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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석처럼 빛나는 선교적인 마음
    John W. Reed의 말에 의하면, 룻기는 칠흑 속에 뭍힌 아름다운 진주처럼 빛나는 보석 이라고 표현을 하였다. 룻기는 참으로 감동적인 스토리다. 이 이야기의 플로트(plot)는 비극에서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결국에는 해피앤딩(happy ending)으로 끝나게 된다. 이러한 해피앤딩의 스토리 속에 우리는 중요한 두 가지 어휘를 꼽는다면, “구속”과 “인애(헤세드)”이다. 여기에서 “인애(헤세드)는 믿을만한 사람에게 사랑과 인애를 베푸는 충심을 뜻하게 된다. 주인공인 룻은 모압여인 으로서 유대인인 남편이 죽은 후 그녀의 시모인 과부 나오미와 함께 이스라엘의 베들레헴 으로 이주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아래서 부유한 유대인의 농부인 보아스를 만나서 결혼 하게 되었고 먼 훗날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된 사람이다. 따라서 룻기는 ”룻“의 이름을 따서 ”룻기“로 명칭되었다. 이는 구약 성경에 ”에스더서“와 함께 유일하게 여인의 이름을 따서 기록된 말씀 이다.룻기는 총 4장 으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1장은 룻기 전체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나오미라는 한 여인이 남편과 함께 먹을 것을 찾아서 베들레헴 땅을 등지고 모압 땅에 갔으나 낮선 객지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며느리들을 집에서 돌려보내야 하는 비참한 현실이 묘사 되었다. 나오미는 이러한 상처를 안고 고향땅에 한쪽 며느리인 룻과 함께 쓸쓸한 귀향을 담고 있다. 2장과 3장에는 룻과 훗일 남편이 되어 가계를 이어갈 보아스와의 관계에 대해서 기록되었다. 그들은 전원적인 풍경 가운데 이상적인 사랑이 싹트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리고 마지막 4장에는 그야말로 해피 앤딩으로 끝나는 룻의 상급이 나와 있다. 이렇게 볼 때에 룻기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 정도로만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참으로 중요한 신학적인 이슈가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보석처럼 빛나는 룻의 신앙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첫째는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알아야 하겠다. 나오미가 처한 형편은 참으로 비참했다. 그의 비참한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 하고 있다.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각각 너희의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맛 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룻 1:8-9)”이 얼마나 비참한 모습인가. 머나먼 이국땅에 먹을 것을 찾아 생존을 부지하려 왔지만 남편죽고, 두 아들마저 먼저 보내 버리는 비참한 모습을 상상해 보기 바란다. 그러나 이러한 나오미의 불행을 그대로 방치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며느리인 룻을 통해서 그 가정을 구렁텅이에서 건지어 내실뿐만 아니라 참으로 위대한 가계를 허락 하셨다. 룻기 4:13-15절에는 나오미의 나중형편이 어떤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제 한 가정을 완전히 회복 시켰고, 후일 이스라엘 왕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는 역할을 감당하였다.두 번째의 교훈은 사망을 인애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시다. 룻기에서의 또 하나의 중요한 신학적인 단어는 “헤세드(Kindness)” 입니다. 나오미는 여호와 하나님께 그의 “헤세드”를 며느리들에게 나타내 달라고 간구 하고 있다. “... 여호와 께서 너희를 선대 하시기를 원하며...(1:8)”,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2;20)”,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자를 쫓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에 더하도다(3:10)” “헤세드”라는 말이 세 번 쓰여 졌는데 두 번은 나오미가 자신의 자부에게 한 말이고, 한 번은 보아스가 룻에게 한말이다. 하나님은 인애의 하나님 이시다. 그의 은혜는 우리에게 그의 사랑과 인애를 베풀어 주신다.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그의 거룩한 피로 사주셨다. 오늘 필자는 나오미와 그의 며느리인 룻과의 관계를 통해서 절망을 소망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사망을 인애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다. 선교는 이처럼 보석과 같은 마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촉진시킬 수 있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신학원)
    • 칼럼
    • 선교
    2016-08-12
  • 신실한 관계 형성의 선교
    지난 호 에서는 “신실한 삶을 통한 선교”를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신실한 관계 형성이 어떻게 선교가 되는가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신실한 삶의 현존을 통해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세상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게 되어 있다. 이 때 복음을 직접 입으로 전할 기회를 얻지 못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해서 관계 형성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관계 형성의 중요성에 대해서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을 통해 뛰어난 통찰력을 제공한다. 우리가 타자를 ‘그것’이라는 사물로 대할 때 타자를 이해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이다. 그러나 타자를 ‘너’로 대할 때 상대의 말에 경청하며 상호 관계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관계 전도는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지경을 넓히기에 다른 종교에 대해 무지하거나 문서를 통해 편협하게 알던 타종교를 그리스도인들이 실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연다. 조지 헌터는 복음 선포로 믿음을 가진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는 로마식 전도와 교제를 통해 마음을 열고 대화로 믿음과 헌신까지 인도하는 켈트 전도법을 비교한다. 켈트 전도법과 같은 관계 전도는 오늘날 한국적 상황에 더더욱 절실하다. 한국 교회는 현재 한국 사회로부터 심한 질타와 멸시를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전도지를 거부하는 것은 예사고 노방전도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다. 