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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의주의의 효능
    “반대할 주장을 지니지 않는 주장은 존재하지 않는다.”위에 소개한 어록은 몽테뉴가 그의 <수상록> 2권 15장에서 인용하고 있는 피론의 말이란다. 몽테뉴는 “‘쾌락이란 순간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쾌락도 진정으로 즐거운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의견에 대해서 ‘아니다. 순간적인 것이기 때문에 쾌락은 즐거운 것이다.’”하는 반대 의견도 성립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기 위해서 위의 말을 인용했다. 피론의 제자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어떤 판단에도 과오가 끼어들 가능성이 있기 마련이고, 그 과오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하나,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것이 스승 피론의 주장이요 가르침이었다는 것. 당사자 피론은 기원전 334년 봄, 알렉산더가 4만의 군사를 이끌고 헤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넜을 때 동행했다는 3명의 철학자 중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알렉산더가 원정을 나서면서 장병과 더불어 철학자를 동행했다는 일화는 두고두고 화제가 되고 있지만, 대왕의 조카벌이 되는 칼리스테네스는 원정도중 바크토리아(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근처)에서 살해되었고 아나크사르코스는 귀국 도중 키프로스 섬에서 참살되었다. 오직 피론만이 종군11년의 노고 끝에 겨우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전해주는 기록을 따르면, 피론의 철학은 알렉산더가 그리스에 공헌한 가장 큰 선물이었다고 한다. 피론이 자신의 철학에 인도의 사상을 섞어서 그리스에 가지고 온 것을 두고 하는 말이고 보면 무척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피론은 다크시라 거리에서 자이나 사원의 승려와 사귀는가 하면, 바라문 승려들과 대화하면서, 자이나교, 불교, 힌두교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신과 같이 마음을 고요하게 지님으로, 마음의 동요를 지켜야 한다”는 피론의 사상은 인도철학에서 배워온 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철학은 인도철학과 그리스철학의 융합이었던 셈이다. 피론의 사고를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사물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를 파악해야하고 “우리는 그 사물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그 관계가 우리에게 어떤 이익을 주고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야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피론은, “우리는 사물의 성질을 알 수 없다”고도 말한다. 우리는 사물을 우리의 지각을 통해서 알게 되는 만큼,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고, 사물이 지각되는 양상에 따라서 달라지게 마련“이란 것이다. 요컨대 피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은 이렇다!”하고 가볍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생각으로는 이렇게...” 이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우리와 사물과의 관계는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는가.”라는 명제에 대해서 피론은 “사물과의 관계를 인정하면 사물에 대한 불필요한 집착이 해소되고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으면 “격정”에 휘말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 그의 가르침의 중심인 것이다. 피론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왜 없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생각을 “회의주의”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사물을 너무 성급하게 “이렇다!”하거나 “저렇다!”하고 판단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신의 판단을 절대적으로 바르다고 주장하며 양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피론의 가르침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우리의 머리를 식혀서, 스스로를 사로잡고 있는 격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려면, 피론의 교훈이 더없이 요긴하리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반대의 논리를 가지지 않는 논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어떤 논리도 바르지 않단 말인가? 하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말함으로써 우리는 오히려 피론의 손에 말려들어가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피론을 반대함으로 피론의 말에 찬성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버트란트 러셀이 말했다. “열정을 지닌 의견을 품게 되는 것은 언제나 그 의견에 그럴듯한 근거가 없을 때이다. 실제로 열정이란 그 사람이 품고 있는 의견에는 합리적인 확신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척도일 뿐이다.”그렇게 말한 러셀은 피론의 회의론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무엇보다도 광신을 방지하는 약이 될 수 있는 말이라고도 했다. enoin34@naver.com
