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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년기고 / 2019년, 사랑과 힘과 정의의 유기체로서의 평화를 위하여!
    사랑이 없는 힘은 폭력이며, 사랑이 없는 정의는 무자비하며, 힘이 없는 사랑과 정의는 무의미하며, 정의가 없는 사랑은 불의요, 정의가 없는 힘은 독재다. 이 사랑과 힘, 그리고 정의를 분리할 수 없는 유기성이 평화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존재의 근거이기도 하다. 이것이 흔들리면 아무리 기회의 균등을 외쳐도 균등할 수 없으며, 제아무리 공정한 과정을 이야기해도 결코 그 과정은 공정할 수 없으며, 정당한 결과를 이야기해도 결코 정당할 수 없다.사랑과 힘과 정의는 권력의 세 축이다. 어느 한축이 무너지면 그 자체로서 사회의 평화는 깨어지고, 아무리 주권자가 평화를 외쳐도 그 자리에서 기회와 과정과 결과는 불합리, 불공평, 부당한 혼란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사회가 깨어진 평화 앞에 신음하고 있다. 지금의 사회적 현상에서 누가 기회가 균등하다고 하며, 누가 과정이 공정하다고 하고, 결과가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권력의 그 어느 누구도 감히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없다.인간의 사랑과 정의와 힘은 사랑하는 자로서의 신, 정의로운 자로서의 신, 전지전능한 자로서의 신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비록 인간에 의해 파악된 신의 사랑과 정의와 힘을 인간이 제대로 실천하지는 못하지만, 권력자는 자신이 가진 그 권력에 이 세 요소가 어느 한쪽에 치우침으로 기울게 하거나 함몰하게 해서는 안된다.인간의 평화를 유지하는 사랑과 힘과 정의는 그 구조상 신적인 요소이다. 즉 하나님의 성부, 성자, 성령으로부터 유추된 것으로 성부 하나님의 정의로움, 성자 예수님의 사랑, 성령 하나님의 힘이 그것이다. 그것은 하나이며 동시에 셋으로 나타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과도 일치한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을 관통하고 완전히 파악한다. 성자는 성부와 성령은 완전히 관동하고 파악한다. 성령도 성부와 성자를 관통하고 완전히 파악한다. 고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완벽한 개체로 계시면서도 완벽한 하나로 일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존재요 평화이다.이것이 인간에게 유기적으로 위임될 때 창조세계에서 하나님의 평화는 완성된다. 인간은 그럴 책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타락 이후 인간의 질서는 동물적 위계로 재편되었다. 동물의 세계에서 힘과 사랑과 정의에 의한 평화는 그 개념조차 성립하지 않는다. 적용시키고자 하는 것이 무의하다는 뜻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짓밟고 잡아먹는 것이 정의이며, 생태 환경에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고 그러하지 못한 자는 도태된다. 자연도태의 과정을 거쳐서 힘없고 약한 생명체는 사라지고 먹이사슬의 변형에 따라 생명 개체의 수도 달라진다.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존재 법칙이 아니다. 인간의 창조와 그 유지를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창조 윤리, 곧 인간의 존재 법칙은 동물의 존재법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돌보아야 한다. 부한 자는 가난한 자를 책임져야 하며, 배운 자는 그렇지 못한 자를 위해 지식을 사용하여야 한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를 도와서 건전한 사회의 일원이 되게 해야 하며, 도태되지 않도록 세워 주어야 한다. 이것이 창조의 윤리질서이다. 이 질서의 완성이 바로 인간에 의해 구현된 사랑과 힘과 정의의 유기적 관계의 평화 실현이다.문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고 김정은 위원장이 답방을 한다고 해서 이 땅에 평화가 오지 않는다. 복지 자금을 풀어 대고 세금으로 직장을 찍어내도 이 땅에 산재한 젊은이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왜 모를까? 