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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32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32. 돈과 명예에 병들어가는 목회자들 인간이 존재하며 살아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두 가지 요소는 ‘생명’과 ‘물질’이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물질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물질을 더 많이 소유하고 싶은 본능적인 욕망이 있고, 그 물질을 획득하고 확보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이 돈과 관련이 있다. 돈 때문에 울고, 돈 때문에 웃고,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돈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고, 돈 때문에 거짓말도 하고, 돈 때문에 자살도 하고, 돈 때문에 결혼하는 경우도 있고, 돈 때문에 이혼도 한다. 심지어는 정치에서도 대부분의 정책이 경제와 돈 문제에 관련을 갖는다. 종교 단체에서조차 돈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이 그칠 새 없이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목사들도 돈 문제로 법정에 서서 세상의 재판을 받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목회자와 돈에 대한 성경의 원칙교회에는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드리는 헌금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교회마다 이 헌금과 교회의 재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거의 모든 경우에 교회 재정 문제의 핵심에는 목회자가 관련되어 있다. 목회자가 돈을 탐하거나 돈에 욕심을 내면 그 자신과 그가 담임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모두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된다. 그래서 목회자는 돈이나 재물에 대하여 시종일관 초연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구약시대 목회자에 해당하는 레위 지파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에 재산을 분배받지 않았다. “레위는 그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신 10:9). 제사장 직분을 맡은 레위 지파의 사람들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경쟁하며 투쟁하며 먹고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먹여주시는 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열 한 지파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드려서 레위 지파의 생계를 책임지도록 분부하셨다. 이러한 제도 안에서, 레위 지파의 사람들의 경우에는 사업이 번성하여 부요하게 잘 살 수 있는 여건이 결코 아니었다. 그저 굶주리지 않고 평범하게 먹고 사는 정도의 수준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이나 신약시대 이후의 목회자들에게 바라시는 뜻이다. 돈 때문에 병드는 한국교회사람이 살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고 교회 사업을 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돈을 잘 못 사용하면 그것이 재난이 되고 재앙이 된다. 모든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이 말씀을 가슴깊이 새기고 명심해야 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목회자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시험에 들어 본인도 수욕을 당하고 교회도 피폐하게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목회자가 재물에 치중하게 되면 성경의 용어로 ‘목자’가 아니라 ‘삯군’으로 전락하게 된다.그러한 삯군의 정신으로 목회를 하다보면 교회는 병들게 되고 성도들의 신앙은 피폐하게 된다. 물욕을 극복하지 못한 목회자들은 주저함 없이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고 헌금 실적에의해서 교인들을 평가하게 될 것이고, 그러한 목회자를 바라보는 신도들은 실망하여 분노하며 목사와 투쟁하던지 아니면 교회를 떠나게 된다. 결국 구원받는 성도들로 가득 채워져야 할 교회가 일반적인 사교(社交) 집단으로 전락하여 생명력을 잃어버린 황량한 교회로 변질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청렴결백한 모습으로 적절한 사례비 외에는 사양을 하거나 아니면 선교지에 후원하면서 검소하게 살아가는 목회자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감추어져 있고 비위(非違)나 비리(非理)를 저지르는 목회자들은 언제나 크게 부각되기 때문에 교회는 더욱 급속히 신뢰를 상실하며 선교의 문이 막히고 있는 것이다. 요즘 세간에 문제가 되고 있는 교회 세습도 그 핵심에는 재산에 대한 목회자의 탐욕이 깔려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한다.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목회자가 걸려 넘어지기 쉬운 3대 덫이 있다면 ‘돈’과 ‘여자’와 ‘명예’일 것이다. 이 중에서 돈과 여자에 관련된 문제가 드러나면 그것은 곧 정죄를 받고 지탄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명예’를 탐하고 추구하는 것은 좀처럼 정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명예라는 것의 바탕에는 소위 ‘자만심’과 ‘교만심’이라는 것이 깔려 있는 것이고, 그것은 성경에서 매우 엄격하게 정죄하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악이다. 이 세상에 최초로 악의 씨를 뿌리기 시작한 루스벨도 자기를 높여서 하나님과 동등해지고자 하는 명예를 탐하는 교만심 때문에 타락한 것이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2-14). 심지어는, 인류의 조상 하와도,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창 3:5) 된다는 말, 즉 하나님과 동등하게 된다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범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 16:18)기 때문에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잠 16:5)신다. 범 교단적인 큰 행사를 하게 되면, 일일이 살펴보기에도 곤란할 정도로 수많은 임원들의 이름들이 광고지면을 가득 채운다. 각각 무슨 역할들을 하는지 잘 모를 일이다. 목사들의 명함에는 별로 의미도 없고 뚜렷한 역할도 없는 직함들이 즐비하다. 더욱이 영어를 거의 못하는 미국산 박사학위 소지자가 왜 그렇게도 많은지 모르겠다. 총회장 선거나 단체장 선거 때가 되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들이 정상적인 일처럼 벌어진다. 중상모략, 흑색선전, 금품살포 등 세상의 눈으로 보아도 수치스러운 일들이 공개적으로 일어난다. 오늘 우리 목회자들의 모습은 목자장이신 예수님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상이하고 이질적이다.목회자의 모델–목자장 예수 그리스도루스벨의 교만심의 결과로 초래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인류에게 용서와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은 아주 가난하셨고 겸손하셨고 온전히 자신을 희생하셨다. 원래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분은 사탄과는 반대되는 정신, 곧 “하나님과 동등됨”(빌 2:6)을 포기하시고 겸손한 모습으로 마구간에 태어나셔서, 한평생 남을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하시다가 마침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빌 2:8)하심으로 철저한 희생적 삶을 사셨다. 바로 이 모습이 오늘날 교회를 지도하고 성도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목사들이 본 받아야 할 모델이다. 이 땅에서 정직한 양심을 가지고 교회를 목양하는 모든 목사들은 날마다 목자장이시며 우리의 모델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며 그분을 닮기 위해 간절한 심령으로 기도하며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한다. 그분은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으셨고 가난하셨는데, 나는 어떠한가? 그분은 참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겸손하셨는데, 지금 나의 모습을 어떠한가? 그분은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의 유익과 행복을 위하여 헌신하셨는데, 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품고 있으며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 한국교회의 부흥과 개혁은 목회자의 심령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2-23