    • 칼럼
    2015-12-19
  • 크리스마스 이브 날 밤의 평화
    북아일랜드는 개신교와 가톨릭교도 사이에 길고 지루한 분쟁이 컸던 곳으로 정평이 난 곳이다. 수십 년의 분쟁 속에 2,500여명의 사람이 희생되기도 했다. 얼마나 싸웠는지 이런 말이 속담처럼 생겨났을 정도다. ‘아일랜드에는 개신교도도 많고 천주교도도 많지만 크리스천은 없다’ 그런데 이곳에 하나님의 은혜로 작은 변화가 일어나 큰 파장을 몰고 온 일이 있었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 이브 밤. 시드니 칼라한(Sydney Callaghan)은 감리교 목사였다. 벨파스트에 위치한 그가 시무하는 교회에서는 새벽송을 준비해 가톨릭 신자들이 모여 사는 빈민촌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것을 안 경찰 당국이 즉각 말렸다.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칼라한 목사님은 단호했다. 성가대원들이 빈민촌에 들어가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자 놀라운 반응이 일어났다. 한 집 두 집 불이 켜지면서 함께 나와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때 칼라한 목사님은 이런 말을 남겼다. ‘얼굴을 가진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그들은 왜 위험한 지역에서 기쁨으로 크리스마스의 캐롤을 불렀을까? 이는 주께서 성도들에게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롬12:18) 권했기 때문이다. 고로 성도들에게는 세상을 화평케 할 사명이 있다. 그런데도 현대 교회와 성도들, 목회자와 장로, 성도들이 이권으로 서로 다투고 심지어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처럼 세상 법정에 송사해 교인들이 상처를 입고 오히려 교회의 권위와 하나님의 영광에 누가 되고 있다. 이 같은 교회의 분열이나 분쟁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주님의 몸을 나누는 일로서 실로 용서할 수 없는 엄청난 죄악이다. 분쟁과 다툼으로 나뉘고 갈라지는 것이야 말로 육체의 일이요, 사단의 역사이기 때문이다(갈 5:20). 화평하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장벽을 제거해 하나 되게 하고 화평케 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분은 이를 위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주로 어떤 장벽을 세우는 행위는 주님의 사역을 무위로 돌리고 모독하는 처사다. 만일 우리가 진정 주께 속한 자라면 이를 기준으로 또 새로운 문을 만들어 벽을 쌓고 분리하는 행동을 삼가야 한다. 대신 주께서 자신의 몸을 드려 땅의 모든 벽을 허물고 하늘과 땅의 장막을 폐하셨듯이(마 27:51) 우리도 이 같은 큰 모습으로 우리가 만든 모든 문과 장벽을 허물어 나뉘고 분리되었던 형제들을 하나로 만드는 화평케 자들이 되어야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관용의 마음을 갖고 원수를 사랑해야한다. 세상을 살다 보면 하루에도 수차례씩 이웃의 잘못을 접하게 되고 또 대적하는 사람들을 교회와 직장에서 만날 수도 있다. 그때에 우리는 믿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절제해 그들의 실수나 대적에 대해 비난하거나 대적하지 말고 그 사람의 자리에서 이해하고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며 품어 주어야한다. 만일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주께는 말씀을 불순종한 성도가 되고 또 그들과는 평생의 원수가 되어 올무가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접할 수 없어 영혼이 병들어 가기 때문이다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까?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처럼 사랑해야한다. 그분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범인이 사형에 해당 하는 시점에 이르러 원수의 구명을 탄원해 수사관들을 감복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 범인을 사형에서 구해내 준 뒤 곧 바로 자신의 양아들로 입적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것이 바로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고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다.우리는 그동안 남들과 마찬가지로 나 자신만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만을 사랑하고 살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대적하는 자, 원수 같은 자,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들을 외면하지 않았을까? 이제 금번 성탄절을 맞아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이제라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떠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지 기억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해 보자. 그러면 화평케 하는 자를 축복하시는(시 34:12~14, 마5:9)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마음에 진정한 희락을 얻고(잠 12:20) 만사가 형통하게 되며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고전 4:5).