지금 청와대와 여당은 추락하고 있는 지지도와 국정실책을 언론과 과거 정권의 잔재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비록 그 말이 맞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집권자이며, 바로 그런 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세력이기 때문이다. 서서히 등을 돌리는 국민을 나무라거나 원망하면 안된다. 우리 국민들이 그 만큼 어리숙한 사람들이 아님을 아직도 모르는가?청와대와 정부는 국민의 불만과 이탈을 단말마적으로 보지 말고 누구 탓으로 돌리려고 하지 말라. 지금 이 현상은 어디선가부터 사회적 힘과 사랑과 정의의 긴밀한 관계가 어긋나면서 벌어지는 불협화음으로 인한 평화의 상실에 있다. 헤겔의 정반합의 원리는 바로 이러한 현상을 바로잡으려는 철학자의 고뇌의 산물이다. 헤겔이 철저하게 인정하고 인용했던 것이 반(反)이다. 그는 정(正)을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반(反)의 실체를 끌어 왔다. 그래야만 변증법이 멈추지 않고 진행하기 때문이다. 어느 한 곳에서 정(正)이 반(反)을 무찔러버렸을 때 역사발전은 그 자리에서 중단되고 만다. 지금의 역사가 멈추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적폐를 청산하는 것은 좋지만 보수를 청산하면 안된다. 그러면 진보도 설자리가 없다. 보수가 없는 진보가 있는가? 보수가 없다는 진보 그 자체가 곧장 보수가 된다. 아니면 멸절된 보수를 대체한 세력이 없으면 그 자체로 곧장 독재가 시작된다. 이것이 역사발전의 원리에 기인한 당연한 현상이다. 지금 집권세력은 바로 이런 길, 자살 골, 자멸의 길로 가고 있다. 어쩌면 이런 실수는 과거 두 보수 정권의 실패이기도 하다. 알면서도 왜 정권만 잡으면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혁하자는 것이 정당한 주장인지도 모른다.청와대와 여당은 각성해야 한다. 국민을 무시하고 어설픈 돈 몇 푼이나 비상한 정치 이벤트로 마음을 잡으려 하지 말라. 지금 국민들이 얼마나 냉철한 눈으로 그대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무서운 잠재력을 간과하지 말라. 촛불의 민심이 항상 진보 쪽에만 있을 것이라는 오판이 가져올 무서운 결과를 던져주면서, 힘과 사랑과 정의의 평화를 허락하시고 그 성취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은혜가 황금 돼지해를 맞는 모든 독자들과 기독인들에게 함께 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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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04
  • 품격을 저상하는 총회재판국 판결 -1
    경유란 행정체계에 따르는 협의과정을 지칭판결 후 그 판결 하회의 경유 요구는 부당한 억지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헌법에는 장로회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대소요리문답 등 교리적인 헌법이 있고, 관리적인 헌법으로는 교회행정의 규범으로 교회정치가 있고, 권징재판의 규범으로는 권징조례가 있고, 예배와 예식의 규범으로 예배모범이 있다. 그리고 교회재판의 경우 교인에 대한 원치리권(직접치리권)은 소속 지교회 당회에 있고, 목사에 대한 원치리권은 그 목사가 소속한 노회에 있다. 바꾸어 말하면 교인에 대한 재판관할은 소속 지교회 당회이고. 목사에 대한 재판관할은 그 목사가 속한 노회이다. 즉 교인에 대한 고소를 받아 심리 판결 하는 일은 그 교인이 속한 지교회 당회 뿐이요, 대등한 다른 당회들은 물론, 상회인 노회도, 총회도 이 권리가 있을 수 없는 것은 재판관할권은 바로 그 치리회에만 있는 고유한 특권이니 말이다. 그리고 목사에 대한 고소를 받아 심리 판결하는 일은 오직 그 목사가 속한 노회 뿐이요, 대등한 다른 노회들은 물론, 하회인 당회와 상회인 총회에도 이 권리가 있을 수 없는 것은, 역시 그 소속 노회의 고유한 특권이기 때문이다.그러나 교회를 재판하는 당회(당회재판회)도, 목사를 재판하는 노회(노회재판회, 노회 재판국)도 인간적인 약점과 분리될 수 없으므로 오판(誤判)의 가능성을 시인할 수 밖에 없어, 3심제도를 원용하고 있으니, 즉 당회의 잘못은 노회가 바로잡고, 노회의 잘못은 대회 혹은 총회가 바로 잡게하고 있다. 그래서 교인에 대한 원치리권이 없는 노회도 당회의 판결을 바로잡아 달라는 상소건을 받아 심리 판결하게 되고, 목사에 대한 원치리권이 없는 총회도 노회의 판결을 바로잡아 달라는 상소건을 받아 심리 판결하게 된다.그리고 권징조례가 규정한 상소의 절차는 “…하회 판결 후 10일 이내에 상소통지서와 상소이유설명서를 본회 서기(서기가 별세하였거나, 부재 혹 시무하기 불능한 때에는 회장에게 제출한다)에게 제출할 것이요.