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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생 후반전의 삶을 위해
    목회일선 에서 손을 놓고 보니 웨인지 아쉬움이 감돈다. 교회에 가면 교회 구석구석에 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별로 없을 정도로 기력을 쏟아 부었으니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러한 생각도 무리는 아니리라 본다. 그렇다 치더라도 한 가지라도 어디 내가한 것인가? 사도 바울이 고백한대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로라.” 고한대로 이제 돌이켜 보면 내가 앞장 설 때는 주님께서 “네 힘으로 해 보아라.고 무관심 하고 오히려 ‘주님 나는 못한다.’ 고 손을 바짝 들었을 때 주님은 맡아서 역사하신 것을 이제야 바로 깨달은 것이 격세지감이다.이제 생각해 보니 나는 대 교회 체질이 아닌 듯하다. 평생 농촌교회, 개척교회, 복지 선교회 밀알선교 00선교에 집중 하다 보니 교회를 크게 부흥 시키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고 후회는 않는다. 그 이유는 큰 교회가 있으면 작은 교회의 역할도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교역 생활 가운데서 나대로의 행복을 복을 찾아본다. 처음 주의 부름을 받아 주님의 종이 되었을 때에 이미 택한바 된바 것을 그리고 영원한 소망 속에 살게 하셨고 복음 사역을 맡겨 주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작은 교회를 목회 하는 중에도 눈물겨운 추억 거리들을 남겨준 성도들을 떠 올리면 눈물 자 욱이 서려온다. 생각해 보면 적은 교회를 섬긴 것이 행복인 것도 많았다.하늘에 폭격기가 뜬 것도 아닌 데 바위 덩어리 같은 것 들이 융단 폭격을 하 듯 땅으로 쏟아 진다. 재수 없이 한방을 맞은 개미는 훌랑 뒤집어 졌다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고 풀잎에 붙어 있던 무당벌레는 집중 포화를 맞아 결국 땅 바닥으로 나뒹굴고 만다. 폭풍이 몰아치면서 검불에 붙어 애벌레의 꿈을 키우고 있던 알들도 모조리 떨어져 버린다. 거미줄에 걸려든 메뚜기는 이미 탈진 상태다. 정복자처럼 늠름한 기세로 쳐다보고 있던 거미는 재빠른 몸놀림으로 포획해 버린다. 특수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원과도 같다. 미시의 세계 땅위의 작은 세계를 확대경으로 들여다 본 모습의 일부이다. 세상은 자꾸 대형화 되면서 작은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잃어가고 있다. 건물을 지어도 고층 으로만 짓고 물건을 사도 한꺼번에 많이 사고 값은 비쌀수록 좋은 것으로 여기고 기회가 와 도 커다란 것 한방만 생각한다. 모두가 홈런만 치려고 한다. 자동차도 대형화 되어 있고 집에 있는tv도 모두 대형화 되었다.교회도 변두리에 있으면서도 중앙교회 창대, 제일00 라는 이름도 유난히 많이 눈에 뜨인다.그렇다면 모든 것이 커진다고 모두 행복하고 좋은 것일까? 대형화 추세의 이면에는 경제적인 욕심이 들어있다. 우리는 작은 것의 위력을 실감 할 때가있다.칼질을 하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뵈었다고 생각해 보자. 신체의 극히 일부가 상처를 입었지 만 우리의 모든 감각과 신경은 손끝으로 집중하게 된다. 작은 벌레가 내는 소리에도 세미 하게 들리는 의미가 있듯 큰 것은 큰 것대로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소명이 있다. 때로는 작은 것 들이 쌓여서 큰 것이 된다.옛날부터 “목사는 설자리는 있어도 앉을 자리는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목사는 설교 하기는 쉽지만 평신도 자리에 앉아서 남의 설교를 듣기는 거북 하 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낮은 자리에 앉은 것이 좀 어색 하다고할까?다른 말로 표현하면 평신도가 교회에 나오면 환영 하지만 목사가 교회에 나오면 별로 달갑지 않게 대한다는 푸념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말이다. 그러기에 은퇴한 다음에는 어느 교회로 가야 할까? 하는 것이 가장 고민스러운 과제라고들 말한다.그러나 이제 마음을 비워야 한다. 은퇴하는 순간 죽은 몸이다. 목회자는 죽고 이젠 평신도로 또는 작은 자로서 소임을 다하려는 마음이 요구된다.성실하고 무성한 나뭇잎이 단풍이 들고 낙엽이 되면 비록 서글프지만 뿌리로 돌아가서 나무를 살게 하는 거름으로 변화 하듯이 낮은 자리에서 평신도를 섬기는 자로 서기를 소원해 본다.인생 전반전은 좀 부실한 경기 이였다면 이제 인생 후반전의 값있는 삶을 위해 철저히 낮아지는 일부터 익숙해 져야겠다. 이제 본 교회에 출석하며 기득권을 다 내려놓는 훈련부터 쌓아 가리라고 다짐해 본다. 인생 후반전의 멋있는 삶을 위해서.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6-03-24
  • (김지호)해빙기
    해빙기 안 재 찬작심 백일이였나다시는 안볼 것 같이얼음장처럼 차가웁더니무슨 바람아 불어나긋나긋이 몸을 풀고심장에다 불을 지르는가나는 오늘 밤과거 따위는 묻지 않고부지런하게 시간을 엮어틈틈이 봄의 발원을 늘어놓고일을 낼 것이다생명을 움 틔울 것이다흔히 사람들이 어떠한 결심을 하고 며칠 가지 못하면 ‘작심삼일’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만큼 자신의 결정을 행동으로 옮기기란 마음처럼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이 시의 화자는 ‘작심삼일’이라는 용어에서 ‘삼일’ 대신 ‘백일’이라는 용어를 환치시키고 있다. 한 계절이 보통 3개월 정도이기 때문에 대충 계산하여 ‘백일’이라 한 것이다.또한 계절을 사람에게 빗대어 의인화하고 있다. 겨울이라는 것이 너무 차가워 다시는 녹지 않을 것처럼 여겼는데 어느새 겨울은 봄 앞에 온 몸을 풀고 냉냉한 가슴을 녹이고 있다. 화자는 그러면서 지난 날의 냉냉했던 과거는 묻지 않고 따스한 봄의 발원을 늘어놓겠다고 한다. 그렇게 할 때만이 생명이 움트는 봄의 향연이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겨울처럼 사람도 때로는 얼음덩이처럼 냉냉한 가슴을 지닐 때가 있다. 결코 다시는 따스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지속적인 관계의 틀안에서는 자신을 녹여야만 한다. 세상은 고집불통 자신만을 내세우면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관계가 잘 형성될 때 우리가 있고 미래가 있는 것이다.
