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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신재)목련꽃
    목련꽃 임 원 재바스락바스락책갈피 속에서엘리어트의 4월이알몸으로 일어서는패러독스차라리비릿한 살냄새 역겨워속옷까지 벗어던진동토의 지심 외발로 서서그날의 그리움에환호하는비로소개벽하는 날속살 들어낸순백의 꽃잎으로볼 비비며사랑으로 부활하라.“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막 11:15-18).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안은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우리 안이 더러우면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하고 그 안에 사랑이 흘러넘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십시오.주여! 내 안이 더러웠사오나 주님이 깨끗하게 하셨사오니, 이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하여 주소서. 사랑의 꽃이 피게 하소서. 성령이 함께 하셔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소서. 주님의 생명수로 사랑이 풍성하게 자라도록 하소서. 의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 칼럼
    • 기독시선
    2015-12-30
  • 임현수 목사의 석방을 위한 기도
    임현수 목사가 평양 당국에 의해 구금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반공화국특대형 범죄행위“라는 죄명과 함께 종신 노동형을 선고받았다. 필자가 아는 임현수 목사는 선교에 남다른 열정을 가진 분이셨다. 임 목사는 CCC 라는 선교기관에 간사님으로서 함께 활동하셨고, 필자도 공부를 했던 CCC의 교육 기관인 국제신학대학원(International School of Theology)을 마치고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캐나다에 가셔서 교회사역을 하였다.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것은 방학 때만 되면 캐나다에서 학생들을 대리고 단기선교차 필리핀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남북이 해빙 무드로 돌아선 이후부터는 북한을 주요 선교지로 택함과 함께 식량과 필수품 그리고 선교비를 들고 북한 자주 드나든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쩌면 남한의 교회들이 우선순위로 해야 할 동포 선교를 임 목사님이 앞장서서 감당했다고 본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 목사는 북한의 암울한 감옥 에서 사투를 벌리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국내의 각종 언론에서 임현수 목사에 대해 보도된 내용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캐나다 정부에서는 앞서 북한이 지난 16일 10개월째 억류한 임 목사에게 국가전복음모죄를 씌워 종신노역형을 선고한 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를 비롯한 정부 관계자들이 연달아 우려의 뜻을 밝혔다. 이러한 캐나다의 생각에 대해서 북한은 12월 22일 임현수 목사에 대한 북한 최고재판소의 종신노역형 판결을 캐나다 정부가 비판한 데 대해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고 반발했다고 한다. 또 “조사 과정에서는 영사 접촉을 불허했지만 조사 사업이 끝난 다음 특례적으로 캐나다 대표단을 초청해 재판에 방청으로 참가시키고 영사 접촉도 실현시켜줬다”며 “캐나다 정부는 이에 대해 걸고들 아무런 법률적 명분도 없다”고 주장했다.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이날 조선중앙통신사 기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자기 공민이 저지른 악랄한 범죄행위로 우리 앞에 죄를 진 처지에 놓여 있는 캐나다 정부가 거꾸로 우리의 정정당당한 사법조치를 놓고 ‘우려’요 ‘국제법 위반’이요 하면서 시비질해 나서는데 경악을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북한 대변인은 “반공화국특대형 범죄행위에 대해 사죄하고 재발방지 조치를 취해야 할 캐나다 정부가 오히려 비호두둔하면서 도적이 매를 드는 격으로 우리에게 삿대질하는데 대해 절대 묵과할 수 없다”며 “캐나다 측의 부당하고 무례한 처사는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 뿐”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한국계 캐나다인 임현수 목사에게 종신 노역형을 선고한 것은 2년 전 미주 기도성회 등에서 있은 북한 정권에 대한 비판 때문인 것으로 확인됐다. 북한의 대외 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는 최근 임현수 목사에 대한 재판 동영상을 공개하면서 4분 분량의 임 목사의 선교집회 강의 영상을 증거자료로 제시했다고 한다. 임 목사는 이 동영상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권력 장악을 못해 극악한 공포 정치를 하고 있다며 김정은 정권의 붕괴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미국의 소리 방송은 오늘 이 동영상은 임 목사가 지난 2013년 10월 세계선교동역네트워크의 미주 기도성회에서 한 강의 장면이라고 보도했다. 이 동영상은 주최 측 관계자의 부주의로 유튜브에 올려졌다가 임 목사 억류 보도가 나간 뒤 삭제됐다고 한다. 미국의 소리 방송은 “이 강의 내용과 유튜브에 오른 또 다른 교회 강의 동영상을 문제 삼아 북한이 지난 1월 말 방문한 임 목사를 구금했다”고 한다.선교는 정치적인 경계를 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경계를 넘을 때에 수 없이 많은 박해가 있었다. 초대교회 때에는 로마의 정치 제도 아래서 예수님을 믿고 포교 한다는 죄목으로 사자밥이 되기도 하고, 검투사의 칼날아래 목이 잘리기도 하고, 카타콤 속에서 삶을 마감하기도 했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사도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선교의 지향점을 고백했다.엘리뇨의 현상으로 지구 전체가 추운 겨울이 없어졌다고들 한다. 사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북한에 억류 중인 임현수 목사의 겨울은 이곳처럼 따뜻한 곳이 아니다. 성탄과 함께 임현수 목사도 석방되어 함께 새봄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5-12-30
