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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의 성장 기능은 연합
    2016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의 성장 기능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교회는 성장하는 기능이 있다. 사도행전 6:7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 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수적 성장 혹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전략적으로 그 목표를 이루셨다. 예수님은 3명의 수제자, 12명의 측근 제자그룹, 70여명의 제자, 500여 명의 제자들과 함께 이곳 저곳(막 1:38)에서 전도 하셨다. 그리고 수 천명 앞에서 설교하시며 전도하셨다. 이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서 예루살렘과 유다와 온 땅에 복음을 증거 하여 교회의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최근에 서울의 양재동 부근에 교회를 이전 개척한 제자가 있다. 그 목사님의 계획은 매원 10가정을 전도하여 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것을 목표로 뛰고 있다. 벌써 두달 만에 10가정을 전도하여 함께 예배드린다고 하였다. 자신의 전도 경험을 말하면서 열심히 뛰어 다니다 보니까 전도가 쉬워 졌다고 말했다. 참으로 놀라운 소식이다. 우리는 전도가 안된다고 주저앉아 있는 교회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초대교회를 통해서 신앙의 지혜를 얻어야 한다. 초대교회는 오늘날과 같지 않았다. 다양한 상황들을 유추해 보았을 때에 오늘날 보다 더욱 더 전도와 신앙생활이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사도행전 2:47절에는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다. 교회의 본질은 부흥의 역사위에 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당연한 원리 이다. 다만 교회가 병들지 않고 정상적인 기능만 발휘해 준다면 시간에 따라서 성장토록 되어 있는 것이 교회의 기능 이다.그런데 교회의 기능이 죽지 않게 만드는 데는 몇 가지의 중요한 방법이 있어야 한다. 사도행전 2:46절에 보았더니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 하며, 온 백성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다. 교회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연합된 힘이 필요하다. 즉 교회성장을 위한 연합의 기능이 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성장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며, 성장은 연합 속에서 만이 이룩될 수 있음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 결국 연합이란 우리가 가진 모든 자원들이 총동원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되어짐을 의미한다.신약성경에는 이러한 연합을 통해서 교회를 부흥 시켰던 예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고전 1:23-24을 보면 “전도하는 성도들”의 모습, 행 2:42 “가르치고 배우는 성도들”, 롬 12:5 “섬김는 성도들”, 행 2:46-47 “찬양을 통한 성도들의 부흥”, 행 2:46 “교제하는 성도들”을 통해서 교회는 연합된 힘을 가질 수 있었다.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가진 달란트를 주님을 위해서 연합된 힘으로 모아져야 하겠습니다. 즉 사업가, 의사, 예술가, 교수, 이러한 직업등의 어느 직분을 가지셨든지 주님을 위해 헌신해야 하겠다는 것이 연합의 마음이다. 사실 연합이 되지 못한 교회는 결국 성장할 수 없다(12:6-8)는 것이 성경적 교훈이다. 잘나가는 집과, 잘나가지 못한 집은 연합의 차이 이다. 잘되는 집의 형제들은 “형님 먼저, 아우먼저”이지만, 못된 집의 형제들은 “왜 내 떡을 네가 먹느냐”고 싸우는 경우다.얼마 안 있으면 국가적으로는 총선이 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다양한 당이 나와서 자신의 정견을 국민들에게 전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은 국민들을 호도하여 판단력을 흐리게 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기독교 내에서도 교단 총회가 각 교단별로 많이 예정되어 있다. 선거 때에는 다양한 목소리들로 말미암아 시끄러운 소리들이 들리곤 한다. 전도하기 어려울 때일수록 연합된 힘을 가지고 선교에 힘써주는 한국교회가 될 것을 기대한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2-04
  • 말에 대해서
    <야고보서>가 유난히 가부장적 체취를 풍기기 때문일까, 루터가 그랬던 것처럼, 프로테스탄트들은 야고보서를 한 옆으로 밀쳐놓기를 아쉬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야고보의 경고가 바로 “나” 혹은 “우리”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 서둘러 그의 말에 귀를 닫아버렸으면서도, 어쭙잖은 신학을 내걸어 자위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하고 뉘우칠 수라도 있다면 그나마 다행한 일일 것이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야고보서 3:1) 이 글을 앞에 하고서도 고개를 처들 수 있는 설교꾼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인 것은 분명하다. 휴머니즘이란 말은 흔히 인간적이란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됨됨이가 넉넉해서 밥이라도 잘 살라치면 “그 사람 인간적이다.” 하고 말해주는 것처럼. 