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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신재)나의 왕께 바치는 노래
    나의 왕께 바치는 노래 예 은 목나의 숨쉬는 호흡마다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나의 몸의 모든 세포들도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언제나 나와 함께 하사주님만으로 나를 채우소서 강물이 바다로 흘러간 후엔강물이 바닷물이 되듯이나 주님 속에 녹아져서나는 없고 주님만 있게 하소서나는 없어도 주님 안에서 숨쉬는나는 주님의 순결한 신부, 주님의 사랑오, 내가 영원히 흠모하고 사모하는나의 주, 나의 왕 예은목은 1994년 목사 안수를 받고 스웨덴 선교사로 나간 이후 해외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시인입니다. “1984년 12월 마지막 수요일 저녁 늦게 기도하다가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모든 재능은 모두가 주님의 것이라고… 그러므로 주님께서 필요하니 글을 쓰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후 4년이 흐른 뒤에 처녀 시집 『그대의 뜨락』을 내었습니다. 이렇게 시를 좋아하도록 저를 지으신 하나님의 은혜로 저는 자연스럽게 삶이 시로 연결되었지요. 지금은 교회의 심장 소리인 전도의 소리를 내는 전도 시집을 만들어서 문서 선교에 열정을 쏟고 있습니다”(『한국 기독 시인 총람』,331쪽). 시인의 고백입니다.위 시에서도 시인은 자신의 전부가 “주님 속에 녹아져서/ 나는 없고 주님만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가 주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살며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과 친밀하여 지는 것이 행복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주님께 따뜻하고 올바른 마음을 가지는 것이 충성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각기 그 재능대로 최선을 다하여 주님께 충성할 때 하나님의 칭찬을 받습니다. 그 성품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바뀝니다. 사탄이 주는 시험이나 유혹을 피하여 영적인 근육을 키울 수가 있습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언 25:13). 아멘.
    • 칼럼
    • 기독시선
    2015-09-18
  • 제자화의 기쁨
    신약 성경 디모데 후서 1장을 보면 사도 바울께서 사랑하는 제자인 디모데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녹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장 3-4절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 바울께서 제자인 디모데를 보면서 자신이 행했던 복음증거의 열매를 디모데를 통해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을 한마디로 표현한 성구라고도 볼 수 있다. 사실 디모데는 바울이 제 2 차 전도여행 가운데 만난 사랑하는 제자 이다. 이후 디모데가 바울의 제자가 되어 에베소 교회에 부임하였지만 어린 나이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격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은 디모데 에게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없신여기지 못하게 하고...”(딤전 4:12)라고 쓰고 있다. 사실 디모데에게 바울은 격려가 필요 했다. 사실 격려란 우리 인간이 주고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가운데 하나라고 볼수 있다. 필자는 사도 바울과 디모데와의 관계 속에서 사역의 열매가 무엇인가를 많이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선생의 참다운 역할이 무엇인가를 거울을 보는 것 같이 비춰보곤 한다. 이미 교회연합신문에서 다루었듯이 한세대학에서의 교수사역은 정년식을 가졌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서 학생들을 계속 보기를 원하는 나에게 초빙교수라는 타이틀을 주어서 지속적으로 선교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시간들 속에서 과연 나는 바울처럼 디모데를 사랑하고, 그처럼 순순한 제자를 두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곤 한다. 바울은 다방면에서 제자인 디모데를 가르치고 있다. 디모데 전서 6장을 보면 몇 가지 교훈을 제자에게 주고 있다. 11절을 보면,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라고 기록 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것들”이라는 말씀에 주목해 보아야할 필요가 있다. “이것들”이란 6장 3절부터 10절에 나와 있는 교회생활과 신앙성장에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통칭해서 말한 것처럼 보인다. 이를 통칭해 보면 교만과 탐욕 이다. 교만한자는,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해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6:4-5)”라고 말씀 하시고 계신다. 다음으로는 탐욕 이다.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잉태한즉 사망에 이르느니라”라고 욕심이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인간은 타락한 이후 인간의 본성이 악하여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가져보고자 하는 욕망 이 생겼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인간들이 탐욕을 물리쳐야 할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6:7)”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제자인 디모데를 향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6:12)”라고 말하고 있다. 