  • 목걸이에 걸린 행복 혹은 진실- 모파상의 다시 읽기
    한 해를 마감하며, 모파상의 단편 <목걸이>를 떠올리게 한 것은 중국 작가 노신(魯迅)의 어록 때문. “사람들은 잊을 수 있기 때문에 점차 받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 그렇기 때문에 영락없이 선인들의 과오를 그대로 되풀이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각자가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기록해두어야 한다는 것이 노신의 생각. 그러나 정작 우리의 현실은 손쉽게 그런 기록을 남길 수도 없거니와 남겨진 것도 탐탁스럽지가 않다. “꿩 대신 닭”이라 했던가, <목걸이>가 그러한 아쉬움을 채워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평범한 공무원의 가정에 태어나서 비슷한 처지의 남편을 만난 여주인공은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나날을 보낸다. 어느 날, 남편이 근무하고 있는 교육부의 장관이 베푸는 야회초청장을 받은 것이 비극의 사단이 되는데... ‘스스로 매력적인 미인이라 여기고 있는 그녀에게는 남달리 보석을 좋아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야회에 입고 갈 드레스도 장식품도 없었다. 드레스는 남편이 꿍쳐 두었던 돈으로 마련할 수 있었으나 정작 그 드레스에 어울릴만한 보석이 문제였다. 마침 그녀가 수도원 시절에 함께였던 부자 친구에게서 목걸이를 빌릴 수 있어서 무도회에 데뷔할 수 있게 된 그녀는 많은 시선을 모으는 스타가 되어 멋진 밤을 보낼 수 있게 된다. 파티가 파하자, 멋지게 차려 입은 부인들을 의식해서 시간차를 두고 초라한 마차로 아파트로 돌아온다. 좁은 계단을 올라 옷을 갈아입으려는 참에야 목걸이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는데. 어쩔 수 없이 고급 보석상에서 비슷한 물건을 구해서 친구에게 돌려주기는 했지만, 그 가격은 무려 4만 프랑이나 되었다. 시아버지가 남겨준 유산을 팔아 대금의 일부를 지불하지만, 나머지는 빚이 되어 부부의 생활을 압박했다. 원금과 이자를 갚는데 꼬박 10년이 걸렸고. 어느 일요일, 우연히 목걸이를 빌려주었던 부자 친구를 만난다. ‘안녕, 잔느’ 그녀의 인사에 상대방은 옛 친구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렇게 자신의 모습이 변해있었던 것이다. ‘나 마틸다 르아젤이야.’ 그제야 알아보는 친구에게 주인공은 지난 날의 일을 고백한다. ‘그러니까 너는 대신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주었단 말이지?’ ‘그래, 너는 눈치 채지 못했지? 똑같은 것이었거든.’ 그녀는 용케도 친구의 눈을 속일 수 있었던 것을 우쭐해 하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놀란 포레스트에 부인이 친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불쌍하게도 마틸다! 내 것은 가짜였어. 기껏 5백 프랑 짜리였는데...’ 작가 모파상은 이야기의 여러 곳에 많은 암시를 숨겨놓고 있다. 주인공의 남편을 하필이면 교육부의 직원으로 설정한 것도 그렇지만, 아름답게 태어난 여인은 그 매력으로 해서 우아한 생활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암시에 더해, 이에 이르지 못할 경우 그 분함과 허영심이 엉켜서 사물을 판단할 이성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암시들을 삽입한다. 부자 친구라 할지라도, 4만 프랑이나 값이 나가는 목걸이를 선듯 빌려 줄 수는 없을 것이란 당연한 판단도, 목걸이를 돌려주었을 때 제 물건이 맞는지를 확인하지 도 않는 부자친구의 몸짓은 혹시나 해볼 기회였을 터이지만, 그녀의 이성은 그럴 수가 없을 정도로 뒤틀려 있었던 것이다. “야회복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고, 보석 따위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자신은 그런 것들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것만 가진다면, 얼마든지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고, 혹하게 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터인데.”하는 것이 오로지 주인공의 생각이었다.우리에게는 <목걸이>로 알려지고 있는 이 작품의 원제는 <La parure>. “장식”, 액세서리 일반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작자는 왜 제목을 “목걸이(Un collier)”대신 “장식(parure)”으로 했을까. parure 원래의 의미 “장식”을 암시하려한 것은 아닐까. “장식”이란 “진실의 모습”을 감추는 짓거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을. 오늘 우리의 목에 걸고 있는 “정의” “평등”을 표방하는 목걸이들은 그 가치를 변질시키는 장식이 가리고 있어 더 찬란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인공은 목걸이를 가지게 되어, 자신의 몸을 꾸미게 되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성공에 취한다. “그러나...”하는 작가의 경고는 우리가 눈여겨 읽어야할 기록이 될 수도 있으리라. 라 루슈코프의 잠언을 되씹어 본다. “행복해지는 것은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남에게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12-30
  • 성도의 세상 보기와 살기
