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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계 통합이 불가한 진짜 이유/심 영 식 장로
    새해부터 한국교회에 섣부른 기대를 갖게 했던 한기총과 한교연의 통합 논의가 결국 예상대로 실패 수순에 접어들었다. 양 단체가 지난 1월 말에 발표한 통합 합의서에 호언장담한 2월 통합은 이미 물 건너간지 오래고, 이후 간간히 거론되던 3월 통합도 무시된 채 바통을 4월로 넘겼다. 하지만 ‘변승우’라는 문제적 인물의 등장은 이마저도 힘들게 하고 있다. 한교연 실무자에게서 ‘통합 불가’라는 공식적 입장이 나왔고, 변 목사를 문제 삼는 한교연의 행태에 대해 한기총 대표회장 전광훈 목사 역시 통합을 하지 않겠다는 발언이 나왔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에서 거론되는 ‘통합’이란 단어의 무게가 심히 가볍다. 분열과 다툼으로 얼룩진 그릇된 과거 위에 한국교회의 미래를 담보할 유일한 대안일진대, 어느 순간 통합은 아무 시장에서나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잡다한 물건보다도 못한 느낌이다. 마치 그 책임에 대한 무게는 전혀 없는 듯 아무나 시장에 들어가 “아저씨 통합 주세요. 없으면 말구요”하며 한국교회를 떠보고 있는 듯 하다. 지금 한국교회에 있어 통합은 반드시 이뤄내야 할 숙제이자 사명으로, 결코 우리가 잊어서도, 외면해서는 안 될 가장 중대한 명제이지만, 그렇다고 진심도, 의지도, 책임도 갖추지 않고, 수시로 언급할 만큼 가벼운 단어가 아니다. 통합은 지금 이 순간 한국교회에 가장 중대하고 무거운 약속이다. 하지만 한기총과 한교연의 분열 이후 한국교회는 지금껏 10번 남짓의 통합 합의서를 남발해 왔다. 심지어 한교연과 한교총은 통합총회까지 열어 놓고도 막상 연말에 가서는 이를 뒤집기도 했다. 반복되는 통합선포와 취소 속에 한국교회의 통합은 그 본질을 잃었다. 아니 하나됨의 본질은 그대로 살아있을진대 분열의 심각성을 망각하며, 통합의 필요성을 더 이상 아무도 절실히 지적하지 않고 있다. 만연된 분열과 반복되는 통합 실패, 그리고 쇼로 전락해 버린 연합단체들의 통합선포, 이 모든 것이 맞물려 한국교회는 그 어느 기독교 역사에서도 본적 없는 저렴한 집단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제는 교계가 저들의 통합 실패에 비난을 주는 것조차 아까워 하는 듯 하다. 애초에 진심이 없는 교계의 통합에 관심을 끈 지 오래고, 이미 결론을 정해놓고 하는 저들의 쇼에 흥미를 잃었다. 분열의 고착화, 수년 전 한국교회가 진정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분열의 고착은 통합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 무엇보다 무겁고 간절했던 통합은 어느새 그 무게를 잃고, 가볍게 공중을 떠돌다 이제는 아예 보이지 않는 하늘로 날아갔다. 우리는 통합의 무게를 다시 찾아야 한다. 통합의 진정성을 찾아 교계가 이루고자 했던 애초의 본질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더 이상 한국교회 통합이 양치기 소년의 심심풀이 거짓말로 반복되어서는 아니된다. 양치기 소년이 주는 가장 무서운 교훈은 반복되는 가짜 속에 진짜마저 가짜가 되게 하는 동네주민들의 의심이다. 지금 한국교회 1000만 성도들은 그동안의 교훈을 바탕으로 종로 5가에 있는 양치기들의 ‘통합 선포’를 더 이상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다. 이미 통합은 또다른 정치적 야합이나 사익 창출의 수단이 된지 오래다. 이익이 없다면 굳이 통합이 절실하지 않다. 반드시 얻는 것이 있어야 하는 반면, 자신이 조금이라도 잃게 된다면 그것은 불의한 통합이라 비난했다. 한국교회를 위하고, 교계의 연합과 화합을 위한다는 궁극적인 대의는 사사로운 욕심 속에 묻혀 버렸다. 지금 한국교회의 한기총과 한교연, 한교총 모두는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하고, 그 어떤 것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 통합이 불가한 진짜 이유다. 하나됨을 위한 통합의 길에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희생이 결코 헛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희생이 가져다 준 통합이라는 거대한 결과는 한국교회의 새로운 100년을 지탱해 줄 마중물이 될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9-03-22
  • 3.1정신과 한국교회/장 헌 일 목사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서울 광화문 일대에선 한국교회 연합기관들이 각각 나뉘어져 주최한 기념행사와 정부가 주관한 기념식은 물론 여러 정치적 이념에 따라 모인 단체들이 광화문 일대를 가득 메웠다.3.1운동의 정신인 자유평등과 자주평화를 이 땅에 계승하고자 종교와 이념을 떠나 온 국민이 하나 되어 연대를 이룬 귀한 역사적 전통을 상실한 채 기독교마저도 연합 정신을 버리고 민족사와 교회사적으로도 중요한 3.1운동 100주년 기념대회를 한국교회가 하나 되지 못해 심히 안타깝다. 3.1운동은 남녀노소, 지역과 계층, 종교와 이념을 초월한 역사 이래 최초의 비폭력 독립운동으로 아시아에서 반 제국 평화 운동을 촉발시켰으며,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분연히 항거하여 민족의 독립정신과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선포하게 되었다. 이러한 3.1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계기가 되었고 대한민국의 헌법전문에 기록된 정신적 토대가 되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자랑스러운 우리 헌법 제1조를 세웠다. 따라서 우리는 3.1운동 정신인 자유평등, 자주·평화 사상을 더욱 발전시켜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거두어야 하며 국내는 물론 해외동포와 3.1운동의 역사와 가치를 나눔으로써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와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적 공감대를 확산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기독교학교가 매각되고 폐쇄되는 오늘 우리의 참혹한 현실 앞에서 기독학교 살리기 운동과 함께 다음세대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3.1운동 정신을 가르쳐야한다. 1919년 당시 전국 823개 기독교학교가 3.1운동의 진원지이자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당시 기독교학교와 학생들이 핍박과 고문에도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선두에선 배경에는 기독교학교의 신앙교육과 민족교육이 있었기 때문이며,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전국에 배포하고 보급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등 3.1운동을 전국으로 확산하는데 기여한 기독교학교의 전국적 조직 때문에 가능했다. 3.1운동이 오늘날 항일무장투쟁이라고만 알고 있는데 사실은 당시 청년들이 주체가 된 국제주의와 비폭력평화주의를 기반으로 한 평화와 인도주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3.1운동은 시작부터 국제적이었으며, 그 시초가 된 신한청년당은 설립자 6명 포함 50명 정도 참여한 청년독립운동단체로 기독청년들을 중심으로 상해에서 창립되었고,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뒤 중국을 방문한 미국 윌슨 대통령 특사 크레인을 통하여 독립청원서를 보냈으며, 1919년 1월에는 김규식을 파견했다.