21일만 지속되면 새로운 습관을 만들 수 있다. 새로운 목표를 세웠는데 작심삼일로 끝내는 사람이 많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부분 자신을 설득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핑계를 만들며 작심삼일로 끝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나쁜 습관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이렇게 하자 1단계, 결심하자 옛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만들겠다고 결단하자. 영어로 결단이란 단어는 ‘decision’ 이다. 이 말은 라틴어 ‘froiu de to cut’에서 나온 말이다.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모두 잘라버린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운동을 하겠다고 결심 했으면 그 시간에 자명종 시계가 울리도록 하고 시계가 울리면 즉시 일어나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2단계, 예외를 인정하자. 새 습관이 만들어질 때까지 핑계를 만들지 말고 합리화 하지 말자. 몸이 찌뿌 등하고 컨디션도 안 좋으니까 오늘 운동을 쉬어야겠고 라고 변명 하지 말자. 3단계, 다른 사람에게 목표를 말하자. 특정한 행동 습관을 익히는 중이라고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말해놓으면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서 게을러지지 않을 것이다. 4단계, 새로운 습관을 가진 자신의 모습을 시각화 하자. 새 습관은 더 자주 시각화할수록 더 빨리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고 자동적인 버릇이 된다. 5단계, 확언하자. 반복해서 확언하면 습관을 형성하는 속도를 높일 수 있다. 6단계, 굳은 결심으로 밀어 붙이자. 결심한 일을 하지 않으면 불편함을 느낄 정도가 되어야한다. 새 습관이 자동적이고 쉬운 일이 될 때까지 계속 연습해야 한다. 그야 말로 불도저처럼 무섭게 밀어붙이면 이루어진다. 7단계, 자신에게 보상하자. 가장 중요한 일은 새 습관을 익히는 자신을 잘 대우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보상 할 때마다 행동을 재확인하고 강화하게 된다. 무의식 속에서 보상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그러면 행동이나 결심의 성과로 얻는 긍정적인 결과에 대해 강한 애착을 보일 것이다. 이밖에도 새로운 습관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태도가 필요하다. 먼저 남의 말을 경청해야한다. 남의 말을 더 많이 듣고 자신의 말을 적게 하는 습관은 참으로 중요하다. 삼성 그룹 이건희 회장은 자신의 말을 아끼고 상대방의 말을 잘 경청하기로 유명하다. 그는 선친이 붓글씨로 써준 ‘경청’이란 휘호를 벽에 걸고 그것을 보면서 스스로 자기에게 잘 듣고 있는가를 묻고 더 경청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다음으로 실력 이전에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한다. 만나는 사람이 예의 없고 품격이 없으면 금세 싫증 나게 마련이듯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예의 없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사하는 것 하나를 보면 그 사람이 교양이 있는 사람인지 품위가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성실하게 일하여야한다. ‘성실성’은 원칙을 중심으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을 의미 한다. 성실성은 라틴어로 ‘sin cero(왁스를 사용하지 않은) 즉 이음새나 떨어진 부분이 없는 완전한 것’을 의미 한다. 진정으로 성실한 사람은 상황에 따라 정직성을 보이거나 가끔 한 번씩 정직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완전하게 일을 끝맺는다. 정주영 회장의 자서전 ‘이 땅에서 태어나서 나의 살아온 이야기’에 이런 글이 있다. ‘무슨 일을 하든 ‘요만큼’ 이나 ‘이 만큼’ ‘요정도’ ‘이정도’ 는 내게 있을 수 없었다. 더 하고 싶어도 더 할 게 없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다하는 최선 그것이 내 인생을 엮어온 기본 생각이다.’
