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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육신한 예수교회-5
    잔치를 준비하려는 이들은, 항상 그 잔치에 오시는 손님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에 관하여 예측하기가 매우 어렵다. 1995년에 숙대 출신들이 모교 방문을 위한 잔치를 힐튼 호텔에서 벌였을 때에, 그 예측된 2500명의 오차가 두세 명이었다고 하였는데, 이 수치는 거의 선지자의 통찰력만큼이나 예리한 이경숙 총장만이 할 수 있었던 예측이라 하겠다. 어느 잔치에서는 손님이 예상보다 적게 오는 바람에 잔치 음식이 풍성하게 남아서 가져가는 경우도 있지만, 손님들이 예상을 뒤엎고 두세 배 들어오기 시작한다면, 그 오신 손님들에게 얼마나 누가 될 것인가는 경험해본 사람들이 잘 알 것이다.집을 떠난 지 이미 두 달이 넘었을 때이다. 예수가 자신의 집안에 혼례식이 있어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고향 근처 가나동리 혼인잔칫집에 들이닥쳤다. 그런데 아뿔사! 혼인집에 있어야할 포도주가 바닥을 들어낸 것이었다. 기적의 이야기를 일곱 개로 추려서 절제 있는 펀치를 날리고 있는 요한복음서의 서기관은, 그 첫 번째 기적의 펀치를, 포도주가 떨어진 혼례식의 이야기로 날린 것이다. 모세가 날린 열 가지 기적의 펀치가 질서 있고 절제되어 있는 펀치라면, 요한 서기관의 일곱 개의 기적은, 한 민족의 이야기를 세계 인류의 구원 이야기로 업그레이드 시킨 이야기이다.혼례식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당시 종교가 내놓을 수 있는 카드를 모두 소진시켰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 당시의 모든 백성이 세상 살아가는 재미를 이미 상실한 상태라는 것을 시사한다. 영화 장면에서 주인공이 등장하는 시기를 보라! 가장 상황이 어려워져서 모든 관객이, 이 문제를 반전 시킬 자를 애태우며 기다리고 있을 시기가 아니던가?주후 90년, 요한의 복음서가 태동되던 시기는 그 시대적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패망하고 성전마저 무너진 채, 이스라엘의 시민들은 노예로 끌려갔거나, 유대지방 근처의 변방에서 숨을 죽이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복음을 전하던 이들 대다수가 이미 순교를 당했거나, 살아남은 자들은 교회의 전열을 재정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장 변화를 꾀하고 탈바꿈한 것은, 유대교가 성전중심의 교회에서 율법중심의 회당교회로 전환되었고, 성전제사제도가 사라지고 회당예배가 유대인의 종교전례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살아남으려는 자들은 구약성경을 재정비하게 이르렀고,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는 복음서를 내놓아야 하는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이 시기에 마가복음은 물론, 누가복음, 마태복음 등이 기록되었다. 그런데 예루살렘 멸망 이후 10년에 기록된 요한의 묵시록에는, 일곱 교회가 이미 쇠락하고 있었던 터이라서, 이를 수습하질 않으면 아니 되는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묵시록이 기록된 지 10년, 우린 현재 요한계시록을 성경의 끝에 두었지만, 실제 시간적으로는 요한의 복음서가 제일 마지막에 기록되었다. 요한은 모든 복음서와 성경을 총괄하는 입장에서, 교회가 얼마나 취약한 상태에 노출되어 있으며, 교회의 결정들이 성경에서 떠나 이단아가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교회가 복음의 내용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교회의 형식과 내용을 결정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이 독선에 빠지고 지도력이 결핍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나치게 곁길로 들어선 교회주의가 복음을 왜곡하기에 이르렀던 것이었다.요한에게서 가나의 혼인 잔치는, 포도주가 떨어진 쇠락한 유대종교를 지명한 것이지만, 시간적으로는 당시 A.D. 90년대의 교회를 시사한다. 예수께서 새로운 포도주를 제공하시면서, 다시금 잔칫집에 흥을 돋워 생기를 불어 넣는 것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이 세우시는 그의 교회를 계시하신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오늘의 우리 교회가 요한의 복음서가 기록되던 당시처럼, 포도주가 떨어진, 흥을 잃은 잔칫집이 되어버린 것이다.우리가 지금 당면한 이 흥이 깨어진 잔치를, 어떻게 다시 일깨워서, 신명나는 잔칫집으로 만들 것인가? 복음서를 우리에게 보낸 요한은 그 해답을 이미 알고 기록했을 것이다. 그는 이미 서두에 “너희는 더 큰 것을 보리라” 하였는데, 그가 이렇게 선언함은, 사마리아 성을 겹겹이 둘러쌓은 적군을 보고서 놀란 게하시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도 엘리사가 게하시의 눈을 열어준 나머지 평안과 희락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게하시가 더 큰 하나님의 능력과 수를 읽게 되었던 때문이리라. 이 같이 절박한 상황에 직면한 한국교회를 알아차린 지도자라면, 칼빈보다도 더 큰 수를 읽고, 더 좋은 포도주로, 더 큰 연회를 배설할 수 있게 되리라...,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2-26
  • 성육신한 예수교회-4
    우리가 예수님의 성전에서 떡과 포도주를 먹고 사는 복음사역자라 한다면, 예수께서 성전을 허물고 다시 세워야 하겠다는 말씀을 하루정도 묵상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적어도 한 주일에 하루 정도는 항상 곱씹어야 할 것이다. 요즈음 우리는 교황의 행보를 보면서, 그가 묶으면 묶이고, 그가 풀면 풀리는 것을 보고서, 교권의 권세와 능력이 얼마나 큰 것임을 생각할 때에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우리교회가 법과 제도를 정해서 한번 묶어 놓게 되면, 그 법과 제도를 다시 바꾼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불가할 것이다. 우리국회가 조만간 ‘선진화 법’을 바꿀 수 있다고는 하더라도, 우리 교회가 작금에 정해놓은 법 가운데는, 교단이 무너질 때까지 바꾸지 못하게 될 악법이 많을 것이리라......,칼빈 선생은 장로 직임을 일 년, 혹은 삼 년, 길어도 칠 년 봉사하면 더 이상 할 수 없게 하였다. 장로의 직이란 오늘날 국회의원이나 지방 의원 같은 제도와 같아서, 일시적인 봉사 직제였기 때문이다. 한 신도가 장로 직을 마치고 나면 다시 집사 직으로 돌아와 집사로서 봉사하는 이가 많았던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가 태동되던 세상은, 유교적 폐해에 쪄든 관료적 행태가 만연하던 시기였다. 기독교로 배를 갈아탔다고 해서 습성까지 바뀐 것은 아니라서, 유교적 행태에 길들여진 나머지, 아주 해괴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른 일들이 많았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미국 장로교회조차 알지 못하는 법과 조례를 만들었는데, 그 중에 한 가지가 위임목사 제도를 만들면서 모든 목사직을 상대적으로 임시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고, 장로 직을 항존 직으로 만들면서 장로직의 권한을 영원히 부여한 것이다.