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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그들은 기독교의 ‘위인’을 원치 않는다
    반기독교 광풍에 찢겨지는 영웅의 이름 조용기 목사 향한 비난, 결국은 기독교 죽이기 고 조용기 목사를 향한 일각의 비난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이단, 재정 비리, 정치 권력 등 목회자에게 가장 치명적인 단어들을 나열해 가며, 그의 생전을 흠집 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전쟁의 폐허 위에 주저앉은 민중들에 희망을 노래하고, 지독한 가난과 굶주림에 죽어가던 전 세계인들에 하나님의 생명을 전하던 조용기 목사,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인으로까지 꼽히는 그의 업적에 왜 저들은 애써 등 돌리며, 어두운 치부만을 들추려 하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에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로 ‘두려움’이다. 저들은 ‘조용기’라는 이름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조용기란 이름으로 인해 다시 회복될 기독교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반기독교 광풍이 세상이 지배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한 대립과 다툼, 경제침체와 행정의 추락, 지금 사회와 국민을 요동케 하는 온갖 불안에 대한 책임을 기독교에 물으려 하고 있다. 엄밀히 그들 자신이 받아야 할 국민들의 마땅한 분노를 기독교에 전가하는 지독히도 치졸한 전략인 것이다. 허나 속이 뻔히 보이는 저들의 작태 앞에서도 한국교회가 눈 뜨고 멍하니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바로 우리 스스로의 반복된 분열로 이에 대응할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진실은 우리 눈 앞에서 침몰했고, 이를 바라보는 저들의 비웃음은 한국교회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짓밟아 버렸다. 이런 와중에 조용기 목사의 죽음은 저들에게 긴장을 주기 충분한 사건이 됐을 것이다. 조용기 목사의 영향력은 이미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어선 지 오래로, 그는 전 세계가 존경하고 사랑한 20세기를 대표한 인물이다. 한국교회의 자랑이자, 기독교 부흥의 상징과도 같은 그의 죽음은 한국교회가 다시 하나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고, 이는 곧 한국교회의 회복을 의미하게 된다. 국내 1천만 성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거대하고, 활발하며 적극적인 유일한 집단, 그것이 바로 기독교이며 한국교회다. 대한민국의 건국부터 교육, 복지, 병원, 경제 등 전 부분의 토대를 만들고 이를 발전시켜 온 한국교회의 부활은 가슴에 불의를 품은 이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다. 그렇기에 조용기 목사의 위대한 업적을 애써 가려가며, 그의 죽음이 한국교회의 결집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고군분투 중이다. 조 목사가 생전 자신에 쏟아지던 온갖 중상모략을 이겨내고 대부분 무혐의를 받았다는 사실은 언급치 않고, 지금은 한국교회조차 전혀 언급치 않는 수십년 전의 케케묵은 이단시비를 다시 꺼내들었을 뿐 아니라, 그의 광범위한 영향력을 정치권력으로 둔갑시키는 저들의 노력은 참으로 처절하기까지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진실은 더욱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세상을 향해 소리치고 있다. 조 목사의 생전을 목도한 전 세계 수천만 기독교인이 그의 위대함을 증거할 것이다. 그는 분명 기독교의 위인이었고, 전 세계가 사랑한 신실한 목회자였다. 우리는 10여년 전 우리 곁을 떠난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과 불교 법정스님의 죽음을 기억한다. 당시 대다수의 언론은 이들의 정신을 기리고, 생전의 청렴한 삶을 조명하며, ‘성인’으로 추대했다. 이후 천주교와 불교의 대사회적 이미지는 급상승했고, 국민들의 지지도 올라갔다. ‘단 한 명’ 종교 전체를 일으키고, 이미지를 바꾸는데 단 한 명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기독교에 있어 조용기 목사는 모두가 인정하는 바로 그 ‘단 한 명’이다. 오히려 개인수양과 가르침에 충실한 고인들과 달리 전 세계를 누비며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몸으로 실천한 조 목사였던 만큼 그의 죽음으로 인한 한국교회와 우리사회의 각성 효과는 더욱 거대할 것으로 보인다. 저들은 지금 빈소에 쓰여진 조용기 목사의 이름을 짓밟으며, 기독교의 ‘위인’ 탄생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하지만 이미 세상은 그를 ‘위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09-17
  • [기자수첩] 영화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을 통해 본 한국교회의 오판
