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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 지혜 있는 자가 되라
    노르베르트 레흐레이트 ‘너의 딸에게 들려주는 작은 지혜’라는 이야기이다. 항상 권력을 잃지 않을까 전전하는 세도가가 있었다. 그는 늘 실력 있는 경비원들을 데리고 다녔고 또 수시로 점쟁이를 불러들여 앞날을 점치거나 꿈의 길흉을 미리 판단해 보도록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는 최고의 해몽가를 불러들였다. 그 중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풀이 하였다. ‘황송하오나 이 꿈은 제후님의 일가친척들이 모두 죽게 될 것이라는 암시인 줄 아옵니다’ 이 말을 들은 제후는 크게 노하여 그 해몽가를 사형에 처했다. 난처해진 해몽가들은 두려워하며 제후 앞에 나서길 꺼려했다. 그 때 제일 어린 듯 하는 한 해몽가가 제후 앞에 나서서 침착하게 말했다. ‘제가 그 꿈을 해몽해 보겠습니다. 제후님의 일가친척들은 모두 천수를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제후께서 그들보다 훨씬 오래 사실 것이라는 예시입니다’ 이 말을 들은 제후는 매우 만족해 하며 그 지혜로운 해몽가에게 포상을 내렸다. 이처럼 사람의 참 지혜는 사람들의 난제를 해결해 주고 행복의 길로 인도해 준다. 영국의 시인이자 역사가인 칼라일(T. Carlyle) 은 ‘인간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행운과 행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참 지혜가 없이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일리가 있다. 요즘 교회와 사회를 보자. 고등교육을 받고 상당한 지위와 명예와 권세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에 빠지거나 아니면 자신의 가족과 사회에 몰염치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럴 때마다 배울 만큼 배우고 사회적인 지위와 명예와 권력과 그리고 넉넉한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왜 그럴까하고 의아해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간단한 문제이다. 그들은 개별적인 지식과 명예와 권세와 재산을 가졌으나 자신과 인생 전반에 대한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인간에게는 지혜가 중요하고 필요하다. 실례로 참 지혜를 가진 사람과 악하고 헛된 세상 지혜를 가진 사람들을 보자. 먼저 애굽의 총리대신 요셉. 그는 애굽의 시위장관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성적인 유혹을 받았다. 은밀한 이 유혹은 참으로 달콤한 것 이었다. 육체적인 쾌락만을 주는 것이 아니고 가정 총무의 자리를 확고히 다지는 방편이기도 했다. 그리고 만일 이것을 거절했다가는 자존심이 강한 여주인으로부터 어떤 보복을 받을지도 알 수 없는 상황 이었다. 적당히 타협하기 좋은 여러 여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두 눈 딱 감고 죄를 한 번 범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가 여주인에게 한말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 하리리까’(창 39:9)였다. 그 결과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고로 우리가 진정 지혜 있는 사람들, 지혜 있는 사회와 국가가 되기를 원한다면 생각을 바꾸어야한다. 즉 거짓과 악행을 버리고 이제 정직해야한다. 정직과 성결이 지혜이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살 때 그 어떤 비웃음과 조롱을 당하고 당장은 손해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끝은 성공이요 인정이다. 고로 우리도 믿음으로 정직하고 순결하게 살면 시온의 대로가 열려 요셉처럼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애굽 왕 바로와 페르시아 시대의 총리 하만을 보자. 이 둘은 악한 세상의 지혜대로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즉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자 나름대로 지혜를 짜 이들을 멸하고자 했다.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를 역이용하심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을 받고 바로는 처절한 실패와 심판을 맛보게 하셨다(출1~12장). 또한 하만 역시 나름대로의 악한 세상 지혜로 유대인들을 몰살하기 위해 함정을 팠지만 오히려 자신이 판 함정에 빠져 자기가 세운 나무에 달려 죽는 수치와 파멸을 당해야 했다(에 3:7). 고로 자기주장을 중심으로 한 세상의 지혜가 비록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가장 똑똑하고 지혜로운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분명하게 깨달아야 하겠다. 이에 러시아의 위대한 문호 톨스토이는 ‘헛된 지혜를 두려워하라 세상 모든 악이 여기서 비롯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요셉처럼 참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무엇을 구해야 할까? 성경의 이스라엘 왕 솔로몬처럼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한다. 솔로몬은 왕위에 즉위하여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맡기신 백성들에게 선정을 펼 수 있는 지혜를 구했다. 결국 솔로몬의 그러한 열망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고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뿐만 아니라 그가 구하지 않는 부와 영광과 수까지도 풍성히 허락하셨다(왕상3:10~14). 과연 솔로몬의 지혜는 당시 현인이 많다고 한 대국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났고 철학자요 시인으로서 삼천 잠언과 일천 다섯의 노랫말을 짓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에 관해서도 논할 만큼 모든 관계에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 따라서 주위의 모든 나라에서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다(왕상 4:29~34). 고로 우리들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자(약 1:5).
