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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현수)세월
    세월 신 을 소마석 사거리 도로변 한 귀퉁이쭈그리고 앉아 있는 노파오일장도 아닌데영하의 추위도 아랑곳없이 벌려놓은 좌판도라지, 시금치, 고사리, 마늘가던 길 되돌아 할머니 쪽을 향하는나의 주문을 미리 알았다는 듯검은 비닐봉지에 이것저것 담는다오늘은 고사리가 좋으니 가져가요재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거친 손찢기고 할퀸 모진 상흔의 더께고속도로 내리막길의 미끄럼 방지 주름 닮은그 얼굴에 활짝 피어나는 웃음이잦아드는 석양보다 더 밝다.시간이란 쉬지도 않고 잠시 졸지도 않으며 가고 또 가기만한다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다.세월이란, 시간이 많이 축적 된 몇 십 년, 아니 그 보다 더 긴 시간의 개념이 아닐까,표제(標題)에 내포된 의미는 마치 낡은 골목길을 돌아 아득하고 먼지 낀 지나간 시간의 이미지다. 그 세월의 무게를 진 고달픈 삶을 견뎌내는 노파의 모습과 시골길에 쓸쓸하고 황량하기 조차 한 무심한 풍경을 놓치지 않고 연민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따뜻하다.사람들이 북적대는 시골 장터를 벗어난 외진 곳, 외곽으로 진입하는 차량들만 바쁘게 스쳐지나는 도로변 귀퉁이, 소외되고 지친 노파의 삶 앞에 지나치지 않고 시인은 한 줄의 시를 건져 올리듯 발길 멈추어 나물거리 몇 가지 받아 들고 돌아 선다.순간, 팍팍한 현실을 힘겹게 헤쳐나가는 늙은 여인은 새롭게 온기가 돌고 힘이 솟는다.굵게 주름진 얼굴은 노을 처럼 환하게 피어나고 있다 시인도 검은 비닐봉지 속 노파의 거친 손길을 어루만지며 집으로 가고 있음에__ .도로변 좌판에 나뒹굴고 있는 세월이 아스라이 기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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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시선
    2016-09-29
  • 선교명령의 의미를 생각하기
    하나님의 선교명령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필자는 오늘 독일의 선교학자로서 명성을 지닌 피터 바이어 하우스의 이론을 소개 하고자 한다. 선교명령 이란 근대 교회의 역사에서 모든 세대의 전체교회에서 부활하신 자의 선교명령이 계속적인 타당성을 지닌다는 것을 최초로 성과 있게 주장한 공로는 근대 세계선교의 개척자인 윌리엄캐리(William Carey)에게 돌려진다. 그는 주님의 선교 명령이 그의 12제자들에게 향한 개인적인 명령이요, 그 명령도 그들이 살아 있을 때에 끝이 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다수의 의견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19세기 복음주의적 선교운동의 파송이해는 전적으로 선교명령에 대한 순종에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는 다른 동기들과 연관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선교명령의 타당성을 자명한 것을 전제한다. 1886년 헤르몬 산에서 열린 학생선교대회 참자들을 향한 요청에서 윌리엄 애쉬모어는 “왜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면 보여주시오.”라고 외쳤다. 현대 교회일치 선교운동의 선구자인 존 모트에게 있어서도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이 말하는 것은 “예수의 마지막 명령은 우리의 선교의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요한네스 바르넥은 “일차적으로 예수 안에서 구원자와 주님을 만나고 그러나 그분 속에서 동시에 모든 상실된 인간의 구원자를 인식하는 고유한 구원체험의 바탕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한 순종은 과거 선교운동의 뿌리였고 또한 현재 선교운동의 뿌리이다.”라는 점을 확인하였다.이에 반해 최근의 개신교 선교학에서 일반화되고 있는 것은 최소한도 선교명령에 입각해서 선교를 우선적으로 근거지우는 것에 일정한 거리를 두거나, 심지어는 그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이유는 한편에서는 역사비평적인 성서주석에서 마태복음 28장 18-20절 부분을 더 이상 권위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여기지 않고 교회공동체의 형성물로 보기 때문이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리적인 이유 때문인데, 그것은 복음자체의 본질 속에 뿌리내리고 있지만 파송이 과도하게 합법화 되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피터스는 선교를 명령 속에서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자신의 우주적인 사랑의 경륜과 삼위일체적인 본질 속에서 신중심적으로 뿌리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고자 하였다. 