    총 탑승객 155명을 태운 여객기가 활주로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날아오는 새떼와 충돌하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다. 이로 인해 여객기는 양쪽 엔진 모두를 잃고,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고, 승객들은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절체절명의 순간 비행기를 조종하던 설리 기장은 일단 보조동력을 가동하고 승객들을 살리기 위한 판단을 고민한다. 사고 소식을 접한 관제탑에서는 출발 공항으로 회항하거나, 인근 공항에 착륙할 것을 지시한 상황, 하지만 설리 기장은 850미터 밖에 되지 않은 상공에서 회항은 불가할 것으로 판단하고 결국 관제탑의 지시를 거부하고 인근 허드슨강에 수상 착륙을 시도한다. 그리고 얼마 후, 155명 모두 안전하게 구조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이 사고는 지난 2009년 1월 15일, 미국 뉴욕 라과디아 공항을 출발한 US항공 1549편 여객기에게 일어난 실화로, 지난 2016년에는 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으로 대중들에 알려졌다. 영화는 단순히 155명을 살린 놀라운 기적 뿐 아니라, 허드슨강에 불시착을 단행한 설리 기장의 판단과 그를 둘러싼 논란들에 포커스를 맞춰 전개되는데, 바로 여기에 우리 한국교회가 눈여겨 봐야 할 주제들이 등장한다. 사고 후, 항공 조사관들은 설리 기장에게 공항으로 회항하지 않은 이유를 추궁하기 시작한다. 자신들의 판단으로는 충분히 공항 착륙이 가능했고, 시간도 충분했다는 것, 무엇보다 제대로 된 절차와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하지만 설리 기장은 그들이 시뮬레이션을 통해 계산한 시간과 사고순간에 놓인 현실의 시간이 결코 동일할 수 없고, 생명이 오가는 긴급한 순간, 모든 원칙이 결코 정답이 아님을 항변한다. 교본 속의 매뉴얼이 아닌 생명을 살리기 위한 현실적인 판단이 더욱 중요했던 것, 결국 설리 기장은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해 낸다. 오랜만에 한국교회에 고조되는 대통합의 열기에 한교총이 절차와 원칙을 내세우며, 제대로 찬물을 끼얹고 있다. 일단 협상부터 완료하고, 통합은 이후에 고민해 보자는 것인데, 현실과 괴리된 한교총의 판단에 교계의 비난이 쇄도하고 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양쪽 엔진을 잃고 추락하는 비행기와 같다. 80~90년대 기적적인 부흥을 경험하며, 워낙 하늘 끝까지 날아 올랐던 터라, 엔진을 잃은 뒤에도 오랜 기간 활강으로 버틸 수 있었지만, 어느덧 바닥이 보이는 지금 추락은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한교총이 고수하는 절차와 원칙은 추락하는 한국교회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당장 바닥과 맞닿을지 모르는 상황에, 공항 활주로만 고집해서는 자칫 승객들의 생명을 모두 잃을 뿐이다. 비록 아스팔트가 쭉 뻗은 활주로는 아닐지라도 승객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것이 자갈 가득한 비포장 도로이든, 차가운 한강 한복판이든 상관없는 것이다. 한교총이 망설이는 사이, 한국교회라는 비행기에 탑승한 수많은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의 생명은 위태로워 진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영화에서 설리 기장이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며, 추궁하는 조사관들을 향해 부기장 제프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어딘가에 착륙할 수 있었던 것은 기장의 판단 덕분이다. 규칙대로 했다면 우린 모두 죽었을 것이다” 지금 추락하는 한국교회를 위해 필요한 것은 정관에 갇힌 규칙이 아니라, 당장의 위기를 타개할 현실적인 판단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08-26
  • [기자수첩] ‘선(先)조율 후(後)통합’의 함정 “우리는 시간이 없다”
    예배회복, 반성경적 악법 대처 등 ‘대통합’ 시급 ‘선(先) 통합’ 후 하나된 단체에서 이단 문제 해결해야 모두의 기대 속에 대차게 첫 발을 뗀 한국교회 대통합 프로젝트가 또다시 제동이 걸릴 태세다. 당장 예배 회복을 필두로 차별금지법과 평등법 저지 등 한국교회에 있어 단 한 시도 미룰 수 없는 시급한 사안이 즐비한데 이런 현실은 무시한 채 ‘선(先)조율 후(後)통합’이라는 느긋한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최근 한교총은 교계 대통합을 위한 ‘미래발전위원회’와 실무협상을 책임질 ‘기관통합준비위원회’를 동시에 구성하고 한기총과의 본격적인 통합에 나섰다. 상임위는 소강석 목사(한교총 이사장, 예장합동)와 김태영 목사(한교총 전 공동대표, 예장통합)를 각 위원장으로 만장일치 추대하고, 교계 대통합을 시급히 완수키로 중지를 모았다. 그러나 통합 실무를 맡은 김태영 목사가 최근 소속 교단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기총의 이단 해제, 금권 선거 등의 문제를 언급하며, 해당 문제들의 해결 없이 통합 협상도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김 목사의 발상이 한국교회 대통합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비난을 듣는 것은 그것이 한국교회가 분열한 지난시간 간간히 추진됐던 통합 시도를 매번 무산시킨 단골 레퍼토리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단문제는 서로간의 첨예한 이견이 부딪치는 극히 예민한 사안으로, 단순히 조율과 협상으로 이를 해결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언제부터인가 이단 문제는 통합 논의에 있어 선결 조건이라기보다는 통합 무산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이런 상황에 김태영 목사가 기관통합준비위원장에 오른 직후, 또다시 이단 문제를 선결 조건으로 내걸었다는 것은 오히려 통합을 거부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김태영 목사가 주장하는 ‘선(先)조율 후(後)통합’이란 형태는 통합에 있어 매우 이상적임은 분명하다. 