    • 칼럼
    • 목회자
    2016-02-25
  • (김지호)천국 시민
    천국 시민 육 명 길요구보다는순종을열정보다는믿음을성취보다는사랑을주장보다는양보를 하는 자그리스도인이라면 나 자신이 과연 천국시민일까 라고 자문할 때가 있다. 또한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언행을 보면서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을 평가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천국시민으로서의 자질이란 자신의 개인적 잣대의 눈이 아닌 것이며 말씀으로 비추어 봐야 할 일이며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판단할 일은 아니다.시인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연한 기회에 천국시민이란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하나 하고 고민 해 본다. 우리는 살면서 타인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기를 요구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요구하는 자신은 실제 삶에서 올바른가 자문해 봄직도 필요하다. 남한테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기 보다는 자신이 먼저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있는가 또한 남을 사랑하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먼저 채우려고 달려왔는가열심히 하겠다는 열정만 가지고 가다보니 헉헉대고 믿음을 상실한채 살아 온 것은 아닌지 자기 고집과 의견만이 옳다고 주장하다보니 양보의 미덕은 사라져 냉냉하게 살아 온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고 있다.이러한 과정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를 되돌아보며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올바른 천국시민의 삶이란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까 축약된 운문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읽는 순간 강렬하게 회개의 심령을 갖게 한다.
    • 칼럼
    • 기독시선
    2016-02-19
  • 목사가 사람을 죽여!
    최근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사건이 있었다. 세계최고의 지성들이 모인 독일의 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유명한 신학대학의 외래교수로 활동 중인 목사님이 자신의 막내딸을 매질하여 죽자 14개월째 납골 상태로 방치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목사가 사람을 죽였다고 언론이 극단적으로 보도하는 모습을 본다. 우리에게 심한 고통을 준 자녀 살인사건의 내막을 포털의 기사를 인용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4살 소녀’ 부천 여중생의 사망 원인은 결국 현직 목사인 아버지의 폭행으로 드러났다.지난 3일 경기도 부천소사경찰서는 자신의 딸(사망 당시 14살)을 폭행해 살해한 혐의(살인 및 폭행)로 이 모(47)씨를 긴급체포했다. 계모인 백 모(40)씨 또한 폭행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났다. 목사인 아버지가 중학생 막내딸을 사망 당일 5시간 동안 빗자루 등으로 무차별 폭행했으며, 결국 사망 이후 딸의 시신을 11개월 동안 자신의 집에 방치한 것으로 드러났다.또 이런 무차별 폭행에는 이양의 계모 또한 가담했으며, 이씨 부부는 딸의 사망 사실을 숨기기 위해 거짓 가출신고까지 한 것으로 밝혀졌다. 아버지 이씨는 국내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독일에서 신약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모 신학대학교의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그리스어를 가르치고 있다. 또한 고등학생인 첫째 아들 등 1남 2녀를 슬하에 두고 있다.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염화칼슘으로 보이는 흰색 가루를 비롯해 방향제, 향초, 습기 제거제 등에 대해 이씨는 경찰 조사에서 “딸에게 훈계를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죽어 있었다. 이불로 덮어놨는데 냄새가 나 방향제를 뿌려두고 주검을 집에 두었다”고 진술했다. 이어 이씨는 “기도를 하면 딸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딸 주검 주변에서 초를 켜고 기도를 했다”고 말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의 신앙 현실을 직시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문제의 발단은 사모님과 사별 한 이후에 재혼으로 말미암은 자녀들의 문제로 인한 부부간의 갈등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재혼 이후로 함께 해야 할 자녀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생활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여기에서 새로운 가정을 이룬 사모님의 책임을 추궁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한 것은 재혼을 통해서 발생하는 자녀 케어 문제들에 대해서 부부는 충분한 대책속에서 대화를 했어야 했다. 둘째는 적절한 신분 보장의 문제를 들 수 있겠다. 독일에서 어려운 공부를 마치고 귀국 하였을 때에는 걸 맞는 자리가 보장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기대 심리가 현실의 벽 앞에 무너짐을 통해서 좌절과 절망의 마음이 깊게 자리잡아 풀 곳을 찾던 중에 대상이 자녀였을 것으로 판단이 된다. 이는 한국의 교육계의 현실 속에 느낄 수 있는 지성인의 자화상일 수 있다. 셋째는 신비적 신앙의 문제를 들 수 있다. 본인의 말대로 “기도를 통해서 부활을 시킬 수 있다”는 믿음은 바른 신앙이 아니다. 