    • 칼럼
    • 목회자
    2015-12-19
  • 사이비 종말론 자들
    실로 이 시대는 말세의 끝자락에 와 있다. 교계의 저명한 인사들이 지금 시대를 가리켜 ‘말세지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세상의 종말이 어느 정도 다가왔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주님이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마 24:3~14)를 통해 그 날에 상당히 근접해 있다는 것만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현 세상이 종말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세상의 종말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주님의 초림으로부터 이 세상의 종말은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세상의 종말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결정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고로 당장 세상의 종말이 오지 않는다고 조급한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세상의 종말은 우리의 생애 중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따라 지금 세상이 종말을 향하여 진행되고 있음을 확신하고 종말을 늘 준비하며 경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종말의식이 팽배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적그리스도 즉 이단의 미혹을 받고 실족하기 때문이다. 사이비 종말론자들 즉 이단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어떻게 미혹하였는지 살펴보자. 어떤 이들은 신은 하나님 한 분이 아니라 부처, 알라 등 여럿이 있을 수 있으며 따라서 구원의 길은 그리스도 외에도 여럿 있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에 입각한 다원주의 신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21세기의 첨단 사상이라는 포스트 모너니즘을 표방하며 스스로를 종교의 벽을 헐고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선구자로 자처 한다. 처음에는 종교 간의 대화를 주장하다가 점차 그리스도 없이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다 급기야 ‘예수는 없다’고 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는 기독교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 어두운 시대는 지나가고 모든 종교를 통해 구원을 얻는 광명의 시대가 열렸다 등의 헛소리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자들이 아닐 수 없다. 예수가 없다는 말은 곧 창조주도 없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 왔다는 말일까? 혹 진화론을 따라 단세포에서 왔거나 기껏해야 원숭이로부터 왔다는 말일까? 아니면 만물은 무시무종이니 전생으로부터 윤해했다는 말일까? 참 안타깝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단자들의 소리를 경청하지 말아야한다. 그리스도는 만유의 창조주이시자 만유의 중심이기 때문이다(롬11:36). 어떤 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하나님 자신으로 인정을 하지 않고 ‘한 인간’이라고 주장 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신성만을 인정을 한다. 심지어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제자들이 조작한 설화라고 주장한다. 즉 이들 이단들은 모두 성경을 보지 않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자들은 언제나 성경에 없는 말을 갖다 붙인다. 성경은 거듭 주님의 재림의 때는 알 수 없다하는데(행1:7) 이 말씀을 가감하여 주님의 재림의 때도 구체적인 날짜나 장소 등을 언급하는 것이다. 이에 귀가 얇은 성도들은 쉽게 속아 넘어 간다. 대표적인 예가 1992년 10월 28일 이장림 사건이다. 이처럼 교회와 성도들이 사이비 종말론에 집착하게 되면 신비주의나 맹목적인 광신에 빠지거나 아니면 시한부 종말론에 빠지기 쉽다. 그 결과 현재의 삶을 등한시 한 채 환상과 망상에 사로잡혀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 한 걸음 더나가 이단들은 한술 더 뜨고 나선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직접 말씀하셨다한다.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가 아닌 영적인 비밀의 말씀을 강조하기도하고 기도 중에 음성이나 환상으로 보여주셨다고 하면서 각종 거짓 이적을 보이면서까지 성도들을 거짓 교훈으로 이끌곤 한다. 그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종교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는다. 즉 종교를 마치 시장의 상품처럼 거래의 대상을 삼는다. 또 어떤 자들은 주의 재림이 가까웠으니 재산이 필요 없으므로 모두 바치라고 하면서 자기는 그 돈으로 엄청난 부동산을 사들이기도 한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교회 안에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가끔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마치 중세시대 당시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팔았던 것처럼 성경 말라기의 말씀을 교묘하게 인용하며 바친 십일조와 축복의 양이 비례한다며 십일조를 강요하는 것 등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복채나 굿 값에 따라 영험이 달려진다고 말하는 점쟁이나 무당의 행위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으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서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마10:8). 고로 성도들은 이러한 사이비 종말론 자들의 거짓 교훈과 미혹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마7:15~23). 따라서 모든 성도는 각자 받은 은혜와 믿음을 잃지 않도록 늘 깨여 있어야 한다.