그러나 휴머니즘은 그런 차원의 말은 아니란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 휴머니즘이란 단어가 인간애를 가리키는 필란트로피스(Philanthropists)와 구별되어 쓰이고 있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휴머니즘이 필란트로피스보다 상위개념이라고 한다면 어폐가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은 “휴머니즘”이 있고서야 “필란트로피스”도 성립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자신보다 몸집이 크고 힘이 센 짐승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 곧 휴머니즘이었기에. 동물들을 이기기 위해서 할 수 있던 일은 기껏 주술행위뿐이었던 원시인이, 스스로의 지혜와 전술과 의사소통을 통해서 짐승을 극복할 수 있게 된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이 곧 휴머니즘이었던 것이다. 한 때는 동물을 그들의 조상으로, 심지어는 신으로 섬기기도 했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고대 그리스인들이 조령동물신(祖靈動物神)으로부터 탈피하여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 되었고, 그 바탕이 곧 “말(로고스)”이라 믿었던 것이다. 조령동물신으로부터 벗어난 인간은 이제 인간의 모습을 띈 신을 발명해낸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만들어 놓은 신상들은 한결 같이 실제 인간보다 크고 아름답고 힘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의 연장선상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신들에게 성격을 설정해주고 걸 맞는 스토리를 만들어주는 것도 로고스였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어온 히브리 그리스도교의 전통이 “로고스가 참 사람이 되었다”하고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문화현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말(로고스)”이 너무 경박해지고 있다. 특히 한국 그리스도교회의 강단에서 난무하고 있는 말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한탄을 들어온 지가 이미 오래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대언은 고사하고 제대로 휴머니즘의 차원이라도 유지해주었으면 하는 느낌을 어찌하랴! 야고보는 말의 힘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혀도 몸의 작은 지체이지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고 자랑합니다. 보십시오. 아주 작은 불이 굉장히 큰 숲을 태웁니다.”(3:5) 말의 피해도 엄청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여가며. 바벨탑이 무엇이던가. 한 무리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 여겨, 그들이 생각 대로 사상의 통일을 이루려고 기술력과 경제력을 총동원하며 안간힘을 썼지만,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마땅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바벨탑은 흉한 몰골을 남기고 역사에서 사라지는 가 싶었다. 그러나 악마는 그냥 주저앉으려 하지 않았다. 중세의 가톨릭교회와 소련의 공산주의자와 독일의 나치스가 바벨탑의 흉내를 내었다. 오늘에도 많은 세력들이 그 유혹을 물리치려 하지 않는다.“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야고보의 충고는 날카로우면서도 모든 사정을 헤아려 품고 있는 경구이다.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하는 경구를 모르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야고보는 “여러분이 아는 대로”라는 부사절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야고보서 3장 2절: “우리는 다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 누구든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충고는 이어진다. “여러분의 마음에 지독한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고, 진리를 거슬러 속이지 마십시오...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3:14-17)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2-04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18세기는 뉴잉글랜드에 있어 대각성의 시대였다. 1734~1735년과 1740~ 1741년에 걸쳐 하나님은 이곳에 놀라운 변화를 허락하셨는데 그 일의 한 복판에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전설적인 설교자가 있었다. 근시로써 원고와 촛대를 들고 행했던 그의 설교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다. 그로 하여금 그런 놀라운 사역을 할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은 어린 시절 회심을 경험하며 영광스런 하나님을 만나고서 가졌던 ‘하나님은 영광 받으셔야한다. 그렇지 않게 사는 삶은 모두 잘못되었다’라는 확고한 의식 이었다. 그는 이 목적을 위해 스스로 수십 조항의 결심문을 만들어 체크하며 지켜갔다. 특히 이러한 확신 속에 필요를 느껴 수년간 지옥에 대해 설교 하기도 했다. 그는 왜 이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까? 하나님의 영광은 주님의 소원이자, 삶이며, 우리 인생의 목적이기 때문이다(소 요리 문답 제1문).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주님의 삶을 본받아야한다. 어느 날 주님은 사람들이 혐오하는 흉한 문둥병자를 친히 손을 대어 치유해 주시면서 함구령을 내리셨지만 주님에 대한 소문은 널리 퍼져나갔다. 갈릴리뿐만 아니라 온 유대와 예루살렘에도 알려져 허다한 무리가 추종하게 되었고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속인들 같으면 더욱 자기를 선전하고 사람들에게 인기와 존경을 받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피해가셨다. 즉 주님은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실 때에 그것에 편승해 영광을 누리기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아들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눅 5:12~16). 