    • 칼럼
    • 목회자
    2016-11-11
  • 아합과 이세벨 그리고 엘리야
    아합이 페니키아 시돈의 공주 이세벨을 왕비로 맞은 것은 결과적으로 큰 골칫거리를 떠안는 일이 된다. 그것은 아합이 한 여인으로서 이세벨을 좋아할 수 없어하는 따위의 일은 아니었다. 아합은 성실한 편이어서 국력신장을 위해 애썼고 나름대로 성과도 거두었기로 그의 이름은 멀리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통치자들에게도 알려 지고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북동쪽의 아람 여러 나라들, 시리아 남부, 그리고 팔레스티나 북부의 세력들과 패권을 다투고 있어, 다윗 솔로몬 시대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상황. 힘 있는 페니키아와의 우호는 여러 측면에서 유리했다. 문제는, 통치자에게도 서슴없이 의견을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 히브리인들을 다스려야할 이스라엘의 왕이, 그런 전통과는 거리가 먼 한 외국 여인의 간섭에서 발생되는 트러블이었다. 2세기 전, 솔로몬 당시에도 그랬었다. <열왕기상>11장 들머리에서 읽을 수 있듯이, 솔로몬은 이집트, 모압, 암몬, 에돔, 시돈, 히타이트 등지에서 많은 여인들을 궁정으로 데려왔고, 그녀들이 가지고 온 이국적 문화와 가치관은 솔로몬 통치 말년의 이스라엘에, 사회적 정치적 혼란을 야기하고 왕국분열의 원인이 되었었다. 이세벨 말고 아합에게 다른 여인들이 더 있었는지, 그 수가 얼마가 되는지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확실한 것은 그 누구도 아합과 이세벨 사이를 비집고 들어 직접 왕에게 간언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아합 궁정에서 이세벨의 영향력은 강했던 것이다. 정치가로서 혹은 군인으로서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아합이 페니키아 여인 이세벨만은 제대로 다루지 못 했던 것이다. 궁정 안팎은 온통 화려한 페니키아 색깔로 칠해진다. 한 고대 히브리 역사가가 남겨준 주석을 보자 “자기 아내 이세벨의 충동에 말려든 아합처럼, 주님께서 보시기에 이렇게 악한 일을 하여 자기 목숨을 팔아 버린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열왕기> 21: 25)이런 아합을 비난하는 자는 오직 예언자 엘리야. 이세벨이 보낸 자객의 손을 벗어나기도 했던 엘리야가 아합은 귀찮고 성가셨다. 얼굴만 보아도 안정을 잃게 될 지경이었다니. 아합이 엘리야에 말했다. “그대가 바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요?” 엘리야가 응수한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임금님과 임금님 아버지의 가문이 괴롭히는 것입니다. 임금님께서는 주님의 계명을 내버리고, 바알을 섬기십니다.(<열왕기상>18:17-18)사실은 아합도 이세벨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물밑에 잠겨 있던 문제들이 구체적인 사건이 되어 수면위로 얼굴을 드러나게 한 것은 바로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었다. “아합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그 포도원을 조상의 유산이라는 이유로 양도하기를 거절하였으므로, 마음이 상하였다. 화를 내며 궁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음식도 먹지 않았다.(<열왕기상>21:4) 왕궁을 늘리기 위해 인접해있는 포도원을 양도받기를 원한 아합의 간청을 물리친 소유주 나봇의 응답을 접한 아합의 모습이다. 한낱 백성의 말에 기가 죽어 입맛을 잃은 남편 아합을 본 이세벨이 나선다. “당신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임금님이 아니십니까? 일어나셔서 음식을 드시고, 마음을 좋게 가지십시오.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임금님의 것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말은 곧 실천으로 옮겨진다. 장로들에게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보내는데, 내용인즉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누명을 씌워 깡패들로 하여금 죽이게 하라는 것. 장로들의 손이 떨린다. 왕의 이름으로 된 편지이지만 그것이 이세벨의 장난임은 불문가지 아니던가. 이세벨로부터 나봇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아합은 곧 나봇의 포도원으로 달려간다. 그를 막아서는 엘리야를 향하여 아합은 말한다. “내 원수야, 네가 또 나를 찾아왔느냐?” 엘리야가 대답한다. “임금님은 목숨을 팔아 가면서까지, 주님 보시기에 악한 일만 합니다. “ 그러나 한 나라의 혼란을 수습한 것은, 살아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엘리야가 아니라,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예언자 엘리사였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11-11