이와 함께 도쿄 유학생 11명이 주축이 되어 678명이 재일본도쿄조선YMCA에서 2.8독립선언을, 기독교가 3.1독립선언을 주도한 것이다. 독립선언서 내용을 보면 미래지향적이며, 진보주의적으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보편적으로 3.1운동을 생각하는 민족주의 반일주의를 넘어 한참 더 나아가 있다. 3.1운동은 일제 탄압에 우리 선조가 항거한 운동이기 때문에 항일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며 독립선언서에 침략주의 동양평화 등의 표현으로 말미암아, 제국주의가 득세하던 세계사에 대한 비판 의식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런 의미에서 3.1운동을 실제로 주도하고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주체가 청년들이며 3.1운동에 참여한 이들 중 투옥된 경우도 20%를 차지 할 정도로 청년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3.1운동 이후 신한청년당은 4월 10일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주동적 역할을 감당 했다.이와 같이 1919년 1년간 이어진 3.1운동 정신에 참여한 청년학생을 포함한 전 국민1천만명(이 참여했으며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1600만 정도였고, 기독교인은 인구의 1.3%인 20만 명 정도인데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에 기독교인이 16인(천도교15인 불교2인)이라는 것은 종교인구 비율이 아니라 교계지도자의 영향력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07년 평양 대 부흥을 통한 양심의 회복과 회개, 신앙적 각성을 통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장했지만, 오늘날 한국교회는 교단 분열, 일부 지도자들의 비리, 일부 교회의 다툼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이제라도 우리는 100년 전 3.1운동 때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보여준 기독교의 연대를 기억하며 민족 복음 통일시대를 열어갈 한국교회 청소년과 청년 다음세대를 양육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교회의 자발적 희생, 공공성과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고 각성하여 깨어 기도하며 교회연합과 일치를 통해 사회정의와 평화를 이 땅에 실천하는 공교회성 회복을 위해 온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9-03-08
  • 제발, 나를 살려주세요!/심 만 섭 목사
    요즘 우리 사회는 소위 ‘낙태죄 폐지’ 문제로 시끌시끌하다. 이것은 지난 2017년 2월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이 제기되면서 시작된 일이다. 이 문제는 그해 5월에 공개변론이 있을 정도로 첨예하였으나 아직까지 결정을 내지 않고 끌어 오고 있는 것을 보면, 그만큼 심각하고 신중해야 할 이유가 되는 듯하다. 그런데 때를 맞추기라도 하듯 지난 14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라는 내용을 발표하였다. 내용은 10,000명의 여성을 조사 대상으로 낙태를 경험한 것을 조사했는데, 임신경험 여성 3,782명 가운데 756명이 낙태를 경험하여 임신한 여성 가운데 약 20%가 낙태를 했다는 것이다. 이를 우리나라의 인공임신중절율에 대입하면 연간 약 5만 건의 낙태가 이뤄지고 있다는 예측이다. 이는 2005년 29.8%포인트로 인한 34만 2,433건, 2010년의 15.8%포인트로 인한 16만 8,738건보다 훨씬 줄어들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여러 가지 사회적 여건이나 낙태를 예방하려는 노력에 의하여 줄어든 것은 희망적이나, 실제적으로는 음성적인 것들까지 포함하면 훨씬 많은 낙태가 시행되고 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 낙태율이 줄고 안 줄고를 떠나서, 고귀한 생명이 엄마의 손에 의하여 죽어간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가운데 진보 정당으로 알려진 정의당에서는 ‘낙태죄 폐지 법안을 발의’할 것이라고 하여, 소수자를 대변한다는 진보 정당이 소수의 생명을 죽이는 것을 합법화로 추진하려는 것에 대한 비판도 일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불법적으로 낙태를 할 경우, 형법 제269조 제1항과 제270조 제1항에 근거하여, 낙태를 한 부녀와 이를 촉탁 받아 낙태케 한 의사를 처벌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형법을 바꾸자는 분위기를 띄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현행법으로 낙태를 허용하는 경우가 있다. ‘모자보건법’ 제14조에 의하면,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를 두고 있는데, 본인이나 배우자가 우생학적이나 유전학적으로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전염병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 또는 준간강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이나 인척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임신이 지속될 수 없는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는 의사와 본인과 배우자 등의 동의하에 중절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조사된 것에 의한, 인공임신중절을 원하는 양상은, 위에 적시한 이유 외에도 경제문제나 자녀계획, 그리고 학업이나 직장 생활 등의 문제로 인공임신중절을 원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여성의 행복추구권이나 자기 결정권이란 그림자에 가려져, 태아의 생명권이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용역조사 결과 발표와 관련하여 성과학연구협회는 성명을 냈다. 그에 의하면, ‘낙태를 합법화하면 낙태를 상업화시키려는 제약회사와 의료산업의 엄청난 홍보작전으로 낙태 광고가 수면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며, 태아 장기 판매 등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질 것’이라고 크게 우려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 36개국 가운데 낙태율이 매우 높은 편이다. 그 가운데 15~44세 사이의 가임 여성을 대상으로 조사한 20개국의 낙태율을 살펴봤을 때, 우리나라의 낙태율은 15.8%로 가장 높게 나타나고 있다. 