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기능만이 우선하는 세상’(2011. 6. 26칼럼)에서 오늘의 우리 사회는 기능적, 기계적 가치가 우선하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가치가 우대받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테크놀로지의 이데올로기가 사회에 만연해 있다고 지적한바 있다. 사람을 양육하는 인간교육이 학교교육에서 배제된 채 그 교육은 기능적 인간을 양성하는 학교교육만으로 환영 받고 우리 사회의 모든 구조도 인간미가 풍성한 사람보다는 지식기능만을 요구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고 한 바가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생명의 순기능보다는 역기능현상으로 달려가고 있고 사회풍조가 영악하고 재치 빠르고 이기적인 사고능력자를 우선한 현상을 보면서 차제에 기능만이 우선하는 세상에서 삶의 철학을 제의(提議)하는 바 이다. 삶을 진리에 서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로 사리(事理=일의 도리)를 알도록 “철학이 있는 삶”을 피력(披瀝)한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생각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동물은 세계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인식 비판하지도 못하며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인식을 가지고 인간처럼 해결하려는 의지도 가지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와 사물에는 원리원칙이 있고 여기에 따르는 과정으로 질서와 규칙이나 규범이 있다. 이것을 아는 인간은 철학적으로 회의(懷疑)하며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며 무엇 때문에 사는가? 를 생각할 줄을 안다. 그리고 고생을 하면서도 살아가야 할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또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이 죽은 후 또 다른 삶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알고 해답을 하려는 여기에 철학의 자리가 놓인다. 소크라테스의 회의(懷疑)가 그리스 철학을 탄생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의가 중세신학의 발단이 되었고 데카르트의 회의가 근대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을 알게 한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철학의 기본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알게 한다. 이는 인간이 사유(思惟)를 할 줄 안다는 것이다. 여기에 철학은 인간정신과 삶에 생활의 필수 영양소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철학은 회의하고 대답을 하고 또 다시 질문을 한다. 이는 철학이 삶을 반성하게 하고 질문을 갖게 하여 여기에서 삶의 의미를 갖게 한다. 이런 철학은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으로 나누어 볼 때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지, 인간이 어떻게 하면 진리를 알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를 묻고 답한다. 철학을 Philosophy라 하는데 philos와 sophia가 합친 뜻은 에로스보다 더 높은 사랑이라는 진리를 알게 하여 철학이라 이름한다. 이는 인생이나 세계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확실하고 엄밀하게 인식 비판하여 근본적으로 삶을 해결 하도록 현실에 결단을 촉구한다. 그러므로 철학은 지식이 아니다. 지식과 구분된다. 많은 지식을 쌓아도 ‘내가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하는 물음에 대답을 지식은 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주는 것은 지혜이다. 지혜는 모든 이치에 의하여 잃고 얻는 것과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마음의 작용으로서 사리(事理)를 밝히고 잘 처리하는 재능을 지혜라 하는 것이다. 즉 지식은 공부를 통해서 얻어지는 실력을 지식이라 한다.
그러나 지식은 그 한계가 있다. 이는 지식으로 유식해질 수는 있지만 유능해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 지혜는 일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되고 경험하지 못하였을지라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준다. 고로 지식은 어떤 것을 넓게 안다 하지만 지혜는 어떤 것을 깊게 알게 한다.
그래서 철학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인 것이며 많이 배워서 습득하는 것이 아니고 지혜는 삶의 철학으로 옳고 그름을 가려 사리를 알게 하며 그 의미를 갖는다. 예컨대 이는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어디에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함을 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행하느냐가 중요함을 아는 것이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를 아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보람 있게 사느냐 하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사물에 대해서 철학적 삶은 올바른 신념체계와 확고한 정신자세, 그리고 분명한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산다. 그 삶의 가치는 최선 속에 있는 영원한 진리를 알고 우직(愚直)하게 바보처럼 산다. 그 사람은 강하고 높아질수록 낮음을 안다. 그 사람은 고난이 깊을수록 철학을 깊이 깨우친다. 그 사람은 현명한 사람으로 지혜를 깨닫는다. 그 사람은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 노력함으로 삶의 진리를 터득하는 것이다.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데 예의 주시 할 것이 있다. 삶에서 주어지는 것은 기회이다. 세상사 모든 만사는 원인과 결과가 쉬지 않고 이어지는 엄중한 사실의 세계를 알아야 한다. 한 순간 잘못 판단하면 회복할 기회가 많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삶을 무시하고 확실하게 하지도 않고 검증되지도 않는 것에 삶을 던지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서 날마다 뉴스를 접하여 보는 것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만사가 이치가 있는데 그 이치를 무시하고 규범을 어기는 데서 생기는 것을 알게 한다. 모든 생명체는 순환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풀이 한다. 좋은 삶으로 좋은 결과를 얻은 것은 당연하지만 사리를 무시하고 물질의 유혹이나 인기에 영입하거나 권력의 남용을 부린다면 그 결과는 반드시 심는 데로 거두는 일의 결과를 알게 하는 것이다. 삶에는 반드시 인생이 살아가는 길이 있다. 인간의 삶의 길에는 반드시 삶의 이치가 따른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여기에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나는 길이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하신다. 이렇게 인간에게는 인생의 삶의 길이 있다.
