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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의 교회와 한국 교회
    한 세기 교회 부흥을 이끌었던 오늘날 유럽의 교회 쇠퇴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있다. 유럽에는 어느 도시 마을에든 위엄 있고 고풍스런 건물이 우뚝 솟아 있다. 바로 이 건물이 교회라고 하는데 그 장엄함과 화려한 장식 때문에 세계의 많은 관광객들이 그 건물에 감탄하여 사진을 찍고 내부를 둘러 건축 양식이나 조각품이나 미술품의 정교함을 음미 한다고 한다. 그로 인해 유럽의 교회들은 관광 자원으로서 독특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 지역을 알리는 엽서나 작은 그림에서 또는 관광 가이드 책자에서 교회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은 그 때문 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이 교회의 사명의 전부일까? 관광코스에서 빠질 수 없는 곳이 되어 수익을 올리는 것이 진정 사명일까를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저 유럽의 교회들은 왜 이렇게 급속도로 문을 닫았을까? 그들이 만일 믿음을 자녀들에게 전수하고 믿지 않는 이들에게 전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기만 했어도 오늘날 저렇게 되었을까? 그럴 리 만무하다. 교회는 여전히 성장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유럽의 교회만을 지탄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크고 웅장하고 화려한 예배당을 세우고 세계 기독교인들이 놀랄 정도로 성장해 왔다. 그 성장의 요인은 성령의 권능이 함께한 이유도 있겠지만 초대 한국 교회가 사회의 문제에 참여한 것이 교회 성장의 초석이 되었다고 볼 수가 있다. 초대 한국 교회는 후진적인 한국 사회에 학교와 병원을 세워 사회를 계몽 시켰으며 각종 구제 사업을 활발하게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칭찬하고 존중했다. 그런데 현대의 교회들이 사회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고 오직 교회 자체의 성장 즉 큰 교회, 많은 성도, 많은 헌금 등에만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물량주의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으로 결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행위를 계속하면 결국 가장 큰 상처를 받는 것은 복음과 교회 더 나아가 목회자 자신들 뿐이다. 한편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세상에서 영광스럽고 아름다워 보이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 지금 한국 교회가 죽어가고 있다는 자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도리어 교회는 세상에서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 일쑤이고 교회는 점점 사회에서 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 한 앙케이트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는 한국 사회에서 영향력을 갖지 못하는 거대 종교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섬김, 희생, 정의, 거룩함, 사랑, 겸손 등의 빛을 비추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를 외면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점점 장식품이 되어가고 빛을 잃어가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조롱을 당할 때 어떻게 할까? 교회는 깨달아야한다. 그리고 교회를 비난하는 불신자들의 말을 무조건 멀리 하지 말고 그들의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여 잘못을 회개하고 발전의 기회로 삼아야한다. 교회에 던져지는 세상 사람들의 조롱은 사탄의 사주를 받은 불신자들의 핍박일 수도 있고 혹 실제로 교회가 저지른 큰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객관적 견책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떠한 어느 경우이든 교회가 조롱을 받는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교회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 기도해야 할 일이다(마5:44, 행7:60). 물론 근거 없는 오해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해명하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는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회개하는 길밖에 없다. 회개하지 않으면 신앙 양심이 더러워지고 마음이 완악해져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막히게 되어 은혜와 축복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개하면 주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형성케 하고 온전한 성숙을 이루게 하는 든든한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고로 한국교회는 회개 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말고 회개에 열심을 내야한다. 한 랍비가 제자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죽기 하루 전에는 회개하라’ 그러자 제자들이 이렇게 되물었다고 한다. ‘스승님, 사람이 자기 죽을 날을 어떻게 알고 하루 전에 회개 합니까?’ 그러나 랍비의 대답은 늘 똑같았다고 한다. ‘죽기 전에 회개하라’ 무엇을 말해 줍니까? 곧 매일 회개함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는 ‘과실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그러나 과실을 회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뜨거웠던 믿음만을 자랑하고 현재의 명목적인 믿음을 회개하지 않고 발뺌 하거나, 죄를 부인하거나, 책임을 전가 하거나, 죄의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외면하는가 말이다. 이제 한국 교회의 살길은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교회 근방의 사람들에게 전도와 구제와 형제 사랑 하는 일을 실천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교회 무익을 주장하는 불신의 사람들도 교회를 존중하고 교회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지니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전하는 복음 진리도 잘 수용하게 되어 전도의 문이 넓어지게 되어 교회가 쇠퇴하지 아니하고 꾸준하게 부흥될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6-03-17
