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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잡이와 칼잡이 커크 더글러스
    미국 서부영화의 전설적 명배우 커크 더글러스가 지난 2월5일 103세의 장수를 누리고 영면하였다. 그의 장남으로서 부친 못지않게 영화계에서 맹활약을 해온, 오스카(아카데미)상 수상자이기도 한 마이클 더글러스를 뒤에 남겨두고 표표히 현세를 떠나갔다. 이 기회에 배우 커크 더글러스에 대하여 좀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인들(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들에 대한 대박해, 소위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보다 더 이른(앞선) 시기에 러시아인들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들에 대한 대박해, 소위 포그람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홀로코스트만큼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러시아에서의 포그람도 유대인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큰 박해였고, 그것을 참아내기 힘들었던 그들 중의 일부는 고향을 찾아 떠나는 연어처럼 옛 고향(고국) 땅으로 되돌아갔으며, 또 일부는 미국 땅으로 이민을 떠나버린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영화 <OK 목장의 결투>로 잘 알려진 미국 서부극의 명배우 커크 더글러스는 러시아인들의 포그람(유대인 박해)에 견디다 못해 미국 땅으로 이민을 떠나버린, 러시아계 유대인의 아들로 뉴욕(인근 작은 마을)에서 1916년 태어났다. 청소년 시절 그는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그리고 학비 조달을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신문배달은 기본이고 노점상, 정원사, 경비원… 등 닥치는 대로 이일 저일, 여러 일터들을 전전했던 것이다. 그는 레슬링 선수 생활로 몸을 단련했고, 그 스포츠를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이용해 생활비 또는 학비를 조달하는 데 일정액 보태어 쓰기도 했다. 어떻든 그는 “젊어 고생은 돈 주고도 못 산다”는 청년 때부터의 그 고난의 삶을 자연적으로 터득하게 되었고, 거기에다 신체적 단련까지 곁들여 탄탄한 몸매와 강인한 정신력을 함께 구비한 채 자신의 앞날(은막생활)에 대비해 왔다고 보겠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스파르타쿠스>란 영화의 주인공인 노예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야무지고도 강인한 모습은 벌써 청소년 때부터 자기단련을 통해 그가 이미 습득해 지녔던 그다운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어느 영화학교에 들어가 배우로서의 기본훈련을 마친 뒤 30세란 늦은 나이에 영화계에 투신하게 된다. 일생 동안 무려 90여 편에 가까운 영화에 출연했다고 하는데, 그것들 중에서 특히 그의 대표작들로 일컬어지는 <OK 목장의 결투>와 <스파르타쿠스>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케빈 코스트너의 서부극 <늑대와 춤을>이 나오게 되면서 할리우드 웨스턴에도 일대변화가 오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영화는 1990년에야 나온 작품이었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때나 되어서야 썩 참신한 미국의 서부극, 곧 인디언을 진멸(盡滅)의 대상이 아닌 화해(和解)의 대상으로 삼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1957년)에 이미 커크 더글러스 주연의 <OK 목장의 결투>가 나왔으며, 그 작품 속에 인디언들은 아예 출몰하지도 않았던 것은 매우 이색적인 일이었다고 하겠다. 지금껏 존 포드 감독의 서부극 같은 데서 ‘인디언 악당’이란 공식이 널리 통용되고 있었음을 상기해 본다면 충분히 이해될 만한 일이다. 커크 더글러스는 그 영화 속에서 포악한 인디언이 아닌 탐욕가인 백인 악당들을 무찌르는 최고의 속사포 총잡이로 그 위력을 발휘한다. 커크 더글러스는 그보다 몇 년 뒤에 나온 영화 <스파르타쿠스>(1960)의 주연을 맡아, 이번엔 불세출의 검투사가 되어 위력적인 칼잡이로서의 힘을 발휘한다. 로마 의 절대권에 대항해 노예항쟁을 이끌었던 노예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영웅적인 삶을 연기함으로써 배우로서도 완전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배우로서의 그는 이처럼 총잡이와 칼잡이로서 세상의 악(惡)과 절대권에 맞싸워 승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영화 속이 아닌 일반 현실 속에서도 총잡이나 칼잡이로 행세할 수는 없었지 않았겠는가.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도 그는 훌륭한 면을 보여준 생활인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50년대 미국 사회에 소위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쳤을 때 영화계라고 해서 그 거센 바람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때 소위 블랙리스트에 오른 동료 배우들을 위해 사실상 블랙리스트 철폐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함으로써 총잡이나 칼잡이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미국 영화사의 엄연한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그렇다고 그가 투사로서만 위대했던 것만은 아니다. 