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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점을 강점으로 바꾼 사람들
    만일 불의의 사고로 손발을 잃거나, 하반신이 마비되거나, 절음발이가 되거나, 소경이 된다면 어떨 것 같냐는 질문에 ‘그것 잘됐다’ 라고 쾌재 하거나 ‘처음엔 충격이 크겠지만 금방 괜찮아 지겠죠’라고 의연하게 답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 하기도 싫은 끔직한 일이라며 고개를 절래 절래 내젖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불행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행복과 불행에 대한 예측이 이처럼 실제와 다른 이유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적응 능력 때문이다. 그래서 유명인들 중에는 자기의 약점을 뒤집어 강점으로 바꿔 크게 성공하는 사례가 많다.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소년시절 거인 골리앗에 맞서 싸우려하자 주위 사람들이 말렸다. 기골이 장대한 천하장사를 소년이 상대하기에는 역부족 이라는 것. 하지만 소년 다윗은 골리앗의 강점을 뒤집어 해석했다. 골리앗은 몸이 크고 행동이 느리기 때문에 자신의 돌팔매를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다윗은 목동 출신으로 양떼를 습격하는 이리들을 돌팔매 하나로 물리치는 솜씨였으니 거대한 몸집에 동작까지 느려터진 골리앗이 자신의 돌팔매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사울 왕이 건네주는 갑옷과 칼을 버리고 개울가로 가서 단단한 차돌 다섯 개를 주어 주머니에 넣고 골리앗에게 다가가 돌팔매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뜨렸다. 만약 다윗이 갑옷과 칼로 무장을 하고 나갔더라면 골리앗에게는 잽도 안 되는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다윗의 전략은 전형적으로 적의 강점을 무력화시키고 그의 강점을 살린 탁월한 전략 이었다. 이처럼 적의 강점을 뒤집으면 약점이 된다. 문학의 거성 밀턴은 실명한 가운데 절망하지 않고 구술로 ‘실낙원’을 썼다. 음악의 황제 베토벤은 청각을 잃었음에도 합창단을 지휘하고 불멸의 교향곡 제9번을 남겼다. 역발상의 원조 알렉산더 대왕은 곱사 등이었다. 아프리카의 선교사 리빙스턴은 외팔이었고 나폴레옹과 문호 셰익스피어 은 절름발이였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평생 휠체어를 타야 하는 소아마비 자였고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전신장애인 루게릭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물리학을 연구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니콜라스 콘스탄티누스는 시각 장애인의 한계를 극복하고 그의 꿈을 성취했다. 그는 시각장애라는 사실이 조금 불편할 뿐이라고 말했다. 캐나다의 총리를 지냈던 크레티앵은 왼쪽 안면 근육이 마비된 장애인 이었다. 그래서 그는 말을 잘하지 못 한다. 항상 말을 해야 하는 정치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 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29세에 정치에 입문하여 16년간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고 나서 총리가 되었다. 그는 유세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는 말을 잘하지 못하지만 대신 거짓말도 하지 못 합니다’ 이 말을 경청한 유권자들은 그의 솔직한 면에 오히려 환호했다고 한다. 우리 한국에도 사례가 많다. 7년간 부시 행정부에서 차관보로 활동했던 강영우 박사는 중학교 1학년 때 축구공에 맞아 시각을 잃었고 장애인이 되었다. 절망 속에서도 미국으로 건너가 피츠버그 대학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해 한국인 최초의 시각 장애인 박사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 후 장애인 재단을 운영하면서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역임했다. 장애인과 이민자라는 두 가지 핸디캡을 극복하고 미국 주류사회에서도 우뚝 선 사람이 됐다. 유명한 동화 작가 고정욱은 소아마비라는 장애를 딛고 140여 권의 동화를 썼으며 300만 부 이상 팔렸다. 돌 무렵 소아마비를 앓아 장애인이 된 그는 성균관 대학교 국문과를 나와 동화작가가 되었다. 70만부 이상 팔린 그의 ‘가방을 들어 주는 아이’는 바로 자신의 경험담을 쓴 동화였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저에게 동화를 쓰라고 장애인이 되었나 봐요’ 세계 최고 존스 흡긴스 병원 수석전공의 이승복은 병원에서 ‘슈퍼 맨 닥터 리’ 로 통한데 그가 휠체어를 타고 병동을 누비는 그의 모습은 환자들에게 주치의이자 고통을 이겨내는 사람에게는 도전과 희망의 증거가 되었다. 그는 8세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낯선 이민 생활로 하루하루가 힘겨웠던 그때 체조를 배우면서 기쁨을 되찾았고 실력을 보여 고3학년에는 전미 올림픽 최고 상비군으로 인정받았다. 스탠퍼드 대학교, 미시칸 대학교 등 많은 스카우트 제안을 받는 등 그의 미래는 창창했다. 하지만 1983년 7월 공중회전을 하다 목을 쭉 늘인 상태로 턱을 박았다. 그는 사지마비 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재활 훈련을 통해 가능한 근육을 다시 쓸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조무사가 건네준 의학 서적을 읽고 의학을 공부하고 싶은 충동을 느켰다. 컬럼비아 대학교 공중 보건학 석사, 명문 다트머스 의대를 거쳐 하바드 대학교 의대 인턴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 마침내 세계 최고의 존스홉킨스 병원 재활수석 전문의가 되었다.