    • 칼럼
    • 목회자
    2015-12-11
  • 회의주의의 효능
    "반대할 주장을 지니지 않는 주장은 존재하지 않는다.”위에 소개한 어록은 몽테뉴가 그의 <수상록> 2권 15장에서 인용하고 있는 피론의 말이다. 몽테뉴는 “‘쾌락이란 순간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쾌락도 진정으로 즐거운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의견에 대해서 ‘아니다. 순간적인 것이기 때문에 쾌락은 즐거운 것이다.’”하는 반대 의견도 성립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기 위해서 위의 말을 인용했다는 것. 피론의 제자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어떤 판단에도 과오가 끼어들 가능성이 있기 마련이고, 그 과오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하나,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것이 스승 피론의 주장이요 가르침이었다는 것. 당사자 피론은 기원전 334년 봄, 알렉산더가 4만의 군사를 이끌고 헤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넜을 때 동행했다는 3철학자 중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알렉산더가 원정을 나서면서 장병과 더불어 철학자를 동행했다는 일화는 두고두고 화제가 되고 있지만, 대왕의 족하벌이 되는 칼리스테네스는 원정도중 바크토리아(오늘날의 아프가니스턴 근처)에서 살해되었고 아나크사르코스는 귀국 도중 키프로스 섬에서 참살되었다. 오직 피론만이 종군11년의 노고 끝에 겨우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전해주는 기록을 따르면, 피론의 철학은 알렉산더가 그리스에 공헌한 가장 큰 선물이었다고 한다. 피론이 자신의 철학에 인도의 사상을 섞어서 그리스에 가지고 온 것을 두고 하는 말이고 보면 무척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피론은 다크시라 거리에서 자이나 사원의 승려와 사귀는가 하면, 바라문 승려들과 대화하면서, 자이나교, 불교, 힌두교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신과 같이 마음을 고요하게 지님으로, 마음의 동요를 지켜야한다”는 피론의 사상은 인도철학에서 배워온 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철학은 인도철학과 그리스철학의 융합이었던 셈이다. 피론의 사고를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위해서는 먼저 “사물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를 파악해야 하고 “우리는 그 사물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그 관계가 우리에게 어떤 이익을 주고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야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피론은, “우리는 사물의 성질을 알 수 없다”고도 말한다. 우리는 사물을 우리의 지각을 통해서 알게 되는 만큼,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고, 사물이 지각되는 양상에 따라서 달라지게 마련“이란 것이다. 요컨대 피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은 이렇다!”하고 가볍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생각으로는 이렇게...” 이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우리와 사물과의 관계는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는가.”라는 명제에 대해서 피론은 “사물과의 관계를 인정하면 사물에 대한 불필요한 집착이 해소되고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으면 “격정”에 휘말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 그의 가르침의 중심인 것이다. 피론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왜 없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생각을 “회의주의”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사물을 너무 성급하게 “이렇다!”하거나 “저렇다!”하고 판단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신의 판단을 절대적으로 바르다고 주장하며 양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피론의 가르침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우리의 머리를 식혀서, 스스로를 사로잡고 있는 격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려면, 피론의 교훈이 더없이 요긴하리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반대의 논리를 가지지 않는 논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어떤 논리도 바르지 않단 말인가? 하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말함으로서 우리는 오히려 피론의 손에 말려들어가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피론을 반대함으로 피론의 말에 찬성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버트란트 러셀이 말했다. “열정을 지닌 의견을 품게 되는 것은 언제나 그 의견에 그럴듯한 근거가 없을 때이다. 실제로 열정이란 그 사람이 품고 있는 의견에는 합리적인 확신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척도일 뿐이다.” 그렇게 말한 러셀은 피론의 회의론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무엇보다도 광신을 방지하는 약이 될 수 있는 말이라고도 했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12-11
  • 고난에 대한 선교적 의미
    2015년 한해를 마무리 짖는 시간이 되었다. 삶은 누구에게나 희망과 고난이 겹치는 것 같다. 활기 넘치는 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또 다른 해인 2016년을 준비하면서 이러한 삶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고난 속에서 허우적거린 사람들은 어서 속히 이러한 환경에서 벗어 나기위해 기도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라고 말씀 하셨다. 바울의 선교 초기에 로마에 있는 교우들이 얼마나 많은 박해 가운데 있었는가를 집작하게 하는 대목이 엿보인다. 성도들의 삶이란 간단하지 않다. 다른 말로 하면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가 있다. 칼빈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각각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했다. 