한편,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 자선사업을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이번(생의 말년)에 자신의 사유재산 거의 전액(한화 600억원 이상)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는 엄연한 사실에서도 튼튼하게 뒷받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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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시평
    2020-03-12
  • 종교자유 침해 없도록 유의해야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신종 바이러스 코로나19 사태가 한국 종교계에 우려스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수퍼감염지로 알려진 신천지는 전국교회가 긴급 행정명령으로 폐쇄되고,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주요 종단들은 자발적으로 예배와 미사 그리고 법회 등 기본 종교행사를 한시적으로 폐지하는 사례들이 속출했다. 이는 근세 한국 종교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사스나 메리스 때는 없었던 일이다. 그만큼 이번 코로나19가 엄중한 사태임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계도 정부의 방역대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그것이 곧 교인들을 보호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엄중한 사태 앞에서라도 종교의 기본사명이 훼손되어서는 안된다. 특히 교회는 예배를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이다. 따라서 예배를 폐지하는 교회는 존립가치가 없게 된다. 교인들이 스스로 알아서 예배에 출석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주일성수를 강조해온 한국교회가 스스로 예배를 폐지한다는 것은 옳은 판단이 아니다. 한국 기독교는 일제의 태평양전쟁과 6·25전쟁 중에도 예배를 드렸다. 교회는 손도독제나 마스크, 발열검사기 등을 준비하여 교인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예배에 참여토록 하면 된다. 그런데 단순히 방역당국의 요청이라 하여 교회에서의 주일예배를 폐지하는 것은 유감이다. 온라인예배나 영상예배가 가능하다면 전국에 산재한 교회당은 필요 없게 될 것이다. 각 가정이나 직장에서 온라인예배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방정부들이 행정명령으로 종교단체에 대해 강제 폐쇄나 강제 집행은 종교자유에 침해를 가할 수 있다. 법원의 판단 없이 집행되는 행정부의 일방적 행정명령은 집행자의 판단에 따라 남용될 소지가 다분히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례를 남겨 다른 사건에도 적용하려 할 수도 있어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정부가 행정명령을 종교단체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우한 바이러스는 국민의 심리상 전쟁보다 무서운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엄중한 사태를 빙자로 정부가 종교자유를 침해하는 사례를 남겨서는 안된다. 이 점을 유의할 것을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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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0-03-12
  • 주요교회들의 온라인예배의 유감
    중 국 우한에서 발생한 신종 바이러스 코로나19 사태가 한국 종교계에 우려스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수퍼감염지로 알려진 신천지는 전국교회가 긴급 행정명령으로 폐쇄되고,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주요 종단들은 자발적으로 예배와 미사 그리고 법회 등 기본 종교행사를 한시적으로 폐지하는 교회들이 속출했다. 이는 근세 한국 종교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한국 기독교는 일제의 태평양전쟁과 6.25전쟁 중에도 예배를 드렸다. 지난 3월 1일과 8일 등 서울을 비롯한 주요교회들이 주일예배를 소위 온라인예배로 대체했다. 온라인예배는 셜교자 및 예배위원들만 예배당에 모여 예배순서를 진행하고, 그것을 교인들의 켬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중계하는 형식이다. 교인들이 굳이 예배당에 출석하지 않아도 예배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가나안교인'이라고 부르는 노미날리티(교회 예배는 참석히지 않아도 스스로 기독교임을 내세우는 명목상의 기독교인) 현상을 부추길 가능성이 많다. 이미 한국교회는 노미날리티가 약 20-30%에 육박하고 있다.