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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된 안식
    성경에는 우리 인간을 향하여 안식하라는 명령이 분명히 나와 있다. 신명기 5:12-15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신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안식일의 중요성은 엿새 동안은 열심히 일하고, 안식하는 것이 축복이 됨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천지를 만드시고 7일에 쉬셨습니다. 쉼이 삶의 고정에 필요하다는 교훈이다. 유대교에서 지금도 철저하게 지키는 안식일은 본래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때 까지 이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는 유대인들이 지키는 안식일 대신에 주님의 날을 안식하는 날로 지키며 주님을 섬기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안식하는 삶이란 쉽지 않다. 우리 입에는 늘 “피곤하다” “바쁘다”라는 용어를 달고 산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안식의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고 있다. 이를 세 가지로 분류하여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안식일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한다. 성도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이제 반드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이뤄지는 성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성화의 과정에 필수적인 것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다. 안식일은 일을 멈추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김과 아울러 예배드려야 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안식일은 구원의 감격을 경험하게 만든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피곤을 이기고 근심을 극복하고 복잡해진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맞이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교제함을 통해서 우리는 성도들과 함께 구원의 감격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안식일은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 하게 만든다. 성경 이사야서 58:13-14에 보면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라고 기록되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믿음의 선택이요 하나님을 신뢰하는 실재적인 모습이다. 우리는 믿음과 신뢰를 택하여 억압과 투쟁적인 세상에서 안식일에 안식함으로써 건강과 안정의 축복을 받게 된다. 하나님은 안식의 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셨다. 안식일을 지키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서 주님과의 더 깊은 관계에 나아가야할 줄 믿는다. 그러나 오늘 필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참된 안식을 생각하고자 한다. 이는 하나님 앞에 가서 쉬는 시간이다. 오늘도 선교 현장에서 피곤에 지치고 힘들어 하는 선교사님들이 편히 쉴 곳은 영원한 안식처인 천국임을 인지해 주셨으면 한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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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6-04-06
  • “내 양을 먹이라” 판타지
    “사도 베드로는 주 그리스도에 의해서 사도들의 수장이요, 가시적 지상 교회의 수장으로 정해졌다”는 문서를 남긴 1870년 제1바티칸 회의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요한복음 21장 15-17절”과 “마태복음 16장 16-19절”을 인용했다. 요한복음 21장은 훗날 의도적으로 첨부되었다는 신학적 주장을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어부로 되돌아가려던 베드로가 황금에 보석을 박은 관을 쓰고 황금지팡이를 들고 나서는 별난 목자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판타지는 그리스신화를 능가하는 재미를 제공 해준다. 또 신들의 사랑타령을 읽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어폐가 될지 모르겠으나, 고상하기만 한 바울의 사랑노래보다는 훨씬 쉽게 마음에 와 닿는 것을 어쩌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로 시작되는 사랑 이야기. 만약 바울이 개입할 수 있는 기록이었더라면 그런 모양으로 후세에 전해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하고 노래하는 바울이라면 말이다. 하긴 사랑에는 2등이 없다 했다. “자기 날 사랑해?”하고 묻는데, “박애정신으로...” 운운한다면,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소리가 되기 십상. 사랑에는 차별화와 특수화 과정이 필수적이다. 남들이 다하는 그렇고 그런 사랑은 사랑이 아니란 것이 사랑이란 괴물의 특성이 아니던가. “We loved with a love that was more than love” 애드가 아란 포의 “Annabel Lee”의 시구가 생각난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 이전의 어떤 사랑보다, 우리보다 지혜로운 이들의 사랑보다 강한 것이었다.”는 억지. 그게 바로 사랑의 묘미인 것을. 20세기가 끝날 무렵, 이름깨나 날리는 학자들이 연애 중인 대학생을 대상으로, 혈중 호르몬 분석을 했다나. 도파민, 노르아드레날린, 세로토닌, 등의 화학물질이 연애감정을 일으키는 요물이라고 발표했다는데, 이를 이용하면 사랑의 강도도 측정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여론조사로 등수를 매길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는...