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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아 이야기
    “아름다움, 매력, 열정은 라헬 몫이지만, 강하고 친밀한 끈, 다시 말해서 성실하고 지속적인, 그래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사랑은 레아의 몫이었다.” 랍비 아딘 스타인잘츠(Adin Steinsalts 1937~ )의 해설에 대해서 평균적인 유대인들은 공감을 표하는 것 같다.그러니까, 눈의 아들 여호수아나 사울과 같이, 한 때 강력한 인상을 심었어도, 단명하거나 허무한 일생을 살다간 라헬의 자손들 보다는,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여 다윗의 가문을 이어온 레아의 자손을 꼽는다는 말일 터. 그러나 레아가 족장들의 처첩들 중 가장 불행했던 여인이었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으랴!<창세기>에서 레아는 라헬의 언니로 등장한다. 그런데도 야곱이 쌍둥이 형에서의 노여움을 피해 외가의 땅 하란으로 왔을 때,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쪽은 언니 레아가 아니라 동생 라헬. 우리가 대하는 대부분의 <창세기>는 ‘라헬의 눈빛이 레아의 것보다 훨씬 빛나고 매력적’이라 번역하고 있지만, 그 대목을 ‘레아의 시력에는 결함이 있다’로 읽을 수도 있단다. 그래서 양들을 이끌고 우물가로 가는 일은 동생 라헬이 맡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야곱이 언니 레아 보다 동생 라헬을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고, 야곱과 라헬이 첫 눈에 서로 반하고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운명이 정해놓은 수순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 모든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레아가 야곱의 첫째부인이 된다. 거기에는 야곱의 외삼촌이자 레아와 라헬의 아비인 라반의 음모가 끼어들기는 했어도, 신방에 들어온 여인이 7년이나 기다리던 라헬이 아님을 알아차리지 못한 야곱의 실수인들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지 않는가. 적어도 고대인의 운명론을 탐탐하게 여길 수 없어하는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레아가 야곱의 첫 부인이 된 책임은 야곱 자신이 질 수밖에 없는 노릇. 레아에게는 동생 라헬이 지닌 그런 매력이 없기에 라헬처럼 야곱과 더불어 천의무봉의 애정을 즐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야곱의 사랑을 얻고자 그녀의 모든 것을 바치고 수모를 인내할 수 있을 뿐이었다. 슬픈 여인 레아는 막무가내로 야곱을 차지하려했다. 그녀의 자식들조차도 그녀의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 어쩌면 많은 유대인이 라헬보다 레아를 받들려하는 데에는, 그녀의 슬프고도 인고에 찬 일생에 대한 동정 때문인지도 모른다.야곱이 무려 7년 동안의 종살이를 마치고 고대하던 첫날 밤을 치를 때,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은 몸매가 아름답고 용모도 예쁜 라헬이 아니라, 못생긴 언니 레아를 신방으로 들여보냈고, 야곱은 레아와 황홀한 ‘밤’을 보낸다. 그것은 야곱의 실수이기도 하지만, ‘밤’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라는 것이 토마스 만의 익살이다. 만은 그의 명작 <요셉과 그의 형제>에서 ‘밤’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니까 야곱의 실수는 역사상 처음 있은 일이 아니라는 것. 이집트 신화에서, 아눕(그리스 이름으로는 아누비스)의 이야기에서 그것을 증명하려한다. 아눕은, 아버지 우시르가 아내 에세트를 찾아간 다는 것이, 어두운 ‘밤’이라 엉뚱하게 동생 세트의 아내 넵토트와 동침한 결과로 태어난 아들이란 것. 그 모든 것은 ‘어둠’ 탓이었다는 것.“밤에게는 집착이란 것이 없지 않는가. 낮이 일깨워주는 편견이란 밤이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거든. 밤이 어떤 진실을 아느냐고? 여자의 몸이라는 게 다 같아서,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생산하기에는 그만한 게 없다는 게 진실이지. 여자가 구별되는 건 얼굴뿐. 그런데도 얼굴만 보고 이 여자한테서 자식을 생산해야지, 저 여자한테서는 자식을 생산할 생각이 없다는 둥 지껄이지. 그런데 얼굴이란 온갖 착각과 상상으로 가득한 낮의 얼굴이거든. 하지만 진실을 아는 밤 앞에서 그 얼굴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1권 6부 역겨운 것)” 얼굴과 밤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했다. 밭은 씨를 뿌리기만 하면 되는 것. 그 씨가 르우벤이란 힘센 장사를 태어나게 했을 뿐. 급한 성질 탓에 ‘마구 쏘아 대는 물’, ‘아무데서나 넘치는 물’이라 불리던 그도 아버지의 첩과 잠자리를 함께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패일언, 결국 야곱 곁에 묻힌 것은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다. <창세기>가 읽히는 것은...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09-03
  • 인생의 여정에 동행하신 하나님
    한 성도가 꿈속에서 자신이 걸어온 발자국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발자국은 두 사람의 것 이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발자국이 누구의 것인지 확인해 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발자국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높은 산을 오르거나 고개를 넘어갈 땐 두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의 발자국만 있었다. 그가 이상스럽게 여겨 예수님께 물었더니 ‘평탄할 때에는 내가 언제나 동행하였지만 어둡고 힘든 곳을 지날 때엔 내가 너를 안고서 지나갔다’고 대답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 동행해 주신다. 인생을 살다보면 때론 고난이나 혼자서는 도저히 헤어나기 힘든 수렁에 빠질 때가 있다.