    • 칼럼
    • 기독시선
    2016-03-17
  • 도시선교의 미래
    이제 세계는 점점 도시화 되어간다. 따라서 인구의 집중과 함께 다양한 문제들이 또한 도시에서 발생된다. 즉, 슬럼화의 문제, 인구집중의 문제, 교통문제, 공해문제 등에서 오는 정신적인 방황과 함께 전통적인 가족의 해체로 말미암아 선교의 영역은 너무나 넓어진다. 따라서 21세기의 선교 과제는 엄격히 말해서 도시 선교의 성패에 따라서 교회의 활로가 측정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이제 몇 가지 도시선교의 전략을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첫째는 도시의 빈민구제 사역을 제언한다. 빈민촌은 도시나 도시의 외곽지역에서 생활이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이 공동으로 모여서 삶을 정착하는 곳이다. 빈민촌의 주민들이 고통 받고 있는 것은 불완전한 고용의 문제가 가장 큰 요인이 된다. 영적으로는 자존감의 상실로 말미암아 이웃과 정상적으로 소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틈을 이용하여 사단은 환경적으로 유혹을 하고 있다. 절도와 도박 그리고 술집과 같은 환경은 절망을 더욱 깊게 만들어 버린다. 빈민촌에 존재하는 악들을 이기는 길은 예수님의 전도 방법에서 찾아야 한다. 예수님은 가난한자는 마음에 겸손함을 만들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의 요건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가난은 복음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도록 만든다. 교회는 세계적인 하위문화가 보편적으로 복음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도시 빈민들, 도시 이주자들을 위한 특별한 선교 전략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개방적이면서도, 폐쇄적인 도시민들을 복음 화할 체계적이고도 종합적인 전략도 지녀야 한다. 둘째는 도시 노숙자들을 위한 밥퍼 사역을 제언한다. 산업 사회의 피해 가운데 하나는 직장을 잃고, 삶의 터인 가정마저 파산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을 거리로 내모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도시의 노숙자들은 사회문제에 있어서 국가가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숙자의 양산은 사회와 교회가 도덕적으로 가장 민감성을 지닌 경우라고 보아야 한다. 만약 교회가 이들을 외면하고 돌보지 않는다면 한국교회는 어디에서도 가난한 자들을 섬겼다는 말을 할 수 없다. 셋째는 가출 청소년 사역을 제언한다. 가출은 가정의 위기로 말미암아 형성된 결과이다. 부모님의 이혼과 불화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청소년들이 가정에서 사랑 받지 못하고 가출을 하는 경우가 있다. 무작정 가출한 청소년들은 유해 환경에 노출되어 천길 구렁으로 떨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들의 가출은 정상적인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특히 소녀들의 경우에는 매춘과 같은 유혹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다. 남학생의 경우에도 범죄 소굴의 유혹 속에 쉽게 떨어져서 사회악을 추종하는 세력으로 바뀌어 질 수 있다. 가정에서 버림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반사회적인 생각들을 가짐으로 살인과 강도 그리고 타인의 것을 탈취하여 교도소에 갇히기도 한다. 교회는 위기 속의 청소년들에게 관심을 갖고 선교적 대안을 세워야 할 것이다. 청소년들이 많이 모이는 역 주변을 중심으로 청소년 쉼터 같은 것을 운영하면서 상담과 치유 그리고 교육 등을 통하여 그들의 앞길을 선도하는 사역이 전게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넷째는 물물 교환 은행의 설립과 나눔을 제언한다. 다양한 사역 가운데에서 도시에서의 사역 가운데 하나는 물물 교환은행의 설립을 통한 나눔의 사역이 중요하다고 본다. 물물 교환이란 자신이 사용했던 물건이나 옷가지들을 교회에 기부하여 필요한 사람들이 사용하도록 만드는 제도이다. 사회적으로는 “아름다운 가게” 같은 운동이 실시되고 있으며, 기독교를 중심으로 “아나바다”운동 같은 예들이 좋은 선례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운동이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활용되어야 하겠다. 필자는 오늘 교회의 도시선교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도시화는 급속도로 되어져 가고 있다. 특히 21세기의 세계는 대부분 도시화의 영향력 아래 있게 될 것이다. 급속한 도시화는 스럼화의 문제, 인구집중의 문제, 교통문제, 공해문제가 도래한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선교의 사명임을 제언하였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3-17
  • 예수의 초상들과 이미지