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으로 이어진다. 이를 능가하는 사랑의 언어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침묵>으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는 일본의 가톨릭 작가 엔도 슈사꾸는 그의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생전의 예수를 알고 있는 제자들과 그렇지 않는 바울을 비교하여 재미있는 글을 썼다. “예수의 제자들은 생전의 예수와 생활을 함께 하고, 그 모습을 보고, 그 말씀을 듣고, 그 행동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스승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제멋대로의 제자노릇을 했지만... 하여튼 그들은 실제 인생에서 사귀었기 때문에, 그 추억은 생생하게 그들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는 생전의 예수를 알지 못했다... 그의 말씀을 직접 들은 적도 없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되기 이전의 예수는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는 존재였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는 그 죽음과 부활의 신학적인 의미 이외에는 별로 관심거리가 못되었을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베드로의 사랑은 영원불변은 아니었고, 바울의 사랑노래와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니까 사랑이란 때로 한 눈도 팔고 실수도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앞서 소개한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강한 연애감정이 지속하는 기간은 길어도 12개월에서 18개월 사이라고 한다.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도 그랬을 지도 모른다. 예수가 어찌 그것을 모르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던 그가 세 번이나 스승을 부인했으면서도 진정 다른 제자들보다 더 사랑한다? 세 번 씩이나. 이것은 베드로의 아픔이 아니던가. 그래서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물으시는 예수의 물음에 불안해 진 것. 예수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는다. 그러는 것이 사랑의 언어이거늘. “내 양 떼를 먹여라. “ 이 한 마디가 모든 것을 껴안는다. 그러나 “내 양떼를 먹이라”는 쉽게 “네 양떼를 먹이라”로 바뀔 가능성이 처음부터 잠재하고 있었던 것일까. 역사는 그게 사실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번에는 예수께서 사랑하던 제자 요한이 등장한다. 아니 베드로가 예수와 자신의 대화에 슬그머니 끼워 넣은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스승의 가슴에 기대어 속삭이던 요한의 모습이 베드로의 상념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것일까. 그러나 예수는 말한다. 그가 어떻게 되던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니, “너는 나를 따르라” 판타지는 무르익어간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4-06
  • 군중 심리를 따라서 사는 사람들
    오늘날을 가리켜 민주주의 시대라고 말 한다. 그리고 이 시대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소위 ‘다수결’의 원칙이라고 불리 우는 다수 여론이다. 이에 이 시대에는 절대적인 원칙이나 진리보다는 다수의 여론이 모든 것을 좌우하고 결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때문에 어제까지 검다고 말해지던 것이 오늘 어느 강한 지도자나 어느 단체가 희다고 말하고 이에 따라 다수의 사람들이 동조하면 그것이 곧 법이요 진리가 되고 만다. 이 같은 구조적인 악, 다수의 횡포 등은 우리가 매일 같이 눈으로 보고 몸으로 부딪혀 가며 절감하고 있다. 하지만 다수의 결정 사항에 소수의 무리가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복종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소수자들은 불안하고 두려워 분명한 삶의 목표도 없이 군중 심리를 따라간다. 그것이 때로는 편하고 안전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쉽고 편안한 길 그래서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은 언제나 하나님의 진리나 정의나 자유 일 수는 없다. 이에 라인홀두 니버(R. Nibur)는 경고 하기를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이면서도 사회 전체적으로는 부도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례로 히틀러 시대의 광기는 바로 절대 다수의 과격한 군중의 목소리가 소수의 양심의 목소리를 압박하고 소멸시킨 결과에 따른 것 이었다. 그리고 다수를 무기로 하여 압박하는 형국은 오늘날에도 결코 드물지 않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타락한 본성을 지닌 존재이기에 집단적 목소리를 통하여 ‘자기 편’에 속하지 않는 소수를 압박하며 괴롭힐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진리, 정의, 자유에 관해서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오늘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옳고 그른 것인가를 따져 보기도 전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괜찮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그릇된 길로 가고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그저 사람들이 많이 몰려가는 곳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언제든지 하나님의 진리, 정의, 자유의 길은 좁고 험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피하려고 한다. 