운동 경기하는 자도 금메달을 얻기 위해서는 싸움이 필요 하다. 자신과의 싸움, 상대 선수와의 싸움, 환경과의 싸움이다. 천국 가는 길 가운데 싸움이 없을 수는 없다. 오늘 바울은 이러한 싸움을 “선한 싸움”이라고 말씀 하시고 계신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물리치시는 싸움을 싸워 승리 하셨다.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이란 사실 아무것도 없다.마지막으로 바울의 교훈은 “영생을 취하라(6:12).”라고 말하고 있다. 영생은 예수 안에 있는 복음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사역과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하겠다. 기독교는 타종교와 다른 절대성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를 믿으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사실 이다. 사실 타종교와 기독교를 비교해 보면, 윤리성 부분에서는 타종교 에도 얼마나 많은 사회적인 일들을 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인간의 이성을 억제하여 자기완성에 이르는 극기 같은 훈련도 우리 보다는 훨씬 강할 수가 있다. 또한 삼강오륜이든지 장위유서 같은 삶의 질서를 근본으로 하는 종교가 사회적으로 훨씬 강하게 어필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들 종교 속에는 영생이 없다. 영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기 때문 이다. 이 복음의 진수를 디모데에게 전수 하였기에 바울은 로마의 참수터 에서 눈을 감으면서도 기쁨으로 지산에서의 사역을 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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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5-09-18
  • 임이라 부르리까. 당신이라...
    1960년대, 경향의 레코드 가게를 달구었던 이미자의 노래 <임이라 부르리까. 당신이라 부르리까>의 노랫말의 대강은 이렇다. “...사랑을 하면서도/마음으로만 그리워/그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 것처럼/울어야만 됩니까” 거의 비슷한 시기, 극장가에서는 이성구 감독, 신영균, 윤정희 주연의 <당신>이 ‘고무신부대’의 발길을 사로잡았는데, “여자 고등학교 수학 교사 영재(신영균 분)와 새로 부임한 젊은 여교사 수진(윤정희 분)이 서로 사랑하게 되지만, 영재에게는 이미 가정이 있는지라, 두 사람은 고민하다 헤어진다는 멜로드라마. 거기에 <당신>이란 제목이 붙여진 것은 수진이 영재에게 마음 놓고 ‘당신’이라 불러보고 싶어 했던 사연을 클로즈업한 것이다.” 그럴 즈음, 바다건너 일본에서는 남극 관측소에 가있는 남편에게 써 보낸 여인의 편지 한 통이 세인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데, 편지지를 채운 글자는 단지 “아나타(=당신)”하는 세 글자였다는 것.그러니까 “당신”은 알뜰한 사랑의 심정을 담은 부부간의 호칭으로 쓰여 온 단어이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남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쓸 수 있는 호칭은 아니었다. 그래서 “자기”라든가 “이녁”이란 말로 대신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어법이 비슷한 우리나라와 일본사람들은 “당신”이라는 호칭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왔다. 이런 경우, “당신”이나 “아나타”는 영어로는 “you”가 아니라, “darling”으로 번역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우리나라나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호칭(呼稱)으로 “당신” “너” “그대”와 같은 인칭대명사를 쓰지 않는다. 집안 어른들에게 “당신”과 같은 대명사를 쓰는 사람은 없다. “형”, “누나” 대신으로도 쓰지 않는다. 학교 선생님이나 직장 상급자와의 대화에서도 “선생님”이라거나 “과장님” 이라 부르지 “당신”이나 “그대”라는 인칭대명사로는 부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당신”이란 말은 “너” “그대”와 비교해서 경어에 가까운 호칭이지만, 실제로는 손위에게 쓰기가 불편한 말이다. “당신”에다 “님”을 덧붙여보아도 비꼬거나 장난스러운 말은 될지언정 경어는 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윗사람에게 사용할 만한 인칭대명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가정을 벗어나서도 “아저씨, 아주머니”로 부를지언정 “당신”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시비가 붙었을 때가 아니면 “당신”이라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직장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너”하고 부른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도전이라 간주해도 좋을 것이고, “너” 대신 “당신”이라 한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혹 현장에 있지 않는 제3자를 아주 높여 “당신”이란 대명사를 사용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 자리에 계시지 않는, 이를테면 돌아가신 부모를 지칭하여 “당신께서 평소 아끼시던 물건 …” 등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삼인칭인 경우에 지극히 한정적으로 쓰일 뿐이다. 그런데도, 공중기도에서 하나님에 대한 호칭으로 “당신”을 쓰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 교회들의 현실이다. 