  • ‘사람’과 ‘사랑’
    사람을 말한다면 생각과 말을 하고 기구를 만들어 쓰며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이라 하며 사람의 몸에서 뻗어 나온 두 쌍의 다리 중 한 쌍의 다리를 사용해 허리를 꼿꼿이 펴고 걷는 직립 보행하는 동물이라 하기도 한다. 본래 사람은 어느 한 곳에서 태어나 일정한 품격이나 자격을 갖추며 사람을 기르며 사람이 되게 하고 사람의 됨됨이나 그 성질이 사람으로서 해야 할 노릇으로 삶의 가치로 사랑을 맺으며 사랑 노릇을 하는 사람다운 사람을 일컫는다. 원래 '사람'과 '사랑'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서로 말이 같지만 이 관계는 서로 미묘하고도 확실하게 다름을 알게 한다. 그 차이는 느낌의 변화가 있다. 예컨대 '사람'과 '사랑'이라는 말을 발음하면 그 들리는 의미는 그 진동이 전달된 뇌와 심장, 그리고 우리의 의식(이성), 그리고 마음은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를 두고 인식하게 된다. 즉 '사랑'이라는 발음을 마지막에 무뚝뚝하게 발음하면 '사람'이라는 '사람'이 되지만, '사람'이라는 발음을 마지막에 부드럽게 발음하면 '사랑'이 된다. 이는 '사람'이 부드러워지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이 되지만 사랑이라는 발음을 무뚝뚝하게 하면 '사람'으로 머무르게 됨을 알게 한다. 이러한 사실은 그 존재의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한다. 이러한 차이는 서로를 다른 하나의 차이가 서로를 다른 하나의 의미로 알게 하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3장1절에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가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하는 말씀을 알게 한다. 그런데 흔히 사람들은 태어났으니 산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죽지 못해 산다고 한다.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그냥 운명일 뿐인가? 태어났으니 살고 죽음이 아직 오지 않았으니 산다는 말인가? 운명적으로 말한다면 그렇게 말 할 수 있다. 이는 생물학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나름대로 이유가 될 수는 있겠지만 실로 생각해 보면 심층적으로 사람에게는 욕심이 있다. 이 인간의 욕심은 본능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욕심을 부인하거나 억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기초적인 작용은 욕심에서 부터 나온다. 그렇다면 사람이 삶을 사는 이유가 이 욕심에서 부터 나온다. 여기에 삶의 본질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보편적 본능과 성서가 가리키는 사람에 대하여 가장 우선적이고 근본적인 요소는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의 한 부분이고 사람의 삶에 존재와 그 지속성을 위해서 사람의 마음 중심에는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한다. 생각 할 수로록 사람은 역시 피조물이며 따라서 의존적이고 우연한 존재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은 인간의 피조적 삶이 그 유한성, 개체성, 그리고 시간성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선한 것임의 근거를 갖게 하는 것이다. 성서는 사람이 유한한 존재이고 태어나고 죽으며 이 삶이 고통과 고난을 수반한다는 성서의 확증은 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을 알게 한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2:7),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창3:19), "사람이 제아무리 영화를 누린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 미련한 짐승과 같다" (시49:12). 신약성서에서도 바울이 이러한 견해를 "로마서 5:12에서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느니라" 한다. 이러한 성서에서 사람의 삶에 의미를 둔 것은 죽음은 피조적 삶에 부여된 하나님의 질서이고 죄를 통해서 회개하는 구원을 알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피조적인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가 사람의 구원이 무엇임을 믿음으로 깨닫게 한다. 여기서 사람의 특별한 존엄성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을 알게 하여 피조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존재를 깨우치게 한다. 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는 사람의 독특성의 한 면으로 순종과 불순종,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을 행 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를 알게 한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 또는 하나님과의 약속에 연관된 사람의 책임을 지니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2-22
  • 기독교인의 행복론 - 67
    오늘도 아파트 단지 안을 감도는 이름 모를 새소리에 잠이 깼다. 잠에서 깨기 전 매일 새벽마다 영감을 가져다 주시는 그분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끼며 컴퓨터를 켠다. 오늘도 나는 살아 있으며, 나만의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내가 그분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매일 새벽마다 그분이 영감의 만나를 내려주시는 것 하나만이 아니다. 그분은 나에게 말씀을 주셨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로마서> 8:15-16). 그분은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 나는 한때 성담론을 연구하였다. 그것은 성의 부정적인 면만을 부각시켜 사회적으로 금기시하지 말고 성의 긍정과 부정, 곧 성의 본질을 알아 몸의 말초적인 것을 극복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에 관한 책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거기에는 나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에너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가령 S. 프로이트가 말하는 리비도(Libido)는 성적 욕망 등을 포함한 여러 가지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고, C.G. 융이 말하는 그림자 현상(The Shadow)에는 창작열과 같은 에너지도 있지만 부정적인 에너지도 강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김동인의 「아라삿버들」(<신소설> 1930)을 보아도 그랬다. 김장의네 집에서 머슴 일을 하는 최서방은 마흔두 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도 부지런히 하였고, 솔직하여 김장의의 신임을 얻었다. 최서방은 버들 한 가지를 “어디서 얻어다가 자기 방 앞에 심었”다. 그것이 무럭무럭 자라서 지붕마루를 덮을 만큼 크게 자랐다. 버드나무는 새끼까지 쳤다. 그것을 보고는 김장의가 최서방에게 결혼을 하라는 운을 떼었지만, 최서방은 부끄러워서 차마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최서방은 버드나무가 새끼를 쳤다는 말을 자주 하여 김장의여자를 골라 주기를 은근히 기대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최서방의 성욕은 더욱 부풀어올랐고, 그의 성욕은 동네 처녀들에게 몰래 욕을 보이고 살인을 할 정도로 주체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이웃 동네에까지 그의 광란이 계속 되었다. 