그리고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앞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 하셨고(마 26:39) 또 대제사장적 중보 기도를 하셨다(요 17:). 이는 사도 바울의 소원이기도 하며(롬 15:6) 그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이에 바울은 성도들에게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라고 권했다(고전 10:31). 이것은 바로 성도된 자의 삶의 가치요 행동이며 강령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면 이 세상에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오늘날 가정, 교회, 교계, 사회 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과 기쁨을 추구하는 데서 발생한 것이다. 인류의 최초의 범죄도 사실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기의 이기적인 만족과 기쁨을 위해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고로 우리가 혹시 교회나 사회에서 큰 공로를 세워 유명하게 되어 사람들의 인기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다면 교만하지 말고 겸손함으로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한다. 사람들에게 경시당하고 수모당할 때보다 높임 받고 존경받을 때 교만, 명예, 권력, 물욕 쾌락 등에 걸려 넘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성경의 사울과 솔로몬처럼 말이다. 요즘 교회 지도자들은 어떨까? 2015년 12월 24일 교회연합신문을 보자. 세계 최대교회인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세우고 지난 2008년 은퇴한 조용기 목사가 교회로부터 200억 원의 퇴직금을 받았다. 국민일보 2015년 12월 11일자에 의하면 조 목사에게 지급된 이 퇴직금은 교회 재정위원회와 당회를 거쳐 정상적인 절차로 지출 되었고 그 중 35억 원을 소득세로 납부했으며 나머지 165억원에 대해 16억 5000만원을 십일조로 교회에 헌금했다고 한다. 몰라도 될 조 목사의 퇴직금 명세는 일부 ‘교바모’(교회 바로 세우기 장로 모임) 장로들이 원로목사를 음해한다며 교회 측이 강력 대처를 천명하여 밝혀진 것이다. 조 목사에게 지급된 이 거액의 돈은 교인들이 생활비를 쪼개고 아껴 복음전도를 위해 사용하도록 하나님 앞에 드린 헌금이다. 목사가 아무리 훌륭한 목회를 하고 교세를 성장시켰더라도 하나님 앞에 바쳐진 헌금을 도에 넘치는 퇴직금으로 받는 것은 기독교 역사상 이제까지 없었던 일이다. 이는 한국 교회에서만이 있는 일이다. 공교회의 헌금을 은퇴 목사가 생활비 외에 거액을 개인적으로 챙겨 가는 것은 옳지 않다. 천재를 횡령한 범죄이고 물욕을 버리라는 목사의 설교를 신뢰해 온 교인들을 실망시킨 것이다. 교회가 그대로 관리하고 있었다면 그 이자 만으로도 은퇴 목사에 대한 생활비를 지원하고도 남을 터인데 교인들의 피땀 어린 헌금 35억 원을 ‘세금’이란 명목으로 날린 셈이다. 또 2006년 1월 3일 본보를 보면 서울 명성 교회가 지난 12월 27일 저녁 공동회의를 열고 김삼환 목사를 원로목사로 추대키로 결정했다. 당초 명성교회는 김 목사에게 전별금으로 약 30억을 지급키로 했으나 김 목사가 고사해 이를 어려운 목회자들과 소외된 이웃을 돕는데 쓰기로 했다. 다만 명성교회는 전별금을 고사한 김 목사에게 종전과 같은 사역비를 계속 지급키로 했다. 두 목사님 중 어느 분이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까?
    • 칼럼
    • 목회자
    2016-02-04
  • 새해 신앙의 첫 사랑을 회복하자
    사랑이라는 말에 대해 묻는다면 ‘사랑하라’는 것 이상으로 더 할 말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 하여라(요한13:34)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셨다.또한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덧붙인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끝을 맺는다. 일단 이렇게 끝을 맺은 요한은 다시 에피소드를 추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함께 아침을 드신 후 베드로 에게 “네가 나를 사랑 하느냐” 라고 세 번을 묻고는 나를 따르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장면이다.나는 요즘 이 장면을 주목하여 보고 있다. 복음의 사역자의 길을 가기로 다짐을 하였으나 고향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를 보니 얼마나 고생을 하는가? 식량도 여신도 교인들이 성미를 모아 간신이 생계나 꾸려갈 정도이고, 가을에는 교우들과 함께 산에 가서 나무를 하여 땔감을 마련하여 드리는 모습을 볼 때 처음에 먹었던 마음이 사라지게 되었다.그때마다 나는 이 말씀을 읽고 다시 힘을 얻곤 하였다. “네가 나를 사랑 하느냐?”라는 이 질문은 바로 나를 향하여 주시는 말씀이구나. 깊이 깨닫고 내 평생의 화두로 삼기로 결심하였다. 마치 주님께서 베드로를 만난 첫 순간에 베드로를 눈여겨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 아니냐? 말씀하신 것처럼 나에게도 들려오게 되었다. 힘들고 낙심 될 때 우리에게 나를 사랑 하느냐?는 그 질문을 평생 새기기로 다짐을 하였다. “그러다가 요즘 요한계시록 2:4절에는 그러나 네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첫 사랑을 버린 일이다”라는 말씀을 새롭게 다가온다.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참고 또 그의 이름을 위하여 잘 견딘 교회 아닌가?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 바쳤던 첫 사랑을 버린 교회가 되고 말았다. 성경은 주님께 바쳤던 첫 사랑을 버린 이 교회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서 떨어 졌는지를 생각하여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라. 만일 그렇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로 부터 옮기겠다”고 하신다.첫 사랑은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이든 아름답지 않은가? 