    우상을 금하는 유대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그리스도교회가 그 초기부터 성상(聖像)을 떠받들어 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랬다 치기로 하고, 예수 혹은 그리스도의 용모에 대해서조차 엇갈리는 견해를 보여 온 교부나 신학자들의 생각들을 더듬다 보면 어리둥절해지기 십상이지만, 예술가와 문인 철학자들의 상상력까지 더하다보면 현기증을 일으키게 된다. 전후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귄터 그라스(1927-2015)의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는 양철북을 치며 소리를 질러 유리를 깨뜨리는 희한한 능력을 가졌다. 태어났을 때 이미 성인의 지성을 지녔으나 멈춰버린 성장으로 해서 ‘영원한 아이’가 된 오스카는 나름의 시선으로 세계를 관찰한다. 그의 눈에 비친 예수의 초상과 이미지는 오늘의 크리스천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 안겨주고 있다. <양철북>중 ‘기적은 없다’에서, 오스카는 어머니와 더불어 단치히에 있는 예수 성심교회를 찾는데, 어머니가 고해성사를 하는 동안, 오스카가 교회 안의 예수 초상들을 보면서 뱉어내는 푸념들이 꽤나 짓궂고 날카로워 몇 구절 인용해본다. “‘예수의 마음’이란 것이 교회의 이름이지만...예수는 성사 때를 제외하고는 십자가의 수난을 그린 다채로운 그림에서만 몇 차례 그 모습을 보였을 뿐이었다. 각각 다른 자세를 하고 있는 채색된 조각도 셋 있었다. 그 중에 채색된 석고상이 하나. 긴 머리의 이 예수는 프로이센풍의 푸른 상의를 입고, 발에는 샌들을 신은 채, 금 대좌 위에 서 있었다. 그는 가슴 위의 옷을 풀어헤치고, 모든 자연스러움에 거역하는 토마토처럼 붉고, 영예로우며, 정해진 방식대로 피를 흘리는 심장을 흉곽 한복판에 드러내 보임으로써, 교회의 이름을 그렇게 붙일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천진할 정도로 자부심이 강한 열광한 저 푸른 눈! 언제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저 피어나는 장밋빛 입술! 눈썹에 나타나 있는 저 사나이다운 고뇌! 찰싹 때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혈기왕성한 두 뺨. 두 사람은 모두 여성으로 하여금 애무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는 옆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연약하고 피로해 보이는 두 손은 일을 싫어하는 잘 가꾸어진 손, 궁정 보석상의 걸작과 똑 같은 성흔(聖痕)을 보이고 있었다...” 이어 오스카는 예수의 다른 초상을 만난다. “이 사나이는 정말 남자다운 근육을 갖고 있었다. 10종 경기 선수...나는 그를 친애하는 체조선생, 스포츠맨 중의 스포츠맨, 한 치 손톱만으로 십자가에 매달리는 승리자라 불렀다.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영원의 빛이 움직였을 뿐, 그는 고행을 완수했고 생각할 수 있는 최고점을 획득했다... ” 오스카가 다시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소년 예수를 오른편 허벅다리 위에 안고 있는 처녀 마리아에게 다가 갔다... 세 살짜리 예수를 벌거벗겨 장미 빛으로 묘사한 것은 조각가의 장난이었다.” “그리고 한 장의 양탄자로 덮인 세 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은 녹색의 옷을 걸친 마리아, 연한 초콜릿 빛 모피, 삶은 햄 빛깔의 소년 예수가 있는 곳이었다...장밋빛 예수의 머리 뒤쪽에는 접시 크기의 후광이 있었는데, 그 금박이 그 접시를 값비싼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내가 떨면서 소리도 없이 세 개의 창을 향해 바라보는 것을 보고, 어머니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내가 기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산산조각을 내고 싶었던 것이다...다만 기적 같은 건 더 이상 바라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초상들, 적어도 교회가 이해하고 있는 예수라며 내걸고 있는 예수의 초상들을 고깝게 바라보는 이단아 오스카의 눈초리를 외면해가며, 시대마다가 남기고 있는 예수의 초상들은 그것이 회화가 되었건 조각이 되었건 혹은 문학작품이 되었건, 어느 것이나 예수의 한 면만을 표현한 것일 뿐 전체 상은 될 수 없다하고 우겨보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어찌 예수의 초상 만이랴. 교회가 내뿜고 있는 모든 입김이 구역질을 유발하고 있지 않느냐며 나무란 인사들이 어디 한 둘이었던가. 그야 언제나 있어온 악마의 푸념이 아니었냐며...귄터 그라스라는 한 작가가 그린 오스카라는 가공인물의 비뚤어진 눈에 비친 예수의 초상에 너무 신경을 쓸 일은 아니라고 말해보지만...가톨릭이 책임질 문제이지 프로테스탄트가 나설 일은 아니라고 얼버무린다 해도...오늘날 우리의 교회가 발신하고 있는 얄궂기만 한 정보들이 하도 엄청난지라...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3-17
  • 유럽의 교회와 한국 교회
    한 세기 교회 부흥을 이끌었던 오늘날 유럽의 교회 쇠퇴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있다. 유럽에는 어느 도시 마을에든 위엄 있고 고풍스런 건물이 우뚝 솟아 있다. 바로 이 건물이 교회라고 하는데 그 장엄함과 화려한 장식 때문에 세계의 많은 관광객들이 그 건물에 감탄하여 사진을 찍고 내부를 둘러 건축 양식이나 조각품이나 미술품의 정교함을 음미 한다고 한다. 그로 인해 유럽의 교회들은 관광 자원으로서 독특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 지역을 알리는 엽서나 작은 그림에서 또는 관광 가이드 책자에서 교회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은 그 때문 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이 교회의 사명의 전부일까? 관광코스에서 빠질 수 없는 곳이 되어 수익을 올리는 것이 진정 사명일까를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저 유럽의 교회들은 왜 이렇게 급속도로 문을 닫았을까? 그들이 만일 믿음을 자녀들에게 전수하고 믿지 않는 이들에게 전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기만 했어도 오늘날 저렇게 되었을까? 그럴 리 만무하다. 교회는 여전히 성장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유럽의 교회만을 지탄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크고 웅장하고 화려한 예배당을 세우고 세계 기독교인들이 놀랄 정도로 성장해 왔다. 