서로 다른 두 단체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해결하고, 조율해야 할 문제들이 한 두 개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교회의 상황은 이런 느긋한 여유를 허락치 않는다. ‘원 리더십’을 확보하지 못한 한국교회는 코로나 상황에 정부의 방역정책에 끌려다니기 바쁘고, 급기야 예배 인원을 방역당국이 정하는 굴욕(?)까지 맛봐야 했다. 여기에 일부 정치계에서는 교회와 사회의 전통 규범을 위협하는 독소조항을 다수 포함시킨 비슷한 법안(포괄적차별금지법, 평등법(이상민 법), 건강가정기본법 수정안, 평등법(박주민 법))들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과거 하나된 한국교회에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지금 사분오열된 한국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위급한 현실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선(先)조율 후(後)통합’이 아닌 ‘선(先)통합 후(後)조율’이 해답임을 알려주고 있다. 현 한국교회에 있어 ‘예배회복’이 가장 시급한 난제라는 것에 이견을 달 사람은 없고, 분열된 힘으로는 이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모두가 공감한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해묵은 문제는 일단 뒤로 잠시 넘겨두고, 예배 회복과 코로나 대처라는 대의적인 목표에 집중해야 한다. 당연히 통합이 먼저다. 이단 문제는 통합된 단체에서 회원들의 다수결을 통해 이를 처리하면 될 뿐이다. 그게 법이고, 원칙이다. 오히려 현 상황에서 이단 문제의 해결을 강조하는 것은 더 큰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이단’의 기준은 각 교단마다 다르고, 서로가 이단으로 정죄한 집단, 인물, 단체가 매우 상이하다. 예장통합측의 기준에서 판단한 한기총 내부의 이단 문제와 합동, 기성, 기침, 기감 등 여타 한교총 회원교단들의 입장이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김태영 목사가 단순히 자기 교단의 이단 기준만 들이대 한기총을 판단한 것 자체가 애초에 모순일 수 밖에 없다. 여기에 자칫 한교총 스스로가 자가당착에 빠질 우려가 있다. 한교총 회원교단 사이에서도 상대 교단의 인물이나 단체를 이단 혹은 교류금지 등으로 정죄한 사례가 많은데 그런 상황에 굳이 한기총을 향해서만 이단 해결을 요구하는 것은 한교총 자체의 이단 기준이 서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더욱이 한교총이 ‘선(先) 통합’ 없이 ‘이단 문제’를 선결과제로 고집한다면, 한기총 역시도 WCC를 선결과제로 끄집어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WCC는 한국교회가 지난 숱한 분열 속에서도 60년간 전혀 의견을 좁히지 못한 사안, 만약 이번 통합 논의에 WCC가 등장한다면, 이 통합은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단 문제는 하나된 통합 단체에서 이를 논의하고 해결해야 함이 옳다. 논란이 되는 교단이나 인물이 있다면,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 잔류, 퇴출 등을 결정하면 될 일이다. 지금은 오직 한국교회의 유익을 위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당장 무너져 가는 예배를 회복하고, 반성경적 악법을 저지키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 일의 선제조건은 당연히 대통합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08-16
  • [데스크칼럼] 부패 완판
    현 정부 여당이 검찰개혁이란 명분 아래 '검수완박'을 말하자, 당시 검찰총장 윤석열은 검수완박은 곧 '부패완판'이라고 응수했다. 검수완박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해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한다는 뜻이다. 이에 윤석열은 그렇게 되면 부패가 완전히 판치게 될 것이라고 맞 받은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정치권과 검찰과의 권력 다툼의 한 단면을 한 마디로 보여주는 말이다. 에덴에서 타락한 인간은 욕망과 욕심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인간의 그 욕심은 끝이 없다. 그것이 재물이든, 명예든, 지식이든, 거기에 욕심이 개입되면 쌓고 또 쌓아도 한이 없다. 특히 재물에 대한 욕심은 인류 사회에 물질문명의 번영을 촉진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지나쳐 윤리를 일탈하면 인간 사회 전체를 타락시킨다. 인간의 이 욕심을 다스리기 위해 나타난 것이 종교(宗敎)이다. 모든 종교의 근본은 타락한 인간이 가진 욕심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인간 본디 모습을 회복하라고 가르치는 데 있다. 축(軸)의 시대에 나타난 인류의 스승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욕심을 경계했다. 그래서 종교의 교조들을 모두가 존중하고 그 가르침을 받드는 것이다. 인류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사회적 가치관은 그 사회의 주류종교에서 나온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20세기에 공산주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있었지만, 공산주의는 한 세기가 다하기 전에 소멸해 가고, 역시 그 자리를 종교가 대체해 가고 있다. 