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13(목)

칼럼
Home >  칼럼  >  WAIC 칼럼

실시간뉴스

실시간 WAIC 칼럼 기사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하나님의 손’(창 39: 1~6)
    본문은 요셉이 바로의 신하 보디발 장군의 집에 노예로 팔려간 비참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은 이 비참한 스토리와 연결이 안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절 ‘요셉은 형통한자가 되어’ 상식적으로 어떻게 노예가 형통할 수가 있습니까? 성경은 노예 요셉이 형통한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노예가 형통 할 수 있는 것은 주안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요셉의 형통은 살면서 가장 무너진 곳 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형통한 사람 요셉에게는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었습니다, 상처가 가족 입니다. 요셉은 열 일곱 살 때 형들이 죽이려다 노예로 팔아서 애굽 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가해자가 가족입니다. 살다 보면 내 잘못도, 내 선택도 아닌 불행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원한 것도 아닌데 남에 의해서 내 삶이 처절하게 무너지기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겨야 하나요? 생각하고 분석해 봐도 억울한 것 밖에는 없습니다. 자기를 죽이자고 하면서 음식을 먹고 있는 형들의 소리를 듣고 있던 우물 속, 노예로 거래가 되어 집을 떠나 멀리 이집트로 끌려가는 길, 애굽에 도착해서 보디발 저택의 대문을 처음으로 본 그날, 요셉은 어느 날 갑자기, 일생일대 위기가 정신없이 착착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무엇을 했을까요? 계속해서 여호와를 붙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나와 함께 계셔 주세요, 나를 놓지 마세요, 내가 두렵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형통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시 50:15)” 하나님은 말씀대로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부르는 요셉과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집에 들어갈 때 이미 형통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예였던 요셉에게 이미 총리대신의 자리를 주셨고 요셉은 자기가 받은 복을 일생을 통하여 취하여 마침내 총리대신으로 받은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노예소년 이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는 노예소년 요셉 안에 총리대신이 들어 있었습니다. 시간보다 크신 하나님은 시간의 밖에서 보십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꺼번에 다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재 모습이 구원의 기준에 미달 되는 형편 없는 모습일지라도 하나님은 미래에 구원받은 완전한 나의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십니다. 형통한 요셉은 마침내 우여곡절을 다 겪어내고서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저는 요셉이 하나님을 믿고 성공하고 잘되었다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택하신 소명을 이룬 것입니다. 그 소명을 위하여 총리대신 이라는 자리를 주셨습니다. 요셉은 이것을 알고, 자기가 받은 것을 자신의 소명을 위해서 쓴 것입니다. 요셉은 이미 주신 축복을 받아서 취하였고, 그 자리에서 소명을 이루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절망은 환경이 아닙니다. 소명을 잃어버린 것이 절망입니다. 우리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처참하게 불행한 요셉의 가족으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만드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다면 얼마나 불완전하고 비뚤어진 인생인지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미래를 믿고 소망을 가진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집니다. 흑암 같은 요셉의 잔혹한 가정사에도 하나님을 믿는 한 사람이 있으면 빛나는 영광으로 변화됩니다. 할렐루야!
    • 칼럼
    • WAIC 칼럼
    2020-04-22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하나님의 하신 일’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요11:6). 아직은 젊고 건강하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어느 날 갑자기 병들었습니다. 병은 의원을 찾아갈 틈도 없이, 간호할 틈도 없이 빠르게 악화되었습니다. 목숨이 경각간에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38년 된 불치 병자를 고치시고, 시각 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며, 중풍병자를 고치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생면부지의 사람도 부탁하면 고치시는 예수님께서, 특별한 관계에 있는 두 자매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위해서라면 열 일 다 제쳐 놓고 오실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처럼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함을 들으시고도 그들의 기대처럼 곧바로 오시지 않고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십니다. 그리고는 마치 나사로가 죽는 날을 기다리기라도 하신 것처럼 나사로가 죽은 후에 비로소 베다니를 향하여 떠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육안으로 보기에 모두가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도 나사로처럼 갑자기 병들 수도 있고, 또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는 일도 어그러지고 풍비박산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기도가 즉각 응답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요단 건너편에 머무시는 동안 마르다, 마리아의 집에서는 애타게 예수님을 기다렸지만, 오히려 상태가 더 악화 되어 죽음까지 가게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타나는 현상이 간혹 우리의 기대에 맞지 않는다 해도 신자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 일을 노래하였느니라.”(욥36:24). 신자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우리의 지각을 초월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고전2:9). 