세상에는 첫 사랑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재 빨리 첫 사랑을 체험 하고는 재빨리 잊어버린다. 언제 내 몸과 마음을 스쳐 갔는지 조차 기억 못하는 첫 사랑이란 있으나 마나한 것이고 차라리 그것은 비극이다.첫 사랑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이루어 지지 않은 사랑이라고 할지라도 두고두고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 있는 사랑일 때 해당이 된다. 만일 이와 같은 사랑을 스스로 포기 했거나 예상치 않았던 제3자의 방해를 받아 망가져 버린다면 그것은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만다.에베소교회의 경우는 ‘스스로 버린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다. 스스로 첫 사랑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 배반, 또는 자기기만이 아니면 변절일 것이다.만일 기독교 윤리학에서 첫째 되는 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변절’ 다시 말하면 사랑의 배반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주님을 배반한 변절자 가룟 유다에 대하여 주님은 노기 띤 목소리로 이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하였다. 라고 말씀하신 의미를 이해 할 것 같다.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도 좋은 사람들 -세상은 그런 사람들로 들끓고 있는 아닌지 …에베소교회는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수고도 많이 하고 참기도 잘한 교회였다. 그러나 그들은 첫 사랑을 버린 교회였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첫 사랑을 끝까지 간직 할 수 있다면 만일 두고, 두고 기억 할만한 첫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황홀한가?속히 사랑했다가 쉽게 내 던지는 사랑, 너무나 빨리 뜨거웠다가 빨리 내 던지고 쉽게 잊어버리는 사랑, 이와 같은 사랑은 있으나 마나한 사랑 있어도 그만 없어도 아쉬울 것 없는 그런 사랑 이라면 차라리 없었던 것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이제 한국 교회는 첫 사랑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고난과 시련도 역경의 골짜기를 걸으면서도 조국을 사랑하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돌아 보았던 그 열정을 어디에서 잃어 버렸는가?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이 한국 교회와 요즘 첫 사랑을 잃어버린 것 같은 나에게 들려오는 듯하다. 금년 한 해가 사랑을 회복하는 원년으로 기록되기를 소원한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6-01-22
  • (김지호)청지기의 사명
    청지기의 사명 김 성 녀하나님이 맡겨주신 청지기의 사명을지혜롭고 슬기롭게 행케 하여 주소서마음속에 품은 믿음 귀히 간직하고서주인님의 기뻐하는 뜻을 따라 해야 하리착하고도 충성스런 청지기가 되어서주님 맘에 합한 자로 인정받기 원하네많은 고기 뛰노는 곳에 그물 던지러 가세깊은 바다 겁내지 말고 열심히 던져 보세힘들어도 쉬지 말고 기도하며 던지면그물 속에 잡힌 고기 우리 주님 거두시리모든 그리스도인이 청지기라는 사명에 대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할까. 대부분이 청지기의 사명을 잘해야지 라기보다는 그냥 주어진 직분에만 습관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시에서 화자는 청지기의 사명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다.1연에서 “하나님이 맡겨 주신 청지기의 사명”이라 언급하며 계속해서 그 사명을 종의 입장에서 주인이 기뻐하도록, 착하고 충성스런 청지기를 언급하다가, 4연에서는 청지기의 사명에서 전도라는 사명을 언급한다. 예수님의 제자 중 베드로와 안드레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던지라 말씀하신 쪽으로 던졌을 때 많은 고기를 잡았다. 전도라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내 의지대로만 하려하면 힘든 것이 더욱 힘들어지고 결국 포기하기가 쉽다. 그러나 쉬지 않고 구도자를 위해 주님께 기도하며 예수님의 지시대로 열심을 낸다면 거두어주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라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아마도 화자는 평상시에 전도에 대한 열정이 많거나 많은 영혼을 전도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인가보다. 수많은 청지기 사명이 있지만 우리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대해 열심을 낸다는 것이 바쁜 사회속에서 쉽지는 않다. 그러나 “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라는 말씀처럼 영혼을 위해 주님의 방법대로 시도한다면 좋은 열매를 거둠으로 주님께 영광돌리는 청지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칼럼
    • 기독시선
    2016-01-21
  • 천륜(天倫)과 종교
    기독교는 부모 공경에 대해서 분명한 지침을 주고 있다. 이 말씀은 성경의 십계명 가운데 제 5계명을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기록되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라고 권면하고 있다. 기독교에서의 부모와 자신과의 관계를 세속적인 단어로는 천륜이라고 볼 수 있다. 천륜의 사전적 의미는 “부모와 자식 간에 하늘의 인연으로 정하여져 있는 사회적, 혈연적 관계”라고 나와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천륜지간 이라는 글을 검색했더니 다음과 같은 글이 나왔다. 부모와 자식은 천륜지간[天倫之間]입니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 주신 귀한 인연[人緣]이지요. 이것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절대 바꿀 수가 없습니다. 가는 세월을 붙잡을 순 없습니다. 가버린 세월 되돌아 오지 않습니다. 