제자들도 자신의 파송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교회의 선교를 아들의 선교와 이것들을 계속 추진하는 성령의 선교속으로 받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구원사적인 맥락의 조건들을 보면서 중요하게 확정해야 할 사항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획하신 것은 승천하심으로 마치신 자기 자신의 세상으로의 파송이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심으로 계속 수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 공동체에 계속해서 의식화되어 남아 있어야 할 것은, 교회는 자기 자체를 위해서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인에 의하여 하나의 위임 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이유요, 그분의 순종적인 수행에 입각하여 교회는 다가오는 심판 속에서 판단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명령이 복음의 세계선교적 선포를 위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명령은 이러한 구원사건에서 나타나는 신학적 결론이요, 따라서 선교적 과제의 구속력을 분명하게 제시한다(행 10:39-42) 이런 연관성에서 볼 때 구스타프 바르넥에게 있어서 신앙을 확산시키는 일은 인간의 자발성에 맡겨져서는 안되고, “직무로 정당화 된다”고 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말씀은 무엇보다도 안수를 받은 선교사인 사도의 직무를 근거 지워준다고 한다. 선교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대사”이다. “보내심을 받은 자로 활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일꾼)”에게서 오직 기대하는 것은 그 비밀들이 전달될 때에 참인 것으로 증명된다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서 선포자는 성경의 메시지를 조작해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는 선교의 열기가 식어가는 이때에 독일사람인 노 학자의 말에 경청할 시간이 되었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6-09-29
  • 유대전쟁에 대한 요세푸스의 증언
    정의란 그것을 내걸고 나선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허락된다는 망상을 갖게 한다. 게다가 그들에게 힘이 실려지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어진다. 로마의 지배로부터 동포를 구해낸다는 대의를 내걸었던 2천 년 전의 유대인이 그랬고, 성지탈환의 대의를 내걸었던 십자군이 그랬다. 요세푸스를 더듬다 보면, 로마에 대한 유대인의 항전기록은 그대로 현대사에서도 낯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신정체제의 기치를 내걸고, 동포를 로마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일어난 ‘제롯당’이나 ‘시카리’가 오히려 동포를 약탈하고 학살한 기록 말이다.당시의 유대민족이 과격파의 기치에 따라나설 수밖에 없는 안성맞춤의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 로마의 총독 프로로스였다. 요세푸스는 치를 떨며 <파멸의 길>의 첫 머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총독 아르비노스의 후임으로 네로가 파견한 게시어스 프로로스는 많은 불행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소아시아 출신으로 교활하기로는 그에게 지지 않을 아내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부임해왔다. 그가 총독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네로의 애첩 포페아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프로로스는 사복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악덕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요세푸스의 글은 이어진다. “프로로스는 너무나도 악랄하게 권력을 남용했다. 그 결과 곤궁의 밑바닥에 떨어진 유대인은 전임자인 아르비노스를 은(銀)이었다고 칭찬할 지경이었다. 아르비노스는 적어도 악행이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줄은 알았다. 그러나 프로로스는 마치 악덕의 쇼를 위해 파견된 양 우리들 유대민족에게 이것 보라는 듯이 약탈과 불법처형을 자행했다...이 이상 무엇을 더 말할 필요가 있으랴. 우리가 로마인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게 한 것은 프로로스였다.”그런 상황에서 ‘로마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명분을 반대하고 나설 유대인은 없었다. 그러나 구호를 내건 자들 역시 서민들의 삶은 안중에 없어한다면 해방 꾼과 위정자들이 다를 바가 없어지지 않겠는가. 투쟁자금을 위해서라면 은행이나 인민을 털어도 그만인 그들이었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었던 혹은 불가항력적이던 사건이 무한히 부풀어 올라 마침내는 스스로에게 박해를 불러오게 되는 일은 역사가 너무나 자주 경험한 일이 아니던가. 거기에 사건이 신성과 연결되면 걷잡을 수 없어지게 마련. 때맞추어 가이사리아 사람이 불씨를 던지고 나섰다. 그리스 이민이 많던 항구 가이사리아에서는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갈등이 끊어지질 않았다. 유대인이 회당에 인접한 그리스인의 땅을 매입하려하자 턱없는 값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아주 좁은 길을 남겨놓고 공사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분개한 유대인 청년들이 방해하다 체포되자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술책이 프로로스 총독을 매수하는 일. 때맞추어 사건이 겹친다. 안식일에 그리스인들이 회당 입구에서 새를 잡아 희생제물을 바치며 비위를 거스르고 나서는 것은 차마 참을 수가 없는 노릇. 하나님을 향한 모독을 어찌 용서할 수 있으랴. 분별 있고 온건한 인사들이 관헌에게 호소하려했지만 선동꾼들의 부추김은 사건을 기어이 싸움으로 몰고 갔다. 