마르다 마리아 자매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야곱 생각에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나타날 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신의 뜻대로 안 되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0-04-22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공개된 지성소’(마 27:45~53)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렇게 죽으신 후, 성소에 있던 휘장이 갑자기 위로부터 아래 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누가 힘을 써서 찢기도 어려운 휘장이 갑자기 찢어진 것입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후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고 볼 수 없는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가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 되었습니다.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게 무슨 일일까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은 서로 관계가 있는 사이입니다. 관계없는 사이가 아닙니다. ‘나의 하나님, 나는 그분의 백성“의 관계 입니다. 둘의 관계가 서로의 말을 들어 주는 것으로 유지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관계가 유지됩니다. 백성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준행 하겠다고 했고, 그 언약은 피로 서명을 했습니다.(출 24:7~8) 피는 생명입니다, 이 언약은 생명 걸고 지켜야 하는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는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고 시작했습니다. 그 언약 후에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만나는 장소입니다. 성막 안에 있는 첫째 방 성소를 지나서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면전이라 두려워서 아무도 함부로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잘못하면 죽으니까 아무나 함부로 못들어갑니다,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까다로운 절차가 있었습니다. 온 백성 중에서 대표인 대제사장 한사람 만이 일 년에 한 번씩 들어갑니다. 그것도 피 없이는 안되었습니다. 이 피는 자기 자신과 백성의 죄를 위해서 바치는 것입니다. 그리고서야 통과되었다, 그런데 그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니 지성소가 다 드러나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안전했던 것은 피를 들고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이 피의 정체가 무엇인가? 짐승의 피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짐승 피가 아닙니다. 내 대신 죽은 짐승의 피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가야 하는 데 그 언약서 대로 다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죄와 허물 때문에 하나님 앞으로 못 들어 갑니다. 게다가 생명 걸고 맺은 언약이니 말씀을 못 지키면 죽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내 생명을 다시 살게 하시려고 제단에서 동물의 생명을 나에게 대신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레 17:11) 짐승의 생명을 가지고 가서 내 생명을 다시 받아오는 것입니다. 짐승의 생명이 피입니다. 모든 육신의 생명은 그 피가 생명 입니다, 생명과 피는 동일하게 봅니다. 의학적인 전문지식이 진리 안에 들어있습니다. (레 17:14) 그래서 짐승의 생명인 피를 들고 갑니다. 그러면 안전합니다. 대제사장은 짐승의 피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이 피가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고 들어 가면 안전했던 그 피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서 대로 약속하신 말씀을 다 못 지킬 것을 아시고 이렇게 지시하신 것입니다. 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꼭 짐승의 피여야만 합니까, 다른 것으로는 안됩니까? 생명은 생명으로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 계산이 정확합니다.(출 21:23~25)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하늘의 성소로 짐승의 피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의 피입니다. 하나님은 내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동물의 피가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의 피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피가 십자가에서 땅 위로 떨어질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면서 지성소의 문이 활짝 열려져 버렸습니다. 지성소의 문이 공개되었으니 이제 아무나 절차와 관문 없이 지성소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피를 믿는 자는 누구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0-04-17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부활의 권능’(빌3:10-12)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생명에는 부활의 권능이 있습니다. 부활의 권능은 낙심과 실망, 좌절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권능입니다. 최후 만찬이 끝난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때도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1-35)라고 말합니다. 이렇던 베드로가 서슬 퍼런 대제사장의 관저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맙니다. 자신만만한 그에게 사탄이 들어갔고(눅22:31), 아직 성령을 받기 전이었으므로 주님을 위하여 자신이 한 결심을 이룰 능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베드로는 낙심과 실망, 좌절, 심한 죄책감을 극복하고 일어나 오순절 후에 삼 천 명이나 회개시키는 사도가 됩니다(행2:41). 나중엔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는 순교까지 합니다. 이처럼 부활의 권능은 실망과 좌절에서 일어서게 하며, 주님을 위한 선한 뜻을 이루게 합니다. 부활의 권능은 옛 자아를 깨뜨리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능력입니다. 바울은 회심하기 전 신앙인들을 훼방하고 핍박하고 폭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딤전1:13). 심지어 여인들까지 옥에 가두는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행22:4). 이랬던 그가 예수님을 믿고 부활의 권능을 받은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행15:26). 눈물이 많은 사도가 되었습니다(빌3:18). 이처럼 부활의 권능은 믿기 전과 전혀 다른 새 사람이 되도록 합니다. 