  • 성령에 대한 선교학적 재발견
    필자는 오늘 피터 바이어 하우스의 “성령에 대한 선교학적 재발견”에 대한 글을 인용하여 글을 엮고자 한다. 선교적선포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성찰은, 이제 우리가 선교에 있어서 성령의 중요한 위치를 동시에 주목할 때만이 선교의 본질이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선교의 성령론적 특성을 1974년 로잔 대회는 그 신학적 기초선언 중 하나의 고유한 장(14장)에서 확고히 했다. 1985년 5월 오슬로에서 세계 복음화를 위한 로잔 위원회의 신학분과 위원회와 세계복음주의 연맹이 그에 대한 하나의 특별한 연구협의회를 열었다.선교에 있어서 성령 수여의 구속사적 편입과 함께 성령의 보혜사적 기능을 들 수 있다. 성령강림절에 오신 성령의 획기적인 과제는 그가 아버지 하나님의 위임을 받고 아들의 신적인 대변인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선교적 증언을 보증하고, 타락한 세상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 계시의 진리에 대해 감겨진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선교적 선포에 성령의 돕는 중재가 어떠한 가는 신학적으로 요한복음의 고별사에 명백하게 나타난다. 여기에서 요한에게 있어서만 사용되는 성령의 신비스런 별칭, 즉 문자적으로 “불러들이는 자”라는 뜻의 “파라클레토스”가 나타난다.이것은 요한복음 14장 16절, 26절, 15낭 26절과 16장 7절 이하의 네 곳에 나타난다. 요한복음 14장17절과 16장 13절에서 동시에 진리의 성령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보혜사는 그럼 누구인가, 또는 성령의 이러한 별칭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보혜사 parakiein)의 그리스 어원은 돕는 자로서,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 요청하게 되는 누군가를 가리킨다. 삼위일체의 틀에서, 즉 세 인격의 내부 관계(내재적 삼위일체)와 마찬가지로 역시 외부로의 공동의 사역(경륜적 삼위일체)이란 관점에서 볼 때, 성령에게 하나의 특별한 의사소통의 과제가 주어진다. 만약 아버지 하나님과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성령을 종말론적 충만 가운데 나타난 성령강림절의 구속사적 사건 속에서 땅으로 보내셨다면, 그의 보혜사적 대리의 사역은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믿지 않는 세상에 대한 교회의 선교와 관련하여 실현하신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며, 그를 그의 제자들에게 현존하게 만든다(요 16:14). 성령이 제자들과 비기독교인 청중의 내면적 상태를 진단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깨닫는 것은 그들에게 삼중의 장애물이 막고 있는 것, 그리고 이 장애물을 통해 청중들이 일부는 고의로, 일부는 내부적 속박으로 복음에 대해 냉정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장애물의 첫 번째 장벽은 그들의 초월성의 상실 때문에 그리스도 케리그마에 대한 몰이해에 있다. 두 번째 장벽은 고의적인 폐쇄성이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완강하게 반항하며 자기 우상화가운데 창조와 자신의 마음과 양심에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에 따라 인식할 수 있는 것에 저항한다. 세 번째 장벽은 내면적인 속박이다. 그것은 죄과의 청취능력을 마비시키도록 양심을 압박하는 것을 통해 그리고 버릴 수 없게 된 짐을 견고하게 한 죄악의 힘을 통해 생긴다. 영적 죄 인정 또는 확신의 중요한 내용을 말하는 세 개의 중심 개념이 나온다. 그것은 죄, 의, 심판이다. 보혜사는 세상에 대해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에 대해 눈뜨게 한다.구원에 필요한 그 첫 번째 인식은 죄의 본성에 관계된다. 