그들은 이왕이면 좀 더 편안하고 수월한 길로 가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세대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는 무엇일까?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말씀과 예리한 영적 통찰력을 통해 참과 거짓을 분별해 내며 자신이 속한 교회, 총회, 정당, 단체가 어떤 결정을 내렸다 하여 그것이 불의함을 알면서도 비굴하게 침묵한 채 좇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악한 권세 자들이나 어떤 단체가 감언이설이나 협박 공갈 등으로 소위 희생을 강요할 때 아무리 다수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정의롭지 못할 때에는 사람들의 눈치나 살피면서 행동하지 말고 용기 있게 ‘아니오’(No) 라고 외칠 수 있어야한다. 개개인의 비겁한 침묵은 다수에게는 만족스러운 동의로 간주되고 각 개인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는 것은 곧 다수에게 있어서는 화합의 증거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는 그 어느 나라 보다 많은 교회와 성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패는 극에 달하여 이 사회는 날마다 들려오는 소식은 악한 것들이다. 이에 외국인들로부터 ‘ROTC(Repubilc of Total Corruption)공화국’이라는 조롱을 받고 있다고 한다. 즉 총체적 부패 공화국 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오명을 뒤집어 쓴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불의를 간과하고 묵인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적인 소수로 살아야한다. 세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언제나 다수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움직이며 유지되는 것 같아도 실상은 하나님의 뜻과 의를 좇는 창조적인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고 발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창조적인 소수의 사람을 보자. 교회사를 보면 바운티의 하극상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사건은 1787년 타이티를 떠나 영국으로 향하던 배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즉 남태평양의 낙원 같은 섬 타이티를 잊지 못해 영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배안에서 반란을 일으켜 다시 타이티로 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근처의 파치린이라는 작은 섬에 도착했다. 이후 타고 온 배를 불태워 버리고 그야말로 10년이라는 세월을 술을 먹고 서로 싸우고 죽이며 자살하는 등 그 섬은 불신앙과 범죄만이 판을 치는 생지옥이 되었다. 그 후 다른 승무원들은 모두 죽고 에드어드 영과 알렉산더 스미스라는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는데 그들은 어느 날 배 안에서 성경을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얼마 후 신약 성경을 다 읽었을 때 그들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였다. 이 후 섬은 완전히 변했다. 즉 그들은 섬의 아이들에게 성경을 읽어주며 폭력으로 대하던 여자들을 섬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꼭 18년 후에 그 섬을 지나던 배의 선장은 보스턴으로 돌아와 이렇게 보고 했다고 한다. ‘나는 그 섬에서 참으로 경건한 공동체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그들처럼 선하며 평화에 가득 찬 사람을 본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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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
    2016-04-06
  • 폭풍을 다스리신 예수님
    선교사님들의 정신적인 건강과 안녕은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중요한 요인이다. 대부분의 선교사님들은 타문화권 선교 현장에서의 다양한 일들로 인해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일들이 지속되면 마음에 병과 아울러 가족 구성원들은 훼오리 바람의 폭풍을 경험하게 된다. 성경에 보면 제자들을 훈계 하시는 과정 가운데 폭풍을 사용하셨던 예가 있다. 마가복음 4장 35-41을 보면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된다. 첫째는 삶의 여정 가운데 만난 광풍을 만나게 된다. 선교사님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삶의 여정 가운데 누구든지 광풍이 있다. 비록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만 위태로운 순간들이 존재한다. 삶의 위기가 찾아 올 때에 우리는 매우 당황하기 쉽다. 두려움이 엄습해 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는 우리에게 도리어 유익을 주는 결과로 바뀐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고난을 통해서 주님과 더욱 가까워 진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시 119:71에 의하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는 광풍을 다스리신 예수님을 볼 수 있다. 광풍에 대한 대처는 다양하게 분석해 볼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제자들 대부분이 갈릴리 호수의 어부 출신들이 었다. 즉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은 매우 갈릴리 호수와 바람 그리고 환경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최선을 다해서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지경을 맞이하게 되었다. 