물론 성경은 죽음자의 부활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바로 인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부활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 신비가 보편적 사건으로 격하 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 사건에 대해서 한국교회연합 대표회장인 조일래 목사는 “오늘 우리는 이번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향해 꾸짖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번 참극은 우리 모두의 감춰진 맨얼굴 중 그 빙산의 일각이 드러난 것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미 드러난 일보다 숨겨지고 감추어진 더 크고 끔찍한 죄악에 대해서도 언젠가 밝히 드러내 꾸짖으시고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오늘 사회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면 한국교회는 더 깊은 나락에 떨어져 사회로부터 맛을 잃은 소금처럼 버려져 밟히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적절한 표현이라고 본다. 이 사건을 접한 날부터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까지 필자의 마음은 편치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두고 돌로 치려는 유대인들 앞에서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고 하셨다. 누가 누구를 정죄 하겠는가? 인간이 가진 한계점을 다시 한번 드러내 주는 사건이라 본다. 하지만 씁쓸한 마음은 지울 수 없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2-19
  •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 엘리야의 고고한 성품을 단숨에 파악하기 위해서라면 “갈멜산에서의 승부수”(왕상18장) 한 장면이면 족할 것이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이 하나님이면 주님을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 엘리야는 확실하지 않거나 불투명한 현실 앞에서도, 멈추거나 다른 각도로 살펴보려 하지 않는, 오로지 사생결단하는 타입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편인지를 확인하는 몸부림이기도 했기에,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얻기 위해서라면 극단적인 방법도 서슴지 않았으리라. 그는 왕 앞에서도 예사로 파괴와 멸절을 예언하는가 하면, 온 백성이 굶어죽으리라는 막말 성 발언조차도 주저하지 않았다. 엘리야의 고독은 타고난 성향이거나 살다보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운명적인 차원이 아니었다. 그에게 분명하게 책임 지워진 하나님의 뜻으로 그는 받아들였다. “너는 이곳에서 아내를 맞거나, 아들이나 딸을 낳거나, 하지 말아라. “(렘16: 8)“너는 사람들이 함께 앉아서 먹고 마시는 잔칫집에도 들어가지 말아라!”(렘 16:8)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명령을 들은 사람이 엘리야 말고 또 있을까. 그러니까 산속에 숨어있는 자신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주는 것은 까마귀였노라고 엘리야는 천연덕스럽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왕상 17:4) 엘리야가 달리 유를 찾아보기 어렵도록 고독한 인간이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언제나 외톨이 이를테면 기인이었다. 그러다가도, 아니 그랬기 때문에, 그가 사람이나 사건을 재단할 때에는 더 없이 엄격한 인간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됨됨이가 그렇게 생겨먹은 엘리야가 예언자 집단의 리더로 행세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을 것이고. 호렙산, 바람이 지나가고 지진이 있은 후, 하나님이 조용한 목소리로 그에게 일러준 사명은 끝내 이루어 낼 수가 없었다. 왕을 설득하고 정치노선을 바꾸게 하는 엄청난 일은 산속에서 까마귀나 벗 삼는 기인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하나님도 후계자를 세우도록 암시했고, 엘리야 자신도 수락한다. 그의 결단은 자신의 역량을 헤아린 겸손이기도 했으리라. 이상주의자이긴 했어도, 엘리야는 하나님의 일차적인 요구가 무엇이었나에 집착해서 현실과 자신의 능력을 가늠하지 못 하는 위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도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보다 실천적인 후계자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현실적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 후계자가 자신을 빼닮은 인재여서는 안 된다는 당연한 결론을 두고 망설일 필요도 없었고. 그러니까 스승 엘리야와 제자 엘리사의 만남이 기질적으로나 삶의 자세에서는 아주 다른 인물끼리의 만남이 될 수밖에 없었음은 필연적 결과였던 것이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만나기 전까지는 어떤 예언자 집단에도 속해있지 않은 농부였다. 자신은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자식도 아니라고 말한 아모스와도 같은 처지였다(암 7: 14).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준 사건은 엘리야의 기적들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안될 것이다. 엘리야가 길을 가다가, 사밧의 아들 엘리사와 마주쳤을 때,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다. 엘리야가 엘리사의 곁으로 지나가면서, 자기의 외투를 그에게 던져 준다. 그러나 엘리사는 즉석에서 그를 따르기 보다는 엘리야를 떠나 겨릿소를 잡고, 소가 메던 멍에를 불살라서 그 고기를 삶고, 그것을 백성에게 주어서 먹게 하는 과정을 소화한다. 그런 다음에야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 그의 제자가 되는 여유를 보였다. 처음부터 그는 실천적인 인물이었다. 한편 엘리야가 신분이 낮은 농부를 자기와 동등한 권위의 예언자로 탈바꿈해버린 것은, 자신의 예언자적 사명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결단이긴 했어도, 거기에는 엘리사가 농부였고 앞으로도 농부일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사는 시종 실천적인 인간이었고, 민중의 현실적인 문제를 이해하고 정치적 현실을 파악하려는 열성을 가진 인간이었기에. 일생을 세속을 벗어나 산에 있어야했고, 세상을 하직할 시점에서는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스승 엘리야와는 달리, 엘리사는 일생을 농부로 땅에 발을 붙이고 지냈다. 그럼에도 예언자로서의 영광이 늘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의 예언은 엘리야만큼은 아니라 할지라도 위엄이 있고 장려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의 삶을 두고 현실적으로는 엘리야보다 훨씬 효능적이었다는 평가를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2-19