    • 칼럼
    • 목회자
    2017-01-24
  • 칭찬을 하라
    미국에서 있었던 한 실험의 이야기이다. 어느 학급에서 무작위로 20%의 학생들을 선발하여 ‘너는 잘 할 수 있다’며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자 8개월 후에는 실제로 성적이 훨씬 더 나아지더라는 것이다. 이번에는 미국의 한 운송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PIE 라는 이름의 이 회사는 일 년 동안 화물식별을 잘못하여 발생하는 손해가 25만 달러나 되었다. 마침내 유명 컨설턴트인 에드워드 데밍 박사를 초청하여 자문을 받았는데 그의 처방 중 하나가 작업 인부들의 호칭을 바꾸라는 것 이었다. 그의 권고에 따라 작업 인부라는 이름대신 장인으로 불렀다. 그러자 한 달 만에 배송 실수가 10% 줄었다. 그전까지 작업 인부는 시간만 때울 뿐이었지만 장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자 자신의 일에 책임과 긍지를 가지더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칭찬을 좋아 할까? 심리학자들은 말하기를 이는 ‘인간의 본능적인 존영의 욕구 때문이다’ 고 한다.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명예욕, 권리, 등이 여기에 속한다. 누구로부터 높임을 받고 싶고 주목과 인정을 받으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람들을 칭찬해야 할 이유는 인간의 본능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매우 특별한 존재 즉 우리 인간이 오직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창 1:26, 27). 그러기에 인간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천사보다도 그리고 천하보다도 귀한 존재이다. 여기에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을 귀히 여겨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의 약함이나 단점을 보고 불평이나 욕이나 험담을 하지 말고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장점을 찾아서 칭찬을 해주어야한다. 그러면 삭막한 이 세상에서 인간이 인간다워지고 인간답게 살아 갈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날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이나 사회에서 칭찬하는 것을 쑥스러워하거나 칭찬하는 방법이 서툰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에 인간관계가 좋지 않아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어떻게 칭찬을 할까? 어떤 분이 칭찬의 요령으로 다음 사항을 염두에 두라고 권했다. 1.‘즉각적으로 칭찬을 하라’ 대화중에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면 미루지 말고 곧바로 해야 한다. 2. ‘간결하게 칭찬을 하라’ 칭찬을 길게 하는 것보다 진심으로 간결하게 칭찬하는 것이 더 깊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3. ‘모호하게 표현하지 말라’ 칭찬은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하는 게 좋다. 모호한 칭찬은 형식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4. ‘공개적으로 칭찬을 하라’ 사람들 앞에서 칭찬을 하면 칭찬받는 기쁨과 우쭐한 기분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5. ‘칭찬과 입에 발린 말은 구별하라’ 입에 발린 말은 마음에도 없는 말하는 아첨과는 결정적으로 다르지만 부정적인 어감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입에 발린 말을 자주 하면 신뢰감이 떨어질 수 있으니 삼가는 게 좋다. 6. ‘지나친 칭찬은 하지 말라’ 추켜세우기 식의 칭찬은 되도록 피해야한다. 7.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과 노력을 칭찬하라’ 결과에만 집착하지 말아야한다. 일하는 과정에서 쏟은 열정과 노력에 대해 칭찬해 주면 자신감을 갖고 더 열심히 노력하기 때문이다. 8. ‘식상한 칭찬은 피하라’ 자신도 모르는 의외의 사실을 칭찬해 주면 잠재 능역을 개발시켜주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음전하를 상쇄하려면 다섯 배의 양전하가 필요 하다고 한다. 잘못 하나를 지적하기 전에 먼저 다섯 가지를 칭찬하라. 하지만 우리는 잘못을 지적하는 것과 칭찬하는 것의 비율이 완전히 거꾸로 되어 있다. 잘못하는 점 다섯 가지를 지적하고 나서야 겨우 잘한 한 가지를 칭찬한다. 그러데 칭찬을 하면 칭찬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비판을 하면 비판을 듣는다. 입술의 열매는 심은 씨앗의 질에 따라 달라진다. 일본의 사토 도미오는 그의 저서 기적의 입버릇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화할 때 가능한 많이 칭찬하라. 당신은 누구에게서나 장점을 발견할 수 있다. 상대의 결점만을 보지 말고 장점을 발견하도록 노력하라. 그리고 그 장점을 솔직하게 칭찬하라. 이것은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는데 무척 중요하다. 그리고 칭찬을 할 때 ‘말의 영적인 힘’에 대해 절대로 잊지 마라. 칭찬은 상대방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말에 깃든 영적인 힘’의 축복을 받기 위해 하는 것이다. 남에게 했던 칭찬은 그대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이것은 대뇌 생리학적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호르몬의 분비를 조정하는 뇌의 자율신경계는 말의 주어를 이해하지 못 한다. 다시 말해 당신이 누군가에게 ‘너의 미소는 아름다워’ 라고 말해도 주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율신경계는 ‘내 미소는 근사해’ 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기쁨의 표시로 뇌에 베타엔도르핀이나 도파민 등의 쾌감계, 보상계 호르몬을 분비한다. 주위 사람을 칭찬하면 할수록 자신이 빛나게 될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7-01-13
  • 지도자들의 언행일치
    한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간디를 찾아왔다. 어머니는 ‘선생님! 제 아들을 도와 주십시오. 아들이 설탕을 너무 좋아해요. 건강에 나쁘다고 아무리 타일러도 안들어요. 그런데 아들이 간디 선생님을 존경해서 선생님께서 설탕을 끊으라고 하면 끊겠다는 군요’라고 말했다. 간디는 소년의 눈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말했다. ‘도와 드릴테니 보름 뒤에 아들을 데려 오세요’ ‘저희는 선생님을 뵈러 아주 먼 길을 왔습니다. 그냥 돌려보내지 마시고 제 아들에게 설탕을 먹지 말라고 한마디만 해주세요’ 간디는 다시 한번 소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보름 뒤에 아들을 데려오십시요’라고 말했다. 보름 뒤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왔다. 간디는 소년에게 ‘얘야 설탕을 많이 먹으면 건강을 해치니 먹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고마움을 전하며 간디에게 물었다. ‘궁금 한게 있습니다. 보름 전 아들을 데리고 선생님을 찾아 왔을 때 왜 보름 후에 다시 오라고 하셨습니까?’ ‘저도 설탕을 좋아 합니다. 보름 전에는 저도 설탕을 먹고 있었거든요. 아이에게 설탕을 먹지마라고 하기 전에 제가 먼저 설탕을 끊어야 했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지도자는 언제나 거짓말을 하지 않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 지도자들은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야할까?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진행 과정에서 인간 들어 쓰신다. 이때 그 중에서도 국가를 다스릴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은 자들의 책임과 역할은 실로 크다 아니할 수 없다. 그들이 바로 서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들에게 맡겨진 나라의 흥망성쇠가 좌지우지 되어 그들이 공의를 행하느냐 불의를 행하느냐에 따라 국민들의 행불행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은 국민들에게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하지 그에 준하는 언행일치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나라가 시끄럽고 국민들이 불안하고 걱정들을 많이 하고 있다. 왜 그들은 불의한 삶을 살고 있을까? 그것은 ‘이익’ 의 문제 때문이다. 즉 돈과 명예와 권력의 욕심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들은 남보다도 더 좋은 것과 높은 자리를 차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남보다도 더 좋은 것을 더 차지하려고 부끄럼을 개의치 않고 언행불치의 삶을 살고 있다. 