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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6
    창세기 12:1-3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주신 약속이다. 이 약속의 내용을 한글 개역성경에 맞추어 간추려 보면 첫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어 그의 이름을 위대하게 하며, 셋째는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게 하여, 여호와께서는 그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시고, 그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얻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 약속은 궁극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의 만민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영적인 복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성령세례를 받고 새언약의 선지자로 인정받은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서 요한과 더불어 날 때부터 앉은벵이를 고치자 그들을 주목하눈 자들에게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고 하나님께서 너희 조상들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들이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씨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복 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의 종을 일으켜 세우셔서 너희에게 보내셨으니, 이는 너희를 각각 악에서 돌아서게 하여 너희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이다 (ἐνευλογ ηθήσονται).” (행 3:25) 여기서 말하는 복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 도 바울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것을 미리 알고 먼저 아브 라함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ἐνευλογη θήσονται).’라고 하였다. 그 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 께 복을 받는다” (갈 3:8-9) 여기서 바울은 모든 이방인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다는 의미를 모든 이방인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복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복을 주는 자가 아니고 아브라함도 복을 받는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이나 이방인들 모두가 아브라함 때문에 복을 받으며, 아브라함과 함께 구원의 복을 받는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모범을 보인 자이다. 그런데 한글 개역 성경은 창 12:2의 마지막 부분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고 번역하고 있다. 3절에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가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가 저주를 받으며,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받는다고 했으니, 아브라함을 가리켜 “복의 근원”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그런대로 타당하고 일리가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근원”이라는 말이 없다. “.... 네가 복이 될 것이다” (הכרב היהו)고 되어있다. 개역성경은 “근원”이라는 말은 덧붙여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적 번역 내지 부가적 번역은 독자의 이해를 위하여 때로 필요하다. 또한 사람을 가리켜 “복”이라고 일컫는 것은 우리 말의 어법상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개역성경 번역자는 “근원”이라는 말을 첨가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다는 말과 “복”이 된다는 말은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사람이 복의 근원이 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복의 근원이시다. 아브라함은 세상 만민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통로일 뿐이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아니라 복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그 자체가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복의 근원”이 아니라 “복”(“브라카” הכרב) 그 자체이다. 따라서 “근원”이라는 말은 빼고 “너는 복이 될 것이다”라고 번역해야 옳다. 이 같은 예는 사 19:24에서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와 더불어 “복”이 될 것이라는 표현이나 슥 8:13에서 유다 족속과 이스라엘 족속이 이방 가운데서 “복”이 될 것이라고 표현을 볼 수 있는 데 개역성경에서도 다같이 단순히 “복”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우리는 “너는 우리 집 복덩이야”라는 말을 쓴다. 네가 우리 집에 복을 불러온 사람이다. 너로 말미암아 우리 집이 복을 받았다는 의미로 쓴 말이다. 아브라함을 가리켜 “복”이라고 일컫는 말도 바로 이러한 의미로 쓰여진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근원”이라는 말과 비슷한 말로 “근본”으로 번역되는 말이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잠 1:7), 혹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9:10) 할 때, “근본”이라는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번역이다. 잠 1:7에서 근본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는 “레쉬트”(תישאר), 잠 9:10에 “근본”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는 “테힐랏”(תלחת)이다. “레쉬트”(תישאר)라는 말은 “처음에”(beginning, 사 46:10), “시작점”(starting point, 창 1:1 시 111:10), 혹은 장자(창 49:3), 첫 열매(느 12:44) 등에서 사용되는 말이고, “테힐랏”(תלחת)은 창 13:3; 41:21; 43:18; 삼하 17:9; 왕하 17:25 등에 사용되는 어휘로 기본적으로 “시작”(beginning) 혹은 “처음에”(at first) 의 의미를 갖는 말이다. 따라서 이 어휘는 다같이 “시작”(beginning) 이라는 의미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시작”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한국말 “근본”이라는 말은 “시작”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근본”이라는 말은 지식과 지혜를 구성하는 어떤 본질적 요소를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에 결코 히브리어의 본 뜻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모든 지식과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제일 먼저 얻어야 할 지식과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첫걸음이요, 지혜의 시작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한글 성경에서 사용하는 “근본” “근원”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사용하는 의미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자어나 한국어의 뜻 풀이를 통해서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는 경우가 많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6-03-17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5
    기드온은 이스라엘 백성을 미디안 사람들로부터 구원한 용사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을 그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기드온의 출현은 앞으로 이스라엘에 왕정의 출현을 예고한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기드온이 삼백 명의 병사를 데리고 야간 기습작전을 벌여 미디안 병사들을 물리치고 통쾌한 승리를 얻는 사건은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짜릿한 승리감을 맛보게 한다. 그래서 우리 목회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세상과 맞서 싸울 “기드온의 삼백 용사”를 양성하려고 한다. 복음의 정예부대를 기드온의 삼백 용사에 비유하는 것이다. 다 좋은 의도이고, 또한 그러한 복음의 정예부대는 필요하다. 할 수 만 있다면 모든 교회가 그러한 복음의 정예부대가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문제는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을 대적하기 위하여 그의 군사로 선발한 삼백명이 과연 “용사”였는가 하는 점이다. 용사란 말은 전쟁에 능한 장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다윗과 그를 따르는 자를 용사라고 부르고(삼하 17:8), 사울과 요나단을 용사라고 부른다(삼하 1:25). 여호수아서 10:2에는 기브온 거민을 용사라고 칭한다. 개역성경에서 “용사”라고 번역하는 히브리어 "기볼"(רובג)이 라는 말은 “용맹스러운 사람”(mighty, vigorous man)을 뜻한다. 