우리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던 선교사들의 말버릇을 받아들인 탓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지만, 대체로 선구자의식이 강한 지도자들이 즐겨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름대로의 성찰과정은 거쳤으리라 믿어본다. 아이가 엄마에게 화를 낼 때, 영어로서는 “I hate you”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나는 당신이 미워” 할 수는 없지 않을까. 기껏 “엄마 미워” 정도로나 번역할 수 있을 터. 인칭대명사의 발달과정이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유럽언어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대목이 인칭대명사, 중에서도 호격(Vocative)이라는 사실은 번역작업에 손을 대본 사람이라면 경험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왕 우월한 문화권에서 들어온 종교이니 되도록 그쪽 언어에 동화하는 편이 여러 가지로 편리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미로 “하나님” 호칭을 “당신”으로 고집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또 다른 각도에서 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거추장스럽게 “하나님의 이름을 망연되이...”운운하면서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쓰고 있는 평균적인 우리말과 교회용어 사이의 골을 메꾸기 위해 애써보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닐 지도 모른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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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5-09-18
  • 원수를 선대하는 밀러 목사님(Peter Miller)
    언젠가 Bible School Journal 지에 소개된 이야기이다. 미국 독립 전쟁 시절 펜실베니아에 사는 ‘피터 밀러’ 목사님은 각계각층에서 모두 존경받았지만 유독 인근에 사는 단 한 사람만은 그를 몹시 증오했다. 어찌나 미워하고 욕했던지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명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나라에 대한 반역을 꾸미기도 했다. 이 사실이 드러나자 그는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밀러 목사님은 이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워싱톤 장군에게 달려가 그의 목숨을 살려 줄 것을 애원했다. 그러나 워싱톤은 말했다. ‘미안하지만 친구를 위한 당신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친구라고요?’ 밀러 목사님이 외쳤다.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내가 만난 최악의 적입니다’. ‘적이라고요?’ 워싱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신은 원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97km나 되는 먼 길을 걸어왔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좀 별 문제군요? 당신을 봐서 그를 용서 하리다’ 워싱톤은 특사 통지서에 서명을 해주었고 밀러 목사는 즉시 사형 집행이 열리는 장소로 달려갔다. 그곳은 밀러 목사가 출발한 지점으로부터 80km나 떨어져 있는 곳 이었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죄수가 막 사형대에 올라서려던 참 이었다. 사형수는 밀러 목사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것을 보고 말했다. ‘저기 늙은 피터가 오는군! 오로지 내 목이 달리는 것을 보면서 복수의 기쁨을 즐기려고 에프라타(Ephrata)에서부터 여기까지 달려온 거야’ 하지만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밀러 목사는 군중들을 밀치고 나아가 워싱톤 장군의 사면 통지서를 그에게 내밀었다. 실로 악을 선으로 갚는 다는 것은 어렵다. 말로는 쉬울지 모르나 막상 자기에게 그런 일이 닥쳤을 때는 참 실천하기가 힘들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고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는 웃는 얼굴로 대하고 피해를 주는 사람에게는 화난 얼굴로 대하는 것은 그 누구나 할 수 있는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원수를 사랑하고 나와 핏줄과 사상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허나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밀러 목사님을 보자. 그가 악으로 선을 갚는 행동을 보며 느끼게 되는 것은 참 그리스도인 이라면 남다른 행동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하신 주님을 본받아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도 사랑하고 용서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는 구체적인 행동의 결단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참으로 어렵지만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기도하라고 하셨으니 어찌 해야 하겠는가? 주께서 왜 원수를 대적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라 하셨을까? 이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사실 폭력으로 원수를 거꾸러뜨려 복수하는 일은 한편으로는 시원하고 통쾌한 일일 수도 있다. 허나 그로인해 내가 상대편의 원수가 되고 그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보복을 가해올 것이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더욱 큰 문제들을 발생 시킨다. 