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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㉘ 장례 예식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전도서에 보면 ‘천하 모든 것에 때와 기한이 있고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고 하였다. 성경은 ‘사람이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고 했는데 매련한 인간들은 천년만년 살 것같이 행동한다.진시황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더 오래 살기를 꿈꾸어 ‘100세 시대’가 보편화되었고, 지금은 ‘120세’를 노래한다. 그래도 인간은 죽게 마련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다. 문제의 탐색사람이 죽으면 장례 예식이 뒤따른다. 그 사람의 배경과 경제적 여건에 따라 그 양상은 다르지만 모두가 이 과정을 거친다.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죽음 후의 장례 예식이다. 이른바 ‘기독교식 장례’를 한다고 하면서 기독교식이 아닌 용어나 절차를 따르는 경우가 많다.예배 인도는 목사가 하지만 실제로는 장의사 직원이 주도하는 경우를 쉽게 본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사례의 탐구‘기독교식’이라는 정해진 규범이 없고 전통적 방법에 예배라는 형식을 덧입히는 것이 오늘의 기독교장례 모습이다. 한 목회자를 만나 그의 생각을 들어보자. 상계청암교회의 이영욱 목사의 생각이다.김남식(이하 김): 나이가 드니 주변에서 별세의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한 번은 죽게 마련이지만 장례 예식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특히 기독교 가정에 초상이 나면 부고를 전할 때에 “아무개가 소천하셨다”라고 알리는 경우가 많다. 거의 전부그 그렇게 하는 것같다. 조문인사차 장례식장에 가보면 각처에서 보내온 조화에도 달려있는 문구는 거의 모두 ‘소천’(召天)이라는 문구를 넣어서 산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이 바른 표현일까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이: 상가에 조문인사차 모여든 사람들의 대화 중에도 거의 모두 별세를 소천이라고 하며 얘기를 한다. “그 건강하던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소천하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별세라고 말하는 이를 찾아보기 어렵다.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는 어떤가? 목사들도 대부분 별세를 소천이라고 말하면서 설교를 하고 기도를 인도한다. 별세라는 말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김: 국어대사전을 보면 ‘소천’이라는 말이 없다. ‘소천’이라는 말은 성경에도 없다. 성경에는 ‘별세’라고 말한다. 누가 복음 9장 31절에 보면 변화산 위에서 예수께서 용모가 변화되었을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한 것을 볼 수 있다. 이같이 성경에도 세상을 떠나는 것을 ‘소천’이라고 하지 않고 ‘별세’라고 했다.이: 소천(召天)이 뭔가? 부를 소, 하늘 천이다. 이 말은 ‘하늘이 부른다’는 뜻이 아니고, ‘하늘을 부른다’는 뜻이다. 성경에 죽음에 관한 말씀이 허다하지만 죽음을 소천이라고 말한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소천’이라는 말을 ‘하늘이 부른다’로 해석하는 것은 억지다. ‘소천’이라는 말을 꼭 사용하고 싶으면 ‘소천 되셨다’라고 하면 되기는 되나 굳이 궁색하게 이렇게까지 하면서 소천이라고 해야 하겠는가. ‘별세’라고 하면 성경적이고 사리에도 맞고 듣기도 좋은데 굳이 소천이라고 말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김: 이와 못지않게 문제 되는 것은 추도예배 혹은 추모예배이다. 한국교회는 ‘추도(추모)예배’를 어떻게 드리게 됐을까? 한국교회와 문화를 50년 넘게 연구한 제임스 그레이슨 교수(영국 셰필드대학교)는 ‘추도(추모)예배’는 세계 그 어디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가 어렵지만 ‘제사를 중심으로 가족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나라에서는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바로 한국이 그 모델이다.이: 사람에게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고, 누구나 피해갈 수 없고 또 언젠가 한 번은 꼭 겪어야 하는 일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두려움, 무서움, 슬픔, 아쉬움 등이다. 왜? 그럴까? 한 번도 가보지 않는 길이고, 영원히 헤어진다고 생각해서 아쉬움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제사를 통해 죽은 사람을 사모하는 예식을 가진다. 성도들도 죽은 사람을 사모하기에 추도(추모)얘배로 모인다. 하지만 성경은 죽은 사람을 생각하고 사모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한자어인 ‘추도’(追悼)는 죽은 사람을 생각해서 슬퍼하는 것이고, 초점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데에 있다. 반면에 ‘추모’(追慕)는 ‘추도’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죽은 사람을 그리며 생각하고, 기억하는데 있다. 여기에 ‘예배’를 붙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을 ‘추도(추모)예배’는 모두 다 죽은 사람을 기리고 애도하는 형태이다. 그래서 여기에 예배라는 단어는 붙이기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과 관련해서 사용되기 때문이다.김: 역사적 흐름을 살필 필요가 있다. 초기 한국교회에서는 ‘추도(추모)예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조선 기독교인들이 추도(추모)예배를 제사 대신으로 여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15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4회 회의록’에 추도(추모)예배를 다룬 내용이 기록돼 있다. 당시 ‘부모 기일에 기독교인이 음식을 장만하고, 이웃을 불러 함께 예배하는 것을 어떻게 조치해야 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헌의안이 올라왔다. 총회는 형식은 예배와 같으나 제사와 다르지 않기에 금지해야 한다고 결의했다.이: 1920년대까지 한국교회는 추도(추모)예배를 죄로 규정해야 한다고 했지만 결국 추도예배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성경은 성도가 죽은 자를 위해 하지 말아야 하는 행위들을 말하고 있다.김: 기독교 전체의 의견을 모아 하나의 규범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주목할 문서가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측에서 죽음과 관련해서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① 죽은 자를 위해 이교도처럼 슬퍼함을 금한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신 14:1). ② 죽은 자에 대한 예물 헌납도 금한다. “내가 애곡하는 날에 이 성물을 먹지 아니하였고 부정한 몸으로 이를 떼어두지 아니하였고 죽은 자를 위하여 이를 쓰지 아니하였고 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사오니”(신 26:14). ③ 죽은 자에게 제사함을 브올의 바알을 숭배하는 죄라고 단언한다. “그들이 또 브올의 바알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시 106:28) ④ 죽은 자를 기념하지 말라고 한다. “내가 잊어버린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시 31:12) ⑤ 우상과 관계되는 모든 종교행위를 저주하고 심판하실 것을 단언한다 “너는 무당을 살려 두지 말라.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출 22:18. 20). ⑥ 우상 숭배적 종교기념일을 폐하라고 선언한다. 사람의 유전(유전), 절기, 월삭, 안식일, 천사숭배 따위는 조상이 전한 망령된 행실로서(벧전 1:18) 금지된 신앙의 기독교윤리이다.이: 제임스 그레이슨 교수는 한국사회가 제사를 중심으로 한 가족공동체로 이루어져 있음은 인정했다. 더 나아가 한국교회 성도들이 추도(추모)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에도 심정적으로 이해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성경말씀에 근거해 볼 때에 죽은 사람을 추도(추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오직 하나님만 받아야 하는 예배가 죽은 사람과 관련된 예배용어로 사용하나는 것은 신앙적 큰 문제이다. 기본에의 회귀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장례 예식을 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연구하고 뜻을 모아야 한다. 특히 ‘추모’ 또는 ‘추도’예배가 더욱 그러하다.따라서 앞으로는 ‘추도(추모)예배’를 사용하기보다 예배와 추도(추모)를 분리해서 상용할 것을 제안한다. ‘추도(추모)날’에 온 가족이 모여 ‘가족(가정, 위로, 기념)예배’를 드린 후에 그 다음에 죽은 고인을 생각하고 신앙적으로 그리워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이다. 그래서 ‘가족예배’를 드릴 때에는 죽은 고인들 언급하기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은혜 그리고 앞으로의 신앙생활을 나눈 후 잠시 고인을 추도(추모)하는 것으로 진행하면 정서상 큰 문제없이 아름다운 기독교 문화를 정립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추도(추모)예배’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개념이 정립되고 정착되기를 바란다.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12-1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05
    작년에는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온 교회가 떠들썩하더니 올해는 501주년이라고 또 곳곳에서 종교개혁에 대한 행사가 다양하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개신교회의 개혁이 요구되는 때는 없었다. 17세기 (1674) 네델란드의 개혁파 교회의 목사 Jodocus van Londenstein 이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이 된다”(el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the church reformed always reforming)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있는 데, 오늘 날의 개혁주의자들에게 Semper Reformanda는 개혁주의의 가장 핵심적이고 귀중한 원리가 되고 있다. 개혁되지 않는 교회는 성경의 바리새인들처럼 낡은 가죽부대가 되어 언젠가는 포도주도 버리고, 가죽부대도 쓸모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하는 것이다. 기념행사로 끝날 일도 아니고, 거창한 학술대회도 이제는 할 만큼 했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에서 간과하고, 비교적 소흘히 다뤄졌던 점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온전한 종교 개혁을 이루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종교개혁자들은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앞에 제사장이라는 “만인 제사장”주의를 믿고 주장하였다. 이 말은 가톨릭 사제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주장하며 중보자 노릇을 했기 때문에 생긴 주장이다. 그들은 죄인들의 죄의 고백을 받고, 속죄에 대한 처방을 내리고, 사죄를 선언했다. 그리하여 죄인들은 이 땅에서 오직 사제들을 통해서 죄인들이 사죄의 은총을 받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반대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는 오로지 하나님 한 분이시며(딤전 2:5), 신자들은 직접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 받으며,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들이 다 제사장이기 때문에 사제들이나 목사처럼 성례를 집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강단에서 선포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루터의 제사장직은 모든 신자가 다 전문적인 사제가 되라는 말이 아니고 복음을 삶 속에서 전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두가 설교자요, 사제라는 의미이다. 목회자들은 특별한 부르심이 있어야 하고, 일정한 신학교에서 신학과 영성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받고, 노회나 총회로부터 안수식이나 위임식을 통해서 목회자로서의 사역을 할 수 있다. 신자들은 신자로서 자기 생업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소명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며, 제사장으로서 전도와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와 심방과 같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에게는 삼중의 직분을 주셨다.