…”(권 제9장 제96조)로 상소절차의 첫 단계가 이루어졌고, 둘째는 “…상소인 자기나 대리할 변호인은 상회 정기회 개회 다음날 안에 상회에 출석하여 상소장과, 상소이유설명서를 상회서기에게 교부한다. 상소인이 전기 기일에 출석하지 못할 때에는 불가항력의 고장을 인하여 위 기간안에 출석하지 못한 믿을만한 증거를 제출하지 못하면 그 상소는 취하한 것으로 인정하고 본 하회의 판결은 확정된다”(권 제9장 제97조). 즉 …후10일 이내에 상소통지서 등 관계문서를 본회 서기에게 접수 시켰으면 이미 상소가 성립되었고, 상회 개회 다음날 안에 상회에 출석하여 상회서기에게 상소관계 문서를 다시 제출함은 이미 성립된 상소건의 취하 여부를 판단하는 근거가 될 뿐이다.그런데 놀랍다고 해야 할까? 근간 5년 동안 (2013년 제98회 총회~2017년 제102회 총회) 상소사건에 노회경유, 심지어는 당회 경우가 없다고 기각된 상소건이 제98회는 6건, 제99회는 4건, 제100회는 25건, 제101회는 8건, 제102회는 4건이니 도합 47 건이나 된다.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하다. 묻노니 각 노회가 총회에 청원하거나 헌의하고자 하면 노회가 결의하고, 총회개회 10일전까지 총회서기에게 제출 (총회규칙 제8장 제29조) 하면 그만인가? 아니면 당회와 시찰회 혹은 노회의 경유를 다시 해야 하는가? 헌의부를 통과할 모든 문서는 위와같이 문서제출기간에 제출하면 그냥 다 접수하여 처리하고 있으면서도 하필 재판사건에 대해서는 노회경유 심지어는 당회경유 부전지 미비 운운하면서 기각하거나 각하하는가?경유(經由)란 그냥 지나는 것이 아니고 거쳐 지나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헌법이 규정한 경유기관(經由機關)은 정 제10장(노회) 제6조(노회의 직무) 9항~11항의 시찰위원회이니 “노회는 교회를 감독하는 치리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지교회 및 미조직 지교회를 순찰하고, 모든 일을 협의하며 노회의 치리하는 것을 보조할 것이니… 교회와 당회를 돌보고 노회를 위하여 교회형편을 시찰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즉 시찰위원회란 노회의 치리를 방조하는 기구요, 지교회와 협의하는 협의기관이란 말이다. 이 협의기구(시찰위원회)를 거치는 것이 경유이다.그리고 총회에는 노회처럼 총회의 치리을 방조하는 기구도 없고 산하 노회와 협의하는 협의기구도 없는데, 도대체 총회의 소원권, 상소건에 경우가 웬 망말인가? 이 소원 건 상소건은 원처결 당시 이미 경유기관(시찰위원회)의 경유를 거쳤고, 판결까지 받았는데, 이제는 그 노회의 처결이 부당하다고 그 시정 혹은 변경을 구하는 상소건, 소원 권인데, 판결한 그 노회, 처결한 그 노회의 경유를 왜 또 받아야 하는가? 억지를 써도 분수가 있어야 한다던데, 도대체 협의하는 경유가 최종적인 처결 이전에 최종적인 판단의 방조자료 구실을 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아니한가? 옳다고 하면 최종적인 처결(노회 처결 혹 노회의 판결을 가리킨다) 후에 그 최종적 판단의 방조자료 구실을 하는 경유가 왜 있어야 하는가?또 부전지(附箋紙) 미비로 기간인가 각하인가도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이 과연 대한예수교 장로회이 최고재판국의 판결인지 의심스러운 생각이 든다.노회가 회집되었을 때에 경내 교회상황 등을 보고하는 시찰회 보고 중에 “○○교회 당회장 ○○○ 씨가 청원한 ○○건은 협의상정한 일이오며”라고 보고하는데, 이같이 노회에 상정하기로 된 문건에는 반드시 경유인을 찍어야 하고, 경유하기에 부적당한 문건에는 부당하다는 이유를 적은 작은 쪽지 한장을 붙여서 반려하는데, 혹시 그냥 반려하면 청원인이 “언제 어디에서 시찰경유를 요청했으나 이유 없이 반려되었으므로 이에 부전(附箋)합니다”고 작은 쪽지에 적어 붙여서 노회서기에게 제출하면 노회서기는 경유 과정을 거친 사실이 인정되면 접수하게 된다. 부전이란 이와같이 경유과정을 거쳤다는즉 둘러왔다는 작은 쪽지를 붙이는 것을 가리키는데, 부전지 미비라며 합법적인 소원권 상소건을 배격하는 일은 어서 속히 바로잡혀야 한다.하급심 판결이면 상급심에서 바로잡힐 수도 있으려니와 대한예수교 장로회총회의 최고심 판결이 이 지경이니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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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24