사실 욕심이 없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또 아무런 욕심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어떤 것도 이루어 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욕심의 정도가 과하면 탐욕이 되어 결국 죄악의 함정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꼭 필요한 만큼’에서 족한 줄 알아야한다. 욕심의 문제는 오늘 날 교회 지도자들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 사회의 부패와 도덕적 타락은 나라의 근본을 흔들 만큼 심각하고 중대한 상태에 와 있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까지 악화된 데에는 한국 사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교회지도자들인 즉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교사들에게도 그 책임이 없다하지 않을 수 없다. 고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언행불일치의 생활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결국 불의한 이를 탐하고 언행불일치의 생활을 하는 자들은 결국 자기의 생명을 잃을 뿐만 아니라(잠1:19, 행12:20~23) 그 다스리는 백성들 까지도 멸망시키고 말기 때문이다.(겔22:27) 아울러 모든 지도자들은 다스리는 권세가 바로 하나님께로 온 것임을 항상 기억하고(롬13:1) 그 뜻을 거역하지 말아야한다. 지도자의 모든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응하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지도자들은 늘 자신을 살펴 말과 행실을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 언행불치의 생활을 했다면 돌이켜야 한다. 즉 환골탈태를 해야 한다. 하늘의 제왕 솔개는 기류를 따라 높이 날아오른다. 그 모습이 연을 날리는 것과 같다하여 ‘연’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수명은 40년 정도이지만 환골탈태를 통해 70년까지도 살수 있다고 한다. 그 방법은 말 그대로 환골탈태이다. 사실 말이 쉬워서 환골탈태 이지 가히 죽음에 이를 정도의 고통이라고 한다. 환골 즉 뼈를 갈아 끼우고 탈 때, 태를 벗기는 의미니 그럴만도 하다. 솔개는 약 40년을 살면 발톱이 노화되어 먹이를 보고도 잡아챌 수 없는 퇴물이 된다. 부리도 길어지고 구부러져서 가슴에 닿을 정도가 되고 또한 깃털이 짙고 두꺼워져 날개가 무거워 진다. 결국 날기가 불가능해진다. 이즈음이 되면 솔개 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뿐이다. 죽을 날을 기다리든가 아니면 고통스러운 환골탈태 의 과정을 거치든가 해야 한다. 환골탈태의 길을 선택한 솔개는 먼저 적의 눈에 띄지 않는 산 절벽으로 높이 날아 오른다. 그곳에 둥지를 짓고 안전하게 숨어야 한다. 그리고 못쓰게 된 뭉텅한 부리를 바위로 쪼아 뽑아버려야 한다.
    • 칼럼
    • 목회자
    2017-01-06
  •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일을 하다보면 실패는 피할 수 없다. 모든 일이 생각대로 술술 풀리면 좋겠지만 세상사란 내 마음 같지 않다. 혼신을 바쳐 매달려도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생각해 보면 실패 그 자체는 큰 문제가 안된다. 이번에 실패했으면 다음에 잘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파장이 오래가는 것이다. 아울러 한번 실패하면 스스로를 ‘패배자’로 낙인찍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제3자의 눈에 ‘그 사람‘ 의 실패는 그저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불발로 끝난 일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이 일을 그르쳤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하지만 정작 실패의 당사자들은 그 의미를 확대해석하기 일쑤다. 실패의 경험에 사로잡혀 매사에 주눅이 들고 의기소침해지다 못해 스스로 무능하다는 두려움에 젖는다. 그래서 실수가 잦아지고 실패가 늘어나고 좌절이 반복 된다. 결국 재기가 어려운 ‘패배’의 상태로 빠져 든다. 이처럼 실패한 과거에 연연한 사람은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실패가 두려워 아무것도 안한다면 시작도 전에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다. 실패는 우리를 더욱 강하고 현명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실패는 실패로 끝내야한다. 그리고 우리를 돕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시 54:4) 우리의 앞을 막아선 어떤 절벽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칠전팔기(잠 24:16)의 신앙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이제 필자는 극한 고난과 실패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바닥을 치고 재기하여 성공한 사람들을 소개 한다. 발명 왕 에디슨을 보자. 그가 축음기를 발명할 당시 많은 사람들이 축음기의 발명에 도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디슨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마침내 에디슨이 축음기 발명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도에 포기한 자들이 공통으로 했다는 말이다. ‘조금만 더 노력했더라면 내가 먼저 발명할 수 있었을 텐데’ 성공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고 한다. 또 실패한 사람의 95%는 처음부터 무엇인가 잘못되어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성공의 고지를 바로 눈앞에 두고 포기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세계 어린이들에게 사랑받는 덴마크 동화작가 안데르센(H.C.)을 보자. 그는 인종, 종교, 국적을 초월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옥같은 동화들을 130여 편이나 남겼다. 그런데 그가 가장 좋아한 일은 글쓰기가 아닌 노래였고 그의 꿈은 동화작가가 아닌 가수였다. 평소 그는 노래를 좋아하고 재능도 탁월했다. 그는 오페라 가수가 되고자 14세 때 수도 코펜하겐으로 무작정 상경했다. 어렵사리 단역으로 무대에 설 기회를 잡으면서 가수의 꿈을 키워갔다. 아름다운 노래로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는 오페라 가수 생활은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불행이 덮쳤다. 생활비를 아끼느라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않던 그에게 병마가 찾아왔고 병이 나은 후에도 제목소리가 돌아오지 않았다. 목에서 피가 날 정도로 혹독한 재활훈련 끝에 그는 다시 무대에 서게 됐지만 예전 같지 않은 목소리에 연출가와 동료들은 고개를 돌렸다. 최고의 가수가 되겠다는 꿈은 물거품이 됐다. 대신 그는 펜을 들었다. 노래만큼은 아니지만 글을 썼다. 그의 열정에 감동한 왕립극장 감독이 후원자로 나섰다. 마침내 후원자의 도움으로 공부를 시작한 그는 대학까지 졸업하며 작가로서 필요한 기본기를 탄탄이 쌓았다. 결국 소설가이자 동화작가로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영국 국민이 가장 사랑한 정치인 윈스턴 처칠을 보자. 그가 영국의 명문 옥스퍼드대학 졸업식에 축사를 맡게 되었다. 위대한 정치가이자 명연설가로 유명했던 연사로서 설 차례가 되자 학생들과 교수들도 한껏 기대어린 시선으로 무대를 지켜봤다. 적은 키에 느릿한 걸음으로 연단에 올라선 처칠은 아주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청중들은 숨을 죽였다. 그리고 잠시 후에 좀 더 큰 목소리로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잠시 후에 좀 더 큰 목소리로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라고 짤막하게 축사를 했다. 그 때 청중들은 모두가 일어나서 박수를 보냈다. 실로 그는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군인과 정치인으로서도 그의 사전에는 포기란 없었다. 그는 초등학교와 중고교에서 성적이 꼴찌였다. 학적부에는 ‘희망이 없는 아이’로 가혹한 평가가 적혔으며 친구들은 그를 멍청이라고 놀려댔다. 육군사관학교에도 두 번의 낙방 끝에 세 번째 도전에서 간신히 입학 했다. 육사 진학 후 그는 배짱과 탁월한 리더십 그리고 카리스마로 두각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후 군인으로 살아가면서 온갖 실수와 재난 사고 속에서도 비관하거나 낙담한 적이 없었다. 또한 정치인으로 새롭게 변신한 뒤에도 선거패배와 인기하락의 어려움을 겪었으나 무너지지 않았다. 결국 처칠은 아버지를 능가하는 세계적 정치가 되었고 노벨문학상까지 받았다.