또 원수를 해하려 하는 이는 우선 자기 자신이 더러워 진다. 세상 죄와 불의에 오염되고 타협하기 쉽다. 그리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대신 사단의 증오와 미움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을 논하거나 그것을 주제로 이야기만 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이념이나 구호가 아닌 어떠한 형태로든 구체적인 실천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사랑을 단지 주제로 삼고 논하는 것으로 사랑의 실체를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반영된 때에야 사랑은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한다. 그렇다 기독교는 분명 사랑의 종교이다. 즉 사랑을 원리로 하는 종교이다. 하지만 요즈음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로 부를 때는 그것을 인정하기 보다는 조롱하는 의미로 그렇게 부른 것 같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가 분명하고 사랑을 가르치는 것이 확실하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말로만 사랑을 외침으로 사랑이 구호로만 그치고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자. 혹시 형제의 사소한 잘못이나 공격에 못 이겨 복수심의 칼을 갈고 있지는 않을까? 그것을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리지는 않을 까? 헌데 이러한 것은 우리의 인격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무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묵상하고 이 사랑을 바로알고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주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또 하나님의 구속의 원리대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진정한 주님의 완전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원수 대신 친구를 얻게 될 것이고 만일 그가 회개치 않으면 하나님께서 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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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
    2015-09-18
  • (정신재)쪽빛 바다
    쪽빛 바다 임 인 진그 사람 홀로 떠나보낸 뒤로쪽빛 물결 하얗게 부서지는 그 바다눈에 밟혀 잠 못 이룬다고 했지솔빛 청청한 봄날그대 가솔들 데리고 청간정淸澗亭 앞 바다거기 하늘 맞닿은 곳 바라보며분홍빛 카네이션 띄워 보내면그 사람 좋아하며 활짝 웃을 거라고 했지은파銀波에 실린 꽃잎하얀 포말泡沫로 부서져그리움의 선율旋律 눈부시게 떠오르는 날그 바다 교향곡交響曲 장엄하게 울리리니그대는 쪽빛 바다 향하여회오리바람처럼 스쳐간 시간을 되돌리며새하얀 오선지에 분홍빛 음표를 찍듯그리움의 선율을 가슴에 새기리한 줄 한 줄씩 곱게 새기리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후 디베랴 호수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와 도마와 나다나엘과 세배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물고기를 잡으러 호수에 나갔으나 밤이 새도록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물가에 서서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던지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 옆에 있던 제자가 “주님이시라” 하니 베드로는 벗고 있다가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왔습니다. 주님은 숯불 위에 생선과 떡을 준비하여 놓으시고 그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떡과 생선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시고는 “내 양을 먹이라”하셨습니다(요 21장).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통치권이 사탄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다스림과 사탄의 다스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빼앗으려는 사탄과 영적 전쟁을 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야 합니다.
    • 칼럼
    • 기독시선
    2015-09-03
  • 은퇴식 소회
    은퇴식을 흔히 retire라는 영어 표현을 쓴다. 사전적 의미로는 ‘맡은 바 직책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서 한가로이 지냄’으로 정의된다. 은퇴와 함께 다양한 면에서 압박과 심적 고통을 밀려 온 것도 사실이다. 특히 주변 사람들이 더욱 걱정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다. 어느 포털 사전에 찾아보았더니 남편은퇴증후군이라는 나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은퇴남편증후군(RHS: Retired Husband Syndrome)은 ‘남편의 은퇴와 함께 아내의 스트레스 강도가 높아지면서 몸이 자주 아프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증상을 의미하는 신조어이다. 이들은 이 시기에 잦은 싸움으로 인해 황혼이혼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라고 나와 있다. 필자의 은퇴식도 공식적으로 2015년8월18일에 있었다. 그동안 학교에 몸담고 있어서 세상물정을 모르고 살았기에 둥지를 떠난다는 것이 새가 어미의 둥지를 떠나서 허허 벌판으로 날아가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참으로 귀한 직장에서 몸담았던 것 같다. 