그 성장의 요인은 성령의 권능이 함께한 이유도 있겠지만 초대 한국 교회가 사회의 문제에 참여한 것이 교회 성장의 초석이 되었다고 볼 수가 있다. 초대 한국 교회는 후진적인 한국 사회에 학교와 병원을 세워 사회를 계몽 시켰으며 각종 구제 사업을 활발하게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칭찬하고 존중했다. 그런데 현대의 교회들이 사회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고 오직 교회 자체의 성장 즉 큰 교회, 많은 성도, 많은 헌금 등에만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물량주의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으로 결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행위를 계속하면 결국 가장 큰 상처를 받는 것은 복음과 교회 더 나아가 목회자 자신들 뿐이다. 한편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세상에서 영광스럽고 아름다워 보이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 지금 한국 교회가 죽어가고 있다는 자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도리어 교회는 세상에서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 일쑤이고 교회는 점점 사회에서 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 한 앙케이트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는 한국 사회에서 영향력을 갖지 못하는 거대 종교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섬김, 희생, 정의, 거룩함, 사랑, 겸손 등의 빛을 비추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를 외면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점점 장식품이 되어가고 빛을 잃어가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조롱을 당할 때 어떻게 할까? 교회는 깨달아야한다. 그리고 교회를 비난하는 불신자들의 말을 무조건 멀리 하지 말고 그들의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여 잘못을 회개하고 발전의 기회로 삼아야한다. 교회에 던져지는 세상 사람들의 조롱은 사탄의 사주를 받은 불신자들의 핍박일 수도 있고 혹 실제로 교회가 저지른 큰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객관적 견책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떠한 어느 경우이든 교회가 조롱을 받는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교회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 기도해야 할 일이다(마5:44, 행7:60). 물론 근거 없는 오해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해명하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는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회개하는 길밖에 없다. 회개하지 않으면 신앙 양심이 더러워지고 마음이 완악해져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막히게 되어 은혜와 축복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개하면 주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형성케 하고 온전한 성숙을 이루게 하는 든든한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고로 한국교회는 회개 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말고 회개에 열심을 내야한다. 한 랍비가 제자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죽기 하루 전에는 회개하라’ 그러자 제자들이 이렇게 되물었다고 한다. ‘스승님, 사람이 자기 죽을 날을 어떻게 알고 하루 전에 회개 합니까?’ 그러나 랍비의 대답은 늘 똑같았다고 한다. ‘죽기 전에 회개하라’ 무엇을 말해 줍니까? 곧 매일 회개함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는 ‘과실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그러나 과실을 회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뜨거웠던 믿음만을 자랑하고 현재의 명목적인 믿음을 회개하지 않고 발뺌 하거나, 죄를 부인하거나, 책임을 전가 하거나, 죄의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외면하는가 말이다. 이제 한국 교회의 살길은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교회 근방의 사람들에게 전도와 구제와 형제 사랑 하는 일을 실천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교회 무익을 주장하는 불신의 사람들도 교회를 존중하고 교회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지니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전하는 복음 진리도 잘 수용하게 되어 전도의 문이 넓어지게 되어 교회가 쇠퇴하지 아니하고 꾸준하게 부흥될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6-03-17