따라서 한국적 상황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려면 먼저 비신자들과 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한국교회는 이미 관계전도를 위해서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 어떤 단체에서는 저녁 식사에 비신자들을 초대하여 거나하게 상을 차려서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법이 식사에서 오는 마음의 오픈을 전도에 연결로 연결시키는데 일정 효과가 있다. 그러나 최고의 관계형성은 아무래도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수식어가 말해 주듯이 한잔 걸치면서 나누는 관계성이 한국의 전통 친화력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술잔을 함께 기울릴 수는 없다. 여기에 딜레마가 존재한다. 이러한 딜레마는 한걸음 더 나아가 타종교인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더욱 깊게 나타난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타종교인과 관계를 맺는 것을 꺼려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의 신앙이 혼합주의적으로 될까 두려워서이다. 이러한 마음은 일부분 일리 있는 이론이다. 관계성은 함께 함을 통해서 맺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사상이 다른 사람들과의 연합은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수용과 용납을 구분하지 못한 결과다. 드웨인 엘머(Elmer Duane)는 수용과 용납의 차이를 매우 분명하게 설명한다.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좀처럼 수용과 용납을 구분하지 않고 혼동한다. 대표적인 예가 집단주의 문화의 국회에서 정당끼리의 논쟁이다. 서로 다른 의견을 논박할 때 인심공격은 예사고 논쟁이 끝나면 상대 당의 사람을 적으로 여긴다. 이런 모습은 이슈와 개인을 구분하는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좀처럼 살펴볼 수 없는 예다.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개인의 주장을 반대해도 그 사람을 수용한다. 하지만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개인의 의견과 그 사람을 다르게 보지 않기 때문에 한 사람을 수용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과 같다.또한 그리스도의 삶은 이런 혼합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리스도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삶을 나누셨다. 그런 그의 모습은 종교적 위선자였던 바리새인들의 비난 거리였다(마9: 11; 막2: 16; 눅5: 30). 만약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삶을 나누셨던 것이 혼합되는 것이고 영적으로 섞이는 것이었다면 분명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성육신하실 때부터 이미 깨어진 세상에 함께 삶을 나누시는 것을 복음 전파의 방법으로 삼으셨다. 관계를 잘 맺는 것이 복음 전파를 위한 과정이 되는 이유는 문화적인 이유도 있다. 비록 한국이 근대화를 통해 많이 개인주의화 되었지만, 아직도 집단주의 문화의 특징이 남아 있기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관계가 형성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관계를 통해 먼저 같은 집단의 일원이 될 때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달 할 수 있는 하나의 문을 여는 것이다. 이웃과의 좋은 관계를 위해서 자신의 아파트 문을 개방하고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우리는 습관을 길어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7-29
  • 신실한 삶을 통한 선교
    몇 시간 후 학생들과 함께 선교여행을 떠나야 할 필자에게는 매주 발행되는 신문의 한 부분을 글로 채워야 한다는 부담감이 상당하다.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 이번 학기에 제출된 제자의 글이 필자의 생각을 정리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박종원 원우의 글은 “한국 기독교와 타종교의 갈등 분석을 통한 전도 방법 고찰”이다. 이 글 속에서 박종원은 한국교회가 갈등 극복을 위해서 세 가지의 전도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필자는 앞으로 3회에 걸쳐서 박종원의 글을 인용하면서 칼럼을 엮고자 한다. 선교에 대한 이론 가운데 존재 전도가 있다. 이는 삶의 초석이 되는 현장에서의 모범과 신실함을 통해서 주변인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고 싶도록 촉구하는 전도 방법이다. 오늘날처럼 전도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새겨 볼 만한 이야기 이다. 신실한 삶은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복음을 살아내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어떻게 전도 방법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성경적인 근거에서 찾을 수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유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했다(벧전3:15). 즉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신실하게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에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삶에 궁금증을 갖게 되고 급기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질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기초한 소망과 이유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기독교는 한국 사회의 지탄과 모욕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독교 지도자들의 각종 부패와 타락이 큰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교회의 리더들이 복음을 삶으로 드러내지 못하면서 성도들에게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메시지가 메신저와 다르지 않음을 그리스도가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 리더들은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은 경시함으로 복음을 경시했기 때문이다. 최근에 어떤 목사는 카지노에서 66억을 탕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진위를 따지기 이전에 도덕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있을 수 없는 비윤리적 소문이다. 또한 인천의 어느 감리교회에서의 성 추문 사건은 교회 지도자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함에서 오는 지탄이 우리의 귀를 따갑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례들은 성경을 가진 지도자가 삶의 모본을 보여주지 못함으로 전도의 길을 막아버리는 것을 볼 수 있다.그동안 한국교회은 교회 성장이라는 이슈가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즉 교인들만 많이 모으면 성공했다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성장한 목회자는 모든 것들이 완벽해 지는 풍토를 만들어 버렸다. 