그 행위는 신문에까지 오르내렸고, 결국 그는 색마의 행위를 벌이다가 경찰에 덜미를 잡히게 되었다. 서술자는 최서방이 “사형대 위의 이슬로 사라졌”음을 알리면서 이렇게 정리하였다. “그에게 일찍 한 마누라를 주어서 그로 하여금 그런 광포성을 발휘할 기회를 없이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개인에게 나타나는 그림자 현상-The Shadow, 가면적 인격인 퍼소나(Persona) 밑에 감추인 어두운 측면의 심리 현상-을 다스리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끔 신문 기사를 보면 사회적으로 위엄이 있다고 정평이 난 사람이 간통하다가 들켰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하였다. 개인에게 색욕이 아예 안 생길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욕망을 극복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아를 가지고 성본능을 자제한다. 그러나 성적 욕망은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때론 그것이 자아를 뚫고 나와 일을 저지를 때도 있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것을 이겨낼 수 있었다. 곧 음란함 등 어둠의 유혹이 밀려올 때 나를 그 유혹에서 이길 수 있게 해 주신 분이 성령이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로마서> 8:4). 바울이 한 이 말은 나의 뇌리를 때렸다. ‘이거구나’ 하는 깨달음이 나를 환하게 미소짓게 하였다. 그것은 바로 나를 내가 아닌 성령이 인도하시게 하는 믿음이었다. 성령이 나를 이끄시어야 사탄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령이 내 안에서 인도하시니 나의 성적 욕망은 가정의 테두리 안으로 가라앉을 수 있었고, 창작열과 같은 긍정적인 데로 나의 정신적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었다. 성령이 인도하시자 내 안에는 음란함에 관심을 두지 않고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가 자랄 수 있었고, 사물의 긍정적인 면을 보고 문학 단체 활동을 하면서도 기발한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다.성령의 인도하심은 나의 간절한 간구도 있었지만 그분이 나를 찾아오심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분은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여 주셨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하게 하셨다. 그분이 인도하신 행동은 내가 율법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정언에 따라 율법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분이 내 안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나의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고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나의 죽을 몸도 살리셔서 영원으로 나아가게 하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도 아파트 앞에는 전동차가 쏜살같이 지나가고 사람들은 여행 가방을 들고 여행을 간다. 그분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시기를 기원한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2-22
  • 목회는 쉬운 것이다·54
    마치 생수가 터져 나오기 전 나오는 건수를 암반석에서 나오는 물이라고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옛날 가난할 때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한 사람이 양식집에서 돈까스를 먹었다고 자랑을 합니다. 본 메뉴의 고기 튀김이 나오기 전 스프만 먹고 와서 돈까스를 먹었다고 자랑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런 엉터리 같은 신비적인 사이비 듣고, 보고, 말하게 한 허무맹랑한 삶에 속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출 20:23).지금까지 이야기는 우리가 어렵다고 하는 이유를 영화 한 편을 보듯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이유가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십계명을 주신 사실 속에 있지 않은 나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우선 비져서-신을-너를 위하여, 온갖 것을 혼합하여 만드는데 능숙해 있는 현대 교회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온갖 학문과 이론을 인간의 욕구와 갈망을 해갈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사용하여 형통의 신을 만들고 있습니다.하나님은 토단 위에 번제와 화목제가 있는 곳에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토단(土壇)이란 흙 자체입니다. 사람의 것이 가입되지 않은 원래의 자연 그대로의 단입니다. 인간의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도구나 방법이 아닙니다.번제는 희생제물로 제물을 태워서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를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행위에 의한 향기입니다. 죄를 완전히 소멸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만들어진 모든 것, 학문까지 다 내가 그것 때문에 수십 년간 소중히 쌓아놓은 모든 자료들까지 다 불태워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제물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화목제는 친교제입니다. 화목제는 어떤 특별한 의무를 면하는 헌신의 목적과 고통의 때에 약속한 맹세를 이행할 목적으로 그렸던 것입니다(적대감을 제거함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소통하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위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출애굽기 20장 25~26절에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우리가 이해하기 쉽고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글을 쓴 사람처럼 자상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하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함이니라” 이 말을 그냥 주은 돌, 아무렇게나 생긴 돌, 창조하실 때 그 모습 그대로의 자연석을 주어서 하라는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그랬듯이 있는 것 즉 적고 많고가 아니라 생김새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예술적 손끝이 닿은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이 얼마나 편리하고 쉬운 일입니까. 예수님처럼이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정성껏 준비해야 한다는 인간의 최소한의 성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방 신의 방법입니다.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우리의 정성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처음 너를 창조하고 복 주신 그대로입니다(창 1:27-28). 그리고 그래도 찌꺼기가 남아 있을 것 같아 ‘정으로 쪼아서 다듬은 돌로 할 때는 부정한 것’이라고 했습니다.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곧 부정한 일에 능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아무 관계 없는 이교도의 신당을 짓는데 능숙해 있는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조각가의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세상 사람들의 우상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아브라함의 아버지가 우상 장수를 했다는 일을 반복하여 우상을 만들어 기업형으로 생산해 내고 있는 것일 뿐 교회나 목회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그다음 출애굽기 20장 26절에서 쌓아올린 것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너를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저는 이 말씀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짐을 느끼며, 감사했습니다. 어린아이라도 홋치마를 입은 여자가 앞서 계단을 오른다면 그의 하체가 뒤 올라가는 사람의 눈이 보이게 됩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2-22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31