우리가 영원할 줄로만 알았던 위임목사 직도 오늘에 와서는 아무런 효율성이 없다. 어디 이 뿐이랴, 권징을 시행하는 교회나 총회는 솜방망이 처벌에 지나질 않는다. 마태복음 16장 19절, 18장 18절에서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이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오히려 욕심 많고 눈이 어두워진 집단과 아류들이 만든 법과 조례로 인해서, 교회가 묶이고 하늘마저도 묶인 격이 되었다.요즈음 젊은 교역자들의 앞날은 이보다 더욱 참담하다. 신대원을 나와서 일차 목사 안수를 받을 수는 있어도, 안수를 받은 즉시 시무 지가 없어서 태반이 쉬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총회서는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를 못한다. 교계에서 대단한 권력을 휘두르는 교역자들에게서도 한국교회를 치유하고 재건할 의지는 희박해 보인다.빛의 화가로 알려진 네덜란드의 렘브란트는 그의 생애 과정을 자화상을 그려서 자신의 삶을 표현하였는데, 그의 마지막 삶을 사는 기간에는 한 해를 오로지 ‘탕자의 귀향’에 집중하여 그림을 완성하였다. 그가 얼마나 삶의 질과 뜻에 무게를 두었던가를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다니엘서의 벨사살 임금의 향연에서, 불쑥 한 손이 나타나 벽에다가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글씨를 쓴 장면을 그린 적이 있다. 렘브란트의 그림 앞에 서면, 화가도 아닌 우리들마저도 그 앞에서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은, 그의 그림이 너무나 깊게 우릴 붙들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라면 누구나 이 장면만큼은 간과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요한은 그의 복음서 첫 장 서론에서, 제자들을 징집하면서 ‘너희는 더 큰일을 보리라’ 하였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14장인 유언장에서는 ‘너희는 더 큰일을 하리라’하였다. 오늘날 우리의 시점에서 이 ‘더 큰일’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가 한 동안은 우리보다 앞 선 문명과 지도자들을 따라잡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들을 아끼지 않고 잘 달려 왔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앞의 것들이 잘 보여서 쉽게 따라잡을 수 있었으나, 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면서 부터는, 앞이 보이질 않게 된 것이다. 뒤에 섰을 때는 우리보다 앞서서 나가는 이들과, 그들이 하는 일들이 잘 보여서 두려움이 없었는데, 이제부터는 우리의 뒤를 따라오는 국가들에 의해서 추격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바로 앞이 보이질 않는 것이 우리의 큰 문제가 된 것이다. 지금의 우리보다 먼저 살았던 선조들을 보라! 히브리서신에는 ‘우리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보이진 않지만 보이는 것 같이 믿고 나아갔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요한은 더 나아가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때를 보고 심히 즐거워하였다’라고 했다. 우리는 루터나 칼빈이 본 것만 가지고 한 백년을 달려 왔다. 그러나 이제는 저들이 본 것만을 보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저들 보다 더 큰 것을 봐야하고 더 큰생각을 해야 하고, 더 큰일을 해야 할 역사적인 시점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2-18
  • 성육신한 예수교회-3
    예수께서 지상에 오시게 되면서, 하나님이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을 갖게 된 가장 효율적인 소통 방식은, 그 어느 것보다도 ‘성육신 적인 소통’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당시 고귀한 자들이 서있던 특별한 자리를 탈피하여, 상식을 깨고서 말구유에 오시었다. 그가 말구유에 첫 자리를 둔 것은 사회제도를 뛰어 넘어서서, 그 누구든지 그를 만날 수 있고, 언제든지 열려진 공간에 예수가 계시다는 것임을 시사한다. 예수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 함은 그가 항시 사람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사람과 소통하시는 영이심을 밝히신 것이다. 세상의 종교란 하나님을 지극히 고귀한 성소에 계시도록 그의 공간을 제한하려하고, 그와 친히 만날 수 있는 이도 오로지 한 사람만으로 제한하여 특화시키려하고, 그의 거룩한 처소에 일반인이 접근하려고 하면, 온갖 종교 의식과 제도적 신비에 감싸여져 있어서, 실제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왕이나 대제사장이 아니면 불가한 것이었다.그러나 예수의 제자였던 이들 중에 가장 막내로 알려진 요한에게서는, 그가 복음을 사람들에게 나누고 60년을 함께 살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 하신 참된 뜻을 더욱 깊게 알게 되었다. 우리가 레위기를 보면 누구나 하나님을 예배하려 하면, 그 누구에게든지 하나님께 나아오는 길을 간편하게 열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행색이 아무리 비천하다 하더라도 비둘기 한 쌍이나, 반 세겔이면 하나님의 성전에 언제든지 들어 갈 수 있었다. 비록 중간에 제사장을 경유해야 했지만 언제든지 유대인 성인 남자라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예수 이후 그의 제자들은 바울을 비롯해서 이 경계를 모두 깨트렸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로 받고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그가 언제든지, 어디서이든지, 어느 때든지, 하나님을 가까이 하도록 한 것이다. 예배의 공간과 시간과 계층을 모두 넘어서게 한 것이었다. 예배 자와 하나님 사이에 거추장스러운 것을 모두 배제한 것이다. 마태복음에서도 보면, 예수께서 숨을 거두실 때에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고 하였는데, 이는 하늘에서 찢었음을 시사한다. 어느 랍비가 그 휘장을 다시 꿰매려고 애를 썼으나, 그 어떤 노력도 허사였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제도와 규칙으로 만들어진, 지정된 처소에 있도록 하는 것을 이미 파기하였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종교가 입고 있는 거추장스러운 제례 보다는, 아주 간소한 예를 말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누구든지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주님은 거기에 계신다. 