우한 신종 바이러스는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엄중한 상황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교계도 당연히 코로나19 대처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그것이 곧 교인들을 보호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엄중한 사태를 맞았다 하더라도 교회의 기본적 사명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교계의 온라인예배는 교회의 존재 목적인 주일예배에 대한 소홀이라는 의미에서 문제가 많다. 손소독과 마스크 착용 등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본 방역체계를 충분히 준비하고 주일예배는 계속 진행함이 옳다. 이 는 온라인예배가 잘못된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온라인예배는 예배의 본질상 온전한 예배가 아니라는 말이다. 예배는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헌금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온라인예배는 예배에서 중요한 요소인 회중의 '성도의 교제'가 빠진 것이다. 만약에 온라인예배가 인정된다면 전국에 모든 예배당이 없어도 방송국 하나면 있으면 될 것이다. 신종 바이러스가 아무리 엄중하다고 해도 주일예배를 온라인예배로 대체하는 것은 예배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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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0-03-02
  • 교회만이 사회주의화를 막을 수 있다
    지금 세계는 20세기의 인류 구원의 메시지로 등장했던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또 사회주의 경제로는 국민을 제대로 먹여살리기가 어렵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그래서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나라들도 한때 수정자본주의나 본격적 자본주의 경제질서로 편입되어 가고 있다. 그럼에도 철지난 공산주의 체제와 사회주의를 고집하고 있는 나라는 후진국으로 전락해 국민을 거지로 만들고 있다. 그 대표적 국가가 북한이다. 북한은 자신들의 경제가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를 미국의 억압과 방해 때문이라고 한다. 그건 김일성 일가의 독재체제를 유지하려는 핑계일 뿐, 북한의 경제적 실패는 사실상 사회주의 체제와 북한 지도자들의 외교적 무능에서 온 결과이다. 그로인해 북한의 주민들은 굶어죽거나, 중국에 팔려가 노예생활을 하거나, 한국으로 도망오고 있다. 북한에는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사회에는 그런 북한체제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아무리 좋은 이론적 배경을 가진 체제라 하더라도 국민을 먹여살릴 수 없는 제도라면 두말할 필요없이 폐기되어야 한다. 중국과 베트남 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그들은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 개혁개방으로 제 빨리 수정자본주의로 체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오늘날 문재인의 좌파 정부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헌법가치를 무시하고 사회주의 정책에 맘을 빼앗겨 그것을 기웃거린다. 이미 문 정부의 소득주도성정이라는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이 불과 2년여 만에 서민의 삶을 망가뜨렷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도 4.15 총선에서 여당이 승리하면 아예 사회주의 정책을 한발짝 더 내딛겼다고 한다. 모두가 그건 아니라는데 여당과 정부는 왜 그 방향으로 계속 끌고 가려하는지 알 수 없다. 자본주의의 부의 집중이 문제라면 세금정책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유럽사회의 성공이 이를 잘 보여준다.특히 사회주의는 종교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모든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교회를 비롯한 종교계는 정부의 사회주의화를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번 4.15 총선이 대단히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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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0-03-02
  • 한국기독교의 윤리적 패배