자기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지도자들 속에서 성도가 지녀야 할 삶의 가치를 흐리게 만들어 버렸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주님의 삶의 모습을 바로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가르치신 대로 사셨고, 사신대로 가르치셨다. 그는 “복음 선포”만 중요시하지 않으셨다. 말과 행실의 일치를 보여주셨다. 그런 신실한 현존을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삶에서 너무 오랫동안 잊혀져 왔다. 그러나 이런 신실한 현존을 보여 줄때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고 나아가 다음 단계의 전도 방법으로 연결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신실한 삶이 너무 수동적이며 피동적인 전도 방법이라고 비판한다. 복음은 말없이 행위로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이다. 복음은 분명 말로 전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에 신실한 현존은 전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복음은 분명 입으로 전해야 하지만 한국적 상황처럼 기독교에 매우 배타적인 때에는 복음 전파에 앞서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이 복음에 반응하도록 준비시킬 필요가 있다. 그런 준비 과정의 하나로 신실한 현존은 매우 중요하다. 최근에 방송된 주기철 목사님의 일대기는 우리에게 큰 신앙의 유산을 주고 있다. 필자의 자녀도 그 영화를 본 후에 목사님을 존경한다는 말을 수 없이 하는 것을 보았다. 이처럼 사회에 영향력을 주는 삶이야말로 한국교회를 위한 선교의 모범이 된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7-21
  • 다시 건너보고 싶은 홍해
    필자는 수년 동안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학생들과 함께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이는 선교학을 가르친 교수로서 학생들로 하여금 현장감을 갖도록 하는 교육의 일환이다. 따라서 금년에도 이스라엘 일정이 잡혀 있다. 이스라엘은 성경의 땅이기 때문에 밟을 땅들이 모두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음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설레임도 가보지 못할 땅이 있기 때문에 반감되는 것 같다. 그곳은 홍해이다. 홍해는 이집트 땅에 소속되어 있다. 최근 이집트에서 일어난 테러로 인한 안정상의 문제로 금년에는 그곳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모세의 사역을 둘러 볼 수 있고, 요르단을 횡단하면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충을 경험해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 땅들이 모두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 구약 성경에서 홍해가 대두된 말씀은 출애굽기 14장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모세를 통한 출애굽의 역사는 출애굽기 1장부터 13장을 통해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던 새로운 왕의 치세 때에 모세가 태어나고, 모세를 통해서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출애굽의 동의를 받고, 밤에는 불기둥 그리고 낮에는 구름기둥을 통해서 생명을 보존하셨다. 이후 홍해를 건너기 위해 비하히롯 앞 바알세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도록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바꾸어서 출애굽을 허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잡아 두기 위해서 군대를 보내어 쫓게 만듦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앞에는 홍해 바다를 바라보고 뒤로는 애굽의 막강한 군대가 그들을 죽이기 위해서 달려오는 상항이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히 두려워하였다(14:10). 그리고 자신들의 지도자인 모세를 원망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14:11). 그들은 차라리 애굽의 종살이가 자유를 얻어서 광야에서 죽은 것 보다도 낫겠다고 소리를 쳤다(14:12).애굽의 군대가 가까이 오자 모세의 책임감은 더욱 무거워졌다. 모세는 아우성치는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바라보라고 말씀을 하시고 계신다(14:13). 위기에 처한 백성들에게 모세는 참으로 위대한 신앙을 보여 준다. 모세는 어떤 사람입니까? 출애굽기 3장을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위해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출 3:14), 영적인 준비를 갖추고(출 3:11-12),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출 4장)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할 지도력을 갖추게 된다. 그는 40년간 애굽의 문화 속에서 왕자로서 백성을 지도할 지도력을 갖추었다. 그리고 자신의 백성이 고난 받는 어려움을 몸소 체험 하면서 그의 백성들과 동질적인 삶을 살았다. 그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국제 정세와 자신의 입지를 바라보면서 변화의 주체로서의 삶을 살았다. 홍해 바다 앞에선 모세의 지도력은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표본이 된다. 지도자의 자세는 항상 준비를 갖추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절망적일 때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강하게 임하심을 알고 있는 지도자 였다. 모세는 “야훼께서 너희를 위해 싸우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 지어다”(14:15)라고 확신 있게 선포한 모습을 본다. 우왕좌왕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모세의 희망적인 메시지는 크나큰 힘이 되었고, 자신의 백성을 책임지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제 시작이 되었다. 홍해에서 일어났던 사실을 기록한 성경은 여호와께서 싸워 주시는 모습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14장 21절에는 당시의 기적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모세가 바다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닷가 마른땅이 된지라” 라고 기록 되었다. 그토록 절망적인 상항을 일시에 소망이 넘치는 순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을 치려고 하였던 애굽의 군대들을 어지럽게 만들어 버렸다. 출 14:31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노래를 하였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라고 기록 되었다. 최근 IS의 준동과 한국인에 대한 테러의 위협 등의 이유로 가까이에서 볼 수 없는 홍해를 그리워하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다시 한번 홍해를 가르는 역사를 나타내시기를 기대해 본다.