상황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4일 발표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서, 가임기 여성 10명 중 7명이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답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느 집단이나 사회나 생명을 경시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 아니다. 비록 여성들이 임신하는 수고와 고통을 안고 있고 현실생활이 어렵다고 하여도 낙태를 규제하며 생명경시를 막고 있는 가이드-라인과 같은 법률을 무조건 없애고 보자는 생각보다, 그 해법을 찾는데 우리 사회가 주력해야 한다고 본다. 본래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는 일에는 반드시 사랑과 희생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것을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거부하게 된다면, 현재 우리들이 부여받은 생명은 어떻게 발생한 것인가? 오늘도 수많은 생명들이 이 세상에서 빛도 보지 못한 채, ‘제발, 나를 살려 주세요’라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 연지골
    • 토요시평
    2019-02-22
  • 응급의료 문제와 윤한덕 의사정신-임 영 천 목사
    필자가 우연찮게 그 작품을 읽은 것과 윤 센터장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각종 언론을 통해 갑자기 전해진 것은 거의 같은 시간대였던 것 같다. 여기서 ‘그 직품’이란 김동주 작가가 한 월간 문예지(2019. 1)에 발표한 <해독제>란 이름의 단편소설이고, ‘윤 센터장’은 지난 2월4일 병원에서 돌연 사망한 국립중앙의료원 응급의료센터장이었던 고 윤한덕 의사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해독제>란 작품과 윤 센터장을 필자가 한데 묶어 거론하게 된 것은 소위 ‘응급’ 의료 문제와 관련된 양자(兩者)의 공통인수 때문이었다. 신예작가(2014년 데뷔)인 김동주의 <해독제>란 작품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개되어 있다. 주인공인 한 가난뱅이 ‘소년’이 생계를 위해 뱀을 잡아다 팔려고 산엘 오르곤 했는데, 그날도 그는 값나가는 독사 세 마리를 잡아 양파망에 집어넣고 하산하는 데엔 성공했지만, 잠깐의 실수로 독사에게 발목이 물려 시간이 흘러갈수록 치명적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소년은 보건소에까지 이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아예 해독제가 없었던 보건소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다. 단 보건소의 간호사가 소년을 차에 태워 이웃 병원으로 후송하는 일만은 용케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병원의 과장은 소년이 거기 도착한 뒤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나타나 소년에게 보호자의 전화번호를 대라고 한다. 보호자에게 연락해 빨리 해독제를 사 오라고 부탁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그의 혀가 엄청 부어올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후엔 원장이 응급실에 나타났으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행히 그 병원 간호사가 말 아닌 글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겠다고 판단해 볼펜을 소년에게 건네자 그가 뱀탕집의 전화번호를 메모지에 써 준 것이다. 간호사가 뱀탕집으로 전화를 걸자 그 여주인이 해독제를 약국에서 구입해 쏜살같이 달려와 소년은 결국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소설의 줄거리는 그렇게 간단명료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소위 응급 의료의 문제가 깊숙이 내장되어 있다. 그 소설의 내용에 의하면, 당시 독사(칠점사)에게 물린 응급환자에게 주사해야 할 해독제가 보건소에 없었다고 했다. 이웃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거기에도 응급환자에게 투여할 해독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간호사가 과장에게 “우리 병원엔 비상용 해독제가 없나요?”라고 묻자 과장은 “아직 해독제는 고가야. 우리 병원엔 없어.”라고 답한다. 원장이 나타났을 때 간호사가 “보호자가 없더라도 해독제를 주문해 생명을 구하는 게 어떨까요?”라고 건의하자 원장은 “그런 사사로운 감정으로 병원을 운영한다면 병원은 며칠 못 가 적자로 돌아설 것이오. 지금 신축 병원 공사비로 받는 자금 압박에 머리가 돌 지경이오.”라고 대답한다. 병원은 신축 공사비 문제 같은 것엔 크게 신경을 쓰는 편이지만 응급환자 생명 구하기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치부형 의료농단의 광풍 속에서 히포크라테스의 정신은 저 멀리 휘발해버리고 만 것인가. 여기에 응급 의료 급선무의 문제가 자연히 대두되는 것이다. 국립중앙의료원 센터장 윤한덕 의사가 기울였던 문제가 바로 이 응급 의료 서비스 문제였다. 그는 아주대병원 센터장 이국종 의사와 함께 응급 의료 서비스를 목표로 한 소위 닥터헬기 도입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일(제도)의 성취를 누구보다도 고대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사들이 기피했던 그런 일의 성취를 위해 지나친 열정을 쏟다가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현장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 나이 꽃다운 51세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소설 속의 병원의 과장이나 원장은 독사에 물린 소년 하나쯤 죽어 나가도 괘념할 일이 아니라는 태도이다. 그러나 만일 그 현장에 윤한덕 의사가 있었더라면 사정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설혹 그 병원에 해독제가 없었더라도 그는 당장 그것을 구하기 위해 해독제가 있는 약국으로 쏜살같이 달려갔을 것이 아닌가. 그 소년이 마치 자신의 아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현 정부가 윤한덕 의사를 국가유공자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한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가 하면, LG복지재단이 응급 상황에 처한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애쓰다가 순직한 윤한덕 의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LG 의인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한다. 이 또한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다. 권력형 의료농단이 판을 치고, 축재형(치부형) 의료농단 또한 기승을 부리는 현실 속에서 오로지 히포크라테스 정신 하나만으로 응급환자의 생명 구하기에 온몸을 던지다시피 한 윤한덕 의사에게 그 어떤 말의 예찬이나 칭송이 주어지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을는지….