    3세기 라틴 교부의 한 사람인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T.C. Cyprianus)는 도나투스 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도나투스, 이 세상은 포도나무 그늘 아래의 나의 정원에서 본 것과 같은 아름다운 세상이지요. 그러나 만약 당신이 나와 같이 높은 산에 올라 거친 대지를 바라본다면 당신은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요. 노상강도, 바다의 해적, 군대의 싸움, 도시의 현란하고 방탕함, 원형 경기장에서 환호하는 관중을 기쁘게 하기 위해 벌어지고 있는 죽음의 결투, 자기 본위의 이기심, 잔인성, 화려한 지붕 아래 있는 고통과 절망 들... 도나투스, 이 세상은 악이요,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악한 곳이요’ 그렇다. 실로 키프리아누스의 말처럼 인간의 소욕대로 이 세상은 얻을 것 많고, 갖고 싶은 것 많은 아름다운 세상이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 안에서 말씀의 높은 산에 올라 세상을 바라본다면 세상은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악한 세상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경계해야 할 세상은 어떤 곳인가? 세상의 본질을 보자. 우리는 세상을 두 가지 방향에서 볼 수 있다. 첫째,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창조된 선한 창조물이며 우리들로 하여금 누리도록 선물로 주셨다는 것이다. 둘째, 세상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들의 다스림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반역하고 대항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늘 이 두 관점을 적절히 적용하며 살아야 한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것에 관점을 두고 살아간다면 장미빛 에덴동산의 환상에 싸여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달려드는 마귀와 세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핍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두 번째 관점만 가진다면 늘 극단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악하다고 늘 불평하며 적대적인 태도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교회 밖의 모든 것 예컨대 하나님께서 인류 복지를 위해 일반 은총으로 주신 권력, 돈, 지식, 성 등은 다 부정하고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하자고 말하면 곧 세상 지식을 앞세운다고 비난하며 세상의 통치자들은 모두 사단의 하수인이라고 말 한다. 상품이나 증권이 거래되는 시장도 도둑의 소굴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곳에 가까이 해서도 안되고 또 그러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 한다. 이에 세상과 평안히 지낼 수 있는 문제들에서도 괜한 충돌을 일으키게 되며 세상에서 스스로 소외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럼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누구의 시각으로 볼 것인가? 세상을 보는 시각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나’의 시각이요. 다음은 ‘사람들’ 의 시각이며 마지막은 ‘하나님’의 시각이다. ‘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어떤 상항에서도 내게 이로운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첫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의 시각을 가진 이들은 사물이나 사건을 볼 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먼저 고민 한다.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사람들이 본다면 뭐라고 할까? 이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좋아 보일까? 이렇듯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주로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행동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의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도와 반응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대다수 사람들이 원하는 일이거나 혹 힘을 가진 사람들이 강압적으로 요구한다 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절대로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시각으로 살려면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할까? 필자는 두 가지 기준을 제시 한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악에 대해 그 기준이 달라야한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눈을 기준으로 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눈을 기준으로 살아가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악한 일을 해도 사람의 눈에만 드러나지 않으면 된다고 하여 마음대로 행동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매사에 조심하고 거룩하게 살아야한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은 선행에 대해서도 그 기준이 달라야한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눈을 기준으로 하기에 사람들이 알아주는 한도에서만 선행을 하려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기에 어디서든 은밀하게 선행을 해야 한다. 고로 세상 사람들처럼 옅은 눈을 기준으로 일희일비 하는 얄팍한 삶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한다. 소극적으로는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말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처럼 세상을 품고 살아야 할 것이다. 곧 죄악 된 세상을 미워하면서도 주 안에서 그런 세상을 사랑할 수 있어야한다.