    미국의 신학자 리차드 니이버는 1054년 중세 가톨릭교회의 분열은“기독교의 윤리적 패배”라고 정의했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분열이란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 논쟁에서 성령이 어디로부터 오는가 하는 성령발출설(필리오케) 논쟁으로 ‘서방교회’(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교회’(그리스정교회)로 분열한 것을 말한다. 세계 기독교는 그때까지 ‘하나의 교회’를 지켜왔다. 그러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온다는 서방교회의 주장과 오로지 “성부로부터” 온다는 동방교회 주장을 조정하지 못한 채 1천년동안 지켜온 하나의 교회를 갈라놓았기 때문이다. 어제까지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요 자매요”라고 노래하던 갈라진 교회는 형제는 커녕, 경쟁 상대를 넘어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성지회복을 명목으로 서방교회가 일으킨 제4차 십자군은 성지로 간 것이 아니라, 1204년 동방교회의 본산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전복시키고 무자비한 약탈과 난동을 일삼았다. 그리고 거기에 라틴제국을 세우고 정교회를 파괴하는 등 기독교 국가 비쟌틴제국을 60여년간 통치했다. 그리하여 국력이 나약해진 비쟌틴제국은 1453년에 오스만 투르크에 멸망당하고 만다. 지금의 터키가 그것이다. 이는 기독교가 분열한 결과이다. 어느 시대나 교회의 분열은 기독교 신앙의 윤리적 패배이다. 신앙과 신학적 견해 차이로 교파가 만들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같은 신앙고백과 같은 신학을 공유하는 교파 안에서 교단의 분열은 두말할 필요없이 그 구성원 모두의 패배이다. 한국 기독교는 개혁파 중심의 교회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개혁신학을 공유하는 장로교가 약 78%에 이른다. 그런데 처음에 하나로 시작한 그 장로교가 수백 개의 교단으로 갈라졌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윤리적 패배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장로교 지도자들이 ‘총회장’입네, ‘노회장’입네 하며 거들먹거리지는 사이, 한국 교회는 회복하기 어려운 불신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지금 우리사회는 좌파 정권이 기독교를 위협해오고 있다. 어쩌면 저들이 사회주의화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다. 이제 우리 앞에 교회를 위협하는 적이 나타난 이상 뭉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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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0-03-02
  • 신명(神名)
    ◇ 한국 기독교는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하나님’ 이라는 신명(神名)을 차용했다. 한국인의 종교 심성에는 지고신(至高神)으로서 하나님 신앙이 자리 잡고 있어 우리 민족에게 매우 익숙한 신명이다. 중국에서 로마 가톨릭은 하나님에 대한 신명을 놓고 오랜기간 논란이 있었다. 천(天), 천주(天主), 상제(上帝) 등 중국에 진출한 가톨릭교회의 선교회마다 각기 그 번역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로마교황청이 신명을 ‘천주’로 최종 결정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천주교’라고 부른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에 들어온 신교(新敎)가 신명을 하나님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하늘에 주재하는 분이 계신다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지고신 신앙 곧 하늘(天)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 우리 민족의 최고 지고신 개념으로서 하나님 사상은 성경의 유일신 여호와를 같은 용어로 번역한 기독교의 하나님 신명을 쉽게 받아들이게 했다. 우리 민족의 고대 신화 속의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조물주이시며 주재자였다. 그는 천지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재하는 분이시다. 그래서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마한의 소도 등의 제천의식에는 뿌리 깊은 하나님 (천신) 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은 모두 노래와 춤으로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 천제(天祭)에는 먹고 마시며 춤추고 노래부르는 '음주가무'(飮酒歌舞)가 따랐다. 음주가무를 통해서 인간이 신과 하나되는 신비체험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나름의 방법이었다. ◇ 초기 미국선교사 게일은 한국인의 신 관념은 유일신관이라고 했다. “한국인은 신에 대해, 그 분은 한 분뿐인 위대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한글로나 한자로나 ‘위대한’(Great)과 ‘한 분’(One)을 의미하는 용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과 땅, 그리고 땅 아래나 최고의 통치자이시다. 위대함은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말한다고 했다. 또 선교사 알렌 클라크는 “한국사람들은 하나님이 비와 추수를 주시며 그의 은혜로 숨쉬고 살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사람들이 위급한 때에 부르는 신도 하나님이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들이 결코 진정으로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추수는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면서도 정작 가을 추수 때는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산신(山神)이나 가신(家神)이나 조상신(祖上神)께 드린다”고 했다.