    • 연지골
    • 토요시평
    2019-02-15
  • 이게 나라냐? 이건 나라냐? 이게 나라구나!-심 만 섭 목사
    우리나라는 대통령 중심제이다. 물론 내각도 있고, 삼권분립이 되어 있다고 하나, 여전히 국민들의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이기에 그만큼 기대와 관심이 크며, 실제적으로도 대통령에게는 엄청난 정무적 힘이 실려 있다. 그래서 국민들은 좋던지, 싫던지 간에 대통령이 국민들의 바람과 기대를 충족해 줄 것을 원한다. 현 대통령이 임기 3년차를 맞는다. 임기도 이미 3분의 1이 지나갔다. 그 시점인 지난 1월 10일 대통령의 신년기자회견이 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냉랭하였다. 그 날과 그 다음날 언론들의 보도와 사설에 보면, ‘의지는 충만한데 결과는 미약하다’는 중론이다. 사실 현 대통령을 지지하던지, 그렇지 않던 간에 국민들의 한결같은 바람은, 대통령이 정치를 잘 해서, 국민들이 행복하고, 국가는 안정이 되는 것을 원한다. 그래서 지지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다는 안도감이 들게 하고, 반대했던 사람들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민들이 기대하는 것들은 여러 가지 통계나 지표로 볼 때, ‘아니올시다’라는 반응들이 늘어나고 있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긍정 평가보다 부정 평가가 앞서는 ‘데드크로스’까지 다다랐고, 현 정부에게서 희망을 기대했던 국민들은 점차로 실망의 경계로 다가가고 있는 중이다. 그 원인은 뭘까? 소통이 제대로 안되고 있다는 지적들이 많다. 현 대통령은 과거 ‘이게 나라냐’며 촛불시위를 하는 현장에 나가서, ‘대통령부터 권위주의적 문화를 청산하고 소통하는 대통령, 공정한 대통령이 되어 나라다운 나라,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여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집권 초기에는 대통령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아왔다. 그러나 지금은 소통하는 모습보다는 ‘변했다’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모습들이 자주 눈에 띤다. 최근의 김 모 행정관 문제와 신 모 사무관의 문제가 불거졌을 때에도, 청와대의 변명과 공격성을 띤 대처 방식이 그랬고, 지난 연말에는 비행기에서 기자간담회를 하면서도 ‘국내 문제는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이 국민들의 귀를 의심케 하였다. 대통령이 소통을 위해서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해야 하는데, 대통령의 ‘혼밥’문제는 자주 거론되는 문제이다. 오죽하면 최근에는 국회의장이 ‘요즘도 혼밥 하십니까?’라고 물었을까? 대통령은 자신을 지지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여당은 물론, 야당 의원들과도 자주 만나, 국회와 소통해야 하며, 여러 사회 계층의 의견을 경청(敬聽)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면,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야당과도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정부 안에서도 내각의 능동적 활동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고, 모든 것이 청와대가 중심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통령은 선출된 ‘대의 권력’을 가지면서, 동시에 집행부의 수장이 된다. 이것은 권력이 되면서 동시에 책무(責務)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한다. 어느 일방으로 기울어지면,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과거 정권들이 비난을 받는 이유도 무게 중심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권력이 청와대로 쏠리다 보면, 집행을 하기는 쉬운지 몰라도, 대의성은 사라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또 한 가지는 인사를 기용함에 있어, 병역 기피자, 부동산 투기자, 세금 탈루자, 위장 전입자, 논문 표절자는 쓰지 않기로 하는 ‘공직 배제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제 정책에서도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를 표방하지만, 이러한 정책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하고, 그 문제점에 대한 대안제시와 순발력 있게 대처하는 방법이 미흡하다는 지적들도 자주 나온다. 이 정부는 일자리위원회/일자리수석/일자리전광판/일자리정부를 표방했지만, 그 실적은 기대치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도 국민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요소이다. 대통령 임기 5년이 올해로 3년차이다. 이제 내년부터는 줄줄이 선거가 있게 된다. 그만큼 국가 전체가 어수선할 수밖에 없다. 올해가 제대로 된 국정수행을 통하여, ‘이게 나라냐?’는 자조와 비탄 속에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으나, 현재 국민들의 평가는 ‘이건 나라냐?’는 비판과 비난이 일고 있는데, 이것을 ‘이게 나라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어떤 조급한 성과를 내려다 혼자 모든 책임을 떠안기 보다는, ‘협치’와 ‘소통’을 근간으로 하고, 국민들의 기본적인 바람인 안정과 안심을 외면하지 않아서, 한 단계 발전된 정치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대통령의 성공이 곧 국민의 성공이 되는 것이 아닌가.