    3부 이제는 교회개혁과 신앙개혁이다31. 한국개신교 여전히 ‘오직 성경’인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나면서 한국 개신교회가 진지하게 자문자답 해 보아야 할 명제가 있다. “한국개신교 여전히 ‘오직 성경’인가?.” 종교개혁은 성경의 본질로부터 너무나 멀리 떠나버린 타락한 기독교(천주교)에 대한 저항(프로테스탄트, Protestant)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명분은 언제나 ‘오직 성경’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회의 정신은 ‘오직 성경’이 아니라는 증거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그 가장 현저한 증거 중의 하나가, 하나의 성경을 두고 2000개 이상의 수많은 개신교 교파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다른 하나님오래전 어느 개신교회 남자 안수집사 한 분이, 필자가 강의한 성경연구 테이프를 듣게 되었다. 테이프의 분량이 24개 정도 되는 꽤 길게 이어진 강의였다. 한 20개 정도의 강의를 들은 다음, 필자와는 생면부지(生面不知)인 그분으로부터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연락이 와서 어느 날 상면하여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분이 이런 말을 하였는데 그것이 오랫동안 나에게 여운으로 남아 있다. “목사님의 강의를 듣기 전에 제가 알고 있던 하나님과 목사님의 강의를 들은 후에 깨닫게 된 하나님이 서로 다르네요.” 그분이 그 동안 다니던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인식하게 된 하나님과 필자의 강의를 듣고 새롭게 깨달은 하나님이 서로 다르다면, 어느 것이 옳고 그르건 상관없이, 두 가르침 중의 어느 하나는 성경에서 말하는 참 하나님이 아닌, 다소간 왜곡된 하나님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물론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아마도 지금 개신교 안에는 이러한 현상이 수도 없이 발생하고 있을 것이다. 목사가 성경의 말씀 중에서 어떤 면을 강조하고 확대하여 설교하고 가르치느냐에 따라서, 그 말씀을 듣는 청중이 배우고 깨닫는 하나님이 서로 다르다면, 청중의 입장에서는 매우 심각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 15:14)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러한 상황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다. 어떤 목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자신이 잘 못 깨달은 진리와 하나님을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성도들은 분별력이 없어서 그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비극이다. 목사가 잘 못 깨달은 진리를 설교한다면 그것은 오류의 독소를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말씀’이다예수를 심문하던 빌라도가 예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 예수께서는 이미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리고 그 ‘진리’는 곧 “아버지의 말씀”(요 17:17)이라고 하셨다. 사도 요한은, 바로 그 ‘말씀’이 모양을 가지고 세상에 나타난바 되었는데, 그가 곧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설명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 14). 여기에서 ‘말씀’이 그리스도이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명백하다. 그러니까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 곧 그분의 생각과 품성과 뜻이 형체가 되어 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가 곧 하나님이시고, 예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분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습이 하나님의 품성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5:39)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에 대하여도 잘 모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를 가르치거나 예수를 믿는다면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진리’이신 예수를 제대로 알고 믿으려면 성경을 깊이 연구해야 한다.한국교회 다시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성경의 오묘한 모든 말씀을 100% 정확하게 이해하기란 사실 불가능하다. 이미 이해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던 말씀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경의 다른 빛들이 더 밝게 비춰지면 새로운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의 본래의 의미, 그 진의(眞義)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연구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탈을 벗고 편견 없이 성령의 지도하심을 따라서 정직한 양심으로 성경을 연구하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올바른 깨달음을 주실 것이다.이러한 일을 시작하려면, 일단 목회자가 성경에 기록된 올바른 원칙과 가르침을 따라서 설교하고 성도들을 인도하고자 하는 양심의 소리가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목사의 가르침만 의존하지 말고 자신이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면서 목사의 설교를 들을 때 진위(眞僞)와 옥석(玉石)을 가려낼 수 있는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성도들이 성경을 깊이 연구하다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으면 목사에게 질문도 하고 말씀의 참뜻을 이해하려는 열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목사는, 성경 본문과 관련하여 평신도가 질문을 가져오면, 성심을 다하여 가르쳐 주고 본인도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 나오면, 겸손한 태도로 연구해서 가르쳐 주겠다고 대답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어떤 신실한 교인이 성경을 공부하다가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에게 질문을 했다. 대학 교수인 이 평신도는 목사에게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듣게 되었다. “목사가 설교하고 가르쳐주면 그대로 받고 믿으면 되지, 성경을 뭐 그렇게 깊이 알려고 하십니까?”. 이런 대답은 종교암흑시대에 신부들이 하던 대답이다. 목회자는 ‘오직 성경’ 대로 신앙을 하기 위해 탄생한 개신교회의 지도자들이다. 그렇다면 평신도가 성경을 정확하게 자세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목사에게 질문을 하면 그것은 반가운 일이고 고무적인 현상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신학대학 교육의 문제개신교의 근본정신 ‘오직 성경’이라는 대명제에 대하여 가장 먼저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곳은 신학대학이다. 