    • 칼럼
    • 목회자
    2015-12-30
  • (정신재)금일봉
    금일봉 오 운 교아련하게 떠오르는 시골 운동회본부석 텐트 앞자락 긴 끈 밑으로주렁주렁 매달려 꼬리 흔들던 찬조금동네 잔치 마당 선지국밥 대금이었을까주민 한마음 어울려 포식하던 날이었다.종종 봉투 금액으로 갈등하는 일상입이 쩍 벌어질 액수 건네주고 싶지만분수 지키려면 가늠하기 만만치 않아서순간순간 갈피 못 잡고 고민하기 일쑤다.드러내기 좋아하는 유력 인사들선한 기부금 명목 호명만 요란하며금액란을 호방하게 밝히지 못하는 속셈순수한 사랑만은 균형 감각 잃지 않았으면.“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사랑은 주님이 피 흘려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온 인류를 품에 안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회복하였으며, 영생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인이라 평가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몸소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부활의 길을 열어 주었고,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셔서 우리는 의로운 행동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게 처신할 수가 있습니다. 천국을 소망하며 절제하는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떠한 역경도 주님이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리라는 믿음으로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가 있습니다. 주님을 찬양하며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심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님의 순수한 사랑을 본받지 못하고 사랑을 변질시키는 이들이 있습니다. 정치적인 야심 때문에 기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남에게 내세우기 위하여 사랑하는 척 흉내를 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시인은 시골 운동회에서 이와 같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선한 기부금 명목 호명만 요란”합니다. 그들은 “금액란을 호방하게 밝히지 못하는 속셈”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민이 하나 되는 “동네 잔치 마당”이 퇴색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사랑이 그 본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요. 주님이 주신 우리들의 순수한 사랑이 회복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 칼럼
    • 기독시선
    2015-12-19
  • 선교사의 선한 싸움
    2015년 12월이 되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삶의 결산을 생각하는 것은 늙어 가는 아이 탓이기도 하다. 1년을 돌아보면서 주님의 제자로서 얼마나 선한 싸움을 싸웠는가 생각해 볼 때에 그저 함량 미달의 삶을 살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럴 때 일수록 모범된 선교사의 길을 걸었던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 그리워진다. 디모데 전서 1장 12절부터 18절을 살펴보면 바울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사도 바울은 자신의 제자인 디모데 에게 자신이 간직한 복음이 얼마나 위대하며, 선한 것이며, 또 죄인의 괴수 이지만 주님의 은혜로 직분을 받아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며, 은혜 가운데에서 직분을 감당하고 있음을 말하면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믿음위에 굳게 서서 이단의 침략 속에서 자신을 기기라 라고 말하고 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의 직분을 맡겨 주셨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을 때에 자신에게 은혜의 직분을 맡겨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 9:15절에 의하면,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 이라”라고 바울이 무슨 직분을 가지고 평생에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바울 자신은 이와 같은 은혜의 직분을 받는데 합당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써 그에게 직분을 감당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8:3에 의하면,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였다. 그러나 변화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었다고 고백한 모습을 보게 된다. 이는 비단 바울에게만 주는 은혜가 아니다 인류 모두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다. 예수님의 탄생의 목적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마태복음 1:21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인류는 구원을 받아야 한다. 타락한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의한 구원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인내로써 나타나는바, 하나님의 인내가 우리를 덮은 것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13:39절에는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 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이것 이니라”라고 말씀 하시고 있다. 최근 서방 세계의 재앙이라고 할 수 있는 IS의 준동이 이제 서서히 우리의 목도 조여오고 있음을 감지한다. 비록 무자비하고 잔악한 IS대원일지라도 복음이 필요하다. 복음만 들어가면 그들도 사도 바울처럼 사울이 바울이 될 수 있다. 그 만큼 그리스도의 은혜는 강력한 능력이 있다. 