    • 연지골
    • 토요시평
    2019-02-01
  • 양승태 사태와 누적된 사법농단/임 영 천 목사
    마침내 올 것이 오고 말았다는 생각이다. 사법농단의 머리로 지목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검찰 소환 사태 말이다. 그가 검찰에 소환된 것을 뭐 사태라고 표현할 것까지야 있느냐는 물음이 가능하겠지만 충분히 가능한 표현이다. 그가 검찰에 소환되면 먼저 포토라인에 서면 되는 것인데, 구태여 대법원 경내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기변명을 함으로써 최소한 구속만은 면해 보려고 용심하는 모습이 보이지만, 이는 새로운 사태만을 불러들일 공산이 커 보인다. 그를 구속하라는 피켓을 든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가 검찰에 소환되는 당일 하기로 작정해 놓은 기자회견에 맞불을 놓을 기세가 역력해서 가위 양승태 사태라는 표현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새로운 국면이 조성될 공산이 매우 커 보이기 때문이다. 양승태를 구속하라는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은 결코 장난이 아니다. 그들은 소위 대한민국의 사법농단의 오랜 악습으로 인해 그들의 삶의 뿌리가 완전히 거덜나버림으로써 생의 벼랑에 몰려 이러도 저러도 못한 삶을 산 사람들, 또는 그 자제들이나 관련자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그들이 그런 고통의 나날을 보낸 것이 양승태 한 개인의 책임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어찌 보면 그는 다른 전직 대법원장들과 함께 혐의(嫌疑)를 나누어 받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꼭 대법원만이 아닌 넓은 의미의 법조계 인사들 대부분에게 혐의가 있다고 보아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과거에 곪았던 것들이 모두 터져가고 있는 지금, 그가 과거 사법부의 잘못들에 대한 총책임 형식의 문책을 대표적으로 받게 되었다고 해서 크게 억울할 일은 아닐 것 같다. 그를 구속하라고 외치는 이들은 재야 시민단체 회원들이다. 그 단체들을 보니 각양각색이다. ‘양승태 구속’의용단, 국가보안법피해자모임, 사법농단피해자단체연대모임, 민생·사법적폐근절행동, 촛불혁명출판시민위원회, 촛불계승연대천만행동…등 통산 수십 종에 이르는 시민 단체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부르짖는 구호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법적폐 청산하라! 양승태를 구속·엄벌하라! 적폐판사 탄핵하라! 재판소원제 도입하라! 국민 참심원제 도입하라! 그리고 마지막엔 좀 더 긴 이러한 구호도 있다. 김앤장 합동법률사무소 위법과 탈세 행위 등을 철저하게 수사하여 엄벌함은 물론 이를 방지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강구하라! 우리가 2017년 문 정부에 들어와서 봇물같이 터지기 시작한 과거 각종 의혹 사건들의 실상이 사법부 인사들, 아니 법조계 인사들에 의해 날조된 것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 앞에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던 기억이 새롭다. 특히 국가보안과 관련된 사건들이 거의가 날조되어 억울하게 짜 맞추어진 각본에 의해 순진무구하고 무고한 양민(良民)들이 생명을 잃거나 장기 투옥되거나 정신병자로 전락하거나 가정이 풍비박산이 되거나 한 사례들이 너무도 많아서 도대체 이럴 수도 있는가 장탄식해 보지만 무슨 뾰족한 해결책이란 게 따로 있는 것도 아니어서 체념 상태에 빠져버린 경우도 한두 인사들에 국한된 체험이 아니다. 필자는 최근의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소위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에 대해 이런저런 자료들을 뒤지다가 그때의 여덟 피고인들을 만들어내는 데 어떻든 한 역할을 한 당시의 법무장관이 황산덕이란 유명한 법학자였다는 사실 앞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하급심 판결을 그대로 기각함으로써 그들이 사형대에서 처형되도록 최종적으로 확정판결한 곳이 바로 당시의 대법원이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접하고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떤 자료에 의하면 이 사건을 초기에 접한 검사 네 분이 이를 하나의 날조된 사건으로 판단해, 그 기소장에 날인(서명)할 수 없다고 거부했으며, 그들 중 세 사람은 아예 사표를 던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 검사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출세에 혈안이 되어 무죄한 사람이 중죄인이 되든 말든, 또는 그들이 처형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라고 윗선의 지시대로 따르는 일을 다반사로 여기던 때에 그 검사들은 실로 위대한 용단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황 장관이 그들(8인)의 형 집행에 직접 서명(날인)을 했느니 안했느니 하는 후문도 돌리지만, 그런 흉포한 시대에 권력에 연연하여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실은 사표를 내던진 그 젊은 검사들만도 못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이처럼 법조계 인사들의 권력지상주의적 망령이 오늘에 되살아난 것이 양 전 대법원장의 재판거래 형태로 나타났으며, 인혁당 사건 때의 그 결단력 있던 검사들의 혼이 오늘에 되살아나 사법농단의 주역을 의법 척결하는 검찰 직무를 담당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9-01-18
  • 내 백성을 위로하라/이 억 주 목사