  • 남 탓만 하는 사람들
    한 엄한 아버지가 신문을 보며 아들과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빵을 집으려는 아들이 실수로 우유를 엎질렀다. 그 우유는 아버지가 보던 신문까지 적시고 말았다. 순간 아들은 아버지의 눈치를 재빨리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아들을 매섭게 쏘아보면서 말했다. ‘조심하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니?’ 이내 아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부엌에 있던 어머니가 달려와 식탁을 닦았다. 일주일 뒤 여느 때와 똑같은 아침 식사 시간. 이번에는 아버지가 빵을 집으려다가 그만 팔꿈치로 우유잔을 건드렸다. 식탁은 온통 우유로 뒤범벅 됐다. 아들은 아버지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그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 우유 잔을 걸리적거리게 놓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 해야겠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들은 아버지 몰래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일반 가정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예화이다. 그러나 이 일상적인 이야기 속에는 다른 사람을 비난함으로 자신의 실수를 정당화시키려는 인간의 고질적인 문제가 담겨 있다. 즉 ‘잘되면 자기 탓이고 못 되면 조상 탓’의 논리가 세상에 만연해 있는 것이다. 주위를 보자. 쉴 새 없이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다. 또 그러한 사건과 문제들로 인해 세상은 한시도 편할 날이 없고 소란하다. 더 안타까운 것은 사건과 문제가 터질 때마다 자신에게 돌아올 질책이나 책임이 두려워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이는 하나도 없고 모두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사실이다. 이에 정치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국민들은 정치인들을 공박하는 반면, 정치인들은 오히려 국민들을 탓하기에 이른다. 또 여당은 모든 잘못을 야당에게 돌리고 야당은 힘없는 자기들보다 권력을 쥔 여당 쪽에 모든 잘못이 있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일전에 유일호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경제 사회부처 장관들이 행정부는 잘하고 있는데 국회와 야당과 교육청들이 못했다는 남 탓 담화문을 발표하여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 ‘정부는 개혁입법을 최선을 다해 국회를 설득해 왔지만 더 이상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라며 ‘대통령과 정부가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국민이 도와 달라’고 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정부나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직장과 가정, 심지어 교회의 성도들 사이에서까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예컨대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목회자는 역으로 성도와 중직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서로를 비난하기에 바쁘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내 생각이 옳으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 서로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즉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상대방의 주장이 옳다면 내 생각을 양보할 수도 있어야한다. 이 땅의 모든 다툼과 분열은 바로 이 같이 자기 생각만 지나치게 고집함으로 발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자기주장이 옳을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의 주장도 옳을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의 주장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완전하다면 서로의 주장이 다르게 나올 수 없다. 불완전하기에 관점에 따라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고 그러다보면 자신의 주장이 틀릴 수도 있다. 고로 자신에게는 전혀 잘못한 점이 없고 상대방에게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걸음 물러서서 ‘내 탓이오’ 하는 겸허한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하루를 다 보내기 전에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자. 오늘 하루 동안 나는 화해를 위해 몇 번이나 내 잘못을 시인했는가? ‘나 때문’ 이라는 생각을 한번 이라도 해 보았는가? 세상에서 남 탓만 하고 살다가 나중에야 ‘내 탓’을 깨닫는 한 성도의 이야기이다. 지금 살고 있는 시골 마을로 처음 이사 왔을 때 우리는 길게 뻗은 자갈길을 지나 한적한 마을 변두리에 있는 낡은 집을 개조하여 보금자리를 꾸몄다. 나는 외출할 때마다 내 발보다 훨씬 크고 딱딱한 구두를 신고 그 자갈길을 다녔다. 자칫 방심했다간 돌에 채여 넘어지기가 십상 이었다. 