성화의 길은 어차피 십자가의 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도 독생자이신 예수님께 십자가의 길을 통과하게 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지체들의 고난은 복음을 방어하고, 모든 형태의 의를 방어하는 일과 대적들로부터 오는 핍박에서 일어나게 된다. 칼빈은 가혹한 고난을 통해서 주님과 사귐으로써 고난 자체가 우리에게 복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촉진하는 수단이 된다고 하였다.여기에서 우리는 칼빈은 성도들의 십자가와 성화의 필연적 연관 관계를 다음의 몇 가지로 논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성도가 일생동안에 계속적으로 십자가 밑에서 지내야할 이유는 고난이 자아의 교만을 억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며 겸손을 배우는 길이라기 때문 이라고 하였다. 성도는 관이라는 역경의 병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경고를 받아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되며, 육에 대한 사악한 신뢰를 탈피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 하게 된다. 둘째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신실을 경험하는 기회와 미래에 대한 소망을 준다. 셋째는, 십자가는 우리의 인내와 순종을 훈련시킨다.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들에게 주신 인내력과 지조를 밖으로 드러냄으로써 그들의 인내를 시험 하신다(창 22:1,12; 벧전 1:7)고 말한다. 모든 일에 하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면, 우리는 백방으로 이 순조의 습관을 우리에게 훈련시키는 하나님의 처사를 결코 거부해서는 안 된다. 넷째는, 십자가는 약이며, 아버지께서 주시는 징벌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끌려 그의 인자하심을 감사하며 사랑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나 우리는 반대로 악의를 품고서 하나님의 관대한 사랑을 받고도 계속해서 타락한다. 따라서 성도가 충동으로 날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징벌을 내려서 억제시킬 필요가 있다. 다섯째, 십자가 밑에서 고통당하는 성도는 하나님 안에서 위로를 받게 된다.개혁신학자인 칼빈 목사님께서 주장하신 고난에 대한 해석은 성도는 고난이 왔을 때에 축복의 기회로 활용하는 침착한 마음과 지혜가 필요함을 말씀하고 있다. 십자가의 길은 성도에게 유익으로 주는 변장된 축복이다. 성도가 십자가를 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 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의와 공평이요,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기를 하나님은 지극히 원하신다는 사실이다.선교적인 삶이란 항상 고난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불충분은 물론 가정 속에서 직장 속에서 그리고 넓게는 사회 속에서 넘어야 할 산이 많음을 직감한다. 그렇기 때문에 좌절을 경험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이 존재하는 한 좌절과 고난은 기차의 레일과 같이 늘상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고난을 멀리하는 시간은 모든 생명의 세포가 활동을 중지한 죽음일 것이다. 왜냐하면 죽은 세포는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고난이야 말로 선교적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친하게 지내야 할 친구라고 본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5-12-11
  • (정신재) 고향에 가면
    고향에 가면 목 영 민고향에 가면 산에 새소리 들리고외양간에 소가 여물을 먹고똥개는 툇마루에 낮잠을 자고뒤뜰에 암탉은 알을 낳았다고 울어댄다할아버지는 장에 가서 친구 만나 곡차 드시고거나하게 취하셔서 또 늦으시나 보다금년 봄에 처마 밑에 둥지를 튼 제비는남쪽 나라로 떠난 지 오래고 뒷동산에 대추나무올해도 가지가 휘어지게 달려 있다길 건너 산에 밤나무에는 탐스러운 밤이 주렁주렁달려 있다 지금도 고향에 가면 할아버지 할머니버선 발로 나와 반갑게 맞으시고씨암탉 잡아 주실 것만 같은데이미 저승에 가신 지 오래다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고향 언제나가고 싶은 고향 내 고향이다하나님의 자녀에게 고향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지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인간은 누구나 다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워하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곳은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는 곳이지요. 고향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주님을 통해서 갈 수 있는 나라가 그곳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행 2:28). 이곳은 믿음이 행함과 함께 온전하게 될 때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약 2:22). 이곳에 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 합니다(에 2:22).위 작품에서 화자는 고향에 가고 싶어합니다. 그곳에는 정들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시고, 소와 개와 암탉과 제비가 평화롭게 있는 곳입니다. 그리하여 정든 사람들이 정을 담뿍 담아서 나누어 주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화자는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고향 언제나/ 가고 싶은 고향 내 고향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보다 더 가고 싶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는 곳입니다. 진정으로 가고 싶은 곳입니다.
    • 칼럼
    • 기독시선
    2015-12-11
  • (정신재)병원
    병원 원 응 순나를 외면하고 너를 마중하는괴로운 표정이 방마다 걸리고빠알간 의식이너울너울 춤추듯 왕래하는공포를 주사하고-,사늘한 미소의 언저리나를 헌신하는모순 속에희생을 투약하는 창구.항시 나를 외면하고너를 마중하는밀림지대,거래의 ‘메스’가 번쩍이는수술대 위,환자의 아픔이 꿈틀거리는시장市場,상냥한 점원의 손길이독점하는 ‘디파트먼트’,항시나를 외면하고너를 마중한다.“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 3:6). 베드로가 성전 입구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칠 때 한 말이다. 위 시에서 화자는 “나를 외면하고/ 너를 마중”하면서 치유를 간구하고 있다. “너”는 의를 함축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의로써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기를 원하신다. 의를 말씀하시는 진리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자.