형용사로 사자를 가르켜 용맹스럽다(רובג)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전쟁과 관련하여 사용될 경우 히브리어 “기볼”은 “전쟁 영웅” (military hero)나 “전쟁의 제 일인자”(champion of war)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전장에서의 장수나, 왕을 호위하고 따르는 장군들을 가르키는 말이다. 따라서 기드온 본문에서는 기드온이 선발하여 전장에 데리고 나간 300명에 대하여 “용사”라는 말은 쓴 적이 없다. 다만 기드온에 대하여 여호와의 사자가 “큰 용사여”(רובג ליחה , 삿 6:12)라고 부른다. 삼백명에 대해서는 다만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자, 삼백”이라는 말은 쓰고 있다. 본문을 살펴보면 기드온이 벌인 전쟁은 여호와께서 기드온을 부르면서 시작되며, 이 전쟁은 여호와의 주도로 치러진 “여호와의 전쟁”이다. 흔히들 성전(the holy war)이라고 말하는 전쟁이다. 여호와 전쟁은 여호와께서 직접 그의 백성들의 전쟁에 참여하여 그의 백성을 위하여 싸우시고 승리하시는 전쟁이다. 여호와께서는 하늘에서 천군을 거느리시고, 지상에서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그의 군대로 거느리신다. 전쟁이 일어나면 여호와께서는 비나 우박이나 천체의 변화를 통하여 그의 대적을 물리치시고, 그의 백성이 추격하여 전리품을 탈취하게 하신다. 따라서 여호와 전쟁에서 병사들이 많아야 할 필요가 없다. 적은 병사들로 큰 군대를 무찔러야 여호와의 위대하심과 강하심이 드러날 것이고,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위하여 싸워 승리하신 하나님을 더욱 믿을 것이다. 그래서 성전이나 여호와 전쟁의 대표적인 특징은 참전하는 병사의 수를 줄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줄인 병사들도 꼭 정예부대나 특수부대여야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오합지졸일수록 하나님의 영광은 더 들어난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기드온에게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할까 함이니라”(삿 7:2)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병사의 수를 줄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이만 이천 명은 돌아가고, 일만 명이 남았지만 그것도 많기 때문에 더 돌려보내라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친히 자신이 기드온과 함께 전장에 나갈 자를 선발하겠으니 그들을 데리고 물가로 내려가라고 명하시며,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삿 7:4)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삼백명을 마치 대단한 시험에 합격한 엘리트 정예부대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여기서 “시험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차라프"(ףרצ)라는 말을 쓰는데 이는 물론 “시험하다”(test)는 뜻도 있지만 “골라내다”(smelt, refine)의 뜻도 있다. 이는 금을 제련할 때 쓰는 말로 광석을 부수어 금과 돌을 골라내는 작업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말의 뜻은 자격이 있나 없나를 “시험하다”는 말이라기 보다는 단순히 분류하고 고르다는 뜻에 더 가깝다. 여호와께서는 숫자를 줄이기 위하여 일만 명을 물가로 데리고 와서 물을 마시게 하는 데 “개의 핥는 것 같이 그 혀로 물을 핥는 자”(삿 7:5), 혹은 “물을 핥아 먹는 자” 삼백명을 남기고 9,700 명을 돌려 보내신다. 여기서 물을 “핥아 먹는자”(קקל, 핥아 먹다) 와 “사타”(רובג חתש, 마시다)를 구별한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물을 “마시는 자”이다. 개는 물을 핥아 먹는다. 그래서 물을 “핥아 먹는 자”를 “개 같은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발해주신 300명은 사실은 정예부대 라기 보다는 물도 사람처럼 제대로 못 마시고 개처럼 마시는 자들이라고 해야 옳다. 만일 이들이 정예부대라면 미디안과 전쟁을 할 때에 용맹을 떨치며 미디안 병사들과의 전투에 몇 사람을 죽였다는 구체적인 전과나 실적이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이 한 일이라곤 고작 횃불을 항아리에 숨겨가지고 가서 “기드온을 위하라. 여호와를 위하라”고 외친 것 밖에 없다. 칼이나 창 한번 써보지 못했다. 엄밀하게 전쟁을 위한 전투요원이라고 볼 수 없는 자들이다. 용사 요나단의 말대로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한 것이다”(삼상 14:6). 여호와께서는 오히려 “세상의 미련한 자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하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전 1:27). 하나님께서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불러서 원하시는대로 불러서 쓰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능력이 부족하면 능력을 주시고, 지혜가 부족하면 지혜를 주셔서 그가 원하시는 일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기드온을 따르는 삼백인들은 용사가 될 수 없고, 용사라고 불러서도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물 한모금도 사람답게 마시지 못하고 개처럼 핥아먹는 조무래기들을 그의 군사로 쓰셔서 친히 승리를 거두신 것이다. 기드온의 삼백 명을 높일수록 하나님의 능력은 과소평가 될 것이고, 이 삼백명의 역할을 강조할수록 하나님의 영광은 빛이 바랠 것이다. 기드온의 삼백명을 결코 용사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기드온을 따르는 삼백 명을 용사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자기 힘으로 승리했다는 말을 못하게 하기 위하여 상식 이하로 병력을 감축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계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중심하여 하나님을 높이고 영광스럽게 하는 방향으로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꼐서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분시다.(눅 3:8)
    • 해설/기획
    • 손석태
    2016-03-11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4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삼상 19:24)는 이 말은 사울이 그의 대적 다윗을 쫓아 다닐 때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자 그는 라마의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고 심지어는 그는 옷을 벗어버렸다. 그리고 사무엘 앞에 이르자 그 앞에서 예언을 했으며, 그날 온 종일 벗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저히 선지자 같지 않는 사람이 선지자와 같은 행동을 하기 때문에 비꼬아 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사울의 행동은 분명히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다. 사울의 행동은 정성적아자 않다. 분명 미친 사람이나 할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울이 미쳤다”라고 말을 해야 옳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고 말한다. 자기들의 눈으로 볼 때 선지자가 아닌데 선지자적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지자는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인가?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삼상 19:24)는 이 말은 사울이 그의 대적 다윗을 쫓아 다닐 때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자 그는 라마의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고 심지어는 그는 옷을 벗어버렸다. 그리고 사무엘 앞에 이르자 그 앞에서 예언을 했으며, 그날 온 종일 벗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저히 선지자 같지 않는 사람이 선지자와 같은 행동을 하기 때문에 비꼬아 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사울의 행동은 분명히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다. 사울의 행동은 정성적아자 않다. 분명 미친 사람이나 할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울이 미쳤다”라고 말을 해야 옳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고 말한다. 자기들의 눈으로 볼 때 선지자가 아닌데 선지자적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지자는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인가?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라고 번역하는 히브리어는 “나비”(איבנ)이다. 이 말은 “예언자적 황홀경에 빠져있다” (be in the prophetic ecstacy) 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동사 “나바”(אבנ)의 파생어이다. 히브리어 사전 BDB에 의하면 “나바”(אבנ)는 가장 고대적인 종교적 황홀경 형태의 예언으로 노래나 음악을 동반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었으나, 후대에는 경우에 따라 미래에 있을 일을 미리서 말하는 예언(prediction)도 있었지만 주로 종교적 가르침 (religious instruction)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명사형 “나비”(איבנ)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대언자”(the Spokesman of God)로 번역하고 쓰이는 말이다. 