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으로서 세 직분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모든 만물 위에 앉아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며, 돌보는 왕,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그의 피조물에게 전달하고 가르치는 선지자, 그리고 피조물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 피조물을 위하여 기도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을 가졌다. 이 세 직분은 어느 것이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다같이 성실하게 수행해야 할 사명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 사제들의 제사장직에 대한 비성경적인 신학에 대항하여 개혁을 주장하는 가운데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는 “모든 신자의 제사장”됨을 특별하게 강조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모든 신자가 선지자라는 만인 선지자라는 점에 대한 강조는 빈약했다. 이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만인 선지자”론을 옳다고 하면서도 기울어져 가는 교세를 한탄하며,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항상 당황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라도 우리는 선지자적 사명을 강조하고 선지자로서의 개혁적 사명을 감당해야 하며, 하나님의 종말적 이상을 실현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종교개혁자들은 루터나 칼빈이나 츠빙글리나 다 같이 성경을 성령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성경을 통하여 개혁의 원리와 사상을 이끌어내고 가르친 위대한 성경선생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거의 예배 시간에 말씀을 강론하는 일을 주로 했다. 말씀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평신도 성경선생을 양성하는 일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중에도 성경에 관심있는 자를 따로 모이게 하여 직접 성경을 가르친 사람은 츠빙글리였다. 그는 1519년 1월 1일에 스위스 취리히 대성당 시민 사제직에 취임한 후 주일예배에 마태복음 1장부터 강해를 시작했다. 이것이 성경의 연속 강해의 시작이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공적으로 연속 강해를 했지만 이 연속 강해 방법을 취리히 종교개혁에 정착시키기 위해 1520년 여름부터는 사적으로 목회자나 성경공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성경공부 모임을 시작했다. 바로 이 모임의 명칭이 “예언연구회”였다. 고전 14:1,“사랑을 추구하여라. 영적인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여라”는 말씀에서 따른 명칭이었다. 우리 한국말로 예언이라는 말은 미래의 일을 점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에서 예언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해석하고, 지키도록 가르치는 교육을 의미한다. 이 취리히의 예언 운동은 점차 그 세력이 확장되어 네델란드, 영국 국교도나 청교도에게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모임이 기초가 되어 여러 신학교가 생겨났고, 또한 이러한 성경공부 모임을 통한 훈련된 사람들을 통하여 취리히 성경이 번역 출판되기도 했다. 유럽의 종교개혁은 이와 같은 평신도들의 말씀공부를 통하여 계속 성장해 갔다. 그러나 이 중요한 예언운동이 서구의 계몽주의나 합리주의에 떠밀려 점점 사라져 갔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운동을 뒷받침하고 대항할 신학적 기초가 너무 빈약했기 때문이었다.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예언과 방언에 대하여 가르치며 우리 성도들에게 항상 있어야 할 것이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것을 말하고, 그 중에서 사랑이 제일 크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특별히 예언을 하라고 권한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으로 말하기를 원하지만 그보다 더 예언하기를 더욱 더 원한다.”(고전 14:3)고 말하고, 39절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마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예언이라는 말은 바로 선지자로서 말씀을 대언하고 가르치라는 말씀이다. .바울은 왜 이렇게 예언하기를 간절하게 부탁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종말대한 비전과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향힌 계획을 이해해야 답이 나올 것 같다.하나님의 종말의 비전은 말씀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 땅에 전파되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여 서로의 적대감을 버리고 사랑과 평화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사야 11:9의 말씀처럼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하여,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그들의 태생적인 적대감을 버리고 함께 평화롭게 누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세워 하나님을 말씀을 알게 하는 일을 해야 했다. 선지자는 그래서 여호와의 입이라고 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은 그가 그의 자식과 그 가족들에게 명령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것을 그에게 이루려 하는 것이다”(창 18-19).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최초로 “선지자”라고 부르신다 (창 20:7). 민수기 11장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울면서 모세를 대항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모세는 이 백성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 달라고 간청한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70명의 장로들에게 모세에게 주셨던 성령을 주어 예언하게 함으로 그들을 모세의 조력자로 세우신다. 이런 가운데 70명의 명단에는 들어 있으나 회막에 참석하지 않았으면서도 예언한 두 사람이 있었는데, 여호수와는 모세에게 이들의 예언하는 것을 금지해달라고 청한다. 바로 이때에 모세는 “여호와께서 그분의 영을 모든 백성에게 주셔서 모두 선지자 되게 하셨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민 11:29). 모세의 소원은 여기 70명의 장로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다 선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목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그의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어 그들이 예언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요엘 2:28-29). 모든 사람을 선지자로 세우시겠다는 것이다.때가 차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육신이 되어 선지자로 이 땅에 오셨다. 그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선지자로서의 복음사역을 하셨다. 그리고 이 말씀 사역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한 알의 밀알로 죽고 부활하셨다. 이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선지자로 임명하시고 땅 끝까지 이르러 그가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명령을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성령으로 이들에게 세례를 주셨다. 이 일은 오순절에 일어났다. 오순절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새 언약의 선지자로 인치신 사건이다.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땅 끝까지, 나가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모든 말씀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선지자의 사명을 수행해야 할 자들이 된 것이다. 예수께서 모든 족속들에게 세례를 주라는 말씀은 바로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선지자로 삼으라는 뜻이다. 신자들은 물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며, 성령세례는 바로 신자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임명을 받는 거룩한 예식인 것이다 (손석태, 『성령세례 다시 해석한다』 CLC, 2016). 예수님의 제자들은 말씀을 가르칠 제자를 양성하라는 사명을 받은 것이다. 바울은 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다. “너는 많은 증인 앞에게 네게 들은 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겨라. 그들이 또 다른 이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될 것이다.”(딤후 2:2). 우리 기독교는 일차적으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그 구원받은 신자들을 선지자로 훈련시켜,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쳐 선지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12-1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04
    예수께서 안식일에 38년 병자를 고치신 사건은 유대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부터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되고, 병 고치는 일도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무시하는 예수님을 박해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했다.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예수께서도 일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다(17). 하나님은 잠을 자거나 쉬고 계신 분이 아니다. 항상 깨어서 그가 만든 세상과 피조물을 살피고 관리하고 제어하시는 분이시다. 이 세상을 support 하시고 maintain 하시는 섭리자이시다.둘째는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슨 일이든지 그대로 하신다는 것이다(19). 하나님 아버지는 전지전능하시다. 그에게는 못할 일이 없다. 불가능이 없다. 천지를 무에서 유로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의 전지전능성을 이어 받아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는 권위와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일으켜 살리신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살린다는 것이다(21).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살리는 일이다. 따라서 하나님이나 아들이나 다 같이 그 하시는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죽은 자를 살리고, 죽어가는 자를 회생시키고, 고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사단 마귀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을 짓밟고 죽이는 일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하신 생명을 살려서 온전하게 하신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살리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살리는 일을 하사는가?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들에게 그의 음성을 들려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으로 상처받고 병들고 훼손되고, 아예 그 생명이 끊어진 인생들을 말씀으로 고치고 살리신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의 말씀을 아들에게 주셨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생명이 아들이 전하는 말씀 안에 있게 하셨다(26). 그래서 하나님 아들, 곧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나는 것이다(25). 