    • 칼럼
    • 기독시선
    2015-12-04
  • 장로 대통령의 죽음이 남긴 교훈
    이 땅의 민주화의 거목으로 사셨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를 보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고 바울사도는 말씀하였지만 그분의 빈자리가 크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특히 장로 대통령으로서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믿음의 정치를 기대하게 만든 장본이기 때문이다. 2015년 11월 22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김영삼 장로님의 생애를 조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1927년 태어난 김영삼은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을 둔 덕분에 생활의 큰 어려움 없이 자랐다.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6.25 전쟁이 끝난 후 정계에 입문한 그는 자유당 공천을 받아 만25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비록 그는 자유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3선 제한철폐에 반대하고 탈당하고 민주당에 입당해 정치 생활을 이어갔다. 5.16 쿠데타 이후 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고, 출소 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다가 질산 테러 사건을 겪기도 했다. 당시는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국내적으로 수없이 많은 박해를 받았다. 특히 박정희 정권에서는 YH 사건으로 김영삼의 존재가 정권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 경호권 발동으로 수백 명의 무술경위를 출동시켜 놓고 국회 별실에서 김영삼의 국회의원직 제명안을 10여 분 만에 변칙 날치기 통과시켰다. 이 사건으로 야당 국회의원들은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고, 부마민주항쟁을 촉발하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급작스러운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이후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야당인 신민당이 직선제 개헌에 합의했지만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이 정권을 잡아 민주화의 길은 다시 멀어졌다.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에게는 사형을 선고했고, 김종필은 보안사령부에 감금시켰으며, 김영삼은 가택 연금 조치를 취하며 민주화 세력을 억압하였다. 그러나 김영삼은 단식투쟁을 벌이는 등 정권에 굴하지 않았고, 결국 오랜 민주화 운동 끝에 1987년 6.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으나 제13대 대선에서 김대중과 단일화에 합의하지 못하면서 군사정권의 후신인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민주화 운동의 두 거목이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충격은 컸다. 그리고 당시 극도의 여소야대 구도에 힘겨워했던 노태우 정권은 김영삼과 김종필에게 손을 내밀었고, 이는 3당 합당이라는 우리나라 정치사의 크나 큰 대사건으로 이어졌다.3당 합당으로 거대 정당의 힘을 얻은 김영삼은 다음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와 또 다시 맞붙어 42%의 지지를 받으며, 33.8% 지지에 그친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은 군사정권을 종식시킨다는 의미로 정부의 명칭을 ‘문민정부’로 지었으며, 재임 초기 명성에 걸맞은 행보를 계속했다. 그는 군대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를 숙청하면서 군사정권이 다시 들어서는 싹을 잘라 버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키웠고, 전두환과 노태우 2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하나회는 하룻밤 새에 김영삼 대통령의 발 빠른 행보로 소멸하게 됐다. 사람은 누구든지 공과가 있다. 그는 군사 정권과 손을 잡아 대통령이 된 것은 비판 받을 부분이지만, 자신이 대통령이 된 이후, 하나회를 숙청하고 전두환과 노태우 전 대통령을 법정에 세우는 등 역사바로잡기 운동을 하면서 민주주의를 다지는데 큰 공을 세웠다.또한,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면서 검은 돈의 유통을 막아 경제민주화의 토석을 다졌으며,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 규명,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지방자치제도 실시 등의 업적으로 여론조사 공식 지지율 90%를 기록하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청춘을 바쳤으며, 대통령에 당선되고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김영삼 대통령이지만, 대통령 당선을 위해 군사정권과 손을 잡은 ‘3당 합당’과 국민들을 고난에 빠뜨린 ‘IMF 사태’는 그의 그림자다.최근 우리는 현대사에 기독교가 끼친 영향력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시기에 장로님으로서 우리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긴 김영삼 대통령의 리더십이 더욱 그리워진다. 아쉽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편히 쉬시기를 기도해 본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5-12-04
  • 아우슈비츠의 음악대