    • 칼럼
    • 선교
    2016-07-01
  • 선교지의 인권 옹호
    어쩌면 선교지 만큼 인권이 유린된 곳이 없다. 특히 이슬람 지역에서의 선교사들의 운명은 파리 목숨처럼 위태롭다. 어떤 사람은 산채로 불태워 죽였고, 다른 사람들은 토막난 채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어떤 선교보고에 의하면, 한 전도자는 머리가 잘리고 공공장소에 아무렇지 않게 버려졌다고 했다. 이처럼 고통을 받는 기독교인들이 하는 말은 “왜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을 갖지 않습니까?”이다. 기독교가 핍박을 받는 것은 어제나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천년 전 기독교가 탄생한 이후부터 핍박은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투옥되고, 고문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먼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에 대한 생존권과 인권옹호에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지구촌화 되어 있는 지금은 우리의 관심과 기도가 급속한 시간에 전달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만약 생존권이 위협 받고 있을 때에 우려를 포명하고, 관계 당국에 부당한 처사를 교정 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즉 세계 연합인 UN을 통해서 함부로 생명에 위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촉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필자는 오늘 선교사와 기독교 때문에 핍박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독교인들의 역할에 대해서 몇 가지를 제언하고자 한다.첫째는 그리스도인들의 결속이다. 우리는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한 형제요 자매임을 온 천하에 보여 주어야 한다. 성경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와 있다. 이웃의 곤경을 무시하고 모른다고 지나치는 것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고통을 받기까지 함께 나누라는 부름을 받았다. 갈라디아서 6:9-10절에 의하면,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라고 말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인권 옹호이다. 인권 옹호는 정치와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현지의 선교사들은 조심스럽고 정확하게 기독교에 대한 박해와 인종차별을 외부세계에 알려야 한다. 종교 탄압이나 차별에 대한 정보를 인권단체들에게 조용하게 제공하여야 한다. 다만 선교지 체류에 해가 되지 않도록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지혜이다. 세 번째는 인권 옹호를 위한 지침서를 만들고 필요시 행동해야 한다. 지침서의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해 기도하라. 가능한 모든 정보출처를 알아내라. 인권 옹호를 위해서 무슨 행동을 취할 것인지 적임자와 논의하라. 신속하고 정확하게 관련자들과 의사소통을 하라. 만약 구류자가 있다면 현지 변호사와 접촉하라.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교관이나 인권그룹들에게 접근하라. 위기에 처한 가족들을 보호하라.”이다.네 번째는 만약 핍박이나 인종차별이 발생하는 상황에서는 필요한 조치를 간구해야 한다. 이는 선교사나 기독교교인들이 투옥되었는지, 폭력을 당하고 있는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농락을 당하고 있는지, 재판 없이 사형을 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정신병동 같은 곳으로 끌고 들어가는지에 대한 것들을 정보로 입수하여 대책을 간구해야 한다. 다섯 번째는 인권 옹호를 위해서 핍박을 당한 자나 가족들로부터 해결을 위해서 노력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법적 위임을 분명히 받아두어야 한다. 만약 관계자들로부터 위임을 받았으면, 함께 일할 전문가나 변호사와 함께 소통하면서 일을 처리하여야 한다. 이 부분은 많은 어려움이 있다. 가족들을 접촉하는 과정에 서방인이나 외부인들과 결탁하여 자신들의 정치 세력을 전복하려 했다는 빌미를 주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섯째는 고난 받는 자들을 위해서 재정적 보조나 법적 지원을 고려해야 한다. 재정적 보조를 할 경우에는 수혜자에게 직접 전달할 것인지, 현지교회나 지도자와 함께 할것이지 잘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법적 지원은 희생자가 변호사에게 직접 지불하도록 돕는 것 보다는 후원기관이 변호사에게 직접 지불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필자는 오늘 세계 각처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와 선교사라고 하는 신분 때문에 인권이 유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위해서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6-17
  • 기도의 힘
    기도는 위대한 힘을 가진다. 성공한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성공의 비결을 물으면 한결같이 기도의 힘이었다고 고백한다. 사실 기도는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우리가 예배 따마다 드리는 “주기도문”이 바로 그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본을 부여 주셨다. 인류의 구속을 앞두고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밤을 새우면서 기도하셨다. 기도에는 네 가지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다. 이는 찬양, 감사, 고백 그리고 간구이다. 이를 흔히들 ACTS 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교회와 한국인에게는 유난히 열정적인 기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필자가 유학시절 외국인들로부터 든는 소리는 “한국인처럼 주여 라고 외치며 소리 내어 기도 합시다”였다. 