나에게 주어진 은퇴사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03년부터 오늘까지 한세 공동체와 함께 할 수 있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이 시간들은 저에게는 참으로 과분한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먼저는 위로는 어머니 같은 총장님의 사랑과 배려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집에는 각종 주방기구들이 식탁위에 있어서 날마다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제 밤에 잠잘 때에 사용한 배게도 총장님께서 건강을 위해서 챙겨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이러한 살림살이들을 보면서 어쩌면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 같은 포근함을 느꼈습니다. 또한 형제 같은 우의 속에 근무 할 수 있었음을 감사드립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에 기도를 모아 주시고, 기쁜 일이 있을 때 함께 즐거워 해 주셨던 모습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사랑을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자식 같은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부자간의 관계란 부모가 부족해도 자식은 부모를 존경과 사랑으로 섬겨 줍니다. 많이 부족했지만 제자들은 저에게 아버지를 대하듯이 깊은 마음을 주셨습니다.결국 위로는 어머니와 같은 총장님의 보살핌, 수평적으로는 형제 같은 동료 교수님과 교직원 선생님, 그리고 아래로는 자식 같은 제자들과 함께 한 시간은 저의 인생 최대의 시간이었음을 고백하면서 퇴임사를 마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퇴임식을 마치고 점심시간 식탁에 둘러 않아서 들으니 한결 같이 멋있는 퇴임사를 했다고들 한다. 어떻게 그렇게 멋있는 말을 할 수 있느냐고 질문들도 들어왔다. 이는 평소에 생각했던 내용들이라고 말했다. 이래저래 은퇴는 색다른 의미가 있는 경우라고 생각되어진다. 하루 앞서 여의도 국민일보 빌딩 12층에서는 제자들이 마련한 은퇴식이 있었다. 평소에 학교에서 관심을 갖고 함께 선교를 이야기 했던 제자들 70여명이 모였다. 이 모임을 주선해 주신 분은 필자를 통해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의 베데스다대학교의 총장으로 취임한 정인욱 박사였다. 이 분은 비즈니스를 통해 재력을 쌓았고, 쉽지 않는 시간을 내어서 한세대학교 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M.Div), 심학석사(Th.M), 철학박사(Ph.D)를 취득하고 미국 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하신 분이다. 애초에는 학교의 강의실에 모여서 간단한 다과와 함께 석별의 정을 나누고자 했던 의도와는 달리 규모와 장소가 한층 높아지게 되었다.은퇴란 retire라고 했다. 이는 타이어를 다시 갈아 끼우고 새롭게 길을 달리게 된다는 의미를 갖게 된다. 인생을 새롭게 개척할 기회가 주어진 것 같다. 한세대학에서는 총장님의 배려로 초빙교수로 다신 교단에 서게 되었다. 그 길이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학생들과 매일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 될 것 같다. 그리고 그동안 준비했던 세계다문화진흥원 사역이 기다리고 있다. 이미 다문화 교육이 46차에 걸쳐서 800여명을 훈련 시켰다. 세계로평생교육원과 세계로원격평생교육원을 통해서 한국어교원 양성(3급)을 만들어 해외 선교에 필요한 수료증을 만들어 놓았다. 세계로미디어를 통해서 선교학관련 책들이 출간 되었고, 다문화선교론 출간을 예정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세계로선교학교 운영이 기다리고 있다. 차근 차근 그동안 활동하지 못했던 분야를 찾아서 은퇴 이후의 삶을 설계하고 추진하고 싶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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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
    2015-09-03
  • 레아 이야기
    “아름다움, 매력, 열정은 라헬 몫이지만, 강하고 친밀한 끈, 다시 말해서 성실하고 지속적인, 그래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사랑은 레아의 몫이었다.” 랍비 아딘 스타인잘츠(Adin Steinsalts 1937~ )의 해설에 대해서 평균적인 유대인들은 공감을 표하는 것 같다.그러니까, 눈의 아들 여호수아나 사울과 같이, 한 때 강력한 인상을 심었어도, 단명하거나 허무한 일생을 살다간 라헬의 자손들 보다는,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여 다윗의 가문을 이어온 레아의 자손을 꼽는다는 말일 터. 그러나 레아가 족장들의 처첩들 중 가장 불행했던 여인이었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으랴!<창세기>에서 레아는 라헬의 언니로 등장한다. 그런데도 야곱이 쌍둥이 형에서의 노여움을 피해 외가의 땅 하란으로 왔을 때,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쪽은 언니 레아가 아니라 동생 라헬. 우리가 대하는 대부분의 <창세기>는 ‘라헬의 눈빛이 레아의 것보다 훨씬 빛나고 매력적’이라 번역하고 있지만, 그 대목을 ‘레아의 시력에는 결함이 있다’로 읽을 수도 있단다. 그래서 양들을 이끌고 우물가로 가는 일은 동생 라헬이 맡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야곱이 언니 레아 보다 동생 라헬을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고, 야곱과 라헬이 첫 눈에 서로 반하고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운명이 정해놓은 수순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 모든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레아가 야곱의 첫째부인이 된다. 