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하여 그 분함을 어디에 어떻게 호소해야 할지 난감할 때도 있다. 나만이 이런 일을 당한다는 생각에 더 서럽고 고독한 적도 있다. 부부간의 갈등, 친구의 변심, 실직, 갑자기 무서운 질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는가 하면 채무자가 되어 하루아침에 부도를 내고 도망가는 바람에 꾸어 준 돈을 한 푼도 못 받는 경우도 있다. 또 갑작스런 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고통을 겪기도 한다. 이럴 때 우리는 흔히 통곡하며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여 원망 한다. 마치 오늘로서 삶이 끝나 버릴 것만 같이.. 실제 적쟎은 사람들이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삶을 포기 한다. 마약이나 알콜 중독자가 그 한 예다. 그들은 대부분 삶을 포기한 자들이다. 현재의 처지가 너무 절망스러워서 미래 역시 현재와 별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암담한 생각에 상습적으로 술 마시고 마약을 복용 한다. 극단적으로 삶을 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자살률은 세계 5위로 인구 10만 명 당 226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루에 평균 36명 정도가 자살한다고 한다. 허나 이것은 문제 해결에 대한 바른 자세가 아니다. 고난을 당할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고난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고난을 주시기 때문이다. 즉 고난을 통해 마음이 겸손해진 후에 복을 주신다. 그러므로 안이하고 태만한 불신앙을 버리고 고통을 꿰뚫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한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듯이 인생 여정에서 불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자꾸만 멀어져 가고 있지는 않는가? 급작스럽고 예측 불허의 일이 일어나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쁠수록 돌아서 가라’ 는 옛말이 있다. 그러기에 가장 가까이에서 나의 고난과 억울한 사정을 알고 계시는 주님을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때 염려는 해 줄 수 있어도 실제 도와주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난을 보시고서 그냥 보고만 계시지 않는다. 고난과 역경 속에 친히 찾아오셔서 동참하시고 대신 무거움을 건져 주시며 함께 감당하신다. 고로 고난을 당할 때 나 혼자 억울함을 당한다고 생각지 말자.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과거에도 현재도 또한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다.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만난 자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 과정을 겪는 것은 누구나 힘겹다. ‘정말 하나님께서 식구들이 편히 거할 수 있는 전세방을 주실까’? 자녀들이 많아 이사할 전셋집도 구하기 힘든 처지에 놓인 한 집사님이 있었다. 그러나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이 거처를 놓고 기도하는 집사님께 미쳐 전셋집은 물론 몇 년 후 훌륭한 자기 집을 마련하도록 도와 주셨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이 있더라도 막상 다른 어려움에 처하면 또다시 하나님을 신뢰 하지 못하고 자신의 힘의 한계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내가 어떻게 이 엄청난 일들을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할 수 없어’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 하지 않고 포기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허나 우리들이 이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진리는 사람 뒤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하나님께서는 시련 속에서 당신을 찾는 자에게 오히려 더 큰 의미로 또한 더 큰 사랑으로 다가오신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가운데서 동행해 주시며 형통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람이 할 수 없다고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했을 때 바로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강하신 손을 더하셔서 모든 환난에서 건져 내신다. 따라서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은총은 비례하여 나타난다. 사람이 더 이상 책임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하나님의 은총이 전폭적으로 역사하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고로 현재 당하는 고난으로 괴롭더라도 절망하지 말고 믿음으로 고난 뒤에 섭리하시는 손길을 바라보자. 환난 중에 도우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손길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5-09-03
  • 이발소 풍경