남자나 여자, 노인이나 어린이를 구분하지 아니하고 저들이 주님을 예배하면 주님은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예배를 받으신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지하 감옥에서 한밤중에 혼절한 상태에 있다가 깨어났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의 경배를 받으셨고, 바울이 금고 상태에서 로마로 이송될 때에도, 하나님은 그를 혼자 두시지를 아니하셨다. 예수님이 천국복음을 선포하신 때부터, 그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역사를 시위한 곳은 모두가, 구별된 성소 바깥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예수님은 언제든지 성령과 함께 하셨는데, 사람들은 이를 보고 성령이 그에게 기름 붓듯이 하였다고 표현하였다. 이는 그가 계신 곳은 어디라도 하나님의 영이 소통하고 계셨기 때문일 것이다.제도권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을 특정화 하고 있었으나, 하나님의 신은 항시 인간이 되신, 사람의 아들 예수와 항상 함께 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제도권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저들의 예배당 안에만 계시도록 정하고 있지만, 우주를 만드시고, 그의 백성 한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지도자가 볼모잡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아브라함도 그가 하나님을 환대하고 사귐을 나눈 후에는, 가시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베드로가 주님을 위한다며 좋은 집을 짓고자 하였더라도, 주님은 즉각 다른 곳으로 가시질 않던가? 과거에 성경을 소유하거나 읽을 수 있는 권한을 성직자들만이 독점하였던 것은, 지성소나 성소를 독점하던 유대 사제들과 다르지 않다. 지난 오백년간 종교개혁으로 고귀한 피 값을 치룬 후에 비로소 성경이 번역되었고, 일반인들도 글을 깨우치고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권한이 회복되었지만, 교회주의로 인해서 성령의 은사나 사역들 역시 일반 신도들에게서 퇴화되어 있다. 신도라 하면 누구나, 교회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과 즐겁게 소통할 수 있고, 서로의 은사를 장려하고 공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2-04
  • 성경에서 지금 막 뛰어나온
    언제나 해가 바뀌면, 많은 교역자들이 지금까지 온 몸으로 섬기며 사역하던 교회에서 짐을 내려놓고 은퇴한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은퇴 후가 더 무겁다. 대한민국 국민이 사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교회가 있기 마련인데, 그 교회의 지도자가 은퇴할 즈음이면 얼마나 일들이 꼬이는지, 직접 당면하지 않으면 그 사정은 알 턱이 없다. 권력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들이닥치는 쓰나미는 그 교회의 존속마저 흔들고 치명타를 가한다.한국교회 교역자들은 교회에 모든 생명을 걸고 온갖 정렬을 불태운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갖는 가치가 절대적이다. 교회가 갖는 중요성이 이렇게 크다보니 이에 따르는 부작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세계교회가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거의 승리주의에 취해서 온갖 죄악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개신교회들은 이러한 책임을 가톨릭교회에 넘겨버리는 경향이 있으나, 전혀 그럴 수 없다. 구 교회 없이는 오늘의 개신교회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의 지나온 역사를 모두 불태워 버리고는, 우리의 사전에는 그런 역사가 없다고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교회’하면 그가 지나온 발자취가, 그가 누구라는 것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이란, 개혁 이전의 히스토리가 어둠의 과정이었음을 시사한다.지난해에 은퇴하는 어느 교역자가, 은퇴를 하는 자리에서 그가 섬겨온 교회의 중요성과 가치를 변증하는데, 얼마나 신도들이 공감을 갖던지, 모든 신도들이 경청하는 것이었다. 성전은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이며, 성령께서 내주하시고 운행하시는 몸이기 때문에 더욱 그리할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이기에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으로 다들 인식할 것이리라.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를 위해서 그의 생명을 바치시지 않았던가? 진실로 교회만큼 이 지상에서 고귀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그러나 이렇게 교회가 중요한 것은 동감하지만, 이러한 가치관으로 인해서 혹시 잘못되어지는 것은 없을까? 교회라는 것이 너무나 거룩하고 위엄이 있어서 국가마저도 멀리서만 바라보고 접근을 하려고 시도하질 않는다. 오랜 역사 과정에서 교회의 위치가 이렇다 보니, 교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란 스스로가 정화시키고 스스로가 질서를 바로잡아야 하는 부담을 크게 갖는다. 거대한 항공모함이 기지를 떠나면, 귀항하기 까지는 지도자의 권한 아래에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항공모함 안에서의 질서와 규율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교회의 위치와 가치를 말한다면, 누구에게든지 소중하게 여김을 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되나, 교회의 가치가 그리스도보다는 앞설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죽음을 당하시고는 부활하시질 못하여서 아직도 지하에 계신다면 뭐라 말하기가 마땅할 것이 없겠지만,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일어나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오르신 이상에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가치를 갖고 있다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앞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나온 역사에서 이천년간, 교회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스도 보다 앞서 있었다.교회의 이러한 횡포는 지나간 가톨릭의 역사에서 확연하게 나타나 있질 않던가? 마치, 그리스도가 부재한 것처럼, 그리스도가 위임한 권세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휘둘렀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성경을 스스로 읽고 성령의 조명을 받기 이전에는 이러한 비리와 오류를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다. 