결국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사실 예수님은 어부가 아니고 목수 였다. 그러나 예수님 만이 전능의 힘을 통해서 폭풍과 배의 침몰을 다스릴 수 있다. 이는 전능의 힘을 제자들이 알게 하시는 교육의 장을 만들게 되었다. 세번째의 교훈은 믿음을 부여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제자들은 그동안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서 놀라운 능력을 소유하신 분으로 알고는 있었다. 즉 베드로 장모님의 열병을 구하고(막 1:29-31), 나병환자를 고치시고(막 1:40-45),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막 2:1-12), 손 마른 자들을 고치심을(막 3:1-6) 목도하였다. 그러한 기적을 보면서도 막상 광풍이 불어서 죽음에 있게 되자 믿음을 잃어 버렸다. 우리의 신앙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지만 막상 위기가 닥치면 제자들처럼 우왕좌왕 알 때가 많다. 서두에서 이야기 했던 것처럼 삶의 과정 가운데 누구든지 폭풍을 만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우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지 않는 믿음은 어떤 것인가? 천지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심과 아울러 관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강하게 믿는 믿음이다. 사실 세상의 어느 누구에게서도 참된 안식을 구할 수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참된 안식의 품이 된다.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끈을 놓지 않을 때에 모든 상황을 뛰어 넘는 참된 안식과 평안을 얻게 된다. 오늘도 선교 현장에서는 타종교와의 영적 싸움 속에서 오는 폭풍, 문화 극복에서 오는 폭풍, 심지어 부부 사이에서 오는 폭풍, 자녀 교육에서 오는 폭풍 들이 수없이 많다. 특히 전 세계가 경험하는 테러ㅗ의 공포 같은 폭풍도 남의 일이 아닌 것처럼 가까이 와 있다. 우리 모두는 어려울 때일수록 주님의 능력 앞에 더욱 기대는 신앙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3-25
  • 브레히트의 부활이해
    "저녁 무렵, 그들은 길을 가고 있다.하늘은 어둡고, 바람이 불고 있다. 바람에 등겨가 날린다. 그들은 꾸부러져 걷노라, 빛을 보지 못한다. 낯선 사나이가 그들과 더불어 걷는다. 그들은 그 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예수가 죽어, 그들은 슬펐다. 그러나, 그들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이상한 일이다. 그 분은 나를 위해 죽으셨어. 의미도 없이, 얻는 것도 없이 죽으셨어. 나도 살고 싶지 않아, 나는 고독하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 분이 다시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꾸부러져 걷노라, 빛을 보지 못한다. 낯선 사나이가 그들과 더불어 걷는다. 그들은 그 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한 제자가, 보리밭을 등지고 있는 그 분을 본다. 그 눈이 불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그는 말한다. 사람들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분이 있다!”브레히트의 시 <성금요일>에서 “에필로그”를 옮겨 보았다. 엠마오 도상. 부활한 예수를 이름도 알 수 없는 한 나그네로 만나는 제자들의 이야기(누가 24장 13절 이하)를 바탕으로, 시인의 감성이 일구어낸 나름의 해석일 터. 제자들이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서로의 의견들을 주고받으면서 길을 가고 있는데... 예수가 그들과 동행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데... 제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를 크리스천 작가로 분류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그는 한 때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지만, 실재하는 마르크스체제는 거부하지 않았던가. 그가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지극히 비판적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 그러나 그는 일생을 예수를 떠나있지 않았기에, 그의 작품 도처에는 예수에 대한 진한 그의 관심이 배어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비판은 그 날카로움만큼이나 강한 예수에의 사랑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표출될 수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그의 시 <겟세마네>(1913)나, <성금요일>(1915)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종종 그의 작품에서 직설적인 수법으로 예수를 다루고 있다. 주제는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로 대표되는 예수의 사랑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타자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을 부각하는 것이 예수에 대한 관심의 전부였다. 또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오늘의 패자가 내일의 승리자가 되는 부활의 모델이기도 했다. 그의 희곡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 ,1939)에서도 자상한 독자라면 작가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그리스도의 상징을 엿볼 수 있으리라. “1636년 1월, 신구교가 서로 싸우던 30년 전쟁 중, 잠든 할레시가 황제군의 기습을 받은 사건이 배경. 군대를 따라다니며 장사를 해서 세 자녀를 길러가는 어머니 피어링은 그날 밤에도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외출한다. 