    이발소 풍경 정 신 재고즈넉한 햇살이 문을 두드린다눈 먼 창문을 넘어서면[아가의 기도]를 건너하루치의 손님을 기다리는 여자고향 얘기를 서러운 밥에 말아 먹고가죽띠 위로 날 선 칼을 간다도시의 거품을 걷어낸 후넋두리의 수염은여자의 손길에 잘려 나가고파아란 하늘과 만나는 거울학벌이 날아가고이데올로기가 날아간 실내가바다처럼 가라앉고거울 위에선영원의 친분마저나뭇잎으로 된 치마를 벗는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헐벗은 소외 계층의 아픔을 위로하는 구세주였습니다. 제자들이 몇 년간 예수님을 믿고 따르다가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자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사셔서 그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상처난 손으로 제자들을 위로하셨지요. 제자들보다 더 큰 상처를 받으셨으면서도 당신의 제자들을 직접 챙기신 주님이 계셨기에, 베드로는 “쿠오바디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며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갔고, 바울은 죄 없는 죄수의 몸으로 복음 전파를 마다 하지 않았지요. 필자는 한창 성담론을 연구할 때에 만성 신부전증을 앓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작가로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소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제가 여기 있나이다. 주님 뜻대로 행하소서.”라고 고백하였을 때, 주님은 삼류 콤플렉스와 추남 콤플렉스에 차 있던 나를 치유시켜 주시고, 문서 선교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침마다 영감을 폭포수처럼 내려 주셨습니다. 나는 그 영감을 받아 적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을 직접 체험하시고,상처받고 아픈 영혼을 가진 사람들에게 직접 찾아오십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 칼럼
    • 기독시선
    2015-08-28
  • 구원의 축복은 선교의 열매
    신앙의 꽃을 무엇인가. 이는 구원의 축복을 받는 것이다. 즉 우리는 무엇 때문에 주일을 지키고,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고, 헌신을 하고, 심지어 오지에 가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비행기 사고로 죽기까지 하는가? 이러한 문제는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구원을 얻어 영원히 사는 영생의 길을 얻기 위함 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따라서 마태복음 16:26에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계신다.빌립보서 2장12절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역과(2:5-11), 대속적인 사역의 결과를 통해서 인간이 이루어야할 자신들의 구원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특히 바울은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논의 하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라고 언급하고 있다.감리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John Wesley는 선제적 은총의 구원을 이야기 하면서 인간이 구원을 받는 과정 가운데 다음의 세가지 역할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첫째는, 구원을 사모하는 열심을 내라. 둘째는, 마음의 문을 여는데 있어서 분명한 결단을 하라. 셋째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자유 의지적 참여라고 말하고 있다.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사역은 인간을 구원 시키는 것이다. 선교지에서 사역을 가다보면 반드시 타종교와 부딪치게 된다.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구원의 문제로 나아가게 된다. 세상의 대부분의 종교들도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 사상이나, 적선을 통한 윤리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본다. 따라서 좋은 일과 적선을 많이 해야 극락왕생 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주류가 급기야는 살생을 금지하고, 동물을 숭배하고, 자연을 숭배하는데 까지 이르기도 한다. 이슬람교에서는 다섯 가지의 계울(신앙고백, 적선, 매일 다섯 번의 기도, 금식, 순례)을 지킴으로 천국 간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자력 구원을 말하고 있으며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기독교의 신앙과 배치된다.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만약 범죄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이 없다면 인간은 여전히 죄 가운데서 구원의 감격이 없는 불안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구원 이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지은 죄 값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형장으로 보내서 피 값으로 인간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고 사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인간이란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구원의 방주에 믿음을 통해서 승선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구원을 얻기 위한 과정 속에 인간에게 선한 욕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인간이 선한 욕심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느냐의 문제 이다. 그것은 구원이 인간에게 얼마나 필요 하느냐의 문제와 직결된다.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적어도 네 가지의 크나큰 은혜가 우리 속에 나타난다. 이는 사죄의 확신, 삶의 목적, 새로운 능력을 공급받는 것, 그리고 평안 이다. 인간은 평안을 소유함을 통해서 얻은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넘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요한복음 14장 27에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원 하지도 말라”라고 말씀 하셨다. 사실 자고 깨고 나면 날마다 우리는 서건 사고를 접하게 된다. 여러 가지 사고를 보면서 우리는 심하게 낙심되기 쉽다. 그럴 때 마다 우리는 분명한 평안의 확신이 있어야 할 줄 믿는다.필자는 필리핀에서 선교사역을 했던 때가 있었다. 그 국가는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예수님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학습 받아 익히 알고 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이 있다. “만약 당신이 지금 죽는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이다. 자신의 구원 문제를 철저하게 생각한 사람은 화신할 수 없다고 고백하면서 복음을 받아 드린다. 우리는 복음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하겠다. 그리고 생명의 복음으로 신앙생활을 활기차게 채워야 하겠다. 또한 주어진 기회를 통해서 선교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5-08-28