아들의 음성을 듣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지고 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24). 여기서 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말은 바로 우리 인간은 모두가 사망 가운데 있다는 것을 전제한 말씀이다. 사람은 다 죄와 죽음 가운데 있다. 사람은 다 아담과의 언약적 연대성 때문에 아담과 더불어 죄인이 되고, 아담과 더불어 죽은 자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다. 그 음성을 듣고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듣지도 않고 믿지 않는 자는 죄와 죽음 가운데 그대로 있게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주이시시기 때문에 아들도 심판의 주로서 권세와 능력을 가지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들어도 좋고 안 들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안 들으면 심판을 받고 죽는 것이다. 심지어 무덤 속에 있는 자들도 그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그때에 선한 일을 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29).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겼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들이 볼 때,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하고, 하나님과 자신이 마치 동등한 권세와 능력을 가진 것처럼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용서할 수 없는 불경이고, 모독이었다.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이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하나님과 동등함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말로 될 일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증거로 자신의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것은 천지창조의 하나님의 권능을 이들에게 과시하는 것이다. 바로 38년 된 병자를 말씀으로 살리신 사건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와 능력을 가진 자임을 보여주시는 것이었다.베데스다 못가에는 가끔 주의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고 물이 움직임을 그칠 때 제일 먼저 못 안으로 뛰어드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따라서 수많은 병자들이 찾아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언제 물이 움직일지 정말 물에 뛰어들면 병이 낫게 되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다. 자기가 누구보다 먼저 뛰어들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래도 요행과 기적을 바라고 찾아 온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천사”가 가끔 물을 움직이게 했다고 했는데, 과연 이 일이 하나님의 천사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런 일이 일어나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이 고대 주요 사본에는 없고 후에 누군가에 의해서 첨가된 부분이라고 생각하여 서양의 현대 역본 NIV나 ESV는 3절 후반부와 4절을 아예 본문에서 삭제하고 난외주에 삽입하고 있다. 바른 성경은 이것을 [ ] 안에 넣고 각주에 고대 사본에 이 구절이 없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설령 그렇다 하드라도 여기 못가에 있는 사람들이란 어쩌면 아담과의 연대성 때문에 죄와 죽음의 권세에 묶여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세상 사람들이나 롯도 복권을 사 쥐고 그것이 당첨되기를 바라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그려놓고 있는 한 장의 그림과 같다.예수께서 이곳에 찾아오시어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다. 병자 스스로 말한 것처럼 그에게는 병이 나을 소망이 거의 없어 보이는 사람이다. 장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평생 그곳에 누워 있어야 할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명하신다. 그래서 그는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셨고, 병자는 그 음성을 듣고 일어났다. 천지창조의 하나님의 권능이 역사한 것이다. 예수님은 보통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권능을 가지신 신적 존재, 곧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 안식일이라는 율법의 안경을 쓰고, 하나님의 신비를 볼 수 없는 또 다른 병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처럼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심에 불구하고 믿지 못하는 이 유대인들은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만일에 안식일에 물이 동했다면, 그래서 정말 병 나은 사람이 있었다면, 이들은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요행을 바라고, 주저앉아 있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나라에 요행이란 없다. 오로지 생명의 말씀을 듣는 자만이 이 베데스다 연못을 탈출할 수 있다. 우리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일어나 걸어야 한다. 물이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사람을 살리신다.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12-01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㉗ 기독교 가정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하나님이 창조사역에서 처음으로 만드신 신적 기구가 가정이다. 가정은 축복의 처소요 하나님의 언약을 전파하는 기구이다. 그래서 가정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가정의 소중함은 동서양 어디에서나 공통된다. 그것은 우리의 뿌리요 삶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어느 집을 방문하면「가화만사성」이라는 액자를 쉽게 볼 수 있다. 이것이 삶의 원리이다.문제의 탐색오늘날 이렇게 소중한 가정의 중요성이 퇴색되고 있다. 이른바 이혼이 일상화되고 가정 해체로 인해 생기는 사회적 문제가 심각하다. 가정의 위기 상황은 교회 안에까지 침투되어 목회자가 가르치기에 어려움이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심각한 문제이다.사례의 탐구가정에 대해서는 누구나 할 말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만 논의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원리는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성경적 가정사역의 원리를 정립하고 가르치고 있는 정정숙 박사(총신대 명예교수)에게 듣는다.김남식(이하 김): 가정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이 무엇인가?정정숙(이하 정): 하나님이 세우신 최초의 기관은 가정이다. 가정과 교회는 본질적인 면에서 유사성이 있다. 가정과 교회는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며, 사랑의 가족 관계는 교회의 회중에게도 해당된다.신약교회의 특성을 가정과 연결시켜 표현한 곳이 많다. 성경에서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집’이 ‘가정’이라는 뜻이라고 반드시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빌레몬서 16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집’(household of God, 교회)에서는 모두가 형제자매라는 것과 또 가정이라는 주체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김: 가정의 여러 가지 요소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정: 사랑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가정 안에서의 사랑은 질서보다 훨씬 더 강조되고 있다. 에베소서 5장을 깊이 들여다보면 가정에서의 사랑과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비교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사랑하라고 하였다(엡 5:25-26).사도 요한은 가정적 사랑이 교회생활의 특성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서로에 대한 사랑은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의 반영이다(요일 3:15-18, 5:1-2). 교회 안에서의 형제 개념은 가정에서의 형제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김: 현대 가정들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그 문제를 무엇으로 볼까?정: 과거의 전통적 기독교 가정은 질서와 평화, 사랑과 섬김, 날마다 드리는 가정예배, 사랑하는 부모와 순종하는 자녀라는 기독교 가정의 이상적 모델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운 전통들이 근래에 와서 붕괴되고 말았다.현대 가정들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비극들에 대하여 많은 연구가들은 가정의 붕괴와 분열을 그리고 있다. 이것은 오늘의 시대가 안고 있는 비극적 양상이며, 또 기독교 가정이 극복하여야 할 주제들이다.김: 가정해체의 가장 큰 요인이 이혼의 증가라고 본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정: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첫째, 이혼관의 변화이다. 과거에는 일부종사(一夫從事)하여야 한다는 윤리관, 그리고 축첩하더라도 가정을 깨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혼하는 것을 금기시(禁忌視)하여 왔고, 그 결과 이혼한 당사자를 따가운 시선으로 보아 왔다. 그러나 점차 혼인이나 이혼에 관한 사회학적 개념이 달라지면서 이혼을 불허하거나 금지하는 의식이 이혼을 관용하는 쪽으로 전환되어감에 따라 이혼율의 증가를 가져오는 것으로 생각된다.둘째, 여성의 지위 향상이 이혼율의 상승을 가져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여성해방운동은 남편에 대한 종속 또는 굴종의 관계에서 벗어나 여성도 남성과 대등한 인격적 주체로서의 지위를 요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여기에 대한 불만이 있는 경우 이혼을 청구하게 되었다. 더욱이 취업으로 경제적 능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되면서 종래에 생존을 위하여 할 수 없이 혼인생활을 계속했던 것과는 달리, 경제적 자립에 힘입어 이혼을 청구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셋째, 산업화나 도시화에 따른 인구의 이동, 핵가족화, 소득의 증대, 교육의 발달 등이 이혼율 상승에 작용하는 요인들이 된다. 특히 여성의 가정 밖 취업은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함께 남편 이외의 남성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이혼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이와 같은 이혼의 문제는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결혼을 영원한 결속으로 보는 성경적 결혼관이 무시되기 때문에 이혼을 하는 현상들이 확산되고 있다. 불안정한 결혼생활 문제가 현대교회에 큰 도전으로 등장하는 현실 속에서 결혼에 대한 성경적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김: 독신자 문제와 노인문제도 심각하다. 이것을 어떻게 볼까?정: 현대 가정에서 독신자와 노인 문제는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독신자들(single-adults)이란 배우자와 사별(死別)한 사람들(widowed), 이혼한 사람들, 그리고 미혼자들(the never married)을 포함한다. 이들이 성인 연령층 가운데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크지만 교회가 이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여기에는 문화적 영향도 많다. 즉 결혼만이 의미있는 유일한 생활방식이며, 독신이란 결혼 전이나 혹은 결혼과 재혼 사이에서만 정당화 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라는 인식들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독신자들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교훈하는 독신에 대한 관점을 면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과 바울 사도의 짤막한 가르침을 제외하고는 독신자들, 특히 미혼자들에 대한 직설적 교훈이 없다.