하나님꼐서는 그의 선지자자에세 말씀을 주시고, 선지자는 그 말씀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입의 역할을 하는 자이다. 따라서 구약성경에서는 선지자를 가리켜 “여호와의 입”(הוהי יפ)이라고 일컫는다(레 24:12;사 1:20; 6:7; 40:5; 58:14; 62:2; 렘5:11; 미4:4).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도구로 쓰시기 위하여 특별히 선택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미래에 일어날 일을 대언하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과거에 있었던 일을 돌이켜 생각하게 하고 그 뜻을 해석해주시거나,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의미를 깨우쳐 주시기도 한다. 따라서 “나비”(איבנ)를 가리켜 미래의 일을 점치는 예언자라고 일컫는 것은 “나바”(איבנ)의 의미를 지나치게 축소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의미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번역도 아니다. 따라서 “나비”(איבנ)를 “예언자”라고 말하는 것보다 “선지자”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다. 선지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알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방법은 꼭 말씀을 대언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말이 아닌 의미있는 행동이나 특별히 상징성 있는 사건을 통하여 표적과 징조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겅우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여 발가벗긴 체로 포로로 잡혀갈 것을 미리서 알려주시며, 이것을 백성들에게 실감나게 가르치기 위하여 선지자 이사야에게 발가벗고 3년을 살으라고 명하신다(사 20:1-3). 뿐만 아니라 그의 자식들에게도 “스알야숩” (남은자는 돌아오리라, 사 7:3) 또는 “마할살랄하스바스”(노략이 빠름, 사 8:3)과 같은 별로 성스럽지도 않고 의미도 어려운 이름을 지어 부르게 함으로 앞으로 다가올 이스라엘의 멸망과 바빌로니아로부터의 귀향을 예고하게 하신다. 호세아에게는 고멜이라는 자식이 딸린 창기와 결혼을 하라고 하심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비뚤어진 결혼관계를 비유하며 살게 하시며, 에스겔에게는 그가 사랑하고 아끼는 아내를 빼앗아 비정한 장례를 치르게 하심으로 다가올 이스라엘의 처참한 전쟁의 참화와 그들이 당할 비극적인 종말을 알리게 하신다(겔 24:19-27). 선지자들의 활동이란 입으로만 하는 것은 아니고 온 몸으로 하고, 선지자 자신 뿐만 아니라 선지자의 온 가족이 함께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사울이 다윗을 체포하기 위하여 다윗이 머므르고 있는 라마의 나욧에 있는 사무엘의 집으로 그의 부하들을 세번이나 보냈을 때 그들이 모두 예언을 한 일이나, 심지어 그가 보낸 부하들이 돌아오지 않자 사울 자신이 직접 다윗을 붙잡으려고 라마에 올라 갔을 때, 그도 가면서 예언하고 심지어 사무엘의 집에 이르러서는 아예 옷을 벗어버리고 온 종일 쓰러져 있었는데 이들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거나 방언을 한 것이 아니지만 성경은 이들이 예언을 하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울의 부하들에게나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삼상 19:20, 23) 예언을 했다고 했다. 이들은 자기들의 자의로 예언을 한 것이 아니다. 사울은 거의 의식불명의 상태인 것 같다.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아닌데도 예언했다고 말한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예언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이들의 행위가 말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한 것은 아닐찌라도 분명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는 상징적 행위를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자기들의 부하를 보내고 심지어 자기도 출동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임하심으로 이들의 악행이 제지되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울의 이 악행으로부터 다윗을 보호하고 계심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간접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의미에서 예언했다는 말을 쓰고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그들의 하나님의 영을 받아 예언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무엘 앞에서 사울이 옷을 벗었다는 사실은 의미있는 선지자적 예언 행위(prophetic ac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블레셋과의 전쟁 중에 스스로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번제를 드려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였다. 이를 불쾌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서 자기 백성의 주권자로 삼으실 것이기 때문에 사울의 왕국이 길지 못할 것임을 사무엘을 통하여 말씀하셨다(삼상 13:13-14). 뿐만 아니라 삼상 1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하셨는데 진멸하지 않고 진멸할 물건을 취함으로 마치 자기가 하나님 행세를 함으로 신성을 모독하는 죄를 범했다. 그리하여 그는 아간처럼 진멸할 물건을 취하는 자가 진멸될 물건이 되리라는 여호와의 진멸의 법칙(헤렘[םרח]의 법칙, 수 6:18)을 범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입을 통하여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니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삼상 15:23)라고 왕을 폐하는 선언을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대신하여 새로 왕으로 기름부으신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 다니다가, 결국 사무엘 앞에서 그는 스스로 그의 왕복을 벗고, 온종일 “벗은 체로 쓰러져 있었다.”(삼상 20:24). 하나님께서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이 전사하기 전날 밤, 신접한 여인을 찾아온 사울 앞에 사무엘의 망령을 불러 그의 입을 통하여 그의 죽음을 예고하신다. 그때 여호와께서는 사울이 주의 맹렬한 진노를 아말렉에게 실행하지 않았던 죄, 곧 “헤렘”(םרח)을 범한 때문에 그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겨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삼상 28:18-19). 그를 버리시고 심판하신 이유가 아말렉 사건과 관계가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사울은 길보아 산에서 처참하게 죽었다. 아말렉 사건으로 그는 죽음을 선고 받았고, 결국 아말렉 사건으로 죽음을 맞았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사울이 사무엘 앞에서 발가벗고 마치 죽은 사람처럼 엎드려 있는 모습은 분명 다가오는 그의 주검의 모습을 그 스스로 예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지자가 될 만한 사람이 못되는 사람이 선지자처럼 행동하니까 장난스레 비꼬는 말처럼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고 말했겠지만 그는 분명 선지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기름부은 후, 그를 그의 아비 집으로 돌려보내며 그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받은 사실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그 표적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대가 있는 하나님의 산에 이를 때에 각종 악기를 앞세워 예언하고 내려오는 선지자들의 무리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만일 사무엘의 말대로 그들을 만나게 된다면 사무엘의 말대로 그가 이스랑레의 왕이 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무엘의 말대로 그는 선지자 생도들을 만났다. 그리고 이때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강하게 임하시어 이들과 함께 예언을 했으며, 이때 사울은 딴 사람 (another man)이 되었다. 중생하여 새사람이 된 것은 아니었다. 사울이 선지자 생도들과 함께 어울린 사실 자체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변화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징조요 상징적인 행위였다. 사울의 인생은 예언으로 시작하여 왕이 되었는데, 자신의 운명을 자기가 예언한대로 결국 그 예언이 성취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필요에 따라 사람을 선택하여 선지자적 역할을 하도록 그의 영을 주시고, 그들을 그의 뜻을 전달하는 도구로 쓰신다. 선지자의 입도 쓰시고, 발도 쓰시며, 몸도 쓰시고, 가정과 아내와 자식들도 쓰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전하고, 해석하고, 가르치게 하기 위하여 누구든지 선택하실 수 있고, 누구든지 그가 원하는 형태의 도구로 쓰실 수 있다.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6-02-25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3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분리할 수 없다. 