  • 총선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우리 교회에 새벽 기도를 열심히 나오시는 분이 계신다. 키는 외국에서 온 이방인 같고 안면은 텁수룩한데 본인의 말로는 중국에서는 한의사 자격증을 취득 하였고 미국에서는 두 주에서 자격증이 인정받는다고 한다. 부인과 자녀는 미국에 있고 혼자 교회 가까운데 기거 하면서 작은 교회임에도 다문화 등을 섬기는 것을 보고 교회에 나오게 되었노라고 한다.그런데 어느 날 실토정 예기를 하겠다며 자기는 K대 정치외교 학과를 나왔고 몇몇 분의 정치인을 거론하며 자기의 후배들이라고도 한다. 그러면서 금번 다가오는 총선에 서울에 주목하는 정치 일번지에 출마할 예정이며 남이 안하 는 특수한 방법으로 선거 운동을 해보겠다고 한다. 대화하는 중에 목사님 이번 싸움은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과 같지만 한번 해 보렵니다. 이미 결정 된 사항 같아서 격려와 기도해 주었다.인간은 누구나 정치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창조주가 인생을 지으실 때 ‘땅을 정복 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창1:23) 그러므로 인간이 범죄한 이후에도 인생은 다스리기를 원하고 반면에 다스림을 받는 것을 싫어 하는가보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군대 노릇을 할 때도 서로 대장이 되려고 하고 졸병 하기는 싫어한다. 결국은 힘센 아이가 대장 노릇을 하기 마련이다.이런 인생이 어쩌다 권력을 얻기만 하면 좀처럼 내놓지를 않는 것도 이해 할 만도하다. [공자]는 정치의 원리를 간단히 요약 하여 정(政)을 바로 정(政)이라고 하였다.정치는 옳은 일을 하되 바른 방법으로서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권력을 잡았다고 해서 꼭 행복한 것만은 아닌가보다.고금 동 서 양을 막론하고 정객(政客) 들이 많은 위험 중에 살아 왔으며 인류의 역사는 권력 투쟁으로 인한 흥망성쇠의 피비린내 나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권세가 있으나 저희 에게는 위로가 없도다. 전4:1]우리는 때때로 교회나 가정 일만 잘되면 일만 잘되면 그만이지 정치는 불신자 들에게 맡기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갖기 쉽다. 그러나 권력을 결코 정치를 무시 할 수 없는 것이다. 무정부 상태를 상상해 보라? 그러기에 바르게 정치 할 수 있는 자를 뽑아야 하는데 그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은 모양이다. 자신이 정 도령이나 되는 양 선전을 뿜어 대지만 그 내면을 알 수 없는 일이고 정견이라는 것도 사탕발림인 경우가 허다하다성경도 무자격자가 권력을 쥐게 되면 세상이 어지럽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잠언 30:21-23에 “세상을 진동 시키며 세상을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임군된 것과 미련한자가 배부른 것과 꺼림을 받는 게집이 시집 간 것과 게집종이 주모를 이 은 것이니.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나 정계에 주인공을 뽑을 때 지역감정에 기대거나 인정에 치우치지 말고 참 자격자를 살펴서 세워야 할 것이다. 오늘 언론에 소개 된 제일 야당의 국회의원이 공천에 제외되자 ‘나 같은 꼰대도 필요한데 하 며 이유 없이 떠난다.’ 는 노 정객의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러면 성경이 제시하는 참 자격자는 어떤 사람일까?마태복음 20:20-28절에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우편에 하나는 주의좌편에 않게 하소서”.“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 고자 하는 자는 너희 중에 종이 되어야 하리라.요즘 도시 중요 거리 대형 건물에 나부끼는 현수막을 보면 모두가 훌륭한 문구가 눈에 뜨인 다. 겉으로는 모두가 국가와 민족을 원한다지만 벼슬자리에 않기만 하면 제 권위, 제 위신, 제 자리에 손실과 상처만은 안 입겠다고 갖은 수단을 부려온 아니꼬운 자들을 가려내야 하겠는데 그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아니다.오직 겸손 하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을 세워야 할 것이다. 지역감정을 부추기거나 권력에 아부하여 이득을 얻고자 하는 자들을 가려내는 일은 현명한 국민의 책무이다. 교회도 마찬 가지 목회자를 청빙 할 때도 교회 본질은 외면한 채 성장 일변도의 목회에 여념 이 없는 자들에 의해 교회의 위신은 땅에 추락 하고 있다. 후보자와 간담을 나누면서 “지금의 그 자세를 끝까지 유지 하세요” 정치인의 자격을 논하며 밤이 깊어 가고 있다. 우리 정치도 깊이 있는 정치의 계절이 오기를 소원한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6-03-17
  • (김지호)눈물의 밧줄
    눈물의 밧줄 이 성 교하늘에서 내려오는 사랑그리 빛날까산에서 다 풀어지게낭떠러지에 줄을 매었다가파른 마음에걸린 밧줄허공 중에 오래오래걸려 있길 바랬다얼마나 사랑스러웠으면 그리했을까얼마나 애처로웠으면 그리했을까험한 산길엔한 마리 산새도 울지 않고눈발이 풀풀 날리고 있다가고 오는 사람눈물의 밧줄을 생각했다화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백설이 무척 사랑스럽게 보였을까. 1연에서부터 사랑이 넘치고 있다. 그 눈들이 가파른 산 위에서부터 아래로 쌓이면서 생긴 풍광을 보며 밧줄을 연상하고 있다. 눈은 거칠고 험난한 세상같은 산길에 조용히 내려오면서 하얗게 덮어주고는 단단히 견디고 있다. 언젠가 날이 풀리면 녹아 없어질 눈물같은 밧줄이지만 오래도록 견뎌내길 바라고 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한편으로는 눈물같아 애처로워 보였다. 강추위가 몰아치는 험한 산길. 즉 너무도 냉냉한 이 세상에 날개가 퍼덕거리는 움직임과 아름다운 노래소리를 들려주는 한 마리 새도 보이지 않는다. 화자는 눈물의 밧줄이 이어지고 있는 낭떠러지 같은 산길을 보면서 세상을 관조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왔다가 사라지지만 사는 동안은 세상에 천년만년 살 것처럼 세상에 집착하며 산다. 그러나 언젠가 눈물의 밧줄처럼 사라지는 그 날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기억해야겠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장 16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 5장 39절)우리는 이 두 말씀을 되새기면서 눈물의 밧줄처럼 짧은 생을 살지라도 영생을 위하여 가는 길이 무엇인지 정로의 길을 가야겠다.