그런데 이 막중한 사명을 가진 종교마저 교권화 되고 세속화 되어 재물이나 명예에 대한 욕심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종교와 함께 그 사회도 결국 망하고 만다. 그것은 수 천년의 역사를 가진 클래식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현대사회는 자본주의와 종교가 한 배를 탄 꼴이다. 그리하여 종교가 그 본연의 사명을 망각하고 재물이나 명예심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그 종교는 진리를 설파하는 '참된 종교'가 아니라 '세속주의화 된 종교'로 전락한 것이다. 그것은 간판에 붙은 그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무늬만 종교일 뿐, 그런 종교는 사람을 회개시키거나 또 사회를 변화시키는 아무런 영적 능력도 갖지 못한다. 오로지 사회 구성원의 한 이익집단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교회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한다. 빛과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정치권이 검찰의 수사권을 박탈하여 사회에 부패가 완전하게 판치게 된다면 그거야 말로 사회를 타락케 하는 적폐이다. 이 때는 반드시 부패를 막아야 할 사명이 있는 종교가 나서야 한다. 종교가 헌법상 정교(政敎) 분리원칙만 되뇌이며 부패한 권력을 방치하는 것은 하나님 앞과 그 사회에 죄를 짓는 것이다. 사회적 부패를 막아야 할 책무가 종교에 있기 때문이다. 검찰총장 윤석열의 '부패완판'(腐敗完판)이란 화두가 새롭게 다가온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06-15
  • [기자수첩] 한국교회 대통합 “모든 준비는 끝났다”
    코로나 위기로 ‘대통합’의 필요성 절감 소강석 목사의 ‘7단계 통합안’ 실현 가능성 높여 어느덧 2021년 새해도 중반을 향해 흘러가고 있는 가운데, 한동안 주춤했던 교계 대통합의 목소리가 다시금 고조되고 있다. 오랜만에 교계 대다수가 한 자리에 함께하며, 대통합의 가능성을 내비친 지난 부활절연합예배가 새 시대를 향한 한국교회 변화와 각성의 새로운 시발점이 된 것이다. 가뜩이나 다툼과 분열로 얼룩졌던 한국교회에 깊게 스며든 우리 사회의 정치적 이념 갈등이 교계의 통합마저 정면으로 가로막던 불의한 상황에, 금번 부활절은 복음 안에서 진보와 보수도 하나라는 부활절연합예배 본래의 취지를 그대로 되살리며, 꺼져가던 대통합의 불씨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물론 한국교회의 통합이 당장 어제 오늘만의 주제는 아니었다. 지난 한기총과 한교연의 분열 이후, 현재까지 한국교회에 발표된 통합선언만 무려 4차례에 달했고, 특히 한교총과 한교연은 통합총회까지 열었지만, 결국 통합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한국교회에 있어 통합이라는 단어는 ‘양치기 소년’의 “늑대가 나타났다”는 외침처럼, 어떠한 신뢰도, 감동도 주지 못하게 됐다. 그저 때 되면 벌어지는 교계 정치꾼들의 허울좋은 ‘이벤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교계의 움직임은 확실히 예전과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단체의 수뇌부 혹은 정치꾼들이 무언가를 취하기 위한 꿍꿍이가 아니라 순수한 ‘통합’ 그 자체만을 향해 전진하는 모습이다. 한국교회 전체에서 모이는 기대가 결코 아깝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번 ‘대통합’의 성공 가능성을 높게 보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먼저 수년 째 계속된 한국교회의 추락이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바닥 끝에 맞닿아 있다. 형제간의 다툼도 먹고 마실 것이 풍족한 집안에서나 가능한 일, 코로나 이전부터 계속된 한국교회의 오랜 침체는 연합단체의 운영마저 힘들게 만들었다. 존립할 능력도, 이유도, 명분도 없는 상황이 점차 고조되는 것은 반대로 대통합에 대한 당위성을 제공하고 있다. 둘째는 코로나 펜데믹의 충격이다. 코로나가 한국교회를 큰 위기로 몰아넣은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로 한국교회를 각성케 한 계기가 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사실 한국교회의 위기는 딱히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충분히 심각했고, 계속 진행 중이었다. 더욱이 당시 한국교회는 지속적인 다툼과 분열, 맘몬에 오히려 무너지는 천장조차 의식하지 못할 만큼 위기에 둔감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 전례 없는 펜데믹을 가져온 코로나는 위기에 물든 한국교회에 매우 효과적인 충격요법으로 작용했다. 결정적으로 코로나는 이념 갈등에 신음하는 한국교회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코로나 발생 이후, 정부의 부당한 예배제재에 심각한 피해를 입은 상황, 정부의 반기독교 정책은 한국교회가 하나로 힘을 합칠 명분을 제공했다. 물론 대정부 정책을 놓고, 내부의 이견이 심각히 갈린 것도 사실이지만, ‘한국교회의 보호’라는 궁극적 목표가 같다는 점은 통합을 위한 충분한 합의점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현재 한국교회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들의 결단이 남다르다는 점이다. 사실 위 두 가지 요소가 충족되어도, 교계 지도자들이 서로 손을 잡지 못한다면, 한국교회는 통합에 이를 수 없다. 