기병대의 만류도 무색해지는 폭력 전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요세푸스의 증언은 계속된다. “프로로스는 마치 싸움의 불씨를 부채질하듯 성전의 보물창고에 사람을 보내 가이사에게 바친다는 구실로 17달란트를 빼앗아갔다.” 격해지는 폭동을 진압한답시고 프로로스가 군사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에 들어온다. 이리하여 국제정세에 밝지 못했던 유대인 사이에 당시의 지중해 세계를 통치하는 로마와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갔다. 대제사장과 지도층 인사들은 프로로스 총독과 열심당 사이에서와 또 로마군의 폭행에 격분하고 있는 민중 사이에서 나름대로의 수습을 시도했다. 그러나 여러 사건이 겹치면서 그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이미 과격파의 영향은 지도층의 자녀들에게도 미치고 있었기에. 요세푸스는 적는다. “당시 대제사장 안나스의 아들 에리아자로스가 성전호위를 맡고 있었는데 그는 호방한 젊은이였다. 그가 제사를 맡은 이들을 설득해서 외국인으로 부터는 제물이나 희생제물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했다.” 그것은 로마제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유대인은 조국을 잃게 되는 유대전쟁으로 돌입하게 된 것이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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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6-09-29
  • 웃어라
    오 헨리의 소설에 나오는 웃음의 이야기이다. 미국 뉴욕에 살고 있는 한 부부가 어느 날 아침에 장을 보러갔다. 부인은 만나는 사람마다 유쾌하고 친절하게 대했고 밝게 웃으면서 덕담을 했다. 사람들에게 기쁨과 웃음의 자취를 남겼고 그 덕분에 그녀를 만난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더 긍정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반면 남편은 이와 정반대로 행동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불평과 험담을 해댔다. 다음 날 이 부부가 장을 보러 갈 때 두 사람은 서로 역할을 바꾸어 보았다. 그 결과 남편은 기분 좋은 인상을 남긴 반면 아내는 사람들에게 상처와 절망만 안겨 주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이는 우리가 행복할 때 주변 사람들 역시 행복해 보이고 우리 기분이 축 처질 때 다른 사람들도 축 처져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 얼굴 표정은 스스로 주변 사람들의 기분에도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즉 기분에는 전염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 상태가 얼굴 표정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표정을 짓느냐에 따라 마음 상태가 달라진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는 것 같다.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웃을 때는 행복과 관련된 화학물질이 분비되고 얼굴을 찌푸릴 때는 불행과 관련된 화학물질이 분비된다고 한다.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더라도 한번 웃음을 지어보라. 훨씬 기분이 나아질 것이다. 부드럽게 미소 지을 때마다 늘 좋은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실례로 어떤 여인이 백화점에서 주문한 결혼 선물로 혼란을 빚어 이를 바로 잡으로 갔다. 그녀는 백화점에서 결혼 선물을 산 후 상점에서 직접 당사자들에게 선물을 배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주문한 물건들이 모두 각각 다른 커플들에게 배달된 것을 알았다. 그녀는 도저히 전화로는 그 상황을 바로잡을 수 없어 직접 상점으로 찾아가야 했다. 그녀는 기분이 매우 상하고 화가 치밀어 오를 대로 올라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이때가 웃음 이론을 시험해 볼 최적의 기회로 생각했다. 그녀는 기분 좋은 표정을 띄우고 점원에게 다가가 그녀의 상황을 이야기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평온하고 부드러웠다. 문제가 해결 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상냥한 표정으로 지점장을 불러 달라고 말했다. 지점장은 그녀를 최고의 고객처럼 깍듯이 대접하며 모든 문제를 바로 잡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정중한 사과와 함께 주문한 물건의 가격을 깍아 주었다. 가장 놀랍고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을 거치면서 그녀는 그녀 자신을 포함한 누구에게도 과도한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가 느꼈던 분노는 유쾌한 표정을 지어 보인 순간 말끔히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그녀에게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을 때마다 좋은 결과가 뒤따랐고 그녀의 인생은 크게 변화 되었다 한다. 이처럼 웃음을 짓거나 즐거운 표정을 지을 때 우리 스스로도 기분이 좋아지며 다른 사람들 역시 기분이 좋아지고 우리를 다 좋아하게 된다. 그러니 습관적으로 즐거운 표정을 짓는 것이야 말로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닐까? 설사 자신이 많이 웃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웃는 법은 배우면 된다. 