  • 자유의 길 4단계
    예루살렘 탈무드(BC 50-AD 30)의 랍비들은, 유월절 만찬에서 네 차례나 건배하며 포도주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것은 그리스인들의 심포지엄 만찬을 모방한 것이란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출애굽기 6장 6-7절에서 그 동기를 찾으려는 경향이 오늘날의 유대인들이 대체적인 자세인 것 같다. 하나님이 히브리인들을 종살이로부터 구해낸 것은 단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네 개의 ‘동사’로 표현되는 ‘네 단계’로 진행된 사건이라 읽으면서, 그 고비마다를 기념하는 행위로 네 번 건배한다는 뜻으로. 출애굽기 6장 6-7절. “그러므로 너(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나는 주다. 나는 이집트 사람들이 너희를 강제로 부리지 못하게 거기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고’, 그 종살이에서 ‘너희를 건지고’, 나의 팔을 펴서 큰 심판을 내리면서, ‘너희를 구하여 내겠다. 그래서 ‘너희를 나의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아랫 줄로 표시한 네 동사, ‘이끌어 내고’ ‘건지고’ ‘구하고’ ‘삼고’ 하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행위를 되새기자는 것이 곧 유월절 만찬이었던 것이다. 랍비 모르데하이 코헨의 고전적 명저 <토라에 대해서>에는, 그들의 조상이 종살이하던 이집트를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과정에 대한 멋진 해석이 기록되어 있다. “첫째로: ‘나는 너희를 이집트의 고역으로부터 이끌어내겠다’는 선언은, 나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가 자각적으로 종살이는 견딜 수 없는 고역임을 인식하고, 스스로 벗어나야겠다고 깨닫게 하려는 의도라는 것. 히브리어 ‘고역’은 ‘인내’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인간이 인내할 수 있는 한계를 넘는 상황이라 판단할 때, 비로소 제 2의 단계가 준비된다는 것이다. 둘째 단계: ‘구원’은 실제적인 노동으로 부터의 구원을 말한다. 그러니까, 마음의 자유가 물리적인 자유에 앞서야하는 것이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는 말인 것이다.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은 타자의 도시나 궁전을 건설하기 위해 땀 흘려 자신을 소모하는 대신, 자신의 노력을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 바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은 ‘종살이에서 너희를 건진다.’하고 약속하시는 것. 셋째 단계: ‘나의 팔을 펴서 큰 심판을 내리면서, 너희를 구하여 내겠다.’ 는 말씀은 긍지를 가지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민족만이 스스로의 권리를 위해 결연히 일어설 수 있고, 독립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뜻. 그리하여 그들이 자유를 누리며 독립하는 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마지막 넷째 단계 ‘너희를 나의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의 준비가 완료되는 것’이라 했다.”출애굽기 5장이 기록하고 있는 상황은, 바로가 얼마나 이스라엘을 괴롭혔으며, 그 상황은 이스라엘이 분연히 일어서지 않으면 안될 상황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현장감독이나 간수, 그리고 경멸받아 마땅한 이스라엘의 내통자들조차도 바로의 요구는 너무 지나쳐서 그 요구에 응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바로에게 보고할 지경이었으니. “저희 종들은 짚도 공급받지 못한 채로 벽돌을 만들라고 강요받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희 종들이 이처럼 매를 맞았습니다. 잘못은 틀림없이 임금님의 백성에게 있습니다. 그러자 바로가 대답하였다. ‘이 게을러터진 놈들아, 너희가 일하기가 싫으니까, 주께 제사를 드리러 가게 해 달라고 떠드는 것이 아니냐!”(출 5: 16-17)바로는 달라지지 않았다. 논리가 먹혀들지 않는 바로의 대답은 채찍과 모욕뿐이었다. 낙망한 모세는 주님에게 대든다. “왜 이 백성을 이렇게 못살게 하시는 것입니까? 왜 저를 그들 가운데로 보내신 것입니까? 저가 바로에게 가서 주님의 이름으로 항의했기 때문에 그가 이 백성을 더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출 5:22-23)바로 그때, 모세는 ‘자유의 길은 멀고, 수많은 장애를 겪지 않으면 안 되는 법. 억압받는 민중이 일어서기만 하면 당장에 얻어지는 자유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우리는 히브리인과 똑 같은 역사를 살아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음미하노라면 뭔가를 깨닫게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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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5-08-28
  •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