필자가 글을 쓰기 위해서 컴퓨터에 안자서 인터넷 신문을 검색하는 동안에 흥미 있는 기사를 발견하였다. 조선일보에 게재된 김철중의 생로병사 코너에 실린 ‘수술 환자를 위한 1분 기도가 만드는 작은 기적들’ 이라는 글이다. 이 글이 가진 논지는 기도는 종교와 사상을 뛰어 넘는 위대한 힘을 가진 도구라는 것이다.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서울 강남터미널 뒤쪽에 자리 잡은 서울성모병원. 5층 수술실에서는 매일 아침 색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전신 마취 수술에 임하는 모든 환자에게 수녀가 다가간다. “제가 환자를 위해 기도해 드릴까요? 종교와 상관없이 환자의 치유를 위한 것입니다.” 환자들 백이면 백 기도해달라고 답한다. 수녀는 환자 옆에서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쾌유를 빌고, 의료진의 정성 어린 손길이 환자에게 닿기를 기원한다.그 1분 기도에 뜻밖의 광경이 벌어진다. 40대 가장이 울음을 터뜨리고, 60대 엄마가 흐느끼고, 80대 할아버지가 눈시울을 적신다. 1분 동안 그들에게 수십년 인생이 지나갔으리라. 수녀의 기도를 듣는 환자의 절반 이상이 눈물을 흘린단다. 찌르면 아프고, 건드리면 무너지는 것이 환자의 심정이지 싶다. 이들을 위해 수녀 8명이 번갈아 가며 수술실 기도 당직을 선다.기도로 수술을 시작한 원조는 세브란스병원이다. 수술 준비실에서 목사와 전도사가 기도를 시작한 데 이어 4년 전부터는 수술대에 누운 환자를 위해 마취과 의사나 수술 의사가 기도를 주도한다. 수술실 의료진 모두 수술포를 덮은 환자의 몸에 손을 얹고 1분 기도를 드린다. 사전에 기도 동의를 얻고, 환자가 ‘아멘!’을 거북해하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를 빼고 기도를 마친다. 매일 100명 안팎의 수술 환자에게 쾌유를 빌고, 의료진의 손길이 실수 없이 아픈 곳을 잘 어루만지게 해 달라고 빈다. 한 스님 환자가 기도를 제안해야 할지 머뭇거리는 의료진을 향해 먼저 “나에게도 기도해 달라”고 말한 일화도 있다. 목사가 환자였다고, 스님의 기도를 마다했겠나…. 수술실 기도를 주도하는 의사 중에는 기독교 신자가 아닌 경우가 절반 정도 된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남을 위한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한다. 자신을 위한 기도나 남을 위한 기도나, 같은 영적 에너지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남에게 기도를 부탁하기도 하고, 남을 위해 중보기도를 한다. 그럼 중보기도는 실제 의학적으로 효과가 있을까. 여기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차이가 있다는 쪽과 없다는 측으로 나뉜다. 수술 전 기도가 환자 회복에 도움이 됐다는 논문이 있는가 하면, 심장병 수술에서 기도를 받은 그룹과 받지 않은 그룹 간에 결과 차이가 없었다는 연구도 있다. 시험관 아기 시술에서 중보기도를 받은 여성의 임신 성공률이 2배 높았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물론 의료의 본질은 세심하고 꼼꼼한 진단과 치료이고, 기도가 그것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어찌 됐건 누군가 기도 혜택을 입었다는 주장은 있어도 기도가 질병을 악화시켰다는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지금 우리는 기도를 해야 할 시간이다. 남북이 극한 대치 상황이라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 밑에서 사는 것 같다. 정치적으로는 기득권을 앞세운 정당들에 의해서 합치라는 말이 무색하게 되었다. 국민들은 그들을 보면서 실망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미래 세대인 청년들이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가 없어서 식당일을 하는 알바로 내몰리고 있다. 대중들에게 소망을 주어야 할 종교인들마저 거룩하고 이타적인 삶 대신에 세속적인 것들에 취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럴 띠일수록 기도의 힘이 필요하다. 그것도 깨어서 기도할 시간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6-10
  •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업
    세상의 대부분의 종교들은 인과응보 사상이나, 적선을 통한 윤리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본다. 따라서 좋은 일과 적선을 많이 해야 극락왕생 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주류가 급기야는 살생을 금지하고, 동물을 숭배하고, 자연을 숭배하는데 까지 이르기도 한다.그러나 기독교는 철저히 이신득의의 신앙이다. 즉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신앙 이다. 신약성경에 두 권의 성경에 이신득의의 신앙이 기록 되었는데,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이다. 갈라디아서속에 전체적으로 흐르고 있는 하나의 흐름은 분명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하는 잘못된 유대교의 교사들을 책망하기 위해서 쓴 바울의 서신서 이다.바울은 갈라디아서 3-4장을 통해서 이신칭의에 대한 교리적 변증을 있는데, 특히 갈라디아서 3장의 말씀은 바울 사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지위에 대해서 분명하게 논증하고 있다. 아 말씀에 근거하여 필자는 세 가지 면에서 그리스도인의 지위를 언급하고 있다.첫째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갈라디아서 3:26-27을 근거로 보면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믿는 자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율법아래 있지 않다고 언급하고 있다. 요한복음 1:12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나니...”라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둘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성도는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라고 말씀되어 있다. 