구약성경의 가르침도 따라야 하고, 신약성경의 가르침도 따라야 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어디까지 따라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구약성경의 핵심을 이루는 제사와 관련된 문제는 분명한 가르침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는 여전히 성전, 제사장, 제물, 제단, 번제 등의 구약적인 어휘를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이들은 개념상 많은 혼란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실제 신앙 생활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이 모든 것들이 다 그리스도의 모형이고, 이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 완성되어 더 이상 우리가 붙들고 있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를 성전이라고 부르거나 강단을 제단, 목사를 제사장, 헌금을 제물, 주일을 안식일 등으로 부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이들은 다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모형(type)은 실형(antitype)이 완성되면 필요치 않다. 이는 마치 아파트를 사고자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먼저 건축업자가 지어놓은 모델 하우스에 가서 그것을 살펴보고 계약을 한다. 그리고 그 아파트의 건축이 끝날 때까지 계약자는 그것을 마음에 두고 바라보고 희망 가운데 살다가 아파트가 완공하면 그곳에 들어가 사는 것이다. 아파트의 계약자는 비록 그 아파트가 완공되지 않았을 지라도 그가 지니고 있는 계약서는 그 계약서 소유자가 건축중인 아파트의 주인임을 인지하고, 아파트가 완성이 되었을 때 건축자는 그에게 아파트의 열쇠를 건네 주며 그곳에 들어와 살도록 허락할 것이다. 그러나 건축자는 아파트가 완성되었을 때 모델 하우스는 없애버린다. 이미 모델 하우스로서의 기능을 다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어떤 인물이나 사건이나 혹은 제도 등을 모형으로 사용하여 앞으로 오실 실형, 곧 그리스도의 모습과 그의 하실 일을 보여주셨다. 이제 그리스도는 오셨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지금 모델 하우스 시대에 사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새로운 성전, 곧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즐기고 누리면 되는 것이다. 솔로몬은 왕이 되어 제사를 드리러 기브온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큰 산당의 제단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그가 구하는 지혜를 그에게 주셨다. 그런데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히브리어 “에렙 오롯”(תולע ףלא)은 개역성경의 번역대로 “일천 번제”(a thousand offerings)이다. 따라서 이 “일천 번제”라는 말을 한국의 많은 성도들은 “일천 번의 번제”라고 이해하고, 첫째는 3년 동안 계속적으로 제사를 드린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3년 동안 빠짐없이 새벽 기도회나 대 예배에 참석하며, 둘째는 제사를 드리러 나갈 때는 반드시 제물을 바치기 때문에 교회에 갈 때마다 특별한 헌금을 바친다. 그리하여 솔로몬을 본받으려고 한다. 솔로몬처럼 지혜와 부귀와 명예를 주셨다.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고, 그때마다 준비한 헌금을 드리는 일은 참으로 귀한 일이고, 칭찬할만한 일이다. 그런데 과연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렸다고 할 때, 3년 동안 빠짐없이 산당에 나가서 제사를 드렸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왕이 백성을 다스리는 일도 힘들었을 텐데 3년을 번제만 드리고 있었다는 말인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히브리어 “오라”(הלע)라는 말은 “번제물”(offering), 즉 “제단에서 온전히 태우는 제물”(an offering burned completely on alter)을 말한다. 또한 동사 “야아레”(הלעי)는 “아라”(הלע, 올라가다”의 사역형으로 “올리다” 혹은 “(제물을)바치다”는 뜻이다. 여기서 동사 “오라”는 명사형 “오롯”과 사역동사형 “야아레”(הלעי)가 같이 쓰이고 있다. 따라서 히브리어 원문, “에렙 오롯 야아레 쉬로모”(המלש הלעי תולע ףלא)는 문자적으로 “솔로몬이 일천 번제물을 (번제로) 드렸다.”(Solomon offered a thousand burnt offerings)라고 이중적으로 번역해야 한다. 개역성경은 이러한 히브리어 원문을 섬세하게 다루지 않음으로 다만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라고 번역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일천번의 번제를 드린 것처럼 오해된 것이다. 다행히 “바른성경”을 비롯한 현대 역본들은 “번제물”로 바르게 번역하고 있다. 이는 솔로몬이 소나 양이나 염소 등을 합하여 일천 마리의 짐승을 제물로 드렸다는 의미이다. 즉 많은 제물을 드렸다는 것이다. 결코 일천 번의 제사를 드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솔로몬이 구한 것을 “지혜”라고 보통 알고 있지만 솔로몬은 자신이 어린 아이라서 세상 물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주께서 택하신 백성을 셀 수 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으니 “여호와께서 주님의 종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주님의 백성을 재판하고 선악을 잘 분별할 수 있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솔로몬이 여호와께 구한 말을 문자적으로 번역해보면 “그리고 선악을 분별하여 주의(당신의) 백성을 재판할 수 있도록 듣는 마음”을 주의 종에게 달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솔로몬이 구한 것은 백성들의 소리를 듣는 마음(עמש בל), 곧 이해심과 선악을 분별하는 분별력(ערל בוט–ןיב ןיבהל)이었다. 서양의 역본들은 이를 understanding mind 와 discerning heart로 번역하고 있다. 솔로몬의 지혜는 그가 무엇을 구해야 할 지를 아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백성들의 소리를 듣는 이해심과 바르고 공정하게 시비를 가릴 수 있는 분별력이었다. 그가 구한 것은 당장 그가 누릴 수 있는 부나 명예나 장수를 위한 건강 등이 아니었다. 솔로몬이 아이의 엄마를 찾아주는 재판 이야기는 그의 이해심과 분별력의 극치라 할 수 있고,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참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솔로몬이 일천번제물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해심과 분별력을 주셨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특별하여 원하는 것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고, 솔로몬도 자기가 하나님께 성대한 번제물을 바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베푸신 언약과 인애로 자기를 왕으로 세우셨으니, 어린 자기가 백성을 잘 재판할 수 있도록 이해심과 분별력을 달라고 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진실한 예배를 드리고, 많은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하였다고 해서 그 댓가로 우리에게 복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마땅히 성도들로서 해야할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시는 분이다. 삼천 번제, 혹은 삼천 번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거나 복을 주셨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고, 기독교적이지도 않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6-02-19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12
    이사야서 9:1-7에는 어둠과 죽음의 땅에 큰 빛으로 한 아기가 태어나 온 땅에 큰 기쁨과 즐거움을 즐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6절에는 그 아기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데, “그 어깨 위에 통치권이 있으며 그 이름은 위대한 상담자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기에게는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권이 주어졌는 데, 그 이름을 “위대한 상담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그리고 “평강의 왕”이라고 불리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 아버지, 왕이라는 칭호는 우리가 쉽게 이해가 되는 것이지만 “위대한 상담자”라는 말은 익숙치 않다. “페레 요에츠”(ץיעוי אלפ)를 한글로 번역한 것이지만 이 번역도 다양하여 한글 개역에서는 KJV을 따라 “페레”와 “요에츠”를 분리해서 “기묘자”(Wonderful)와 “모사”(Counselor)라고 번역하여 다른 두 개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페레”(אלפ)라는 말은 분명 “무엇인가 비범한 것”(something extraordinary) 혹은 “놀라운 것”(marvel, something wonderful) 등의 의미를 가진 어휘이며, “요에츠”(ץיעוי)라는 말은 “상담자” (counselor)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 한 아기는 통치권을 가진 분으로,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사시는 아버지, 그리고 평강의 왕이시다. 이러한 분에게 “상담자”라는 말은 의미상으로나 문맥 구조 상으로 그 병행성이 맞지 않다. 