    중국 명나라 때 지행합일을 주장해 양명학을 발전시켰던 왕양명의 이야기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산적, 마적 등으로 인해 폐해가 심했다. 왕양명은 그들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고 강서 지방으로 갔다. 그때 한 사람이 왕양명을 찾아와 진중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위병이 그를 가로막으면서 왕양명이 강의중이라 들어갈 수 없다고 막아섰다. 그러자 그는 ‘아니, 선생님께서 그럴 겨를이 있으십니까’라며 따졌다. 이때 위병은 강의는 날마다 선생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강의가 끝난 왕양명에게 ‘적도들이 언제 역습할지 모르는 이 위험한 중에 유유히 강의만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 놀랍습니다’라며 묻자 왕양명은 이렇게 대답했다. ‘산중의 적은 무찌르기는 쉬운 일이나 마음에 있는 적은 무찌르기가 어렵다네. 그러기에 나는 매일 내 마음을 향해 도를 강의하고 있는 것 일세’ 왕양명은 왜 그의 마음을 지키려고 노력 했을까? 사람의 마음은 사고의 중심지며 의식의 원천으로써 선악의 근원지가 되기 때문이다. 즉 생을 지배하는 중심지이다. 헌데 우리는 하루에도 이러한 두 가지 마음 즉 미움의 마음이 지배하는가 하면 사랑의 마음이 생기고 고마워하는 마음이 생기는가하면 섭섭한 마음의 지배를 받는다. 이렇게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드는가 하면 저렇게 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든다. 믿음과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심이 생기는가 하면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겠다는 마음이 불쑥 들기도 한다. 만일 이렇게 기압골의 영향에 따라 발생하는 마음의 변화를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일 수 없는 정신 분열증 환자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축복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말씀 하신다(약 4:8). 두 마음이란 하나님과 더불어 세상과 벗하려는 마음이며 동시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는 마음(눅 16:13)을 말한다. 따라서 마음을 성결하게 한다는 것은 이러한 두 마음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따르고 좇는 거룩한 마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 중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을 좇아 하나님과 함께 재물도 동시에 섬기려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 많다. 곧 영혼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한편 세상의 쾌락과 축복을 얻기 위해 적당히 세상과도 짝하려 한다. 인간적으로 볼 때 대단히 지혜로운 것 같아도 착각이요, 더 나아가 어리석음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두 마음을 감찰 하신다.(살전2:4) 감찰하다는 헬라 원어로 ‘시험하다, 검사하다‘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참된지 그릇되지를 알아보기 위해 시험하시는 분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옳고 그름을 분변하시기 위해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행실을 지켜보시고 계신다(대상 28:9, 렘 12:3). 그렇다면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전지하신 하나님께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할까? 주님의 선한 마음을 본받아야한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주님의 마음은 첫째 겸손한 마음이다(마 11:29). 주님은 본래 하나님이시다. 그런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사람으로 낮아져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창조주로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들을 섬기는 삶을 사셨고 그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셨다. 이것이 바로 겸손의 극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성육신과 희생의 겸손을 본받아 늘 낮은 자리에 설 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한다. 둘째 착한 마음이다(행 10:38). 주님의 행하신 모든 일은 다 착한 일이다. 병자를 고치시고 영혼을 구원 시기셨으며 죽은 자를 다시 살리셨다. 착한 일은 착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만이 할 수가 있다. 그와 같이 우리는 주님의 행하심을 보고 우리들도 착한 마음을 가져야한다. 독한 마음은 성도들 마음에 합당치 않다. 주님처럼 착한 마음을 지니고 어려운 이웃을 돌볼 줄 알아야 한다. 셋째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다(벧전 2:21). 주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받는 고난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도 십자가의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주님마음을 본받아야한다. 주님의 은혜만을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주님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주는 마음이다(빌2:7). 주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시지만 이 세상에 오셔서 오직 사랑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을 행하셨다. 또한 사욕도 없으셨다. 이 땅의 물질에 대한 욕심이나 영광이나 정치적인 야망이 조금도 없으셨다. 무덤도 타인의 무덤을 빌리셨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런 주님의 빈 마음을 가진 목회자와 장로와 성도를 원하신다.
