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몽의 신학은 사변이 아니라 체험이 배경
중생·성화·성령 체험, 모두 기독교적 체험에 바탕하고 있어
나운몽은 자신의 ‘신앙역정’(信仰歷程)의 시발점을 1940년, 26세 나이로 용문산에 들어간 해로 잡았다. 용문산에서 이루어진 그의 개종과 전도와 부흥사역은 이후 나운몽 신앙과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의 신학을 ‘용문산 신학’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다.
그는 용문산 아래 도치랑(경북 김천군 어매면 능치동) 마을에 거처를 정하고 용문산에 토실(土室)을 마련한 후 생식을 하면서 “걸을 때도, 앉아서도, 누워서도 ‘관세음보살’을 부르기만 하면 관세음보살을 만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는 신념으로 ‘불교식’ 수행에 몰입하였다. 그런 식으로 수도생활을 2년간 하던 중 마침내 1942년 봄 한밤중에 ‘주의 음성’을 듣는 체험을 하였다.
“초근목피로 생식을 하면서 산으로 헤매던 어느 하루 자정은 넘었을 듯한 어둠 속이었다. 누가 와서 일깨우는 듯 벌덕 일어나 앉는 순간 큰 음성이 들려왔다. ‘네 마음을 청결하라. 그리하면 나를 보리라.’ 이것이 누구의 음성인지도 모르면서 잠꼬대 같이 ‘말이 안 되는 소리, 방바닥이라도 닦아 내란 말인가? 성결(聖潔)이면 성결이지 청결(淸潔)이 뭐인고?’하고 다시 자리에 누우려는 찰라 또 다시 똑같은 음성으로 ‘네 마음을 청결하라. 그리하면 나를 보리라.’고 한다.”
그때 나운몽은 온 천하가 ‘백설처럼 희게 보이는’ 환상체험도 하였다. 즉 남쪽으로 백리 밖 ‘가야산 해안사’도 보였고, 북쪽으로 백리 밖 ‘속리산 법주사’도 보였는데, “그 마당과 문 앞에 있는 바위도, 비도 모두 환하게 보이는” 신비체험이었다.
“산도 나무도 바위도 흙도 무엇이든지 하얗게 보인다.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의심스럽거든 마태복음 5장을 보라. 분명히 맑은 청(淸)자니라.’고 한마디를 남기고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때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내가 찾기는 분명히 관세음보살을 찾았는데 관세음보살이 나타났으면 금강경을 보라든지 화엄경을 보라든지 할 것이지 왜? 하필이면 예수쟁이들의 책 마태복음을 보라고 할 것인가? 내가 가장 반대하고 비웃고 천대하던 예수쟁이들의 책을 보라고 하니 내 마음에는 두려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날이 밝기를 기다려 도치랑 마을로 내려가 성경을 구해 읽었다. 그리고 마태복음 5장 8절의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는 구절을 발견하는 순간 그가 밤중에 산중에서 들었던 음성이 ‘하나님의 계시’였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비로소 ‘하나님’소리가 내 입에서 터져 나오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가 없게 터져 나오는 눈물, 왜 우는지도 몰랐다. 누가 볼까봐서 산중으로 그 성경을 갖고 자취를 감췄다. 또 읽고 또 읽었다. 그 책은 간이국한문 신약전서였는데 아마 다섯 번 쯤 읽은 것으로 생가된다. 울다가 또 보고 보다가 또 울고 하기를 몇일인 지도 알 수 없다. 산골짝에 묻혀 나 혼자 몸부림치며 읽었는데 그 속에서 나를 발견했다. 참선으로 찾지 못했던 ‘나’를 찾았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인 나운몽’이 탄생했다. 그리고 신약성경을 갖고 다시 산으로 들어가 탐독하였다. 다섯 번 통독을 하는 가운데 자신이 ‘영원한 사망’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달았다. 그것이 그를 또 괴롭혔다. ‘꺼지지 않는 유황불 못’, ‘죽음의 길’, ‘호리라도 안 갚을 수 없는 죄 값’으로 두려워하며 몸부림치는 순간 또 다른 성령체험이 그에게 임했다.
나운몽은 ‘거듭나는’ 즉 ‘중생’체험을 하였다. 이번에는 ‘소리 없는 말씀’으로 죄와 죽음에 대하여 ‘죽어주고’, 구원과 생명에 대해서 ‘살아주는’기독교 구원의 기본교리, ‘십자가의 도’를 깨달았다.
죄와 죽음의 공포로 인한 극심한 고뇌 속에서 얻은 구원과 생명의 은총이었기에 그 감격이 더욱 컸다. 그 순간 나운몽은 “나를 위하여 죽어주고 살아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당신을 위하여 살고 당신을 위하여 죽겠나이다.” 결심하였고, 자기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부터 “울어도 울어도 솟구치는 눈물이” 솟아나면서 “나무 가지 흔들리는 것만 봐도 눈물이었고 귓전에 와서 지저귀는 새소리만 들어도 눈물이었다.” 그런 감격 속에서 그는 이런 ‘십자가의 도’를 아직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이 도(道)를 죽어가는 내 형제 자매 우리 동족에게 어서 전하고 싶어졌다. 저 죽음 길도 모르고 눈감고 가는 넓은 길, 지옥 길인 줄 알면 그 길을 누가 가랴. 모르고 가는 저 길. 어서 속히 못가도록 막아야 할 책임도 의무도 내게 있다고 느껴졌다. 그때부터 나는 전도 길에 나섰다.”