장애아인 딸 카트린을 혼자 남겨둔 채. 마을에 위험이 닥친 것을 눈치 챈 카트린이 어머니의 손수레 밑에 감추어 둔 북을 꺼내 들고서는 한 농가의 지붕에 올라가 그 북을 치기 시작한다. 잠든 마을이 기습을 받고 있다고 경고한다. 북을 친다. 울면서, 웃으면서 북을 쳤다. 잠든 마을을 살리려 필사적으로 북을 쳤다. 카트린이 황제군의 병사의 총에 스러지고서야, 멀리 할레시의 경종이 울린다. 마을은 구호된다. 주변 사람들에게 있어 카트린은 늘 성가신 이를테면 잉여인간, 아니 ‘불행한 짐승’이었다. 그러나 브레히트에게 있어 그녀는 올바르지 못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려하는 전형적인 크리스천. 그러니까 카트린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상징이었다. 전쟁을 이용해서 이득을 추구하다가 결국에는 전쟁 때문에 자식들을 모조리 잃게 되는 억척어멈은 인간의 처참한 모순을 대표하는 것일까. 그러나 억척어멈 당자는 전쟁이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깨닫지 못한다. 연극이 막을 내리려하는데도 여전히 그녀는 손수레를 끌고 군대를 따라간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3-25
  • 지도자들의 권력의 오남용과 책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20세 때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재위 기간(B.C. 336~323) 중에 그리스와 페르시아 등 근동 제국을 정복해 대제국을 수립했다. 그리고 복종하지 않고 끝까지 반항하던 그리스의 테베시를 철저하게 파괴해 버렸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시민들의 동향을 탐색하기 위해 테베시 출신의 저명한 철학자인 크라테스(B.C. 365~285) 라는 사람을 불렀다. 그리고 제안 했다. ‘만일 그대가 원한다면 파괴된 테베시를 재건해 주겠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크라테스는 그의 말을 듣자 말자 그 제안을 무시해 버렸다. ‘전혀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열심히 재건해 보았자 또 다른 알렉산더 같은 사람이 와서 파괴해 버릴테니까요?’ 알렉산더는 독재자였고 전쟁에서는 영웅이었으나 그러한 알렉산더도 시민들의 마음은 사로잡을 수가 없었다. 권세자의 칼은 일시적으로 사람의 무릎은 무력으로 꿇게 할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은 사로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람의 마음은 권력의 힘으로 사로잡을 수가 없다. 이에 아브람 링컨은 ‘일단 시민들의 신임을 상실하면 두 번 다시 그들의 존경을 얻지 못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고로 지도자들은 이 말을 주의해서 들어야 한다. 한두 번은 소수의 지도자가 다수의 회중을 소외시킬 수 있다. 지도자의 우월한 위치에서 사람들에게 횡포를 부리고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것은 잘못이다. 일단 다수의 신망을 잃고 나면 역전의 상황이 벌어진다. 다수에 의해 소수의 지도자의 소외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얼마나 많은 권세자들이 독재의 칼을 쓴 결과 뒤끝이 좋지 않는 상황에서 권좌에서 물러나고 있을까? 오죽하면 ‘권불십년’ 이라는 말을 했을까? 그러기에 공직에 있거나 또한 교회의 행정과 정치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권세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서든지 다수의 대중을 소외시키는 일을 하지 말아야한다. 흔히 ‘군중은 어리석다’ 라는 말을 많이 한다. 바로 이것 때문에 많은 지도자들이 독선과 아집의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군중은 어리석은 것 같으면서도 어리석지 않는다. 어리석다가도 깨어나는 것이 군중이다. 지도자가 권력을 남용할 때 결집된 힘으로 지도자를 순식간에 소외 시킨다. 예컨대 폭력으로 정권을 잡는 독재자들의 최후를 보자 온전히 제 명대로 산 사람들이 별로 없다. 또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점령한 나라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새로운 세력에게 정복되어 멸망하고 말았다. 고로 지도자들은 무력으로 무엇을 이루고자 폭력의 칼을 들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바른 지도자는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 먼저, 공의를 말하고 실천해야한다. 옛말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있다. 이는 누구보다도 이 사회의 지도자요 권세자들이 먼저 정직하게 공의를 실천해야 그 사회가 공의롭게 될 수 있음을 잘 나타내 주는 말이다. 고로 성도로써 국가나 공동체를 운영하는 이들은 정말 정직하고 바른 사람이 되어야한다. 먼저 자신의 이익보다도 사회의 기강과 정의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해야한다. 또 소수자들의 소리를 경청해야한다. 세상 역사에는 소수의 소리를 경청하지 않아서 실패한 위정자들이 많다. 고로 지도자는 다소 소수의 소리가 싫더라도 껄끄러운 소리 비판과 반대하는 소리를 경청해야한다. 왜냐하면 위정자가 귀를 닫으면 자신의 악한 뜻만을 고집해 귀머거리 독사처럼 위험해 지기 때문이다. 고로 지도자들은 밑에서 정리되어온 좋은 소리만 듣지 말고 소수의 소리에 귀를 열어야한다. 아울러 편벽이 없어야한다. 문자적으로 한 쪽만을 의도적으로 높이기 위해 다른 한 쪽을 편파적으로 낮춘다는 의미이다. 요즘처럼 학연, 지연, 혈연에 따라서 요직에 발탁하고 실수도 눈감아 주며 부정도 모르는 척하는 이 세대 속에서도 우리 성도된 자들은 편벽이 없어야한다. 즉 차별이 없어야 한다. 이와함께 섬기는 철학을 가져야한다. 이 세상에는 권리만 있고 책임은 없는 그렇게 편한 직분은 없다. 권리가 있는 곳에는 항상 책임이 존재 한다. 그런데 불의한 지도자들은 권력을 권리로만 알고 책임보다는 축재의 도구로 이용하려든다. 하지만 바른 위정자나 또는 지도자가 되려면 섬김의 철학을 가져야한다. 남 섬기는 종의 도야말로 이 세계를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위대한 힘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섬김 받기를 좋아하는 것이 사실인데 지도자들이 가져야 할 정신은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의 자리를 섬김의 자리로 인식해야한다.