이 말씀의 근본 의미는 모든 성도들은 교회 속에서 인간적인 차이점과 중요성을 상실한다는 뜻 이다. 당시 바울 사도가 언급한 이 선언은 폭탄과도 같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비록 예수를 믿어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교리를 중시 여겼다. 이러한 교리는 자민족 중심주의가 원인이라고 보아야 한다. 자기들만이 최고의 민족 이라는 자부심 속에서 다른 민족들을 하나님이 없는 야만족 이라고 생각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유대인들 사회 속에서 여성의 지위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 이었다. 그래서 여성들은 계수하지도 않았다.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지위가 하나이다 라는 선언은 굉장한 파괴력을 지닌 폭탄과도 같은 것이다. 물론 교회 속에서의 성도의 지위는 남녀를 공히 귀한 존재로 보는데서 찾을 수 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약속의 유업을 이을 자 라고 언급하고 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라고 언급하고 있다. 자손이라야 유업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대기업에 부장이 되고, 차장이 되고, 이사가 되어도 한낱 월급쟁이에 불과하지 기업의 유업을 받지는 못한다. 그러면 왜 우리 성도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님을 통해서 유업을 받게 되는가? 로마서 9:8절에는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하나님의 구원과 소명의 은혜는 처음에는 유대인에게 주어 졌다. 그러나 그들의 불순종은 그와 같은 특권을 상실하여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을 영접한 모든 성도들에게 그와 같은 특권을 주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간 그리스도의 축복된 유업을 이을 자들로 이 자리에 모여 있다. 이 특권을 순종과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로 갚는 귀한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하겠다.이제 글의 마무리를 짖고자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다. 그리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 누구든지 그를 마음속에 초청하면 그는 들어와서 함께 사시겟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를 영접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하나가된 우리는 진정한 유업을 받을 자들이다. 우리의 영혼을 견인해 가시는 주님의 은혜를 항상 생각하면서 슬기롭게 살아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6-01
  • 가정을 지키자!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가정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과 이벤트성 행사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필자의 나이도 이제 상당한 것 같다. 얼마 전 동사무소의 선물이 집으로 도착했다. 받고 보니 노인잔치에 대한 초대장과 아울러 작은 봉지에 담겨진 쌀 한 부대가 배달되었다. 이러한 행사들도 가정의 달이 갖는 의미라고 본다. 이러한 이벤트성 행사들이 주최자와 참여자에게 세속적 행복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가장 중요한 가정의 존재와 유지 그리고 발전의 요소들은 생략된 것 같다. 이는 바로 성경적 가정이 무엇인지 알려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최초의 가정을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만드셨다. 창세기 1:27-28과 2:18-25과 3:1부터 5:32절은 인류의 최초의 사람인 아담의 가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크게 나누어 보면, 1장은 인간 창조이며, 2장은 1장에 창조된 아담을 통해서 하와와 함께 가정을 만드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으며, 3장은 인간의 타락에 대해서, 그리고 그 후로는 타락의 결과로 오는 다양한 문제들에 관해서 성경은 설명 하고 있다.하나님은 영원한 베스트셀러인 성경의 가장 첫 머리에서의 중심 주제는 가정인 것을 볼 수 있다. 가정은 인간의 삶 속에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건물로 보면 마치 기둥과 같다. 기둥이 무너지면 건물은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가정이 파괴됨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것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가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선교적 명령을 수행하는 것과 같다. 첫째로 가정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다. 하나님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인간을 창조하셨다. 창조의 과정을 보면 흙으로 만들고 생기를 불어 넣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인간의 몸은 하나님에 의하여 흙으로 만들어 졌으며, 이러한 비물질적인 형태에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창조 목적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었다. “...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두 번째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가정을 파괴 시키는 사단의 전략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성경 구절은 창세기 3장 1-6절이 될 것이다. 불행스럽게도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을 통해서 거부 하였다(창 3:1-24). 