    • 칼럼
    • 기독시선
    2016-03-11
  • 선교지에서의 기도요청
    선교지에서의 기도 요청은 항상 응급한 경우가 많다. 오늘의 기도 제목도 그렇다. 필자의 동료 미국인 교수였던 세섬 가족이 보내온 기도 제목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다. 이러한 사연들 가운데 세섬 선교사가 겪고 있는 건강의 문제가 가장 심각했다. 왜냐 하면 전립선 암을 이번에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섬 선교사님과 필자는 한세대학에서 동료 교수로 만났다. 처음 우리학교에 왔을 때에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에 이 분이 목사님이시면서 선교에 열정을 가지신 분임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주어진 교과목에 대한 권한으로 선교학을 가르칠 수 있도록 배려 해 드린 것이 계기가 되어 더 깊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세섬 교수는 학교에서 강의를 하신지 몇 년이 지나 네팔로 선교사역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충성 스럽게 하나님 나라를 확장 시켜 나가고 있다. 한 달 전의 편지에 의하면 생명샘 바이블 트레이닝 센터에는 현재 남학생 28명과 여학생 22명이 새 학기를 시작하여 잘 진행 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지진으로 지난 6개월 동안 닫혀 있던 국경도 열리면서 기름도 들어오고, 봉쇄 되었던 국도도 열리면서 인도와의 왕래도 좀 더 원활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역 가운데 진행된 문맹인 프로그램도 23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두 군데에서 네팔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들은 태어나서 한번도 글자를 읽어 보거나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학생들이란다. 이들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신 후원자님들께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이러한 긍정적 소식과 아울러 긴급 기도제목을 올렸다. 세섬 선교사는 지난 몇 년간 전립선염으로 조용히 통증을 참아오고 있었는데 최근 점점 심해져서 커피와 차, 청량음료도 마실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몇 년 전 한국과 미국의 두 의사 에게 상의해 보았지만 크게 염려해야할 상태는 아니라고 하여 지어준 항생제만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통증이 점점 심해져서 한국에 오는 길에 검사를 받게 되었다. 뜻 밖에도 피검사와 초음파 그리고 조직 검사를 통해 전립선암 초기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다행으로 의사 선생님의 의견은 아직 전립선 제거 수술 보다는 6개월 마다 한번씩 재검진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상황을 지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결정 하였단다. 선교사님의 형편은 2014년 11월 한세대를 퇴직하여 건강보험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이러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전립선 검사를 받는 동안에도 세섬 선교사는 구령의 열정으로 가득찬 간증을 보내왔다. 조직검사를 위해 삼일간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5인 병실 속에서 55세의 한 남성분이 저의 침대 바로 앞에 간암 말기로 입원해 있었다고 한다. 환자의 아내는 그리스도인이었고 병든 남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병든 남편을 돌보느라 지쳐있었으며, 그녀의 믿음도 바닥이 나 하나님을 원망하며 혼돈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내 연희는 그 재매를 위해 위로와 격려의 기도로 도와준 후, 선교사인 남편과 함께 자매의 남편께 기도와 복음을 나눌수 있겠느냐 물어봤더니 쾌히 승낙하였단다. 우린 그 자매의 남편과 함께 네팔과 우리 삶을 간단하게 나눈 후 그분의 피로에 지친 얼굴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로마서 10장 8-10절을 나누었단다. 나눈 후 그가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주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더니 고개 숙여 절하면서 승낙했다. 이후에 주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여 고백함으로 새 사람으로 변하는 기적의 시간이었다. 아내와 그 자매는 더 친교를 위해 병실 밖으로 나갔고 우리 둘은 각자 침대에서 쉬고 있는데 얼마 되지않아 누군가 침대에서 요동하며 떨어지는 소리가 나 얼른 일어나 봤더니, 앞에 누워있던 그 형제분이 화장실에 가려다가 떨어진 거였다.그분은 삼일 밤낯 동안 소변과 대변을 보지 못해 의사와 간호사 모두가 고심하고 있었는데 그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드린후 기도 받고 몇분 되지 않아 막혔던 것들이 다 풀어졌단다. 우리와 함께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병원에서 퇴원하게 되었다. 떠나는 그 두 분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자비의 하나님을 경배했단다. 이어서 세섬 선교사님의 기도요청은 “지난 오년 반동안 우리 가족을 네팔로 보내셔 함께 해주심을 감사드리며, 주님의 온전한 치유의 기적이 나에게도 부어주시길 함께 기도 부탁드립니다.”였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3-11