이제 선교사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는 선한 양심으로 악을 이겨야 하겠다. 선한 양심은 때로는 손해도 보고, 때로는 핍박을 받기도 한다. 우리가 약해질 때면, 사탄은 우리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밀 까불 듯이 까불기도 한다. 이때에 우리의 신앙이 매우 낙심되기 쉽다. 정말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싸움을 싸워야 한다. 믿음은 가장 강한 하나님의 무기 이다.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어떤 일 을 할 만큼 그러한 능력 있는 자도 아니며, 자격도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의 직분을 주셔서 감당하게 하셨다. 따라서 충성스럽게 주어진 직분을 감당하여 복된 신앙생활을 하므로 축복을 듬뿍 받는 선교사들이 되어야 하겠다.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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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5-12-19
  • 회의주의의 효능
    “반대할 주장을 지니지 않는 주장은 존재하지 않는다.”위에 소개한 어록은 몽테뉴가 그의 <수상록> 2권 15장에서 인용하고 있는 피론의 말이란다. 몽테뉴는 “‘쾌락이란 순간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쾌락도 진정으로 즐거운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의견에 대해서 ‘아니다. 순간적인 것이기 때문에 쾌락은 즐거운 것이다.’”하는 반대 의견도 성립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기 위해서 위의 말을 인용했다. 피론의 제자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어떤 판단에도 과오가 끼어들 가능성이 있기 마련이고, 그 과오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하나,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것이 스승 피론의 주장이요 가르침이었다는 것. 당사자 피론은 기원전 334년 봄, 알렉산더가 4만의 군사를 이끌고 헤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넜을 때 동행했다는 3명의 철학자 중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알렉산더가 원정을 나서면서 장병과 더불어 철학자를 동행했다는 일화는 두고두고 화제가 되고 있지만, 대왕의 조카벌이 되는 칼리스테네스는 원정도중 바크토리아(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근처)에서 살해되었고 아나크사르코스는 귀국 도중 키프로스 섬에서 참살되었다. 오직 피론만이 종군11년의 노고 끝에 겨우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전해주는 기록을 따르면, 피론의 철학은 알렉산더가 그리스에 공헌한 가장 큰 선물이었다고 한다. 피론이 자신의 철학에 인도의 사상을 섞어서 그리스에 가지고 온 것을 두고 하는 말이고 보면 무척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피론은 다크시라 거리에서 자이나 사원의 승려와 사귀는가 하면, 바라문 승려들과 대화하면서, 자이나교, 불교, 힌두교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신과 같이 마음을 고요하게 지님으로, 마음의 동요를 지켜야 한다”는 피론의 사상은 인도철학에서 배워온 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철학은 인도철학과 그리스철학의 융합이었던 셈이다. 피론의 사고를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사물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를 파악해야하고 “우리는 그 사물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그 관계가 우리에게 어떤 이익을 주고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야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피론은, “우리는 사물의 성질을 알 수 없다”고도 말한다. 우리는 사물을 우리의 지각을 통해서 알게 되는 만큼,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고, 사물이 지각되는 양상에 따라서 달라지게 마련“이란 것이다. 요컨대 피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은 이렇다!”하고 가볍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생각으로는 이렇게...” 이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우리와 사물과의 관계는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는가.”라는 명제에 대해서 피론은 “사물과의 관계를 인정하면 사물에 대한 불필요한 집착이 해소되고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으면 “격정”에 휘말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 그의 가르침의 중심인 것이다. 피론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왜 없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생각을 “회의주의”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사물을 너무 성급하게 “이렇다!”하거나 “저렇다!”하고 판단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신의 판단을 절대적으로 바르다고 주장하며 양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피론의 가르침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우리의 머리를 식혀서, 스스로를 사로잡고 있는 격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려면, 피론의 교훈이 더없이 요긴하리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반대의 논리를 가지지 않는 논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어떤 논리도 바르지 않단 말인가? 하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말함으로써 우리는 오히려 피론의 손에 말려들어가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피론을 반대함으로 피론의 말에 찬성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버트란트 러셀이 말했다. “열정을 지닌 의견을 품게 되는 것은 언제나 그 의견에 그럴듯한 근거가 없을 때이다. 실제로 열정이란 그 사람이 품고 있는 의견에는 합리적인 확신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척도일 뿐이다.”그렇게 말한 러셀은 피론의 회의론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무엇보다도 광신을 방지하는 약이 될 수 있는 말이라고도 했다. enoin34@naver.com