과거의 성경은 어떠한 사정이 있었는가? 성경이 교권과 국가 권력의 압제를 받고 있었기에, 나라마다 자신의 모국어로 번역할 수 없었다. 성경을 번역하거나 보급하는 자는 죽음을 각오하였던 것이다.더더욱 글을 알고 읽고 쓰는 것 마저 기득권에게 점유되다 보니, 성경을 알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문자가 모든 백성에게 학습되어 지기 까지는, 1500년간 성경은 무덤에 묻혀있었던 것이다. 극소수의 위대한 설교자들마저, 그들의 권력자와 기득권자들에게서 자유하질 못하였기 때문에, 그가 황금의 입을 가졌거나 제아무리 재주를 피운다 한들, 마치 당나귀를 타고 가는 발람 같은 꼴이었다. 발람은 제가 가려는 길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는 당나귀를, 막대기로 세 번씩이나 후려갈겼지만, 그는 주의 사자가 칼을 들고, 그를 치려고 서신 것을 알아차리질 못하였다. 당나귀는 보고, 듣고, 알고 있었으나, 발람의 눈과 귀는 욕심으로 인해 어두워진 때문이었다. 자신의 영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농락하는 이들이 어디 그 시절뿐이었던가?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1-22
  • 성경에서 지금 막 뛰어나온
    예수님의 성전에서의 포퍼먼스는 마가복음이 스탠다드이다. 마태복음도 그 장면이 실제로 짜릿하지만, 주의 깊게 그 상황에 몰입하여 보면, 마가가 가장 사실적으로 잘 그려낸 것 같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라는 시민들의 찬미와 환호성 가운데에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요즈음 표현에 걸맞게 말한다면 하얀 의전용 에쿠스를 타고 각료들과 함께 그의 도성에 입성한 것이 아니라, 포니를 타시고 민중들의 인파속에서 입성한 것이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가 뜸을 드리질 않으시고, 성전에 들어가자마자 장사하는 이들과 환전상을 뒤엎고는 ‘이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삼일 후에 다시 세우리라!’하셨다. 그러고 나서는 성전에는 들어오질 못하고, 항시 바깥에서만 서있던 장애인들을 모두 건전한 신체를 가진 사람들로 회복시키었다.그러나 마태보다 먼저 기록을 한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성전을 둘러보고서는 그 다음날, 먼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심판하고, 그 다음에 성전에 들어가서 장사치들의 거래하는 상을 모조리 뒤엎어버린 것이었다. 부랴부랴 제사장들과 책임자들이 나와서 예수께 소리치기를 네가 무슨 권리로 이렇게 할 수 있느냐? 하였다. 그러자 예수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삼일 후에 다시 세운다!’ 하였다. 그런데 이보다 30여년 뒤에 기록을 한 요한은 어떤 영문에서인지, 이 성전 퍼포먼스를 맨 앞으로 끌어내었다. 요한복음 서두에서 예수는 성전으로 돌격한다. 요한이 이 장면을 기록한 때는 이미 이 예루살렘성전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돌 위에 돌 하나도 얹히질 않는 상태로 무너져서, 폐허가 되어 있었던 때이다.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하였을 때에 그와 동행한 학자들 중에는 화가들이 많았는데, 그들 중 하나가 이집트에서 다마스쿠스를 지나면서 그린 사실화와, 그 직후에 나온 카메라의 발명으로 인해서 찍혀진 사진들을 보면 흉물스럽기가 짝이 없다. 이토록 폐허로 변해버린 성전을 요한은 이미 본 바요 들은 바요 아는 바였건만, 굳이 다시금 ‘너희가 이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삼일 후에 다시 세우리라’ 함은 무슨 영문일까?우리가 앞으로 삼십년 후, 처참하게 무너져 버린 한국교회를 되돌아보면서, 그때, 우리가 이 교회를 바르게 허물지를 못하여서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하며 긴 장문의 예레미야의 애가를 눈물로 읊게 되기 때문이어서 일까......? 바울이 아시아와 유럽에 복음을 전하여서 교회를 세운 이후, 바울이 우려하던 상황을 요한은 직면하고 있었다. 요한묵시록의 교회가 이를 잘 시사한다. 교회들이 이미 위험한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때와 시기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이미 지금 우리는 세상에서 ‘새로운 종교가 필요하다’는 말을 수없이 듣고 있다. 갤럽연구나 미래학자들의 연구보고서들을 보면 21세기의 종교는 이미 예측되어 나와 있다. 과거에, 기우제를 수없이 지내도 비가 오지를 않자, 제사상을 엎어버리고서는 마침내 종교를 바꿔버린, 우리 조상들의 역사가 재현되는 듯 한 느낌을 받는 것은 왜일까?지금의 우리 기독교는 마치 예수교라 하기 보다는 율법적인 교회와 유사하다. 모세교회를 보면 한 사람 지도가가 나와서 신의 계시를 받고, 그가 가르치고 일러준 말과 신학을 조차서 길을 가야했다. 이러한 제도에서는 피라미드 구조를 탈피하질 못한다. 이미 유대인들마저도 지난 2,000년을 거치면서 제사장제도라든지, 혈통중심이었던 것을 깡그리 청산하였다. 저들의 회당이 작고 간편하지만 개개인 모두가 세상을 사는 지혜와 윤리가 가장 앞선다.금세기 초부터 교회 권력자들의 몸집이 너무나 비대해지더니, 한국교회는 전반적으로 뇌졸중 장애가 온 상태이다. 한때는 중간의 문제가 얼마나 크던지 천사들이 일시적으로 중간 역할을 하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이후부터는 이 시스템이 확연하게 달라진 것이다. 지도자를 선택할 때에 모세가 여호수아를 지명하던 것과 같이 노심초사 할 필요가 없다. 이미 사도행전에서 보인 바와 같이,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다 하늘의 아들이 되는 권리가 생기고, 영생을 얻고, 성령을 선물로 받기 때문에, 특별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를 찾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신도들 각 사람에게 부어진 기름부음과 각양 은사들을 존중해서, 저들이 갖고 있는 탤런트가 최대의 기량을 발휘하게 하는, 유기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장차 교회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의 역할이 될 것이고, 교회가 사는 길도 될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6-01-12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34