이기적인 사람을 이타적인 사람으로 바꾸고, 인색한 사람을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바꿉니다. 탐욕적인 사람을 하나님께 대한 소망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부활의 권세는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수 있는 권세입니다(눅10:19). 뱀과 전갈은 사탄의 두 가지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뱀은 유혹하는 특징이 있습니다(창3:1-6). 전갈은 쏘는 특징이 있습니다. 부활의 권세는 유혹하며 참소하는 자를 물리칠 권세입니다. 사람의 두뇌가 발전한 것처럼 사탄도 발전하였습니다. 옛 뱀이 지금 용이 된 것입니다(계12:9). 온 천하를 꾀는 마귀를 어떻게 분별하며 그들에게 넘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까? 독수리의 두 날개, 기도의 날개로 이길 수 있습니다(계12:14). 온갖 못된 말들로 참소하는 마귀를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찬미와 감사입니다(시8:2). 기도와 하나님을 높이는 찬미는 우리에게 주신 권세를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유혹이 옵니까? 기도하십시오. 여러 가지 상처 주는 말이나, 불안하게 하는 생각들이 파고듭니까? 하나님을 믿고 감사와 찬미를 부르십시오. 감사와 찬미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위하여 일하실 근거이며, 마귀를 질식하게 만듭니다. 부활의 권능은 낙심과 좌절에서 일어나게 하는 권능이며,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이 되게 하는 권능이며, 우리를 유혹하고 참소하는 마귀를 물리치는 권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능력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 권능이 나타나도록 죽으심을 본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0-04-14
  • [WAIC 데일리 기도] 곽수정 전도사의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기도문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우리와 함께하시고 보호하시며 지켜주시고 어떠한 상황 속에도 주님만을 바라보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영적 균형을 잃고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 진리됨을 망각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우리는 죄악성을 알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무지한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음행이 난무하고 사이비 이단이 판치면서 우리의 죄는 갈수록 악행으로 번져가는 이시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멀어졌다면 저희들을 일깨워 주시옵소서. 지금은 죽음의 기로에서서 불안한 마음으로 걱정하는 성숙치 못한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 용서하시고, 코로나19로 인하여 전 세계가 떨고 있는 가운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비눗물로 손 씻고 마스크 쓰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까지 우리를 건강하게 지켜주신 하나님 질병도 주의 손에 있음을 믿으며 기도하오니 바이러스의 확산을 하루속히 종식되게 하시고 감염자들이 속히 회복되게 도와주소서. 질병 치료를 위해 노력하는 기관과 의료진들과 자원봉사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합당한 치료약이 개발되게 하소서. 우리 기독인들은 나라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의 모범이 되게 하소서. 하루속히 본당 예배가 준비되게 하시며 어려운 가운데서도 감사의 조건을 찾게 하옵소서. 살아 역사하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 칼럼
    • WAIC 칼럼
    2020-04-13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나의 십자가, 나의 부활’(롬 6:3~11)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에게 넘겨져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죄에게 저항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죄의 횡포를 다 받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는 죄가 얼마나 참혹한지, 100프로의 악 이 어떤 것인지 보았습니다. 악의 결국은 죽음으로 끝장을 봐야 합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무덤에 장사 되었습니다. 몇몇 여자들이 다음날, 예수님의 무덤에 향품을 가지고 갔는데 무덤 문이 열려있고 예수님의 시체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다들 깜짝 놀랐겠지요, 그날 거기 있었던 여자들의 이름은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입니다.(눅 24;20) 이름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걸 보니 실제 일어났던 일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무덤에서 나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일으키셔서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음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예수님을 묶어 둘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 보다 크신 하나님 이시며 죽음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조건이 있습니다. 원인 발생이 죄입니다. 죄는 댓가를 치러야 하지요, 죄의 댓가는 최고형인 사형 즉 죽음 입니다. 죄가 하나도 없으신 완전하신 하나님은 죽음의 조건을 뛰어 넘으시는 분이십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은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죽음은 마귀가 잡고 있는 악의 세력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죽음을 이기고 죽음의 권세 잡은 마귀를 멸하셨다! 승리는 온 세상에 선포되었습니다. 마귀에게 속한 죽음과 어두움의 모든 영역은 다 파괴 되었습니다, 온 천하만물은 기뻐하고 마귀는 자기 진영이 파괴되어 두려움과 분노로 벌벌 떱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막 3:27)” 예수님은 승리하셔서 마귀를 결박하고 마귀의 진영으로 들어가서 마귀에게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다 빼앗아 왔습니다. 슬픔, 탄식, 괴로움, 고통, 절망, 망하고 멸망하고 죽이고 미워하는 어두움에 속한 모든 것들, 인생사의 모든 괴로움과 고통 들을 강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진영에서 매정하고 잔혹할 정도로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다 빼앗아와서 소멸 시키셨습니다. 이제 다 빼앗기고 결박당한 마귀는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이제 어두움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사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서만 해결됩니다. 