거기에는 야곱의 외삼촌이자 레아와 라헬의 아비인 라반의 음모가 끼어들기는 했어도, 신방에 들어온 여인이 7년이나 기다리던 라헬이 아님을 알아차리지 못한 야곱의 실수인들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지 않는가. 적어도 고대인의 운명론을 탐탐하게 여길 수 없어하는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레아가 야곱의 첫 부인이 된 책임은 야곱 자신이 질 수밖에 없는 노릇. 레아에게는 동생 라헬이 지닌 그런 매력이 없기에 라헬처럼 야곱과 더불어 천의무봉의 애정을 즐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야곱의 사랑을 얻고자 그녀의 모든 것을 바치고 수모를 인내할 수 있을 뿐이었다. 슬픈 여인 레아는 막무가내로 야곱을 차지하려했다. 그녀의 자식들조차도 그녀의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 어쩌면 많은 유대인이 라헬보다 레아를 받들려하는 데에는, 그녀의 슬프고도 인고에 찬 일생에 대한 동정 때문인지도 모른다.야곱이 무려 7년 동안의 종살이를 마치고 고대하던 첫날 밤을 치를 때,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은 몸매가 아름답고 용모도 예쁜 라헬이 아니라, 못생긴 언니 레아를 신방으로 들여보냈고, 야곱은 레아와 황홀한 ‘밤’을 보낸다. 그것은 야곱의 실수이기도 하지만, ‘밤’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라는 것이 토마스 만의 익살이다. 만은 그의 명작 <요셉과 그의 형제>에서 ‘밤’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니까 야곱의 실수는 역사상 처음 있은 일이 아니라는 것. 이집트 신화에서, 아눕(그리스 이름으로는 아누비스)의 이야기에서 그것을 증명하려한다. 아눕은, 아버지 우시르가 아내 에세트를 찾아간 다는 것이, 어두운 ‘밤’이라 엉뚱하게 동생 세트의 아내 넵토트와 동침한 결과로 태어난 아들이란 것. 그 모든 것은 ‘어둠’ 탓이었다는 것.“밤에게는 집착이란 것이 없지 않는가. 낮이 일깨워주는 편견이란 밤이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거든. 밤이 어떤 진실을 아느냐고? 여자의 몸이라는 게 다 같아서,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생산하기에는 그만한 게 없다는 게 진실이지. 여자가 구별되는 건 얼굴뿐. 그런데도 얼굴만 보고 이 여자한테서 자식을 생산해야지, 저 여자한테서는 자식을 생산할 생각이 없다는 둥 지껄이지. 그런데 얼굴이란 온갖 착각과 상상으로 가득한 낮의 얼굴이거든. 하지만 진실을 아는 밤 앞에서 그 얼굴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1권 6부 역겨운 것)” 얼굴과 밤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했다. 밭은 씨를 뿌리기만 하면 되는 것. 그 씨가 르우벤이란 힘센 장사를 태어나게 했을 뿐. 급한 성질 탓에 ‘마구 쏘아 대는 물’, ‘아무데서나 넘치는 물’이라 불리던 그도 아버지의 첩과 잠자리를 함께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패일언, 결국 야곱 곁에 묻힌 것은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다. <창세기>가 읽히는 것은...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09-03
  • 인생의 여정에 동행하신 하나님
    한 성도가 꿈속에서 자신이 걸어온 발자국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발자국은 두 사람의 것 이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발자국이 누구의 것인지 확인해 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발자국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높은 산을 오르거나 고개를 넘어갈 땐 두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의 발자국만 있었다. 그가 이상스럽게 여겨 예수님께 물었더니 ‘평탄할 때에는 내가 언제나 동행하였지만 어둡고 힘든 곳을 지날 때엔 내가 너를 안고서 지나갔다’고 대답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 동행해 주신다. 인생을 살다보면 때론 고난이나 혼자서는 도저히 헤어나기 힘든 수렁에 빠질 때가 있다.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하여 그 분함을 어디에 어떻게 호소해야 할지 난감할 때도 있다. 나만이 이런 일을 당한다는 생각에 더 서럽고 고독한 적도 있다. 부부간의 갈등, 친구의 변심, 실직, 갑자기 무서운 질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는가 하면 채무자가 되어 하루아침에 부도를 내고 도망가는 바람에 꾸어 준 돈을 한 푼도 못 받는 경우도 있다. 또 갑작스런 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고통을 겪기도 한다. 이럴 때 우리는 흔히 통곡하며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여 원망 한다. 마치 오늘로서 삶이 끝나 버릴 것만 같이.. 실제 적쟎은 사람들이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삶을 포기 한다. 마약이나 알콜 중독자가 그 한 예다. 그들은 대부분 삶을 포기한 자들이다. 현재의 처지가 너무 절망스러워서 미래 역시 현재와 별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암담한 생각에 상습적으로 술 마시고 마약을 복용 한다. 극단적으로 삶을 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자살률은 세계 5위로 인구 10만 명 당 226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루에 평균 36명 정도가 자살한다고 한다. 허나 이것은 문제 해결에 대한 바른 자세가 아니다. 고난을 당할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고난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고난을 주시기 때문이다. 