    어느덧 우리는 시간의 경계선을 넘어버렸다. 어제를 떠나서 새로운 오늘로 넘어온 것이다. 새해가 되면 과거의 우리 어르신들은 기도원을 찾아 나섰다. 산으로 올라가면 많은 것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꽉 막힌 듯한 현실 속에서 눈을 높이 들어, 그가 나아가려는 길을 찾고자 함에서 산으로 올라갔던 것이다. 비행사였던 리처드 바크는 그의 ‘갈매기의 꿈’에서 ‘높이 오르는 자라야 멀리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높이 오르려면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잠시라도 떨어져 나와야만 하는데, 어디, 사람마다 자신이 속한 집단을 벗어난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연말연시라 해서 모임들이 얼마나 많은가? 만약에 그 자리에 참여하질 못하면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것이다. 우리 사회는 한 개인이 쉽사리 그 집단에서 벗어나질 못한다.허지만, 이 갈매기는 바람을 타고 높이 오르면서 저 바다 끝에 있는 것을 보려한다. 벌써 마음에는 그 끝을 보고 있는 것인지? 그는 날개 쳐 올라서 날기 시작한다. 지난해 초에 저어새의 이동 경로가 GPS를 통해서 밝혀진 것을 보면, 대략 700km를 날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 새가 남동쪽에서 올라올 때는 거의 먹지를 않고 20일 이상 난다. 먼 길을 간다는 것은 많은 모험도 뒤따르지만, 많은 짐을 지고서는 결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기에,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간소화해야 하고, 먹는 것조차도 절제해야 한다. 그래야 여러 날을 밤낮으로 날아가 비로소 목적지에 이르는 것이다.예부터 사제들은 신전에서 독수리가 나는 것을 보면서 앞날을 예측하였다. 이를 보고 동양에서는 길조라 하였다. 독수리 같이 높이 오르면 전체를 보게 되고, 정확하게 목표를 세워서 직선으로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지 성경의 시인들은 높은 산에 오르며 노래하였다. 아마도 그의 영혼에 거룩한 장소를 말하는 듯하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기력이 쇠하여진 상태로 있지를 아니하고 다시금 새 힘을 얻질 아니하던가? 시인은 사슴의 발과 같이 되어서 높은 곳에 오르며, 산들을 뛰어넘고 적들을 쓰러트린다. 그의 연약하게 보이던 허리에는 이미 능력벨트를 띠고 있다. 하나님이 나를 잊어버린 것 같다고 하던 이들마저 독수리처럼 높이 떠서 힘차게 난다. 기도한다는 것이야말로 마치 독수리처럼 높이 오른다는 것인데, 높이 올라야 보이기 때문이다. 독수리 같이 높이 오르려면 반드시 믿음이 필요하다. 리처드 바크는 두려움 때문에 높이 오르는 것이 어려웠다고 한다. 고공비행을 하는 전투 비행사를 얻는 것은 쉽지 않다고 한다. 저들을 훈련하는 교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비행기 조종사가 될 것인가? 아니면 비행기 정비사가 될 것인가를 최종 결정할 때에, 대부분 비행기를 타고 난 후에 결정될 것이라 생각하지만, 거의가 비행기를 타기 이전에 정비사가 될 것인지, 비행사가 될 것인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높이 오르려면 먼저 자신에게 침투하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하는데, 믿음을 익히고 터득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높이 오르면 보게 된다. 요한은 거듭해서 그의 복음서신에서 ‘나는 본 바요 들은 바요 아는 바라’한다. 본다는 것은 바로 제대로 본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마리아로 가야 하겠다’는 문장은 이미 그가 사마리아로 가야할 것을 알아 차렸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수가성의 우물가에 앉아서 그에게 다가오는 구도자를 기다렸는데, 요한에게서는 그 구도자들이 주로 여성들로 등장되며, 저들은 기회를 놓치질 않고 포착하였다. 우리가 다 아는바와 같이 수가성의 그 여인은 사마리아의 선지자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이미 얻은 자가 되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이 여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미리 보시고 아시며, 그녀의 앞길도 보여주시는 것을 보라! 그녀 또한 많은 시민들을 이끄는 자가 되지 않았던가?예수께서는 자기가 살던 곳에서 훌쩍 떠나서 광야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시험 몇 가지를 이겨낸다. 우리는 그 장면에서 예수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저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만국을 다스리시는 자이시며,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께만 경배 드리는 분이심을 계시하셨다. 연말연시다. 사람들에게 숨어있지만 말고, 홀로 주님이 계시는 지성소로 나아가 보라. 모세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였고, 어거스틴도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왕국을 불수 있었다. 과감하게 주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더 큰 것, 더 큰일을 말씀하시고, 머뭇거리질 않으시고 단번에 십자가로 나아가셨다. 이는 그가 기도하는 분이셨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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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30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33
    한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뉴욕 타임지에 이어서 런던 파이낸셜 타임지가 올해의 인물로 독일 메르켈 총리를 선정했다. 독일은 과거에 유대인을 600만이나 희생시킨 국가이다. 이러한 나라가 주변국들로부터, 특히 젊은이들로부터 가장 신뢰받고 인기가 높아진 나라이기도 하다. 어떻게 세계대전을 일으킨 가해자가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피해를 입은 주변국들에게서 이토록 신속하게 지나간 날의 과오를 털어내고, 다시금 세계적인 지도력을 나타내는 국가로 건실하게 부상할 수 있었을까?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나눠진 상처를 머뭇거리질 아니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이 일을 위해 독일 교회들이 지치질 아니하고 꾸준히 기도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설마 저렇게 통일이 빨리 오리라고는 아무도 예측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통일과 관련하여 적극적으로 직면하여 나아갔기 때문에 일어난 행운임에는 틀림이 없다. 뿐만 아니라 이 국가의 지도자는 유럽 통합을 이끌어 내었고, 2015년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시리아 난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미 100만이 넘는 난민이 독일 시민의 환대와 배려를 받고 있는 것이다.