하나님께 먼저 기도한 후 긴장을 풀고 웃어보자. 웃다보면 습관이 된다. 또한 웃음에는 전염성이 있다. 즉 웃음은 내적, 외적으로 놀라운 변화를 가져 온다. 또한 웃는 표정을 짓기 위해 날마다 거울을 보고 웃는 좋은 표정을 가져 보자. 우리가 거울 속의 자기 자신을 볼 때는 좀 더 매력적이고 즐거운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거울에서 얼굴을 돌리는 순간 원래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이 사실을 통해 뭔가 느껴지는 바가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멋진 고가의 옷을 입고 있다 해도 다른 사람들은 당신의 옷이 아니라 표정에서 가장 큰 인상을 받는다. 즐거운 표정은 다른 사람들을 끌어당기지만 찌뿌린 표정은 사람들을 등을 돌리게 만든다. 우리는 때로 생각에 깊이 잠겨 있거나 무엇인가를 주의 깊게 들을 때 무심코 인상을 찌뿌리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이러한 태도를 오해하고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얼굴 표정은 주변 사람들의 피부 반응이나 심장 박동 등과 같은 신체에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한다. 즉 사람들은 얼굴 표정에 감정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반응한다는 것이다. 웃음 짓거나 즐거운 표정을 지을 때 우리 스스로도 기분이 좋아지며 다른 사람들 기분이 좋아지고 우리를 더 좋아하게 된다. 아울러 우리는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과 웃음을 주고 살고 있을까? 시간의 모래 위에 우리의 발자국을 남길 정도로 위대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가치 있고 특별한 느낌이 들도록 만들어 주고 다른 사람들 을 복돋아 줌으로써 그들에게 잊지 못할 인상을 심어 줄 수 있다. 이러한 행동은 쉽게 잊히거나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행동들은 한 사람의 영혼과 인격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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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
    2016-09-29
  • (경현수)수평선
    수평선 박 기 임끝도 없는 긴 선사이에 두고하나로 손잡은 하늘과 바다푸른 하늘물들인 하얀 구름두둥실소리 없이 떠나가고넓은 바다파도는 마음껏 뒹굴어물거품 일으키며이별의 모래집 허물었다물결에 부서지는 햇살이먼 바다의전설을 기억하는 오늘도하늘과 바다둘이서 하나가 되어끝없이 가는 길수평선 끝에는무엇이 있을까, 가물가물 막막한 수평선은 하늘과 맞닿아 있다.시야에 들어오는 그 끝은 바라볼수록 먹먹하고 서럽기까지 하다 영원히 가져올 수 없는,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은 그리움 일 것이다.멀리서 소금기 가득 실은 해풍이 휴양림을 넘나들고 수평선엔 폭풍우도 파도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푸른 하늘과 바다가 그 경계가 없는 하나가 되어버린 세계….바닷 속에는 전설이 살아있다.해적들의 배와 항아리에 가득 담긴 보화도 잠겨 있을까?소라껍질은 귀를 열고, 갈매기는 울며 날고, 만선의 고깃배를 기다리는 아낙들은 수평선을 바라보고있다.갈매기와 파돗소리는 화음으로 합일(合一)된 채. 하늘과 바다가, 하나 된 모습은 아름답다. 우주의 질서다.수평선은 큰 줄을 하나 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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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시선
    2016-09-22
  • 선교사의 건강은 선교의 열매
    네팔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유는 건강책크 때문이라고 한다. 이 미국 선교사 부부는 지난해 지진으로 말미암아 선교지 네팔에서 심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었다. 마치 최근에 지진에 안전하다고 느낀 한국에서 경주를 중심으로 일어난 400여회의 지진과 여진은 심장을 정지 시키는 고통을 겪었다고 인터뷰에서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인명 손실이 없는 한국에서도 이러한 말을 하는데 네팔에서의 지진은 산이 갈라지고, 몇 천년된 문화제가 무너지고, 사람이 죽어서 끊임없는 장례식을 목격한 충격은 너무나 컸다고 간증하기도 했다. 선교지에서 건강을 잃으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필자의 가족도 건강 때문에 선교지를 철수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소식을 접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된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몸이 아파서 누울 정도가 아니면 병원을 찾지 않는다. 국내 한 교회의 선교부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선교대회를 통해서 한국에 오는 선교사들을 위해서 건강검진을 실시한다고 들었다. 이러한 일은 다른 선교부와 현지 선교사들에게는 사치스러운 일일 수 있다. 사실 세계 선교 현지의 모든 곳에서 의료시설은 매우 열약하다. 특히 아프리카를 비롯한 저개발 국가들에서의 보건시설은 말할 것도 없다. 말라리아와 장티부스와 이질 같은 질병들은 열대 지방의 선교지에서는 매일 싸워야 할 질병들이다. 선교사들의 또 다른 질병은 사역과 일상생활 속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다. 열악한 환경과 휴가 없는 사역 그리고 선교비 조달이 어렵게 될 때에 더욱 심해진다. 