또한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데는 반드시 진리가 따른다. 이 세상에는 그림자 없는 삶은 없다. 즉 사람은 모두가 다 그림자가 있다. 마찬가지로 빛이 있는 낮 세상에 걸어 다니는 사람은 모두가 다 그림자가 생긴다. 만일에 그림자를 없애려면 빛이 없는 어둠 속에 들어 가거나 아니면 온 사방천지를 밝은 조명 빛을 투시하면 그림자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는 여전히 어두움의 그림자가 남아있음을 안다. 빛으로 오신 주님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은유적으로 알게 한다.
그러기에 주님은 ‘내가 진리요’라고 하신 것이다. 밝은 대 낮임에도 그림자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자리에 그림자를 없애는 것은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나는 진리이다’라고 구원의 진리인 말씀을 알게 하신다. 진리는 참 진리이어야 한다. 골짜기에 피어난 꽃에도 향기가 있고 버림받는 잡초더미 위에도 단비가 내린다. 무참하게 짓밟히는 이름없는 풀잎 하나에도 뭉개지는 아픔의 크기는 사람과 똑 같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의미는 뿌리를 살찌우기 위한 창조의 섭리임을 안다. 세상에 사랑 없이 태어난 것 아무것도 없으니 이는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를 알게 하는 것들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범사에 진리는 우리 삶을 영글게 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것도 떠난 자의 몫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몫이라는 진리는 예수께서 가르치는 진리임을 알게 한다. 예수께서 ‘나는 생명이다’라고 하신다. 사람의 삶의 생명은 무엇인가? 하루살이는 어제도 내일도 모르고 오늘만 산다. 가을에 지는 꽃은 작년 여름도 내년 봄도 모른 채 여름 한 철만 알고 산다. 사람인들 하루살이나 한 송이 꽃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가? 그가 아는 것은 오로지 오늘뿐 오늘 이후의 미래가 무한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함에 살아간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태어남도 알고 죽음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영원한 생명!’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바라는 것은 바로 지상의 삶이 유한함을 알기 때문이 아닌가? 천하의 어떤 권력도 자기 손에 넣지 못한 것은 바로 그 영원한 생명을 과연 알게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알게 함이다.
그리하여 온 세상을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를 분명히 알게 한다. ‘나는 생명이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영원하심의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의 자리를 알게 한다. 당신은 삶에는 삶의 철학이 있는가? 있다면 철학적 사유를 하고 있는가? 철학적 사유(思惟)는 어떠한 사실을 헤아리고 간추려서 일정한 개념이나, 판단, 추리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진리가 개관적 사실만이 아니라 철학 하는 관심에 따른 믿음에 있음을 알게 한다. 차제에 나의 길, 나의 진리, 나의 생명이 나의 주님의 신앙과 주님의 철학 있는 삶으로 주님의 삶을 살고 있는지 넌지시 묻고 싶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생각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동물은 세계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인식 비판하지도 못하며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인식을 가지고 인간처럼 해결하려는 의지도 가지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와 사물에는 원리원칙이 있고 여기에 따르는 과정으로 질서와 규칙이나 규범이 있다. 이것을 아는 인간은 철학적으로 회의(懷疑)하며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며 무엇 때문에 사는가? 를 생각할 줄을 안다. 그리고 고생을 하면서도 살아가야 할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또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이 죽은 후 또 다른 삶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알고 해답을 하려는 여기에 철학의 자리가 놓인다. 소크라테스의 회의(懷疑)가 그리스 철학을 탄생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의가 중세신학의 발단이 되었고 데카르트의 회의가 근대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을 알게 한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철학의 기본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알게 한다. 이는 인간이 사유(思惟)를 할 줄 안다는 것이다. 여기에 철학은 인간정신과 삶에 생활의 필수 영양소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철학은 회의하고 대답을 하고 또 다시 질문을 한다. 이는 철학이 삶을 반성하게 하고 질문을 갖게 하여 여기에서 삶의 의미를 갖게 한다. 이런 철학은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으로 나누어 볼 때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지, 인간이 어떻게 하면 진리를 알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를 묻고 답한다. 철학을 Philosophy라 하는데 philos와 sophia가 합친 뜻은 에로스보다 더 높은 사랑이라는 진리를 알게 하여 철학이라 이름한다. 이는 인생이나 세계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확실하고 엄밀하게 인식 비판하여 근본적으로 삶을 해결 하도록 현실에 결단을 촉구한다. 그러므로 철학은 지식이 아니다. 지식과 구분된다. 많은 지식을 쌓아도 ‘내가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하는 물음에 대답을 지식은 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주는 것은 지혜이다. 지혜는 모든 이치에 의하여 잃고 얻는 것과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마음의 작용으로서 사리(事理)를 밝히고 잘 처리하는 재능을 지혜라 하는 것이다. 즉 지식은 공부를 통해서 얻어지는 실력을 지식이라 한다.