    1937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우람한 체격의 빌헬름 프루트벵글러와 남달리 키가 작은 아르투르 토스카니니 두 거장이 만나 언쟁을 벌인다. 토스카니니 왈: “나치의 나라에서 지휘하는 자는 모두 나치이다.” 이를 받아 프루트벵글러는 “예술은 정치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베토벤이 연주되는 곳에서는 언제나 자유가 있다.”하고 응수했다. 만약에 둘의 만남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아우슈비츠의 음악대>란 책을 읽고 난 다음이었다면 같은 말을 주고받을 수 있었을까 하고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아우슈비츠의 음악대>는 1948년, 프랑스에서 출간 책으로, 같은 음악가라도 유대계는 배척을 받아 마치 가축처럼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던 나치 지배시절, 우연히도 음악대원으로 발탁되어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시몬 랙스(Simon Laks)와 르네 쿠디(Rene Coudy) 두 사람이 펴낸 수용소 생활의 기록. 어느 날 ‘나’는 수용소에 도착한 커다란 짐짝 속에서 나무로 만든 보면대를 발견하고, 이 죽음의 수용소에 왜 보면대가 필요할까 생각했다. 장송행진곡을 위해서? 아니면 죽음의 무도회를 위해서? 나의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너희 중에 음악가가 있는가?”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수용소에 이송되기 전, 색소폰을 연주하는 한편 편곡가로도 활동했던 ‘나“는 그렇게 아우슈비츠 음악대원 명단에 오를 수 있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수용소 이발사는 너는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부러워하는 것이었다. 음악대원은 모두 35명. 하루에 두 차례, 새벽에 수용수가 작업하러 나갈 때와 저녁 무렵 그들이 돌아올 때 연주했다. 그 밖의 시간에는 노동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스실과 총살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하나, 언제 위기가 닥쳐올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나’는 열심히 연주하며 간부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독일군의 유대인 학살은 계속되었다. 수인들이 가스실이나 사형장에 끌려갈 때도 우리는 연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러 친위대원들과 수용소 간부들의 파티에 불려가 연주하기도 했고, 사령장관 슈바르츠 후버의 탄생일을 위해서는 특별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어느 여름날 오후, 수용소 간부들의 요구를 따라 독일 오페레타의 서곡을 연주하고 있었을 때, 솔로에 열중하는 프룻 주자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열중함으로서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다하는 표정 말이다. 그래서 그는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여자들을 실은 트럭행렬이 화장터로 달려가는 것도 보지 못한다. 실려 간 여자들 가운데는 그의 딸도 섞여 있었는데 말이다. 비유대인인 선임자 악장이 권리를 남용하다가 개처럼 끌려가 목숨을 잃는가하면, 음악대와 친하게 지내던 집시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추는 일도 있었다. 또, 사령장관이 화려하게 차려입은 아내와 일여덟쯤으로 보이는 아들 형제를 데리고 와서는 행진곡을 연주하라 명령했을 때는 “왜 우리에게는 그의 명령을 거부하고 그의 두 아들을 끌어다 불 속에 던져 버릴 용기가 없는가?”하는 생각을 하며 자조하기도 했다. 그러니 연주가 어찌 아름다울 수 있었겠는가. 연주는 슬픔과 증오가 얽힌 영혼의 갈등이 번져나가는 그런 음악이었다.그러나 ‘나’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상상을 초월하는 특이한 일만이 아니라, 삶의 기본적인 조건이 철저하게 박탈되고 있는 지옥 같은 세계에서도, 인간의 삶이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생활이 놀라우리만큼 일상적으로 영위되고 있었다는 사실도 기록한다. 몰래 식량과 생활필수품은 물론 귀금속의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 생각해 보면 참으로 기이한 일이지만, 하루에 수백 수천의 인간을 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음악을 열렬히 사랑하며 음악대원들과 친해지려 하는 독일 친위대원이 있었다는 것은 더욱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무엇보다도 음악을 통해 이루어진 그들과의 한 가닥 인연으로 해서 아우슈비츠 음악대에 속한 유대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음악활동은 “엄격한 규율 밑에 있는 수용소의 활동이 빈틈없이 진행하기 위한 일인 동시에, 수용수들을 감시하는 친위대를 즐겁게 해서 그들의 사기를 돋우어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에도 최후의 순간이 온다. 소장은 떠나면서 말했다. “나의 음악대여!”하고. 물론 그는 체포되어 죄수가 되지만 수용수들은 해방된다. 그러니 나치를 낳은 독일 민족과 그들의 희생이 되었던 유대민족이 더불어 다른 민족들에서는 볼 수 없는 깊은 음악적 유대를 유지하고 있다는 특이한 현실을 이해하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12-04