그간 한국교회가 수차례가 통합을 논의하면서도, 정작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탓이 바로 이들의 정치적 경쟁과 실무자들의 이해관계가 얽혔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하나됨이라는 거대한 명제를 위해 누구보다 먼저 스스로를 희생했어야 할 이들이 욕심 앞에 단 하나도 내려놓지 못했기에, 한국교회는 하나가 되지 못했었다. 올해가 기대되는 것은 “더 이상 이대로는 안된다”는 공통적인 문제제기에, 모든 교계 지도자들이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금번 부활절연합예배에 한국교회의 참여율이 더욱 돋보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가 바탕에 있다. 여기에 현재 한국교회의 최일선에서 통합 작업을 이끌고 있는 새에덴교회 소강석 목사의 존재는 대통합에 대한 기대를 더욱 높이고 있다. 지난 9월 예장합동 총회장, 12월 한교총 이사장에 오른 소 목사는 근 2년 새, 한국교회 최고 지도자로 우뚝 섰다. 그런 소 목사가 취임 이후, 자신이 가진 거대한 내·외적 영향력을 오직 ‘통합’에 쏟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교회에 상당한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최근 소 목사가 발표한 ‘7단계 통합안’은 통합을 위한 전제부터, 행동요소, 시간별 추진 사안 등 통합을 위한 실제적인 요소를 담고 있어,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이전 통합 논의에서는 찾아 볼 수 없던 것으로, 소 목사는 그간 통합을 가로막았던 여러 방해요소들을 가감없이 지적하는 등, 한국교회의 분열과 통합에 대한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이제 한국교회는 대통합을 위해 본격적인 행보에 나섰다. 목표로 삼은 통합을 위한 최종 시한은 고작 6개월 남짓,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통합에 대한 당위성이 섰고, 의견이 뭉쳤으며, 실행을 위한 모든 분석과 준비가 끝난 상황인 점을 감안하면, 그리 짧은 시간도 아니다. 남은 것은 바로 이 글을 읽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결단이다. 지금 교계에 뜨겁게 불어닥친 ‘대통합’의 열기가 반드시 그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바로 당신부터 하나됨을 위한 위대한 한 걸음을 내딛어야 할 것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04-27
  • [기자수첩] “목사도 아프다. 단지 견디고 있을 뿐···”
    그 어느 때보다 교회를 향한 국민들의 비난이 거센 때다. 정부와 언론에 의해 코로나19 확산의 주범으로 지목된 교회는 더 이상 추락할 수 없는 바닥 끝에 맞닿아 있다. “예배 내 감염은 없었다”는 정부의 마지못한 인정이 이제 와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여전히 교회 예배를 코로나 확산의 분기점으로 몰아가려는 그들의 의도 때문일 것이다. 물론 교회의 잘못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어찌됐든 교회로 인한 감염은 있었고, 그것이 국민들의 염려를 산 것은 역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굳이 확산 규모로만 잘못의 크기를 가늠하려는 일부의 잣대는 스스로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자처한 교회의 사명에 모순될 뿐이다. 교회를 향한 부조리한 탄압과 부정할 수 없는 죄책이 공존하는 시대는 목사들의 인내를 시험하고 있다. 진실의 옳고 그름과 관계없이 국민들의 신뢰가 무너진 교회를 지켜내야 하는 목사들이지만, 그 어느 쪽을 택해도,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한겨울 찬서리 가득한 비난을 피하기는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가 지배했던 지난 1년은 목사들에게 있어 초창기 한국교회 못지않은 고난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더욱 서글픈 것은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목사들은 결코 아파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코로나로 힘겨워 하는 성도들의 고통을 온전히 나눠야 했던 목사들은 그들의 아픔 위에 자신의 아픔을 더할 겨를도, 여력도 없다. 아픔을 덜고자 찾아오는 성도들 앞에 자신의 아픔을 드러낼 수는 없는 법, 사람들의 모든 걱정을 대신 짊어진다는 옛 인디언의 ‘걱정인형’처럼 목사들은 현재 이 시대의 아픔을 대신 짊어지고 주님께 나아가고 있다. 코로나 이후 매일 같이 한국교회와 국민들을 향해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사는 한 목사가 떠오른다. 정부에 굴복했다는 내부의 질책과 예배강행은 종교이기주의라는 국민들의 비난 사이에 그 모든 책임을 온 몸에 떠안으려 하는 그를 보며, 어느 순간 목사에 대한 비난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진 이 시대가 참으로 안타깝고, 불편하다. 하지만 목사도 아프다. 단지 목사이기에, 주님을 닮아야 하는 사명자이기에, 매일 지옥같은 아픔을 견뎌내고 있을 뿐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03-18
  • [기자수첩] ‘코로나와 한국교회’ 국민들의 신뢰회복이 먼저