인간 속에는 살인(창 4:8)과 함께 각종 어두운 죄의 결과가 유입 되었고, 인간을 타락하게 만든 도구들을 저주 하셨다. 인간 타락의 결과는 아담 한사람에게만 그 영향이 미치지 아니한다. 아담과 인류는 유기적 통일성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오고 오는 세대 속에 영향을 미친다. 아담의 자유 행위 속에서 인류의 의지는 하나님께 배반 하였으며, 인류의 성품은 부패하게 되었다(롬 5:12; 고전 15:21).세 번째 중요한 요소는 가정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참된 가정을 만들어야 한다. 피조물인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 타락의 결과 즉각적인 저주를 받았음에도 생명을 연장하게 하였으며, 이를 통해서 구속 사역의 성취의 모습을 예시하심을 볼 수 있다.창세기 3:15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출현을 말씀해 주셨다. 모든 사람은 남자의 후손 이지만 예수님만이 여인의 후손 이며 예수님만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으신 분이심을 하나님이 말씀해 주신다. 즉,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파괴된 가정을 진정으로 회복시키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계신다. 세속주의적 가르침과 포스트모던적 사조들이 가정을 회복시킬 수 없다. 그리고 정치와 경제적 발전이 일그러진 가정을 회복시킬 수 없다. 다만 예수님만이 우리의 가정을 회복시킬 수 있다. 예수님이 가정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찬양하는 찬양의 목소리가 가정에서 울러 퍼져 나와야 한다.이제 글을 마치려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가정을 만드셨다. 가정은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한 도구 이다. 가정이 사단의 공격을 받아서 점점 파괴되는 상황을 보게 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가정을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어야 한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5-20
  • 뿌리 깊은 신앙
    골로새서 2:6-7을 보면 우리의 신앙이 주님 안에서 견고해져야할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라고 하신다. 생명을 가진 모든 만물은 그 특징이 자라는 것이다. 이를 흔히 자연법칙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고 나면 봄이 되고 나면 다시 싹이 나서 성장하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로 정통믿음을 가지면 환경이 어떻든지 그 사람은 계속적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벧 2:2에 있는 말씀처럼 구원에 이르도록 성장해야한다. 그래서 엡 4:13에 바울은 성장하되 얼마나 성장하느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느니 말씀했다. 우리의 육신은 어느 정도 자라다가 머물지만 우리 영혼은 계속적으로 성장한다.그러면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데 필수적인 요소가 무엇인가? 첫째는 뿌리깊은 신앙은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 즉 뿌리가 깊어야 한다. 왜냐 하면 뿌리 깊은 나무는 흔들림 없이 나무를 지탱해 주면서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 신앙의 뿌리는 어디인가? 이는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우리 신앙인들이 잘못 인식하기 쉬운 것은 신앙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세속에 주어진 현상에 너무 안주하는 기분이 든다. 즉 세속적인 명예나, 돈이나, 권력이나, 부유함이 곧 신앙 성장이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영적인 문제도 그렇다. 잘못된 계시와 예언 그리고 지나친 감정주의는 주님의 사역과 말씀을 왜곡하게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변화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변화 받고 주님 앞에 바른 성령을 받았다면 섬기는 교회를 통해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되야 합니다. 뿌리가 바로 박혀야 한다. 뿌리는 땅속에 들어가서 땅과 부딪쳐서 땅속에 있는 모든 영양이나 수분을 뿌리가 빨아들이는 것이다. 즉 정통신앙 속에서 자리를 잡는 것이다. 두 번째는 뿌리 깊은 신앙은 교훈대로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교훈대로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이 중요하다. 이 교훈대로라고 하는 말은 내가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예수 님 속에 뿌리를 박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평상시에 밥먹듯이 사모하고 앙망해야 한다. 우리 한국이 이만큼이라도 믿음을 지키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일 낮밤과 수요 예배를 통해서 말씀에 거하는 습관이 중요하다.세번째는 뿌리 깊은 신앙은 열매 맺는 신앙이다. 그 열매는 무엇입니까? 이는 감사입니다. 사실 감사가 감사를 낳습니다. 즉 넘치는 감사입니다. 간신히 억지로 감사가 아니고 넘치는 감사입니다. 이와같은 실례를 보여주는 것이 손양원 목사님의 갖는 “사랑의 원자탄”입니다. 그분의 두 아들은 공산주의자들 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그와 같은 극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곧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 두 아들 미국 유학 가서 주의 일꾼 삼으려 했지만 하나님 나라로 유학 보내주시니 감사합니다. 한집에 하나도 아니고 두 아들을 순교자로 내게 했으니 여호와여 영광을 받으옵소서.”라고 했다. 성경 속에서 뿌리 깊은 신앙의 태도를 가진 사람은 욥일 것이다. 욥은 하나님의 시험대에 올라 섰지만 신앙을 지킨 사람이다. 