  • 주의 일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설교자인 맥클라덴 목사가 한 가정을 방문했다. 예배를 마치고 다과를 들던 중 그 가정의 부인이 말했다. ‘목사님, 저는 주님께 너무도 죄송합니다. 소녀 시절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작정했었는데... 돌이켜 보니 주님께 바친 봉사나 헌신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목사님은 부인에게 그 동안 무엇을 하며 살았느냐고 물었다. 부인은 한숨을 쉬며 ‘저는 하루 세끼의 음식 준비와 설거지를 했어야 했어요. 식구들의 빨래를 모두 해야 했고 또 아이들을 돌봐야 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못 했어요’ ‘자매님은 아이들이 몇입니까?’ ‘목사님, 우리 아이들은 넷이 아닙니까? 성경대로 이름을 지어 큰 아이는 마태, 다음은 마가, 셋째는 누가, 그리고 막내는 요한이지요’ 목사님은 다시 물었다. ‘그 아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목사님께서 아시는 대로 큰 아이 마태는 중국에서 선교사로, 둘째 마가는 아프리카에서 선교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우리 교회에서 파송하지 않았습니까? 누가는 제 형과 함께 중국에서 일하고 있구요. 막내 요한은 오늘 아침 나에게 말 하더군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시는 같다고요’ 맥클라덴 목사는 말했다. ‘그런데도 자매님은 자기의 삶을 낭비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자매님이 하늘에 갖고 있는 그 큰집이 부럽고 자매님이 주님의 보좌에 아주 가까운 것처럼 나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오늘 교회 안에 그리스도인들을 보자. 각각의 은사와 종류와 분량이 다른 것을 볼 수가 있다. 곧 하나님은 각 사람의 능력과 품성과 기질 등에 따라 그에 필요한 적절한 은사나 사명을 주셨다(고전 12:4~11). 즉 목회자, 장로, 정치인, 경제인, 과학자, 큰 능력자나 작은 능력자 등이 있다. 그 외에도 각 사람이 받은 은사는 다양하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깨닫지 못하고 목회자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귀한 주의 일이고 그 외의 일 등은 세속적인 것이라고 생각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 아닐까? 일례로 한 선교 단체에서 친선 체육대회를 개최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운동경기를 하기 전 각 부서의 사람들이 모여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시설 관리부 사람이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일 우리 부서를 이기는 팀에게는 앞으로 화장실 청소도 안 해주고 책상도 안 고쳐 줄 거야’ 그랬더니 식당에서 일하는 한 집사님이 ‘아이고, 우리부서는 어떻고 만일 우리 부서를 이기는 팀에게는 앞으로 밥도 안해 줄 거야’ 그리고 이러한 농담이 오고간 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즉 그 선교 단체 가운데 할 일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또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가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해 나가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일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제각기 합당한 은사와 사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고 계신다. 우리 각자에게도 은사 즉 주께서 필요에 따라 주신 고유의 선물이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선물은 무엇일까? 그 것이 어떤 은사든지 그것을 소중히 생각하고 주신이의 뜻에 맞게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사용해야 한다. 헌데 이것은 축복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외롭지 않으며 다른 이를 섬기면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복이다. 그러면 주께서 주신 은사를 다른 사람들과 값없이 나누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세월을 아껴야 한다(엡 5:16). 모든 일에 때가 있기 마련이고 이때를 놓치면 그 손실이 크기 때문에 우리는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도록 항상 준비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을 보면 기회를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어진 기회를 사장시키는 사람도 있다. 인생의 성패는 기회를 어떻게 활용 하는가 좌우하는데 있는데 말이다. 만일 우리가 주께서 주시는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고 준비하고 기다린다면 기회를 만드는 자가 되나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으면 기회를 잃고 사장하고 평생 후회하는 자가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인생이 짧고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간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고 주께서 봉사의 기회를 주실 때 열심히 섬기고 준비에 만전을 기하여야 한다. 혹 재물이 없다면 기도를 통해 봉사하고 머리가 없거든 팔과 다리로 감당하며 이것조차도 없거든 환한 웃음과 친절과 칭찬으로 다른 사람들의 용기와 신앙을 북돋아 주자. 이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신앙인의 현명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우리의 결산의 날에 주께서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으시며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도 기억하자(눅 12:48).
    • 칼럼
    • 목회자
    2015-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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