이 예수님만 붙잡으면 사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고의 근원지가 마귀의 진영 안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그곳을 다 파괴 시킨 예수님의 부활생명이 아니면 어디에서 해결 할 수가 있겠습니까? 누가 이런 예수님을 죽일 수가 있겠습니까? 감히 하나님을...“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요 10:18)”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사건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정하신 때가 되어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주신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이었습니다. 막을 수 없었던 우연한 참사가 아닙니다.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 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받은 부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의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0-04-08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재앙이라는 포장지에 담긴 축복’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61:3). 얼마 전에 한 자매의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자매의 말이 어떤 일로 마음이 몹시 아파 수양관에 다녀왔는데 그곳에 이름 모를 열매가 꽃처럼 피어있어 화면에 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자매의 친구에게 카톡이 와 열어보았는데 자기가 찍은 사진과 같은 종류를 보내왔다고 합니다. 그 식물 이름은 남천이었습니다. 식물의 뜻을 확인해보니 “전화위복”이라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자매는 지금의 어려움이 복이 되었고, 또 복이 되리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생각하고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전화위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이 전화위복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자신이 승리할 줄 알았지만 오히려 영원한 패배였으며,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형님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지만 그 일로 인하여 요셉은 애굽에 팔려 나가게 되고 그곳에서 총리가 되어 기근 때 그 아버지와 권속들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아하수에르 왕이 총애했던 아말렉인 하만은, 하나님을 섬기는 모르드개에 대한 분풀이로 모르드개와 파사(페르시아)에 사는 유다인은 전멸하려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하만과 아말렉인을 전멸시키도록 하셨습니다. 또 바울과 실라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인의 귀신을 쫓아내고도, 좋은 일 하고도 옥에 갇혔지만 그 일로 인하여 간수와 그 가족들이 구원을 얻는 계기가 되었습니다(행16:16). 성경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1)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재앙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설사 재앙같이, 화같이 보이는 일일지라도 그것은 포장지일 뿐 안에는 축복이 들어 있습니다. 그 축복을 찾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2018년 초겨울에 쓴 글입니다.>
    • 칼럼
    • WAIC 칼럼
    2020-04-06
  • [WAIC 칼럼] 강성률 목사의 ‘사랑의 빚진 자로서의 생활’(삼상30:21-25)
    다윗과 함께한 육백 명이 사울을 피하여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갔을 때입니다. 다윗을 신임한 아기스왕은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우러 갈 때에 다윗과 그의 용사들도 함께 가도록 명하였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블레셋 방백들이 다윗을 의심한 나머지 그들이 동족 이스라엘과 싸우는 일은 비켜갈 수 있었습니다. 다윗 일행이 새벽 일찍 블레셋 군대가 있는 진에서 떠나 사흘 길을 행하여 그들의 거처인 시글락에 갔을 때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말렉 군대에 의하여 그들의 아내와, 자녀, 재산이 모두 없어지고 성읍은 불에 살라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힘입어 용기를 얻은 그들은 침략군 아말렉을 뒤쫓아 처자식과 그들의 재물은 물론 덤으로 아말렉의 우양까지 빼앗아 옵니다. 그들이 사로잡힌 아내와 자녀들을 되찾기 위하여 아말렉과 싸우러 갈 때에 용사 600명 가운데 200명은 피곤하여 브솔시내를 건너지 못하였고 단지 400명으로 싸웠습니다. 승리하여 돌아올 때 어떤 악한 자와 야비한 자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 사람의 처자만 주어서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22절). 그러자 다윗은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를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일반일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23-24)라고 하며 함께 싸우러 가지 못한 사람들의 몫까지 똑같이 나누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여호와께서 보호하셨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손에 붙이셨고, 여호와께서 주셨다.’는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김의 주체가 다윗과 400용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자신들의 공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되찾았으니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말고 연약한 자의 몫까지 담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분배방식은 그 후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롬15:1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강한 자는 연약한 자의 약점까지 담당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것은 없습니다. 건강도, 재물도, 재능도 모두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고전4:7). 심지어 성령까지 선물로 받았습니다. 값을 지불한 것이 아니라 무료로 받았습니다. 이젠 사랑의 빚진 자로서 하나님께 보답하는 마음으로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까지 담당해야 합니다. 은혜는 착한 일을 하도록 주시며, 또한 착한 일을 할 때 더욱 넘쳐납니다(고후9:8).