왜냐하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분노가운데 있는 재앙의 상황에 처한 인간에게 오직 그 죄를 대속하는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구원의 소식이 된다. 두 번째로 성령은 의의 본질에 대한 시야를 그들에게 열어 주신다. 이것은 추상적인 이상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유일무이한 구원행동 안에서 계시된다. 성령께서 세상에 세 번째로 열어 주시는 것은 심판에 대한 시야이다. 이것이 세상 권세 잡은 자기 심판 받는 데에 있다. 에리히 자우어는 성령의 보혜사적 활동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성령은 세상의 죄를 그들의 불신앙을 통하여 폭로하는데, 이는 그들이 주님을, 한 분이신 참된 주님을 내던져 버린 것이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6-11-11
  • (경현수) 사시나무 숲에서
    사시나무 숲에서 엄 원 용늦가을 공원 사시나무 숲속을 거닐어 보았다.수피가 은백색인 수십 그루의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어찌 보면 세월을 다 이기고 머리 희끗 희끗 날리는 노인들이 꿋꿋이 서 있는 것도 같고, 재질이 무르고 가벼워 가구재나 성냥개비 젓가락 등에 쓰인다는데, 나이 들어 가벼워지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름답게 물들인 낙엽처럼 한때 곱게 물들었다가 지상에 떨어져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것이리라.참으로 정갈한 은백색, 그 위에 노랗게 물들인 낙엽을 보면서 인생도 이렇게 아름답게 저물어 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만추의 숲속은 황홀하게 쓸쓸하다,온갖 색채와 음향들이 적나라하게 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 겸손하게 내려놓고 적신으로 서 있는 나무와 나무, 울울했던 지난 계절의 찬란했음을 결코 말하려 들지 않고 있다.가을날 더군다나 사시나무숲은 어떨까, 잎 보다 꽃을 더 성급하게 피우던 사시나무, 넘쳐나는 생명력의 분출로 쉼없이 팔랑 팔랑 온 몸으로 전율하며 춤 추었다. 활엽수인 백양나무 잎들은 그들의 본향인 흙으로 내려앉는다. 아주 조용히-은백색의 수피는 노년의 시인의 모습과도 닮았다, 잎을 떨군 백양나무와 정갈하고 가볍게 숲을 거니는 시인의 동질성이 놀랍다.사시나무는 희고 부드러운 재질로 무엇인가 담길 상자로, 혹은 불꽃을 만드는 성냥개비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시인은 다시 또 다른 이름으로 태어나고- 그래서 숲은 잠 들지않나보다.
    • 칼럼
    • 기독시선
    2016-11-11
  • (경현수)사람이 위안이다
    사람이 위안이다 박 재 화살다 보면사람에 무너지는 날 있다사람에 다치는 날 있다그런 날엔혼자서 산을 오른다해거름까지 오른다오르다 보면작은 묏새 언덕을 넘나든다그 서슬에 들찔레 흔들리고개미떼 숨 죽이는 것 보인다그림자 없이 내려오는 숲속순한 짐승들어깨 비비는 소리 가득하여 사람에 무너지는 날에도사람은 그립고사람에 다치는 날에도사람은 위안이다하나님이 그 분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지으신 모든 것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에덴동산에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이 아름다운 피조물,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를 두고 살아가고 있음을 시인은 고백하고 있다 상형문자인 인(人)자는 서로 의지하여 기대어 있는 두 개의 획으로 되어 있다, 인간은 서로 버팀목이 되어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다.인간(人間)이라는 의미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성을 드러내는 절묘한 상형문자다.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또 미워하기도 하는 애증의 갈등에 묶여 살아가는 아이러니한 내면을 보여 주고 있다, 사람에 / 무너지는 /날 있다/사람에 /다치는 /날 있다시인은 그런 날엔 산을 오른다, 날이 저무는 해거름까지, 하나님 지으신 모든 생명체가 어우러져 합일(合一)되어 있는 산에서 작은 묏새 무리가 날아가고 그 파장으로 들찔레가 흔들려도 아무 일도 없는 듯 여전히 피어 있고 부지런한 개미떼도 일손을 놓고 있어도 말없이 순응하고 있다. 이 섭리 앞에 마음의 그림자 내려놓고 산을 내려온다.사람이 다시 그리워지고 상처도 지긋이 누르며 사람에게 다가가 어깨를 비비며 위로의 말을 듣고 싶다.