    하나님의 백성들뿐만이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은 위로를 받아야 한다. 지나온 역사 속에서 너무도 많은 상처를 받았다. 최근 수년간은 더욱 그렇다. 서로가 서로에게 준 상처도 있을 것이지만 권력자들에게서 받은 상처가 크다. 상처를 준 사람들은 잘 모르겠으나 받은 사람들은 그 아픔이 오래가는 법이다. 백성들의 잘못을 책망하기를 칼같이 하던 선지자 이사야도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이사야40:1)고 선포했다. 그리고 그 위로의 말은 진정성이 있어서 그 백성들의 마음에 닿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예루살렘, 이스라엘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다. 아 대한민국 얼마나 가슴 벅찬 이름인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회를 하나님께 기도 올림으로써 시작된 나라가 아닌가. 그 기도는 아직도 하나님 앞에 유효하다고 믿는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드린 기도,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이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밖에 없는 줄로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이 기도는 지금도 우리가 간구해야 할 내용이다.우리나라는 현재 내우외환(內憂外患)이다. 내적으로는 1945년 해방이후의 갈등과 다를 바가 없다. 당시는 이념적 갈등이었는데, 현재는 이념갈등의 연장과 함께 이익계층간의 갈등 그리고 정치세력의 분열적 갈등, 그리고 정권의 무능과 사나움은 국민들을 더 불안하게 한다.그런가하면 우리나라의 국제정세는 국내 문제보다 더 심각하게 움직이고 있다. 두려운 여감이지만 2019년 아무래도 어떤 두려운 일이 일어날 것 같다고들 말한다. 남, 북한을 두고 펼치는 세계 4대 강국의 손익계산이 이토록 냉정하다는 것을 너무도 늦게 알고 있는 국민들보다 정치인들이 더 무능한 것인지 아니면 적과 한 통속으로 움직이는 것을 국민들만 모르는 것인지.북한의 3대 세습 독재자 김정은의 신년사는 핵으로 위협하는 수준이 이제 너무도 분명해졌다.그 신년사는 희망의 메시지가 아니다. 휴전선에서 들리는 총소리 보다 더 무서운 소리로 들린다. 핵보유국이 되었으니 인정하라는 것인데, 이제 우리의 선의가 아니라 김정은의 핵위협으로 많이 바쳐야 할 것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두려움으로 살아가야 할 처지가 되었다. 지난 2년 여간 우리 대통령이 이 일에 매달렸으며, “국민들은 안심하시라. 김정은 착한 사람이다. 핵 위협은 절대 없다”고 국내외에 장담하고 다녔는데, 이제 불안해서 살수 없게 되었고, 가져다 바치자니 함께 가난 속으로 몰락하는 것은 아닌가. 역시 두려운 예상이 앞선다.이제 이 백성을 무엇으로 위로하랴. 정치권의 역사적 사명이고 우리 국민들을 행복하게 할 것처럼 선전하는 적폐청산’으로 위로하랴. ‘갑질 정죄’ 정리로 위로하랴. 실직자들에게 ‘월 몇 푼의 돈으로’ 위로하랴. 내일은 직장의 문이 열린다고 위로하랴. 내일은 또 다른 희망이 있다고 믿게 하라. 한 전쟁터에서 부상당하여 신음하는 병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고 묻었더니 “내일(Tomorrow)을 주십시오”라고 했다고 한다.내일의 희망이 있다면, 오늘의 숨넘어갈 것 같은 고난의 환경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서 위로가 된다. 그런데 어제의 대립구도로 재미를 본 사람들에게서 상처받은 이들에게, 험한 말로써 상처받은 이들을, 사회 전체가 아직 이름도 정할 수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안해하고 분노하는 국민들을 무엇으로 위로하랴. ‘내일’이라는 희망을 줘라. 내일이 더 불안하다고 하는 이들에게 내일은 괜찮다고 안심시켜라. ‘내일은 잘 되리라’는 희망으로 위로 하라. 그런데 더 불신하고 미워하기를 경쟁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이제 누가 이 백성을 위로 할 수 있겠는가?이 시대를 위로 할 이는 언제나 복음진리, 구원진리의 소유권자인 교회뿐이다. 한국교회여 시대를 향하여 외치기를 주저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백성을 위로하라. 이제도 민족의 희망은 하나님께 있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9-01-04
  • 2018년 성탄절을 생각하며-심 만 섭 목사
    이제 2018년 성탄절을 맞는다. 성탄절하면 떠오르는 어릴 적의 추억이 있다. 그때 당시에는 성탄절에는 반드시 천사의 마음으로, 교회에서 각 가정마다 혹은 복음을 전할 대상의 집들을 찾아 가서 ‘새벽-송’을 돌았다. 12월 24일 저녁에는 모두 교회에서 모여서 성탄 축하 행사를 하고, 기다리다가 새벽이 되면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서 출발을 한다. 보통 3~4km를 걷는 거리가 많았다. 나는 의례히 가장 먼 거리에 있고, 더 가난한 성도들의 가정이 사는 동네를 찾아가는 팀에 배정받기 일쑤였다. 그때에는 웬 눈이 그다지도 많이 내리는지, 시골길에 성탄 전야에 눈이 쌓이면, 긴 장화를 신고 다녀도 허리춤까지 차 올라오는 눈의 높이로, 장화 속까지 눈이 들어가 녹는 바람에, 신발을 벗으면 수증기가 올라오고, 발은 더 시려왔다. 교회 마당에서 전체가 모여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양을 부르고, 각 팀마다 출발하여 성도들의 집집마다 다니면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양을 부르고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친다. 그럼 각 가정에서는 과자 한 봉지를 준비했다가 성탄 선물로 준다. 그렇게 밤을 새우다시피 3~4시간을 새벽-송을 돌고, 교회에 돌아와서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가 성탄 예배를 드렸다. 참, 순박하고, 거룩하고, 기쁜 마음으로 성탄절을 맞이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이제는 성탄절의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이미 새벽-송은 사라졌다. 지역 주민들이 소음(騷音)이라고 싫어하고, 또 교인들 가운에 이에 동참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탄절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 대신에, 온갖 세상적인 것들이 들어와 판을 쳐서, 상업화와 세속화의 안타까운 모습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성탄절에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선물의 가격이 상대방에 대한 사랑으로 환산되는 날’이라는 웃지 못 할 말까지 생겨날 정도이다. 요즘은 예수님의 말구유대신, 화려한 성탄 트리와 휘황찬란한 장식들이 대신하지만, 역시 성탄의 본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 한 동안 우리 기독교계는 서울 시청 앞에 성탄트리를 세우고 예배하며 기뻐하는데, 타종교인들이 이에 시비를 걸어 불편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것은 왜 성탄 트리에 ‘별’을 달지 않고 ‘십자가’를 다느냐는 것 때문이었다. 