금식기도와 성화체험
기독교로 개종한 나운몽은 곧바로 도치량 마을 능치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능치교회는 1908년 설립된 교회로서 역사가 오래 되었지만 교세는 크지 않아 1940년 당시 김홍주(金洪柱) 전도사가 담임하고 있었는데, 그는 어매면 남산동교회도 맡아 보았음으로 능치교회는 박만출 영수가 주로 강단을 맡아 보고 있었다. 나운몽은 능치교회 출석한 지 수개월이 못되어 김천에서 올라온 조선출 목사에게 세례를 받으면서 곧바로 영수로 임명을 받고 설교단에 올랐다. 그때부터 “교회행정은 전혀 알지도 못하거니와 관여할 생각도 없었고, 오직 전도에만 열이 대단하여 단상설교는 도맡아서 하다시피”하였다.
애향숙(愛鄕塾)의 시작
전도자로 나선 나운몽은 1943년 6월, “동네 주민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생각하다가 문맹퇴치와 복음전도를 목적으로 동네 사랑방 하나를 빌려 야학을 시작하였다. 처음엔 ‘도의자수회’(道義自修會)란 간판을 내걸었는데 얼마 후 ‘애향숙(愛鄕塾)으로 바꾸었다. 그것은 단순히 “고향을 사랑하자”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의 본향 하늘의 뜻을 땅 위에 이뤄보자”는 종교적인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래서 “단순 글을 가르치고 배우는데 그치는 글방이 아니라, 땅 위에 하늘의 모형인 사랑나라 건설을 목적한 교육기관”인 동시에 집(가정)의 개념 그대로 “함께 먹고, 자고, 일하는 것을 생활 지침으로” 삼았다. 기독교 수도공동체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애향숙의 기본 생활원칙을 “첫째 사람이 하나님을 공경함은 절대적 조건이며(敬天絶對), 둘째 사람은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해야 하며(愛人如己), 셋째 사람은 흙에서 났으니 일생토록 흙과 친해야 하며(親土一生), 넷째 사람은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해야 하며(勤業力行), 다섯째 사람은 종신토록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勉學終身)”로 정했다.
그러나 애향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행적을 수상하게 여긴 일본 경찰에 처포되어 김천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김천읍 황금정교회 송창근 목사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났다.
출옥 이후에도 경찰의 감시가 심하여 결국 용문산을 떠나 만주 수하현 왕성광(王成廣)으로 가서 1년여 만주척식회사 농장 기술자로 일하다가 1945년 2월 다시 도치랑으로 돌아왔지만 전처럼 드러내놓고 애향숙 운동을 하지는 못했다. 이후 6개월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다가 8.15해방을 맞이하였고, 그는 ‘해방의 감격’을 안고 김천과 대구를 거쳐 서울로 올라갔다.
상경 후 여러 ‘정치적인’ 모임과 강연회에 참가하였고, 이승만과 여운형, 김구, 김규식 등 당대 정치지도자들의 주변을 맴돌기도 했다. 그러면서 개인 사업으로 주교동에 있던 일제말기 대표적인 ‘친일잡지’였던 <練成之友>를 인수하여 <農民聲報>란 농민 잡지를 내기 시작했는데 “3만부 이상 팔리는”인기를 얻었다. 교회는 집에서 가까운 수표동 수표교교회로 다녔다.
그러던 중 1946년 1월 1일 조선기독교연합회에서 전국 교회에 ‘금식기도’를 선포하였다. 나운몽도 이에 호응하여 주교동 자택에서 ‘기한을 두지 않은 금식기도’에 돌입하였다. 그렇게 금식을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세미한 음성’을 들었다.
“제3일째 되는 날 배가 몸시 고팠다. 기진맥진하여 기도할 기맥조차 잃어버리고 쓰러진 듯 엎드려 있었다. ‘너 안 먹고 못 살겠지?’하는 세미한 영음이 다정스럽게 들렸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도 알려고도 않고 의식적인 대답이 내 입에서 절로 나왔다. ‘네! 안 먹고는 못 살겠어요.’하고 기운 없는 대답을 했다. 그 대답에 이어 음성은 또 들렸다. 처음 소리보다는 좀 더 명확한 어조였다. ‘그렇다. 사람은 안 먹고는 못 사느니라. 네 육신이 안 먹고 못 사는 것처럼 네 영혼도 안 먹고는 못 사느니라.’라는 친절한 교훈의 말씀이었다.”