    • 칼럼
    2015-12-19
  • 크리스마스 이브 날 밤의 평화
    북아일랜드는 개신교와 가톨릭교도 사이에 길고 지루한 분쟁이 컸던 곳으로 정평이 난 곳이다. 수십 년의 분쟁 속에 2,500여명의 사람이 희생되기도 했다. 얼마나 싸웠는지 이런 말이 속담처럼 생겨났을 정도다. ‘아일랜드에는 개신교도도 많고 천주교도도 많지만 크리스천은 없다’ 그런데 이곳에 하나님의 은혜로 작은 변화가 일어나 큰 파장을 몰고 온 일이 있었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 이브 밤. 시드니 칼라한(Sydney Callaghan)은 감리교 목사였다. 벨파스트에 위치한 그가 시무하는 교회에서는 새벽송을 준비해 가톨릭 신자들이 모여 사는 빈민촌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것을 안 경찰 당국이 즉각 말렸다.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칼라한 목사님은 단호했다. 성가대원들이 빈민촌에 들어가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자 놀라운 반응이 일어났다. 한 집 두 집 불이 켜지면서 함께 나와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때 칼라한 목사님은 이런 말을 남겼다. ‘얼굴을 가진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그들은 왜 위험한 지역에서 기쁨으로 크리스마스의 캐롤을 불렀을까? 이는 주께서 성도들에게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롬12:18) 권했기 때문이다. 고로 성도들에게는 세상을 화평케 할 사명이 있다. 그런데도 현대 교회와 성도들, 목회자와 장로, 성도들이 이권으로 서로 다투고 심지어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처럼 세상 법정에 송사해 교인들이 상처를 입고 오히려 교회의 권위와 하나님의 영광에 누가 되고 있다. 이 같은 교회의 분열이나 분쟁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주님의 몸을 나누는 일로서 실로 용서할 수 없는 엄청난 죄악이다. 분쟁과 다툼으로 나뉘고 갈라지는 것이야 말로 육체의 일이요, 사단의 역사이기 때문이다(갈 5:20). 화평하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장벽을 제거해 하나 되게 하고 화평케 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분은 이를 위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주로 어떤 장벽을 세우는 행위는 주님의 사역을 무위로 돌리고 모독하는 처사다. 만일 우리가 진정 주께 속한 자라면 이를 기준으로 또 새로운 문을 만들어 벽을 쌓고 분리하는 행동을 삼가야 한다. 대신 주께서 자신의 몸을 드려 땅의 모든 벽을 허물고 하늘과 땅의 장막을 폐하셨듯이(마 27:51) 우리도 이 같은 큰 모습으로 우리가 만든 모든 문과 장벽을 허물어 나뉘고 분리되었던 형제들을 하나로 만드는 화평케 자들이 되어야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관용의 마음을 갖고 원수를 사랑해야한다. 세상을 살다 보면 하루에도 수차례씩 이웃의 잘못을 접하게 되고 또 대적하는 사람들을 교회와 직장에서 만날 수도 있다. 그때에 우리는 믿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절제해 그들의 실수나 대적에 대해 비난하거나 대적하지 말고 그 사람의 자리에서 이해하고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며 품어 주어야한다. 만일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주께는 말씀을 불순종한 성도가 되고 또 그들과는 평생의 원수가 되어 올무가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접할 수 없어 영혼이 병들어 가기 때문이다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까?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처럼 사랑해야한다. 그분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범인이 사형에 해당 하는 시점에 이르러 원수의 구명을 탄원해 수사관들을 감복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 범인을 사형에서 구해내 준 뒤 곧 바로 자신의 양아들로 입적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것이 바로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고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다.우리는 그동안 남들과 마찬가지로 나 자신만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만을 사랑하고 살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대적하는 자, 원수 같은 자,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들을 외면하지 않았을까? 이제 금번 성탄절을 맞아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이제라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떠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지 기억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해 보자. 그러면 화평케 하는 자를 축복하시는(시 34:12~14, 마5:9)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마음에 진정한 희락을 얻고(잠 12:20) 만사가 형통하게 되며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고전 4:5).