    새해 초부터 교회와 관련한 계속되는 코로나 확산 사태에 국민들이 또다시 염려하고 있다. 어느 순간 코로나 시대의 ‘슈퍼 전파자’로 전락한 교회에 대해 국민들은 실망을 넘어 분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이러한 공격적 여론이 심히 과도한 것은 사실이다. 교회 관련 시설에서 일부 코로나 확산이 이뤄진 것을 부정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모든 책임을 교회에 뒤집어씌우는 것은 억울한 면이 크다. 지금 언론은 교회 확진 사태에 대한 구체적인 파악은 뒤로한 채, 일부 국민들의 반교회적 정서를 자극하는데 급급하고 있다. 언론들의 입장에서 교회를 공격하는 기사는 독자들에 소위 ‘먹히는 장사’인 것이다. 코로나 시대 교회가 감염의 원흉이 된 것은 정부의 반기독교 정책과 이에 호응하는 언론들이 크게 기여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모두를 정부와 언론의 탓만 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 지난 1년여 간 교회 혹은 교회 관련시설에서 수많은 확진 사태가 발생했다는 1차적 전제는 교회가 코로나 확산의 매개라는 부정키 어려운 증명이 되고 있다. 정부와 언론들은 교회가 제공한 작은 매개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200% 활용했을 뿐이다. 그러한 행태가 심히 저급하고, 다소 억울하기까지 하지만, 지금도 계속 출몰하는 새로운 교회 관련 확산은 그 억울함에 대한 자그마한 동정조차 불허하고 있다. 백신이 개발됐다고는 하지만 지속적인 변이의 출연과 백신의 실효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는 상황은 올해 역시 지난해와 다름없는 한 해가 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측 속에 교회는 어떠한 대비를 해야 할 것인가? 또다시 별다른 대비없이 그저 그때 그때 일어나는 사건과 현상에만 1차적으로 반응할 것인가?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 한국교회는 코로나 정책에 있어 분명 패배했다. 실패라는 표현보다 패배라는 말이 적당한 것은 코로나 확산에 따른 예배 제재가 단순히 과학적 영역만이 아닌 정치적 영역에 기인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변화가 없는 한 한국교회는 올해 또 다시 패배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중요한 것은 이기는 싸움이다. 한국교회의 지난해 모습은 작전도, 대책도 없이 그저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혈기 가득한 병사와도 같았다. 한국교회를 위한다는 그 신념은 분명 높이 사야하지만, 그것이 결코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각자가 품은 신념이 서로 다른 상황은 한국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잃게 만들었다. ‘내분’ 전쟁의 패배를 담보하는 최악의 상황을 한국교회가 자초한 것이다. 당장 필요한 것은 바로 힘의 결집이다. 각자의 신념보다 한국교회 전체의 대의를 우선해야 한다. 어차피 방법이 다를 뿐 한국교회를 위한다는 모두의 생각은 같은 터, 대의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힘을 한 곳에 모을 필요가 있다. 정부와 방역정책에 대한 협의를 담당하고 있는 한교총이 지난해 나름의 여러 전략들을 내놓았지만, 만족할만한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은 그 전략을 실현시켜줄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협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보다 우위에 서는 것인데, 지난해 코로나 정국에서 이러한 모습은 연출되지 못했다. 오히려 교계 내부에서 이를 끌어내리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듯한 모습은 반대로 정부에 힘만 실어 주는 결과를 낳았다. “교회가 예배를 너무 쉽게 포기했다”는 일부의 비난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은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나마 정말 힘겹게라도 예배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새해 한국교회의 예배 회복을 위한 코로나 전략이 성공키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론이 중요하다.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는 여론 정책에 완전히 실패했다. 앞서 언급했던 언론들의 왜곡보도를 제대로 바로 잡지 못했고, 무엇보다 기독교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치를 전혀 충족치 못했다. 가뜩이나 코로나 이전부터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있던 상황에, 코로나란 극한의 위기상황에서 드러난 교회의 이기적인 모습은 국민들의 실망을 분노로 뒤바꾼 결정적 계기가 됐다. 교계 내부의 지지는 물론이고, 국민들의 여론마저 등을 돌린 상황에, 한국교회의 코로나 전략이 힘을 발휘할리는 만무하다. 더구나 이런 정서에 아랑곳 않고, 자기의 신학적 신념만 우선하는 일부 교회의 태도는 국민들의 공감을 전혀 얻지 못한 채, 종교 이기주의의 표본으로 굳어지고 있다. 한국교회는 코로나 정국에 있어 분명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종교의 자유’라는 헌법적 권리를 침해 당했고, 대부분 올바르게 방역지침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코로나 확산의 주범이라는 억울한 오해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억울함에 대한 국민들의 공감이 없다면, 코로나 정국에 있어 한국교회는 영원히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굳어지게 될 것이다. 새해 방역 협상 일선에서 펼치는 한국교회의 전략이 효율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교계는 적극적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 하나됨은 교회가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가장 우선된 전제다. 여기에 교회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더 이상 교회가 국민들과 대립해서는 안된다. 그 어떤 교회 역사에서도 국민들과 대립하는 교회가 부흥한 적은 없었다. 새해 하나됨으로 승리하는 한국교회를 기대해 본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02-01