    • 칼럼
    • 목회자
    2016-12-23
  • 어떻게 화를 다스릴까?
    한 선비가 관직을 맡아 임지로 떠나게 되었다. 먼저 벼슬길에 오른 친구가 말했다. ‘여보게, 관직에서 일하려면 무엇보다도 참을 줄 알아야 하네’ ‘명심 하겠네’ 하지만 친구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저 참는 게 제일 이라네’ ‘알았네,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친구가 또 당부했다. ‘몇 번이라도 참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게’ ‘글쎄 알았다니까?’ 선비가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 뒤돌아서 막 떠나려고 하는데 친구가 선비의 소맷자락을 붙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보게. 무슨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해. 참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꼭 명심하게’ 이 말을 들은 선비가 버럭 화를 내면서 말했다. ‘자네 나를 놀리는 건가? 도대체 같은 말을 몇 번씩이나 하는 건가?’ 그러자 친구는 한탄을 하듯 말했다. ‘고작 네 번 말했는데 자네는 그걸 못 참고 화를 내는군’ 이라고 안타까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늘 날 한국 사람들은 어떤 학자들이 말했듯이 ‘냄비근성이 강하고 화끈한 유목민족기질’이 있기 때문에 점점 참을성 즉 인내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했다. 마음의 여유를 상실하고 하루에도 너나할 것 없이 가정, 교회, 일터, 친지들 중에서 늘 다투기를 좋아하고 비판적이며 남을 지배하고자하는 사람들 때문에 화를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놓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 실로 이런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은 곤욕스럽기 짝이 없다. 달래거나 설득하려고 애써 봤자 소용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를 다스리는 요령으로 첫째, 화를 일으키는 감정을 찾으라고 한다. 즉 좌절감, 위협, 두려움, 거절감, 아픔, 질투 중에서 화를 일으키는 감정이 무엇인지 찾아내려고 한다. 둘째로 경멸하는 말을 삼가라고 한다. 화를 낼 때 경멸하는 말은 사람의 자존감을 망가뜨릴 수 있다. 관계를 끊거나 일을 그만두자는 위협은 돌이킬 수 없는 해를 끼칠 수 있다. 셋째 자신의 감정 상태를 상대에게 알리라고 한다.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에 화가 났다면 빈정거리거나 모욕하지 말고 자신의 기분을 털어놓고 상대의 말이나 행동이 거슬린다고 말하라. 넷째 몸싸움은 피하라고 한다. 절대로 때리거나 혹은 어떤 식으로라도 육체적으로 학대하면 안 된다.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을 때는 그 자리를 떠나라. 가능한 빨리 자리를 피해야 상대뿐만 아니라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다섯째 필요하면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을 가지라고 한다. 자제력이 떨어질 때는 잠깐 산책을 하든지 아니면 앉아서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가라. 마음이 가라앉았으면 자신을 화나게 한 상황에 대해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라고 한다. 여섯째 운동으로 풀라고 한다. 화가 났을 때는 건설적으로 분출하는 것이 좋다. 상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능하지 않거나 화가 가라앉지 않을 때는 논의가 좋은 방법이 못 된다. 이럴 때는 육체적인 활동과 운동이 좋은 배출구가 된다. 일곱째 용서하라고 한다. 노여움이 가시지 않는다면 유일하게 남은 방법은 바로 ‘용서’ 하는 것이다. 용서는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 사건에 대해서도 용서할 수 있는 성품을 만들어라. 자신의 평안을 위해서 용서하라. 참고 용서하는 것이 인격의 힘이다. 인간 세상의 모든 갈등은 참지 못하는 데서 시작되고 용서하지 못하는데서 끝난다. 사람다움은 자제력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일리가 있다. 성경은 노를 어떻게 다스리라고 하는가? 먼저 노하기를 더디 해야 한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쉽게 화를 내고 분을 품는 경향이 있다. 또 매사에 자기중심적 이어서 무슨 일만 생기면 서로 ‘네 탓’이라며 언성을 높여 싸우기 일쑤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하는 겸허한 자세로 분을 자제하고 노하기를 더디 해야 한다. 그러한 태도야 말로 남에게 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상대방을 부끄럽게 하는 진정한 지혜이기 때문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잠언을 보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12:16) 이것은 인간 사회에서 오래 참음의 덕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실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 병사들이 모여들 때 베드로가 화가 나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잘라 버렸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면서 말고의 귀를 만져 낫게 하셨다. 그러기에 억울하게 손해를 본다고 해서 화를 벌컥 내기 전 우리와 같은 죄인을 향해 끝까지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벧후 3:9). 아울러 성령 충만을 기도해야한다. 성령을 힘입어 살 때만이 어떠한 상황에 처할 지라도 오래참고 인내함으로 노하기를 더디 할 수 있기 때문이다(갈 5:22, 23).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내함으로써 온전해 지고(약1:4) 장차 주님의 약속의 유업 즉 큰 상을 받기 때문이다(히10:36).
