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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죽은 삶 - 배성산목사
- 사람들은 나서 살다가 죽는다는 전제로만 살아간다. 죽음이 삶의 종지부라고 생각하며 거기에 의미를 둔다. 이는 죽음은 비존재이니까 살다가 죽으면 없다고 생각하며 산다는 데 근거한다. 그러기에 허무는 기승을 부린다. 그러나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한 생명의 알(씨)의 생명으로 죽음으로 삶을 보게 한다. 사람은 나서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죽는 것으로 사는 것이라는 의미를 알게 한다. 죽음은 삶의 종지부가 아니라 완성점이고 삶을 영원히 타오르는 초점으로 보는 것이다. 성서에서 생명은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차원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뜻한다. 그러므로 살고 죽은 것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음을 안다. 일찍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살아 있을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그의 생애를 인도하시고 보살피고 문제의 물음에 대답하며 그 하나님의 약속을 언약하신 분임을 한 세대 또한 오는 한 세대를 따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년대를 따라 대대로 이으시며 이를 알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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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죽은 삶 - 배성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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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가정에서 배운다 - 배성산목사
- 성서는 가정의 중요성과 신앙적 교훈의 중심체로서 그 역할을 삶의 생활로 사회생활을 알게 하고 사랑의 공동체로서 면목을 가지게 한다. 이는 가정의 제도가 성서에서 긍정되었고 사회 인류학에 의하여 이를 입증한다. 예컨대 가족이 팽창하여 한 종족이 되고 이어서 한 국가를 이루고 마침내는 전 세계에 흩어지게 된다. 이리하여 집을 세우시는 분은 창조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인류는 하나님의 자녀로 한 형제가 됨을 알게 하신 것이다. 세계적인 교육자 페스탈로치는 "가정이여 그대는 도덕의 학교"라고 말하였다. 가족은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와 그들의 자녀로 이루어 구성된 가족이며 그 가족의 가정은 부모와 자녀가 함께 의식주 등의 공동생활을 하는 생활 공동체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가족들이 생활할 수 있는 공간적 장소를 마련하여 서로 사랑하고 믿는 가운데 공동의 목표를 달성해 나가며 서로의 사랑과 인격적 교제를 이루는 곳이 가정임을 알게 한다. 가정은 장래적으로 훌륭한 사회인, 민주 시민의 의식,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 타인과의 협력하는 정신, 책임과 의무 등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사회 구성원은 혈연관계를 가지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가정의 집합체로서의 관계이며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이해와 인격적 존중 관계로 맺어져 하나님의 사랑을 하고 있어야 함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삶은 사랑의 공동체 가정에서 하늘의 뜻을 배운다." 가정은 단순한 집이 아니요 가족 모두의 가슴속에 품고 있는 서로의 믿음이 형성되어 신뢰가 회복되는 믿음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 인간의 삶의 행복은 깃든다. 사람은 고독한 단독자이면서 동시에 사회인이며 창조함을 받은 내림사랑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두 갈래의 삶을 영위한다. 한 갈래는 자신만이 간직하는 삶이며 다른 한 갈래는 여럿이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삶이다. 그래서 한문으로 사람 '인'자로 알게 하고 사회생활은 모두가 더불어 사는 삶이다. 그리하여 가정은 삶의 거울이 된다. 더불어 사는 삶에서 믿음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내가 상대를 믿어주면 상대도 나를 믿어 주어야 삶이 놓인다. 이러한 믿음이 튼튼하면 더불어 사는 삶은 순리대로 풀려진다. 순리는 항상 상식의 잣대와 삶의 이치의 구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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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같다 - 배성산목사
- 사람이 삶을 "산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같다."는 이 말은 그리스도교의 신앙이다. 사람은 스스로 생겨진 우연의 존재와 실재도 아니고 또 사람이 스스로 창조할 것도 아닌 오히려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어진 피조물이라고 함에 그 의미를 둔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에 '사랑의 하나님'을 닮아 사랑하여야 할 사랑의 삶으로 살아간다는 그 이치를 알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주어진 ‘삶’은 책임져야 할 사랑의 존재들인 것을 알게 한다.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는 새로운 역사의 토대이며 이 역사 속에서 ‘정의’와 ‘사랑’이 실현되는 책임사회의 창조인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을 사는 사회는 인간과 인간관계 뿐 아니라 인류가 하나님 관계에 계속되는 회개와 창조, 심판과 용서의 변증관계가 실현되는 책임사회를 뜻한다. 사랑의 삶은 인간이 기계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이웃과 인류의 복지와 사랑을 위해 기계를 도구로 사용하게 되는 인간 주체하의 사랑의 사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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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같다 - 배성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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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 안에 사는 삶 - 배성산목사