    • 칼럼
    • 기독시선
    2016-11-03
  • 선교지에서의 구원 선포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이 사역할 때에 쟁점 하나가 인간의 구원문제이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 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은 진리이다. 이 진리야 말로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를 이글 수 있는 절대적인 무기가 된다. 죄인인 인간이 진노의 심판아래 놓여 있음을 생각할 때, 그의 구속은 그 자신에게서 나올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만 나올 수 있다. 이것이 실제로 구약과 신약성서의 모든 구원론적 진술의 일관된 진단이다. 모든 구원하는 행동은 하나님을 그 주체로 한다. 인간은 또한 그의 구속에 능동적으로 공헌할 수 없으며,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구원의 장본인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또한 구원의 내용이시다. 구원은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근본적 관계의 회복에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실존이 그 관계 회복의 근원과 목적설정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처한 인간의 재난상황을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있어서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피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마지막 기회가 된다. 싸이더와 패커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성경의 언어용법의 압도적인 다수가 가리키는 것을 구원론적 언어 사용을 제한하는 방향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과 연관이 있으며, 이것은 개인 혹은 공동체와 연관되어 있다. 수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약의 “대속개념”을 하나의 종교사적인 표상으로 제쳐 놓는데, 이는 다른 여러 성경적 진술과의 전체적인 관련에서 근본적인 것이 아니며, 단지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초기 기독교의 구원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아래의 중요한 단서들을 주목하도록 하면서 다음과 같이 인간구원의 메시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첫째는 구원은 신약적 의미에서 단지 “부정적”으로만 죄의 용서를 통한 죄책의 도말에 있지 않다. 모든 성경의 구원론적 용어들은 행동개념들로서, 재난의 제거를 내포한다. 적극적인 새로운 구원의 상태, 즉 인간의 하나님과의 갱신된 친교를 목표로 한다. 이러한 면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구원받은 자의 양자됨 또는 하나님의 아들 됨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바울과 요한의 개념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아들여짐은 구원사건의 끝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새로운 생명의 시작인데, 계속적인 변화와 영적 성장의 과정을 통하여 온전한 성숙에 다다라야 할 성화이다. 셋째는 구속은 단지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다. 만약 구원이 단지 개별적인 죄인에 의해서만 개인적 신앙행위를 통해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구속의 목적은 그의 몸 된 지체로서의 구속받은 자들의 공동체, 교회를 형성하는 것이다. 넷째는 구원은 물론, 거듭 강조한 바와 같이, 우선 먼저 하나님께 대한 수직적 관계에서 실현되는 사건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은 모든 인간의 삶의 영역에 대하여 갱신하는 결과를 갖는다.다섯째는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얻는 구원은 세 가지 구원사적 시간 속에서 효력이 발생된다. 구원은 현재에서의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의 수용과 유지에서 실현되며, 또한 매일의 붙듦에서 갱신되어야 한다. 구원의 성취는 미래에서 발견된다.위에서 언급된 인간 구원의 개념이 선교현장에서 선교사들을 통한 하나님께서 베푸신 화해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하겠다. 선교사들은 십자가로부터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선포하는 과제가 선교적 직무에 포함되어 있음을 주지해야 하겠다. 부활로부터 규정된 사명의 양태는 그를 주님으로 선포하는데 있다. 실제로 우리가 거의 2000년간의 선교역사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바, 사람들은 선포되거나 읽혀진 하나님의 말씀에서 다양한 측면 때문에 내적으로 감동 받아 마침내 그의 주님이요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목숨을 바치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이것이 암시하는 것은, 내적 확신의 사역과 율법과 복음을 통한 깨달음의 사역은 선포자의 처분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다. 선포자가 책임지는 것은 오로지 온전한 구원의 소식을 청중의 내적 상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개입을 하면서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과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6-11-03
  • 다윗 그리고 나발과 아비가일