당시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부드럽고 발에 맞는 신발을 사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고충으로 인해 부드러운 신발을 사지 않으면 도저히 그 길을 걷지 못할 것 같아 큰 맘 먹고 구두 가게에서 부드럽고 발에 꼭 맞는 신발을 하나 샀다. 새 신은 바닥이 유연했으므로 울퉁불퉁한 길을 훨씬 쉽게 걸을 수 있었다. 그 일로 인하여 나는 험난한 인생의 길에서 자주 미끄러져 실패했던 것은 내가 너무 딱딱하게 대처했던 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 그랬다. 나는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모든 어려운 상황들에 거칠게만 대항했지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부드러운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리석게도 나는 그것들과 대항하고 싸움으로써 내 인생을 더욱 많은 상처로 점철시켰던 것이다. 일리가 있다. 이제 우리를 실족케 하는 아집과 편견과 교만의 구두를 벗고 사랑과 믿음의 신을 신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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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
    2016-02-19
  • (김지호)길
    길 김 정 자날마다 달마다오던 길 가던 길길은 길인데마음이 밝은 날은가야 할 그 길이꽃길처럼 환하다가이 마음에안개 자욱한 날이찾아들 때면가야 할 그 길이어둠보다 더 깊은미로가 된다사람의 마음이란 자기 자신도 콘트롤 하지 못할 때가 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고 악보와 같아 오르락 내리락 할 때도 있다. 경사스런 일이 있는가하면 슬플 때도 있다. 기분이 엎 될 때가 있는가하면 기분이 다운 될 때도 있다. 특히 마음이 힘들 때 누군가 그러한 마음을 알아준다면 좋겠건만 신앙을 하는 사람들조차 깊은 수렁에 바질 때가 있다이 시에서 화자는 늘상 오가던 길을 더올린다. 똑같은 길을 오가면서 화자는 마음의 상태에 다라 길을 걷던 마음을 표출하고 있다. 컨디션이 좋은 날은 기쁨이 충만하여 발걸음이 가볍다고 한다. 얼마나 기분이 상쾌하면 꽃길처럼 느껴질까. 아마도 바람에 굴러가는 꽃잎하나도, 길가의 잡초도 모두가 아름답게 보였나보다. 그러한 기분좋은 날이 매일 이어지면 좋겠건만 화자는 때론 마음에 안개가 자욱하여 기분이 다운될 때도 있었다. 오죽하면 “어둠보다 더 깊은 피로”라고 했을까. 상처가 너무 깊거나 분노가 솟아오를 정도로 속이 상하거나 누구한테도 하소연 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픈 일이 있을 때 화자는 어떻게 극복했을까여기서 화자는 해결법을 제시하지 않고 독자에게 맡기고 있다. 아마도 신앙인으로써 기도하면서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해결법을 찾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 칼럼
    • 기독시선
    2016-02-04
  • 교회의 성장 기능은 연합
    2016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의 성장 기능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교회는 성장하는 기능이 있다. 사도행전 6:7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 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수적 성장 혹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전략적으로 그 목표를 이루셨다. 예수님은 3명의 수제자, 12명의 측근 제자그룹, 70여명의 제자, 500여 명의 제자들과 함께 이곳 저곳(막 1:38)에서 전도 하셨다. 그리고 수 천명 앞에서 설교하시며 전도하셨다. 이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서 예루살렘과 유다와 온 땅에 복음을 증거 하여 교회의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최근에 서울의 양재동 부근에 교회를 이전 개척한 제자가 있다. 그 목사님의 계획은 매원 10가정을 전도하여 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것을 목표로 뛰고 있다. 벌써 두달 만에 10가정을 전도하여 함께 예배드린다고 하였다. 자신의 전도 경험을 말하면서 열심히 뛰어 다니다 보니까 전도가 쉬워 졌다고 말했다. 참으로 놀라운 소식이다. 우리는 전도가 안된다고 주저앉아 있는 교회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초대교회를 통해서 신앙의 지혜를 얻어야 한다. 초대교회는 오늘날과 같지 않았다. 다양한 상황들을 유추해 보았을 때에 오늘날 보다 더욱 더 전도와 신앙생활이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사도행전 2:47절에는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다. 교회의 본질은 부흥의 역사위에 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당연한 원리 이다. 다만 교회가 병들지 않고 정상적인 기능만 발휘해 준다면 시간에 따라서 성장토록 되어 있는 것이 교회의 기능 이다.그런데 교회의 기능이 죽지 않게 만드는 데는 몇 가지의 중요한 방법이 있어야 한다. 사도행전 2:46절에 보았더니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 하며, 온 백성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다. 교회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연합된 힘이 필요하다. 즉 교회성장을 위한 연합의 기능이 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성장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며, 성장은 연합 속에서 만이 이룩될 수 있음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 결국 연합이란 우리가 가진 모든 자원들이 총동원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되어짐을 의미한다.신약성경에는 이러한 연합을 통해서 교회를 부흥 시켰던 예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고전 1:23-24을 보면 “전도하는 성도들”의 모습, 행 2:42 “가르치고 배우는 성도들”, 롬 12:5 “섬김는 성도들”, 행 2:46-47 “찬양을 통한 성도들의 부흥”, 행 2:46 “교제하는 성도들”을 통해서 교회는 연합된 힘을 가질 수 있었다.