현대가정의 문제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노인문제이다. 세계의 인구증가율 가운데 노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커가고 있다. 많은 나라들이 노령국으로 바뀌고 있는데 한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65세 이상의 고령인구가 전체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960년대의 3.3%에서 1975년에는 3.5%, 1984년에는 4.0%, 2000년에는 7%로서 고령화 사회가 되었고, 근래에 와서 ‘고령사회’가 되었고, 평균 수명도 놀라운 증가를 보이고 있다.노인 인구의 증가는 사회복지 차원만이 아니라 현대가정에서 중요한 문제로 제기된다. 노인문제는 노화(老化, Aging)라는 신체적 특성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나아가서 교회와 사회에서도 큰 문제가 된다.김: 그러면 이런 현상에 대해 우리 교회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정: 교회의 각종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교회 중심으로 편성되고 심지어는 가정생활을 소홀히 하게 하거나 해를 끼치는 경우가 있다. 특히 한국교회의 신앙적 특성이 ‘교회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가정생활에 대한 관심을 ‘세속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가정 사역은 매우 중요하며, 가정과 교회의 협력적 방향모색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으로서의 가정과 교회는 상호보완적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한다.김: ‘가정 사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정: 가정 사역(家庭使役 Family Ministry)이란 단어가 우리 주변에 정착되고, 여기에 대한 연구가 구체화 되고 있는 것은 최근의 일이다. 우리들은 가정문제에 대한 단편적 관심에서 벗어나서 이것을 체계화 하고 이론화 하며, 나아가서 우리들의 교회와 가정에 정착시키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가정문제를 주제로 한 각종 세미나들이 개최되어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켜 왔지만 가정 사역을 이론적으로 체계화 하지 못한 약점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기본에의 회귀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신성을 지켜야 한다. 세상의 풍조를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진정한 “기독교 가정”이 되어지도록 교회들이 바로 가르쳐야 한다. “가정이 살아야 교회가 살고, 사회가 산다.”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11-30
  • 학술/ 한복총 ‘한미관계와 기독교 특별 심포지엄’
    본고는 지난 11월 22일 한국복음단체총연합회가 개최한 ‘한미관계와 기독교 특별 심포지엄’에서 김명구 교수가 발제한 ‘초기 한미관계와 기독교’의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 편집자 주 △미국정부의 한국포기와 그 이유1880년대 한국을 방문한 대개의 미국인들은 외교관과 선교사들이었다. 경제적 이유로 한국을 찾은 미국 사업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선교사들과 달리 외교관들은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7년가량 체류했다.이들은 조선을 면밀히 관찰했고, 조미수호조약이 체결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에 대 해 소극적이고 무심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조선이 미국의 이익에 이바지 하지 못한다는 판단이 었다. 미국의 대(對) 조선과의 수교 목적은 미국의 국가이익이었다. 안전한 항로의 보장과 경제적 이익 을 위해71) 적극적으로 조선의 개항을 실현하고 공사관을 개설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빈약한 의존 관계(a poor reliance)”를 확인했고, 따라서 무관심과 소극적 정책으로 후퇴한 것이다.72) 이들의 외교적 판단은 미국의 대(對) 조선정책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조선은 미국을 통해 일본과 같은, 강력한 근대국가를 꿈꾸었지만 미국은 조선을 지원해주어서 얻을 수 있는 정치·경제적 이익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1905년 5월 쓰시마해전을 계기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해 9월 러시아와 포츠머쓰 (Treaty of Portsmouth)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을 “지도, 보호 및 감리의 조 치”하는 것을 용인해야 했다.79)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은 어떠한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인 1900년,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는 이미 일본이 한국을 차지하도록 해서 러시아의 남하를 차단해야 한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었다. 러시아의 팽창을 막기 위해 일본의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시베리아, 북만주를 차지한 러시아와 대치시키자면 일본이 한국을 차지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었다.80) 고종 황제는 “미국만이 한국의 우방이며, 미국 국민이야말로 한국이 장차 난경(難境)에 처할 때 강력하고도 사심 없는 조언과 충고할 국민”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조미수호 조약 당시의 원조나 거중조정 조항에 대한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고 미국은 이를 외면했다. 19세기 당시, 한 국가가 주권을 인정받으려면,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국가들에 의해 문명국(civilized state)으로 인정받아야 했다. 또한 국가의지(state will)의 존재, 곧 적대적인 세계에 대해 스스로 자위할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어야 했다. 한국과 중국은 문명국으로 인정받지 못한 반면 일본은 그 지위를 확보했다. 이를 바탕으로, 비문명국가인 대한제국을 보호한다 는 명분으로 침탈했고, 미국은 일본의 한국 점령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했던 것이다.△미국정부와 미국사회의 변화1907년의 영적대각성운동은 한국교회 비정치운동의 시발이 되었다. 그런데 이 운동은 한국을 버리고 떠난 미국을 다시 돌아오게 해 일본과 대립하게 했다. 미국교회를 자극했고 미국정부의 대한(對韓) 인식을 교정하게 했다. 일방적으로 기울었던 일본 우선의 정책에 교정을 하게 한 것이다. 나는 올해 한국을 방문한 많은 유명인사들 중 한 사람에게 한국의 기독교에 대해 어 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평양에서, 5-6천명의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고 한 주일을 보냈는데, 그는 “원더풀? 원더풀!”이라고 대답했다. 목사들과 선교회 총무들뿐만 아니라 여러 신문 특파원들과 사업가들도 그 사실에 동의를 하 며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놀라운 결과에 경이를 표하고 있다. 그들은 비기독교인들이나 한국인들의 유일한 구원의 소망이 기독교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무어(John Z. Moore)는 1907년 영적대각성의 결실을 확인하고 싶어 적지 않은 인물들이 한 국을 찾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 사람들 중에는 교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언론계와 경제계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의 말대로 세계 거대신문의 특파원들이 한국을 찾았고, 세계 명사들의 방문도 넘쳤다. 이들은 영적대각성 운동의 결과와 선교의 결실, 곧 복음의 강력한 힘을 확인하 고 싶어 국권이 상실된 나라를 찾은 것이다. 방문객들은 한국에서 사도적(使徒的) 기독교가 되살아났다며 흥분했고 한국이 아시아의 “지배 적인 세력”이 될 것이라며 탄성을 질렀다. 방문객들은 하나같이, 소박한 예배당에서, 수천 명씩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에 경탄해 마지않았다. 이들에게 한국은 복음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고 있는 나라였 다. 국제정치적 이득을 위해 한국을 버린, 미국정부와 다른 생각이었다. 식민지를 확장하고 있던 시대였고 문명국과 비문명국의 간극을 뚜렷이 구분하던 시대요, 사회 진화론의 철학이 지배하고 있던 때였다. 그런 시대 속에서, 식민지에서의 불합리한 일들이란 흔한 일이었다. 한국의 문제가 주목을 끌 수 없었고, 기독교에 관한 일 지라도 다른 기독교 국가 정부의 관심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일본은 서구 세계로부터 아시아의 유일한 문명국으로 인정받고 있었고, 일본의 식민지 한국을 찾은 서구인들도 일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서구인들은 한국인들이 당하는 핍박과 가혹한 현실을 보려하지 않았다. 선교사들이 아무리 일본의 처신에 대해 설명을 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예일 대학교 심리학 교수 랫 박사 부부가 이토오 히로부미의 초청으로 한국에 두어 달 머물며 “교육과 윤리”를 주제로 강연했을 때도, 일본인들이 한국 땅에서 저지르고 있는 일에 대해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1912년에 이르러, 미국 정부의 입장이 변하고 있었다. 미국 뉴욕의 월간지 아웃룩( The Outlook )은 1912년 12월 4일자 기사는 한국 땅에서 일어난 '105인 사건'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동양 각국에서 중대한 범죄 사건으로 인해서 재판 처벌 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일본 도쿄나 중국 베이징에서는 각기 자기 국민들을 감금하거나 징역에 처하기도 하고, 혹 교형이나 참형에 처한다. 외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에 관계만 없으면 서양 각국들은 전혀 상관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에 한국인 123명의 재판 사건으로 인해 동서양 각 국이 이렇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통상을 시작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다.”소극적이고 수세적이었던 미국교회가 적극적이고 공세적으로 한국문제를 대변하기 시작했고, 미국사회를 강하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관심이 없었던 한 국문제가, 미국교회를 통해, 미국사회와 미국정계의 이슈가 되었다. 1907년 운동의 결실만큼 뛰어난 선교 결과를 가져온 예가 없었고, 그것은 곧바로 미국교회의 업적과 자랑이 되었다. 당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어떻게 한국교회가 평가되고 있었는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세계의 모든 교회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한국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처럼 특별히 택해 서, 동양 처음으로 기독교 나라를 만들어서 아시아 주에 기독교 문명을 발전시킬 사명을 맡기려는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때에 한국교회를 돕는 것이 장차 일본과 중국을 문명화시키는 기초가 된다고 하여 각 교회에서 발행하는 신문, 월보, 잡지에 한국교회 의 소식이 그칠 때가 없으며 교회 순례자들의 연설이나 보고에 한국교회에 대해 칭찬 하지 않는 것이 드물 정도이다.이승만의 말대로 미국의 신문과 잡지는 한국교회의 성과에 대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계속해서 그는 1907년 이후에 변하고 있는 사항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술하고 있다. 국제 정치에서 한국이라는 나라는 없어졌고 잊히고 있던 존재였지만, 한국교회 선교의 결실을 보고 싶어 적지 않은 서구의 기독교 지도자들,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이 적지 않았던 사람들이 한국을 방문했다. 대개 이들은 재한 선교사들의 집에 머물며 통역과 안내를 받으며 한국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한국 교인들의 집을 방문을 했다. 이들이 알고싶어 했던 것은 오직 한국교회 부흥 이유였다. 그렇지만 자연스럽게 한국의 정치 상황도 알게 되었고, 한국의 정세와 여러 상황도 함께 분석하게 되어 있었다. 이승만의 분석대로 한국 방문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판단한 것을 서구 기독교 세계로 알리게 되어 있었고, 일본으로서는 이것이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의 가혹한 통치와 위선이 적나라하게 서구 기독교 사회로 전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1907년의 선교사들은 비정치를 선언했지만, 한국기독교의 현실과 정치적 입장을 대변했고, 한국의 실정을 미국사회에 곧 바로 알리는 역할을 했다. 따라 서 일본은 가혹한 정치와 자신들의 추악한 단면을 전달하는 선교사들이 위험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파악한 이승만은 독립운동에 이를 잘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선교사들과 미국교회와 연결시킬 줄 알았고, 미국정계로 이어지게 했던 것이다. 1907년을 시작으로 재한 선교사들은 일본이 한국인들과 한국교회를 학대하는 정황도 비밀리 에 미국교회에 전했다. 미국교회는 한국의 정황을 미국정계와 사회로 알렸고, 한국의 입장을 대변했다. 상당수의 미국교회 목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미국 정치 지도자들에게 한국독립을 직접 호소하고 설득 했다. 1940년대까지의 시간이 지나야 했지만, 이 사건은 미국정부의 한국 독립 결정으로 연결되었다. 1902년의 러일전쟁과 1905년의 을사늑약 이후, 미국은 조선을 포기했고 일방적으로 조선과의 관계를 끝내려 했지만 그러나 재한선교사들에 의해 양국간의 관계는 이어졌고, 오히려 한국독립의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 해설/기획