    • 칼럼
    • 목회자
    2016-03-25
  • 인생 후반전의 삶을 위해
    목회일선 에서 손을 놓고 보니 웨인지 아쉬움이 감돈다. 교회에 가면 교회 구석구석에 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별로 없을 정도로 기력을 쏟아 부었으니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러한 생각도 무리는 아니리라 본다. 그렇다 치더라도 한 가지라도 어디 내가한 것인가? 사도 바울이 고백한대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로라.” 고한대로 이제 돌이켜 보면 내가 앞장 설 때는 주님께서 “네 힘으로 해 보아라.고 무관심 하고 오히려 ‘주님 나는 못한다.’ 고 손을 바짝 들었을 때 주님은 맡아서 역사하신 것을 이제야 바로 깨달은 것이 격세지감이다.이제 생각해 보니 나는 대 교회 체질이 아닌 듯하다. 평생 농촌교회, 개척교회, 복지 선교회 밀알선교 00선교에 집중 하다 보니 교회를 크게 부흥 시키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고 후회는 않는다. 그 이유는 큰 교회가 있으면 작은 교회의 역할도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교역 생활 가운데서 나대로의 행복을 복을 찾아본다. 처음 주의 부름을 받아 주님의 종이 되었을 때에 이미 택한바 된바 것을 그리고 영원한 소망 속에 살게 하셨고 복음 사역을 맡겨 주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작은 교회를 목회 하는 중에도 눈물겨운 추억 거리들을 남겨준 성도들을 떠 올리면 눈물 자 욱이 서려온다. 생각해 보면 적은 교회를 섬긴 것이 행복인 것도 많았다.하늘에 폭격기가 뜬 것도 아닌 데 바위 덩어리 같은 것 들이 융단 폭격을 하 듯 땅으로 쏟아 진다. 재수 없이 한방을 맞은 개미는 훌랑 뒤집어 졌다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고 풀잎에 붙어 있던 무당벌레는 집중 포화를 맞아 결국 땅 바닥으로 나뒹굴고 만다. 폭풍이 몰아치면서 검불에 붙어 애벌레의 꿈을 키우고 있던 알들도 모조리 떨어져 버린다. 거미줄에 걸려든 메뚜기는 이미 탈진 상태다. 정복자처럼 늠름한 기세로 쳐다보고 있던 거미는 재빠른 몸놀림으로 포획해 버린다. 특수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원과도 같다. 미시의 세계 땅위의 작은 세계를 확대경으로 들여다 본 모습의 일부이다. 세상은 자꾸 대형화 되면서 작은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잃어가고 있다. 건물을 지어도 고층 으로만 짓고 물건을 사도 한꺼번에 많이 사고 값은 비쌀수록 좋은 것으로 여기고 기회가 와 도 커다란 것 한방만 생각한다. 모두가 홈런만 치려고 한다. 자동차도 대형화 되어 있고 집에 있는tv도 모두 대형화 되었다.교회도 변두리에 있으면서도 중앙교회 창대, 제일00 라는 이름도 유난히 많이 눈에 뜨인다.그렇다면 모든 것이 커진다고 모두 행복하고 좋은 것일까? 대형화 추세의 이면에는 경제적인 욕심이 들어있다. 우리는 작은 것의 위력을 실감 할 때가있다.칼질을 하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뵈었다고 생각해 보자. 신체의 극히 일부가 상처를 입었지 만 우리의 모든 감각과 신경은 손끝으로 집중하게 된다. 작은 벌레가 내는 소리에도 세미 하게 들리는 의미가 있듯 큰 것은 큰 것대로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소명이 있다. 때로는 작은 것 들이 쌓여서 큰 것이 된다.옛날부터 “목사는 설자리는 있어도 앉을 자리는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목사는 설교 하기는 쉽지만 평신도 자리에 앉아서 남의 설교를 듣기는 거북 하 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낮은 자리에 앉은 것이 좀 어색 하다고할까?다른 말로 표현하면 평신도가 교회에 나오면 환영 하지만 목사가 교회에 나오면 별로 달갑지 않게 대한다는 푸념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말이다. 그러기에 은퇴한 다음에는 어느 교회로 가야 할까? 하는 것이 가장 고민스러운 과제라고들 말한다.그러나 이제 마음을 비워야 한다. 은퇴하는 순간 죽은 몸이다. 목회자는 죽고 이젠 평신도로 또는 작은 자로서 소임을 다하려는 마음이 요구된다.성실하고 무성한 나뭇잎이 단풍이 들고 낙엽이 되면 비록 서글프지만 뿌리로 돌아가서 나무를 살게 하는 거름으로 변화 하듯이 낮은 자리에서 평신도를 섬기는 자로 서기를 소원해 본다.인생 전반전은 좀 부실한 경기 이였다면 이제 인생 후반전의 값있는 삶을 위해 철저히 낮아지는 일부터 익숙해 져야겠다. 이제 본 교회에 출석하며 기득권을 다 내려놓는 훈련부터 쌓아 가리라고 다짐해 본다. 인생 후반전의 멋있는 삶을 위해서.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6-03-24
  • (김지호)해빙기
    해빙기 안 재 찬작심 백일이였나다시는 안볼 것 같이얼음장처럼 차가웁더니무슨 바람아 불어나긋나긋이 몸을 풀고심장에다 불을 지르는가나는 오늘 밤과거 따위는 묻지 않고부지런하게 시간을 엮어틈틈이 봄의 발원을 늘어놓고일을 낼 것이다생명을 움 틔울 것이다흔히 사람들이 어떠한 결심을 하고 며칠 가지 못하면 ‘작심삼일’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만큼 자신의 결정을 행동으로 옮기기란 마음처럼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이 시의 화자는 ‘작심삼일’이라는 용어에서 ‘삼일’ 대신 ‘백일’이라는 용어를 환치시키고 있다. 한 계절이 보통 3개월 정도이기 때문에 대충 계산하여 ‘백일’이라 한 것이다.또한 계절을 사람에게 빗대어 의인화하고 있다. 겨울이라는 것이 너무 차가워 다시는 녹지 않을 것처럼 여겼는데 어느새 겨울은 봄 앞에 온 몸을 풀고 냉냉한 가슴을 녹이고 있다. 화자는 그러면서 지난 날의 냉냉했던 과거는 묻지 않고 따스한 봄의 발원을 늘어놓겠다고 한다. 그렇게 할 때만이 생명이 움트는 봄의 향연이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겨울처럼 사람도 때로는 얼음덩이처럼 냉냉한 가슴을 지닐 때가 있다. 결코 다시는 따스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지속적인 관계의 틀안에서는 자신을 녹여야만 한다. 세상은 고집불통 자신만을 내세우면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관계가 잘 형성될 때 우리가 있고 미래가 있는 것이다.