‘영혼의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 나운몽은 다시 한 번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러면 제 영혼은 죽었습니까?” “주여 내 영혼은 죽었나이까?”하고 “정신없이 또 묻고 또 물으며 부르짖었다.” 영혼이 죽었다면 모든 것이 이미 끝났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용문산 수련과 성령체험
나운몽은 ‘주님의 품속’용문산으로 돌아오자마자 용문산 ‘큰 골’(大谷)에 초막을 한 채 짓고 제자(숙생) 5명을 데리고 ‘애향숙’을 다시 열었다. 그러나 그의 첫 번 관심은 교육보다 수련이었다. 그래서 해방 전부터 함께 신앙생활했던 능치교회의 박만출 영수와 감환계 영수 등과 함께 ‘산기도’(山祈禱)를 시작했다. 기도를 시작하였는데, “찬송을 불러도 눈물, 기도를 해도 눈물… 왜 그렇게 눈물이 많았는지 계속 눈물뿐이었다.” 1년 전(1946년) 금식기도를 하면서 흘렸던 ‘눈물’이 다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세월 가는 줄 모르고 기도에만 전념하고 있는 중 기도가 점점 깊은 지경으로 들어가” 자신이 ‘주님 품속에 안긴 아기’로 나타나 보이는 환상까지 체험하였다. 이렇게 산 속에서 기도의 ‘깊은 경지’를 체험하며 6개월 지내는 동안 서울 “회사도 끝장이 났고, 가정도 집까지 다 팔고 남의 집 윗층 셋집으로 옮겨야 했지만 나운몽은 이에 개의치 않았다.
용문산에서의 수도생활은 기도와 찬송과 성경 읽기, 이 세 가지로 이루어졌다. 처음엔 기도와 찬송이 주를 이루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성경 읽기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렇게 “밤낮으로 성경만 읽으며” 지냈는데 한 번은 ‘사흘 동안’성경만 읽었는데 “배고픈 줄 몰랐고 변소 출입은 언제 했는지 그것도 기억되지 않을”정도로 탐독하였다. 그렇게 침식을 잊고 성경을 읽는 중에 나운몽은 ‘성경의 세계’가 열리는 신비체험을 하였다.
“그 이후 나는 그 경지를 ‘성경 속에 들어가 보았다.’고 말하게 되었다. 바울 사도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경지에서 삼층천까지 가 보았다는 것은 천국 광경을 직접 가서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나는 겨우 방 안에서 텔레비전 화면에 비춰주는 옛 이야기, 세상 구경을 앉아서 하는 정도 밖에 안되는 경지였다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침식을 잊고 성경을 본 것만은 사실이지만 글자만 보거나 읽은 것은 아니고 영적인 시청각을 통한 독경이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한 표현일 런지도 모르겠다. 그 때의 체험을 ‘창세 과정도, 에덴의 광경도, 인류 역사의 모습, 노아 당시 홍수나 역대기에 있는 전쟁 등의 정황까지도 필름 속 화면을 보는 듯 했다.’고 설명하곤 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나운몽은 기도나 묵상, 혹은 설교나 전도 중에 짧은 순간, ‘섬광처럼’들려 오는 ‘소리 없는 음성’을 듣게 되었는데, 나운몽은 그것을 ‘영음’(靈音) 혹은 ‘은몽’(恩蒙)이라 표현하며 그것 역시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순간순간 들린 ‘음성’과 떠오른 ‘영감’(靈感)을 기록해 두었다가 후에 <은몽록>(恩蒙錄)이란 책으로 엮어 냈다. 그 중에 용문산운동 초기인 1954-57년 어간에 ‘받은’ 은몽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이다.
“우주만물은 하나님의 사상 표현이다.” “하나님은 ‘한’이시다. 그런고로 하나를 원하신다.” “성부는 보이지 않는 형상이시고(生), 성자는 보이는 형상이시고(體), 성신은 형상 없는 실존이시다(靈).” “과거의 나와 상관된 예수는 길이요, 현재의 나와 상관된 예수는 진리요, 미래의 나와 상관된 예수는 생명이다.” “생명은 원(O)이다. 처음과 나중이 하나 된 데 있다.” “근본으로 돌아간 곳이 천국이다. 한 톨 씨가 백배의 결실을 맺고 근본 씨로 돌아감과 같이.” “만든 말은 생명이 없고 받은 말씀은 생명이 있다.” “길은 직선이요(-), 진리는 삼각이요(△), 생명은 원이다(O). 이것이 진리다.” “정반귀일(正反歸一)이 고고극치(高高極致)다.” “시대는 진극상생(盡剋相生)하리라.” “돌아서면 지옥이요, 돌아서면 천국이다.”
나운몽은 이런 ‘음성’이나 깨달음을 하나님의 ‘게시’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얻은 영감이 그의 설교와 강연, 부흥과 전도 사역, 저술의 주제와 원리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나운몽은 자신의 설교와 전도 사역 뿐 아니라 신학교육과 저술사역도 철저히 체험에 바탕을 두고 전개되었다. 사변(思辨)이 아니라 체험이 나운몽 신학의 배경이자 기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