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가진 달란트를 주님을 위해서 연합된 힘으로 모아져야 하겠습니다. 즉 사업가, 의사, 예술가, 교수, 이러한 직업등의 어느 직분을 가지셨든지 주님을 위해 헌신해야 하겠다는 것이 연합의 마음이다. 사실 연합이 되지 못한 교회는 결국 성장할 수 없다(12:6-8)는 것이 성경적 교훈이다. 잘나가는 집과, 잘나가지 못한 집은 연합의 차이 이다. 잘되는 집의 형제들은 “형님 먼저, 아우먼저”이지만, 못된 집의 형제들은 “왜 내 떡을 네가 먹느냐”고 싸우는 경우다.얼마 안 있으면 국가적으로는 총선이 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다양한 당이 나와서 자신의 정견을 국민들에게 전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은 국민들을 호도하여 판단력을 흐리게 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기독교 내에서도 교단 총회가 각 교단별로 많이 예정되어 있다. 선거 때에는 다양한 목소리들로 말미암아 시끄러운 소리들이 들리곤 한다. 전도하기 어려울 때일수록 연합된 힘을 가지고 선교에 힘써주는 한국교회가 될 것을 기대한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6-02-04
  • 말에 대해서
    <야고보서>가 유난히 가부장적 체취를 풍기기 때문일까, 루터가 그랬던 것처럼, 프로테스탄트들은 야고보서를 한 옆으로 밀쳐놓기를 아쉬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야고보의 경고가 바로 “나” 혹은 “우리”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 서둘러 그의 말에 귀를 닫아버렸으면서도, 어쭙잖은 신학을 내걸어 자위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하고 뉘우칠 수라도 있다면 그나마 다행한 일일 것이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야고보서 3:1) 이 글을 앞에 하고서도 고개를 처들 수 있는 설교꾼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인 것은 분명하다. 휴머니즘이란 말은 흔히 인간적이란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됨됨이가 넉넉해서 밥이라도 잘 살라치면 “그 사람 인간적이다.” 하고 말해주는 것처럼. 그러나 휴머니즘은 그런 차원의 말은 아니란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 휴머니즘이란 단어가 인간애를 가리키는 필란트로피스(Philanthropists)와 구별되어 쓰이고 있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휴머니즘이 필란트로피스보다 상위개념이라고 한다면 어폐가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은 “휴머니즘”이 있고서야 “필란트로피스”도 성립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자신보다 몸집이 크고 힘이 센 짐승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 곧 휴머니즘이었기에. 동물들을 이기기 위해서 할 수 있던 일은 기껏 주술행위뿐이었던 원시인이, 스스로의 지혜와 전술과 의사소통을 통해서 짐승을 극복할 수 있게 된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이 곧 휴머니즘이었던 것이다. 한 때는 동물을 그들의 조상으로, 심지어는 신으로 섬기기도 했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고대 그리스인들이 조령동물신(祖靈動物神)으로부터 탈피하여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 되었고, 그 바탕이 곧 “말(로고스)”이라 믿었던 것이다. 조령동물신으로부터 벗어난 인간은 이제 인간의 모습을 띈 신을 발명해낸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만들어 놓은 신상들은 한결 같이 실제 인간보다 크고 아름답고 힘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의 연장선상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신들에게 성격을 설정해주고 걸 맞는 스토리를 만들어주는 것도 로고스였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어온 히브리 그리스도교의 전통이 “로고스가 참 사람이 되었다”하고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문화현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말(로고스)”이 너무 경박해지고 있다. 특히 한국 그리스도교회의 강단에서 난무하고 있는 말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한탄을 들어온 지가 이미 오래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대언은 고사하고 제대로 휴머니즘의 차원이라도 유지해주었으면 하는 느낌을 어찌하랴! 야고보는 말의 힘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혀도 몸의 작은 지체이지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고 자랑합니다. 보십시오. 아주 작은 불이 굉장히 큰 숲을 태웁니다.”(3:5) 말의 피해도 엄청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여가며. 바벨탑이 무엇이던가. 한 무리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 여겨, 그들이 생각 대로 사상의 통일을 이루려고 기술력과 경제력을 총동원하며 안간힘을 썼지만,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마땅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바벨탑은 흉한 몰골을 남기고 역사에서 사라지는 가 싶었다. 그러나 악마는 그냥 주저앉으려 하지 않았다. 중세의 가톨릭교회와 소련의 공산주의자와 독일의 나치스가 바벨탑의 흉내를 내었다. 오늘에도 많은 세력들이 그 유혹을 물리치려 하지 않는다.“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야고보의 충고는 날카로우면서도 모든 사정을 헤아려 품고 있는 경구이다.