요즘 신학대학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본문을 깊이 이해하고 성경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여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하시는 말씀의 참 뜻을 깨닫고 가르치는 일보다, 성경을 기초로 만들어진 ‘신학’이라는 학문을 더 많이 가르치고 있다. 결과적으로 신학과를 졸업하는 목회자 후보생들은 현대신학의 사조나 신학자들의 다양한 이론은 많이 알고 있으나, 정작 그들이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할 성경의 내용에 대해서는 매우 피상적이고 부분적인 지식만 습득하여 교회의 목회를 시작한다. 이러한 구조적인 모순과 결함 때문에 목회자는 저마다 ‘자기 신학’과 ‘자기 학문’을 가지고 교회를 지도하면서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 ‘자기 교회’를 만들고 있다. 그래서 요즘 교인들은 성경 지식이 매우 박약하거나 왜곡된 신앙의 틀에 갇혀서, 진리와 오류에 대한 분별력이 없다. 그래서 소위 이단이라고 하는 교파에서 성경을 논리적으로 그럴듯하게 가르치면 수많은 기성교인들이 그리고 쏠려 넘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단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막는 일이나 일단 넘어간 교인들을 끌어내기 위하여 어떤 논리를 만들어내는 일보다, 교회에서 평상시에 성경을 제대로 정확하게 논리적으로 잘 가르쳐서, 어떤 교리적 공략이 있을지라도 흔들림이 없는 교인들을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까?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2-12
  • 하나님의 형상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그리스도교의 통찰은 인간의 죄와 고통이라는 실재적이고 현상적인 신학적 주제들로 알게 한다 .예컨대 인간들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인간의 삶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섭리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은 무엇이고 어떻게 다가오는지 그리고 그 죽음과 종말을 인식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또한 이는 어떤 상태인지에 대한 물음들로 발전한다.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빚어내셨음을 감사하고 존재의 고통과 환희 그리고 무자각 속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인간에게 창조주의 형상을 내어주심은 인간을 포기(파괴)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의지이고, 끊임없이 삶에 희망을 주시는 존재로 거듭나게 하심이라 믿는 것이다. 생명 중에 가장 완벽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래서 어느 인간도 흉내 낼 수 없는 형상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인간 예수 그리스도. 그의 인간의 삶은 그래서 가장 고통스러운 인간의 길이었음을 성서는 말하고 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인간 때문에 완성되지 못하고 지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 과정 속에 인간으로서 가장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은 끊임없이 인간에게 요청하고 있다. 인간의 죄와 악으로 점철되어진 피조세계의 신음소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매개로 유한자 인간과 무한자 하나님이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통해 감각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피조세계의 신음소리에 가장 민감했던 인간 그리스도의 삶은 고난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인간은 제 십자가를 지고 그 고난에 동참해야 하는 것이며,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음의 사명이 아닌가 싶다.이러한 현상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컴퓨터를 이용하는 형상인식에는 문자의 특징을 형상화해두고 손으로 쓰거나 인쇄된 문자를 읽어 이것과 비교하여 어떤 글자인가를 판별한다. 마찬가지로 성문(聲紋)을 형상화하면 음성을 인식할 수 있고 지문을 형상화하면 범죄수사에 유용하게 이용된다고 한다. 이 분야에서 가장 일찍 실용화된 것은 손으로 쓴 숫자를 읽는 우편번호 자동판별기이다. 또 활자로 된 글과 또박또박 쓴 필기체의 형상인식은 이미 실용화 단계로 들어섰다. 이미 시판된 컴퓨터 모니터 중에는 화면에 전자 펜으로 글을 쓰면 내장된 글자인식 장치가 글을 판별하여 건반으로 타자한 것처럼 기억 장치에 입력할 수 있다. 한글의 경우도 획마다 또박또박 쓰는 경우에는 90%의 인식률을 가진 한글필기인식 방식을 이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인공지능연구센터에서 개발했다고 한다. 또한 인간의 음성은 변화하는 가청진동수의 형상으로 나타낼 수 있어 음성인식 방식은 이것을 컴퓨터에 내장된 음질과 낱말의 소리의 형상과 비교 판별하여 인식하게 된다고 한다. 음성인식 방식은 우선 전화번호 안내에 이용될 것이며, 다음 단계는 인간의 구술(口述)을 컴퓨터 문장으로 옮기는 받아쓰기에 이용된다는 것이다. 과학 기술의 능숙한 기능은 이미 근래 들어 형상인식은 하나의 시스템으로 구축되어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이고 있다.‘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자기 초월의 능력을 가리킨데 대해서 최초의 신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이다. 그는 인간의 능력은 하나님을 가리킬 뿐 하나님을 직접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한다. 이는 인간은 자기 초월의 힘으로서의 그 정신은 사고의 능력으로서의 이성(logos)을 배제하지 않는 것을 의미함에 유의 한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하게 하는 것은 로고스(logos)가 하나님의 형상을 의미한다고 할 때 이것은 본래 단순히 합리주의적인 이성에 국한하기보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말한 우주적 이성, 보편적 이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이 우주적 이성에 근거한 데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칼 빈의 “그리스도교의 강요”에 의하면 칼빈은 “영혼의 이성” 속에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인간의 자기 초월성과 함께 의지의 자기결정성을 포함시킨다는 점에 유의한다. 또한 여기에 루터는 그의 “창세기 주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영혼, 기억, 정신, 지성, 그리고 ‘의지의 힘 이상의 것’이라 말하고 있음에 유의하기 바란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오늘의 인간은 타락 이전의 아담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있으며 여기에 신학적인 논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사실로 인정하는 귀결로 삼아야 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8-02-09
  • 최경수 장로
