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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 9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노라 하면, 마치 교회론적인 성령론을 다루는 듯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사도행전의 기자가 고집스럽게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집중 조명하려하기 때문인 것이었을까? 스데반이 예루살렘의 지도자 그룹인 산헤드린으로부터 불법적인 인민재판을 받아 시구문 바깥으로 끌려 나가 죽음을 당하고, 이 박해가 시발점이 되어서 -사도행전의 기자가 말하는 대로- 그렇게도 수많은 예수의 추종자들을 잔멸하는 박해가 일어나게 되고, 심지어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 땅에는 예수의 추종자라 할 근거가 될 만한 자들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처리되었다고 믿고, 당국은 한숨을 돌렸다. 박해자 앞잡이가 시리아로 발길을 돌린 그 이유와, 그러한 박해의 태풍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아니하고, 있는 듯 없는 듯이 그 땅에서 버젓이 살아있는 예수의 사도들의 이 이야기를 무어라 설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들어가기란 특별한 설명이 없이는 불가능한 이야기였기에, 요한도 예수가 그의 제자들 일행을 데리고서 과감하게 사마리아에 들어 가려한 이유를 장문으로 설명하려 했듯이, 누가는 사마리아로 경계선을 넘어간 이단아 같은 자를, 박해로 인해서 숨어들어간 것처럼 빌립의 이야기를 남겨주고 있다. 누가는 빌립의 전도로 온 사마리아가 충분이 주님께 돌아왔음에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마침표를 찍질 아니하고, 베드로의 일행이 파송되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안수하니 저들이 비로소 성령을 받았다 하였다. 사도들이 안수하기 이전에는 성령을 받은 일이 없었다는 부연은, 마치 로마교회가 진실보다 교회를 우선시하여, 예수의 모친 마리아에게 영원한 동정녀-성모라는 특별함을 입히기 위해서, 예수의 형제들을 요셉의 두 번째 부인이 낳은 아들들이라고 주장하듯이, 교회론을 먼저 생각하는 기자의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아니면 주의 손이 나타난 자에게는 이미 하나님나라가 그에게 임하였다는 주님의 말씀을 전제한 것이었을까(눅 11:20)? 누가가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처럼, 아무리 입에 거품을 물고 장시간 복음을 전하고 설명을 한다 해도,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한 식탁에 얼굴을 맞대고 주님의 성찬을 나눈다는 것은 불가하였을 것이다. 그만큼 율법과 복음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율사들과 사제들의 가치관과 신앙이 예수가 전하는 복음과 달랐던 것처럼 만나기 어려운 질곡이 있었던 것이다. 누가가 진정으로 우리에게 말하려는 바를 주의 깊게 읽고, 그의 고른 숨소리를 경청하면, 누가가 적어도 오늘의 우리게 말하려는 바를 들을 수 있다. 베드로가 안디옥교회에서 할례를 받지 않고 예수를 믿게 된 크리스천들과 불편한 식탁을 같이 하였을 때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야고보 그룹들과 맞닥뜨리었다. 여지없이 우려하던 일들이 벌어졌는데, 베드로에게 한 사람이 급하게 귓속말로 전달하자, 베드로는 교제 도중에 그의 일행들을 데리고 황급하게 자리를 뜨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황당한 일들이 어찌 여기 한 장면에서만 있었을까? 이 사건을 기점으로 해서 바울은 날카로운 양날 검 끝으로 뼈에서 살을 발라내듯이 이 일을 갈라디아 서신에서 명료하게 규명하였다. 이방인과 유대인은 함께 식탁을 나눌 수 없는 건너지 못할 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에서, 오늘날 분단된 남과 북을 아무런 장애 없이 오르내리는 독수리처럼, 모든 이유와 각론을 잠재하고, 다리가 놓이고 오고가는 소통이 일어난 것이다. 그 이야기가 누가의 기록에 장문으로 반복되어 다루어졌다. 누가는 단어와 단어 사이의 짧은 언어와 문장으로 우리에게 말하기도 하지만, 긴 장문으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교회론 적이면서도 성령론적인 교회론으로 구성하였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을 방문하게 되는 이야기는 아주 세밀하게 다뤄졌다. 베드로는 두렵기도 하였겠지만 낯선 이방인의 집으로 일행들과 함께 들어가 저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다. 베드로의 복음 설교가 핵심에 이를 때에, 성령이 그 곳에 모인 이방인들 모두에게, 주인이나 노예나 하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남녀도 차별하지 아니하고, 어린아이와 어른을 구분하지 않고 성령께서 내려오셔서 각 사람에게 임하신 것이었다. 세례를 아니 줄 수 없게 되었고, 주님의 떡과 잔을 아니 나눌 수도 없게 되었다. 가르침만으로는 전달이 되질 않고, 실천으로도 연결되지 않는다. 우리 전도자들의 한계가 그것일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내려오시면 소통이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소멸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04-01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 8