여기서 “상담자”에 대한 어휘의 바른 이해를 위하여 우리는 본문을 자세히 살펴봐야 할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전에는”(in the former times, ESV. in the past, NIV)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지만 “후에는” (in the later times, ESV. in the future, NIV) 해변길과 요단 건너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9:1). 따라서 이사야는 전과 후를 비교 대조하고 있다. 한글 역본처럼 “옛적에” 와 “그 뒤로” 혹은 “후에는”이라는 번역은 본문의 문예적 표현을 간과한 것이다. 이는 주전 734-733년에 있었던 아시리아 왕, 디글레빌레셀 3세의 침략으로 말미암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패망과 더불어 북왕국 백성들이 받은 고난을 염두에 두고, 그때를 가리켜 “전에는” 표현을 쓰고, 이후 한 아기의 탄생으로 열리는 빛의 세상을 “후에는”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스불론과 납달리 땅은 아시리아에게 점령당한 이스라엘 땅을 가리키며(왕하 15:29; 두란노성서지도 141, 지도 68 참고), “해변길”은 지중해 연안의 남북을 잇는 대로로 “돌”(Dor) 까지, 그리고 “요단 건너”는 “길르앗”을, “이방의 갈릴리”는 여러 이방 사람들에게 점령당했던 “므깃도”(Megiddo)를 중심한 갈릴리 지방을 염두에 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역의 주민들에게 이후에는 큰 빛을 비추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언약을 저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는 이스라엘에게 가혹한 처벌을 하시지만 영원토록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의 약속을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회복을 이루기 위하여 오시는 아들, 한 아기는 하나님과 같은 신적 존재이다. 그는 분명 전쟁에서 패망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능력의 지도자요, 해방자이시다. 그래서 그를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왕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것이다. 이사야 7장에는 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다 왕조의 몰락을 걱정하는 가운데, 많은 돈을 아시리아 왕, 디글랏빌레셀에게 보내어 구원을 요청할 생각을 하고 있는 유다왕 아하스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을 지켜주실 것을 약속하시며, 그 징조로 처녀가 잉태하여 “임마누엘”이라는 아들을 낳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그의 구원자로 아시리아 왕을 기다리는 아하스에게 하나님께서는 임마누엘 왕을 기다리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는 분명 기묘하다. Wonderful 하다. 그래서 NAB에서는 “놀라운 상담자”(Wonder-Counselor), 한글 새번역은 “놀라운 조언자,” 바른 성경에는 “위대한 상담자”라고 번역하여, “페레 요에츠”(ץיעוי אלפ)를 붙여 번역하고 있다. 어깨에 정사를 맨 한 아기에 대한 칭호로서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왕에 대한 수식어로 전능자, 영존자, 그리고 평강 등이 사용되는 것을 보면, 상담자의 경우도 그 수식어로 “기묘하다, 놀랍다” 등의 “페레”(אלפ)가 사용되었다고 간주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현대의 역본, ESV나 NIV에서 처럼 “기이한 상담자”(Woderful Counselor)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문법적으로도 기묘자와 상담자를 동종의 동격(appositional), 혹은 의미상의 소유격(genetive)으로 번역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요에츠”(ץיעוי)를 “상담자”로 번역가는 것이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히브리 동사 “야아츠”(ץיעי) 라는 말은 “충고하다”(advise) 혹은 “상담하다”(counsel)는 의미로 성경에 두 번 사용되는 어휘라서 그 정확한 의미와 용도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명사형 “요에츠”(ץיעוי)는 삼하 15:12에서 아히도벨을 다윗의 “조언자”로 번역하고 있지만 실상 히브리어 사전적 의미는 “도공, 옹기장이”(potter), 혹은 “주조자”(caster)라고 풀이하고 있다(Holladay,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T). 따라서 이 어휘는 도자기 만드는 사람처럼 흙을 빚어 자기가 원하는 그릇을 만드는 도예가나 어떤 건축물을 설계하고 건설하는 사람과 같은 역할을 하는 자의 개념이나 이미지를 내포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여기에 소개되는 하나님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는 세계 역사를 주관하시는 창조주로서 이방의 강대국에 짓밟힌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데 있어서 우리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기상천외의 오묘한 계획과 작전을 세우시고 이를 실행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특히 본문 4-5절은 전쟁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압제자들을 부수고 제압하여 그들을 구원하시는 여호와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단순한 “상담자”의 모습이 아니다. 기막힌 전략가이다. 따라서 NET는 이를 “비범한 전략가”(Extraordinary Strategist)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사야 36:5에 “에차 우게볼라”(הרובגו הצי)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전쟁의 문맥에서 “에차”를 “전략” 혹은 “책략”이라는 의미로 쓰여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의 하나님은 단순히 전쟁의 전력가나 책략가 만은 아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전 세계의 구원 역사 속에서 각 나라의 역할과 사명을 배분하여 맡기며, 그의 계획 속에서 이를 실행해가시는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구속사를 기획하시는 오묘한 기획자나 섭리자이시다. 섭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가 창조하신 세상을 통제하시고 (control), 유지 관리하시는 (mantain) 속성을 일걷는 말이다. 따라서 본문의 하나님은 “오묘한 섭리자” 혹은 “놀라운 기획자”라고 번역하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한 아기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곧 통치권을 그의 어깨에 매신 그는 오묘한 섭리자(God of Wonderful Providence),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그리고 평강의 왕이라고 번역하고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옳다. 한 아들, 한 아기, 그는 임마누엘, 그리고 오묘한 섭리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으로 오시는 분이시다. 어둠과 죽음의 땅에 큰 빛으로 오셔서, 어둠을 물리치시고, 생명을 살리셔서, 압제자들에게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큰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는 구원자이시다. 이 세상의 어둠을 빛으로, 인생들의 슬픔과 아픔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분은 오로지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한 아기로 오신 왕, 예수님 뿐이다. 이제 그 아기가 전쟁의 참화로 말미암아 짓밟히고, 수탈당하고, 압제당하며, 눈물 흘리고 괴로워하는 백성, 이스라엘의 작은 고을 베들레헴의 한 양무리의 축사에서 태어나 구유에 뉘였다. 바로 그곳으로부터 죽음과 어둠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한 줄기 빛이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의 오묘하고 신비로운 지혜요 수수께끼이며, 놀라운 기획이고, 섭리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6-02-04
  • 바로 알고 바로 믿자 10 - 끝
    중세의 가톨릭은 극도로 타락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망쳤다 로마 가톨릭은 가톨릭교회만이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 ‘그리스도의 단일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제816조, 822조, 870조). 이는 가톨릭 이외의 다른 교파들은 교회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제811조,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를 우리는 신경에서 하나이요,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라고 고백한다...”제816조, “가톨릭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로서... 이 교회는 베드로의 후계자와 그와 일치하는 주교들이 다스리고 있는 가톨릭교회 안에 존재하다.”제822조, “...그리스도의 단일 유일한 교회의 일치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화해를 실현하여야 한다.”제870조, “우리는 신경에서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는 하나(one)... 그 교회는 베드로의 후계자와 그와 일치하는 주교들에 의하여 다스려지고 있는 가톨릭교회이다.”제817조, “실제상 이 단일 유일한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초기부터 분열이 생긴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의 연합에 상처를 입히는 분열은 분명히 인간들의 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단.