    • 칼럼
    • 목회자
    2016-12-16
  • 비관주의자 대신 낙관주의 자가 되라
    미국의 한 연구자가 신입 보험 세일즈맨들을 대상으로 낙관주의 자와 비관주의 자를 검사 한 후 1,2년 사이의 평균 계약 실적을 분석했다. 낙관적인 성향을 가진 사원은 처음 일 년 동안 3,087달러 계약을 한 반면 비관적인 성향을 가진 사원은 1,962 달러를 계약해 약 60%의 차이를 보였다. 입사 2년 차에는 차이가 더 커졌다. 낙관적인 사원은 비관적인 사원보다 무려 638%나 많은 계약 실적을 올렸다. 비관주의 자는 고객을 방문해 한두 번 거절당하면 낙심하고 포기 하지만 낙관주의 자는 한두 번 거절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영업은 거절당하는 순간에 시작된다고 믿는다. 낙관주의 자는 어떤 환경에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밝은 표정을 하며 행운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비관적인 사람은 직장 상사로부터 질책을 당하면 ‘성격이 고약 하네 허구한 날 저래’라고 생각하지만 낙관적인 사람은 ‘오늘 기분이 안 좋은가 보다 조금 있으면 풀리겠지’라고 말 한다. 많은 사람 앞에서 발표할 때 긴장하는 순간에도 비관적인 사람은 자신이 너무 겁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식은땀을 흘리지만 낙관적인 사람은 대중 앞에서 긴장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곧 자신감을 갖고 말하기 시작 한다. 급할 때 택시가 잡히지 않으면 비관주의 자는 ‘왜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거야’하면서 지속적인 불쾌감을 드러내지만 낙관주의 자는 ‘오늘은 택시잡기가 힘드네’ 라고 하며 일시적인 상황탓이라고 생각 한다. 시험 성적이 안 좋을 때 비관론자는 ‘난 공부체질이 아닌가 봐 하고 전반적인 생각을 하는 반면 낙관론자는 ‘이번시험은 망쳤네 다음에는 더 분발해야지’하며 제한적으로 생각 한다. 우산이 없는데 비가 오면 비관주의 자는 ‘우산을 안 갖고 나오면 꼭 비가 온다 말야’하며 자신 탓을 하지만 낙관주의 자는 ‘날씨가 변덕스럽군’하며 날씨 탓을 한다. 비관적인 사람이 될 것인지 낙관적인 사람이 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달라질 수 있으며 인간관계, 일, 자신의 태도, 그리고 앞으로 자신의 모습까지 인생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지에 따라 우리가 세상을 보는 필터가 결정된다. 낙관적인 생각을 갖는다면 맑고 투명한 필터로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세상의 걱정거리나 문제점을 보는 동시에 먹구름 사이로 비치는 한 줄기 햇살과도 같은 가능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비관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어둡고 흐릿한 필터로 세상을 보는 것과 같다. 무얼 보든 간에 모든 것이 절망스럽게 보인다. 더 나쁜 것은 인생의 긍정적인 면조차 전혀 보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낙관적인 생각은 질병을 낫게 한다고 한다. 우리 뇌에는 의학이나 약학 분야에서 유명한 ‘플라세보효과’라는 작용이 있는데 인체에는 무해하고 아무런 효과가 없는 약 포도당과 가짜 약을 환자에게 투여하면 환자가 그것을 ‘진짜 약’이라고 믿고 복용할 때 정말로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뇌에서 약의 효과에 반응하는 호르몬이 대량으로 분비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병은 마음에서 온다’는 속담처럼 정말로 좋은 기분 즉 낙관적인 생각의 힘으로 병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실례로 제1,2차 세계대전 중에 부상병이 급증하자 의약품이 턱 없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에 의사들은 약효가 전혀 없는 가짜 약을 처방해 주면서 ‘특효약’이라며 환자들을 속였다. 그랬더니 가짜 약을 먹은 환자들의 상태가 상당히 호전되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특효약을 먹었으니 좋아질 것이라는 환자 스스로의 자기 암시에 의해 나타나는 치료 효과였다. 이를 위약 효과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를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킨 사람은 프랑스의 의사 에밀쿠였다. 의사로서 위약의 효과를 확인한 그는 1922년에 발간된 에세이집 ’나는 날마다 모든 면에서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에서 상상의 힘은 의지보다 강하다고 말했다. 이것은 자아 이미지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항상 ‘어차피 나는 못생겨서 인기가 없어 그렇게 큰일은 나한테는 무리야’ 등의 비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으면 아무리 미인이고 능력이 있더라도 무엇 하나 얻을 수 없다. 고로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습관을 개발해야한다. ‘나는 소중해 나는 나를 사랑해, 나는 할 수 있어’라고 기도해야한다. 사람들이 요즘 어떠세요? 라고 물으면 ‘ 너무 좋아요’라고 기분 좋게 대답해야한다. 심리학자들은 자신이 느끼는 95%는 자신의 생각과 자신에게 하는 말에 결정된다고 주장 한다. 그러기에 자기가 원하지 않고 의심하고 겁 네는 일에 압도당하지 않도록 자기를 훈련하고 통제해야한다. 그래도 부정적인 생각에 빠질 때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온갖 걱정거리들을 내려놓고 전심으로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정적인 마음을 현실적인 낙관주의, 실천적인 낙관주의 자로 바꾸어 주실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6-12-07
  • 죽은 후에도 기억될 만한 삶을 살아라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곳은 어디일까? 미국 켄터키주 포스트녹스에 있는 금괴 보관소인가? 아니다. 중동인가? 아니다. 남아프리카의 금광이나 다이아몬드 광산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구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곳은 공동묘지이다. 쓰지 못한 사업, 이루지 못한 관계 등 온갖 보화가 땅 밑에 묻혀 있다. 어마어마한 잠재력이 무덤 속에서 사라져 가니 안타깝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전하지 않으면 미국 어느 마을에 살았던 노처녀 낸시존스의 인생처럼 무미건조할 것이다. 미스 존스가 사망했을 때 그곳 지방 신문 편집자는 그녀의 부고난에 쓸 말이 없어서 고민에 빠졌다. 그녀는 결혼한 적도 없고 자녀도 없었고 특별한 사건에 연루된 적도 없었다. 한참 고민하던 편집자는 마침 사무실에 들어온 스포츠 기자에게 일을 맡겼다. 스포츠 기자는 낸시 존스의 부고 난에 이렇게 적었다. ‘여기 낸시 존스의 유골이 누워 있다. 그녀는 평생 두려움을 피했다. 노처녀로 살다가 노처녀로 죽었다. 안타도 도루도 에러도 없었다’ 우리들의 묘비에 이런 글이 새겨진다면 어떨까? 그런 운명을 피하려면 삶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세상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착실하다. 약속한 것은 꼭 지키고 사람들을 늘 성심성의껏 대하며 크던 작던 목표를 향한 계획을 성실하게 즉 끈질기게 실천하였다. 외국계 회사에서 임원 자리에 오른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그녀가 임원이 된 것은 경영 전략이나 카리스마가 아닌 신입 사원시절 정성스런 복사 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지방 대학 졸업 후 상경해 처음 맡은 일은 복사였다. 당시엔 대형 복사기가 귀했다. 그녀는 종이를 대는 판과 덮개를 약품과 걸레로 깨끗이 닦고 종이를 제자리에 놓았다. 복사하면서 나오는 검은 잡티를 없애기 위해서다. 스테이플러도 정확한 위치에 찍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복사 서류만 보고도 그녀가 한 것임을 알았다. 