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하는 경구를 모르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야고보는 “여러분이 아는 대로”라는 부사절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야고보서 3장 2절: “우리는 다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 누구든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충고는 이어진다. “여러분의 마음에 지독한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고, 진리를 거슬러 속이지 마십시오...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3:14-17)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2-04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18세기는 뉴잉글랜드에 있어 대각성의 시대였다. 1734~1735년과 1740~ 1741년에 걸쳐 하나님은 이곳에 놀라운 변화를 허락하셨는데 그 일의 한 복판에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전설적인 설교자가 있었다. 근시로써 원고와 촛대를 들고 행했던 그의 설교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다. 그로 하여금 그런 놀라운 사역을 할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은 어린 시절 회심을 경험하며 영광스런 하나님을 만나고서 가졌던 ‘하나님은 영광 받으셔야한다. 그렇지 않게 사는 삶은 모두 잘못되었다’라는 확고한 의식 이었다. 그는 이 목적을 위해 스스로 수십 조항의 결심문을 만들어 체크하며 지켜갔다. 특히 이러한 확신 속에 필요를 느껴 수년간 지옥에 대해 설교 하기도 했다. 그는 왜 이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까? 하나님의 영광은 주님의 소원이자, 삶이며, 우리 인생의 목적이기 때문이다(소 요리 문답 제1문).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주님의 삶을 본받아야한다. 어느 날 주님은 사람들이 혐오하는 흉한 문둥병자를 친히 손을 대어 치유해 주시면서 함구령을 내리셨지만 주님에 대한 소문은 널리 퍼져나갔다. 갈릴리뿐만 아니라 온 유대와 예루살렘에도 알려져 허다한 무리가 추종하게 되었고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속인들 같으면 더욱 자기를 선전하고 사람들에게 인기와 존경을 받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피해가셨다. 즉 주님은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실 때에 그것에 편승해 영광을 누리기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아들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눅 5:12~16). 그리고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앞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 하셨고(마 26:39) 또 대제사장적 중보 기도를 하셨다(요 17:). 이는 사도 바울의 소원이기도 하며(롬 15:6) 그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이에 바울은 성도들에게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라고 권했다(고전 10:31). 이것은 바로 성도된 자의 삶의 가치요 행동이며 강령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면 이 세상에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오늘날 가정, 교회, 교계, 사회 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과 기쁨을 추구하는 데서 발생한 것이다. 인류의 최초의 범죄도 사실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기의 이기적인 만족과 기쁨을 위해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고로 우리가 혹시 교회나 사회에서 큰 공로를 세워 유명하게 되어 사람들의 인기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다면 교만하지 말고 겸손함으로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한다. 사람들에게 경시당하고 수모당할 때보다 높임 받고 존경받을 때 교만, 명예, 권력, 물욕 쾌락 등에 걸려 넘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성경의 사울과 솔로몬처럼 말이다. 요즘 교회 지도자들은 어떨까? 2015년 12월 24일 교회연합신문을 보자. 세계 최대교회인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세우고 지난 2008년 은퇴한 조용기 목사가 교회로부터 200억 원의 퇴직금을 받았다. 국민일보 2015년 12월 11일자에 의하면 조 목사에게 지급된 이 퇴직금은 교회 재정위원회와 당회를 거쳐 정상적인 절차로 지출 되었고 그 중 35억 원을 소득세로 납부했으며 나머지 165억원에 대해 16억 5000만원을 십일조로 교회에 헌금했다고 한다. 몰라도 될 조 목사의 퇴직금 명세는 일부 ‘교바모’(교회 바로 세우기 장로 모임) 장로들이 원로목사를 음해한다며 교회 측이 강력 대처를 천명하여 밝혀진 것이다. 조 목사에게 지급된 이 거액의 돈은 교인들이 생활비를 쪼개고 아껴 복음전도를 위해 사용하도록 하나님 앞에 드린 헌금이다. 목사가 아무리 훌륭한 목회를 하고 교세를 성장시켰더라도 하나님 앞에 바쳐진 헌금을 도에 넘치는 퇴직금으로 받는 것은 기독교 역사상 이제까지 없었던 일이다. 이는 한국 교회에서만이 있는 일이다. 공교회의 헌금을 은퇴 목사가 생활비 외에 거액을 개인적으로 챙겨 가는 것은 옳지 않다. 천재를 횡령한 범죄이고 물욕을 버리라는 목사의 설교를 신뢰해 온 교인들을 실망시킨 것이다. 교회가 그대로 관리하고 있었다면 그 이자 만으로도 은퇴 목사에 대한 생활비를 지원하고도 남을 터인데 교인들의 피땀 어린 헌금 35억 원을 ‘세금’이란 명목으로 날린 셈이다. 또 2006년 1월 3일 본보를 보면 서울 명성 교회가 지난 12월 27일 저녁 공동회의를 열고 김삼환 목사를 원로목사로 추대키로 결정했다. 당초 명성교회는 김 목사에게 전별금으로 약 30억을 지급키로 했으나 김 목사가 고사해 이를 어려운 목회자들과 소외된 이웃을 돕는데 쓰기로 했다. 다만 명성교회는 전별금을 고사한 김 목사에게 종전과 같은 사역비를 계속 지급키로 했다. 두 목사님 중 어느 분이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까?