  • 총선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우리 교회에 새벽 기도를 열심히 나오시는 분이 계신다. 키는 외국에서 온 이방인 같고 안면은 텁수룩한데 본인의 말로는 중국에서는 한의사 자격증을 취득 하였고 미국에서는 두 주에서 자격증이 인정받는다고 한다. 부인과 자녀는 미국에 있고 혼자 교회 가까운데 기거 하면서 작은 교회임에도 다문화 등을 섬기는 것을 보고 교회에 나오게 되었노라고 한다.그런데 어느 날 실토정 예기를 하겠다며 자기는 K대 정치외교 학과를 나왔고 몇몇 분의 정치인을 거론하며 자기의 후배들이라고도 한다. 그러면서 금번 다가오는 총선에 서울에 주목하는 정치 일번지에 출마할 예정이며 남이 안하 는 특수한 방법으로 선거 운동을 해보겠다고 한다. 대화하는 중에 목사님 이번 싸움은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과 같지만 한번 해 보렵니다. 이미 결정 된 사항 같아서 격려와 기도해 주었다.인간은 누구나 정치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창조주가 인생을 지으실 때 ‘땅을 정복 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창1:23) 그러므로 인간이 범죄한 이후에도 인생은 다스리기를 원하고 반면에 다스림을 받는 것을 싫어 하는가보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군대 노릇을 할 때도 서로 대장이 되려고 하고 졸병 하기는 싫어한다. 결국은 힘센 아이가 대장 노릇을 하기 마련이다.이런 인생이 어쩌다 권력을 얻기만 하면 좀처럼 내놓지를 않는 것도 이해 할 만도하다. [공자]는 정치의 원리를 간단히 요약 하여 정(政)을 바로 정(政)이라고 하였다.정치는 옳은 일을 하되 바른 방법으로서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권력을 잡았다고 해서 꼭 행복한 것만은 아닌가보다.고금 동 서 양을 막론하고 정객(政客) 들이 많은 위험 중에 살아 왔으며 인류의 역사는 권력 투쟁으로 인한 흥망성쇠의 피비린내 나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권세가 있으나 저희 에게는 위로가 없도다. 전4:1]우리는 때때로 교회나 가정 일만 잘되면 일만 잘되면 그만이지 정치는 불신자 들에게 맡기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갖기 쉽다. 그러나 권력을 결코 정치를 무시 할 수 없는 것이다. 무정부 상태를 상상해 보라? 그러기에 바르게 정치 할 수 있는 자를 뽑아야 하는데 그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은 모양이다. 자신이 정 도령이나 되는 양 선전을 뿜어 대지만 그 내면을 알 수 없는 일이고 정견이라는 것도 사탕발림인 경우가 허다하다성경도 무자격자가 권력을 쥐게 되면 세상이 어지럽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잠언 30:21-23에 “세상을 진동 시키며 세상을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임군된 것과 미련한자가 배부른 것과 꺼림을 받는 게집이 시집 간 것과 게집종이 주모를 이 은 것이니.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나 정계에 주인공을 뽑을 때 지역감정에 기대거나 인정에 치우치지 말고 참 자격자를 살펴서 세워야 할 것이다. 오늘 언론에 소개 된 제일 야당의 국회의원이 공천에 제외되자 ‘나 같은 꼰대도 필요한데 하 며 이유 없이 떠난다.’ 는 노 정객의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러면 성경이 제시하는 참 자격자는 어떤 사람일까?마태복음 20:20-28절에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우편에 하나는 주의좌편에 않게 하소서”.“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 고자 하는 자는 너희 중에 종이 되어야 하리라.요즘 도시 중요 거리 대형 건물에 나부끼는 현수막을 보면 모두가 훌륭한 문구가 눈에 뜨인 다. 겉으로는 모두가 국가와 민족을 원한다지만 벼슬자리에 않기만 하면 제 권위, 제 위신, 제 자리에 손실과 상처만은 안 입겠다고 갖은 수단을 부려온 아니꼬운 자들을 가려내야 하겠는데 그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아니다.오직 겸손 하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을 세워야 할 것이다. 지역감정을 부추기거나 권력에 아부하여 이득을 얻고자 하는 자들을 가려내는 일은 현명한 국민의 책무이다. 교회도 마찬 가지 목회자를 청빙 할 때도 교회 본질은 외면한 채 성장 일변도의 목회에 여념 이 없는 자들에 의해 교회의 위신은 땅에 추락 하고 있다. 후보자와 간담을 나누면서 “지금의 그 자세를 끝까지 유지 하세요” 정치인의 자격을 논하며 밤이 깊어 가고 있다. 우리 정치도 깊이 있는 정치의 계절이 오기를 소원한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6-03-17
  • (김지호)눈물의 밧줄
    눈물의 밧줄 이 성 교하늘에서 내려오는 사랑그리 빛날까산에서 다 풀어지게낭떠러지에 줄을 매었다가파른 마음에걸린 밧줄허공 중에 오래오래걸려 있길 바랬다얼마나 사랑스러웠으면 그리했을까얼마나 애처로웠으면 그리했을까험한 산길엔한 마리 산새도 울지 않고눈발이 풀풀 날리고 있다가고 오는 사람눈물의 밧줄을 생각했다화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백설이 무척 사랑스럽게 보였을까. 1연에서부터 사랑이 넘치고 있다. 그 눈들이 가파른 산 위에서부터 아래로 쌓이면서 생긴 풍광을 보며 밧줄을 연상하고 있다. 눈은 거칠고 험난한 세상같은 산길에 조용히 내려오면서 하얗게 덮어주고는 단단히 견디고 있다. 언젠가 날이 풀리면 녹아 없어질 눈물같은 밧줄이지만 오래도록 견뎌내길 바라고 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한편으로는 눈물같아 애처로워 보였다. 강추위가 몰아치는 험한 산길. 즉 너무도 냉냉한 이 세상에 날개가 퍼덕거리는 움직임과 아름다운 노래소리를 들려주는 한 마리 새도 보이지 않는다. 화자는 눈물의 밧줄이 이어지고 있는 낭떠러지 같은 산길을 보면서 세상을 관조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왔다가 사라지지만 사는 동안은 세상에 천년만년 살 것처럼 세상에 집착하며 산다. 그러나 언젠가 눈물의 밧줄처럼 사라지는 그 날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기억해야겠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장 16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 5장 39절)우리는 이 두 말씀을 되새기면서 눈물의 밧줄처럼 짧은 생을 살지라도 영생을 위하여 가는 길이 무엇인지 정로의 길을 가야겠다.