하루는 사장에게 제출할 중요 서류를 복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퇴근 시간이 지나가고 복사를 하다 그만 복사기가 고장이 났고, 비상 연락망을 통해 퇴근한 복사기 회사 직원에게 심야수리를 부탁, 결국 새벽 3시 무렵에야 복사를 마쳤다. 이런 사정을 안 사장은 복사를 이처럼 정성스럽고 책임 있게 하는 직원이라면 무슨 일을 맡겨도 잘할 것이라는 신뢰를 표하며 그녀를 희망 부서에 배치해 주었다. 그녀는 더 열정적으로 일했고 결국 임원의 자리에 올랐다. 정성스럽게 일 하는 사람이 인정 받고 승진 하는 법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하루를 성실하게 살았다면 일생을 성실히 산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늘 하루가 일생이다. 어떤 날은 열심히 했다가 또 어떤 날은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성실이 아니다. 남의 탓, 환경 탓을 하는 것은 가장 불성실한 자세다. 다른 누구의 평가 때문에 성실해서는 안 된다. 정해진 계획대로 꾸준히 일관성을 갖고 일을 전개해나가는 것이 성실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선한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정직하고 솔직하게 자신을 평가하면서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축복하신다. 하지만 탁월한 지식과 재능과 경험이 있어도 성실함과 겸손함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결국 실패하고 만다. 타성에 젖어 대충대충 하거나 주먹구구식으로 ‘잘하자’ ‘열심히 하자’ 구호에 그쳐서도 안된다. 반드시 무엇을 어떻게 해서 어떤 결과를 얻는다는 구체적인 목적과 방향을 정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허공에 뜬 모호한 목표는 달성할 수 없다. 이런 사람에게는 기회조차 오지 않는다. 성공하는 사람은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한다. ‘대박’ 이란 말을 잘 쓰는 사람은 대박과는 거리가 멀다. 이 세상에 대박이란 없다. 자잘한 것들이 쌓여 대박이 된다. 그런데 우리들은 한계를 인정하는 습관이 있다. 해결 방법을 찾다가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바로 포기한다. 필자도 타인과 대화할 때 ‘그것 안됩니다’ 말을 하거나 자주 들을 때가 있다. 왜 안 되느냐? 사람들에게 물어 보거나 나 자신에게 질문해 보면 지금까지 해봤지만 안 되었다는 것이다. 남들이 한두 번 해서 안된 일이라면 열 번, 스무 번 하자. 남들이 두세 달 해서 안된 일이라면 일년, 이년 동안 물고 늘어지자. 1%의 가능성이라도 보이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근성이 있어야 한다. 하고 싶은 일에는 방법이 보이고 하기 싫은 일에는 핑계가 생긴다. 변명이 보이기 때문이다. 안되는 수십 가지 이유와 변명으로는 되는 일이 없다. 회피하는 것에 길들여진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어려운 일을 시도해 성취감을 맛보기 보다는 행여나 일을 하다가 망신을 당하면 어쩌나 자존심이 상하면 어쩌나 하면서 철저히 자신을 보호하려고만 한다. 그런 사람은 성공 가능성이 99%라도 1%의 실패 가능성에 연연해야 할 것이 분명하다. 떠밀려서 억지로 한 일이 설령 성공하더라도 흥분하고 감격하기 보다는 ‘휴 다행이다’ 하며 안도감을 갖는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6-11-24
  • 당신의 습관을 고쳐라
    어떤 분이 사람의 습관을 말하기를 ‘나는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하인이고 또한 모든 사람들의 실패한 사람들의 하인이다. 위대한 사람들은 사실 내가 위대하게 만든 것이다. 실패한 사람들도 사실 내가 실패하게 만든 것이다. 나는 기계처럼 정확하게 움직이지만 또한 인간의 지성을 가지고 있다. 나를 변화시키는 사람은 이득을 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파멸을 맞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내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만일 내가 필요하다면 나를 훈련시켜라 엄격하게 대하라. 그러면 나는 이 세상을 다 줄 수 있다. 그러나 나를 쉽게 대하면 당신을 파멸시킬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바로 ‘습관’이다 라고 했다. 왜 나쁜 습관을 고쳐야 할까? 인간의 부와 행복, 마음의 평화는 모두 습관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습관은 제2의 천성으로 제1의 천성을 완전히 파괴한다’고 말했다. 아무리 나쁜 성품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좋은 습관을 기르면 천성이 바뀐다는 것이다. ‘습관’(habit) 이란 단어는 원래 의복이나 옷감을 의미했다. ‘승마복’, ‘복장’과 같은 단어가 그 예이다. 습관은 우리가 입고 있는 의복과 같다. 그것은 생각지도 않는 일이나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자신에게 딱 들어맞기 때문에 우리는 그 것을 입고 있는 것이다. 맥스웰 몰츠 박사는 ‘새로운 습관을 만들려면 어른의 경우 최소한 21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21일만 지속되면 새로운 습관을 만들 수 있다. 새로운 목표를 세웠는데 작심삼일로 끝내는 사람이 많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부분 자신을 설득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핑계를 만들며 작심삼일로 끝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나쁜 습관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이렇게 하자 1단계, 결심하자 옛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만들겠다고 결단하자. 영어로 결단이란 단어는 ‘decision’ 이다. 이 말은 라틴어 ‘froiu de to cut’에서 나온 말이다.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모두 잘라버린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운동을 하겠다고 결심 했으면 그 시간에 자명종 시계가 울리도록 하고 시계가 울리면 즉시 일어나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2단계, 예외를 인정하자. 새 습관이 만들어질 때까지 핑계를 만들지 말고 합리화 하지 말자. 몸이 찌뿌 등하고 컨디션도 안 좋으니까 오늘 운동을 쉬어야겠고 라고 변명 하지 말자. 3단계, 다른 사람에게 목표를 말하자. 특정한 행동 습관을 익히는 중이라고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말해놓으면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서 게을러지지 않을 것이다. 4단계, 새로운 습관을 가진 자신의 모습을 시각화 하자. 새 습관은 더 자주 시각화할수록 더 빨리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고 자동적인 버릇이 된다. 5단계, 확언하자. 반복해서 확언하면 습관을 형성하는 속도를 높일 수 있다. 6단계, 굳은 결심으로 밀어 붙이자. 결심한 일을 하지 않으면 불편함을 느낄 정도가 되어야한다. 새 습관이 자동적이고 쉬운 일이 될 때까지 계속 연습해야 한다. 그야 말로 불도저처럼 무섭게 밀어붙이면 이루어진다. 7단계, 자신에게 보상하자. 가장 중요한 일은 새 습관을 익히는 자신을 잘 대우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보상 할 때마다 행동을 재확인하고 강화하게 된다. 무의식 속에서 보상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그러면 행동이나 결심의 성과로 얻는 긍정적인 결과에 대해 강한 애착을 보일 것이다. 이밖에도 새로운 습관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태도가 필요하다. 먼저 남의 말을 경청해야한다. 남의 말을 더 많이 듣고 자신의 말을 적게 하는 습관은 참으로 중요하다. 삼성 그룹 이건희 회장은 자신의 말을 아끼고 상대방의 말을 잘 경청하기로 유명하다. 그는 선친이 붓글씨로 써준 ‘경청’이란 휘호를 벽에 걸고 그것을 보면서 스스로 자기에게 잘 듣고 있는가를 묻고 더 경청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다음으로 실력 이전에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한다. 