◇ 이는 우리 민족이 하나님 신앙 사상을 고대로부터 가졌음에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예배를 몰랐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3,24)고 말한 대로, 우리 민족이 고대로부터 간직해온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진정한 방법을 오늘날 한국교회가 회복한 것이다. 그것이 곧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예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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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02
  • 신천지 교회
    ◇ 코로나 19로 불리는 우한 폐렴이 결국 한국을 강타해 수퍼감염지로 알려진 신천지가 대구교회를 필두로 모두 폐쇄 조치됐다. 그러나 장로교 등 감염자가 다수 발생한 타 교회의 경우는 주일예배만 자율적으로 금지토록 하고 교회당은 폐쇄하지 않았다. 한국교회사에서 행정력으로 교회를 폐쇄한 역사는 일제 시대 '재림' 파들에 대한 강제 교단해산이 있다. 여기에는 성결교, 동아기독교, 재림교회(안식일교회)가 포함된다. 일제는 이들 교단의 종말론적 교리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 하나님 나라, 최후 심판 등은 신들의 나라 일본은 절대로 멸망하지 않는다는 신주불멸(神州不滅) 일본제국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 그런 교리를 강조하는 교단을 해산하고 교역자들을 처벌했다. 그러나 장로교와 감리교를 비롯한 여타 교회들은 태평양 전쟁 중에도 예배는 계속되었다. ◇ ‘신천지증거장막성전’이라는 이름을 가진 일명 신천지교회는 보편적 기독교를 일탈한 섹트(sect)이다. 1960년대 과천에서 일어난 유재열의 장막성전에서 비롯된 이만희의 신천지는 한국 기독교의 이단 집단이다. 이유는 교주 이만희를 ‘보혜사’라고 믿는 교주우상주의와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자신들의 집단을 요한계시록 15장 5절의 ‘증거 장막’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있다. 이는 비록 성경을 공부하고 예배를 드리는 등 기독교적 외형을 가졌지만 그 내용은 보편적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 유재열의 장막성전에서 여러 명의 ‘하나님’ 또는 ‘재림예수’가 나타났는데, 이만희는 그 중에 제일 막내인 셈이다. 유재열은 ‘어린종 두 증인(두 감람나무)’, 구인회와 백만봉은 ‘재림예수’, 유인구는 ‘임마누엘 하나님’, 홍종효는 ‘여호와 하나님’, 이만희는 ‘보혜사 하나님’이다. 이런 허망한 집단에 한국의 기성교회 교인들이 빠져들고 있다. 여기에는 기성교회에서 한때 중직을 맡았던 장로도 있고, 권사도 있고, 집사도 있고, 교사도 있다. 심지어 목사도 있고, 목사부인도 있다. 조금만 이성적으로 들여다보면 신천지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 수 있는데, 한국교회에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 그것은 아마도 기성교회의 보편적 성경해석에 만족을 못하고 새로운 것을 찾는 한국적 종교심성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한국인의 중교심성의 저변에는 비결사상(秘訣思想)이 숨어 있다. 비결이란 신선(神仙)이 되는 길을 제시하는 득도(得道)에 있어 비밀스러운 방법을 가리키는 도교적 용어이다. 비결은 장래를 예언하고 장차 다가올 난리에 목숨을 지키는 구원의 방법을 제시한다. 이 비결신앙은 민간신앙과 결합돼 운명론적 신앙심리가 작용해 도피성이 강하며, 이것은 사이비 신앙이나 이단을 쉽게 받아들이는 원인이 된다. 한국에서 발흥하는 신흥종교는 모두 이 비결사상에 바탕하고 있다.◇ 신천지는 자신들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성경공부로 생명나무와 선악나무를 구별하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목자를 만나 계시록의 비밀을 알아 진리의 말씀으로 세상을 이긴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비결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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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7
  • 중국 우한 폐렴과 중국몽