- 것을 알게 한다. 결국 산다는 것은 삶에 공간의 지배하에 있어야 하기에 결과가 있어 시간에 따라 태어 날 때와 죽을 때가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이 살아가는 삶에서 마음으로 시간과 공간을 일구며 산다는 것을 알게 한다. 중국 명대(明代) 홍응명이 통속적인 처세 철학서 ‘채근담’에서 그는 “시간은 생각에 달려 있고 공간은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한 말은 삶을 잘 말 해준다. 그리하여 우리 신앙인들은 신과 우주 만물을 이분법적인 대립관계로 보지 않고 통전적이며 유기체적인 생명관계로 이해한 화이트헤드(A. N. Whitehead,1861-1947)의 “과정철학”사상을 신학에 적용하여 인간이 산다는 것도 그 자체가 공간과 시간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여 살아가는 것을 제시한다. 예컨대 이는 인간과 공간의 삶의 관계가 내면적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행동하기 위해서 공간을 자신의 것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인간이 공간을 조정함과 동시에 행동하는 것으로 공간을 만들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간은 인간의 생활 속에서 사실과 의미를 갖게 되고 사물에 있어서는 사실공간, 자연공간, 인간적 공간으로 그 의미 있는 공간이 된다. 무엇보다도 공간에 있어 인간은 신체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마음에 의해 살아가는 것임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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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 안에 사는 삶 - 배성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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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삶의 자리 - 배성산목사
- 인간이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 가는 데는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원리와 질서가 있다. 어느 시대든지 세월을 따라 시간은 가고 시대는 변화한다. 우리의 신앙의 형태도 그 시대의 상황 따라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창조질서는 본래의 약속이 지켜져야 하고 이를 회복하여야 하기에 시간에서 '때'를 알게 한다. 오늘날처럼 이 시대가 속도에 따라 사회적 정황은 너무 빨리 변화하고 있다. 여기에 시대적인 삶의 자리에 본래의 창조함을 받은 가치관이 요청되기에 만사에 ‘때’가 있다. 우리에게는 만고불변의 하늘의 가치가 있기에 때가 온다. 이것을 예수께서는 신앙의 삶의 가치관으로 우리에게 열어 보이신다. 이를 위해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기다림의 메시아로 오셔서 성육신하심으로 세상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몸소 보여주시며 이를 실현하시기 위해 자기를 버리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보여주고 있기에 복음(gospel, 기쁜 소식)이라 하며 복된 말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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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삶의 자리 - 배성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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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며, 주여! 오시옵소서 - 배성산목사
- 우리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은 희망이요 누구를 기다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바로 행복한 것이다. 기다림 뒤에 오는 짜릿한 만남은 평생을 두고 행복하다. 또한 기다림의 시간이 성장에 필요한 시간인 것을 알게 한다. 인간의 삶도 기다림을 통하여 성장하며 성숙한다.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우리에게는 무엇으로 얼마나 많은 기다림이 있는가! 이 기다림은 믿음의 관계 속에서 성숙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약속된 미래 지향적 믿음은 영원한 생명의 삶이 된다. 믿음과 삶은 종말론적 신앙과 현세적인 삶의 연속 점을 찾고 유지하기 위하여 하나님 안에서 생명이 완성되는 것으로 그 기다림을 알게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게서 하나님의 형상이 어떻게 회복될 것인가? 이는 여전히 죄로 물든 나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주어진 생명이 우리 안에 있기에 이것은 잠정적인 생명 안에 머물러 있지만 이는 이미 종말의 생명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삶에 소홀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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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며, 주여! 오시옵소서 - 배성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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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마음 - 배성산목사