배교.음모를 구별하여야 한다.”제2089조, “...이단이란 세례 받은 후 천상적 가톨릭 신앙으로 믿어야 할 어떤 진리를 완강히 부정하거나 완고히 의심하는 것이고, 배교란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부 포기하는 것이며, 이교란 로마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그에게 종속하는 교회의 회원들과의 친교를 거부하는 것이다.”교황들의 주장교황 바오로 2세는 2009년 9월 5일 “가톨릭교회만이 기독교의 유일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으며, 개신교 등 다른 종파들은 본래 의미에서는 교회가 아니다”라고 했고,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7년 7월 “로마 가톨릭교회만이 참 교회이고, 교회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에서 볼 때, 개신교는 교회라기 보다는 종교 공동체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했다.비평1. 역사적으로도 가톨릭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가 아니다.초대 교회시대(사도시대)와 교부시대를 거쳐 4세기까지는 ‘교황’이나 ‘가톨릭’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예루살렘, 안디옥, 로마,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등 5대 교구의 감독체제이었으며, 로마 교구 감독들이 5대 교구 가운데 수위권을 주장하기 시작한 레오 1세(440-461) 때와 그레고리우스 1세(590-604) 때부터 교황 제도가 시작되었다.그후 1054년에는 중세 교회가 분열하여 동방교회(동방 정교회)와 서방교회(로마 가톨릭)로 나뉘었다. 그리고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로는 서방교회로부터 루터교회, 개혁교회, 장로교회, 회중교회, 침례교회, 성공회 등 여러 개신교회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로마 가톨릭은 역사적으로도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가 아니다. 오히려 교회사는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를 극도로 타락한 교회라고 단죄한다.2. 신앙적. 교리적으로도 가톨릭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가 아니다.가톨릭의 제도. 신앙. 교리 등에서도, 교황의 감독 제도, 교황의 무오, 성경에 외경 추가, 마리아 성현 숭배, 사제의 독신, 연옥설, 화체설, 고해성사, 성현들의 중재간구,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등은 교리적 이단이다.3. 가톨릭만이 단일.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하는 것은독선이요, 억지 주장이다.이 세상에는 현상적으로도 다양한 교파들, 교회들이 존재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성경관, 신관, 그리스도관, 성령관, 인간관, 구원관, 교회관, 종말관, 내세관 등 신학 전반에 걸쳐 설(說)들과 교리(敎理)들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 단일 유일한 교회란 존재하지 않는다.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화해 주장가톨릭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가톨릭 안에서 화해를 실현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화해를 실현하여야 한다는 말은 좋으나 ‘가톨릭 안에서’라는 조건은 틀린 말이다. 가톨릭 안에서란 말은 가톨릭만이 단일 유일한 교회라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즉 가톨릭의 신앙과 교리, 체제와 제도, 예배의식과 생활 안에서 화해를 실현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가톨릭은 ‘가톨릭 안에서 화해’를 주장하기 전에 종교개혁자들을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불화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스스로 살펴보고 그 불화의 요인들을 먼저 제거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중세의 종교개혁자들은 결단코 분열.이단.배교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타락한 가톨릭교회를 개혁하여 성경적. 신앙적 교회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다가 오히려 가톨릭으로부터 사형언도를 받고 쫓겨난 영적 지도자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별하여 불신앙.배교. 이단들을 바로 인식하고, 폭로하고, 책망하며 영적 선한 싸움을 사워야 한다. 현대교회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일치운동은 이 점을 유의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5-11-12
  • 바로 알고 바로 믿자- 9
    교황청의 결정으로 하루 아침에 ‘진리’가 ‘비진리’로 전락 가톨릭의 기본교리인 가톨릭교회 교리서에는 추도예배 또는 추모의식이 없다. 그러나 제2바티칸 공의회에서 추도예배를 결의하였다.동양의 조상제사를 반대해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가톨릭교회는 1939년 12월 18일자로 발표된 로마 교황 비오 12세의 교서에 따라 “시대의 변천과 민간의 풍속, 정신이 비뀐 현 시대에 와서는 조상제사는 조상에게 효성을 표시하는 하나의 시민적 의식일뿐 종교적인 의식은 아니다”라고 선포하여 신사참배와 함께 조상제사를 허용했다.교황청과 무솔리니의 라테란조약그러면 교황 비오 12세가 조상제사를 허용할 때 무슨 이유가 있었는가? 그것은 당시의 국제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20세기 초엽에 나치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와 이태리의 독재자 무솔리니와 일본제국의 도조가 3국동맹을 맺었고, 무솔리니는 교황청과 라테란 조약을 맺고 있었다.라테란 조약은 1929년에 무솔리니와 교황 비오 11세가 맺은 조약으로, 로마 교황청이 바티칸을 중심으로 0.44 평방마일을 영유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이 되는 것과, 외교상으로 교황이 일국의 원수의 자격을 갖게 된다는 것이며, 로마 가톨릭이 이태리의 국교임을 선언한 조약이다.말하자면 이태리의 세속 통치는 무솔리니가 맡고, 교황청을 중심한 영적인 문제는 교황이 맡는다는 조약이다. 즉 당시 물밀듯이 밀려오는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교황청이 무솔리니에게 많은 것을 위임한 조약이 바로 라테란 조약이다.그 결과 조선에서 신사참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일본 제국은 무솔리니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이리하여 무솔리니의 압력을 받은 교황청은 조선에서의 신사참배와 조상제사를 한묶음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이 조선에서 8,500여명의 순교자를 낸 천주교의 조상제사를 하우 아침에 허용하게 된 배경이다. 이리하여 가톨릭교회는 조상제사를 지낼 때 향을 피우고, 음식을 차려놓는 것 등을 정당한 것으로 허용했다.가톨릭교회는 이를 다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서 성례전에 대한 규칙 제37조로 예식화 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헌장 제37항, “전례에 있어서 교회는 엄격한 형식의 통일성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는 여러 민족과 인종의 영적 의식과 표현들을 존중하고 선양한다. 그리고 교회는 민족들의 풍습에서 미신이나 오류와 관련되지 않는 생활양식을 호의적으로 존중하고, 가능한 그대로 보존하며, 더욱이 참되고 올바른 전례정신에 부합하기만 하면 전례자체에 받아들인다. 사실 때에 따라서 교회는 같은 의식들을 성례전 안에 포함시킨다.”따라서 가톨릭교회는 죽은 사람을 위한 조상제사를 합리화 하고 정당화 한다. 죽은지 3일 되는 날은 ‘3일째 위천의 미사’, 7일째 되는 날은 ‘7일째 위천의 미사’, 30일이 되는 날은 ‘30일째 위천의 미사’를 지내고, 대·소상 때는 ‘기념의 미사’, 매년 11월 2일에는 모든 죽은 자를 위로하는 ‘위령의 날’로 정하고, 전세계가 같은 날 죽은 자를 위하여 제사를 지낸다.가톨릭에서 조상들에게 제사하는 절차① 평소에 가족이 좋아하는 음식상을 차려 놓는다. ② 제사상에 촛불을 켜놓는다. ③ 꽃을 제사상에 놓는다. ④ 향을 피운다. ⑤ 벽면에 십지가고상을 걸어 놓는다. ⑥ 십자가 밑에는 죽은 자의 사진을 모신다. ⑦ 제사상 앞에는 돗자리 또는 깔개를 편다. ⑧ 가족의 서열 순으로 큰절을 한다. ⑨ 제사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가톨릭의 추도식과 전통 조상제사의 공통점① 돌아가신 날에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② 장남의 집에서 책임을 지는 것이 원칙이다. ③ 추도식 후에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다. ④ 그 동기와 목적면에서 같다. ⑤ 절하는 것과 고인과의 영적 교통의 의식에서 공통점이 있다. 조상제사에 대한 성경적 교훈1. 성경은 죽은 자를 위하여 이교도와 같이 슬퍼함을 금하고 있다.레위기 19:28,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신명기 14: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섭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고대 이방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명복을 빌고, 그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과도한 슬픔을 표하고, 몸에 상처를 내어 죽은 자의 고통에 동참함을 표했다. 이런 행위는 모두 고대 조상숭배나 우상숭배 풍습에서 온 것이다.2. 성경은 죽은 자에 대한 예물 드림을 금하고 있다.신명기 26:14, “...죽은 자를 위하여 이 성물을 쓰지 아니하였고 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대로 다 행하였사오니.”3. 성경은 죽은 자에게 제사하는 것은 바알브올을 섬기는 우상숭배와 같은 죄라고 하였다.