    • 칼럼
    • 목회자
    2015-08-28
  • 이문동 所見.7 - 정신재
    이문동 所見.7-낙숫물과 명상 정 신 재낙숫물이 떨어진다 사랑의 귀울림이기다림 포근히 적시는 내 마음의 하수고이문동 삼층 다락에서 경이 음성 듣는다.미감을 향한 갈구 멀리서 또 가까이서괴로우면 괴로움을 꿰고 있는어머니 젖은 음성에서 빛이 쌓여 가고 있었다. 언젠가 강의실에서 시험 감독을 할 때입니다. 한 여학생이 하얀 색깔의 초미니 스커트를 입고 시험을 치르고 있는데, 하얀 살결의 허벅지 아래로 컨닝 페이퍼를 놓고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꾸만 그 여학생에게 눈길이 가고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였습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그때 생각난 것이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면 성령님이 인도하시어 나로 하여금 의롭게 행동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나는 그 여학생에게 다가가서 눈짓을 하며 경고를 보냄으로써 더 이상 컨닝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묵상의 시간을 가질 때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은 여자 때문에 망한 사내였습니다. 그는 “나귀의 새 턱뼈”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일 정도로 힘이 세었습니다(삿 15:15). 그가 가사 사람들에게 포위되었을 때에는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어 가지고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삿 16:3) 갈 정도로 힘이 강했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영”(삿 15:14)이 임할 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의 영”이 함께 하지 않을 때,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소렐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였습니다.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은 들릴라에게 삼손을 꾀어 그의 힘이 어디서 생기는가를 알아내게 하였습니다. 삼손은 처음에는 자신의 힘의 원천을 거짓으로 알려 주다가 들릴라가 계속 조르자, 그만 자신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알려주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삼손의 사랑은 결국 헛된 것이 되어 목숨을 잃었습니다.남자는 여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여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는 남녀의 만남은 행복의 꽃밭을 이룹니다. 부부도 오래 살다 보면 사랑이 식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의 끈이 단단히 묶여지면, 꽃보다 아름답고 멋지고 은혜로운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맺어 주신 짝이라고 생각하면, 불행이나 이혼이 있을 수 없지요. 추억을 더듬어 지난날의 사랑을 더듬어 보는 것도 삶의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는 일일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주님과 교제하면서 영원으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부부 만세.
    • 칼럼
    • 기독시선
    2015-08-14
  • 선교를 위한 남은 자의 역할
    금년의 무더위는 지금까지의 상황과는 다른 것 같다. 연구실과 교회 그리고 편안히 쉬어야 할 곳인 집도 무더운 여름을 견디기에는 역부족인 듯하다. 보도에 의하면 섭시 45도로서 채감온도가 90도를 넘는다는 중동 지역의 이란과 이라크를 보면서 더워진 지구를 실감하게 된다. 급기야 세계의 최고 권력자인 오바바 미국 대통령과 반기문 UN 사무 총장이 회담을 통해서 기후 변화에 대해서 적극 대처하기로 했다는 뉴스도 보인다. 육신이 더위에 고통을 받을 때에 참고 견디면서 살아야 하는 것처럼 영적 세계도 끝까지 견뎌야 할 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문하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 사상이 남은자의 역할이다. 이사야 10:20-23의 말씀은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배교의 위험 속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끊임없이 지키시고 유지하실 것이라는 남은 자의 역할에 관해서 말씀해 주시 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모두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절대적인 신앙에서 떠날지라도 남은 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실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말씀 입니다.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도 순환적인 관계를 가졌던 것을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을 배반하고, 벌을 받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하시는 관계를 말한다. 이러한 때에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도록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도전을 주었고, 배교의 위험을 공격 하였다.더 구체적으로 남은 자란 어떤 의미를 지닌 용어인가? 열왕기상 19:10에 의하면, 주의 선지 엘리야와 바알을 섬기는 이세벨과의 싸움에서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 끓지 아니한 자 7천을 남겨두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만천하에 공포하게 됨을 볼 수 있다. 결국 구약성경을 통해서 남은 자들의 정의를 찾는다면, “남은 자들은 곧 끝까지 견디는 소수의 신실한 자들을 가르치며 이스라엘 중의 이스라엘인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의 남은 자란 혈통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남은 자의 정의를 로마서 9:6에서 잘 말해주고 있는데, “은혜로 택함을 입은 자”가 곧 남은 자라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남은 자의 정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역사에 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소수의 선택함을 받은 자들을 택하셨음을 보게 된다. 