    한 달에 절반 정도는 각종모임 참석하며 지인들과 친교 시간 가져 최경수 장로(84세, 예장백석 삼일교회)는 매일 아침 4키로미터 정도를 걷기운동을 하고 있으며, 하루 세끼 식사를 거르지 않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 달에 절반 정도는 각종 모임에 참석하여 친교의 시간을 가지면서 여러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고 했다. 최 장로는 삼일교회 설립 멤버로서 교회를 위해 많은 헌신을 해 왔고 장로 장립 50여 년이 되지만 지금도 교회를 항상 염려하면서 기도하고 있다고 한다.최 장로는 한국장로회총연합회 대표회장을 역임하고, 한국원로장로회연합회와 여러 평신도 단체 임원으로 연합활동을 했다. 교단에서는 전국장로회와 전국남전도회 등 여러 단체에서 회장을 역임하여 평신도로서 많은 연합사역에 헌신했기 때문에 모임이 많다고 한다.또한 교단 회장단 모임, 토요성경공부 모임, 서예작가협회 모임은 정기적으로 모이고 있으며, 사단법인 한국우리민족사연구회 회장을 7년간 맡아 오고 있다. 그리고 청담동 자택 부근에서 ‘독거노인’을 돌보는 봉사활동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어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저는 사실은 여러 모임에 다 참석할 수는 없고, 지난날 맡았던 단체와 교단, 그리고 정기모임에 참서하려니 은퇴하고도 늘 이렇게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있지요. 그것도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되니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최 장로는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동구여자상업고등학교 수학 교사로 발령을 받아 5년 정도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사직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좀 후회가 되는 것은 교사로 은퇴했으면 교장도 맡았겠고, 연금을 받아 편히 살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합니다.”라며 후회스럽다는 말도 한다. 그 후에는 유치원을 경영하고 사업도 했다.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으나 “지금까지 교단과 연합사역에 참여하여 일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께서 물질을 베풀어 주셨지요.”라며 자족한 마음을 표한다.교단에서는 절친한 장종현 박사를 적극 도와 교단 임원으로 활동했고, 평신도국장도 역임했다. 그러나 최 장로가 교단을 섬기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대신교단과 통합하는 과정이 매우 가슴 아프고 힘들었다고 한다. “저는 우리교단이 정체성을 바로 지키면서 발전해 나가기를 바랐기 때문에 통합을 반대했지요.”최 장로는 한국장로회총연합회 대표회장을 맡아서는 잘못된 관행으로 흘러온 연합회 운영을 바로잡기 위해 오해와 비난을 받으면서도 큰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면 증경회장들의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인사와 사업을 원칙대로 바로 잡고, 총무 일변도의 사업추진을 바꾸고 여러 임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단체로 거듭나는 일에 소신을 가지고 앞장서왔던 것이 가장 보람 있었다고 한다. “저는요 한국원로장로회연합회에 참여하여 원칙과 공평한 행정을 강조하면서 체질개선을 하는데 바른 소리를 많이 하여 어쩌면 미움을 많이 샀지요.”최 장로의 신앙철학은 “하나님 앞에서 즐겁고 감사하면서 살자! 이해하고, 배려하고, 베풀면서 사는 것”이라며 건강이 허락 되는 대로 남은 생을 작은 정성이지만 베풀면서 살겠다고 다짐한다.최 장로는 최근 한국교회는 너무 편견이 심하고 개인주의로 치우쳐 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며 성경 말씀이 가르쳐 주는 대로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는 언행일치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최 장로는 부인 이영순 권사(79세)와의 사이에 1남 3녀를 둔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늙어서도 부부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돈이나 세상의 어떤 명예보다 더 큰 행복이지요”라면서 가정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자녀들에게 늘 “너희는 선한 행실에 씨를 뿌려라”는 성경적인 교훈을 했다고 한다. 즐겨 부르는 찬송가는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8-02-09
  • 기독교인의 행복론 - 66
    ‘백짓장 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발만 나서면 사물의 본질에 다다를 수 있는데, 조금 더 나아가면 꿈을 이룰 수 있는데, 그렇지 못했을 때 아쉬움을 남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 발은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이룩한 성과입니다. <300>이라는 영화의 원작자이기도 한 세계적인 소설가 스티븐 프레스필드(Steven Pressfield)는 한때 백짓장을 넘지 못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청년 시절에 소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글 쓰는 재주가 있었던 그는 결혼하면서 아내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소설만 완성되면 좋은 집에 살며 좋은 차를 타고 잘 살게 될 거야.” 그는 꾸준히 글을 쓰며 작품이 완성될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5년이 지나도 완성되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지지부진한 상태로 글쓰기에 계속 매달리자, 가능성 없는 그의 꿈에 지친 아내는 집을 떠났습니다. 아내가 떠난 그의 상황은 더욱 고달팠습니다. 가난으로 더 이상 살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집에는 낡은 타자기 한 대와 봉고차, 고양이 한 마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좋은 소설을 창작하고야 말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낡은 타자기 한 대와 고양이를 싣고 길을 떠났습니다. 소설을 완성하기 위한 장소를 찾으며 여섯 달 동안 길 위에서의 생활을 계속하다가 캘리포니아의 조그만 마을에 있는 레스토랑에 취직하여 웨이터로 일하였습니다. 그는 웨이터로 일하면서도 꾸준히 소설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걸림돌이 하나 있었습니다. 소설을 마무리해야 할 시점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글의 마지막 장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그 걸림돌이 무엇인가를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소설가의 자질이 있는가를 자문해 보고 소설의 결말을 짓지 못하는 이유를 분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소설을 완성하겠다는 욕망이 강할수록 이를 저지하려는 걸림돌도 강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걸림돌을 넘어서려는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그는 그 걸림돌 가운데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조감, 작품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 등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 걸림돌을 이겨냈을 때 그의 소설은 드디어 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도 작가이기에 이와 같은 경험을 숱하게 겪었습니다. “글을 써서 돈이 나와, 밥이 나와?”, “글 써 가지고 돈 좀 벌어와 봐.”, “허무맹랑한 짓 하는 거 아니야?” 등등등. 남자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잔소리를 수없이 들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지인들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 글을 쓸 수도 있잖아?” 하며 내가 내가 글 쓰겠다며 명퇴를 선택한 것에 우려를 표시한 이도 있었습니다. 날마다 사색을 하며 글쓰기에 매달렸지만, 뚜렷한 성과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대했던 책이 팔리지 않았고, 문예지에서 보내 주는 원고료도 신통치 않았습니다. 문예지 기획자들은 나의 책을 출판할 수 없다는 답신만 보내왔습니다. 나의 작가로서의 존재감도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책도 안 팔리는 무명 작가, 문단에서 알아 주지 않는 미미한 작가로 취급될 수도 있었습니다. ‘내가 꼭 이 길을 걸어야 되나?’ 하는 회의감도 들었습니다. 남들처럼 여행이나 다니며 편안히 지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저 지인들 만나 가벼운 대화나 나누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편히 지낼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습니다. 35년을 별러 온 작가의 꿈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새벽마다 일어나서 노트 위에 ‘내가 작가 맞아?’ 하는 질문을 수없이 되뇌었습니다. 