    • 칼럼
    • 목회자
    2016-02-04
  • 새해 신앙의 첫 사랑을 회복하자
    사랑이라는 말에 대해 묻는다면 ‘사랑하라’는 것 이상으로 더 할 말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 하여라(요한13:34)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셨다.또한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덧붙인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끝을 맺는다. 일단 이렇게 끝을 맺은 요한은 다시 에피소드를 추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함께 아침을 드신 후 베드로 에게 “네가 나를 사랑 하느냐” 라고 세 번을 묻고는 나를 따르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장면이다.나는 요즘 이 장면을 주목하여 보고 있다. 복음의 사역자의 길을 가기로 다짐을 하였으나 고향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를 보니 얼마나 고생을 하는가? 식량도 여신도 교인들이 성미를 모아 간신이 생계나 꾸려갈 정도이고, 가을에는 교우들과 함께 산에 가서 나무를 하여 땔감을 마련하여 드리는 모습을 볼 때 처음에 먹었던 마음이 사라지게 되었다.그때마다 나는 이 말씀을 읽고 다시 힘을 얻곤 하였다. “네가 나를 사랑 하느냐?”라는 이 질문은 바로 나를 향하여 주시는 말씀이구나. 깊이 깨닫고 내 평생의 화두로 삼기로 결심하였다. 마치 주님께서 베드로를 만난 첫 순간에 베드로를 눈여겨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 아니냐? 말씀하신 것처럼 나에게도 들려오게 되었다. 힘들고 낙심 될 때 우리에게 나를 사랑 하느냐?는 그 질문을 평생 새기기로 다짐을 하였다. “그러다가 요즘 요한계시록 2:4절에는 그러나 네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첫 사랑을 버린 일이다”라는 말씀을 새롭게 다가온다.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참고 또 그의 이름을 위하여 잘 견딘 교회 아닌가?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 바쳤던 첫 사랑을 버린 교회가 되고 말았다. 성경은 주님께 바쳤던 첫 사랑을 버린 이 교회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서 떨어 졌는지를 생각하여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라. 만일 그렇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로 부터 옮기겠다”고 하신다.첫 사랑은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이든 아름답지 않은가? 세상에는 첫 사랑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재 빨리 첫 사랑을 체험 하고는 재빨리 잊어버린다. 언제 내 몸과 마음을 스쳐 갔는지 조차 기억 못하는 첫 사랑이란 있으나 마나한 것이고 차라리 그것은 비극이다.첫 사랑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이루어 지지 않은 사랑이라고 할지라도 두고두고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 있는 사랑일 때 해당이 된다. 만일 이와 같은 사랑을 스스로 포기 했거나 예상치 않았던 제3자의 방해를 받아 망가져 버린다면 그것은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만다.에베소교회의 경우는 ‘스스로 버린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다. 스스로 첫 사랑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 배반, 또는 자기기만이 아니면 변절일 것이다.만일 기독교 윤리학에서 첫째 되는 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변절’ 다시 말하면 사랑의 배반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주님을 배반한 변절자 가룟 유다에 대하여 주님은 노기 띤 목소리로 이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하였다. 라고 말씀하신 의미를 이해 할 것 같다.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도 좋은 사람들 -세상은 그런 사람들로 들끓고 있는 아닌지 …에베소교회는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수고도 많이 하고 참기도 잘한 교회였다. 그러나 그들은 첫 사랑을 버린 교회였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첫 사랑을 끝까지 간직 할 수 있다면 만일 두고, 두고 기억 할만한 첫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황홀한가?속히 사랑했다가 쉽게 내 던지는 사랑, 너무나 빨리 뜨거웠다가 빨리 내 던지고 쉽게 잊어버리는 사랑, 이와 같은 사랑은 있으나 마나한 사랑 있어도 그만 없어도 아쉬울 것 없는 그런 사랑 이라면 차라리 없었던 것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이제 한국 교회는 첫 사랑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고난과 시련도 역경의 골짜기를 걸으면서도 조국을 사랑하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돌아 보았던 그 열정을 어디에서 잃어 버렸는가?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이 한국 교회와 요즘 첫 사랑을 잃어버린 것 같은 나에게 들려오는 듯하다. 금년 한 해가 사랑을 회복하는 원년으로 기록되기를 소원한다.
    • 칼럼
    • 출애굽의 은총
    2016-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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