그러면 남은 자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남은 자들의 역할은 열방에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뜻을 알려드리는 일을 위하여 직임을 받았다. 인간들은 가끔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숭배하는 경우를 수없이 많이 보게 된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상을 섬기는 일에 극치를 보면, 금송아지 사건을 볼 수 있다. 출애굽 이후 광야생활 가운데 모세는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엘 갔고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 있을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면서 그것으로 신을 삼았다. 결국 그들은 심판을 받게 된 것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다.남은 자의 역할을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막중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에는 많은 어려움이 도래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남은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려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남은 자를 통해본 이시대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영적으로는 침체된 한국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는 작업을 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 세속적인 일들 보다는 하나님의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신앙으로 패턴을 바꾸어야 하겠다. 또한 기독교인들로서 우리가 처한 사회적인 관심 상항에 대해서 분명한 목소리를 내야 하겠다. 즉 동성애 문제라든지, 남북의 문제라든지, 사회 윤리와 부의 재분배 문제등에대해서도 할 수 있으면 적극적인 의사 표현이 되어야 하겠다.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영적 가계를 이어 오듯이, 이 시대를 통해서 선교의 역군으로 쓰임 받는 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5-08-14
  • “조크는 작자가 없는 문학”
    “조크는 작자가 없는 문학”이라 했다. 자신은 독자라고만 여겼는데, 어느덧 작품 형성에 관여하고 있다면 작가가 될 수박에 없지 않는가. 그래서 모든 조크의 겉모양은 엇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알맹이는 늘 새로워지고 있는 것이다. 시대와 국경을 넘나들며 다듬어진 작품일지라도 ‘해석과 적용 과정’을 거쳐 완성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으로 남아있다. “조크는 작자가 없는 문학”이란 말은 단순히 표절에서 자유롭다는 사정만을 두고 함부로 해본 말이 아닌 것이다. 길거리에 개를 동반한 거지가 서있다. 개목에는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는 표지판이 걸려 있고, 땅바닥에 놓인 깡통 속에는 몇 푼의 동전이 들어있다. 가까이에 있는 전화 부스에서 한 사나이가 튀어나오더니, “잘 보시오. 내가 백원짜리 동전 넷을 가지는 대신 오백원짜리 동전 한 개를 넣었다오.”했다. 거지 : “이 사기꾼 녀석, 네놈이 넣은 것은 백원짜리 동전이잖아!”사나이 : “사기꾼은 네놈이지. ‘눈이 보이지 않는다.’ 했으면서.”거지 : “이 멍청아, 눈이 안 보이는 것은 개지 내가 아니지 않는가. 표지판 은 개목에 걸려있는 걸.”이같은 유형의 조크를 생산해내는 작자는 여의도 언저리라면 어렵잖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조크에는 작가가 따로 없다고는 했지만, 더러 작자를 밝힐 경우 효능이 커진다고 판단된다면, 이름을 밝힐 수도 있다는 것이 조크계의 불문율이 되어 있다. 출처를 밝힐 수는 있지만, 풋 노트를 달지 않아도 처벌은 받지 않는다.A “아침 일찍 낚시를 가시는가 보지요.”B “아닐세, 낚시하러 가는 길일세.” A “그래요? 나는 낚시하러 가시는 줄만 알았네요.”프랑스의 극작가 마르셀의 <웃음에 대해서>에 있는 걸작이라 알려지고 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우월감’을 표현한 조크라던가? 그렇지만 요사이 토크 쇼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들이라 굳이 작자의 이름까지 들추지 않아도.... 어느 겨울 오후, 버스정류장에 남자 둘이 서있다. 한 사람은 평범한 시민 같아 보이나, 다른 한 사람은 약간 이상한 느낌을 주는, 이를테면 초능력자이거나 예언자, 아니면 정신이상자일 수도 있다는 느낌을 준다. 침묵이 불안했던지 평범한 쪽이 먼저 입을 연다. “저기 저 할머니는 눈 속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가 봐요.”눈이 질펀한 길바닥에서 할머니 한 분이 뭔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열쇠라도 떨어뜨린 모양이지요.” 응대가 없자 멋쩍은 듯이 말을 이었다. 그 말을 받아 초능력의 사나이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연다. “아니라오.”평범한 시민이 놀라 사나이를 쳐다보는 순간, 보아서는 안될 것을 보아버린 듯 섬뜩한 느낌이 등줄기를 흐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약간은 두려운 어조로 물었다. “어떻게 그걸 아시지요?” 사나이가 입가에 미묘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할머니가 찾고 있는 동전은 내가 벌써 주은 걸요!”아무나 알 수 없는 일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일 것 같지만, 미리 돈을 주었기 때문에 할머니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그러니까 제 삼자처럼 구는 당사자... 정치인의 기자회견에서...부동산 소개사의 언변“이 집으로 말씀드리자면, 솔직히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습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손님께서 정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하실 수 있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먼저 나쁜 면부터 말씀드리자면, 환경문제입니다. 이쪽에는 양돈장이 있고, 저쪽에는 암모니아 공장, 그리고 맞은편에는 사격장이 있다는 정도입니다. 이제 좋은 면을 말씀 드리자면, 언제나 생활을 위한 지적인식이 가능하다는 점이지요. 그것은 뛰어난 현대적 특징이랄 수 있지요. 창문을 완전히 닫고 있어도 풍향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도 그 중의 하나이구요. 이렇게 훌륭한 특징을 갖춘 집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여기서도 해석과 적용, 그리고 책임은 오로지 독자의 몫으로 남아 있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08-14
  • 덤! 덤! 덤!