동이 서에서 아무리 멀다고 하여도 극동과 유럽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독일의 인구가 노령화 되어서 앞으로 20년 뒤에는 국가를 단단하게 받쳐 줄 인구가 턱없이 부족하게 되는 것은 모두가 우려하는 바이었지만, 현실적으로 난민을 100만이 넘게 수용한다는 것은 그 이상의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까지 독일 주변국들을 보면 모두가 난민들에 관해서는 뒷짐을 쥐고 눈치만 보며 겨우 체면치레만 할뿐이다. 그러나 독일은 확연하게 다르다. 아주 적극적이다. 비록 메르켈의 정적들이 때는 이 때다 하여 메르켈을 압박하고 흠집을 내며, 메르켈 총리 집권 이래 최대 위기라고는 하지만, 실용적인 행보를 지금까지 잘 진행해온 차분한 총리로서는 난민의 대 유입이 독일 국가에 새로운 도전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지난날의 독일이 아닌, 앞으로 지구상에 나타날 가장 혁신적인 강대국으로 가게 되는 절호의 찬스를 붙들고 있는 것이다.독일 주변에서는 메르켈 총리가, 차가운 머리보다는 뜨거운 가슴으로만 난민 문제를 결정하였다고 하는데, 뒤집어서 보면 지금 일어나는 독일 내의 소요는 모두가 두려움을 이겨내질 못하여서 일어나는 처사이다. 오히려 난민 유입으로 인해서 차분하게 실리를 따지고, 국가 앞날을 예측하면서 학자들과 경제인들과 기업가들의 지지를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유로화를 사용하고 있는 19개국들이 그리스를 비롯한 재정위기 국들로 인해서 경제난이 심화될 것으로 다들 우려했지만 메르켈은 그리스의 유로존 이탈을 막아내었고,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일방적으로 병합하였을 때에도, 국제사회의 침묵을 깨고 러시아를 강력하게 비난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사태의 확산을 막고, 유럽연합의 힘을 모아서 러시아를 제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작금의 국제 정황을 볼 때에 메르켈의 결단은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고, 누군가는 국제사회에서 이와 같은 리더십을 발휘해야할 시점에서 아주 적절하고 용감한 처사였음을 공감한다. 우리나라는 유럽보다도 더 큰 정치적 국가적 난제들을 끌어안고 있다. 지금까지 이러한 문제들은 일시적인 지지와 표를 의식한 나머지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시금 눈을 높이 들어서 우리민족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활로를 뚫는 용기가 절실히 요구된다.이사야선지는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하였다. 내면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은 맑고 예리하여서 그 공적 가치를 실현하는 사명을 떨칠 수 없다. 난민 수용은 어떤 결과를 낳을지 당장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메르켈 총리의 결단은 강한 확신을 가진 정치인으로서 대담한 행동을 한 것이다. 혹시 그녀가, 빌라도 법정에 서신 예수님에게서 ‘네가 받은 권한은 네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받은 것이니 똑바로 해야 할 것이니라.’는 음성을 들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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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21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32
    창세기 24장 1절의 아브라함의 기록은, 우리 전통적인 정서에 익숙하게 번역이 된 듯하다. ‘아브라함은 이제 나이 많은 노인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하는 일마다 복을 내리셨다.’ 이러한 글을 대할 때에는 마치 한 사람의 인생의 황혼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란을 떠났고,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다고 하였는데, 그 때도 그가 청춘이었다는 말인가? 도대체 나이가 얼마가 되어야 많다고 하는 것일까?이러한 번역은, 권위적인 전통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원문을 직역하면 ‘그 날들로 나아가다’(went into the days)이다. 랍비들은 ‘그 날들로 나아가다’라는 문장을, ‘아브라함은 야훼 앞에서 그의 백성들로부터 메시아까지의 역사를 보았다’고 해석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8장 56절의 유대인들과의 논쟁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 문장을 보면 무엇보다도 요한 자신이 랍비 전통과 해석을 세밀하게 알고 있었음은 물론, 논쟁 당사자인 예수님은 랍비의 토라 해석을 잘 소화하고, 자신에게 적절히 적용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요한은 단순히 이 논쟁을,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으로 유대교를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저자는 ‘우리가 예수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비로소 볼 수 있었는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라고 하였다. 그의 문장력 역시,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는 예수님과 다르지 않게, 복음을 생동감 있게 증거하고 있다. 우리는 그로 인하여서 우리의 영을 더욱 밝힐 수 있게 되었다.예수님의 영광은 부활 승천하신지 60이 넘어서면서 요한에게서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유대교 사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빛나게 하는지, 예수님을 설명하는 은유들과 표현들에 있어서,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에는 새 포도주를, 종일 말씀을 듣노라 시장기를 느끼는 청중에게는 생명의 떡을, 밤 그늘이 급하게 찾아드는 성전의 여인의 뜰에서는 예수님만이 우리 개개인의 참 빛이심을 선포한다. 요한의 가르침을 받으면 독자들은 화들짝 놀란다. 수천 년을 오로지 믿음 하나만을 붙들고,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며, 하란을 훌쩍 떠나서 거친 들로 나아가던, 그 믿음의 선조에게서 그렇게 큰 기쁨이 있었다하니, 얼마나 거룩한지 경이롭기만 하다.아브라함은 항상 텐트를 치고 살았다. 그 아들 이삭도, 그리고 야곱마저도 그의 조상이 텐트에 사는 뜻을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둥지를 쉽게 벗어나질 않는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지연 학연 등을 항상 중요시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였는가? 그런 것들 모두를 훌훌 벗어 던지고, 사람들에게서 떠나 조용히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한다. 어떤 종교는 제단마저 조상을 만나는 곳이 되지만, 아브라함은 하늘과 소통을 하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어떤 제단은 크고 화려하게 꾸몄지만, 아브라함은 언제든지 어느 곳이든지 그가 멈추면 그 곳이 바로 제단이 되었다. 