    • 학술
    2018-11-30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㉖ 학원선교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우리나라에 온 초대 선교사들은 교회와 학교 그리고 병원을 세워 입체적 사역을 하였다. 그래서 지역마다 미션스쿨(Mission School)이라 불리는 각급 학교를 세웠고, 이 학교들이 한국 교육의 현대화를 이끌어 나갔다.지금도 전국 각지에 기독교 계통 학교들이 있으나 지금의 교육 환경은 옛날과 달라졌다. 문제의 탐색오늘의 기독교 계통의 학교들이 그 설립 이념에 따라 바른 교육을 할 수 있느냐? 란 문제가 제기된다.교육 환경의 변화와 정부의 교육정책 등이 기독교 학교들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위한 사역 즉 학원선교를 어떻게 할 것이냐 라는 문제에 우리의 관심을 모을 필요가 있다. 사례의 탐구많은 학교중 한 학교를 찾는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설립한 전통있는 전주 신흥고등학교의 교목실장 박용화 목사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김남식(이하 김):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학원선교 사역을 하느라고 수고한다. 오늘날 학생들이 일반적 경향이 어떠한가?박용화(이하 박): 우리는 종종 한 나라의 미래는 그 나라 청소년들에게 달려 있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비행이나 폭력성 경향은 결코 간과할 수준이 아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청소년문제를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지표는 이들의 흡연과 음주실태다. 그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청소년들의 음주나 흡연이 다른 비행의 시작이 되는 소위 ‘게이트웨이(Gateway)’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 최고 수준의 청소년 흡연율을 비롯해서 술집이나 윤락가에까지 드나드는 나이 어린 청소년들, 그리고 날로 증가하는 청소년들의 성범죄와 소비와 향락을 위한 각종 범죄 행위, 또한 학폭은 물론이고 따돌림과 정보통신망을 이용한 음란·폭력으로 인해 신체적, 정신적으로 우리 사회는 중병을 앓고 있는 실정이다. 거기에다 세계 제1의 청소년 자살률에, 인터넷과 스마트폰 중독, 게임중독 실태는 참으로 심각한 수준이다. 김: 이런 상황 속에서 학원선교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의 현실이 어떠한가?박: 오늘의 상황을 초래한 원인에 대해서 학자나 전문가 마다 여러 가지로 진단하고 있으나 대체로 세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첫째는 정부정책의 일관성 결여이고, 둘째는 청소년들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해치는 각종 유해환경이며, 셋째는 입시위주의 학교교육의 문제다.먼저, 입시위주의 학교교육 문화는 기독교학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사실, ‘기독교학교’는 ‘기독교’와 ‘학교’라는 두 명사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기독교’를 앞세우면 자율성에, ‘학교’를 강조하면 공공성을 강조하는 면이 강하다. 즉 기독교학교는 복음을 전수하고 성서적 세계관에 근거한 복음을 전파하며 선교적 사명을 실천해야할 자율성과 학교로서의 학문과 지식을 전수하고 가르쳐야 하는 공적인 책임성을 가진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의 기독교학교는 ‘자율성의 상실’과 ‘공공성의 약화’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며 신음하고 있다.거기다가 기독교학교의 가장 큰 버팀목이자 지지대인 한국교회도 선교적 관심이 ‘삶의 발아시기’로 선교의 황금어장인 중고등학교보다는 ‘장병 몇 명에게 세례 주었다’는 성과주의와 맞아떨어지면서 교단마다 군선교에 치중하고 있는 실정이다. 젊은 장병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군선교는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것이다. 군선교에 앞서 가정과 교회가 아닌 처음으로 복음을 접하는 청소년들이 있는 기독교학교에 좀 더 관심을 가진다면 한국교회는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의 활기찬 발걸음으로 넘쳐 날 것이다.신자본주의는 학교를 무한경쟁으로 몰아가고 있는 거대한 공룡이다. 공립학교는 국가적 지원을 받지만, 교회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는 기독교학교들은 이 경쟁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 재정적 위기는 기독교학교의 생존과 교육의 ‘질’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기독교학교는 이념적으로, 재정적 구조면에서도 사회의 흐름을 모방하면서 예배, 성경 수업, 신앙 활동을 장애물로 여기거나 축소시키고 오직 ‘좋은 대학 진학률’에 목을 매고 있는 현실이다. 전인교육과 신앙교육을 추구한다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사실 기독교학교가 추구하는 바도 대단히 세속적이다. 명문대학을 진학을 통해 학생들이 정치계, 법조계, 의료계, 금융계로 진출하여 사회에 영향력을 과시하게 하고, 이를 통해 다시 학교의 명성을 더욱 드높이자는 논리이다. 무한경쟁의 시대에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펴며 기독교학교도 사실상 이 길을 선택하고 있지만, 기독교학교마저 이렇게 세속화되고 나면 ‘누가 이 세속 문화를 수정해 갈 수 있는 영적인, 정신적인, 도덕문화를 창출해 낼 것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따라서 기독교학교가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교회가 울타리가 되어주고, 교육과정에 관해서 정부와의 협상은 물론이고 재정적 지원도 충분히 해야 하는 시점이다. 김: 교육부의 교육정책이 기독교계 학교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고 있다. 현장 실무자로서 보고 있는 상황은 어떠한가?박: ‘기독교 종립학교라 할지라도 어떤 특정 종교만을 강조하거나 강요하지 말라’는 정부 교육당국자들의 교육행정 방침이다. 이러한 지침은 갑자기 뛰쳐나온 것이 아니라 역사적 흐름이 있다. 중학교 무시험제 실시(1969년)와 고교평준화(1973년) 이후 끊임없이 기독교계 사립학교에서의 채플과 성경수업에 대한 문제가 부각되어 왔다. 정부와 교육당국은 기독교학교의 정관을 무시한 채 일체의 신앙교육 행위를 비정규 과목으로 전환하도록 강요하고, 통제의 수단으로 ‘예산’이라는 칼자루를 사용하며, 최근에는 반기독교 연대로 뭉친 일부 시민단체들을 등에 업고 ‘학생인권조례’까지 들이대고 있는 실정이다. 제7차 교육과정이든 2015 개정교육과정이든 간에 정부의 미션스쿨에 대한 통제 정책은 결국 기독교학교의 존재 이유와 존재 양식에 심각한 훼손을 주며 기독교학교의 정체성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정교분리(政敎分離)라는 헌법에도 위배되는 국가 정책인 것이다. 그러면서 자유로운 선교활동은 꿈도 꾸지 못하는 실정이다. 심하게 표현하면, 기독교학교라는 명칭만 달고 겨우 ‘연명’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현실이다.김: 어려운 여건 속에서 기독교 학교들과 학원선교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란 심각한 문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현장에서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나?박: 이러한 시대적 정황과 현실 앞에 놓여 있는 기독교 학교는 ‘기독교학교만이 수행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를 정립하고 설립목적에 맞게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고 선교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해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 학교 행사 때마다 예배를 드리고, 매주 채플이 있으며, 수업에 성경과목이 있고, 기독교적 교훈이 있으며, 교직원이 기독교인이라는 것만으로는 결코 해답이 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자기 정체성의 문제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기독교학교의 건학 이념에서 핵심 중에 핵심은 바로 ‘성경적 세계관’에 부합하는 인물을 배출하는 데 있다. 즉, 기독교학교의 존재 이유는 세상이 요구하는 무한 경쟁자들을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의 자신의 실체를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과 함께 하는, 그리고 생명존중과 인간사랑, 이타심과 자기 긍정을 가지고 학문과 신앙을 통합한 성품과 인격을 갖추고 세상을 보다 아름답도록 돌보고 가꾸는 청지기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다. 세상적인 성공(sucess)이 아니라 섬김(service)의 종(servant)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역량을 키워주는데 있는 것이다. 점차 비인간화가 속도를 더하고, 세계는 기계화되어 가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 그분의 섭리, 그리고 역사와 진리를 지켜야 할 지성과 신앙양심의 보루가 되는 일꾼을 세우는데 기독교학교의 선교적 사명과 방향성이 있는 것이다. 기본에의 회귀세속화의 물결이 학원선교의 터전을 흔들고 있다.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신 지상명령을 감당하기 위해 청소년들의 가슴에 복음 씨앗을 뿌리는 일에 우리 모두 힘을 합하자.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11-16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03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는 “갑질”이나 “미투”라는 말이 널리 쓰여지고 있다. 가진 자, 높은 자리에 앉은 자, 강한 자들이 자기들의 권위와 부와 힘을 이용하여 못 가진 자, 낮은 자리에 있는 자, 약한 자를 이용하고, 짓밟고, 수탈하고, 상처주고, 죽이기까지 하는 자들을 규탄하고 부조리한 사회 제도를 개혁하자고 외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역사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에서라도 있었던 일이고, 우리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박힌 현상이라 이를 고치는 일은 하루 이틀 사이에, 한 두 사람의 힘을 통하여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근본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성경에서 찾아보았으면 한다. 갑질은 성경에도 많이 언급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브라함은 흉년을 피하여 이집트에 내려갔다가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 부자가 되었다. 바로왕이 많은 선물을 주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에게는 상속자가 없었다. 그의 하인 엘리에셀을 입양하는 문제를 고려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찾아 오셔서 그의 몸에서 날 자가가 그의 상속자가 될 것임을 말씀하시고, 그를 통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과 가나안의 넓고 넓은 땅을 그의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를 보증하는 “횃불언약”을 맺으셨다. 아브라함이 쪼갠 짐승들 사이로 하나님께서 지나가심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담보하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지킬 것을 약조하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져 버렸다. 당대의 메소포타미아나 가나안 땅의 풍습을 따라 아내 사라가 씨받이로 정해준 이집트 출신 몸종 하갈과 동침하였다. 하갈은 임신하였다. 하갈은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고 그의 여주인 사래를 무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꼴을 두고 볼 수 없던 사래는 우선 아브라함에게 이 사실을 불평했다. 