시편 106:28-29,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 민수기 25:1-8 참조).4. 성경은 우상과 관계되는 모든 종교행위를 저주하고 심판한다고 하였다.무당들(출 22:18), 우상숭배자들(출 22:20), 사람을 꾀어 우상을 경배하게 한 자들(신 13:1-5), 자녀를 우상에게 불 제물로 드린 자들(레 20:2), 신접한 남녀와 무당(레 20:27). 이들은 반드시 죽일 것이니라고 선언하고 있다.5. 성경은 이방인의 제사는 귀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고린도전서 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한국천주교의 모순처음에 조선땅에 전래된 한국천주교는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라며 금했다. 이로써 유교사회에서 정치적인 사건과 연계되어 수천명의 순교자를 낳았다. 그런데 이제와서는 조상제사가 ‘효성을 표하는 시민의식’이라며 허용하고 있다. 그러면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조상제사를 반대하다 죽은 그들의 죽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결국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를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교황청의 잘못된 가르침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가톨릭은 그들을 ‘성인’이니, ‘복자’니 하는 말로 추대식 따위로 무마할 것이 아니라, 먼저 그 후손들에게 사죄부터 했어야 옳은 일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5-10-30
  • 바로 알고 바로 믿자-8
    그러나 성경은 아무 형상이든지 신상(神像)으로 만드는 것을 금하고 있다 가톨릭교회는 성화상<聖畵像>들을 ‘숭배’하는 것 이 아니라 ‘공경’하는 것이라 주장그러나 성경은 아무 형상이든지 신상(神像)으로 만드는 것을 금하고 있다성화상(聖畵像)이란?로마 가톨릭교회에는 성모 마리아 조각상을 위시하여 예수님과 그 제자들, 성현들, 스랍들(천사) 그리고 성경의 특별한 사건들을 묘사하는 형상들(Icons)과 그림들이 교회의 전면을 중심으로 가득히 부착되어 있다. 신도들은 향단에 향을 피우며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합장을 하고 기도하면서 허리 굽혀 절하고, 상 위에 놓여 있는 마리아의 초상(추상적 그림)에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동방정교회나 동양정교회도 마찬가지이다.로마 가톨릭에서는 성모 마라아와 성현들의 형상들이나 조각상들에 입을 맞추거나 허리를 굽혀 합장을 하는 것은 우상숭배와 미신행위가 아니라, 그 성화들에 그려진 형상들이나 조각상들에 새겨진 분들을 공경하는 것 뿐이라고 주장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제1159조, “성화와 전례에 쓰이는 성화상은 주로 그리스도를 그리고 있다. 성화상이 비가시적이고 불가해한 하느님을 표현할 수는 없으나, 하느님의 아들의 육화(성육신)로서 형상의 새로운 경륜이 시작되었다.”제1160조, “그리스도교의 성화상은 성서가 언어로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형상으로 옮긴다. 형상과 언어는 서로를 분명하게 해준다.”제1161조, “전례 거행의 모든 표징은 그리스도께 관한 것이다. 천주의 거룩한 성인들의 성화상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성화상들은 그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성화상을 통해서 하느님의 모습대로 우리의 신앙에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된 천사들의 모습까지도 나타난다.”제1162조, '성화상의 아름다움과 색채는 나의 기도를 고무시킨다. 전원 풍경이 나의 마음을 자극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 것처럼 성화상을 보는 일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과 전례의 찬미가와 합쳐져, 전례 거행의 표징들과 조화를 이룬다. 그 결과로 전례가 기념하는 신비가 마음 속에 기억되고, 나아가 신자들의 새로운 생활로 표현된다.”제1192조, “성당과 집에 있는 성화상들은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우리의 신앙을 일깨우고 기르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어머니와 천사들과 성현들의 성화상들을 공경한다.” 역사적 기독교공의회와 성화상제2131조, “787년에 니케아에서 열린 제7차 공의회는 강생하신 '말씀'의 신비에 근거하여, 성화상 파괴주의자들에 맞서, 그리스도뿐 아니라 천주의 모친, 천사와 모든 성인의 성화상 공경을 정당화 하였다. 하느님의 아들은 인간이 되심으로써 성화상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 것이다.”제2132조, “그리스도교의 성화상 공경은 우상을 금지하는 첫째 계명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과연 '어떤 성화에 대한 공경은 그 본래의 대상에게 소급되며,' '어떤 성화를 공경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성화에 그려진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 성화에 표하는 공경은 '존경을 표하는 공경'이지 하느님께만 드려야 하는 흠숭은 아니다.“제2141조, “성화 공경은 하느님 '말씀'의 강생 신비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첫째 계명을 어기는 것은 아니다.”제2바티칸 공의회 전례에 관한 헌장 125장, “신도들이 공경하도록 성당 안에 성화상을 전시하는 관행은 계속되어야 한다.”8세기 동방정교회 신학자이며, 성화상 지지 옹호 선구자인 성 요한(St. John Damascus, 675-749)은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다니엘은 하나님의 사자(천사) 앞에서 허리를 굽혀 절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천사들을 숭배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아들이 종의 형체를 취하여 육신의 몸을 입었음을 발견하게 되면 당신은 그의 형상을 신기한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무덤, 부활, 승천 등을 보여주어라... 심지어는 그 성화물들에게 키스를 한다고 내가 우상숭배와 관계되는가?”비평로마교회의 주장과는 달리 성경은 성화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3-5).이 계명은 종교적인 목적이나 또는 예배를 위하여 어떠한 형상이나 조각상을 만드는 것을 금한 것이다. 그것들을 향해 합장을 하고 허리를 굽혀 절하는 행위는 신(神)께 예배하는 행위이다. 그와 같은 행위는 결코 형상이나 조각상의 인물들을 공경하는 태도가 아니라, 숭배하는 행위이다.그들 형상들이나 조각상들 배후에는 실체(實體)가 있다. 그러므로 절하는 행위는 그것들을 숭배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섬기는 행위이다. 성경은 우상숭배를 엄히 금하였다(신 27:15, 시 115:3-8, 고전 10:7, 14, 살전 1;9, 요일 5:21).이 말씀은 십계명 중 제1, 2계명이다. 여기에 '새긴 우상들'이란 사람들이 손으로 만든 우상들을 말한다. 금으로 만든 우상들(출 32:3, 시 115:4, 135:15, 사 20:20, 호 8;4), 은으로 만든 우상들(사 2:20, 30:22, 31:7, 호 8:7), 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들(레 26:1, 신 4:28, 27:15, 왕상 19:18, 사 37:19, 41:6, 겔 20:32). 이 모든 우상들은 신으로 섬기기 위하여 만들어진 거짓 형상들이다.그러나 조각가의 조각품이나 미술가의 미술품이나 공예품들은 각기 예술 작품이다. 예술적 작품들은 그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작가의 심상을 이해하며 감상한다. 건전한 예술 작품들은 우리의 정신적 세계를 정서적으로 풍요케 한다. 따라서 조각가의 조각품이나 미술 작품들을 예술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감상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5-10-17
  • 바로 알고 바로 믿자 ⑦
    어떻게 구원을 금식·구제·기도·선행·헌금 등 공로와 돈으로 살 수 있는가 연옥설가톨릭은 죽은 자가 가는 천당과 지옥 이외에 연옥이라는 제3의 장소가 있다고 주장한다. 가톨릭의 연옥설에 의하면 완전히 순결한 자들은 세상 떠날 때 곧장 천국으로 가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며, 악한 자는 대죄(大罪)를 지었으므로 세상 떠날 때 곧장 지옥으로 가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그러나 완전히 순결하지 못한 자들은 소죄(小罪)를 지었으므로 그 영혼들은 정화의 장소인 연옥에 가서 완전히 깨끗이 정화되고 형벌의 대가를 다 치르고 난 후 천국에 간다고 한다. 그리고 연옥에서 속히 나오기 위하여는 후손들에게 자선·보속·고해성사를 권한다. 연옥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그 죄에 해당하는 보속을 치르는 곳이라고 한다.연옥설에 대한 교리가톨릭교회 교리서 1030조,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의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기는 하지만 하늘나라의 기쁨으로 들어가기에 필요한 거룩함을 얻기 위해 죽은 후에 그 영혼이 정화를 거쳐야 한다.”제1031조, “교회는 선택된 자들이 거치는 이러한 정화를 ‘연옥’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단죄 받은 자들이 받는 벌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것이다. 교회는 연옥에 관한 신앙교리를 특히 프로렌스(피렌체) 공의회와 트렌트 공의회에서 확정하였다. 교회의 전승은 성서의 어떤 대목들을 참고로 해서 정화하는 불이 있다고 이야기한다.”제1032조, “...또 교회는 죽은 이들을 위한 자선과 대사(大赦)와 보속을 권고한다. ...죽은 이들을 위한 우리의 제사가 그들에게 위로를 준다는 것을 왜 의심하겠는가? 죽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자.”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리헌장 제49항, “...