    지금 전 세계는 중국 허베이성의 우한시에서 발병한 우한 폐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그야말로 큰 몸살을 앓고 있다. 중국에서만 2월 11일 현재, 4만 2천명이 넘는 확진자가 발생하였고,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 한국에서도 28명째 확진자가 발생하였고, 공공장소가 수백 군데 문을 닫고, 학교에서는 졸업식을 취소하거나 영상으로 진행하고 있고,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도 중단한 곳이 생겨났다. 중국은 세계에서 미국과 겨루어 G2를 표방하고 있고, 화평굴기(和平屈起-중국의 평화적 구상 전략)와 대국굴기(大國屈起-대국이 일어선다)를 주창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이 2013년 주석이 되면서 ‘중국몽’(中國夢)으로 패권 중국의 극대화를 꾀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자신의 영향력을 오랫동안 발휘하기 위하여, 지난 2018년 2월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를 통하여 ‘주석직임기제한’ 헌법을 삭제함으로 사실상 자신이 주석직을 종신으로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에 호응하여 한국 정치가들도 너도 나도, ‘중국몽’에 함께한다고 하고 있고,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제안한 일대일로(一帶一路-중국의 새로운 실크로드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 주변 국가들과 경제/무역 합작 확대하는 것을 말하며, 내륙 3개, 해상 2개 등 5개의 노선으로 추진되고 있음)를 통하여 세계가 중국이 중심이 되는 야심작을 펼치고 있다. 그런데 이번 우한 폐렴 신종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시진핑 주석에 대한 중국 국내에서 책임에 대한 반발이 생기고 있다고 하니, 그 결과가 주목된다. 중국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만만치 않다. 중국은 전 세계 GDP의 16.9%를 차지하고 있고, 전 세계 수출입 금액은 11.7%, 전 세계의 중국 대외금융자산이 3.1%, 전 세계 시가총액이 9.2%, 전 세계 여행지출도 17.8%를 차지할 만큼 경제적 규모와 비중이 크다. 그런데 이번 우한 폐렴 사태로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1분기에 작년의 6%에서 2%로 떨어질 전망이다. 2002~2003년에 발생했던 사스 때의 충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이다. 이번 중국에서의 신종 바이러스에 의한 공격은 중국 경제의 취약성까지 드러내고 있어 중국의 미래에도 관심이 쏠린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이 전체 교역량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23.3%로 전체의 1/4을 차지한다. 그래서 중국의 GDP가 1% 포인트 하락할 때, 한국은 0.35% 포인트가 떨어질 것으로 추정하여, 전 세계에서 중국 다음으로 가장 피해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우한에서 발생한 우한폐렴 역병은 여러 가지로 중국과 주변 나라에 피해를 줄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이들은 중국은 대국굴기를 할 것이 아니라, 도광양회(韜光養晦-칼날을 칼집에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중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동북지역인 고구려/발해 등 한반도와 관련된 역사를 중국역사로 편입하려는 계획) ‘서북공정’(西北工程-서북지역인 위구르(돌궐)의 분리 독립운동을 차단하려는 계획) ‘서남공정’(西南工程-서남지역인 티베트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프로젝트)등으로 역사를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만들면서, 시진핑 주석 취임 이후 더더욱 자신들이 세계의 패권을 거머쥐고 호령할 야심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이번 우한 폐렴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정치와 경제, 역사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다. 중국은 이미 수년 전부터 기독교 박해에 박차를 가하면서, 사실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열심을 내게 되었다. 중국은 시진핑 주석 이후, ‘기독교의 중국화’라는 이상한 슬로건을 내 걸고, 교회를 부수고, 십자가를 철거시키고, 기독교 지도자들을 구금하고 있다. 지난 2018년에는 산시성 린펀시에 있는 금빛등대교회를 강제로 폭파/철거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바 있다. 이 교회는 당시 5만 명의 성도가 있던 것으로 알려진다.이번에 중국 우한시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이곳에서도 교회를 강제로 철거하고, 선교사들을 강제로 추방하고, 성경책을 불태우고, 교회에 중국기와 시진핑 주석의 사진을 걸게 하며, CCTV를 설치하여 교회를 감시하고, 지도자들을 구금하고, 교회에서 정부를 홍보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등 다양한 기독교 말살과 핍박행위를 해 온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에 공산당 정부가 들어선 지 71년이 되었다. 중국의 역대정권의 평균수명은 70년이라고 한다. 기독교를 박해하는 정부나 정권, 지도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묵과(默過)하지 않으신다. 초대교회 헤롯왕은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지 않다가 충이 먹어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고(행12:23)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은 왕궁에서 쫓겨나 들판에서 짐승처럼 7년을 지내기도 하였다(단4:32~33).