  • [기자수첩] “정인아 미안해”
    인간이 도대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실험한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한 손에 겨우 감길만한 16개월 된 아기가 온 몸의 뼈는 골절되고, 장이 터져 나갔다. 뱃속 가득히 피가 고여 울음조차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폭력은 계속됐을 것이다. 정말 악마조차 고개를 돌릴 정도의 잔인함이다. 뉴스를 보며 ‘악마를 보았다’는 말이 무색한 것은 악마를 넘어선 잔인함은 물론이고, 일말의 죄책조차 없는 뻔뻔함 때문이다. 제발 이 뉴스가 현실 아닌 영화이길 바랄 정도로, 눈을 감고 싶었고, 귀를 닫고 싶었다. 그 아픔을 조금이라도 상상하려만 해도 발끝부터 저려오는 몸서림은 정인이가 겪었을 고통의 1/100도 체감치 못할 비겁한 어른의 무관심이었다. 이런 상황에 이 모든 학대의 주범으로 의심받는 양모의 부친이 바로 목사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더 큰 충격을 준다. 더구나 목사의 사모이자 양모의 모친은 바로 어린이집의 원장, 윤리와 도덕, 사랑과 포용의 상징적 인물인 그들은 ‘악마’를 키워낸 장본인들이었다. 정인의 양모는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나온 ‘악마’는 아니었을 테다. 그렇기에 어린 시절부터 내면에 싹틔웠을 악의 씨앗이 목회자 부모가 일군 결과물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고 했다. 양모가 보여준 악마의 끔직한 본성은 그 부모의 얼굴을 투영한다. ‘목사와 악마’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두 존재의 공존을 목도함은 우리 의 역사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어긋남의 시작은 과연 언제부터인가? 어느 순간 한국교회의 윤리 기준은 그 중심점이 심히 낮아졌다. 종교인으로서의 완벽한 윤리를 추구하는 것이 당연함으로 여겨졌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목회자도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이해가 자연스러워졌다. 목회자의 양심도 법이 판단하는 시대가 된 것은 ‘최소한의 도덕’일 뿐인 법을 지키며, 그것을 심히 당당해 하는 씁쓸하기 그지없는 윤리 의식 때문이다. 물론 이 사건이 절대 한국교회 혹은 기독교의 현실을 대변할 수는 없다. 냉정히 지극히 예외인 경우로, 이를 교회, 목회자 전체의 문제로 확대하는 것은 심히 위험한 발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사죄해야 한다. 정인이의 죽음은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무관심의 학대였다. 모두가 가해자였고, 죄인이다. 이러한 사건이 우리사회에 일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교회는 책임이 있다. 윤리를 지켜내지 못한 책임,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책임은 정인이에 대한 사죄와 별개로 우리가 마땅한 짊어져야 할 몫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1-01-09
  • [기자수첩] 소강석 목사의 ‘One’과 한국교회의 ‘Win’
    한동안 정체 되었던 한국교회의 대통합 운동에 또다시 불이 붙을 태세다. 현 한국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로 꼽히는 소강석 목사가 지난 9월 총회에서 ‘원 리더십- 원 메시지’라는 시대의 구호를 발표한 뒤, 하나됨에 대한 교계의 열망은 다시 들끓어 오르고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한교총의 차기 공동대표로서 내년 자신의 모든 역량을 한국교회 연합운동을 재건하는데 매진할 것이라고 수차례 공언하며, 교계 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기대까지 한껏 받고 있는 상황이다. 한기총에서 한교연으로, 그리고 다시 한교총으로 이어지는 연합운동의 3단 분열 속에서 한국교회가 받은 상처는 실로 엄청났다. 물론 하나됨을 위한 시도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편승해,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한 그들만의 욕심은 결국 또다른 분열만을 만들어 냈을 뿐이다. 언제부터인가 교계에 있어 ‘통합’이란 말은 양치기 소년의 “늑대가 나타났다”는 외침처럼 아무런 신뢰도, 별다른 기대도 주지 못한다. 통합에 대한 의지나 행동은 전혀 보이지 않은 채, 그저 말로만, 문서로만 반복되어 온 ‘통합’이란 두 글자는 어느순간 한국교회에 있어 ‘거짓’의 또 다른 표현이 됐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 ‘One’의 절대성을 주창하는 소강석 목사를 향한 들끓는 기대의 한 편에는 여전히 트라우마 가득한 불신이 자리함을 배제할 수 없다. 