만나는 사람이 예의 없고 품격이 없으면 금세 싫증 나게 마련이듯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예의 없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사하는 것 하나를 보면 그 사람이 교양이 있는 사람인지 품위가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성실하게 일하여야한다. ‘성실성’은 원칙을 중심으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을 의미 한다. 성실성은 라틴어로 ‘sin cero(왁스를 사용하지 않은) 즉 이음새나 떨어진 부분이 없는 완전한 것’을 의미 한다. 진정으로 성실한 사람은 상황에 따라 정직성을 보이거나 가끔 한 번씩 정직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완전하게 일을 끝맺는다. 정주영 회장의 자서전 ‘이 땅에서 태어나서 나의 살아온 이야기’에 이런 글이 있다. ‘무슨 일을 하든 ‘요만큼’ 이나 ‘이 만큼’ ‘요정도’ ‘이정도’ 는 내게 있을 수 없었다. 더 하고 싶어도 더 할 게 없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다하는 최선 그것이 내 인생을 엮어온 기본 생각이다.’
    • 칼럼
    • 목회자
    2016-11-11
  • 하나님의 가족들 돌보라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며 영원히 함께 통치할 가족을 원하시고 가족의 일원이 되도록 우리를 만드셨다. 그분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것을 계획하셨다(엡 1:5). 이 같은 하나님의 가족은 과거, 현재, 미래의 믿는 사람들도 포함 한다. 그래서 영적인 가족은 혈육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 기독교는 주안에서 혈연을 초월한 새로운 영적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부르며(고전 8:6, 롬 8:15)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부르는 것은 주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고 복음 전도를 위한 한 팀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가족이 된 근거는 주님의 보혈에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보혈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즉 우리 심령 속에는 똑 같은 주님의 보혈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교회는 국가와 인종과 지역과 혈연을 뛰어넘는 가장 진한 색깔을 띌 있는 하나의 영적 가족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너무도 분명하게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한 집에 있는 가족으로 부르고 있다(딤전 3:15, 벧전 4:17). 물론 이 세상에서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진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이지만 그것은 일시적이며 때때로 이혼, 먼 거리, 노화, 그리고 죽음으로 깨어지기도 한다. 반면 우리의 영적인 가족, 즉 다른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영원토록 계속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고 예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랑스럽게 여기신다(마 12:49~50). 아울러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가족의 유산을 나누게 된다(갈 4:7, 빌 4:19). 이 땅에서 풍성함, 은혜, 친절함, 인내, 영광, 지혜, 그리고 자비를(엡 1:7, 롬 2:4, 3:16) 얻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우리는 더 많은 유산을 받게 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은 가장 큰 영광이고 특권이다. 그 어떤 것도 이에 비할 수 없다. 고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성도들을 대할 때에는 친 가족을 대하듯 해야 한다. 그리하여 교회를 아름다운 천국 가정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오늘 날 가족 윤리를 잊어만 가는 이 세상을 향해서도 진정한 가정이 어떠한 모습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날 명목적인 교회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가족에 봉사 하지 않고 등한시 하며 소홀이 하거나 버리기도 한다. 이에 사회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믿음을 배반하는 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라고 정죄 한다(딤전 5:8). 실로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마음에 새겨진 양심과 본성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 따라서 불신자라 할지라도 가족을 위해 어떠한 수모와 스트레스도 참고 인내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말씀을 통해 가족에 대한 의무를 알고 있는 성도들이 이를 게을리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이는 믿음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양심마저 외면하는 악한 일이다. 고로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과 경건을 실천하노라 하면서 밖으로 뛰쳐 나아가 외치기 전에 먼저 육신의 가족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가족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해야 한다. 아울러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가족에 대한 의무도 다해야한다. 즉 은퇴한 목회자들과 불우한 노인들을 외면하지 말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야 한다. 진정한 가족은 동고동락을 같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울을 위해 헌신했던 구레네 시몬의 아내이자 루포의 어머니처럼 말이다(롬 16:13).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햇볕이 내려쬐는 사막 한 복판에서 낡은 트럭을 끌고 가던 한 젊은이가 허름한 차림의 노인을 발견하고 차를 세웠다. ‘타시죠’ ‘고맙소 젊은이! 라스베이거스까지 태워줄 수 있겠소?’ 젊은이와 노인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노인의 목적지인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했다.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부량자 노인이라고 생각한 젊은이는 주머니를 뒤져 25센트를 노인에게 주면서 말했다. ‘영감님 차비에 보태세요. 몸조심하시고요’. ‘참 친절한 젊은이구먼 명함 있으면 한 장 주게나’ 젊은이는 무심코 명함을 건네주었다. ‘멜리 다마! 이 신세는 꼭 값겠네. 나는 하워드 휴즈라고 하네’ 얼마 후 세월이 지나 이일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을 무렵 기상천외한 사건이 벌어졌다. ‘세계적인 부호 하워드 휴즈 사망’ 이런 기사와 함께 유언장이 공개되었는데 하워드 휴즈가 남긴 유산의 16분의 1을 멜빈 다마에게 증여한다는 내용 이었다. 멜빈 다마가 누구인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유언장 이면에 멜빈 다마는 하워드가 일생 동안 살아오면서 만났던 가장 친절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친절한 사람 이것이 유산을 남겨주는 유일한 이유였다. 하워드 휴즈 유산 총액이 25억 달러 정도였으니 유산의 16분의 1은 최소한 1억5천만 달러, 우리 돈으로 2000억원 가량이었다. 무심코 베푼 25센트가 6억 배가 되어 되어 돌아올 줄 누가 알았으랴!