    베드로에게 주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라고 고백을 하였다. 그러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다,’ 라 하셨다.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석이다. 내가 음부의 권세에 넘어지지 않는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셨다. 이와 같은 주님과의 친밀한 조우와, 하늘 아버지로부터의 계시와, 주님으로부터의 직접 천국열쇠를 부여받았다는 것은 탄탄대로의 미래가 보장된, 주님으로부터의 영적 지지이다. 이렇게 영적 지지를 받는 베드로였지만, 감히 밀려오는 십자가의 사명을 감내하기에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가 가시는 길을 미리 아시고 계셨으나, 그의 제자들은 이제서 ‘그가 걷고 계신 길’을 학습 받고 있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갖춘 것만으로는 누가 감히 십자가를 질 수 있다고 말 하리요? 이 지상에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갈 수 있는 어린 양으로서, 우리 주님 예수 외에는 합당하신 이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는 베드로이기 보다는 복음서를 기록하게 된 마태에게 더 마음에 와 닿는 또렷한 슬로건이었을 것이다. 베드로가 진정성이 있게 주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에 깊은 이해가 있었고, 그 가르침을 등한히 여기질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의 기록을 빌리면, 베드로가 욥바 해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서 있는, 밤낮 무두질로 인해서 냄새가 진동을 하는 피혁 가공공장, 무두장이네 집에서 여러 날 묵고 있을 때였다. 저는 오랫동안 중풍으로 인해서 누어있던 애니아를 그 병상에서 일으키었다. 뿐만 아니라 도르가를 주검에서 일으켰다. 정말 그리스도의 수제자답게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렇게 명성을 쌓으면, 그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질 아니하고, 강을 건너 지방으로, 도시들을 지나서 중앙 도성에 다다랐을 것이 아니겠는가? 사무엘의 소문이 전국에 퍼져나갔던 것처럼 그의 영적 권위와 파장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리라. 그러한 명성과 권력과 귀하신 몸임에도 불구하고, 그 거룩한 몸이 누추한 무두장이네 집 사랑방에서 기거하였다 함은, 실로 오늘을 사는 서울 양반인 우리로서는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중에 베드로 같은 이력과 경력을 쌓았다면, 얼마 전 어느 나라의 한 도시의 시장이 된 아무개처럼 수십억대의 저택에서 잠을 자는 것만으로도 부족할 터인데, 우리네 상식과는 거리가 먼 처사였다.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한 이들의 사고방식처럼, ‘음부의 권세가 넘볼 수 없는 교회’를 그런 형식으로 생각하여서, 교회당을 궁전 같이 지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새로운 몸가짐을 갖고서 사도들을 바라보아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스스로가 말하였던 것처럼, 이 세상의 어느 군대가 넘볼 수 없고, 어떤 강한 왕이라도 점령할 수 없는 강력한 하나님의 도성을 예비하였던 것이다. 저는 아무 미련도 없이 배를 버려두고서는 그리스도를 따른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연연하지를 않았다. 어느 누구 같이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밑에 있는 사람들을 보내며, 콩이니 팥이니 하고 참견을 하며 시비를 두질 아니하였다. 저는 벌써부터 자리에 연연하질 않고서 예루살렘을 떠난 것이다. 우리 주님의 복음서를 기록한, 거룩한 서기관인 마태가 눈여겨 본대로, 사도 베드로는 과연 음부의 권세가 쓰러트릴 수 없는 견고한 도성의 기초가 되어 있었다. 저는 하나님나라의 열쇠를 거머쥔 권세자로서 아주 겸허한 문지기였다. 비록 냄새나는 무두장이네 집의 방 한 칸을 빌려서 자리를 얻어 몸을 두었지만, 그 앞에서는 어둠의 권세들이나 지옥의 창끝은 무력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 주님의 사도인 베드로도 역시, 주님처럼 자유와 거룩을 터득하였다. 돈과 권력과 명예에서 자유 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었으나 이성으로부터도 자유 하였다. 그의 부인이 사역에 항상 참여하였음이 이를 밝히 증명하는 것이다. 사도는 오로지 자신의 백성들에게 순수한 복음만을 공급하였다. 그가 말하는 교회란, 몰려다니는 어린아이들이나, 원숭이무리 같은 것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선택받은 시민이요, 거룩한 나라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이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끈 젖먹이들 같은 양들이 아니라, 왕 같은 거룩한 제사장들이었던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03-18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7