마치 거울의 양면처럼 소 목사가 말하는 ‘One’의 뒷면에 무엇이 새겨져 있을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미 바닥 깊이 추락해 앞뒤를 돌아볼 여력조차 없는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과연 그 의심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반복된 거짓말에 진력이 난 마을 사람들이 소년을 외면한 순간, 늑대는 나타났다. 그리고 양들은 몰살 당했다. 연합단체의 ‘하나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앞선 그들의 행태가 꽤 괘씸하기는 하지만, 그로 인해 ‘하나됨’의 사명을 외면한다면, 결국 양들을 잃는 것은 우리 한국교회일 뿐이다. 현재 각종 유튜브와 SNS, 온라인을 통해 쏟아지는 소강석 목사에 대한 비난은 단순 ‘유명세’라고 하기에는 심히 도가 지나친 감이 크다. 더 안타까운 점은 그 대부분이 한국교회 내부에서 이뤄지는 총질이라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하나됨을 외치는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면서, 동시에 정부에 굴복했다는 비난을 가하는 것은 현 상황에서 지독한 모순일 뿐이다. 냉정히 한국교회가 가진 지금의 힘을 과연 크다고 볼 수 있나? 분열을 반복한 한국교회의 현재의 모습은 차·포 떼인 장기판이자, 무기와 갑옷을 잃은 군대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최악의 상황에서 그나마 이룬 최선의 결과였다. 한국교회의 하나됨은 바로 그 힘을 되찾는 결정적 방편이다. 반 기독교정책에 몰두하는 정부에 더 이상 끌려가지 않고, 기독교의 예배와 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당장 눈 앞의 일로 일희일비(一喜一悲)할 것 없이,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회복을 위해 모두가 힘을 한 곳을 모으는데 집중해야 한다. 적어도 2021년, 한 해 동안만이라도 한국교회 전체가 지난 트라우마는 덮고, ‘하나됨(One)’을 통해 반드시 ‘승리(Win)’하겠다는 절박한 소망을 쏟아내기를 기대해 본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0-11-24
  • [기자수첩] 기독교는 좌도 우도 아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초장기전으로 접어들며, 국민들의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 설상가상 갈수록 고조되는 우리사회의 정치적 이념갈등은 가뜩이나 코로나19로 신음하는 국민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하는 중이다. 사실 보수와 진보간의 이념갈등이야 늘상 있었던 일로 그리 새로울 것은 아니지만, 이전에 보지 못한 극단적 이념간의 충돌은 조금의 타협점 없이 서로의 막장을 향해 치닫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충돌의 중심에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진보와 보수의 양 끝에서 그 어느 집단보다 강력한 행동으로, 각자의 진영을 주도하고 있다. 단순히 교회만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 전체를 상대로 한 이념 주입에 몰두 중이다. 주사파, 빨갱이 등 거의 소멸되다시피 한 반공이념들이 지금 이 시대에 되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교회라는 거대한 매개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그러한 이념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것이 극단적일지는 몰라도 엄연한 하나의 정치적 신념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들이 세상을 진짜 우려케 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거나 선동하는데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자기 이념에 동조하지 않으면,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지배하고 있다. 소위 극우, 극좌로 불리는 이들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 사고와 발상으로 교계와 사회, 국민을 가르고 있다. 일부 극우 기독교 세력은 자신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을 향해 빨갱이, 주사파, 종북주의라는 험한 말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반대로 일부 극좌 기독교 단체는 포괄적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대다수의 교회를 향해 ‘근본주의 개신교 집단’이라는 낙인을 씌웠다. 철저히 자기 중심적 사고에 얽매이다 보니, 어처구니 없는 사태들이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교계에서 익히 알려진 골수 보수 목회자들을 향해 광화문에 나오지 않고, 정부에 대해 적극적인 비난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 주사파’로 매도해 버린다. 마찬가지로 교계를 대표하는 진보 교단들인 예장통합과 감리교는 포괄적차별금지법을 반대함으로, ‘근본주의 집단’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기독교는 중립의 종교다. 각자의 정치적 개성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교회가 지향해야 할 것은 보수도 진보도 모두 복음 안에 품는 포용의 자세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잘못된 생각으로 규정하거나, 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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