    • 칼럼
    • 기독시선
    2016-03-17
  • 도시선교의 미래
    이제 세계는 점점 도시화 되어간다. 따라서 인구의 집중과 함께 다양한 문제들이 또한 도시에서 발생된다. 즉, 슬럼화의 문제, 인구집중의 문제, 교통문제, 공해문제 등에서 오는 정신적인 방황과 함께 전통적인 가족의 해체로 말미암아 선교의 영역은 너무나 넓어진다. 따라서 21세기의 선교 과제는 엄격히 말해서 도시 선교의 성패에 따라서 교회의 활로가 측정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이제 몇 가지 도시선교의 전략을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첫째는 도시의 빈민구제 사역을 제언한다. 빈민촌은 도시나 도시의 외곽지역에서 생활이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이 공동으로 모여서 삶을 정착하는 곳이다. 빈민촌의 주민들이 고통 받고 있는 것은 불완전한 고용의 문제가 가장 큰 요인이 된다. 영적으로는 자존감의 상실로 말미암아 이웃과 정상적으로 소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틈을 이용하여 사단은 환경적으로 유혹을 하고 있다. 절도와 도박 그리고 술집과 같은 환경은 절망을 더욱 깊게 만들어 버린다. 빈민촌에 존재하는 악들을 이기는 길은 예수님의 전도 방법에서 찾아야 한다. 예수님은 가난한자는 마음에 겸손함을 만들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의 요건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가난은 복음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도록 만든다. 교회는 세계적인 하위문화가 보편적으로 복음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도시 빈민들, 도시 이주자들을 위한 특별한 선교 전략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개방적이면서도, 폐쇄적인 도시민들을 복음 화할 체계적이고도 종합적인 전략도 지녀야 한다. 둘째는 도시 노숙자들을 위한 밥퍼 사역을 제언한다. 산업 사회의 피해 가운데 하나는 직장을 잃고, 삶의 터인 가정마저 파산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을 거리로 내모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도시의 노숙자들은 사회문제에 있어서 국가가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숙자의 양산은 사회와 교회가 도덕적으로 가장 민감성을 지닌 경우라고 보아야 한다. 만약 교회가 이들을 외면하고 돌보지 않는다면 한국교회는 어디에서도 가난한 자들을 섬겼다는 말을 할 수 없다. 셋째는 가출 청소년 사역을 제언한다. 가출은 가정의 위기로 말미암아 형성된 결과이다. 부모님의 이혼과 불화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청소년들이 가정에서 사랑 받지 못하고 가출을 하는 경우가 있다. 무작정 가출한 청소년들은 유해 환경에 노출되어 천길 구렁으로 떨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들의 가출은 정상적인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특히 소녀들의 경우에는 매춘과 같은 유혹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다. 남학생의 경우에도 범죄 소굴의 유혹 속에 쉽게 떨어져서 사회악을 추종하는 세력으로 바뀌어 질 수 있다. 가정에서 버림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반사회적인 생각들을 가짐으로 살인과 강도 그리고 타인의 것을 탈취하여 교도소에 갇히기도 한다. 교회는 위기 속의 청소년들에게 관심을 갖고 선교적 대안을 세워야 할 것이다. 청소년들이 많이 모이는 역 주변을 중심으로 청소년 쉼터 같은 것을 운영하면서 상담과 치유 그리고 교육 등을 통하여 그들의 앞길을 선도하는 사역이 전게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넷째는 물물 교환 은행의 설립과 나눔을 제언한다. 다양한 사역 가운데에서 도시에서의 사역 가운데 하나는 물물 교환은행의 설립을 통한 나눔의 사역이 중요하다고 본다. 물물 교환이란 자신이 사용했던 물건이나 옷가지들을 교회에 기부하여 필요한 사람들이 사용하도록 만드는 제도이다. 사회적으로는 “아름다운 가게” 같은 운동이 실시되고 있으며, 기독교를 중심으로 “아나바다”운동 같은 예들이 좋은 선례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운동이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활용되어야 하겠다. 필자는 오늘 교회의 도시선교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도시화는 급속도로 되어져 가고 있다. 특히 21세기의 세계는 대부분 도시화의 영향력 아래 있게 될 것이다. 급속한 도시화는 스럼화의 문제, 인구집중의 문제, 교통문제, 공해문제가 도래한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선교의 사명임을 제언하였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3-17
  • 예수의 초상들과 이미지