하늘이 열리는 곳이 정해진 장소에 한한다면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못 만나게 된다는 말이 아니던가? 혹시 지체 높으신 몸이 아니라면, 장소와 관계없이 어디서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앞으로는 화성에 가서도 산다는데 저렇게 크게 지은 전을 우주로 옮길 수는 있을까?스가랴는 성소에서 가브리엘을 만났으나 마리아는 집에서 가브리엘을 환대하였다. 성소야 하나님의 거룩한 곳이니 그럴 수 있으련만, 마리아는 일상을 보내는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세속적 권위가 마리아를 높여놓아서 그렇지, 마리아 자신은 그가 생활하는 가정에서 하나님을 조우한 것이었다.마리아의 찬가를 부르는가? 그녀는 세상이 뒤집힐 것을 알았다. 사람이 만든 세상은, 모든 사람이 즐거움을 누리거나 행복할 수가 없다. 그 당시만 해도 글을 아는 이가 5%가 채 못 되었다. 권력과 지혜와 글마저 독점하였다. 그런 세상을 아브라함은 동조하지 않았기에, 단출하게 믿음만을 가지고 갈대아와 하란을 떠났다. 한번 본 것은 수천 년이 지나간다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마침내 마리아는 아브라함이 본 메시아왕국을 드디어 거머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의인이 되고, 그 모두가 성령을 받고, 각양 은사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세상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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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성논단
    2015-12-10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31
    우리에게 복음을 가져온 교회는 서방교회로서 칼뱅의 개혁교회이다. 그런데 이 서방교회가 동방교회가 가진 것을 놓친 부문이 많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예배 중에, 예배 자들이 예수님의 화상 앞에서 경배의 순서를 기다리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아이콘 앞에 경건하게 서서 오직 예수님께만 집중하며 경배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어린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한결같은 모습이다. 마치 한 젖먹이가 어머니의 품속에서 젖을 빨다가, 잠시 물었던 젖을 빼고는, 한동안 물끄러미 그 어머니의 얼굴을 한참 뚫어지게 보는 모습과 다르지 아니하다.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실 때에, 짐승들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부모로부터 받을 수 있도록 창조하신 것 같다. 짐승들에게서 젖을 먹이며 새끼를 돌보는 시간이 그 짐승마다 정해져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을 키워낸 늑대의 이야기 사례가 많았던 것에서 착안된 실험에서, 새끼를 출산한 짐승들에게서 새끼를 돌보도록 하는 모성애 호르몬이 한동안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모성애로 인하여, 아이는 안전한 부모의 품에서 보호를 받으며,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갖추어져야할 결정적인 시간들을 놓치질 않고서, 모국어를 배우는 것은 물론, 딸은 엄마의 목소리를, 아들은 아빠의 목소리마저 그대로 빼닮는다.이렇게 한 생명이 부모의 모든 것에 집중하며 학습을 하면서 사람됨을 배워 왔듯이, 종교적인 분야에서도 이와 같은 학습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시고 지상에서 하늘로 높이 올리심으로,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 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치 어머니의 품에서 젖을 빠는 아이가 어머니의 눈을 바라보듯이, 매일 같이 주님에게 집중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예배 자에게는 다른 어떠한 유혹들이 들어설 틈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형상을 본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예수님은 요한과 그의 교회에 이와 같은 예배를 확실하게 보여주셨다. 요한교회의 예배는 모임의 숫자나 장소나 시간에 연연하질 않는다. 비록 그 예배 자가 사마리아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혼자서 예배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성령과 성령의 실재 안에서 예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현대 예배 자들의 음악이 부재하다고 할지라도, 저들은 주님의 임재 가운데에 깊숙하게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원시 교회가 저들의 모임과 저들 개개인을 그리스도가 임재하시는 몸이며, 거룩한 성소라고 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 성전이라는 용어보다는 성소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보아도, 저들은 주님을 예배할 때에 즉각 지성소에 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숨을 거두시자,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보도는, 저들 모두가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주님의 지성소에 저마다 출입하게 되는 혜택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영적인 진보는 공관복음서는 물론, 그보다 일찍 기록된 바울 서신들에게서도 확실하게 나타나며, 히브리서에서는 아주 광범위하고도 세밀하게 다뤄졌다. 요한은 세계 도처에 퍼져나간 그리스도의 이 모든 교회들이 예순을 넘기며, 내외적으로 발생하는 요인들로 인해서 교회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흐려지기 시작하자, 교회라는 것이 무엇임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요한 자신은 물론, 그가 섬기는 교회 공동체는 예수가 부어주신 성령이 강물처럼 충만하게 흘러가는 교회이었다. 이러한 생수가 솟아나서 흐르는 역사는 사마리아도 구원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광야 같은 세상에 젖을 주고 꿀이 흐르게 하는 역사를 가져오게 된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유대광야와 사해바다를 보긴 하였으나, 요한의 교회는 이미 죽음의 바다를 생명의 바다로 바꾸어서 어부들이 그물을 내리는 곳이 되게 한지 오래이다.요한은 그의 복음서 5장에서 38년 동안 질병에 시달리던 사람을 치유하면서, 그 사역의 비법을 지치질 아니하고 즐겨 설명하고 설득하고 있음을 본다. 