가 버리면 되돌아 오지 않는것이 세월이요. 떠나시면 모시고자 해도 따를 수 없는 것이 부모입니다. 나무는 고요하고 싶어도 바람이 그치질 아니하고 부모님을 모시려 하나 세월이 기다려 주지를 않습니다. 살아 생전 부모님을 잘 섬김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천륜지간[天倫之間]의 도리입니다. 이 글을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논어(論語)가 생각나서 기슬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2016년을 희망찬 날들로 채우기를 원하는 나에게 무겁게만 들려오는 소식들로 가득차 있다. 참으로 암담한 사실은 ‘천륜 짓밟은 냉혈한’ IS대원, 탈출 설득 어머니 공개처형, 이라는 소식이다. 인터넷 기사에 의하면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20대 대원이 탈출하자고 설득하는 어머니를 공개 처형했다고 BBC방송과 AP통신 등이 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영국에 본부를 둔 시리아인권관측소(SOHR)에 따르면 IS 대원인 알리 사크르(21)는 지난 7일 IS가 점령한 시리아 락까에서 어머니 레나 알-카셈(45)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했다.공개 처형은 카셈이 일하는 우체국 건물 인근에서 이뤄졌다. SOHR는 카셈이 아들에게 IS 조직에서 벗어나 도시에서 떠나자고 설득했기 때문에 공개 처형을 당했다고 설명했다. 어머니는 미군 주도 연합군의 공습이 IS를 쓸어버릴 수 있다면서 아들을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들은 어머니 말을 IS에 그대로 전했고 IS는 공개 처형을 명령했다. 다른 인권단체인 ‘락까는 조용히 학살당하고 있다’(RBSS)도 어머니의 공개 처형 소식을 전하면서 처형 이유를 ‘배교’라고 설명했다. IS는 동성애, 배교 등을 이유로 많은 사람을 처형했다. 최근 들어 IS의 근거지 락까에 대한 연합군은 공습이 심해지자 탈출 의지 등을 꺾기 위한 IS의 공개 처형 사례도 늘고 있다. 한 젊은 여성은 IS 점령 아래서의 도시 생활을 담은 글을 썼다는 이유로 죽음을 맞았다. SOHR는 IS가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한 2014년 이후 동성애와 배교 등으로 살해된 사람이 2천 명이 넘는다고 전했다.보도에 의하면 자식의 안위가 걱정이 된 어머니가 IS조직을 떠나서 안전지대로 탈출하자고 권유했다고 한다. 이는 자식을 낳아서 성장시킨 어머니의 당연한 자식사랑이다. 성경은 자식사랑에 대해서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ㅈ불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라고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치면서 부자간의 관계를 언급하셨다. 어머니를 공개 처형장으로 내몰아 버린 자식은 종교적 맹신에 의해서 천륜을 내 팽개쳤다. 종교는 무엇인가? 종교는 인간 교육 중에서 최고의 경지를 가르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참된 의미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어머니를 총알 바지로 만드는 종교를 좋은 종교라고 볼 수 있는가. 다시는 이러한 일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지 않기를 바란다.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를 반면교사 (反面敎師)로 삼아야 하겠다. 오늘도 우리는 신앙심을 이유로 가정과 자녀를 팽개침과 아울러 책임을 회피하고 살고 있는 사람은 아닌지 돌아봐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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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6-01-21
  • 도스토예프스키가 죽기 직전에 한 일
    잘못된 성서 번역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을 앞당기게 했다는 주장에 당장 고개를 끄덕여 줄 이가 있다면, 그는 남달리 깊은 영성을 지녔거나, 아니면 도스토예프스키를 둘러싸고 있던 당시 러시아의 속사정을 소상히 연구한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죽음은 상당한 신비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운명한 것은 1881년 1월 28일 오후 8시경. 쉰아홉 해의 파란 많았던 생을 마감한 것이다. 사인은 폐동맥파열로 진단되었고, 그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던 아내와 친구들이 그의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평범해 보이는 그의 임종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는 사건으로 기억되는 데에는 이상하게도 러시아의 문인들 중에는 평안하게 제명을 살다간 이들이 많지 않았다는 징크스가 한 몫하고 있다. 푸시킨과 레르몬토프는 결투로 죽었고, 고골과 가르신은 미쳐서 죽었다. 가출해서 죽은 톨스토이는 그렇다 치고, 자살한 문인들이 있는가하면 숙청되어 처형된 이도 있는 터에, 59세의 나이이긴 해도 가족과 친지가 지켜보는 병상에서 조용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는 것은 축복받은 최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작품에서 남달리 등장인물들의 최후를 비정상적으로 엮어갔던 도스토예프스키가 정작 자신은 평온한 죽음을 맞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어떤 인과가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하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아마도 문호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각별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가 죽기 13시간 전, 우연이라 치부해버리기에는 너무나 미스터리한일이 있었다. 오전 7시경, 문호가 갑자기 눈을 뜨더니 곁에 있는 아내 안나 에게 겨우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오늘은 죽을 것 같아요.”하고 말한다. 그리고는 그의 만년에 자주 그랬던 것처럼, 성경으로 점을 치겠노라고 했다. 아내는 손때로 찌들은 낡은 성경을 그의 머리맡에 갖다 놓는다. 