    예수님 당시 Mishnah, Priq aboth에 보면 세상을 떠받드는 기둥이 세 개가 있는데, 그 세 가지 중에 하나는 율법을 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전, 나머지 하나는 신도의 경건과 윤리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었다. 랍비들은 이 세 가지를 절대화하여서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라도 무너지면 세상이 모두 무너진다는 것이었다. 율법을 지키는 것과, 성전신앙과 이를 기초로 하는 경건생활과 윤리생활이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히 여겨지는 가치관이었는가를 엿볼 수 있다.이같은 사회 체계에서 새로운 세상, 새로운 하나님나라를 세우려는 복음의 창시자들이나 이를 기초로 한 하나님나라의 가르침을, 바울서신과 사복음서가 그저 지나갈 리가 없었을 것이다. 율법과 성전예전과 백성들의 삶을 아주 예리하고 시원하게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우리의 구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예수께서는 율법의 한계를 지적하시고 성전의 예전 같은 기능과 제도를 통해서 강도짓을 서슴없이 하는 사제들을 거침없이 비판하였다. 그리고 저들의 생활이나 경건성이 과연 실천이 이뤄진 적이 있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비판은 예레미야나 에스겔, 이사야 선지자들에게서 시작된 것이었으나, 예수께서 등장하기 까지는 그 율법적인 것과 성전의 기능과 역할이 보완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예수께서 가르치는 복음과 하나님나라의 건설은 이 세 가지 기둥을 새롭게 갈아 치는 새 포도주였으며, 그 가르침을 담지 하도록 새롭게 제안하는 새 부대였던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이 기적과 표적이 동반됨에 따라서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고, 백성들의 믿음 대상이 예수께로 전환되고, 백성들의 삶이 복음의 가르침을 받은 형태로 전환되는 조짐이 일고, 당시 권력자들과 사회적 가치의 중심권에 있는 자들에게, 이전의 가치관과 제도의 변화에 따른 사회적 붕괴의 두려움이 가중되자, 예수는 십자가에 못이 박히고 말았다.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희생이, 새로운 세상의 건설을 위한 하나님께, 필연적으로 드려야하는 속죄의 제사가 되었고, 세상 짐을 모두 안고 십자가에서 도말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리어 지시자,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다시금 전열을 정비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한 곳에 모여 기도하였는데, 저들 모두가 예수께서 약속하신바, 선지자들이 예언한대로, 특정인 몇몇에게만 기름 붓던 것을, ‘말세에는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말씀’이 이뤄진 것이었다. 이날 이후 성령은 하늘로부터 강림하시어서, 주예수를 구주로 믿는 모든 이에게 내주하시는 영광을 신도들 모두가 받게 되었다.예수님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바 된 이 선물은, 그의 영이신 성령님도 함께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하시어서 인간에게 내어주신 바는, 경이로울 뿐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총이신데, 시인들도 이를 말과 붓으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신비이다. 이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신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 우리의 인격 안에 임재 하시게 됨을, 그의 은총과 거룩함을 그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세상에 있는 언어로는 다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요한의 복음서에 기자는 말하기를, 아직은 각 사람에게 성령이 내리시지 않았지만,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는 예수님의 초막절 끝날 행사의 절정에 선포하신 말씀이, 바로 모든 믿는 자의 인격에서 흘러나오는, 성령의 임재와 은사와 사역과 능력과 순결과 거룩을 일컬어서 가리킨 것이었다.이로써 바울은 동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세 가지 기둥으로써 건설하였다. 복음과 성령의 능력과 열매로써 본을 보임이었다. 예수님의 복음 전파에서 가르침과 능력과 표적과 기사가 동반되고, 그 결과 삭개오 같은 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었듯이, 예수와 제자들에게서 복음 선포와, 성령의 나타남과, 본을 보임에 일관성이 있었던 것이다.사도가 어떻게 하였기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아주 짧은 기간에 건설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교회는 마게도니아 지방에 모범이 되는 교회로서 믿음과 생활에서 좋은 소문이 자자하였던 것이다. 바울, 그는 단단하게 무장된 복음과, 성령의 온갖 은사와 능력과, 성령의 열매로 본을 보임으로서 사역한 결과이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온전하게 갖추고는 있는 것일까? 우리가 놓친 능력과 성령의 나타남과 본을 보임은 어떻게 해야 되찾아 올 수 있단 말인가?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03-06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5