특히 아프리카 선교사들은 시민전쟁이나 종교전쟁, 공동체 내에서의 갈등으로 심한 스트레스와 상처를 받게 된다. 특히 선교사들을 납치하여 돈을 요구하는 반군 세력들이 득세 하는 경험을 하게 되면 선교 현장이 지옥 같은 환경으로 바뀌게 된다. 일예로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서 사역했던 한 나이지리아의 선교사 가족의 자녀들은 아직도 “시에라리온”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병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유엔 평화 봉사단이 그들을 구출하기 까지 그들은 반란군에 포로가 되어서 죽을 고생을 하였다고 했다. 어느 누구도 이 아이들이 겪은 정신적 충격을 극복할 수 있는 치료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다. 선교사 가족이 다시 시에라리온으로 돌아가진 않았지만 그들의 자녀들은 전쟁의 충격과 상처로 인해서 계속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선교사들의 업무는 쉴 틈이 없다. 한 선교사가 다섯 사람의 몫의 일을 하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과중한 일로 인해서 선교사들은 탈진 하게 된다. 비록 탈진이 지속된다고 하더라도 휴가나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너무나 바쁘기 때문에 휴가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역을 대신해 줄 수 없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을 때에는 자신이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선교가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수많은 영혼들이 죽어 가고 있는데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이들이 죽어 간다고 생각한다.최근 일본의 선교지에서 철수한 한 제자의 예를 들어 보자. 그는 일본 선교에 비젼이 있었고, 찬양하는 달란트를 통해서 일본의 수많은 영혼들을 구해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너무나 힘들게 사역한 나머지 심장이 좋지 못한 관계로 부득이 철수 하여 국내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지금은 기도원에서 몸을 쉬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소식에 감사할 따름이다. 한국교회의 선교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선교지에서 각종 질병과 정신적 공항 상태에 있는 선교사 가족을 돌봐야할 책임이 있다. 지금은 선교회들 마다 나름대로의 건강 프로그램을 세워서 추진하고 있다. 선교사의 질병과 탈진 소식을 접한 본국의 선교지도자들은 “재충전”을 위해서 선교사 가족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일이 많아진다. 이러한 충전과 휴식은 선교사 가족들로 하여금 육신적, 정신적, 영적으로 안식을 주게 된다. 이처럼 재충전을 통한 파송과 교제야 말로 매우 바람직한 정책이라고 본다. 이 말은 선교사의 건강은 곧 선교의 참다운 열매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교회, 건강한 선교, 건강한 선교사는 우리 모두에게 큰 기쁨을 준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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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6-09-22
  • 조크와 위트
    유머하면 으레 유대인을 떠올리곤 하지만, 그렇다고 유대인이 세상의 모든 유머를 독점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영미 문화권에서는 유머야말로 지도자가 갖추고 있어야할 첫 번째 자질이 되어 있다는 것쯤은 상식이 되어 있다. 유머 중에서도 위트로 분류되는 쪽은 남의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그 무엇이란 인식이 깔려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본란이 철지난 조크와 위트를 뒤지게 된 것은 요즘의 우리 처지를 생각해서 일 것이라 이해해주실 줄 믿는다. 앵글로색슨은 위기에 처해서 유머를 발휘하는 도량이 여유와 불굴의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라 믿고 있다. 당황스러운 목전의 상황에 휘말려서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노릇은 아예 유머감각이 없거나 상실해버렸기 때문이라 여긴다. 앵글로색슨만이 아니다. 모택동도 조크나 위트를 두고는 물러서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영국의 외상이었던 흄이 자신의 전기에 남긴 일화에 따르면... 흄이 중국을 방문해서 모택동주석이 인민대회당에서 거창한 환영 만찬을 차려주었을 때의 일. 흄이 입을 열었다. “만약에 케네디 대통령이 아니라, 흐루시초프가 암살되었다면 그 후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흐루시초프가 중소대립을 조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던져 본 말. 그러나 모택동의 응수는 전혀 차원이 다른 쪽이었다. “그랬다면 미스터 오나시스가 흐루시초프 부인과는 결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케네디가 암살당한 후 “재키“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재크린부인이 그리스의 해운 왕 오나시스와 재혼한 것을 두고 던진 응수. 재크린부인의 바람기가 평균적인 미국인의 경향이 아니냐는 비아냥거림에 더해서, 말죽통처럼 살이 찐 흐루시초프 부인이야말로 전형적인 러시아 여성이이라며 싸잡아 웃어주는 조크가 아니었던가. 