  • 유다의 배신에 대해서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의 <신곡>에서, 첫 책인 <지옥편>의 끝장 제34곡은 “아홉째 지옥” “코키투스”를 묘사하는 것으로 막이 내린다. 코키투스는 지옥의 가장 밑바닥, 배신자를 가두고 있는 지역으로, 다시 4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첫째 구역은 카이나(Caina): 육친을 배신한 자를 대표해서, 아벨을 죽인 카인의 이름에서 땄다. 둘째 구역 안테노라(Antenora): 조국을 배신한 자를 가두고 있는데, 트로이의 전쟁에서 트로이를 배신한 안테노르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셋째 구역 트로메아(Ptlomea): 손님을 배신한 죄인을 가두고 있는데, 시몬 마카비와 그 아들들을 초대해서 살해한 여리고의 장관 아브보스의 아들 프트레마이오스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구약외전 마카비서). 마지막 네 번째 구역 주데카(Judecca)는 주인을 배신한 가리옷 유다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거기에는 시저를 배신한 브루투스와 캐시우스도 갇혀있다. “주데카”의 중심, 지구의 중력이 집중되는 이 지역에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락한 천사 사탄(루키페로)이 얼음 속에 갇혀있는데, 마왕은 예수를 배신한 유다와 시저를 배신한 브루투스와 케시우스 세 사람을 입으로 깨물고 있다. 소름이 끼치는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유다를 쳐 박은 공로는 결코 단테 혼자의 것으로 돌릴 수는 없으리라. 로마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유럽인의 정서에는 유다는 배신자요 구원받을 수 없는 악마라는 낙인이 깊이 새겨져 있은 지가 오래였기 때문이다. 12세기가 되기 전에, 프랑스에서는 “유다”라는 고유명사가 “배신자”를 뜻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되고 있었고, “유다 짓”은 곧 “배신하기 위한 키스”를 의미하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아이들에게는 물론 개나 고양이에게 조차도 유다란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유다는 “스파이”를 의미하기도 했다. 만찬 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기도하는 예수를 몰래 훔쳐보았다는 인식이 민중들 틈에 나돌아 다니면서였다. 충실한(?) 다른 제자들이 잠들고 있는 틈에, 기도하는 스승을 냉정한 눈초리로 살피면서, 성공적으로 스승을 체포할 방책을 궁리하는 유다의 이미지가 생겨났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으리라. 몰래 들여다보는 행위는 일그러진 “성적 욕구”도 상징할 수 있었다. 이런 저런 소위 “유다근성”이 유럽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 모두에게 덧 씌워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셰익스피어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을 연출해서 박수갈채를 받았고, 나치는 온 유럽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냈지만, 종교인 예술가는 물론, 내로라하던 지성인도 입을 다물었다. 세계적으로 종교 문화 사회, 여러 측면 여러 차원에서 “배신자”이기 때문에 증오의 대상이 된 캐릭터는 유다 말고는 달리 유를 찾을 수가 없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하고 선언한 이후의 세계에서도 유다에 대한 증오는 보기 좋게 살아남아 시대마다에 걸맞은 변용을 거듭해온 것이다.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제사장과 로마 병사. 그 정점에는 빌라도 총독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도 아니라면, 빌라도가 제안한 예수의 석방을 거부했던 민중들에게 책임을 돌릴 만도했다. 유다는 직접적으로 예수를 죽이는 데 가담하지는 않았다. 이리저리 따져보아도 그 동기가 석연찮은 “밀고”가 죄목이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세월이 더 해갈수록 유다가 악의 화신으로 변모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양이 된 것처럼, 유다도 그 대극에서 모든 악을 한 몸에 뒤집어쓰고 인류의 죄악감을 소멸케 하거나 그 색깔이 묽어지게 하는 역할을 감당한 것은 아니었을까. 스승이 죽은 후 유다가 제사장들에게 돈을 돌려주려 하자, 제사장들은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요? 그대의 문제요!” 하고 말한다. 또 예수의 처형을 결심한 총독 빌라도는 민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 했다. 유대민족을 대표한 제사장들 쪽에서나, 로마를 대표한 총독 편에서나, 다 같이 책임을 이 가리옷 사람 유다에게 뒤집어 씌우려한 몸짓이 아니던가. 유다의 죄가 제사장이나 로마 병사 그리고 빌라도의 그것에 비해 두드러지게 부각된 이면에는 유다가 예수의 제자 중의 하나였으면서도 배신했다는 기록을 강조해보이며 자신들의 죄과를 묽게 해보려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의 범위를 어디까지 잡을 수 있을지는 쉬 판단이 서지 않지만, 오늘의 우리도 그 범위를 벗어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을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3-11
  • 죽음의 집 이야기