나는 작가가 그 누구도 알아 주지 않는 고독과 친구가 되어 살아가는 직업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 혼자만이라도 ‘작가’라는 자부심이 없다면 나는 별 볼 일 없는 백수에 불과할 것입니다. 나는 이 길이 주님이 계획하신 일인가를 수없이 물어 보았습니다. 작심하며 다니엘 세이레 새벽 기도회에도 참석하였고, 주님께 작가로서의 진정성을 갖게 해 달라고 수없이 기도하였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작가로 인정해 주는 주님을 만나기를 고대하였습니다. 올해에도 봄이 왔고, 벚꽃과 진달래가 진 다음 영산홍이 피었습니다. 가끔은 까치가 나뭇가지 사이로 날았습니다. 겨우내 헐벗었던 나무에는 푸른 빛이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따뜻한 봄바람과 함께 미진도 하늘을 잔뜩 흐려 놓았습니다. 여전히 전동차는 철길 위를 지나갔고, 아파트 단지 앞에는 정해진 노선 버스가 지나갔습니다. 주일에는 교회에서 찬양을 드렸고 예배도 보았습니다. 같은 선교 회원들과 차를 마시며 일상에 관한 얘기도 주고받았습니다. 일상은 늘 똑같은 방식으로 하루를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변화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나를 작가로 인정해 주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는 여전히 독자를 감동시키는 글을 쓸 것이고, 거기에 그분이 동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나는 그분과 함께 독자를 감동시키는 글을 쓸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함께 하시는 동안 나는 열심히 글을 쓸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분이 인정하는 온전한 작가가 될 것입니다.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8-02-09
  • 목회는 쉬운 것이다·53
    단, 한 가지 질문을 명상하라.나는 누구인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을 때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가장 쉬운 문제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장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입니다. 우리 각 개인 자신의 위대한 창조주와 하나이며 완벽하고 온전한 영적 존재라는 것입니다.예수님의 습관은 습관에 의한 습관이 아니라 본성에 의한 반응인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무엇이냐 곧 예수님과의 진정한 관계가 무엇이냐에 따라 나타나는 반응이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목회인 것입니다.내면 깊숙한 곳에 자기 자신이 위대한 창조주와 하나이며, 완벽하고 온전한 영적 존재라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의 쫓기는 스케쥴과 열심에서 자유 할 수 있고, 어려움에서 평화로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맨발입니다. 모세의 소명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인생 말기인 80세가 되는 해 호렙산에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난 여호와로부터 민족 해방의 사명을 받습니다. 그 장면이 출애굽기 3장 5절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하지 말라. 너희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우리가 너무 잘 아는 내용이고, 자주 인용하는 사건입니다. 우리 백석학원이 1976년 야간생 30명을 모집하고 처음 예배 때 설교했던 본문입니다.우리가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맡기실 때 꼭 이 과정을 거쳐야 하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하나님에게 가까이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입니다. 막무가내로 어른에게 엉겨 붙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지만, 어른이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릎에 앉고 수염을 만지는 데까지는 참으실 수 있지만, 상투를 잡아당긴다면 참지 못하는 분노가 인자한 할아버지가 돌변하여 매를 드는 것처럼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땅이기 때문이며 거룩한 것이 거룩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것입니다. 맨발입니다. 발바닥에 다른 중간 매개체가 없는 맨살 그대로입니다. 나의 편리함을 위해 만들어진 모든 장치 모두를 망가뜨린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 천지의 주제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의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 17:24~25).“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라”(슥 12:1).“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 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의 손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이요 어린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이요 드리는 예물은 돼지피와 다름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양함이요”(사 66:1).“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 상이니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행 7:46~49).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돌비석에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맨발로 살아갈 수 있는 아주 쉬운 법칙으로 계명의 10가지 중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네 계명이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여섯 계명을 주셨는데, 하나님은 누구나 이행할 수 있는 쉽고 간편한 이야기로 누구든지 이행할 수 있기에 맨발로 어린아이처럼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어려운 관문으로 험하고 좁은 문으로 설명하는 이유가 제사장이라고 착각하는 뚜쟁이들이요 신자라는 사람들입니다.신자란 우상 신을 믿는 사람으로 이방 종교의 방법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되신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방들이 만들어 놓은 섬겨야 하고 섬김을 받아야 하는 절대적인 우상의 개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신앙의 핵심은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런 확신도 없는 이유입니다. 만일 열심을 다하는 사람들의 공력에서 나타나는 응답이라고 하여 우리가 진액을 드려진 공적을 이방 신들이 받아들여서 죽음과 사망과 고통으로 이끌리게 하는 말초신경이 흥분하게 하는 마약과 같은 습관적인 행위입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8-02-09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30