그 성경은 30년 전, 청년 도스토예프스키가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어 죄수로 시베리아로 호송되는 도중 드보리스크에서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의 아내들이 건네준 바로 그 성경. 1823년판 러시아어 역 <신약성경>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손을 뻗어 책갈피를 넘겼다. 펼쳐진 쪽은 마태복음 3장 끝 부분에서 4장에 걸쳐 있었다. 성경 점을 칠 때에는 펼쳐진 왼편 쪽 위쪽에서 훑어 최초로 나타나는 “예수의 말씀”을 점괘로 쓰게 되어 있었다. 그가 받은 점괘는 <마태복음> 3장 14-15절로, 세례요한이 예수로부터 세례 요청을 받고 사양하는 바로 그 구절이었다.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안나가 여기까지 읽자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만 읽으라는 눈짓을 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지금은 말리지 말라. 즉 내가 죽는 다는 뜻이지...” (러시아역에서는 “허락하라”를 “말리지 말라”로 번역하고 있다.) 우리말 역본이나 영어역본에서는 “지금은 말리지 말라”라는 번역은 찾아볼 수 없다. 대체로 “이제 허락하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인 것은, 러시아판 신약성서 모두가 그렇게 번역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공교롭게도 유독 1823년판에서만 그 구절이 그렇게 번역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죽음을 앞 둔 문호가 성경 점을 친 성경책이 1823년 판이 아니었다면 그의 죽음은 연장될 수 있었을까? 사후에 그의 장서목록을 검토해본 결과 그에게는 1862년 이후의 개정판을 포함해서 여러 종류의 성서가 있었다는 것이 확인 되고 있다. 만약 다른 책으로 점을 쳤다면, 그래서 “말리지 말라” 가 아니라 “허락하라”로 읽었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은 적어도 수년간 연장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까. 그랬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애독자들이 그렇게 아쉬워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부도 써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안나 부인이 <회상록>에 기록하고 있는 이 일화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바로 그 성경을 준 폰 비지나 부인에게 다음과 같이 써 보낸 적이 있었다. “설사 진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다할지라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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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6-01-21
  • 순교자 이그나티우스의 편지
    교부 이그나티우스가 로마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서머나교회 감독 폴리갑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그는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타협하지 말라, 내가 놓이기를 바라지 말라, 나는 밀알이 되고 짐승의 이빨에 가루가 되어 하나님의 깨끗한 빵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형벌당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있다면 십자가 위에서 짐승의 이빨에 뼈 가루가 되어 손과 발이 잘리더라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겠노라, 나에게는 오직 그리스도가 있을 뿐이다’ 라고 한 후 순교했다. 서머나교회 감독 폴리갑도 A.D. 156년 어느 날 예수님을 욕하고 자신의 생명을 구하라고 종용하는 이들에게 ‘저는 86년간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분은 한 번도 제게 나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저를 구원하신 저의 왕을 욕할 수 있습니까?’ 말한 후 화형을 당했다한다. 당시 그들은 고난을 피할 수 없었을까? 아니다. 신앙을 포기하면 굳이 고난을 받지 않아도 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 각오의 신앙을 선택했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이 이탈하거나 포기할 만큼 고난이 찾아오고 신앙을 버리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하게 보이는 유혹이 있을 때 성도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환난에 동참하는 것은 분명히 어려운 일이다. 비록 법은 어기지 않더라도 세상에 만연된 죄악된 규칙을 따르지 않음으로 인해 공공연한 따돌림과 사회적 고립을 경험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반대로 오늘날 한국교회를 비롯 자유사회에는 교회와 성도에 대한 정치적 박해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사단은 다른 방법으로 성도들을 유혹하여 넘어지게 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서 사업상, 직업상 등의 이유로 하나님과 교회를 멀리하고 우상 숭배를 비롯한 각종 죄악에 참여케 하고 그것을 교묘한 방법으로 합리화시켜 주어 그 죄의 자리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기독교인인 정치 지도자들이 표를 의식해 사찰에 가서 예불을 올리는 것이나 사업상 바이어를 접대한다는 명목으로 음란한 행위를 하는 것이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이는 교회와 성도로 봐서는 핍박을 동원한 공격보다도 은밀한 유혹과 자기 합리화를 통한 공격으로서 더 위험하다. 핍박은 사단의 공격인 것이 뚜렷이 인식되어 대처하기가 비교적 쉽지만 은밀한 유혹이나 자기 합리화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악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기독교 공인 이전에는 로마 제국의 성도들의 신앙이 굳건한데 반해 기독교 공인 후에는 로마 제국의 성도들이 급속히 타락하는 사실로도 확인 할 수 있다. 