    • 칼럼
    • 기독시선
    2016-03-11
  • 선교지에서의 기도요청
    선교지에서의 기도 요청은 항상 응급한 경우가 많다. 오늘의 기도 제목도 그렇다. 필자의 동료 미국인 교수였던 세섬 가족이 보내온 기도 제목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다. 이러한 사연들 가운데 세섬 선교사가 겪고 있는 건강의 문제가 가장 심각했다. 왜냐 하면 전립선 암을 이번에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섬 선교사님과 필자는 한세대학에서 동료 교수로 만났다. 처음 우리학교에 왔을 때에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에 이 분이 목사님이시면서 선교에 열정을 가지신 분임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주어진 교과목에 대한 권한으로 선교학을 가르칠 수 있도록 배려 해 드린 것이 계기가 되어 더 깊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세섬 교수는 학교에서 강의를 하신지 몇 년이 지나 네팔로 선교사역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충성 스럽게 하나님 나라를 확장 시켜 나가고 있다. 한 달 전의 편지에 의하면 생명샘 바이블 트레이닝 센터에는 현재 남학생 28명과 여학생 22명이 새 학기를 시작하여 잘 진행 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지진으로 지난 6개월 동안 닫혀 있던 국경도 열리면서 기름도 들어오고, 봉쇄 되었던 국도도 열리면서 인도와의 왕래도 좀 더 원활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역 가운데 진행된 문맹인 프로그램도 23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두 군데에서 네팔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들은 태어나서 한번도 글자를 읽어 보거나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학생들이란다. 이들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신 후원자님들께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이러한 긍정적 소식과 아울러 긴급 기도제목을 올렸다. 세섬 선교사는 지난 몇 년간 전립선염으로 조용히 통증을 참아오고 있었는데 최근 점점 심해져서 커피와 차, 청량음료도 마실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몇 년 전 한국과 미국의 두 의사 에게 상의해 보았지만 크게 염려해야할 상태는 아니라고 하여 지어준 항생제만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통증이 점점 심해져서 한국에 오는 길에 검사를 받게 되었다. 뜻 밖에도 피검사와 초음파 그리고 조직 검사를 통해 전립선암 초기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다행으로 의사 선생님의 의견은 아직 전립선 제거 수술 보다는 6개월 마다 한번씩 재검진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상황을 지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결정 하였단다. 선교사님의 형편은 2014년 11월 한세대를 퇴직하여 건강보험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이러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전립선 검사를 받는 동안에도 세섬 선교사는 구령의 열정으로 가득찬 간증을 보내왔다. 조직검사를 위해 삼일간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5인 병실 속에서 55세의 한 남성분이 저의 침대 바로 앞에 간암 말기로 입원해 있었다고 한다. 환자의 아내는 그리스도인이었고 병든 남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병든 남편을 돌보느라 지쳐있었으며, 그녀의 믿음도 바닥이 나 하나님을 원망하며 혼돈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내 연희는 그 재매를 위해 위로와 격려의 기도로 도와준 후, 선교사인 남편과 함께 자매의 남편께 기도와 복음을 나눌수 있겠느냐 물어봤더니 쾌히 승낙하였단다. 우린 그 자매의 남편과 함께 네팔과 우리 삶을 간단하게 나눈 후 그분의 피로에 지친 얼굴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로마서 10장 8-10절을 나누었단다. 나눈 후 그가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주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더니 고개 숙여 절하면서 승낙했다. 이후에 주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여 고백함으로 새 사람으로 변하는 기적의 시간이었다. 아내와 그 자매는 더 친교를 위해 병실 밖으로 나갔고 우리 둘은 각자 침대에서 쉬고 있는데 얼마 되지않아 누군가 침대에서 요동하며 떨어지는 소리가 나 얼른 일어나 봤더니, 앞에 누워있던 그 형제분이 화장실에 가려다가 떨어진 거였다.그분은 삼일 밤낯 동안 소변과 대변을 보지 못해 의사와 간호사 모두가 고심하고 있었는데 그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드린후 기도 받고 몇분 되지 않아 막혔던 것들이 다 풀어졌단다. 우리와 함께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병원에서 퇴원하게 되었다. 떠나는 그 두 분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자비의 하나님을 경배했단다. 이어서 세섬 선교사님의 기도요청은 “지난 오년 반동안 우리 가족을 네팔로 보내셔 함께 해주심을 감사드리며, 주님의 온전한 치유의 기적이 나에게도 부어주시길 함께 기도 부탁드립니다.”였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3-11