    • 칼럼
    • 목회자
    2015-12-19
  • 사이비 종말론 자들
    실로 이 시대는 말세의 끝자락에 와 있다. 교계의 저명한 인사들이 지금 시대를 가리켜 ‘말세지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세상의 종말이 어느 정도 다가왔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주님이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마 24:3~14)를 통해 그 날에 상당히 근접해 있다는 것만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현 세상이 종말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세상의 종말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주님의 초림으로부터 이 세상의 종말은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세상의 종말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결정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고로 당장 세상의 종말이 오지 않는다고 조급한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세상의 종말은 우리의 생애 중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따라 지금 세상이 종말을 향하여 진행되고 있음을 확신하고 종말을 늘 준비하며 경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종말의식이 팽배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적그리스도 즉 이단의 미혹을 받고 실족하기 때문이다. 사이비 종말론자들 즉 이단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어떻게 미혹하였는지 살펴보자. 어떤 이들은 신은 하나님 한 분이 아니라 부처, 알라 등 여럿이 있을 수 있으며 따라서 구원의 길은 그리스도 외에도 여럿 있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에 입각한 다원주의 신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21세기의 첨단 사상이라는 포스트 모너니즘을 표방하며 스스로를 종교의 벽을 헐고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선구자로 자처 한다. 처음에는 종교 간의 대화를 주장하다가 점차 그리스도 없이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다 급기야 ‘예수는 없다’고 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는 기독교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 어두운 시대는 지나가고 모든 종교를 통해 구원을 얻는 광명의 시대가 열렸다 등의 헛소리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자들이 아닐 수 없다. 예수가 없다는 말은 곧 창조주도 없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 왔다는 말일까? 혹 진화론을 따라 단세포에서 왔거나 기껏해야 원숭이로부터 왔다는 말일까? 아니면 만물은 무시무종이니 전생으로부터 윤해했다는 말일까? 참 안타깝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단자들의 소리를 경청하지 말아야한다. 그리스도는 만유의 창조주이시자 만유의 중심이기 때문이다(롬11:36). 어떤 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하나님 자신으로 인정을 하지 않고 ‘한 인간’이라고 주장 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신성만을 인정을 한다. 심지어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제자들이 조작한 설화라고 주장한다. 즉 이들 이단들은 모두 성경을 보지 않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자들은 언제나 성경에 없는 말을 갖다 붙인다. 성경은 거듭 주님의 재림의 때는 알 수 없다하는데(행1:7) 이 말씀을 가감하여 주님의 재림의 때도 구체적인 날짜나 장소 등을 언급하는 것이다. 이에 귀가 얇은 성도들은 쉽게 속아 넘어 간다. 대표적인 예가 1992년 10월 28일 이장림 사건이다. 이처럼 교회와 성도들이 사이비 종말론에 집착하게 되면 신비주의나 맹목적인 광신에 빠지거나 아니면 시한부 종말론에 빠지기 쉽다. 그 결과 현재의 삶을 등한시 한 채 환상과 망상에 사로잡혀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 한 걸음 더나가 이단들은 한술 더 뜨고 나선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직접 말씀하셨다한다.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가 아닌 영적인 비밀의 말씀을 강조하기도하고 기도 중에 음성이나 환상으로 보여주셨다고 하면서 각종 거짓 이적을 보이면서까지 성도들을 거짓 교훈으로 이끌곤 한다. 그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종교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는다. 즉 종교를 마치 시장의 상품처럼 거래의 대상을 삼는다. 또 어떤 자들은 주의 재림이 가까웠으니 재산이 필요 없으므로 모두 바치라고 하면서 자기는 그 돈으로 엄청난 부동산을 사들이기도 한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교회 안에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가끔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마치 중세시대 당시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팔았던 것처럼 성경 말라기의 말씀을 교묘하게 인용하며 바친 십일조와 축복의 양이 비례한다며 십일조를 강요하는 것 등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복채나 굿 값에 따라 영험이 달려진다고 말하는 점쟁이나 무당의 행위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으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서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마10:8). 고로 성도들은 이러한 사이비 종말론 자들의 거짓 교훈과 미혹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마7:15~23). 따라서 모든 성도는 각자 받은 은혜와 믿음을 잃지 않도록 늘 깨여 있어야 한다.