    사무엘이 죽은 후, 떠돌이 다윗이 파란 광야로 활동 무대를 옮겨갔을 때, 숙명적으로 만나지 않으면 안 될 두 사람은 나발과 그의 아내 아비가일이었다. 나발은 갈렙 족속으로 큰 부자. 성서는 나발을 소개하면서 재산목록을 기록하고 있는데, 목장과 기르는 양 3,000마리와 염소 1,000마리의 소유주라고. <사무엘서>는 나발은 고집이 세고 포악한 성격의 소유이지만, 아내 아비가일은 이해심도 많고 용모도 아름답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녀가 있었기에 다윗이 스스로의 혈기를 눌러 피를 흘리지 않고도 왕이 될 수 있었다며 아비가일의 미덕을 추켜세운다. 다윗은 나발이 양털을 깎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종자들을 보냈다. 다윗은 그의 종자들이 나발을 그의 형제라 부르도록 타일러 두었다. 떠돌이 폭력집단의 두목으로서는 나름대로의 예의를 갖춘 셈이지만, 나발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다윗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 보는 것처럼 거드름을 피운다. 어엿한 사업가인 그가 어떻게 불한당들과 상종할 수 있겠느냐는 듯이. 다윗 패거리는 주인에게서 도망쳐온 종들의 집단에 불과하다며, 다윗이란 이름 대신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며 되묻기도 한다. 종자들의 보고를 받은 다윗은 주먹 패의 두목답게 곧 나발을 징계하러 나선다. 칼을 차고 다윗을 따르는 장정이 400이라 했다. 진지에는 200만 남기고. 낌새를 알아차렸을까 아니면 내통해주는 이가 있었을까. 하여튼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재빨리 빵 200덩이와 포도주 두 부대, 요리한 양 다섯 마리, 볶은 곡식, 건포도와 무화과 뭉치들을 준비하여 여러 마리의 나귀에 실어 다윗에게 보내고 자신은 그 뒤를 따랐다. 물론 남편 나발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산등성이를 내려오는 다윗 일행과 마주치자 아비가일은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댄다. 다윗을 ‘아도나이’(나의 주)로 부르고 자신은 ‘아마드카’(당신은 나의 주인)라 칭한다. 아비가일이 말한다. “장군께서는 나의 몹쓸 남편 나발에게 조금도 마음을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은 정말 이름 그대로, 못된 사람입니다. 이름도 나발인데다, 하는 일도 어리석습니다. 그런데다가 장군께서 보내신 젊은이들이 왔을 때에는, 내가 거기에 있지 않아서, 그들을 만나지도 못하였습니다.”그리고 아비가일은 다윗이 사람을 죽이거나 몸소 원수를 갚지 못하도록 막아주신 분이 야훼하나님이라고 천명한다. 뿐만 아니라, 다윗을 해치려는 모든 원수들은 나발처럼 저주받기를 원한다고 말하자, 다윗은 순순히 돌아선다. 아비가일이 집에 돌아왔을 때, 남편 나발은 양털 깎기를 마치고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나발은 자기가 왕이나 된 것처럼 술잔치를 벌이면서도 정작 앞으로 왕이 될 사람의 요청은 거절한 것이다. 나발이 술에서 깨어나자 아비가일은 일어난 모든 일을 말해준다. 그녀가 말한 ‘모든 일’안에 어떤 일이 포함되고 어떤 일이 제외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와 다윗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암시라도 한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나발이 그 말을 듣고 갑자기 심장이 멎고 몸이 돌처럼 굳어질 수 있었겠는가? 아비가일의 정숙함과 아름다움이란 범인의 짐작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깊이 있는 내용들을 함축하고 있을 그런 차원의 것일 지도 모른다. 하여튼 자초지종을 들은 나발은 심장이 멎고 몸이 돌처럼 굳어졌다. 열흘이 지나 야훼께서 나발을 치시자 그가 죽었다. 야훼께서 누구의 손을 빌렸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혹 아비가일이? 하고 추측하는 것은 망령된 일이 될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는 양 3000마리 가운데 다섯을 아끼려다 목숨을 포함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은 나발. 그러니까 그의 이름은 바보였던 것이다. 다윗은 나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자기가 직접 그를 죽이지 않게 된 일을 하나님께 찬양하면서, 나발은 자기가 저지른 죄 값을 받았다고 말하였다는데, 다윗은 곧 사람을 보내어 아비가일에게 구혼을 했고, 아비가일은 물론 받아들였다는 것이 성서의 기록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모든 일을 야훼의 직접적인 행위로 돌리는 것이 성서의 기록이다. 그러는 것 말고 하나님의 뜻 혹은 역사의 의미를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하고 고개를 끄덕여보기도 하지만, 오늘날 같으면 청문회 꺼리가 되고도 남을 사건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게 한 쪽은 히브리인의 도량이기보다는 지혜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11-03
  • 하나님의 가족들 돌보라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며 영원히 함께 통치할 가족을 원하시고 가족의 일원이 되도록 우리를 만드셨다. 그분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것을 계획하셨다(엡 1:5). 이 같은 하나님의 가족은 과거, 현재, 미래의 믿는 사람들도 포함 한다. 