    • 칼럼
    • 목회자
    2016-11-03
  • 고슴도치의 딜레마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가 쓴 우화에는 재미있는 ‘고슴도치 딜레마’의 이야기다 있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두 마리 고슴도치가 서로 몸을 기대어 온기를 나누고 싶은데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의 침에 찔려 아프고 그렇다고 떨어져 있으면 온기를 나눌 수 없어 적정 거리를 놓고 고민하는 내용이다. 이를 일컬어 ‘고슴도치의 딜레마’라 하고 또 이런 고슴도치들의 적정 거리 간격을 예절이라고 하는데 사람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예’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예’ 란 합당한 사람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것을 의미 한다. ‘예’는 왜 지켜야 하나?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이기 때문이다. 만나는 사람이 예의 없고 품격 없으면 금세 싫증 나듯 그 누구도 예의 없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은 인사하는 것, 하나를 보더라도 그가 교양이 있는지 품위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즉 부드러운 미소, 헤어스타일, 좋은 목소리, 단정한 옷차림, 절도 있는 동작 하나를 보면 그 사람이 준비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예의를 지켜야 한다. 예절은 사람의 인격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사랑도 예의라는 그릇에 격식을 갖추어 나 올때 품위 있고 존경스럽다. 아울러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린다. 사람을 무례하게 대하면 소인배들이 모여 든다. 그러나 예의를 갖추면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사람과 교제 할 수 있다. 고로 실력 이전에 먼저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사소한 것이라고 우습게 여겨서는 안된다. 예의도 하나의 습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의를 지키는 방법이 무엇일까? 무례히 행지 말아야 한다. ‘무례’(헬.아스케모네이)란 말은 공정치 않게 행동함으로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을 의미 한다. 그것은 첫째로 공중을 위한 예의가 없이 행함을 가리킬 수 있다. 성도는 주님의 지체요. 고립되어 자행자지할 사람이 아니다. 개인이면서도 그리스도의 몸(하나님의 백성)의 모든 지체들과 함께 살 줄 알아야 한다. 주님의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인륜상의 질서도 더욱 강화 할지언정 약체화 시키지 않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책임을 다 할 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겠는가(요일 4:21)? 하나님을 공경하노라 하면서 부모를 박대한 바리새인은 실상 하나님을 바로 공경하지 못한 자였다.(마 15:5, 6) 사람들에 대한 예의와 하나님에게 대한 경외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눅 18:4절에 불의한 법관의 말도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라고 하여 양자의 관련성을 암시 한다. 둘째로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 역시 무례이다. 실례를 들면 부모는 자식의 권위요, 선생은 제자의 권위요, 노인은 젊은 자들의 권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여 주셨다. 사람이 땅의 권위들을 존경하도록 하는 것은 그들이 그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 경외에 이르는 훈련을 받도록 한 것이다(레19). 고로 권위를 존경할 줄 모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을 알게 하기가 곤란하다. 존경의식은 어떤 의미에선 경건을 돕는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 중에 존경할 자를 존경하는 것이 우리의 경건도 증진 시킨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무례할까? 세 가지 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즉 돈병, 색병, 이름병이 그것이다. 이중 가장 무서운 것이 이름병이다. 돈병이나 색병에 걸리면 주위 사람들의 눈총을 줘 고칠 수 있다. 하지만 이름병에 걸리면 여간해서는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이 된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정치인이며 고위 공직자며 사업가들이 사단의 유혹을 받아 불의한 돈과 명예와 권력을 사랑하다가 평생 힘들게 쌓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하루 아침에 잃고 있는가? 그런데 이들은 여러 번의 불운이나 실패를 경험한 것이 아니다. 단 한번으로 영원한 파멸을 경험했다. 그런데도 이러한 것들에 맛에 길들여진 사람은 방자하고 교만하여 사람을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단의 유혹을 받아 재물에 대한 애착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명예욕을 물리치지 않으면 영과 육이 망한다. 이제 우리는 무례하지 말고 이렇게 하자. 스탠튼처럼 링컨을 모욕한 사람은 없다고 포스딕은 말했다. 스탠튼은 링컨을 ‘저급하고 교활한 어릿광대’라고 했다. 또 ‘고릴라의 원종’이란 별명을 붙여주고 듀 샤일류는 ‘바보보다 고릴라를 잡자면 일리노이스주의 스프링필드에 가면 간단 할 텐데 멀리 아프리카까지 갈게 뭐란 말이야’라고 말하기 까지 하였다. 링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스탠튼 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하였다. 그 직임에는 스탠튼이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링컨은 최대의 예절을 다해서 스탠튼을 대우해 주었다. 세월이 흘러 극장에서 암살자의 흉탄에 링컨이 쓰러진 날 밤이 왔다. 그날 밤 대통령의 유해가 안치된 좁은 방에 스탠튼이 서 있었다. 그는 이제 말없이 누워 있는 링컨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여기에 세계 사상 가장 훌륭한 통치자가 누워 있다’고 말했다. 사랑에 의한 인내가 드디어 승리하였던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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