    이강백의 ‘결혼’의 내용이다. 남자가 말한다. 난 사기꾼입니다. 이 세상 것을 잠시 빌렸었죠. 그리고 시간이 되니까 하나둘씩 되돌려 줘야 했습니다. 이제 난 본색이 드러나고 이렇게 빈털터리입니다. 그러나 덤, 사람들에게 물어봐요. 누구 하나 이것이 내 것이다 말할 수 있는가를, 아무도 없을 겁니다. 모두 덤으로 빌렸지요. 눈동자, 코, 입술, 어느 것 하나 자기 것이 아니고 잠시 빌린 거예요. 남자는 관객석의 사람을 붙들고 또 말한다. 이게 당신 겁니까? 정해진 시간이 얼마지요? 잘 아꼈다가 시간이 되면 꼭 돌려주시오. 덤 이젠 알겠어요? 남자가 마지막으로 말한다. 덤, 난 가진 것 하나 없습니다. 모두 빌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덤,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이 가진 건 뭡니까? 무엇이 정말 당신 것입니까? 넥타이를 빌렸던 남성 관객에게 내 말을 물어 보시오. 그럼 나를 이해할 거요. 내가 당신에게서 넥타이를 빌렸을 때, 그때 내가 당신 물건을 어떻게 다뤘소? 마구 험하게 했었소? 망가뜨렸소? 아니오, 그렇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빌렸던 것이니까 소중하게 아꼈다간 되돌려 드렸지요. 덤! 당신은 내말을 들었어요? 여기 증인이 있습니다. 이 증인 앞에서, 약속하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덤 당신을 빌리는 동안에 아끼고, 사랑하고, 그랬다가 언젠가 그 시간이 되면 공손하게 되돌려 줄 테요. 덤! 내 인생에서 당신은, 나의 소중한 덤입니다. 덤! 덤! 덤! 이 글의 주제는, 인생에서 소유의 모든 것은 빌린 것이며, 덤과 같은 것이란 것이다. 그렇다. 세상에서 인간이 소유한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에게 잠시 빌린 것이다. 자연도 모두 빌린 것이며, 인간이 소유한 명예도 지위도 물질도 잠시 빌린 것이다. 또한 누군가의 사랑할 때도 역시 상대를 잠시 빌린 것이다. 헌데 자고로 인간들은 이러한 덤 의식이 무지하고 소유욕만 강하다. 그래서 인간이 있는 곳에는 분쟁이 치열하다. 하지만 알아야한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고 없이 부르시면 이 모든 것을 두고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래서 위대한 정복자였던 마게도냐의 알렉산더 대왕은 생전에 이러한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으면 관에 네 개의 구멍을 뚫어 양손과 발을 내놓아라’ 이것은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사람은 죽을 때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도 변함없이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그것을 쟁취하기 위하여 온갖 부정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전생애를 소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세상에서 얻는 것은 결국 안개와 같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어느 돈 많은 사람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 차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 사람은 눈을 뜨자마자 망가진 차를 보며 아까워했다. 이에 간호사가 한심하다는 듯이 ‘선생님, 지금 차가 문제가 아니에요. 선생님의 왼쪽 팔이 떨어져 나갔다는 말이에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눈을 돌려 왼손을 보더니 또 소리쳤다. ‘아이고 내 롤렉스시계, 롤렉스시계...’ 왜 이러한 일이 일어 나는가? 세상에서 오직 명예와 권력과 재물만이 가장 안전하고 든든한 방패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을 보자. 가난하고 어려울 때는 사람들에게 겸손하고 낮은 모습으로 처신하던 자가 점차 명예와 권력과 재물이 쌓이면서 어느 사이에 그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흘러 더 많은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갖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명예와 권력을 욕심내며 더 높은 곳을 탐하다가 결국 큰 실패와 파멸을 맞는 경우도 결코 적지 않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명예와 권력과 재물이 쌓일수록 넘어질 위험도 더 커지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고로 우리는 명예와 권력과 재물이 반드시 축복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이 파멸로 인도하는 사닥다리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함으로써 명예와 권력과 재물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품지 말아야 한다. 또 축복을 받아 명예와 재물이 많아질 지라도 늘 이러한 위험이 있음을 알고 더욱 삼가하며 스스로를 돌보는 마음을 지녀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명예와 재물이 더해진 자들은 오히려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고 늘 겸손한 마음으로 선한 일에 힘씀으로써 받은 축복을 더 크고 신령한 축복으로 나아가는 통로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가진 자들은 청교도 정신을 이어받아 근검절약으로 재물을 축적한 뒤 이를 다시 세상에 환원시켜 수많은 도서관이나 복지 재단을 만든 미국의 부호들처럼 사회에 환원하면 어떨까?
    • 칼럼
    • 목회자
    2015-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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