올해 청와대에서도 성탄트리를 만들어 세웠는데, 그 트리에는 예수님을 예표하는 어떤 것 보다도, 각 복지/구호 단체의 이름을 단 카드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 SNS를 통해 전해지는 것을 보면서,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성탄 왜곡은 미국에서도 있었는데, 미국에서는 ‘Merry Christmas’ 대신 ‘Happy Holidays’나 ‘Season’s Greeting’으로 인사해야만 하던 때가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대통령직 8년 동안 ‘Christmas’라는 단어를 사용해 본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트럼프 현 대통령은 ‘Merry Christmas’로 사용하는 것을 대통령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 된 후, 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방송들도 성탄절이 되면, 성탄에 관한 것을 특집으로 내보내기보다는,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것, 교회를 흠집 내려는 비리와 같은 것들을 방송으로 내보내는 것을 마치 관행처럼 하고 있음은 매우 안타깝다. 마치, 남의 감사와 은혜 축제, 구원의 기쁨 잔치를 망치려는 의도로 보인다. 성탄의 가장 큰 의미는, 하나님 되신 예수님이 성육신(聖肉身)하셔서, 인간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이 모든 죄를 담당하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신 것이다. 또 하나는 병들고, 소외되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소망과 사랑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평소에 예수님의 구원과 사랑에 대한 것을 소홀히 했다면, 이것을 반성하고,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성탄의 의미에 대하여, 회복하도록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 교회 안에서의 화려함과 거창함보다는 세상과 함께 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구원의 은총이 임하고,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예수의 사랑으로 찾아가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온 누리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 구원이 임하도록 기도할 것이다. 특히 저 북녘 땅에도 속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가 울려 퍼지고, 캐롤송이 들려지기를 소망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8-12-24
  • 안녕하세요? 대한민국교회/강 경 신 목사
    12월, 한 해의 끝 달이다. 기대와 설렘으로 시작한 한 해가 속절없이 끝나는 것이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세밑이 되면 한해를 돌아본다. 그러면서 자문해 본다. 과연 대한민국의 교회는 안녕할까? 그래서 “안녕하세요? 대한민국교회”라고 물어본다. 작년 종교개혁 5백주년을 맞이하면서 너도나도 개혁의 목소리를 드높였건만, 불과 1년이 지나지도 않아 교회들은 잠잠하다. 묵묵하다. 달라졌다는 말도 없고, 새로워졌다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극히 일부의 교회들을 빼 놓고는 잘 된다(?)는 교회도 눈에 뜨이지 않는다. 그래서 기독교 최대의 축일인 성탄절이 오건만, 이 땅의 교회들은 고요하다. 아니 숨을 죽이고 있다. 이게 오늘의 대한민국 교회의 현실이다. 이미 수년전부터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개혁을 외쳤다. ‘이대로는 안된다’ ‘교회가 새로워져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수많은 기도집회와 세미나와 각종 행사들을 통하여 나름대로 개혁의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그렇지만, 작금의 현실은 참담하다. 교회와 교회, 교단과 교단 간의 골은 더 깊어졌다. 목회자들의 도덕적 일탈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세간의 말거리가 되었고, 일부 대형교회의 교회세습이 언론과 매스컴의 핫 이슈가 되었다. 소위 ‘무슬림의 확산’과 ‘성소수자’ 문제가 개신교 안에서 ‘교리 논쟁’으로 비화되면서, 타 교단을 이단으로 정죄히는 무리수를 두는 일도 발생하였다.어떤 목회자들은 자기의 정치적 신념을 종교적 신앙으로 포장하여 기꺼이 ‘태극기 부대’의 기수가 되거나, 태극기 집회에 뭇 성도들을 동원하여 열을 올렸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 ‘태극기 부대=개신교’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 주기도 하였다. 무슬림 문제만 해도 그렇다. IS의 확산이 온 세계의 골칫거리가 될 때, 일부 교회지도자들이 ‘IS=무슬림’이라는 등식으로 성도들을 ‘십자가 운동’의 용사로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타 종교에 대한 지극히 얄팍한 지식과 종교적 편견으로 우를 범하면서도 진리를 수호한다고 신념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연합운동은 어떤가? 그동안 우리 대한민국 교회가 ‘연합과 일치’를 외친지가 그 몇 해가 되었던가? 어렴풋이 따져보아도 새천년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그랬다.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한다’는 소리를 한결같이 말했다. ‘천주교는 하나의 공교회이기 때문에 힘이 있는데, 개신교회는 사분오열되어 힘이 없다’고 그 당위성을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연합기구를 만드는 일에 열중하였는데, 오히려 수많은 연합단체들이 합종연횡을 거쳐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참으로 희한하게도, 교회가 연합과 일치의 중요성을 말하면 말할수록 더 많은 연합기구들이 생기고, 더 여러 갈래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이제 교회연합기구들이 하도 많아 왠만한 목사들은 그 수와 이름도 잘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교회지도자라고 자청하는 사람들은 연합해야 한다고 열을 올리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의 내부적 현실은 어떠한가? 한때 성공한 목회자로 존경과 추앙을 받았던 일부 대형교회의 유명목사들이 더 이상 일반 목회자들에게 ‘성공의 롤 모델’이 되지 않으며, 일반 성도들에게는 엄청난 실망을 안겨 주면서 교회가 영적 권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교회 안에는 여전히 ‘기복신앙’의 물결이 도도하다. ‘형통’과 ‘번영’의 신앙은 한물가지 않고,지금도 교회 안에서 위력을 발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교회란 원래 그런 곳인가 보다’라고 인식하게끔 되었다. 그러다보니 ‘고난’과 ‘십자가’ 신앙을 사람들은 별로 귀담아 듣지 않는다. 성공과 번영을 추구하는 세상의 물결에 교회도 편승하여 버린 것이다.1980년대 암울했던 시절에 쓴 정호승 시인의 ‘서울의 예수’라는 제목의 시가 생각난다. 