아브라함은 “보시오 당신의 여종은 당신 손 안에 있으니 당신 눈에 좋을 대로 그 여자에게 하시오”라고 대답하였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아무런 책임도 관계도 없는 것처럼, 남의 일을 말하듯이 이 문제에서 물러 선 것이다. 그래서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하였고, 하갈은 학대를 참을 수 없어 집에서 도망쳐 나와 광야를 해매고 다니게 된 것이다. 성경에 사래가 하갈을 어떻게 학대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도망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만큼 견디기가 힘든 고통과 아픔을 느꼈기 때문에 아이를 가진 여자가 집을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갈의 인생은 참으로 불쌍하기 그지없다. 그는 이집트에서 바로의 종이었음에 틀림없다. 왕 바로가 아브라함에게 그의 허물에 대한 변상으로 재물을 챙겨 주었을 때에 아마도 가축들과 함께 묻혀와 아브라함의 가속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여자는 부모들을 떠나 멀리 이방에 끌려와서 아브라함의 종노릇을 하고 살다가 아브라함의 씨받이가 된 것이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도, 반항할 여지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처지가 된 것이다. 요사이 말로 인권이니 자유이니 선택이니 하며 자기주장을 할 틈이 없다. 동물 취급을 받는 것이다. 그래도 아브라함의 피붙이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자기에게는 조금이라도 숨통이 트이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그마저 날려버린 것이다. 이제는 살기 위한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한편, 사래의 갑질성 학대는 다분이 보복성이 있고, 가정의 질서를 세우기 위한 의도가 있어서 그런대로 이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아브라함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아주 비겁하고 무책임하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자기가 안고 자고, 자가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인데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아내에게 알아서 처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시류를 따라 상속자를 얻고자 했던 아브라함의 가정에 검은 풍파가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에게는 사실상 상생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허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때 여호와의 천사가 하갈에게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지 않으시고 그의 천사를 보내신 것이다. 이는 분명 횃불 언약을 믿지 못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불편한 심기를 보여주는 면이라고 할 수 있다. 출애굽 때에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 가지 않고, 그의 천사를 대신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신 경우와 유사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언약을 저버린 아브라함 부부를 보시고 그의 마음이 편하실 리가 없다. 그래서 그 대신 그의 천사를 보내신 이유가 될 것이다. 여호와의 천사는 하갈에게 복귀 명령을 내리신다.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 여자의 손아래에 복종하여라.”(16:9)고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들이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문제는 안보고 회피하고 도망간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미해결로 남는 것이다. 하갈에게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라고 명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식을 낳고 거기서 다시 출발하라는 말씀이다. 여호와의 천사는 그가 앞으로 아들을 낳을 것을 예고하시고,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로 부르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마엘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God hears)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하갈의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그의 생명을 살려주셨기에 그 아들 이름을 이스마엘로 지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짓밟히고 신음하고 죽어가는 인생들의 고통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의 앞날에 대해서 그가 들나귀와 같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의 어미 하갈은 비록 노예로 자유 없이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의 아들에게는 자유를 약속하신 것이다. 아마도 어느 누구에게 구속되지 않는 들나귀와 같은 자유인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동장치가 없는 한 사람의 자유는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와 고통을 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고, 별로 좋은 관계를 맺고 살지는 못할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이 모자를 아브라함 부부의 갑질로부터 구출하시고 살리는 분이시다.하갈은 자기를 살려주신 하나님이 감사했다. 세상에서 자기의 가련한 신세를 보고 계신 하나님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격스러웠다 그래서 자기의 형편과 처지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를 살피시고 살려주신 하나님을 “엘로이”이시다 라고 말한다. “엘로이” 는 “나를 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가 여호와의 천사를 만났던 그 우물에 이름을 붙였는데, “브엘 라하이 엘로이”(Beer-lahai-El-roi), 즉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자의 우물”(The well of the living one who sees me)이다. 하갈이 만난 하나님은 들으시고, 보시고 살리는 분이었다.하갈은 세상에서 가장 짓밟히고 핍박당하고 상처받은 비참한 인생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도 살 길을 열어 주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심지어 자기가 살기 위해 자기의 아내도 누이라고 속이고, 자기의 자식을 임신한 여자를 자기 입장이 난처하니까 모른 체하는 비굴한 사람이다. 이스마엘은 아브람에게 계속 그의 약속의 아들, 이삭에 이어 대대로 그의 후손들에게 옆구리의 가시가 되었다. 사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늙어가는 아내로서 당시의 풍습을 따라 씨받이를 통해서라도 남편의 대를 잇게 해주려다가 결국은 하갈을 학대하고 갑질하는 여인이 되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무시하고 세상의 풍속을 따라 자식을 얻으려고 몸부림치는 이 가정은 어떻게 보면 바람 앞에 촛불과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천사가 찾아오시어 이 문제를 수습하신다. 하나님은 하갈을 구출하시고, 15장에 이어 17장에서 할레를 통하여 피를 흘리게 하시고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종결 완성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한 많은 인생살이를 보고 계시는 분이시다. 엘로이 하나님은 이 고난 받고, 핍박당하고, 도망가는 것만 보시는 분이 아니다. 인간들의 모든 불의와 고난을 살펴보시는 분이시다. 요셉은 자신을 유혹하는 주인의 처 보디발의 유혹을 물리치며 “내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 득죄하리이까?”라고 말한다. 그의 주인, 보디발에게 득죄하리이까 라고 말하지 않는다. 미성년자에 대한 세도가의 아내가 부리는 성폭력 갑질 시도를 “코람 데오”(하나님 앞에서)의 믿음과 정신으로 이겨낸다. 하나님께서 “엘로이”이시니 우리 인생들은 요셉처럼 “코람 데오”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11-16
  • 해설 / 법을 외면하는 교회, 모순에 빠진 정의
    공교회로서의 신뢰 추락… 국민들 교회 불신에 한 몫1000만 성도, 6만 교회를 자랑하는 한국교회의 수장이자, 300개 장로교단의 장자교단임을 자처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통합측(총회장 림형식 목사)의 탈법, 무법적 행태가 점점 도를 넘고 있다. 통합측의 최근 몇 년간 행보를 보면, 스스로 최고의 권위를 부여한 총회법은 안중에도 없고, 심지어 사회법 판결까지 무시하는 처사가 곳곳에서 눈에 띈다. 법 위에 교단이 있을 수 없고, 법을 무시한 채 총회가 있을 수 없건만 통합측에 있어 법은 지엄한 권위를 가진 절대적인 규범이 아닌 듯 싶다. 한국교회의 장자교단을 자처하는 통합측의 이러한 무법적 행태는 한국교회 전체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친다. 공교회로서의 신뢰가 바닥으로 추락함은 물론이고, 비신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외면하게 하는 결정적 단초를 제공한다. 앞서 한국교회의 신뢰도 추락의 원인을 묻는 수많은 설문조사에서 대다수의 국민들은 ‘목회자’를 그 원인으로 꼽았다. 그리고 문제의 중심에 있는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자신의 사리사욕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해 거짓을 말하고, 위선을 내뿜으며, 법을 자기들 멋대로 해석한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교회가 처한 부끄러운 현실이다. ‘이단 사면’ 폐기, 삼위일체 절대 권위 무시통합측의 무법적 행태가 대표적으로 드러난 사건은 지난 2016년 발생한 이단 사면 ‘취소’였다. 통합측은 2015년 제100회 총회를 맞아 ‘화해’를 모토로 특별사면위원회 구성을 허락하고, 이듬해 특별사면위원회는 공모를 통해 신청한 이명범 목사, 김기동 목사, 박윤식 목사, 변승우 목사 등 4인을 면담과 검토 끝에 사면을 결정한다. 엄밀히 ‘해지’가 아닌 ‘사면’이었다. 그리고 당시 총회장 채영남 목사는 이들 당사자 4인과 기자들을 모아놓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들이 ‘사면’됐음을 세상에 선포했다. 평생의 한(恨)과 같았던 이단이란 족쇄를 벗어던지게 된 이날 선포 앞에 이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앞으로 한국교회와 함께 복음전파에 온힘을 기울이겠다는 겸손한 맹세도 했다. 하지만 통합측은 곧이어 개최된 2016년 9월 101회 총회에서 일말의 고민도 없이 이를 폐기해버렸다. 이단을 풀어줬다는 세간의 비난여론과 현장 총대들의 반발 앞에 총회장 이성희 목사가 즉각 폐기를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특별사면위의 ‘이단 사면’은 총회의 허락을 구할 사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채영남 총회장은 삼위일체 하나님 이름으로 사면 선포까지 한 것이다. 하지만 통합측은 자신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권위보다 마치 위에 있는 듯 이를 무참히 뭉개버렸다. 여론에 좌우되는 원칙 없는 총회요즘 세간에 가장 큰 화제 중 하나는 단연 명성교회다. 김삼환 목사의 아들인 김하나 목사에 대한 목회세습이 정당한가를 두고 교계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까지 관심을 갖고 명성교회를 주목하고 있다. 명성교회가 세계 최대 장로교회라는 이슈가 있긴 하지만 사실 한국교회 목회세습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미 수많은 교회들이 목회를 세습했고, 지금도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앞선 교회들과는 달리 유독 명성교회의 세습은 사회적 관심사로까지 부각됐는데, 이 역시 명성교회와 통합측 교단 모두의 법을 무시한 행태에서 비롯됐다. 먼저 명성교회는 ‘세습방지법’이라는 총회법을 완전히 무시한 채 목회세습을 강행했다. 이를 두고 김삼환 목사가 은퇴하는 목사가 아닌 은퇴한 목사이기에 ‘세습방지법’을 적용받지 않는다는 옹색한 주장까지 나왔다. 명성교회는 김하나 목사의 목회세습에 이미 모든 것을 걸었다. 그렇다면 중심을 잡아야 할 것은 명성교회를 판단한 교단이다. 문제는 통합측이 명성교회 사태에서 중심을 완전히 잃었다는데 있다. 총회는 법을 앞세워 사건을 판단하고 교회를 치리하면 될 것이지만, 통합측은 명성교회라는 어마어마한 명성에 짓눌려 이도저도 하지 못한채 거의 1년을 허비했다. 그리고 지지부진 이어오던 총회재판국은 명성교회 목회세습을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명성교회 문제에 대해 총회재판국이 판단을 내렸다는 부분이다. 