  • 유다의 배신에 대해서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의 <신곡>에서, 첫 책인 <지옥편>의 끝장 제34곡은 “아홉째 지옥” “코키투스”를 묘사하는 것으로 막이 내린다. 코키투스는 지옥의 가장 밑바닥, 배신자를 가두고 있는 지역으로, 다시 4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첫째 구역은 카이나(Caina): 육친을 배신한 자를 대표해서, 아벨을 죽인 카인의 이름에서 땄다. 둘째 구역 안테노라(Antenora): 조국을 배신한 자를 가두고 있는데, 트로이의 전쟁에서 트로이를 배신한 안테노르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셋째 구역 트로메아(Ptlomea): 손님을 배신한 죄인을 가두고 있는데, 시몬 마카비와 그 아들들을 초대해서 살해한 여리고의 장관 아브보스의 아들 프트레마이오스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구약외전 마카비서). 마지막 네 번째 구역 주데카(Judecca)는 주인을 배신한 가리옷 유다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거기에는 시저를 배신한 브루투스와 캐시우스도 갇혀있다. “주데카”의 중심, 지구의 중력이 집중되는 이 지역에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락한 천사 사탄(루키페로)이 얼음 속에 갇혀있는데, 마왕은 예수를 배신한 유다와 시저를 배신한 브루투스와 케시우스 세 사람을 입으로 깨물고 있다. 소름이 끼치는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유다를 쳐 박은 공로는 결코 단테 혼자의 것으로 돌릴 수는 없으리라. 로마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유럽인의 정서에는 유다는 배신자요 구원받을 수 없는 악마라는 낙인이 깊이 새겨져 있은 지가 오래였기 때문이다. 12세기가 되기 전에, 프랑스에서는 “유다”라는 고유명사가 “배신자”를 뜻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되고 있었고, “유다 짓”은 곧 “배신하기 위한 키스”를 의미하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아이들에게는 물론 개나 고양이에게 조차도 유다란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유다는 “스파이”를 의미하기도 했다. 만찬 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기도하는 예수를 몰래 훔쳐보았다는 인식이 민중들 틈에 나돌아 다니면서였다. 충실한(?) 다른 제자들이 잠들고 있는 틈에, 기도하는 스승을 냉정한 눈초리로 살피면서, 성공적으로 스승을 체포할 방책을 궁리하는 유다의 이미지가 생겨났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으리라. 몰래 들여다보는 행위는 일그러진 “성적 욕구”도 상징할 수 있었다. 이런 저런 소위 “유다근성”이 유럽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 모두에게 덧 씌워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셰익스피어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을 연출해서 박수갈채를 받았고, 나치는 온 유럽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냈지만, 종교인 예술가는 물론, 내로라하던 지성인도 입을 다물었다. 세계적으로 종교 문화 사회, 여러 측면 여러 차원에서 “배신자”이기 때문에 증오의 대상이 된 캐릭터는 유다 말고는 달리 유를 찾을 수가 없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하고 선언한 이후의 세계에서도 유다에 대한 증오는 보기 좋게 살아남아 시대마다에 걸맞은 변용을 거듭해온 것이다.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제사장과 로마 병사. 그 정점에는 빌라도 총독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도 아니라면, 빌라도가 제안한 예수의 석방을 거부했던 민중들에게 책임을 돌릴 만도했다. 유다는 직접적으로 예수를 죽이는 데 가담하지는 않았다. 이리저리 따져보아도 그 동기가 석연찮은 “밀고”가 죄목이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세월이 더 해갈수록 유다가 악의 화신으로 변모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양이 된 것처럼, 유다도 그 대극에서 모든 악을 한 몸에 뒤집어쓰고 인류의 죄악감을 소멸케 하거나 그 색깔이 묽어지게 하는 역할을 감당한 것은 아니었을까. 스승이 죽은 후 유다가 제사장들에게 돈을 돌려주려 하자, 제사장들은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요? 그대의 문제요!” 하고 말한다. 또 예수의 처형을 결심한 총독 빌라도는 민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 했다. 유대민족을 대표한 제사장들 쪽에서나, 로마를 대표한 총독 편에서나, 다 같이 책임을 이 가리옷 사람 유다에게 뒤집어 씌우려한 몸짓이 아니던가. 유다의 죄가 제사장이나 로마 병사 그리고 빌라도의 그것에 비해 두드러지게 부각된 이면에는 유다가 예수의 제자 중의 하나였으면서도 배신했다는 기록을 강조해보이며 자신들의 죄과를 묽게 해보려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의 범위를 어디까지 잡을 수 있을지는 쉬 판단이 서지 않지만, 오늘의 우리도 그 범위를 벗어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을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3-11
  • 죽음의 집 이야기