    우상을 금하는 유대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그리스도교회가 그 초기부터 성상(聖像)을 떠받들어 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랬다 치기로 하고, 예수 혹은 그리스도의 용모에 대해서조차 엇갈리는 견해를 보여 온 교부나 신학자들의 생각들을 더듬다 보면 어리둥절해지기 십상이지만, 예술가와 문인 철학자들의 상상력까지 더하다보면 현기증을 일으키게 된다. 전후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귄터 그라스(1927-2015)의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는 양철북을 치며 소리를 질러 유리를 깨뜨리는 희한한 능력을 가졌다. 태어났을 때 이미 성인의 지성을 지녔으나 멈춰버린 성장으로 해서 ‘영원한 아이’가 된 오스카는 나름의 시선으로 세계를 관찰한다. 그의 눈에 비친 예수의 초상과 이미지는 오늘의 크리스천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 안겨주고 있다. <양철북>중 ‘기적은 없다’에서, 오스카는 어머니와 더불어 단치히에 있는 예수 성심교회를 찾는데, 어머니가 고해성사를 하는 동안, 오스카가 교회 안의 예수 초상들을 보면서 뱉어내는 푸념들이 꽤나 짓궂고 날카로워 몇 구절 인용해본다. “‘예수의 마음’이란 것이 교회의 이름이지만...예수는 성사 때를 제외하고는 십자가의 수난을 그린 다채로운 그림에서만 몇 차례 그 모습을 보였을 뿐이었다. 각각 다른 자세를 하고 있는 채색된 조각도 셋 있었다. 그 중에 채색된 석고상이 하나. 긴 머리의 이 예수는 프로이센풍의 푸른 상의를 입고, 발에는 샌들을 신은 채, 금 대좌 위에 서 있었다. 그는 가슴 위의 옷을 풀어헤치고, 모든 자연스러움에 거역하는 토마토처럼 붉고, 영예로우며, 정해진 방식대로 피를 흘리는 심장을 흉곽 한복판에 드러내 보임으로써, 교회의 이름을 그렇게 붙일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천진할 정도로 자부심이 강한 열광한 저 푸른 눈! 언제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저 피어나는 장밋빛 입술! 눈썹에 나타나 있는 저 사나이다운 고뇌! 찰싹 때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혈기왕성한 두 뺨. 두 사람은 모두 여성으로 하여금 애무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는 옆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연약하고 피로해 보이는 두 손은 일을 싫어하는 잘 가꾸어진 손, 궁정 보석상의 걸작과 똑 같은 성흔(聖痕)을 보이고 있었다...” 이어 오스카는 예수의 다른 초상을 만난다. “이 사나이는 정말 남자다운 근육을 갖고 있었다. 10종 경기 선수...나는 그를 친애하는 체조선생, 스포츠맨 중의 스포츠맨, 한 치 손톱만으로 십자가에 매달리는 승리자라 불렀다.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영원의 빛이 움직였을 뿐, 그는 고행을 완수했고 생각할 수 있는 최고점을 획득했다... ” 오스카가 다시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소년 예수를 오른편 허벅다리 위에 안고 있는 처녀 마리아에게 다가 갔다... 세 살짜리 예수를 벌거벗겨 장미 빛으로 묘사한 것은 조각가의 장난이었다.” “그리고 한 장의 양탄자로 덮인 세 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은 녹색의 옷을 걸친 마리아, 연한 초콜릿 빛 모피, 삶은 햄 빛깔의 소년 예수가 있는 곳이었다...장밋빛 예수의 머리 뒤쪽에는 접시 크기의 후광이 있었는데, 그 금박이 그 접시를 값비싼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내가 떨면서 소리도 없이 세 개의 창을 향해 바라보는 것을 보고, 어머니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내가 기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산산조각을 내고 싶었던 것이다...다만 기적 같은 건 더 이상 바라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초상들, 적어도 교회가 이해하고 있는 예수라며 내걸고 있는 예수의 초상들을 고깝게 바라보는 이단아 오스카의 눈초리를 외면해가며, 시대마다가 남기고 있는 예수의 초상들은 그것이 회화가 되었건 조각이 되었건 혹은 문학작품이 되었건, 어느 것이나 예수의 한 면만을 표현한 것일 뿐 전체 상은 될 수 없다하고 우겨보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어찌 예수의 초상 만이랴. 교회가 내뿜고 있는 모든 입김이 구역질을 유발하고 있지 않느냐며 나무란 인사들이 어디 한 둘이었던가. 그야 언제나 있어온 악마의 푸념이 아니었냐며...귄터 그라스라는 한 작가가 그린 오스카라는 가공인물의 비뚤어진 눈에 비친 예수의 초상에 너무 신경을 쓸 일은 아니라고 말해보지만...가톨릭이 책임질 문제이지 프로테스탄트가 나설 일은 아니라고 얼버무린다 해도...오늘날 우리의 교회가 발신하고 있는 얄궂기만 한 정보들이 하도 엄청난지라...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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