    • 연지골
    • 토요시평
    2020-02-14
  • 한국교회 목자들이여, 모두 예언자가 되라
    기독교의 목사는 구약 성경의 제사장 전통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예언자 전통에서 나온다. 제사장은 그 가문에서 대대로 세습되는 성직이고, 예언자는 하나님의 소명에 따른 사명자이다. 그러므로 예언자의 아들이 반드시 예언자 되는 것은 아니다. 예언자는 엘리사처럼 밭을 갈다가 부름을 받기도 하고, 아모스처럼 뽕밭에서 일하다가 부름을 받기도 하며, 스가랴처럼 제사를 드리다가 부름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예언이 끝나면 그들은 다시 본직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예언자이다. 기독교의 목회자는 그 예언자 전통에 또 주님의 사도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면 사도들은 어떻게 부름을 받았는가. 그들은 하나같이 직업 현장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베드로를 비롯한 갈릴리 어부들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세리 레이와 마태는 세관에서 일하다가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사도들의 자녀들이 그 자리를 세습하지는 않았다. 현대교회 목회자도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부름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 전통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언자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권이나 제사장의 종교권이 그 본디 사명을 일탈해 타락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경고를 그들에게 발한다. 그것이 예언자의 사명이다. 왕이나 제사장들이 예언자들의 그 경고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나라와 백성이 평안하고, 교만하여 예언자의 경고를 무시하면 그 사회에 불행이 닥친다. 문제는 예언자로 부름받은 자가 왕권이나 제사장권이 두려워 입을 닫으면 결국 그 화가 예언자 자신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예언자가 요구된다. 한국교회에는 15여 만명에 이르는 목회자가 있다. 교계 일각에서 문재인 정부가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주의 정책을 쓴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왜 지금 사회를 향한 예언을 하지 않나? 이런 예언자를 성경은 ‘벙어리 개’(사56:10)라고 부른다. 15만의 목회자들이 다같은 목소리를 내면 투표로 선출되는 정부가 무슨 힘으로 교회의 신앙을 함부로 억압할 수 있겠나. 어쩌면 우리사회는 지금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예언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고 있는지 모른다.
    • 연지골
    • 사설
    2020-02-14
  • 우리사회 희망은 기독교에 있다
    인류사회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사회의 주류종교가 사회적 가치관을 공급해 왔다. 종교가 그 기능을 제대로 못할 때 결국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그 사회를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중세 유럽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사회를 변화시켰지만, 아시아는 클레식 종교들이 정체되어 20세기의 공산주의 운동이 사회적 가치관을 제공하며 나타났다. 20세기는 공산주의야 말로 인류사회의 희망이었으나, 그러나 70여년 만에 인류사회에서 소멸되고 말았다. 역설적이게도 그들 공산주의자들이 과학의 발달과 함께 곧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던 종교는 그 시기에 가장 많이 늘어났다.오늘날 대한민국은 딱히 주류종교라고 할 수 있는 종교가 없다. 우리사회에 여러 가지 종교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고 해서 다종교사회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토착된 전통종교로서 불교가 있고, 종교적 기능은 사라졌지만 전통문화로서 유교가 있으며, 뒤늦게 우리사회에 들어온 기독교(천주교와 신교)가 그 세력을 양분하고 있다. 그래서 특별한 주류종교가 없다는 뜻에서 우리사회를 다종교사회라고 하는 것이다.그러나 한국불교는 무속과 미신에 너무 깊이 빠져 있고, 유교는 이미 종교로서의 생명을 다했기 때문에 거기에서 사회적 가치관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우리사회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밖에 없다. 그런데 기독교도 분파주의와 기복주의로 얼룩져 사회를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변화시키려는 데는 역부족이다. 최근 광화문에서 모인 우파인사들의 중심에 기독교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한국 기독교를 대표할 만한 입장에 있지 않다는 면에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까지는 크게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지금 한국 기독교가 진정으로 우리사회를 바로 이끌려면 분파주의와 기복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가 우리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주님을 위해 살겠다는 사람들이 어째서 주님의 영광을 가리고 전도를 가로 막는 짓을 계속 고집하고 있어야 하는가. 그러면 결국 하나님도, 국민도 그런 교회를 외면하는 날이 올지 모른다.
    • 연지골
    • 사설
    2020-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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