    어느 건축가가 여행 중에 본 아름다운 건물들을 모두 종합하여 자신이 살 집을 한 채 지었다. 그 집은 화려한 바로크식 건축 양식을 최대한 모방 했고 실내는 규모 있고 다양하게 꾸며 동양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한마디로 그 건축가가 희망해온 아름다운 집이요. 심혈을 기울여 만든 집이었다. 마침내 온 가족이 꿈에 그리던 ‘궁전’ 으로 이사하였다. 그런데 웬일인가? 그들이 누린 기쁨도 잠시 뿐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가 별 다른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불행의 먹구름은 점점 더 짙어만 가 아내의 죽음에 연이어 그의 두 아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끔찍한 일을 당하자 그는 으리으리한 그 집이 무서워졌고 하루 빨리 그 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는 집을 헐 값에 팔았고 그 곳엔 다른 사람이 이사 와 살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집에 이사와 살던 사람들도 하나, 둘.. 분명한 이유도 없이 싸늘한 시체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건물이 세워진지 7년 동안 여러 구의 시체가 나온 것. 7년 채 되던 해 당시 집주인이 관계기관에 의뢰하여 사인을 규명한 결과 건물 밑을 흐르는 하수구에서 새어나온 독이 그 집의 벽으로 스며들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 이유로 그 집에 기거하던 사람들이 죽어갔던 것이다. 지금도 알게 모르게 명예와 권세와 재물과 쾌락의 달콤한 죄악의 독을 마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음을 당하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해 일종의 불감증을 앓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죄를 인정하기란 쉽지 않은듯하다. 언제나 자신을 속이고 그럴듯한 핑계를 찾으려 한다. 이 정도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그럴 수 있는 것이지 결코 죄는 아니라고 여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성경에는 좋은 말씀도 많지만 기독교와 교회 자체에는 왠지 거부감이 든다’ 그리고 그 이유라는 것이 지금까지 법 잘 지키고 별다른 문제 없이 사는 자기들을 향해 항상 죄인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심지어 죄를 짓고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 중 일부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세상에 죄 없는 사람들은 모두 교도소에 있다’ 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법은 도덕의 최소 부분만을 요약해 놓은 것일 뿐이다. 사람의 양심도 완전한 것 같지만 실상 그 사람이 속한 문화와 그가 가진 생각이나 지식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고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 또 사람에게는 자기를 합리화시키는 본능이 있어서 아무리 자기가 큰 죄와 실수를 저질러도 얼마든지 이유를 들어 합리화시킬 수 있다. 때문에 사람의 법이나 양심, 혹은 자기 생각에 비추어 볼 때 옳은 것조차도 결코 완전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무리 법과 양심, 혹은 자기 생각에 비추어 옳은 것조차도 결코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세상 사람들처럼 인간의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기준에 비추어 스스로 의롭다는 생각으로 교만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의를 완전하게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임을 기억하며 그분의 앞에서 부지중이나 무심중에 짓는 죄를 깨닫고 자복하고 회개하여야 한다. 17세기의 유명한 화가였던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이다. 렘브란트는 네델란드에서 출생했다. 그는 루벤스와 함께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대가로 어린 시절부터 그 명성이 높았다. 그의 그림을 사기 위해 전 유럽의 귀족과 부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모여들었다. 그에게는 넘치는 부와 사랑스러운 아내 그리고 샘솟는 재능이 있었다. 부러울 것이 없는 그는 사치와 방탕이라는 덫에 너무도 쉽게 걸렸다. 이런 그를 경건한 프로테스탄트인 처갓집 사람들이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렘브란트는 이런 사실을 알고 처갓집 식구들을 조롱할 목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아내를 모델로 한 탕자라는 그림을 그렸다. 피아노를 앞에 두고 그의 무릎 위에 않은 아내와 그림 밖을 향해 와인 잔을 치켜들며 건배를 제의하는 렘브란트의 모습은 탕자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의 영광은 오래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사치와 방탕으로 인해 많은 재산을 다 날리고 아내도 일찍 죽었다. 인기가 떨어져 그의 그림을 원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 재능뿐이었다. 렘브란트는 말년의 죽음을 앞두고 가난과 배고픔 속에서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붓을 들었다. 그리고 그 자신을 모델로 ‘돌아온 탕자’를 그렸다(눅 15:20). 탕자의 모습을 보자. 허름한 옷을 입은 앙상하게 마른 청년이 무릎을 꿇고 한 노인의 품에 안겨 있다. 안고 있는 아버지는 아들을 향한 오랜 기다림에 얼굴 가득 주름살이 자리 잡고 있다. 그의 눈은 아들을 다시 찾은 희열과 아들의 비참한 모습으로 인한 안쓰러움이 교차되어 있다. 또한 아들만큼이나 앙상하게 마른 노인의 손은 고생으로 군데군데 빠져버린 아들의 짧은 머리를 꼭 안고 있다. 마치 이제 다시는 빼앗기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단을 보여주는 듯이 말이다.