유머는 위트와 조크로 나누어진다고들 말하고 있지만, 대체로 위트가 윗목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위트는 조건반사처럼 자리자리 마다에서 창조적으로 튀어나와야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니까 위트는 일회적 발상일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위트가 전혀 준비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위트는 늘 터뜨리는 사람이 터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위트는 재해석되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조크로 재생산되는 지도 모른다. 진부하긴 하지만, 윈스턴 처칠의 것을 복습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처칠은 성급하기로 이름난 천하무적의 독설가. 그럼에도 그의 독설이 사랑받고 있는 것은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는 애교가 깃들여있기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처칠은 타임스사의 사주 애스터 여사와는 아주 사이가 나빴다. 처칠이 나치 독일에 대해서 철두철미한 매파였던 데 대해, 타임스는 히틀러에게 융화정책을 주장하는 비둘기파였기에...언젠가 처칠이 만찬에서 부인옆자리에 앉자, 애스터 부인이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당신의 아내였다면 당신의 홍차에 독을 탔을 것”이라고. 처칠이 대답했다. “마담, 내가 만약 부인의 남편이었다면 어김없이 그 홍차를 마셨을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부정으로가 아니라 긍정으로 곤궁에 몰아가는 것이 처칠의 독설이자 애교였다. 그렇지 않아도 술을 좋아했던 처칠이 어느 날 파티에서 부인을 만났을 때 대취하고 있었다. “그렇게 취해 있다니, 그 얼굴이 흉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처칠이 응수한다. “나는 내일 아침이면 깨겠지만, 당신은 그대로일 터인데 어떻게 하지!” 그러나 독설가 처칠이라 할지라도 현장의 일을 자료로 삼지 지난 날의 일이나 없었던 일을 들먹이지는 않았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차대전 중, 처칠과 처음으로 회담했을 때의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 백악관에서 밤늦게 까지 회담하면서도 이 노회한 수상 때문에 미국이 이용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염려는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밤이 늦어 처칠이 침실로 들어간 후, 얼마 되지 않아 못다 한 말이 생각난 루즈벨트가 객실의 문을 노크했다. 문을 열어주는 처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인 것을 본 대통령이 당황해서 돌아서려하는데, 처칠이 말했다. “대영제국의 수상은 미합중국의 대통령에 대해서 무엇 하나 감추는 것은 없다오.” 이 한마디로 둘은 친한 친구가 되었단다. 처칠은 기지에 넘쳐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기지는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9-22
  • 그리스도인과 환경 문제
    오늘 이야기는 1962년 초 우리나라가 사상 초유의 경제개발계획으로 나라가 온통 떠들썩했을 때 이미 그때부터 환경 문제를 염려했던 소수의 사람들의 짤막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환경을 무시한 경제 개발은 반드시 심각한 공해 문제를 야기하게 될 것이라며 엄중하게 경고를 했다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정신 나간 소리로 취급하여 대답조차 하려 하지 않았고 심지어 정부 최고의 권력자를 비롯한 고위 인사들은 얼마 후에 강에서 오염 물질이 검출되자 오히려 기뻐하기까지 하였다. 곧 이는 산업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증거이며 우리나라도 이제 선진국처럼 공해 물질이 있는 나라가 되었으니 도리어 기뻐해야 한다는 것 이었다. 그리하여 이후에도 오로지 선진국처럼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바라보며 환경은 도외시하고 개발에만 매달렸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불과 30년이 못되어 한강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강물은 심하게 부패되어 물에서는 썩은 악취가 나고 그곳에 살던 물고기들은 공해 물질로 거형이 되거나 심한 질병으로 흉한 모습이 되어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점차 수돗물마저 안심하고 마시지 못하는 나라가 되었고 지구상에서 강수량이 많은 나라에 속하는 우리나라가 유엔이 정한 물 부족 국가에 분류되는 수치를 안게 되었다. 한마디로 오천년 동안이나 금수강산의 명성을 자랑하는 나라가 불과 한 세대도 안 되는 기간에 공해로 찌든 나라가 되었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오염의 문제는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고 세계적인 이야기이다. 