    30. 개신교의 타락과 재림신앙의 부활영국의 청교도들에 의해서 형성된 미국의 개신교가 타락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초기 기독교가 로마 가톨릭으로 변질된 배경과 흡사하다. 순수했던 기독교의 변질은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의 계략으로 시작되었다. 콘스탄틴은 로마 제국 내에 공존하고 있는 두 개의 거대한 종교 집단, 즉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교와 태양신을 섬기는 미트라교를 통합하여 다스리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마침내 서기 313년에 콘스탄틴 황제는 자신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공포한 다음, 거의 250년 이상 계속되던 기독교 박해를 중단하라는 명령(밀란칙령)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군복무 면제, 세금 감면 등 많은 특혜를 제공하였고 기독교를 우호적으로 대하기 시작하였다. 미트라교를 신봉하던 이교의 사제들이 기독교의 성직자들에게 부여되는 특혜를 얻기 위하여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했고, 이와 같은 분위기에 편승하여 많은 이교도들이 기독교로 몰려들었다. 얼마의 세월이 흐른 뒤에는, 개종한 이교도들의 세력이 원래의 기독교의 힘보다 더 커졌다. 이리하여 교회 안에는 이교도들의 관습과 제도와 교리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었고, 급기야 교회는 기독교의 얼굴을 가진 이교로 변질되었다. 이렇게 정치적 세력이 종교에 개입이 되고 순수한 기독교와 우상을 섬기는 이교도가 혼합되면서 교회의 타락과 부패가 극도에 달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로마교회가 지배하는 ‘종교암흑시대’라는 쓰디 쓴 열매를 먹게 된 것이다. 미국 개신교의 타락1620년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주해 온 이후, ‘기회의 땅’ 미국에 대한 소문이 유럽에 퍼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신대륙 미국으로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그들이 미국에 도착하였을 때는 대체적으로 개신교가 기득권을 가지고 세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정치적 권한까지도 교회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신교인이 아니면 국가 공무원이 되거나 어떤 확고한 지위와 신분을 갖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분위기였다. 다시 말해서 초기 미국 역사에서 어떤 목표를 이루고 생존하려면 개신교인으로 개종을 해야 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뚜렷한 신앙적 체험이나 영적 회심이 없이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개신교인이 되는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결과는 뻔한 것이다.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이다. 초기 교회 역사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콘스탄틴 황제 이후에 진행되었던 교회 타락의 역사가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명목상 교인들의 수가 증가하고 정치적 세력이 교회와 결합되면 타락과 부패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의 공식이고, 인류 역사를 통해서 일어난 반복된 현상이기도 하다.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교회가 타락을 하면서 범하는 가장 큰 죄악 중의 하나는 성경을 덮어두고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과 신앙의 원칙들이 기록된 성경이 펼쳐지면 어두움에 빛이 비취는 것과 같아서 온갖 비리와 미신과 부패가 드러나기 때문에, 타락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집요하게 추구하는 것은 성경을 파묻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이끌어간 정신은 ‘오직 성경’이었다. 종교개혁의 불꽃을 지속적으로 타오르게 한 동력은 여러 종교개혁자들이 자국어로 번역해 놓은 성경이었다. 1798년 교황 비오 6세가 프랑스에 포로로 잡혀가서 옥사(獄死)하므로 교황권이 몰락한 이후, 성경은 날개를 달고 세상에 전파되었다. 1804년에 대영성서공회가 발족되었고, 1816년에 미국성서공회가 설립되었다. 때마침 인쇄술이 급속히 발달하여 성경은 대량으로 생산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펼쳐들고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재림신앙의 부활신약성경을 펼치면 예수 재림에 관련된 성경절이 300회 이상 나온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 시대에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믿었다. 그러니까 구약이 예수 초림에 대한 약속과 성취라면, 신약은 예수 재림에 대한 약속과 부활의 소망을 전하고 있다. 초림의 목적이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는 것이라면, 재림의 목적은 죄로부터 구원받은 성도들을 이 죄악세상에서 구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흐름이기도 하다. 그런데, 성경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중세기 종교암흑시대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재림 신앙은 퇴색되었고 재림과 부활의 소망은 자취를 감추었다. 물론, 개혁신앙을 주장하다가 순교한 사람들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목숨을 포기하였겠지만, 대체적으로 일반 평신도들에게 재림과 부활의 신앙은 그들의 현실과 동떨어진 교리였다. 암흑시대가 지나고 성경이 펼쳐지면서 나타난 뚜렷한 현상 중의 하나는, 재림에 대한 관심이 일깨워진 것이다. 요셉 볼프의 재림운동-히브리인의 혈통을 이어받은 독일인이었던 요셉 볼프는 1821년부터 시작하여 약 24년간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선포하였다. 그는 아프리카의 이집트와 아비시니아, 아시아의 팔레스틴, 시리아, 페르샤, 보카라, 인도 등지에서 온갖 핍박과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면서 재림의 소식을 전했다. 나중에는 북미 합중국까지 건너가서 재림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볼프는 유대인들에게도, 배화교를 숭상하는 터키인들에게도, 힌두교인들에게도, 여러 종족과 민족들에게 재림의 소식을 전파하였다. 영국의 재림운동-영국에서는 1826년 경부터 재림 메시지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국교회 성직자 약 700명이 그 당시에 재림과 관련된 천국복음을 선포하였다고 전해진다. 미국에서 건너온 재림에 관한 책자들이 널리 배포되었고, 영국에서도 재림에 관한 서적과 잡지들이 발행되었다. 1842년에는 미국에서 재림신앙을 받아들인 로버트 윈터라는 영국인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재림과 심판에 관한 메시지를 전하였다. 18세기말 남미에서 예수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스페인 사람 라쿤자가 저술한 재림신앙 서적이 1825년 영국에서 영어로 번역되어 배포되었다. 프랑스와 스위스의 재림운동-학생시절 합리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던 가우센은, 성경의 예언을 연구하는 중에 주님의 재림이 절박하였음을 깨닫고 제네바에서 재림신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는 특별히 어린 아이들에게 재림에 대하여 가르쳤고 이것이 불씨가 되어 아이들의 부모에게까지 재림의 소식을 전파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그의 예언 해석과 재림신앙을 프랑스어로 저술하여 널리 전파하여 스위스와 프랑스에 재림의 불씨를 지폈다. 스칸디나비아의 재림운동-재림의 소식은 스칸디나비아까지 퍼져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재림신앙을 받아들이고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나 국교회의 성직자들은 이 운동을 반대하였고 재림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을 투옥시키기도 했다. 그러자 국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어린 아이들이 일어나서 공중 앞에서 재림의 소식을 전파하는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증거였다. 북미의 윌리암 밀러의 재림운동-19세기 전반부에 북미에서 일어났던 윌리암 밀러(침례교회 교인)의 재림운동은 매우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5만~10만 명에 이르는 신도들이 재림운동에 가담하였다. 그가 재림의 날짜를 정하는 오류를 범하기는 하였으나, 북미 지역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재림에 대한 관심을 일깨운 것은 특이할만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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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8-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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