    • 칼럼
    • WAIC 칼럼
    2020-04-03
  • [WAIC 칼럼] 이영은 목사의 ‘하나님 나라’(신1;26~35)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해내셨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을 지나 광야로 들어갑니다. 크고 두려운 광야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왜 애굽에서 구원하셨을까요? 그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지니라” (신 1:8) 구원은 어쩌다 보니 우연히 받은 게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는 구원입니다. ‘가나안으로 가라’ 그런데 가나안이 어디입니까? 가나안은 이 땅에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왕은 하나님입니다. 나라는 왕의 통치를 받으면서 세워집니다. 왕은 자기의 백성을 자기의 나라로 보내시기 위해서 구원 하셨습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습니다. “우리는 못가겠다”라면서 그 앞에서 주저앉아 버린 것입니다. 아니,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한 땅을 목적으로 여기까지 오지 않았느냐? 그런데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그 땅에 못 올라가겠다니... 기가 막힌 일이지요, 그럼 왜 여기까지 온 것입니까? 내가 어디를 향해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지 목적을 모르니 가나안에 못 들어가겠다는 말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 생각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그 속에 계속 있었던 것입니다. 어차피 일어나야 할 일인데, 정탐꾼 사건 에 부딪치면서 드러난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정탐꾼을 보내자고 제안했었습니다. 일을 실행하기 전에 충분히 사전 조사를 하고 계획을 세워 더 효율적으로 하면 좋겠지요. 각 지파별로 대표 12명을 뽑아서 정탐하러 보냅니다. 정탐꾼들은 눈으로 본대로, 아주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신 1:28) 세상은 너무 크고 강대한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들을 이기고 가나안에 들어 갈 수 있을까? 할 수 없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려고 목적을 가지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일이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 들어갈 수 있고,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누구의 말을 선택할 것인가? 정탐꾼의 말인가, 모세의 말인가? 세상의 말인가? 진리인가? 결국 그들은 정탐꾼의 말을 선택했습니다. 그 안에 진리가 없으니 모세의 말은 안 들리고 정탐꾼들의 말이 꽂혀서 공감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틀린 것 같고 세상이 하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결국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진리를 외치고 부르짖다가 마지막 내린 모세의 결론은 ‘이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신 1:32) 가나안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의 통치를 받고 그분과 함께 사는 곳, 그런데 거기로 건너가는 것이 그렇게도 힘이 듭니다. 여기서 가나안으로 못 들어가는 자들이 영원한 그 나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단순한 원칙이 있습니다. 왕의 통치를 받아서 왕과 함께 가면 잘되고 그 반대 길로 내 맘 대로 가면 망합니다. 오늘 선택한 불순종과 불신앙의 삶은 처절한 결과로 받습니다.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 칼럼
    • WAIC 칼럼
    2020-03-31
  • [WAIC 데일리 기도] 이봉선 목사의 ‘코로나19 극복 위한 기도’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긍휼의 하나님,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의 은총을 구합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중국과 아시아를 넘어 유럽과 미국 등으로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확산하면서 금융시장마저 붕괴되고 있는 위기 상황입니다. 세계 각국이 앞다퉈 문을 걸어 잠금에 따라 세계 경제가 더욱 위축되어 우리나라 경제도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합당한 긍휼의 심정으로 간구하오니 주님께서 일하셔서 ‘코로나19’가 하루속히 종식되고 치유되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이 땅의 고통 받는 영혼들, 죽어가는 영혼들, 공황상태에 빠져있는 영혼들이 절망에서 소망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오늘 교회가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경험하는 혹독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심을 믿습니다. ‘코로나19’에 위축되어 불안해 하는 걸 보시면서 안타까워하고 계시는 하나님, 성전에 나와 마음껏 예배하기를 기다리고 계시지만 이보다 더 아픈 것은 예배가 유린되고 성전이 굳게 문을 닫고 신앙이 정죄 받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지 않게 하시고 공동체가 모여 마음껏 예배드리는 날이 속히 올 수 있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코로나19’로 인해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한 상황이지만 바이러스 앞에 결코 좌절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게 하시고, 강하고 담대하게 하시고, 주님과 함께 이 재난을 넉넉히 이기게 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바이러스를 제어할 강력한 백신과 치료약이 기적같이 개발되어, 모든 이들을 자유롭게 해 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게 하옵소서.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여 모든 재난을 축복으로 바꾸어 주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칼럼
    • WAIC 칼럼
    2020-03-3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