환경 운동가들의 말을 빌리면 사람들의 탐욕과 욕망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환경을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무분별하게 파헤친 결과 지구상의 100만여 생물종을 포함한 자연시스템이 와해되는 위기에 직면해 있고 대기 오염과 온실가스의 증가로 인한 지구온난화의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데 북극과 남극의 빙하와 히말라야를 포함한 고산지대의 만년설이 녹아내리면서 해수면이 상승해 저지대 해안지역이 수몰되고 많은 섬들이 바다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또 해류의 변화로 바다 생태계의 파괴는 물론 집중호우나 한랭기후 변화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데 그로인해 전 지구의 식량 생산량의 10%가 감소될 위기에 처해 있고 또 물 부족과 물 흐름의 변화로 인해 10억 이상의 인구가 마실 물이 부족해 생존의 위험에 직면해 있으며 26억 이상의 인구가 위생용 물 부족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원자력발전과 핵무기시스템은 인류를 자멸로 몰아갈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핵분열의 개발이 인류에게 큰 유익을 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 결과는 방사능의 위험과 체르노빌, 후쿠시마 등의 재앙으로 돌아왔다는 주장이다. 특히 핵무기를 만들면서 이 핵무기가 있는 한 인류는 더 이상 섣불리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핵무기와 상관없이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났으며 핵무기는 오히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스러운 요인들 중에 하나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정치 지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핵문제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 소 간에 냉전이 시작될 무렵 소련의 후르시초프 서기장은 쿠바에 핵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한다. 즉 핵 군사 기지를 설치함으로써 미국을 위협함과 동시에 자신의 위상을 강화를 위한 일환이기도 한 것으로 미국은 물론 자유민주의에 대한 중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심각한 위기 속에서 케네디 대통령은 세계 지도를 앞에 놓고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 위기로 인하여 최대의 희생을 지불하게 되는 것은 전 세계의 어린이들이다. 그들은 이 시대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없으면서 모든 것을 잃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그들이 이성을 잃고 핵전쟁이라도 일으켰다면 진정 어린이와 노약자 소외된 계층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데 요즘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은 새해 신년사에서 경제문제를 주요 정책으로 내세운다고 발표 한 후 연초 곧 바로 수소탄 실험을 감행하여 우리 동포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대외에 핵보유국을 선언하는 이중적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핵폭탄 수소폭탄으로는 결코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무지를 깨달아야한다. 그리고 북한은 수소탄 실험으로 인해 국제 사회에서 더욱 고립만 깊어질 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아울러 정치 지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와도 역행하는 핵에너지를 경계해야한다. 핵은 절대 그리스도인들의 양심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핵은 우리의 후손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는 무모한 선조가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고 환경 보전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만물을 다스리라고 명령을 하셨기 때문이다. 아울러 마음과 영혼을 보존하고 지키는 일에도 소홀히 하지 말자.
    • 칼럼
    • 목회자
    2016-09-22
  • (경현수)벼랑의 나무
    벼랑의 나무 이 향 아벼랑의 나무는벼랑에 서 있음을 아나 봅니다황토 흙 생살처럼 불거진위험천만한 두덩 위에밤낮없이 몸을 꼬아 중심을 잡습니다벼랑의 나무는 벼랑인 줄 앎으로높은 꿈을 꾸나 봅니다들판의 나무보다 간절한 흐느낌으로떠나는 것들의 이름을 외쳐 불러서들판에선 되레 엄두도 못낼눈물겨운 회임과 아름다운 결실뼈가 조심조심 삶을 다스리는 것처럼뿌리는 서로 얽혀 흙을 안아 올리고벼랑의 나무는 벼랑인 줄 앎으로절대로 추락할 수 없나 봅니다.나무는, 나무들은 같은 듯해도 모두 다른 형질인 듯싶다.어디에서 자라는가에 따라서 그 삶의 행로가 틀려 진다, 하필 벼랑에 선 나무일까 기암괴석을 뚫고서야 비로서 그 생명을 지탱해 나갈 수 밖에 없는 생명체 인 얄궂은 나무, 인고의 시간을 견뎌 내야한다.그러나 그 시간 밖에 서 있는 아름답고 눈물겨운 벼랑의 나무는 누구일까? 벌써 삶의 지혜를 눈치 채 버리고 우주의 섭리도 깨달아 버렸다. 그리하여 자연 앞에 겸손히 순응하고 있다.바람과 눈비를 달래며 살아가는 법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휘여진 허리는 되레 벼랑과 대칭되어 더욱 조화롭게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보이고 있다. 키만 훌쩍 자란 들판의 키다리 나무 보다 더욱 오묘한 노래를 부를 줄 안다. 신비로운 회임懷妊으로 삶의 무게를 승화 시키고 있다.나무는 아득한 절벽으로 추락하는 연습을 수도 없이 해보았다.다리는 더욱 견고하고 튼실하며 짖꿎은 바람도 밀어내고, 시인은, 자연의 여백이 푸르게 깔린 화폭에 한 폭의 명화를 그려내고 있다.