명성교회 목회세습이 정당한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은 분명히 있을 수 있지만, 교회 최고 권위를 가진 총회재판국이 판결을 했다면 그 판결이 다른 재판에 의해 뒤집어질 때까지는 그 판결을 따라야 함이 옳다. 하지만 이후 일반 언론까지 가세해 총회재판국의 판결을 비난했고, 9월 총회에서 명성교회 문제를 상세히 다루는 듯 국민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총회는 총회재판국의 판결을 재판없이 뒤집었다. 마치 손바닥을 뒤집듯 너무도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는 정의를 바로세운다는 나름의 변명을 할 수도 있겠지만, 사회법과 구분되는 교회법의 권위를 완전히 깔아뭉갠 커다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번 명성교회 사건을 계기로 통합측 총회재판국의 권위가 바닥으로 추락함은 자명한 일이다. 더 이상 누구도 총회재판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고, 결과에 순응치 않을 것이며, 혹여 자신의 뜻에 반대되는 판결이 나왔을 시에는 여론을 동원하면 이를 충분히 뒤집을 수 있다는 전례가 될 것이다. 사회법 결정마저 무시통합측의 법을 무시하는 행태는 교회법과 사회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미 판결이 났음에도 그를 전혀 수용치 않는 것이다. 먼저 효성교회 사건을 보면 총회재판국의 판결을 끝냈음에도 총회행정지원본부가 재판국의 판결집행문을 당사자에게 발송하지 않아 1년이 넘도록 집행되지 않고 있다. 지난 2017년 9월 총회 제1재심재판국은 효성교회 전중식 목사에 대해 “전중식을 가중처벌하여 면직출교에 처한다”라는 내용의 재판 결과를 제102회 총회석상에서 총대들에게 보고하고, 총회행정지원본부에 판결집행문을 발송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 판결집행문은 최근까지도 발송되지 않았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 10월 1일, 전 총회 제1재심재판국(국장 박창재, 서기 조국환, 회계 이석구) 명의로 총회장 앞으로 보낸 ‘총회 제1재심재판국 판결 집행 촉구’문에서 드러났다. 이 문서에 따르면, 당시 제1재심재판국이 제102회 총회석상에 30여분에 걸쳐 재판국 보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통합측 총회는 제1재심재판국이 ‘총회임원회의 안건처리 지침’을 위반하였다며, “<총회 제1재심재판국 제100-10-1>의 ‘전중식을 가중처벌하여 면직출교에 처한다’는 재판 결과가 제102회기 총회석상에서 총대들에게 공식 보고된 바가 없다”고 부정한다는 것이다.제1재심재판국은 “재판은 재판으로만 뒤집을 수 있는 것인데, 총회임원회가 행정절차를 따지면서 총회판결을 무효로 결의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사법부의 판결을 어떻게 행정부의 결의로 무효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라며, 총회장은 “총회 헌법대로, 총회 판결대로 바르게 행정조치를 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또한 최근 이뤄진 평양노회 노회장 승계는 교회법과 사회법 모두를 무시한 대표적 사례다. 평양노회는 지난 10월 23일 제189회 추계노회를 통해, 조인서 목사를 노회장으로 추대했는데, 조 목사는 현재 무임목사로 노회장에 오를 수 없는 신분이다. 평양노회는 조 목사를 강북제일교회 위임목사로 표기했지만, 현재 조 목사는 법원에 의해 강북제일교회 대표자 자격을 정지당한 상태로 엄밀히 말하면 무임목사다. 총회 헌법, 제74조 노회원의 자격에 의하면, ‘회원권은 위임목사, 담임목사, 부목사, 전도목사, 기관목사, 선교목사, 선교동역자에게만 있으며, 공로목사, 은퇴목사, 무임목사, 전 노회장, 전 부노회장은 언권회원이 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즉 무임목사는 언권회원일 뿐으로 노회장을 승계받을 수 없지만, 평양노회는 이를 무시하고 조 목사의 노회장 추대를 강행했다. 더구나 조 목사는 법원에 의해 강북제일교회 대표자라는 명칭을 사용할 경우 1회당 50만원을 강북제일교회에 지급해야 한다는 간접강제까지 받은 상황이다. 허나 이날 조 목사는 평양노회 회의록 곳곳에 스스로의 직위를 강북제일교회 대표자로 표기했다. 평양노회와 조 목사가 사회법의 권위를 무시하지 않고서야 도저히 할 수 없는 처사다. 악법도 법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악한 법이라도 지켜야 할만큼 법의 권위는 존중되어야 하며, 법의 권위가 깨어질 때 극단적인 혼란이 찾아올 것이라는 경고다. 지금 통합측을 둘러싼 수많은 분쟁과 다툼은 무법, 탈법에서 오는 도덕적 혼란이다. 스스로 장자교단의 위치를 지키고자 한다면 먼저 법에 순응하고 솔선수범 법을 지키는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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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설
    2018-11-16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102
    요한복음 4장은 1-42절은 사마리아 여자와 수가 동네 사람들의 예수님과의 만남과 교제를 통한 개종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 반면에 43-54절은 죽어가는 왕의 신하를 고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 이후 갈릴리에서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라고 주를 달고 있다. 그런데 본문의 양식이 요한이 쓰고 있는 매 장의 전반부는 Narrative, 그리고 후반부는 Narratve에 대한 Discourse 의 구조와는 다르다. 어떻게 보면 전혀 다른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전반부와 후반부의 사건을 분리해서 설교한다. 본문이 길고, 별 연관성이 없는 것 같은 사건을 무리하게 붙여서 설교의 초점을 흐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본문을 살펴보면 간단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사마리아 여자에 대해서 너무 많은 관심과 비중을 두고 본문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 아닌가 싶다.예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서 하신 일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 같다(45). 이후 그는 고향 갈릴리 지방으로 발길을 옮기셨다. 그런데 이때 예수께서는 “선지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44)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시며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아마도 앞으로 존경 받지 못할 상황을 미리서 예언적으로 말씀하신 것인지, 아니면 일부의 주석가들의 주장처럼 문맥에 맞지 않게 갑자기 튀어나온 말씀이기 때문에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서 삽입된 구절인지 좀 읽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다음 절은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셨을 떼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였다고 했다(45).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보면 예수께서 꼭 고향에서 푸대접을 받거나 무시당하는 것 같지는 않은 데 예수께서 마치 자기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하신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니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말씀 후에 가버나움에서 온 왕의 신하가 자기의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하여 예수님께 내려와 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는 아마도 헤롯 왕의 신하였을 것이다. 가버나움은 당시의 국경 주변 도시였기 때문에 여러 국경 사무 관리들이 그곳에 많이 주둔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상당히 사회적으로 지체가 높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때 예수께서는 “너희들은 표적들과 놀라운 일들을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신하는 다시 똑같은 간청을 한다.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달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가시지 않는 것이었다. 대신 “가라, 네 아들이 살 것이다.”(50)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기대와는 달리 그를 돌려보내는 것이 예수님이 대답이었다. 그때 그 신하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갔다고 했다. 그리고 집에 가서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의 아들이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이적이나 놀라운 일을 보지는 않았지만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집으로 돌아갔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들었고, 그래서 예수께 오셔서 그의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청하는데, 예수께서는 표적과 놀라운 일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사 말씀하신다. 아마도 그들은 갈릴리 사람들일 것이다. 더 나아가서 앞에서 언급한대로 선지자의 고향 사람들일 것이다.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명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보았다. 2:23-25에 보면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많은 표적을 행하셨고,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셨다”고 하셨다. 여기서 “맡긴다”(entrust)는 말은 흔히 쓰이는 “믿는다”(believe)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을 문자대로 번역하면 “예수님 자신은 그들에 대하여 자신을 믿지 않았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역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그들에게 맡기지 않았다”(But Jesus on his part did not entrust himself to them. ESV, NET, NAS)라고 번역하고 있다. 말하자면 예수께서 그들이 그를 믿었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았았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그들 속에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표적을 보고 믿는 이들의 마음을 아셨다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명절에 예루살렘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본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셨을 때 영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선지자는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실제로 엘리야, 엘리사, 예레미야 등 많은 선지자들이 자기 백성에게 환영받지도 못했고, 존경받지도 못했다. 본문에 보면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였다고 했는 데 왜 예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까? 사마리아 사람이나 이 왕의 신하와 갈릴리 사람들은 무엇이 다른가? 이들의 근본적인 다름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고, 갈릴리 고향 사람들은 이적을 보고 영접한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과의 길고 긴 만남과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자신들의 영혼에 대한 말씀을 깊이 있게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성경을 통해 역사적으로 기다려온 메시야시오, 세상의 구주라는 결론을 내리고 믿고 고백한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증언한 여자의 말 때문에 ... 예수님을믿었다.”(39), “그 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더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41),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당신의 말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심을 알았기 때문이다”(42)라고 말한다. 이들은 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본적이 없다. 다만 말씀을 직간접적으로 들은 것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 그리스도, 온 우주 만물의 구주로 알고 믿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왕의 신하도 예수께서 직접 자기 집에 “내려 오시라”고 말한다. 