    • 칼럼
    • 목회자
    2016-03-11
  • 민족을 구원하는 교회
    새해가 되면 누구나 새로운 계획이 있게 마련이다. 그 계획이 나만의 계획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 안에서의 계획인지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올 한 해 동안 신앙인으로서 나의 결정과 판단이 이웃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이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것인지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이루어 지 는 것인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누가6:30)‘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 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막1:15)이것은 광야에서의 시험을 극복하고 갈릴리에 돌아 오셔서 전하신 첫 말씀이다. 민족을 구원하는 일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첫 주제였다. 그 일이 성취되지 않고서는 민족 구원 완성을 기대 할 수 없다. 예수께서 이 설교를 마치신 후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병든 이를 고쳐주시는 일이었다. 풍랑을 만나 고통당하는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을 구원 하여 주시는 일이었다. 형식화된 유대교로부터 그들을 해방 시켜주시는 일이었다.한국의 교회는 한국 민족과 함께 웃고 우는 교회가 되어야하고 민족과 함께 통곡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슬픈 역사 속에서 ‘고난 받는 종으로 수난의 역사를 같이 사는 교회가 되어야한다. 약자를 억누르는 편이 아니고 억눌린 자의 편에서 그들과 함께 신음하며 울어야 한다. 영광의 자리가 아니고 비천한자리에서 고난을 감수하는 자리로 내려와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불의를 고발한다는 것이고 사회악을 제거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요. 억울한 자의 편에서가 아니고 억눌린 자의 편에서 그들과 함께 울어주는 자리여야 한다. 맨 처음 한국 교회는 한국 역사의 빛이었다.그 다음은 이 민족의 역사 속에서 고난 받는 종이었다. 그리고 이제 한국 교회는 이 민족의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되어야 한다. 그때 이 땅의 교회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한국은 빛에 짓 눌려 있고 아직도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지킬만한 복지 사회를 이룩하는데는 갈 길이 멀다. 더더욱 가슴 아픈 일은 남과 분단 상황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족이면서도 가장 무섭고 떨리는 대적 관계에 놓여 있다.이런 처지에서 개인의 구원이란 너무나 불안한 것이다. 그래서 나의 구원과 동시에 민족의 구 원에 나를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께 올바른 일이요 민족의 역사를 바로 잡는 일이라 믿는다. 인간의 존엄성을 실천하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기신 소명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에 참여 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아니겠는가?이웃의 고통을 모르면서 하나님만 아는 것은 자만을 낳게 될 것이요. 하나님을 모르면서 이웃의 고통만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하셨다는 것은 인간을 창조적인 피조물이 되게 했다는 뜻이다. 창세기에 보면 모두가 맑게 개인 하늘과 땅으로 가득 차 있다. 어느 한 구석에도 그늘진 종교의 흔적이나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보이지 않는다.창세기 첫 머리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로 빚어진 살인 사건이 그 예이고 아담과 하와의 자기 기만이 그것이다. 창조주인 야훼 앞에서 떳떳하지 못했을 때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기만 했을 때 인간은 나뭇잎으로 스스로를 가릴 수밖에 없었다.역사가 하나님의 역사가 되게 하는데 교회의 사명이 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이렇게 선포 하였다. ‘뇌물을 받고 재판을 그릇되게 하거나 하거 나 가난 하다고 동정적인 재판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가난한 사람을 없이 여기지 말고 과부와 고아를 돌보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계명이라고 했다.이것을 지키는 자에게 축복이 있고 어기는 자에게 저주가 있다고 했다. 야훼는 ‘나 곧 나’인 동시에 ‘나 곧 그’다 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자가 예언자 이다. 모세가 밝혀준 야훼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형상 그것을 담은 것이 성경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이어야 한다. 민족 구원의 원년이 되기를 빈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6-02-26
  • (김지호)벽
    벽 박 수 민지친 몸으로 돌아올 때너의 따뜻한 미소로 맞아 주고어이없는 실수로 괴로워하면말 없는 진심으로 격려를 했지병마의 고통에 시달릴 때도가까이서 묵묵히 감싸 주고무릎 꿇고 기도할 때 지켜 주었지절박할 때 함께하는표정 없는 말 없는 고마운 친구야너의 따뜻한 우정 잊을 수 없구나나의 부끄러운 삶 탓하지 않고조용히 바라만 보는 너의 심성이너무도 고맙구나내가 세상 떠나는 자리에서도포근히 전송해 줄 미더운 친구야나는 너를 생각하며그분의 은혜를 감사한다우리가 사는 동안 친구라는 존재는 참으로 중요하다. 친구란 유치원 때부터 청소년기 대학교 때 친구, 사회에서의 친구 등등 많은 친구가 있다. 그 중에 속내를 털어 놓기도 하고 언제라도 만나고 싶으면 달려가는 친구가 참된 우정의 친구라고 할 수 있다.화자는 이러한 친구를 두고 있다. 지치고 힘들어 괴로울 때 병마로 고통 당할 때 진심으로 가까이서 지켜주고 격려해준 친구. 이러쿵 저러쿵 말은 안해도 옆에만 있어도 힘이 되는 든든한 친구. 언젠가 화자가 이 세상을 떠날지라도 포근히 전송해 줄 미더운 친구 그러한 친구를 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끝을 맺는다.이 시를 읽으면서 나에게도 벽처럼 든든하고 울타리 같은 친구가 있는가 되물어본다. 단 한 명이라도 그러한 친구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고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한다.이 시에 담겨져 있는 참된 우정은 혼자가 아닌 둘과의 참된 관계가 형성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 칼럼