    • 칼럼
    • 기독시선
    2016-09-08
  • 직업과 삶
    사도 바울은 사람이 직업을 갖고 성실하게 근무하여 삶을 영위 할 것을 말씀하셨다. 즉 “... 누가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적을 먹지 않겠느냐(고전 9:7)”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정황상 사도의 권리에 대한 말씀이지만 필자는 오늘날 우리의 직업과도 연관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 대신에 운명적으로 정해진 금수저와 흑수저 논쟁이 요즈음 화두가 된 듯 하다. 결국 성실하게 일해서 삶의 목표를 성취하는 분위기는 점점 소멸되어 가고 부모가 남겨둔 유산으로 질퍽 질퍽 쓰면서 호위 호식하는 것이 특권인 세상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오늘 아침 포털에 올라온 글은 우리마음을 잠시 순수한 마음으로 되돌릴 수 있는 글이 올라와 있다. 국민일보가 기사화한 내용은 “‘짜장면 배달원’ 한시간 동안이나 울린 소녀의 사연”이다. 기사의 내용은 이렇다. “한 여자 아이가 중국집 배달원을 한 시간 동안이나 울게 만들었습니다. 인터넷에 심심찮게 올라오는 ‘갑질’은 아닙니다. 아이가 빈그릇과 함께 건넨 편지 한 장이 때문입니다.눈물 먹은 배달원의 사연은 2일 “아직은 세상 살만하네요”라는 제목으로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왔습니다. 글쓴이는 실직한 뒤 배달 일을 하게 됐다다는데요. “오늘은 너무너무 눈물이 난다”면서 사연을 전했습니다.밤 늦게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딸아이가 집에 혼자 있는데 짜장면 1그릇만 배달해 달라면서요. 흔쾌히 짜장면을 들고 갔다네요. 초인종을 누르니 예쁜 꼬마 숙녀가 “아저씨 감사합니다”하며 받아 들었다고 합니다.그로부터 1시간 뒤 그릇을 수거하기 위해 집에 갔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여자 아니가 설거지까지 해놓은 그릇을 들고 나오는데 왠 쪽지가 바닥으로 떨어지더라는 겁니다. 처음엔 ‘택배’라고 쓰여있어 망설였다는데요. 고민 끝에 열어봤다고 합니다.그러면서 글쓴이는 소녀에게 받은 쪽지 사진을 함께 올렸습니다.겉에는 “열어보세요 택배아저씨”라고 적혀있고, 속에는 “저희가 밥을 따뜻하고(게)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또박또박 예쁜 글씨로 쓰여있습니다. 게다가 소녀는 감사의 표시로 10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함께 넣었습니다.글쓴이는 평소에 배달일 한다고 무시당하기 십상이었는데, 어린 소녀에게 사람대접 받았다며 기뻐했습니다. 한 시간 동안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적었습니다.네티즌들도 어린 소녀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했습니다. 제목처럼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라는 댓글이 줄을 이었습니다. 한 네티즌은 “이렇게 바른 아이가 앞으로 흔들림 없이 반듯하게 자랄 수 있도록 지금부터라도 각박한 세상을 바꿔 나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한 소녀의 순수한 마음이 짜장면을 배달하는 직업인을 한시간 가까이 울게 만들었다는 것은 감동적이 나닐 수 없다. 이는 1000원짜리가 가진 화패의 경중이 아니다. 바로 직업에 대한 존중과 감사의 마음이다. 이러한 존중과 감사가 많아질수록 그 사회는 희망과 꿈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최근의 기독교계를 들여다보면 이러한 순수함이 자꾸 소멸되어가는 느낌이다. 예수님의 사역이 담긴 성경은 절대적인 진리이다. 불행스럽게도 이 진리를 해석하고 삶을 통해 실행해 나가는 일부 지도층에 의해서 교회는 망가져 가고 있다. 세속주의가 추구하고 있는 돈과 성(性) 그리고 권력의 욕심이 너무 과한 것 같다. 언론에 의하면 수억원의 공금횡령과 빠찡고에서의 일탈을 일삼는 목사, 청소년 선교기관을 책임지고 있는 어느 목사의 성 추문사건, 정부 권력과 야합을 통해서 무엇인가 취해 보려는 지도자들 때문에 선교의 밭이 점점 황패해져 가고 있다. 이러한 잘못된 기독교의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것”이 인류의 타락을 가져와 죄가 인류 속에 전가된 교훈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삶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직업 앞에서 천직(天職)의식을 가져야 할 때이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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