욥은 자녀와 재산을 모두 잃었지만 고백하기를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은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올지라 주신이도 야훼시오 거두신 이도 야훼시오니 야훼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라”라고 고백했다. 사실 롬8:28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는 자들에게는 모든 합력하여 유익을 이루느니라”라고 기록되었다. 우리의 신앙은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시류와 세속에 휩싸여 중심을 잃고 방황 할 때가 많다. 이럴 때 일수록 중심을 잡아야 하겠다. 결국 모든 성도들이 세상 살아갈 때에가 믿음의 뿌리만 바로 정하고 바로 믿고 바로 참된 신앙만 걸어가면 하나님 앞 에서 만사형통의 삶이 될 것이다. 오늘 그런 축복의 은혜가 독자들에게 넘치기를 기도한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5-11
  • 선교지의 사고 예방
    대부분의 선교지는 안전한 고국의 상황과는 다른 환경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시에 일어날 수 있는 사고를 예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사실 많은 사고들이 사람들의 실수로 일어난다. 다시 말하자면 사고는 미연에 예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장기선교의 현장이던지 아니면 단기선교의 현장이던지 사고는 끔찍한 결과를 낳게 된다. 즉 사망, 중상, 해외여행자들의 긴급송환과 같은 일이 발생한다. 이들 사고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교통사고, 수영사고 그리고 가정내 에서의 사고들이다. 그러면 이러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일은 무엇인가? 이는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지침서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침서가 선교기관의 책장에 비치되어있다고 하더라도 현장에서 실천적으로 활용되지 않으면 무용하다고 볼 수 있다. 에를 들면 선교지에서 버스에 승차한 이후 팀 리더자는 반드시 승객들에게 안전벨트 착용의 유무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여름방학이 되면 매년 선교지를 방문하곤 한다. 이는 학문의 현장감 때문이기도 하다. 숙소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 타지역 으로 버스가 출발하기 전에 반드시 챙기는 것이 있다. 이를 흔히 “여보사랑”이라고 칭한다. 이 용어의 의미는 여권과 보따리에 있는 짐을 잘 챙겼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다행이 17여년동안 해오는 해외 연수 프로그램에서 별탈 없이 잘 다녀올 수 있었던 것도 “여보사랑”의 덕택이 아닌가 생각된다. Inter Health People in Aid의 테드 랜케스터의 이론을 빌려서 선교지의 사고예방에 대한 지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스탭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이미 인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과 알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라. 둘째는 사람들에게 조언할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하며, 단순히 문서로 하지 말라. 실제로 일어났던 시나리오 내용으로 그들과 대화하라. 셋째는 스탭들이 기관의 사고지침서를 읽고, 이해하며, 이에 동조하는지 확인하라. 넷째는 스탭들에게 응급조치 절차에 대한 사용법을 훈련하라. 다섯째는 선교 현장의 책임자들로 하여금 단체 모이시 사고 예방을 행하도록 하며, 이에 대해서 보고하도록 하라.위에서 언급된 내용들이 선교 현장에서 실시할 수 있는 사고예방에 대한 중요한 지침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를 토대로 실제적인 사고예방 조치를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먼저 안전한 도로여행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차량안전을 체크해야 할 것이다. 브래이크, 타이어, 조명등이다. 장거리 여행을 위해서 에어컨과 난방 시설의 이상 유무를 점검해야 한다. 특히 운전자가 알코올 중독자인지도 확인해야 한다. 만약 술에 중독이 되어있는 경우에는 운행 중에도 음주를 하게 됨으로 엄청난 재앙을 불러 올 수 있게 된다. 또한 장거리 여행일 경우에는 보조 운전자가 배치되는지도 점검해야 한다. 이울러 운행 중에도 여행의 책임자는 운전자가 졸지 않는지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만약 사고가 날 경우를 대비해서 “신뢰할 수 있는 헌혈자 명단”을 확보해 두는 것도 중요하다. 다음은 안전한 수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스텝진이 숙지해야할 사항은 그 지역의 바다, 호수, 강, 수영장들이 어느 정도 안전한지 조사해야 한다. 이어서 조류의 위험, 오염의 문제, 위험한 동물들의 출현 여부 등이다. 비록 리조트 내의 풀장을 이용할 때에도 전문가의 가시권 내에서 해야 하며, 혼자 보다는 동료와 함께 수영을 하도록 해야 한다. 특히 음주나 과식 이후의 수영은 피하도록 해야 한다.마지막으로는 사고 혹은 사고의 위기일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지역의 지침들을 대응책에 적용해야 한다. 이는 선교지의 상황이 천차만별로 다르기 때문에 보편적인 매뉴얼만으로는 현지의 문제점과 다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필요할 경우 현지의 전문병원을 미리 알아두어 재빨리 이동할 수 있도록 정보를 확보해 두는 것이 좋다. 특히 보험 관계를 정확히 해 둠으로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것이 좋다. 오늘 필자는 선교지의 사고 예방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금년 여름도 단기선교를 떠나기에 좋은 시간이다. 탈 없는 선교지 사역이야 말로 우리 모두가 바라는 기도 제목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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