이처럼 마귀는 하찮게 보이는 작은 유혹들을 통해 성도들을 곧잘 쉽게 넘어지게 한다.마귀가 미혹하는 것을 보자. 사실 어떤 일에 실수를 한다거나 잘못을 하면 우리는 그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또한 어떤 사람이 실수를 한다거나 문제를 일으키면 문제의 원인을 그 사람에게서 찾고 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보편적인 것이다. 인간들은 교육이나 환경 개선을 통해 그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물론 이러한 방법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을 고치고 문제점을 개선한다면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사람에게서 어떤 문제를 발견하고 그 문제를 지적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개선한다고 해서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그것과는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더 심한 경우 같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환경을 개선하고 미리 교육을 시킨다고 해서 환경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사회가 발전하고 문명이 발달하고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문제가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실제론 어떠한가? 그 반대인 경우도 많다. 문명의 사회이고 지식과 교육 수준이 높은 사회일수록 혹은 그런 사람일수록 문제는 더 많고 범죄성도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훨씬 교묘하고 악질적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실 모두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문제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근원적으로 인간 배후에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르게 하고 부적응하게 하는 세력이 있는데 곧 그것이 바로 마귀란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주목하고 사람이상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마귀가 그렇게 성도들을 달콤한 방법으로 속이기 때문이다. 항상 자신을 주목하는 대로 만들고 거기에서 문제와 해법을 찾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탄의 유혹과 고난이 올 때 절대로 마음이 약하여 상심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주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쳐야한다(마 4:4).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마귀와 맞서 영적 싸움을 할 때 홀로두시지 않고 천사를 파송하여 돕고(히 1:14) 또 친히 함께해 주실 것이다(요 14:18).
    • 칼럼
    • 목회자
    2016-01-21
  • (정신재) 민들레 홀씨
    민들레 홀씨 김 철 교 노오란 꿈이 옹골차게 영글면이리도 가볍게 날 수 있는 것을머문 듯또다시 바람이 불면미련없이 자리를 턴다세월의 무게를 다 내려놓고바람에 실려 어디로 간들거기가 고향이 아니겠느냐주님! 오늘도 저희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의 은혜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지요.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저희가 새나 물고기로 태어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택하실 때에도 하나님의 뜻에 따르셨지요.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을 때에 주님이 시몬의 배에 오르셨지요. 사람들이 몰려들므로 예수님은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아서 말씀을 가르치셨지요.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셨지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 베드로가 대답하였지요.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 그리하여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었지요. 베드로가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도움을 청하여 두 배에 물고기가 채워져 잠기게 될 정도였지요. 베드로가 엎드려 고백하였지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그러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지요.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 5:10). 그리하여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랐지요(눅 5:11).주님! 저희가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을 따르렵니다. 주께서는 저희의 달란트를 아시오니, 그 달란트를 통하여 주님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저희의 믿음이 “옹골차게 영글”었을 때 저희는 주님 뜻에 의지하여 어디든지 떠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바람에 실려 어디로 간들/ 거기가 고향이 아니겠”습니까. 저희의 마음은 “민들레 홀씨”가 된 기분입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한들 주님이 원하시는 곳이 저희들의 고향이겠지요. 세상의 미물도 다 주님이 주관하시는데, 하물며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저희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여 주신 주님의 말씀을 소홀히 할 수는 없지요. 주 뜻대로 하소서.