    바울이 유럽에 복음을 전한 이후에, 다시금 세 번째 복음전도를 위한 여행에서, 에베소 윗 지방에 도착하였을 때이다. 거기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그룹을 만나게 되었는데, 예수를 믿는다면 저들이 기본으로 갖추고 있어야 할 것들이 결여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묻자, 우리는 성령에 대하여 들은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되물었다. 당신들이 세례를 받은 것 같은데, 그러면 어떠한 세례를 받은 것입니까? 하고 묻자, 저들은 세례요한의 세례만을 받은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저들에게 자신과 자신들의 동료와 함께 항상 숙지하고 다니는 ‘바울의 복음’을 명료하게 가르쳐 주고는,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인 저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령을 받도록 간구하니, 저들도 비로소 성령을 받음으로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02-16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4
    요즈음 극장가로 사람이 몰리는 이유 중에는 우리가 그동안 바삐 사느라고 잊어버리고 있었던 인간됨의 중요한 요소들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국제시장’은 우리 어른들의 지난 세월동안에 겪어야 했던 역경의 세월 속에서, 한 가장으로서 얼마나 무겁게 책임감을 지니고 살아야 했던가를 모든 시민들이 공감하도록 보여주었다. 어린 학생들도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보는 그 모습이야말로, 오래간만에 사람과 사람이 세데 간의 격차를 뛰어넘어서 서로가 마음으로 통할 수 있었던 순간이 아니었던가? ‘언브로큰’의 영화에서도 한 인간이 격동의 세월을 보내면서, 어떻게 그가 당면한 삶과 시간들을 인내하면서 책임 있게 감당할 수 있었던가를 보여주었다. 19세 최연소 나이에 올림픽에 출전하게 되면서 보여주는 인간의 투지와 인내심, 그리고 47일간의 태평양 표류와 850일간의 전쟁 포로로서 겪게 되는 수용소에서의 삶은, 차마 인간이 저렇게 잔인할 수 있는가를 밑바닥 까지 노출시키게 되고, 그토록 악하고 지능적이고 잔인한 환경을 받아들이는 한 인간의 용기와 박애정신은 함께하는 동료들에게 얼마나 힘을 주었던지,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감독 안젤리나 졸리는 마치 ‘마가복음’을 기록한 서기관처럼 섬세하고 인간미가 넘쳐흐르게 장면 장면들을 이어간다. 마가가 우리 인류 모두에게 필요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 그리고 용서와 치유와 구원을 예수로 마무리 할 수 있었듯이, 안젤리나 졸리도 역시 우리에게 인내와 진정한 용기, 용서로서 비로소 치료되는 인간의 구원을 보여주려고 수많은 캐릭터들과 전문 종사자들을 등장시켜서, 루이 잠페리니를 통한 참된 인간구원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02-05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3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베드로에게 음부의 권세가 넘어뜨리지 못하는 교회를 말씀하셨다.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넘어뜨리는데 있어서 사용하는 무기는 무엇일까? 얼마 전 교회당을 무리하게 확장하다가 경기도에 세워진 한 교회당이 이단 종파에게 팔렸다는 보도가 있었다는데, 최근에도 경북 어느 지방에서도 예배당을 확장하였는데, 두고 간 예배당이 또 그 집단에게 넘어갔다고 한다. 우리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들이 공중권세 잡은 자에게 전략이나 전술에 있어서도 그 세가 약하여져서인지 최전선은 무너지고 후방으로 밀리는 듯 한 양상들이 뚜렷하다. 과거에는 우리에게 복음을 들고 온 선교사들이 책임감을 갖게 되면서, 먼저 자기성찰을 하고 회개를 시작하였다. 그 뒤를 이어서, 아직 한국교회가 목사를 채 배출하지 못했던 시절 신학생들과 조사들이 먼저 회개를 시작하였다. 원산에서 발화되어 서울과 평양에 밀려들어온 부흥은 마치 조나단 에드워드의 각성운동 시절, 마을의 어귀나 술집, 길가와 밭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통회하고 자복하며 온 마을이 주님께 돌아왔듯이, 봇물 터지듯 밀려드는 회개와 각성의 운동이 일어났다. 농한기가 되자 전국에서 평양 장대제예배당으로 모인 사경회에서 더욱 큰 규모로 폭발되었다. 한국교회의 선진들은 거의가 자아성찰과 회개를 경험하고 나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마치 예수께서 목수 일을 내려놓으시고, 사람들이 운집한 요단강에 가셔서 세례로 몸을 씻고 물에서 오르시면서 성령을 받으시고, 그러시고 나서야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아 광야로 나아갔던 것처럼......,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01-29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2