즉 고난을 통해 마음이 겸손해진 후에 복을 주신다. 그러므로 안이하고 태만한 불신앙을 버리고 고통을 꿰뚫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한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듯이 인생 여정에서 불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자꾸만 멀어져 가고 있지는 않는가? 급작스럽고 예측 불허의 일이 일어나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쁠수록 돌아서 가라’ 는 옛말이 있다. 그러기에 가장 가까이에서 나의 고난과 억울한 사정을 알고 계시는 주님을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때 염려는 해 줄 수 있어도 실제 도와주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난을 보시고서 그냥 보고만 계시지 않는다. 고난과 역경 속에 친히 찾아오셔서 동참하시고 대신 무거움을 건져 주시며 함께 감당하신다. 고로 고난을 당할 때 나 혼자 억울함을 당한다고 생각지 말자.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과거에도 현재도 또한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다.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만난 자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 과정을 겪는 것은 누구나 힘겹다. ‘정말 하나님께서 식구들이 편히 거할 수 있는 전세방을 주실까’? 자녀들이 많아 이사할 전셋집도 구하기 힘든 처지에 놓인 한 집사님이 있었다. 그러나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이 거처를 놓고 기도하는 집사님께 미쳐 전셋집은 물론 몇 년 후 훌륭한 자기 집을 마련하도록 도와 주셨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이 있더라도 막상 다른 어려움에 처하면 또다시 하나님을 신뢰 하지 못하고 자신의 힘의 한계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내가 어떻게 이 엄청난 일들을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할 수 없어’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 하지 않고 포기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허나 우리들이 이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진리는 사람 뒤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하나님께서는 시련 속에서 당신을 찾는 자에게 오히려 더 큰 의미로 또한 더 큰 사랑으로 다가오신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가운데서 동행해 주시며 형통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람이 할 수 없다고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했을 때 바로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강하신 손을 더하셔서 모든 환난에서 건져 내신다. 따라서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은총은 비례하여 나타난다. 사람이 더 이상 책임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하나님의 은총이 전폭적으로 역사하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고로 현재 당하는 고난으로 괴롭더라도 절망하지 말고 믿음으로 고난 뒤에 섭리하시는 손길을 바라보자. 환난 중에 도우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손길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5-09-03
  • 이발소 풍경
    이발소 풍경 정 신 재고즈넉한 햇살이 문을 두드린다눈 먼 창문을 넘어서면[아가의 기도]를 건너하루치의 손님을 기다리는 여자고향 얘기를 서러운 밥에 말아 먹고가죽띠 위로 날 선 칼을 간다도시의 거품을 걷어낸 후넋두리의 수염은여자의 손길에 잘려 나가고파아란 하늘과 만나는 거울학벌이 날아가고이데올로기가 날아간 실내가바다처럼 가라앉고거울 위에선영원의 친분마저나뭇잎으로 된 치마를 벗는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헐벗은 소외 계층의 아픔을 위로하는 구세주였습니다. 제자들이 몇 년간 예수님을 믿고 따르다가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자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사셔서 그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상처난 손으로 제자들을 위로하셨지요. 제자들보다 더 큰 상처를 받으셨으면서도 당신의 제자들을 직접 챙기신 주님이 계셨기에, 베드로는 “쿠오바디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며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갔고, 바울은 죄 없는 죄수의 몸으로 복음 전파를 마다 하지 않았지요. 필자는 한창 성담론을 연구할 때에 만성 신부전증을 앓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작가로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소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제가 여기 있나이다. 주님 뜻대로 행하소서.”라고 고백하였을 때, 주님은 삼류 콤플렉스와 추남 콤플렉스에 차 있던 나를 치유시켜 주시고, 문서 선교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침마다 영감을 폭포수처럼 내려 주셨습니다. 나는 그 영감을 받아 적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을 직접 체험하시고,상처받고 아픈 영혼을 가진 사람들에게 직접 찾아오십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 칼럼
    • 기독시선
    2015-08-28