- “가난한 마음”은 마음을 쓰는 태도로 사람의 마음씨(心根)를 알게 한다. 생각이나 의식 또는 정신을 외부로 부터 자극에 일어나는 기분이나 느낌을 머리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아픔, 기쁨을 같이하며 가슴열고 그와 함께 기도하는 충만한 마음이며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들 마음속의 탐욕을 버리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의 타락은 죄이다. 그 죄는 하나님중심의 약속을 어기고 땅의 형편 따라 인간중심의 아집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죄의 그늘에 있게 됨을 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우리 인류의 죄 문제, 죽음의 문제, 인생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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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마음 - 배성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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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새 일을 행하리라 - 배성산목사
-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을 수 있으나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어디에 두고 사느냐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여기에 많은 사람이 갖는 관점이 따른다. 인생관, 가치관은 인간의 근본 문제에 대하여 확립된 기본 신념이다. 왜냐하면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삶에는 모든 사물에 대해서와 인간관계에 신뢰와 확고한 가치관에 의한 삶의 자세가 하늘 앞에 어떤 마음으로 역사인식을 가지고 소명과 사명으로 사느냐 하는 문제는 삶에 분명한 철학이 있느냐 하는 문제에 이르게 한다. 이는 지금 살아가는 삶의 정황과 시대인식에서 어떤 결정으로 시대분별에 척도가 되는 삶의 길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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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새 일을 행하리라 - 배성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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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질서와 예수의 비유 - 배성산목사
- 자연의 계절은 철을 따라 지난해도 올해에도 한결같이 창조질서를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철이 일 년 사시절을 바꾸지 않고 순응하는 것을 보면서 인생의 삶은 왜 이리 변화무쌍(變化無雙)한가 하는 비정한 마음에 지쳐서 하늘의 뜻을 맞는 가을의 기분이 여기 있다. 자연은 환경이나 경우의 변화에 익숙하게 순응하여 자연의 풍광(風光)을 나타내 지금 가을의 철을 보게 하여 자연을 보는 것에서 신앙심을 갖게 한다. 여기에 우리는 신앙하는 믿음을 갖는다. 그 믿음은 아는 것, 보는 것에서 깨달음으로 마음의 상태를 이룬다. 그리하여 믿음은 믿는 마음이요 이 신앙으로 그 믿음을 받드는 행위로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보게 하고 믿게 하는 이는 누구이며 자연의 질서는 곧 우주의 창조하신 분의 뜻대로 창조의 질서는 따르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 깨달음에서 피조물은 조물주를 따라 행한다는 이치를 터득한다. 그리하여 성서에는 그 창조질서가 그 이유대로 인생의 삶을 땅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삶의 환경에서 자연을 따라 시절을 따라 철을 따라가게 하고 하늘에 계신 분이 우리를 이 땅에 두신 까닭을 알 수 있도록 한다. 즉 땅에서 창조의 질서를 보고 우주의 이치를 알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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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질서와 예수의 비유 - 배성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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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빛 안에서 - 배성산목사
- 성서 전체에는 생명과 빛을 함께 언급하고 있다. 빛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이는 성서의 위대한 원칙이다. 우리는 주님의 빛 안에서 빛을 보는 자이다. 생명은 항상 빛을 뒤따르고 오직 빛만이 생명을 태어나게 한다는 진리를 알게 한다. 은혜가 사랑의 표현인 것과 같이 진리는 빛의 표현이다. 빛이 비칠 때 마다 우리는 진리를 받는다. 빛은 어둠 가운데서 빛난다. 진리는 빛의 비춤이다. 빛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신성한 빛이 비칠 때 우리는 진리를 보며 이 진리들은 실재(實在)들이다. 우리에게 신성한 빛이 없고 어둠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이 헛되고 공허한다. 그러나 우리가 빛 안에서 행할 때 우리는 실재를 보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할 때 그리고 빛 안에서 행할 때 그리스도, 그 영, 교회, 몸과 그 몸의 지체들이 우리에게 실재가 된다. 즉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과 은혜 이 모두 우리의 실재가 됨을 알게 한다. 이를 풀이하면"(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1:6) "생명의 빛 안에서"는 제목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행하여지는 삶의 사실을 알게 하려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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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빛 안에서 - 배성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