    • 칼럼
    • 기독시선
    2016-01-12
  • 선교역전
    선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동안에는 서구에서 제 3세계로 향하는 것이 대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선교역전이라는 어휘가 왠지 새롭지 않다. 필자는 오늘 Allan L. Effa, 박사에 의해서 쓰여진 논문 “세계 기독교속에서 나이지리아의 요소”가운데에서 발췌된 글을 소개함하고자 한다. 이 글의 하반부에는 “선교 역전: 나이지리아인에 의해 시작된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교회들”이라고 쓰여져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 선교 운동의 주류는 남에서 북으로, 가난한 세계에서 부자 세계로, 변두리에서 힘의 중심으로, 아래에서 위로 가고 있다. 복음은 이민의 막대한 물결에 기인하여 전 세계에 전해지고 있다. 비구조화된 방법 안에서, 그리고 선교의 본부의 통제 밖에서 많은 시간동안 그것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복음은 가장 기대되지 않는 곳에 도달한다. 그 곳이 어디든지 성령이 남자들과 여자들, 그리고 어린이들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감동시키신다.한 번에 많은 선교사를 보낸 땅에 있는 나라들에 거주했던 서아프리카 크리스천들은 이민을 통하여 오늘에는 영국 땅에 수 없이 많이 거주하면서 신앙 생할을 하고 있다. 비록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주로 경제적 이유로 유럽에 왔을지라도, 서방의 사람들에게 다시 복음을 가져가기 위한 선교의 열정적 감각이 있다. 이것은 아프리카의 나라들로부터 온 많은 나라들이 오늘날 영국에서 섬기는 50개국으로부터 온 약 1,500명의 선교사들이 사역을 하고 있는 이유이다. 디아스포라 아프리카 크리스천들은 주류에서 영적 집과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복음주의 교회를 발견하는 반면, 최근 몇 년 동안 다수의 아프리카인들에게 시작된 교회가 생겨나고 있다. 이 교회들은 두 개의 폭넓은 부문 속에 포함되어있다.첫 번째 부문은 아프리카에서 비롯된 교회의 유럽 또는 북아메리카 분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들의 부분은, 영국의 경우에서 특히, 1960년대만큼의 이른 시기로 소급된다. 이것들의 예는 Aladura 교회, 더 깊은 삶, 하나님의 구속된 크리스천 교회 (모든 교회는 기원에 나이지리아인이 있다.) 그리고 오순절 가나 교회이다. 이것들 중 몇몇은 함께 모인 이민자의 작은 그룹에 의해 발견되었고 결국 모임으로 조직화되거나 다른 경우, 계획된 선교 아웃리치 노력들을 통해서, 나이지리아나 가나의 국외로 추방된 사람들 중에서 일하기 위하여 교회 심기 목사들의 파송을 포함한다. 두 번째 부문은 유럽에서 시작된 교회들을 포함한다. 이 교회들 중 몇몇은 이어서 아프리카와 세계의 다른 부분에서 분파를 설립했다.이 두 형태의 교회들은 유럽 기독교의 지형을 바꾸기 위해 돕고, 성장하는 세계적 선교의 힘이다. 우리는 이미 영국의 교회 출석률이 주로 이민 요소 때문에 감소를 멈췄다는 것을 관찰했다. 이것은 주로 “흑인이 대다수인 교회들”의 생명력 때문이다. 크리스천 연구의 Peter Brierly는 런던 안에 교회 출석의 51%가 흑인과 소수민족으로 구성된다고 평가했다. Gerrie ter Haar는 1997년에 가나인들에 의해 알려진 그들의 대부분인 약 40개의 아프리카인에 의해 시작된 교회들은 암스테르담에 존재한다고 보고했다. 교회의 첫 번째 부문의 예로써, 간단히 하나님의 구속된 크리스천 교회(RCCG)를 고찰하도록 하자. 그 구속된 교회는 무교육자지만 능력있는 설교자, Josiah Akindayomi의 목회에 까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RCCG가 되는 것을 시작하기 위해 Cherubim과 Seraphin 교회를 남겼다. 강력한 선교 명령은 교회를 바로 사작하도록 교회를 특징지운다. 1981년까지는 그렇지 않았지만 Enoch Adeboys가 교회의 리더십을 취할 때 그 운동은 수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사실, RCCG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기독교 운동으로 간주되었다. 나이지리아 자체 안에서 적어도 4,000개의 RCCG 교구와 5백만 가량의 지지자가 있었다. Lagos의 동북쪽으로 45킬로미터에서 있었던, ”구원 캠프“에서 특별한 모임은 한 번에 일백만 명 정도의 많은 사람들을 끌었다. 그들의 컨퍼런스 장소는 쉽게 5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그 교회의 목회는 대학교, 영화 스튜디오, 위성 텔레비전, 그리고 Wi-Fi 인터넷 공급자를 포함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검은 대륙의 땅이라고 지칭하는 아프리카인들이 현대선교의 아버지를 배출한 영국의 기독교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따라서 이를 선교역전이라고 표현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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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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