  • 구원의 축복은 선교의 열매
    신앙의 꽃을 무엇인가. 이는 구원의 축복을 받는 것이다. 즉 우리는 무엇 때문에 주일을 지키고,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고, 헌신을 하고, 심지어 오지에 가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비행기 사고로 죽기까지 하는가? 이러한 문제는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구원을 얻어 영원히 사는 영생의 길을 얻기 위함 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따라서 마태복음 16:26에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계신다.빌립보서 2장12절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역과(2:5-11), 대속적인 사역의 결과를 통해서 인간이 이루어야할 자신들의 구원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특히 바울은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논의 하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라고 언급하고 있다.감리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John Wesley는 선제적 은총의 구원을 이야기 하면서 인간이 구원을 받는 과정 가운데 다음의 세가지 역할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첫째는, 구원을 사모하는 열심을 내라. 둘째는, 마음의 문을 여는데 있어서 분명한 결단을 하라. 셋째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자유 의지적 참여라고 말하고 있다.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사역은 인간을 구원 시키는 것이다. 선교지에서 사역을 가다보면 반드시 타종교와 부딪치게 된다.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구원의 문제로 나아가게 된다. 세상의 대부분의 종교들도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 사상이나, 적선을 통한 윤리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본다. 따라서 좋은 일과 적선을 많이 해야 극락왕생 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주류가 급기야는 살생을 금지하고, 동물을 숭배하고, 자연을 숭배하는데 까지 이르기도 한다. 이슬람교에서는 다섯 가지의 계울(신앙고백, 적선, 매일 다섯 번의 기도, 금식, 순례)을 지킴으로 천국 간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자력 구원을 말하고 있으며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기독교의 신앙과 배치된다.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만약 범죄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이 없다면 인간은 여전히 죄 가운데서 구원의 감격이 없는 불안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구원 이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지은 죄 값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형장으로 보내서 피 값으로 인간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고 사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인간이란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구원의 방주에 믿음을 통해서 승선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구원을 얻기 위한 과정 속에 인간에게 선한 욕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인간이 선한 욕심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느냐의 문제 이다. 그것은 구원이 인간에게 얼마나 필요 하느냐의 문제와 직결된다.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적어도 네 가지의 크나큰 은혜가 우리 속에 나타난다. 이는 사죄의 확신, 삶의 목적, 새로운 능력을 공급받는 것, 그리고 평안 이다. 인간은 평안을 소유함을 통해서 얻은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넘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요한복음 14장 27에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원 하지도 말라”라고 말씀 하셨다. 사실 자고 깨고 나면 날마다 우리는 서건 사고를 접하게 된다. 여러 가지 사고를 보면서 우리는 심하게 낙심되기 쉽다. 그럴 때 마다 우리는 분명한 평안의 확신이 있어야 할 줄 믿는다.필자는 필리핀에서 선교사역을 했던 때가 있었다. 그 국가는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예수님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학습 받아 익히 알고 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이 있다. “만약 당신이 지금 죽는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이다. 자신의 구원 문제를 철저하게 생각한 사람은 화신할 수 없다고 고백하면서 복음을 받아 드린다. 우리는 복음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하겠다. 그리고 생명의 복음으로 신앙생활을 활기차게 채워야 하겠다. 또한 주어진 기회를 통해서 선교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www.worldcan.co.kr(세계로선교학교)
    • 칼럼
    • 선교
    2015-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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