    어느 건축가가 여행 중에 본 아름다운 건물들을 모두 종합하여 자신이 살 집을 한 채 지었다. 그 집은 화려한 바로크식 건축 양식을 최대한 모방 했고 실내는 규모 있고 다양하게 꾸며 동양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한마디로 그 건축가가 희망해온 아름다운 집이요. 심혈을 기울여 만든 집이었다. 마침내 온 가족이 꿈에 그리던 ‘궁전’ 으로 이사하였다. 그런데 웬일인가? 그들이 누린 기쁨도 잠시 뿐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가 별 다른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불행의 먹구름은 점점 더 짙어만 가 아내의 죽음에 연이어 그의 두 아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끔찍한 일을 당하자 그는 으리으리한 그 집이 무서워졌고 하루 빨리 그 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는 집을 헐 값에 팔았고 그 곳엔 다른 사람이 이사 와 살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집에 이사와 살던 사람들도 하나, 둘.. 분명한 이유도 없이 싸늘한 시체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건물이 세워진지 7년 동안 여러 구의 시체가 나온 것. 7년 채 되던 해 당시 집주인이 관계기관에 의뢰하여 사인을 규명한 결과 건물 밑을 흐르는 하수구에서 새어나온 독이 그 집의 벽으로 스며들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 이유로 그 집에 기거하던 사람들이 죽어갔던 것이다. 지금도 알게 모르게 명예와 권세와 재물과 쾌락의 달콤한 죄악의 독을 마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음을 당하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해 일종의 불감증을 앓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죄를 인정하기란 쉽지 않은듯하다. 언제나 자신을 속이고 그럴듯한 핑계를 찾으려 한다. 이 정도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그럴 수 있는 것이지 결코 죄는 아니라고 여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성경에는 좋은 말씀도 많지만 기독교와 교회 자체에는 왠지 거부감이 든다’ 그리고 그 이유라는 것이 지금까지 법 잘 지키고 별다른 문제 없이 사는 자기들을 향해 항상 죄인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심지어 죄를 짓고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 중 일부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세상에 죄 없는 사람들은 모두 교도소에 있다’ 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법은 도덕의 최소 부분만을 요약해 놓은 것일 뿐이다. 사람의 양심도 완전한 것 같지만 실상 그 사람이 속한 문화와 그가 가진 생각이나 지식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고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 또 사람에게는 자기를 합리화시키는 본능이 있어서 아무리 자기가 큰 죄와 실수를 저질러도 얼마든지 이유를 들어 합리화시킬 수 있다. 때문에 사람의 법이나 양심, 혹은 자기 생각에 비추어 볼 때 옳은 것조차도 결코 완전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무리 법과 양심, 혹은 자기 생각에 비추어 옳은 것조차도 결코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세상 사람들처럼 인간의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기준에 비추어 스스로 의롭다는 생각으로 교만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의를 완전하게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임을 기억하며 그분의 앞에서 부지중이나 무심중에 짓는 죄를 깨닫고 자복하고 회개하여야 한다. 17세기의 유명한 화가였던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이다. 렘브란트는 네델란드에서 출생했다. 그는 루벤스와 함께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대가로 어린 시절부터 그 명성이 높았다. 그의 그림을 사기 위해 전 유럽의 귀족과 부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모여들었다. 그에게는 넘치는 부와 사랑스러운 아내 그리고 샘솟는 재능이 있었다. 부러울 것이 없는 그는 사치와 방탕이라는 덫에 너무도 쉽게 걸렸다. 이런 그를 경건한 프로테스탄트인 처갓집 사람들이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렘브란트는 이런 사실을 알고 처갓집 식구들을 조롱할 목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아내를 모델로 한 탕자라는 그림을 그렸다. 피아노를 앞에 두고 그의 무릎 위에 않은 아내와 그림 밖을 향해 와인 잔을 치켜들며 건배를 제의하는 렘브란트의 모습은 탕자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의 영광은 오래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사치와 방탕으로 인해 많은 재산을 다 날리고 아내도 일찍 죽었다. 인기가 떨어져 그의 그림을 원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 재능뿐이었다. 렘브란트는 말년의 죽음을 앞두고 가난과 배고픔 속에서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붓을 들었다. 그리고 그 자신을 모델로 ‘돌아온 탕자’를 그렸다(눅 15:20). 탕자의 모습을 보자. 허름한 옷을 입은 앙상하게 마른 청년이 무릎을 꿇고 한 노인의 품에 안겨 있다. 안고 있는 아버지는 아들을 향한 오랜 기다림에 얼굴 가득 주름살이 자리 잡고 있다. 그의 눈은 아들을 다시 찾은 희열과 아들의 비참한 모습으로 인한 안쓰러움이 교차되어 있다. 또한 아들만큼이나 앙상하게 마른 노인의 손은 고생으로 군데군데 빠져버린 아들의 짧은 머리를 꼭 안고 있다. 마치 이제 다시는 빼앗기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단을 보여주는 듯이 말이다.
    • 칼럼
    • 목회자
    2016-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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