    • 칼럼
    • 목회자
    2015-12-11
  • 회의주의의 효능
    "반대할 주장을 지니지 않는 주장은 존재하지 않는다.”위에 소개한 어록은 몽테뉴가 그의 <수상록> 2권 15장에서 인용하고 있는 피론의 말이다. 몽테뉴는 “‘쾌락이란 순간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쾌락도 진정으로 즐거운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의견에 대해서 ‘아니다. 순간적인 것이기 때문에 쾌락은 즐거운 것이다.’”하는 반대 의견도 성립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기 위해서 위의 말을 인용했다는 것. 피론의 제자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어떤 판단에도 과오가 끼어들 가능성이 있기 마련이고, 그 과오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하나,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것이 스승 피론의 주장이요 가르침이었다는 것. 당사자 피론은 기원전 334년 봄, 알렉산더가 4만의 군사를 이끌고 헤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넜을 때 동행했다는 3철학자 중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알렉산더가 원정을 나서면서 장병과 더불어 철학자를 동행했다는 일화는 두고두고 화제가 되고 있지만, 대왕의 족하벌이 되는 칼리스테네스는 원정도중 바크토리아(오늘날의 아프가니스턴 근처)에서 살해되었고 아나크사르코스는 귀국 도중 키프로스 섬에서 참살되었다. 오직 피론만이 종군11년의 노고 끝에 겨우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전해주는 기록을 따르면, 피론의 철학은 알렉산더가 그리스에 공헌한 가장 큰 선물이었다고 한다. 피론이 자신의 철학에 인도의 사상을 섞어서 그리스에 가지고 온 것을 두고 하는 말이고 보면 무척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피론은 다크시라 거리에서 자이나 사원의 승려와 사귀는가 하면, 바라문 승려들과 대화하면서, 자이나교, 불교, 힌두교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신과 같이 마음을 고요하게 지님으로, 마음의 동요를 지켜야한다”는 피론의 사상은 인도철학에서 배워온 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철학은 인도철학과 그리스철학의 융합이었던 셈이다. 피론의 사고를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위해서는 먼저 “사물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를 파악해야 하고 “우리는 그 사물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그 관계가 우리에게 어떤 이익을 주고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야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피론은, “우리는 사물의 성질을 알 수 없다”고도 말한다. 우리는 사물을 우리의 지각을 통해서 알게 되는 만큼,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고, 사물이 지각되는 양상에 따라서 달라지게 마련“이란 것이다. 요컨대 피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은 이렇다!”하고 가볍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생각으로는 이렇게...” 이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우리와 사물과의 관계는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는가.”라는 명제에 대해서 피론은 “사물과의 관계를 인정하면 사물에 대한 불필요한 집착이 해소되고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으면 “격정”에 휘말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 그의 가르침의 중심인 것이다. 피론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왜 없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생각을 “회의주의”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사물을 너무 성급하게 “이렇다!”하거나 “저렇다!”하고 판단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신의 판단을 절대적으로 바르다고 주장하며 양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피론의 가르침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우리의 머리를 식혀서, 스스로를 사로잡고 있는 격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려면, 피론의 교훈이 더없이 요긴하리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반대의 논리를 가지지 않는 논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어떤 논리도 바르지 않단 말인가? 하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말함으로서 우리는 오히려 피론의 손에 말려들어가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피론을 반대함으로 피론의 말에 찬성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버트란트 러셀이 말했다. “열정을 지닌 의견을 품게 되는 것은 언제나 그 의견에 그럴듯한 근거가 없을 때이다. 실제로 열정이란 그 사람이 품고 있는 의견에는 합리적인 확신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척도일 뿐이다.” 그렇게 말한 러셀은 피론의 회의론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무엇보다도 광신을 방지하는 약이 될 수 있는 말이라고도 했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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