나사렛이나 가나는 산동네요 그가 사는 가버나움은 바닷가이기 때문에 내려오시라고 청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지 않으셨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갔다고 했다. 그때 아들이 살아났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도 말씀을 믿은 것이다.그러나 갈릴리 고향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러나 그를 선지자나 메시야로 믿고 받아들였다는 말은 없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듣고자 하는 마음도 없고, 들으려고 청하지도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 고향 사람으로 특별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랑스럽고, 그래서 영접하는 것이다. 갈릴리에서 용이 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들이 멸시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의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고향 사람으로 영접했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크게 다른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의 백성이 말씀을 듣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의 말씀을 받아야 할 고향 사람들은 말씀을 받지 않았다. 기적을 원했다. 기적이 하나님의 구속사를 말하고, 구원의 방법, 하나님과의 교제, 예배에 대한 지식, 영적 성장에 대하여 말해주지 않는다. 기적은 기적일 뿐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행하는 기적은 단순한 도로의 표지판에 불과한 것이다. 도로 표지판은 나그네가 가는 성읍에 이르는 길을 안내할 수 있지만, 그 성읍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기적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려주는 일회성의 사건일 수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말해주지 않는다.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기적을 붙들고 있는 사람은 계속 기적을 바란다. 마치 어린 아이가 선물을 사다주는 부모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게속 선물을 기다린다. 성장도 없고, 잘 못된 길로 가기 쉽다. 유치한 믿음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은 이러한 믿음을 인정하시지 않은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11-09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㉕ 찬송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찬송이 가지는 위력은 대단하다.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이요 삶의 표현이며, 영광의 선포가 된다. 특히 예배에서 찬송은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예배의 핵심인 찬송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최고의 고백이다. 문제의 탐색예배가 언약 갱신의 현장이라면 여기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어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부분과 교회 곧 하나님의 백성이 드리는 부분으로 나뉜다. 교회가 삼위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역동적인 것 중 하나는 찬송이다. 찬송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백성의 읊조림이요 높임이며 기도이고 고백이다.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예배 찬송은 하나님을 찬미하기보다 인간의 음악적 기교를 나타내는데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찬송이 어떠해야 할까? 전문적 음악가가 아닌 일선 목회자와 성도들의 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성경적 찬송’을 실천하는 하나의 길이기 때문이다.사례의 탐구날마다 예배를 인도하고 있는 일선 목회자의 소리를 듣는다. 광주 동산교회 이한석 목사를 만났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목회자로 헌신하고 있으니 평생을 예배 속에서 살아온 셈이다.김남식(이하 김): 목사로서 늘 예배를 인도하며 찬송의 중요성과 오늘의 문제점들을 느꼈을 것이다. 찬송의 성경적 배경이 무엇인가?이한석(이하 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다니 앞에서 제자들을 축복하시고 승천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늘 하나님을 찬송했다(눅 24:50-53). 여기 예수님의 축복과 제자들의 ‘찬송’은 같은 단어이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베푸신 복을 기억하며 회상하여 올려드렸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축복하신 그것을 제자들이 다시 시를 읊듯이 읊조리는 것이 찬송이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1)고 찬송했다. 이렇듯 찬송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신 일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 드림이다.김: 성경은 바른 찬송을 교훈하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볼까?이: 그래서 성경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라고 명령한다(엡 5:19, 골 3:16).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는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제시된다. 신약교회가 칠십인역 성경을 주로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시편을 시, 찬미, 신령한 노래로 분류했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모두 시편이 된다. 다른 견해는 시는 시편을, 찬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을 노래하는 것을, 신령한 노래는 성령의 감동으로 지은 찬송이라는 것이다. 어떤 해석을 선택하든지 공통적인 면은 시편을 찬송함이다.김: ‘시편 찬송’은 개혁주의 교회들의 예배적 특성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시편 찬송을 부르기보다 ‘부흥성가’ ‘복음송’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대한 우리의 한계가 무엇인가?이: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교회 성도들은 시편이 주는 유익을 누리고 있다. 물론 시편만 예배용 찬송으로 사용해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시편이 주는 유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랍다. 우리에게 시편이 얼마나 자주 불려 지는가? 한국교회는 선교초기부터 이 부분에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1930년대 이전까지 한국에 들어온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미국에서 온 분들이다. 이 분들의 수고로 한국에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러나 이 분들 대부분의 신학적 배경은 미국 부흥운동이었다. 그러니 대륙의 개혁주의 유산을 이어가는 데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신앙고백과 예배에서 더욱 그러하다.김: 오늘의 예배 음악이 예배의 핵심에서 벗어난 듯하다. 가사나 곡에 문제가 있는 듯하다.이: 종교개혁자 루터는 직접 찬송을 만들어 예배에 사용했다. 칼빈 선생은 제네바 시편 찬송을 만들어 성도들의 신앙을 도왔다. 실제 교회생활에서 시편이 찬송되는 교회를 찾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세속 음악의 장르에 개혁주의 신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가사를 붙인 노래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눈을 감고 음률만 들으면 예배음악인지 세속음악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곡들도 더러 있다.김: 나의 경험으로 보면 몇 해전 예장합동총회의 ‘시편찬송가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하여 시편찬송가 만들기에 노력한 바 있다. 교회들의 무관심과 추진하는 사람들의 역량 부족으로 흐지부지 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의 예배음악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이: 종교개혁은 교회의 예배를 바꿨다. 가장 큰 변화 중 하나가 바로 예배 음악이었다. 뛰어난 가창력과 예술성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에게 맡겨진 찬송을 모든 성도들이 부르는 찬송으로 옮겨왔다. 종교개혁 전에는 전문 찬양대원을 양성하는 학교들이 있었고 심지어 이 학교에서 성직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찬송은 이들 전문가들의 전유물이었다. 종교개혁은 비성경적인 찬송 문화를 완전히 개혁했다. 우리는 이 전통과 원리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김: 우리의 예배 음악이 어떻게 회복되어야 할까?이: 찬송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신 구원을 다시 읊조림이다(시 145:5). 이러한 예배 찬송은 반드시 성경적 기준을 가져야 한다. 예배에서의 찬송은 보편성과 경건성(혹은 거룩성)이 담보돼야 한다. 보편성은 모든 성도가 공감하며 부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특정한 일부의 사람들만이 부르는 찬송은 예배 찬송으로 합당치 않다. 가사의 내용이 공감할 수 없는 것이라든지 음악적 기교가 젊은이들에게 적합해 어린이나 노인들이 따라 부를 수 없으면 안 된다. 한국의 그리스도인이나 미국의 그리스도인이나 국적을 초월해 함께 부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이나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세상 연락을 즐기고’ 등은 보편성이 결여된 찬송이다. 시편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구속역사와 그리스도의 사역을 내용으로 하는 가사에 곡을 붙인 찬송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보편성을 갖춘 찬송이다.김: 교회에서의 음악이 세속적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 너무 많다. 세속음악과 장르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이다.이: 리듬과 가락에서 찬송가와 세속음악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특별히 복음송은 더욱 그렇다. 복음송과 예배용 찬송의 구별이 없으니 어느덧 우리 가운데 복음송이 예배 찬송을 대신하고 있다. 복음송에는 포크, 팝, 발라드, 트로트, 재즈, 랩 등 여러 장르의 음악이 혼재돼 있다. 바로 이러한 복음송을 통해 온갖 장르의 음악이 예배 속으로 고스란히 들어왔다. 예배 음악과 복음송은 구분돼야 한다. 시대의 흐름에 편승된 예배 음악은 반드시 중생돼야 한다. 젊은이들과 초신자 또는 구도자들을 배려한다 할지라도 예배음악과 복음송의 균형이 필요하다.김: 음악의 영향력은 누구나 인정한다. 우리의 교회음악은 어떠해야 할까?이: 음악은 사람을 압도하는 힘을 지녔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감정이라는 좋은 선물을 주셨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흥분하기도 하며 차분하게 되며, 분노하고 슬퍼하며, 사랑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감정은 불과 같아서 반드시 신중히 관리하며 제어해야 한다. 신앙의 깊이가 부족한 성도가 자칫 교회 음악을 감정에 치우쳐 사용해서는 안 된다. 교회도 감정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예배 음악이 되지 않도록 감독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것이지 사람의 만족을 최고로 여기지 않는다. 리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로운 구원 역사가 울려 퍼질 때 성도들의 감정은 최고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린다.기본에의 회귀바른 찬송 즉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자.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미하는 ‘시편찬송’이 우리의 찬송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최고의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여 합당한 찬송을 드리자.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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