그 시의 일부를 읊어본다. ‘나를 섬기는 자는 슬프고, 나를 슬퍼하는 자는 슬프다. 나를 위하여 기뻐하는 자는 슬프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는 더욱 슬프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워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지 않았나니,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이 시는 왠지 오늘 이 시대의 교회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든다. 수십년이 지나도 교회가 변하지 않았다. 교회가 새로워지지 않았다. 교회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교회는 꿈쩍도 않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를 보면서 ‘예수의 슬픔’을 본다. 제발 새해에는 대한민국의 모든 교회가 ‘예수의 슬픔’이 되지 않고 ‘예수의 기쁨’이 되기를 소망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8-12-14
  • 한영덕 씨 사건과 작금의 의료농단-임영천 목사
    평양의전을 나온 산부인과 의사 출신인 한영덕 씨는 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뒤로 마땅한 일터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무면허 병원을 운영하던 무리에 걸려들어 그들에게 면허증을 빌려주고 몇 푼씩 얻어 쓰면서 살아가고 있다. 의사도 아니면서 무면허병원을 차려놓고 주로 여성들을 상대로 하여 낙태수술… 등 쉽게 돈벌이가 되는 일을 붙잡아 큰돈을 벌어보려고 획책하던 그 돌팔이의사들의 부실 병원이 끝내 취체(단속)에 걸려들어 고발당하는 처지가 되자 그들은 평소 결벽증을 제법 드러내 보이곤 했었던 한씨를 배경 인물로 의심하고 그에게 근거 없는 보복 행위를 자행하고야 만다. 그들은 이런저런 그럴듯한 보안상의 이유를 들어 그가 위험분자(빨갱이)라는 점을 실감 있게 그려서 사직 당국에다 고발한다. 그런데 당국에 한번 잡혀 들어가고 나면 그가 위험분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후에 밝혀진다고 해도 사직 당국에서는 그를 석방하지 않는다. 한영덕 씨도 국가보안 상의 위험분자란 혐의만은 용케 벗어나게 되었지만 결국 그는 다른 죄목(의료법 위반)으로 실형을 언도받고야 만다. 이 이야기는 작가 황석영의 중편소설 <한씨 연대기>(1972)에 나타난 북한 출신 의사 한씨(한영덕 씨)의 한 많은 일생을 다룬 한 편의 비화(悲話)이다. 한씨의 일생은 이렇게 구차하게 뒤틀린 혼탁한 조류에 휘말려 흘러가버리고 만 것이다. 그가 아무리 깨끗한 인품의 소유자였다고 하더라도 권력의 횡포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존재일 뿐이었다. 권력을 휘두르는 강자들 앞에서 일개 피난민인 약자 한씨는 자기를 보호할 아무 지푸라기 하나도 붙잡을 데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그의 말할 수 없이 억울한, 다른 말로 그의 ‘뿌리 뽑힌’ 삶을 읽는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시종일관 엄청난 분노와 공포감 내지 울압감(鬱壓感) 속에서 헤매게 된다. 그런데 필자는 피난민 의사 한영덕 씨가 월남한 뒤 상대하게 된 의료기관이 일개 무면허병원이었을 뿐이고, 그 병원을 운영하던 자들도 정식 의사가 아닌 속칭 돌팔이의사들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한씨도 의료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함께 걸려들 운명에 처해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생각해 왔었다. 즉 의료인으로서의 정당한 자격을 지닌 의사(한씨)가 무자격 의사들이나 무면허(무자격) 병원을 상대하다 보니까 그런 황당한 지경에 처해질 수밖에 없었던 건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닌가, 그렇게 판단해 왔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무법적인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도 6.25 직후인 혼란했던 1950년대(또는 1960년대) 경에나 있을 수 있었지 오늘날과 같이 모든 제도가 법적으로 정비되어 있는, 곧 적법(適法)만이 통용되고 있는 시대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음도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한영덕 씨가 겪은 불행한 사건은 현 시대가 아닌 지난 오·육십 년대에나 있었을 법한 일이요, 또한 그가 무자격 의사나 무면허 병원을 상대했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는 그런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그러나 이런 필자의 다소 낙관적인 판단(믿음)이 깨지는 일이 최근 의료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요즘의 언론보도에 의하면, 한 예로 파주의 M병원이 면허 없는 의사에 의한 무면허 수술, 또는 의사도 아닌 의료기기 영업사원에게 대리수술을 시켰다가 결국 두 명의 환자를 사망케 한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물론 그 무면허 의사나 영업사원이 환자 사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처지에 있음이 사실이지만, 병원 측은 최근 6개월 동안 단순히 ‘페이닥터’로 근무해온 다른 의사 N씨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려고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는 보도도 나왔다. 그러나 이는 빙산의 일각이 아닌가 싶다. 사립병원이 아닌 국립중앙의료원에서도 최근 수십 건의 영업사원의 대리수술이 있었다는 언론 보도도 있다. 그렇다면 어쩌자는 건가. 병원 측이 자신들의 재정적 여건을 강화하겠다는 목적으로 죄 없는 환자들이 죽어나가거나, 부실한 의료행위의 희생물이 되도록 해야 한단 말인가. 작년에 의료농단이란 말이 많이 흘러나왔었다. 박 전 대통령을 보좌하는 의료진들의 과잉충성 작태와 관련해 이런 표현이 나왔었던 것 같다. 그것은 표현컨대 권력(權力)형 의료농단이었다. 이젠 치부(致富)형 의료농단이 의료계에 팽배해져 가고 있다. 다다익선이란 말이 있듯이 돈은 더 벌수록 좋다는 풍조다. 원래 권력과 금력(돈)은 칼의 양날과도 같은 관계이다. 그러므로 권력형이든 치부형이든 의료농단은 이젠 우리 사회에서 날카로운 메스에 의해 수술(청산)되어야 할 적폐 중의 하나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8-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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