    한국 강산에서의 성령의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선교사들이 삼천리금수강산에 첫발을 디딘지 20년이 흘러서였다. 가장 먼저 성령의 불씨가 지펴진 구역은 강원도 원산지역에서였다. 20년의 세월이란 선교사들의 사역이 무르익어가야 할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에게 아무런 결실이 없었음 알아차리게 된 선교사들은 저마다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영적 성찰이 일어난 것이었다. 누가 시켜서 이러한 영적각성이 도래하였다고 하기 보다는, 사람들이 모이면 서로가 자신을 과신하다 보니, 그 한계가 보이기까지는 미련하여서, 그 사역은 벼랑 끝에 다다르게 되고, 그 벼랑 끝에서야 비로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손끝이라도 붙들어서 살려하는 것이 역사가 보여주는 교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교적 정치성이 미약하고 사리사욕에서 조금이나마 쉽게 탈출할 수 있었던 그룹이 카나다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경제적인 면에서도 검소하였고, 교단의 배후도 미약하여서 세상의 권력욕이라든지 명예욕이라든지 하는 것에서는 멀리 떨어진 구역에 있어서, 자신들을 성찰하는 데에 거치는 것들이 많지 않았던지, 하나님께 어느 그룹보다도 가까이 다가섰던 것이다. 당시 장로교단 같은 경우는 교단이 든든하여서 경제력에서부터 모든 것에 이르기 까지 교단이 주는 후원이 강력하다 보니, 교단과의 결속력이 단단하여진 터이라서 스스로를 살필 만큼의 필요성이 원산 그룹보다는 덜하였을 것이리라. 원산에서 시작된 기도의 불씨는, 교단에서도 좀 더 자유스러웠던, 평신도 선교사인 의사 하디(Hardie, Robert A., 1865-1949)에게서 시작되었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01-16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1
    우리 한국교회는 지난 2013년 말, WCC 제 10차 총회를 개최하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경험을 하였다. 무언가 우리 한국교회의 교회론에서 빠진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저마다 교회를 위한 교회에 집중하다보니 성령론적인 교회로서의 모습을 채우지 못한 것이다. ‘예수중심, 교회중심, 교역자중심’ 이란 표어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순수한 유기적인 몸으로서의 시스템을 갖춘다하기 보다는, 세상이 이미 갖추고 있는 익숙한 구조의 시스템을 선호함을 내포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항시 가시적 존재가 목회자이다 보니, 목회자 중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였던 것이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도읍하여 성전이 건축된 이후, 400년간 지속된 예배의 예전이나 사제들의 사역은 진부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시피 모세가 이집트에서 자신의 백성을 탈출 시킬 때에, 이집트 제국이 바탕하고 있는 종교가 거짓임을 밝혀내야 했고, 그 제국이 터를 둔 그 바탕마저도 거짓의 기반 위에 형성된 제국임을 만민들에게 들어내야 했던 것이다. 제국이 세력을 확장하고 정권의 권력 유지를 하기위해서, 그들의 백성들 가운데에 귀족이나 황족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노예 계급으로 전락되었고, 대다수의 백성들이 왕의 무덤과 전승 기념 도시를 세우는 데에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서 이집트 제국의 종교는 권력을 뒷받침하는 시녀에 불과하였고, 사제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부와 권력에 편승하는 데에 시간을 모두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야훼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억울하게 종살이를 하는 백성들을, 하나님의 기업으로서의 위치에 자리매김 하도록,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모세는 하나님과 호흡을 같이 하며, 자신의 백성들을 일깨우고 움직이게 하는 데에 높은 공감대를 끌어내었다. 이집트인들마저도 모세 편이 되어 주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약자의 집에 곡소리가 나는 법이었는데, 이제는 그 신음소리가 이집트인들의 진영으로 옮겨 붙고, 이스라엘 진영에는 신뢰가 공고하게 되고, 역사적인 야훼의 새로운 공동체로 출애굽하게 된 것이었다. 모세가 절제 있게 날린 열 가지 하나님의 능력 펀치는 효율성이 극대화되어서, 마침내 홍해를 건너게 되면서 승리의 음악과 춤의 잔치가 열린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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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ecumenicalpress.co.kr/article_list.html?section_code=column&category_code=column_11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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