어떤 이는 이 삶을 마치고 정화를 받으며, 또 어떤 이는 바로 삼위이시며 한 분이신 하느님을 계시는 그대로 분명하게 뵈옵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그레고리 대화집, “우리는 어떤 죄들은 현세에서 용서받을 수 있지만, 다른 어떤 죄들은 내세에서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크리소스톰, “...죽은 이들을 위한 우리의 헌금이 그들에게 위로를 준다는 것을 왜 의심하는가? 주저하지 말고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자.”토마스 아퀴나스, “지옥에서 버림받은 자들을 괴롭히는 불과 연옥에서 의인들을 괴롭히는 불은 동일한 불이다. 연옥에서의 가장 작은 고통도 금생에서 당하는 가장 큰 고통을 능가한다.”이같은 연옥교리는 1439년 플로렌스 공의회(1431-1445)에서 유게니우스 4세가 선포하고, 트렌트 공의회(1543-1563)에서 확정하였다.종교개혁자들은 연옥설을 부정하였다특히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그의 95개 항의 논제들에서 연옥설을 반박하였다.제10항, ‘죽은 자에게 대하여 연옥을 내세워서 종교상의 속죄를 보류하는 사제들은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이다.”제11항, “성경 속의 벌을 연옥의 벌로 변경시키는 ‘가라지’는 확실히 감독들이 잠자는 동안에 심어진 것이다.”제22항, “교황은 연옥에 있는 영혼에 대해서 어떤 형벌도 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이 형벌은 교회법에 의하여 현세에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제27항, “연보궤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 나온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학살이다.”제35항, “연옥으로부터 영혼을 속량하는 것 또한 고백할 사제를 마음대로 선택하는 사람에게는 참회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자는 비기독교적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다.”비평1. 가톨릭이 천국과 지옥 이외에 제3의 장소 연옥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단적이다.성경은 사람 사후의 영원한 처소는 천국과 지옥 두 곳 뿐이라고 분명히 계시하였다. 천국은 성도들의 영생복락의 처소이다. 사도 바울은 천국을 가리켜 셋째 하늘(3층천) 또는 낙원이라고도 하였다(고후 12:2,4). 지옥은 불신자들의 영원형벌의 장소이다(마 3:12, 25:46, 눅 16:24, 계 20:10). 2. 연옥은 신구약 성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외경에서만 나타난다.성경에는 천국과 지옥 이외에 제3의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복음 16:19-31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에서 아브라함과의 대화에서 부자는 죽어 음부(지옥)에서 고통하며 구원해 달라고 간청할 때,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되었느니라”(눅 16:26).3. 금식, 구제, 기도, 선행, 헌금 등으로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사이비적이다.이미 세상 떠난 사람들의 죄를 사하고 정화되어 천국으로 간다는 것은 구원 영생을 돈주고 산다는 망상으로,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도리를 부인하는 무서운 죄이다. 죄에서 구원, 사망에서 구원 그리고 영생복락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믿음으로만’(엡 2:8, 갈 2:16)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롬 8:1)라고 선포하셨다.가톨릭은 범죄한 인간은 전적 타락, 전적 부패, 전적 영적 무능에 대한 칼빈주의의 중심 교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 해설/기획
    • 손석태
    2015-10-10
  • 바로 알고 바로 믿자 6
    믿음에 행함이 있어야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사이비 신앙 로마 가톨릭교회의 구원관로마 가톨릭은 믿음에 행함이 있어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람이 자유의지로 구원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또는 거절할 수도 있다고 한다. 가톨릭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이신득구(以信得救)의 진리를 부인한다.가톨릭은 야고보서 3:14-26 등의 말씀을 인용하여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반쪽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믿음이 행위보다 우선하나 행위가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면서 행위가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고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구원은 사람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고 한다.가톨릭 문답성경(354쪽)에 의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선행(善行)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구원적 신앙이 아니라고 믿는다. 선행은 구원을 위하여 필요하다. ...한 젊은 관리가 예수께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눅 18:18-25)라고 물었을 때, 저에게 선을 행하라고 명하셨다. ...예수는 또한 적어도 행위와 자선에 따라 상급을 주시고 구원을 부여하신다”라고 한다. 가톨릭교회교리서 제405조, “원죄는...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을 박탈당했지만 인간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니다.”제416조, “아담은 첫 인간으로서 죄를 지음으로서 자기 자신 뿐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원초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을 잃어버렸다.”제417조,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후손들에게 그들의 첫 범죄로 인해 원초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을 상실한 인간 본성을 전해주었다. 이 상실을 원죄라고 부른다.” 비평위와 같이 가톨릭 교리서는 인류의 시조 아담의 범죄로 거룩함과 의로움을 상실했다고 말하면서도, 그러나 인간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가톨릭에서 말하는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이란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Moral image of God)을 가리킨다(엡 4:24, 골 3:10). 그런데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은 인류의 시조 아담 하와의 범죄로 완전히 상실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에서는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을 상살하였다고 하며, 반면에 사람의 선행이 구원의 공로가 된다고 주장하니 이율배반이 아닌가!자유의지(Free-will)가톨릭교회 교리서 제851조,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깨달음에 도달하기를 원하신다(딤전 2:4).” “은혜는 구원을 위하여 필요하다. 그렇지만 사람이 은혜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다.”가톨릭은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에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이 그 은혜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므로 구원도 인간의 자아의지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한다. 그러나 범죄 타락한 이후의 사람의 상태는 전적으로 타락되고, 전적으로 부패되고, 영적으로 무능해졌으므로 사람의 선행이 구원의 공로가 될 수 없으며, 사람의 자유의지 또한 전적으로 무능해졌으므로 구원을 선택하거나 또는 거절할 수 없다. 선행으로 구원가톨릭교회 교리서 제1260조,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교회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도 자신이 이해하는 한도 내에서 진리를 찾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가톨릭에서는 선행(good works)이 구원에 절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구원을 얻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선행이 필요한가? 선행의 정도가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분명한 답을 피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말하기를 일부 성현들 이외에 다수는 연옥에 가서 모든 죄를 정화(purging)한 후 천국에 들어간다고 한다.그러나 사람이 구원받고 의롭게 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아들을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고 말씀하셨다.성경은 이를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성도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중생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시 부활체로 또는 변화체로 온전한 구원을 이룬다. 그 믿음에 행위를 더해야 구원에 이른다는 성경말씀은 어디에도 없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5-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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