    • 기독시선
    2016-02-25
  • 선교사의 아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군사가 되는 것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이 있다.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메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4)라고 했다. 이는 선교사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이 말씀에 대비해서 필자는 오늘 선교사의 아내라는 주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선교를 수행 하는데 있어서 부부간의 팀웍이나 커뮤니케이션은 너무나 중요한 사항이다. 특히 선교사의 아내들은 항상 정상적인 가정의 패턴을 꿈꾸며 살고 있다. 그러나 사역지의 다양한 상황들이 부부간의 정상적인 삶의 패턴을 빼앗아 가버릴 때가 많다. 이럴 경우 아내는 심한 우울증이나 탈진과 같은 신체적 질병까지도 얻어서 불행스러운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이럴 경우 힘든 과정을 잘 이겨나갈 경우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문제를 안고 생활할 경우에는 더 큰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최근에 선교사의 아내로서 상당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임현수 목사님의 사모님께서 어려운 환경을 이기고 있는 글을 올려서 모든 이들의 마음을 잔잔히 울리고 있다. 북한의 감옥에서 고생하실 남편의 안위를 생각할 때에 한없이 슬퍼하고 고통스러워질 만도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는 당당한 모습 속에서 하나님 군사의 아내로서 우리에게 귀감을 주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사모님께서 임 목사님의 무사귀환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카나다 토론토의 큰 빛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울고 싶고, 무어라 표현이 잘 안되네요. 몸은 이곳에 있지만 마음은 항상 토론토에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참으로 복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세계 교인들이, 아니 안 믿는 사람들 조차도 임현수 목사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저는 너무 감사합니다. 한국 교회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알려지게 되자 저는 이건 분명히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 내가 아파하고 힘들어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는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이렇게 억류되면서 많은 생각이 저를 돌아보게 해주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너무 억울하고 속상하고 화가 났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지금은 너무 감사하다는 마음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교회적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요.교인들이 함께 모여 중보기도 한다는게 너무 감사했습니다. 목사님이 억류되고 일주일 되던 어느 새벽에 주님이 확실하게 저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셨어요. “내가 너의 남편 북한에 보냈어. 염려 하지마라. 내가 함께 하고 있단다” 라고. 전 그 말씀에 너무 감사해서 펑펑 소리내어 얼마동안 울었습니다. 그 후 위로부터 사람이 형용할 수없는 감사한 마음을 마구 내려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걱정없이 염려없이 감사하며 만나는 사람들을 오히려 위로할 정도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너무 정확하시고 실수가 없으십니다. 그리고 신실하십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 저희 가정에 이런 사건이 생기면서 제 개인적으로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감사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은 정확한 시간에 억류하셨다는 것도 너무 감사합니다. 지금 남북한의 상황을 보면 정말 겁이 날 정도로 어수선합니다. 그러나 그 땅의 영혼을 생각한다면 어느 누군가의 밀알이 있어야하는데 그 사람이 목사님이라는 생각에 저는 또 한번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손해 보실 분이 아니시니...그 땅의 영혼은 누가 책임지겠습니까.목사님 종신 노역형 이라는 죄명을 받았을 때 저는 주님 또 살려주셨네요. 분명 사명이 있겠다고 혼자서 감사기도 드렸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그 날 함께 기도했다는 말을 듣고 펑펑 울었습니다. 주님이 좋아 하는걸 우리 교회가 하고 있다는 것이 감사해서 우리 교회가 너무 자랑스러웠습니다. 우리 한번 사는 인생. 주님 나라 위해 목숨 걸고 기도하고, 목숨 걸고 전도하고, 목숨 걸고 사랑하는 큰빛교회가 되길 그리고 마음껏 축복해드리고 싶습니다.목사님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해 주십시오. 어둠의 땅이지만 빛의 역할을 하도록, 하나님만 바라보고 감사하는 시간 갖도록, 아버지의 마음 더 많이 주시도록,”당당히 선교사 아내의 길을 가신 사모님의 기도가 반드시 응답될 것을 믿는다. 이제 우리 모두는 사모님에게 힘찬 응원을 보내야할 시간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2-25