그러나 지식은 그 한계가 있다. 이는 지식으로 유식해질 수는 있지만 유능해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 지혜는 일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되고 경험하지 못하였을지라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준다. 고로 지식은 어떤 것을 넓게 안다 하지만 지혜는 어떤 것을 깊게 알게 한다.
그래서 철학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인 것이며 많이 배워서 습득하는 것이 아니고 지혜는 삶의 철학으로 옳고 그름을 가려 사리를 알게 하며 그 의미를 갖는다. 예컨대 이는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어디에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함을 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행하느냐가 중요함을 아는 것이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를 아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보람 있게 사느냐 하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사물에 대해서 철학적 삶은 올바른 신념체계와 확고한 정신자세, 그리고 분명한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산다. 그 삶의 가치는 최선 속에 있는 영원한 진리를 알고 우직(愚直)하게 바보처럼 산다. 그 사람은 강하고 높아질수록 낮음을 안다. 그 사람은 고난이 깊을수록 철학을 깊이 깨우친다. 그 사람은 현명한 사람으로 지혜를 깨닫는다. 그 사람은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 노력함으로 삶의 진리를 터득하는 것이다.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데 예의 주시 할 것이 있다. 삶에서 주어지는 것은 기회이다. 세상사 모든 만사는 원인과 결과가 쉬지 않고 이어지는 엄중한 사실의 세계를 알아야 한다. 한 순간 잘못 판단하면 회복할 기회가 많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삶을 무시하고 확실하게 하지도 않고 검증되지도 않는 것에 삶을 던지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서 날마다 뉴스를 접하여 보는 것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만사가 이치가 있는데 그 이치를 무시하고 규범을 어기는 데서 생기는 것을 알게 한다. 모든 생명체는 순환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풀이 한다. 좋은 삶으로 좋은 결과를 얻은 것은 당연하지만 사리를 무시하고 물질의 유혹이나 인기에 영입하거나 권력의 남용을 부린다면 그 결과는 반드시 심는 데로 거두는 일의 결과를 알게 하는 것이다. 삶에는 반드시 인생이 살아가는 길이 있다. 인간의 삶의 길에는 반드시 삶의 이치가 따른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여기에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나는 길이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하신다. 이렇게 인간에게는 인생의 삶의 길이 있다.
또한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데는 반드시 진리가 따른다. 이 세상에는 그림자 없는 삶은 없다. 즉 사람은 모두가 다 그림자가 있다. 마찬가지로 빛이 있는 낮 세상에 걸어 다니는 사람은 모두가 다 그림자가 생긴다. 만일에 그림자를 없애려면 빛이 없는 어둠 속에 들어 가거나 아니면 온 사방천지를 밝은 조명 빛을 투시하면 그림자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는 여전히 어두움의 그림자가 남아있음을 안다. 빛으로 오신 주님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은유적으로 알게 한다.
그러기에 주님은 ‘내가 진리요’라고 하신 것이다. 밝은 대 낮임에도 그림자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자리에 그림자를 없애는 것은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나는 진리이다’라고 구원의 진리인 말씀을 알게 하신다. 진리는 참 진리이어야 한다. 골짜기에 피어난 꽃에도 향기가 있고 버림받는 잡초더미 위에도 단비가 내린다. 무참하게 짓밟히는 이름없는 풀잎 하나에도 뭉개지는 아픔의 크기는 사람과 똑 같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의미는 뿌리를 살찌우기 위한 창조의 섭리임을 안다. 세상에 사랑 없이 태어난 것 아무것도 없으니 이는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를 알게 하는 것들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범사에 진리는 우리 삶을 영글게 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것도 떠난 자의 몫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몫이라는 진리는 예수께서 가르치는 진리임을 알게 한다. 예수께서 ‘나는 생명이다’라고 하신다. 사람의 삶의 생명은 무엇인가? 하루살이는 어제도 내일도 모르고 오늘만 산다. 가을에 지는 꽃은 작년 여름도 내년 봄도 모른 채 여름 한 철만 알고 산다. 사람인들 하루살이나 한 송이 꽃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가? 그가 아는 것은 오로지 오늘뿐 오늘 이후의 미래가 무한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함에 살아간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태어남도 알고 죽음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영원한 생명!’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바라는 것은 바로 지상의 삶이 유한함을 알기 때문이 아닌가? 천하의 어떤 권력도 자기 손에 넣지 못한 것은 바로 그 영원한 생명을 과연 알게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알게 함이다.
그리하여 온 세상을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를 분명히 알게 한다. ‘나는 생명이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영원하심의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의 자리를 알게 한다. 당신은 삶에는 삶의 철학이 있는가? 있다면 철학적 사유를 하고 있는가? 철학적 사유(思惟)는 어떠한 사실을 헤아리고 간추려서 일정한 개념이나, 판단, 추리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진리가 개관적 사실만이 아니라 철학 하는 관심에 따른 믿음에 있음을 알게 한다. 차제에 나의 길, 나의 진리, 나의 생명이 나의 주님의 신앙과 주님의 철학 있는 삶으로 주님의 삶을 살고 있는지 넌지시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