그래서 영적인 가족은 혈육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 기독교는 주안에서 혈연을 초월한 새로운 영적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부르며(고전 8:6, 롬 8:15)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부르는 것은 주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고 복음 전도를 위한 한 팀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가족이 된 근거는 주님의 보혈에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보혈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즉 우리 심령 속에는 똑 같은 주님의 보혈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교회는 국가와 인종과 지역과 혈연을 뛰어넘는 가장 진한 색깔을 띌 있는 하나의 영적 가족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너무도 분명하게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한 집에 있는 가족으로 부르고 있다(딤전 3:15, 벧전 4:17). 물론 이 세상에서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진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이지만 그것은 일시적이며 때때로 이혼, 먼 거리, 노화, 그리고 죽음으로 깨어지기도 한다. 반면 우리의 영적인 가족, 즉 다른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영원토록 계속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고 예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랑스럽게 여기신다(마 12:49~50). 아울러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가족의 유산을 나누게 된다(갈 4:7, 빌 4:19). 이 땅에서 풍성함, 은혜, 친절함, 인내, 영광, 지혜, 그리고 자비를(엡 1:7, 롬 2:4, 3:16) 얻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우리는 더 많은 유산을 받게 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은 가장 큰 영광이고 특권이다. 그 어떤 것도 이에 비할 수 없다. 고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성도들을 대할 때에는 친 가족을 대하듯 해야 한다. 그리하여 교회를 아름다운 천국 가정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오늘 날 가족 윤리를 잊어만 가는 이 세상을 향해서도 진정한 가정이 어떠한 모습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날 명목적인 교회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가족에 봉사 하지 않고 등한시 하며 소홀이 하거나 버리기도 한다. 이에 사회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믿음을 배반하는 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라고 정죄 한다(딤전 5:8). 실로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마음에 새겨진 양심과 본성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 따라서 불신자라 할지라도 가족을 위해 어떠한 수모와 스트레스도 참고 인내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말씀을 통해 가족에 대한 의무를 알고 있는 성도들이 이를 게을리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이는 믿음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양심마저 외면하는 악한 일이다. 고로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과 경건을 실천하노라 하면서 밖으로 뛰쳐 나아가 외치기 전에 먼저 육신의 가족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가족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해야 한다. 아울러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가족에 대한 의무도 다해야한다. 즉 은퇴한 목회자들과 불우한 노인들을 외면하지 말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야 한다. 진정한 가족은 동고동락을 같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울을 위해 헌신했던 구레네 시몬의 아내이자 루포의 어머니처럼 말이다(롬 16:13).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햇볕이 내려쬐는 사막 한 복판에서 낡은 트럭을 끌고 가던 한 젊은이가 허름한 차림의 노인을 발견하고 차를 세웠다. ‘타시죠’ ‘고맙소 젊은이! 라스베이거스까지 태워줄 수 있겠소?’ 젊은이와 노인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노인의 목적지인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했다.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부량자 노인이라고 생각한 젊은이는 주머니를 뒤져 25센트를 노인에게 주면서 말했다. ‘영감님 차비에 보태세요. 몸조심하시고요’. ‘참 친절한 젊은이구먼 명함 있으면 한 장 주게나’ 젊은이는 무심코 명함을 건네주었다. ‘멜리 다마! 이 신세는 꼭 값겠네. 나는 하워드 휴즈라고 하네’ 얼마 후 세월이 지나 이일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을 무렵 기상천외한 사건이 벌어졌다. ‘세계적인 부호 하워드 휴즈 사망’ 이런 기사와 함께 유언장이 공개되었는데 하워드 휴즈가 남긴 유산의 16분의 1을 멜빈 다마에게 증여한다는 내용 이었다. 멜빈 다마가 누구인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유언장 이면에 멜빈 다마는 하워드가 일생 동안 살아오면서 만났던 가장 친절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친절한 사람 이것이 유산을 남겨주는 유일한 이유였다. 하워드 휴즈 유산 총액이 25억 달러 정도였으니 유산의 16분의 1은 최소한 1억5천만 달러, 우리 돈으로 2000억원 가량이었다. 무심코 베푼 25센트가 6억 배가 되어 되어 돌아올 줄 누가 알았으랴!
    • 칼럼
    • 목회자
    2016-11-03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