  • 다시 “엘리야와 엘리사”
    그 옛날 모세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었던 위엄을 기억하는 이스라엘인이라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보여주었던 멋진 장면 또한 잊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백성에게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결단하도록 재촉했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주님이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입증해준 통쾌했던 승리의 장면은 오랜 세월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적 승리의 상징이 되어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기에 엘리야가 살아서 승천했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그 엘리야가 다시 그들의 역사 위로 내려오리라는 바람 또한 간절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갈멜산에서의 승리는 바알 예언자들의 기세를 아주 꺾어놓지는 못했다. 극적인 감동을 주었던 엘리야의 선언도 오랜 세월 길들여진 백성들의 타성을 흔들어 놓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런 현실을 눈치 채지 못한 엘리야는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희망이 없다는 것을 훤히 알면서도 끊임없이 투쟁만을 반복하게 한 동력은 엘리야의 “순수”,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그의 “순수”에서 오는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쫓기는 신세가 된 엘리야가 죽기를 간청하지만 그 소원조차 들어주지 않는 주님에게 실망한 그가 초췌해진 모습으로 호렙 광야에 머물고 있을 때 주님과 주고받은 대화는 <열왕기>를 읽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으리라. “그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왕상 19:9)“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다.”를 우리말 성서들과는 달리 KJV와 ASV는 보다 실감나게 “I have been very jealous for...”로 번역하고 있음을 주목하지 않는다면 이 장면을 실감나게 읽기는 어려울 지도 모른다. <아가서>의 시인은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한 것,”(아가8:6)이라 읊었지만, 사랑하기 위한 시샘, 하나님에 대한 엘리야의 열정은 바알에게 부귀와 힘을 요구하는 탐욕과 같은 것은 아니었으리라. 엘리야의 시샘은 독점하고자 하는 욕구이고 자신의 모든 감정을 오로지 하나님에게로만 향하게 하려는 열정이 아니었던가. 이 완고하기만 한 엘리야의 “응답”은 그의 일생을 일관하는 모토였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를 위대하게 하는 근거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엘리사보다 엘리야가 더 위대한 예언자라는 인상을 대대로 심어주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슬로건이야말로 그에게 후계자가 필요했고 그 후계자가 실무적인 엘리사이지 않으면 안 될 요인이기도 했다. 엘리야의 후계자로 예언계에 들어선 엘리사는 스승과는 달리 현실감각을 가지고 사태를 분별할 줄 아는 위인이었다. 타이르고 교육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렇다고 엘리사가 현실과 타협했다거나 관용일변도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후가 통치하던 시대의 예언자로서는, 왕국의 정신과 사회구조를 송두리째 갈아엎고 새로운 씨를 뿌리는 방법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러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엘리야와는 아주 다른 방법을 취했던 것이다. 고집 불통하는 엘리야의 정서는 그의 일생을 일관하는 올곧은 자세로 나타났다. 그 정서야말로 그를 위대하게 하는 근거이기도 했고. 그러한 그의 자세는 엘리사 보다 엘리야가 더 위대한 예언자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자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자세야말로 그로 하여금 후계자가 필요하게 했고 그 후계자가 실무적인 엘리사가 아니면 아니 될 요인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바알의 예언자들에게 승리한 것은 엘리야였고, 긴 역사를 두고 보면 결국에는 이스라엘백성으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결단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간단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어떤 위기나 사건이라 할지라도 단 한 번의 극적인 대응으로 한 민족의 문화를 영구히 바꾸어 놓을 수는 없는 노릇. 그것을 완성하거나 일상화하기 위해서는 엘리사와 같이 온건한 지도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엘리사는 충고도 하고 비난도 했다. 그러나 의분에 불타 투쟁을 일삼는 예언자는 아니었다. 인간의 약함을 이해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현실적인 해법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누가 엘리야이고 누가 엘리사인지를 분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사이비 엘리야와 엘리사라는 가려내야할 터이지만.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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