이는 요한복음의 결론을 내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세상의 죄를 사하시려 우리를 세상에 파송하시려 함이기 때문이다.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사역의 비밀을 아버지와 하나 됨에서 설명하신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이 세상에 내어준 선물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세상을 살리려면 자기 자신의 능력이나 사상, 자신의 본을 보임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것을 세상이 요구하고 있음을 아신 것이었다. 이를 이미 인지하신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떡으로, 자신의 생명을 거룩한 잔에 부어서 마시게 하신 것이었다. 예수님의 사역의 비밀은 아버지에게 날마다 집중하고 바라봄에서 비롯되었다. 항상 그 경배의 시간에 아버지를 보았고, 그의 사역을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를 부끄러워하거나 게으르질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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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성논단
    2015-12-03
  • 온전한 교회, 행복한 세상-30
    주후 80-90년 사이에 요한의 묵시록이 기록된다. 이 묵시록의 수신자가 된 일곱 교회는 당시 소아시아에 소재한 교회이기도 하지만, 먼저 오늘 우리의 한국교회를 지칭한 것이다.요한의 묵시록에서 수신자가 된 교회 일곱은, 복음을 받은 지 그리 얼마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미, 교회로서의 빛이 퇴색되어 있었다. 바울의 선교 시점에서 본다면, 소아시아 지방의 교회는 겨우 한세대를 지나고 있었을 뿐이다. 에베소에 소재한 교회를 통해서 소아시아 온 지역으로 복음이 확산되어졌기에, 에베소를 비롯한 일곱 교회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다. 복음이 전파된 시기뿐만 아니라, 전파하는 복음전도자나 복음의 질이 바울사도의 가르침에서 누락될 수가 없다. 바울 서신이 한 교회로 보내어져서, 낭독하는 자나, 듣는 자나, 읽는 자와, 필사해서 또 다른 지방으로 전달하고 가르친 것을 볼 때에 거의 하나의 신학과 하나의 흐름 가운데에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소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산재한 교회들은 서로 소통되어지고 있던 형제교회들이었지만, 저들의 삶의 자리가 여러 상황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에, 교회마다의 형편과 지역의 특성으로 인해서 당면한 문제들이 다양하였다. 먼저 에베소교회를 보자. 이 교회는 에베소로 보내어진 에베소서의 내용과 같이 복음의 진리를 바르게 인지하였고, 천사들도 흠모할만한 지혜와 계시적인 지식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교회의 구성원들이 서로서로의 은사와 역할에 따른 효율적인 기능과, 유기체적인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여 가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자신들의 교회를 외부의 세력에서부터 지혜롭게 잘 지켜가고 있었고, 그리스도의 신부 같은 영광을 띠고 있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들이닥친 거짓된 교훈들로 인해서 피로가 누적되자, 저들 공동체에서 화기애애하였던 구성원들 간의 유기적 관계가 소원하여진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핵심 가치인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로 변질되어 있었던 것이다.일곱 교회 중에서 또 다른 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에다가 발람의 교훈이 혼합되었다. 발람이란 자가 누구이던가? 저의 이야기가 민수기 22,23장에 잘 기록되어졌다. 그가 선지자로서 영적으로 ‘보는 자’이었으나, 그가 타고 다니는 나귀보다는 민감하질 못하였다. 그가 가려는 길에서 천사가 저를 치려고 칼을 빼어들고 있었으나 알아차리질 못하였다. 아마도 명예와 재물 욕에 노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이도 그가 타고 있던 나귀가 이를 미리 감지하여서 가려던 길을 멈추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말을 하였기 때문에, 그제야 발람은 이를 알아차리고는 일시적으로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만큼 저는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에는 미련하고 게을렀던 것이다. 이 타락한 선지자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모압 여인들의 미인계에 걸려들게 되었고, 염병까지 겹치게 되면서 24,000명이 희생되었고, 이 눈이 어두워진 발람도 역시, 모압처럼 멸망을 피해가진 못하였다.역사가 헤로도토스가 BC 454년부터 집을 나서서, 당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집트와 근동지방들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한번은 이집트에서 순결한 처녀를 구해보려고 시도하였지만, 어디엘 가더라도 구할 수는 없었다고 하였다. 그만큼 저들의 종교관습은 민수기의 25장 의식이나, 출애굽기 32장의 시내 산 금송아지 종교 축제와, 소돔의 멸망과 관련되어 있었다. 출애굽을 시도한 시내산 교회의 위험 지수나, 소돔과 고모라의 문화생활은 그 위험에 있어서 주후 일세기의 교회들과 차이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마태복음의 가르침과 같이,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는 일은 항상 있어왔다(마 13:24). 이같이 교회는 출생되면서부터 외적인 요인들뿐만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 발생되는 문제들로 인해서 항상 위험에 노출되었던 것이다. 한국교회도 묵시록의 교회들처럼 위험 요소들에 노출 된지 오래이다.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서는 물리적인 전쟁에서는 승리할 수 있었으나, 싯딤에서는 종교 문화의 관습을 통해서 침투하는 적들은 막아내질 못하였다. 이스라엘이 영적인 전쟁에서는 비참한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오늘의 한국교회 상황도 당시의 일곱 교회가 영적인 전쟁에서 패주하고 있었던 것과 다르지 않다. 늦은 감은 있지만, 우리가 이러한 영적인 패주를 정지시키고, 저주의 수취를 씻어내려면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슬픔과 질병이 만연해진 싯딤 캠프에서 한 전사가 나타났는데, 그가 곧 비느하스 신학을 세운, 엘르아살의 아들이었다. 그가 취한 민첩한 판단력과 실천력으로 인해서, 그들 교회에 만연된 염병과 저주가 즉각 사라진 것이었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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