  •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2018년 한 해가 저물어가는 세모(歲暮)가 되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은 세월 속에 사는 인생들의 연륜과 함께 저물어 간다.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을 사람들은 ‘쏜 화살’과 같다. ‘달리는 말(走馬)’과 같다고 했는지도 모른다.우리는 이 한 해를 보내면서 많은 아쉬움과 고민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우선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앞날을 염려한다. 정말 ‘적폐청산’이라는 과거에 매달린 한 해 동안 수없는 갈등과 분열, 좌절을 겪으면서 용서와 화해가 없는 시간을 보냈다. 이 한 해를 보내면서 새삼스럽게 넬슨 만델라의 ‘용서와 화해’의 정치가 생각난다. 한 해의 마지막 갈무리를 해야 하는 풍요로움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불투명한 미래를 예감하는 염려로 가슴을 조이고 있는 것은 지울 수가 없다.국민들은 사업장에서, 일터에서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 원망과 불평이 산더미처럼 쌓여가고 있지만, 정부나 정치인은 명쾌한 해답을 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어쩌면 삶의 기로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진심어린 ‘측은지심’의 심정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우리의 마음이 희망적인 모습으로 자라고, 우리의 기쁨이 현실 속에서 꽃피어나고, 아름다운 미래가 햇빛같이 밝게 보여져야 하는데 전혀 반대로 가슴속에 아픔이 자라고 서글픔만 더해가고 있다.국가사회가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은데도 통로를 바로 찾지 못하고 일방통행으로 가고 있는 상황이 한계선을 넘은 것 같다. 개혁에 앞장서야 할 학자들과 지식인은 벙어리가 되었고, 패기와 열정으로 우리 사회의 기둥이 되어야 할 젊은이는 상실감에 묻혀 있다. 저명한 학자들이 경제위기를 진단하고 있지만 정책의 변화는 없고 좌충우돌하고 있다. 소 상고인의 고통, 청년 일자리 문제, 저 출산 문제, 고령화문제, 탈 원전문제, 교육과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불안한 모습이 계속되지만, 우리 국가 사회의 희망지수는 자꾸만 하락하고 있다. 한마디로 기대가 무너지고 있다. 당리당략(黨利黨略), 사리사욕(私利私慾)의 늪에 빠진 우리 사회는 안팎을 바로 보는 눈으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잦은 사고와 욕구불만의 시위가운데 공정성과 진정성을 가지고 어려움을 타개하는 밝은 미래의 지표를 마련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국민을 생각하는 측은지심일 것이다.한국교회도 2018년 저물어가는 세모에 교회의 유익과 성도들의 신앙성장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반성해 봐야 한다. 결론적으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단체들의 연합과 일치운동은 실망스럽도록 후퇴했고 절망적이라고 말하고 싶다.다만 교회가 교회답게 서야 하기 때문에 개체교회는 공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과 같이 ‘거룩한 공교회’의 모습이 회복 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지역적으로 교회는 우주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형제가 연합하고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순수하고 은혜로운 열정이 담긴 예배의 회복과 성도들을 바르게 지도하는 권징이 바로 시행되어야 한다. 직분은 상하 우열의 계급이 아니고 봉사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봉사와 헌신을 함에 있어서 담임목회자나 사람 앞에서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바르게 감당해야 한다. 목회자는 성도를 차별하고 편애할 때 교회의 화평을 깨뜨리고 나아가서는 분쟁으로 비화 될 수 있기 때문에 빈부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랑으로 감싸는 측은지심을 가질 때 공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길이 될 것이며 건강한 교회로 가는 길이 될 것이다.그리고 교회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재정운용과 투명성이 확실하게 이루어 져야 한다. 교육과 선교, 지역봉사와 구제에 이르기 까지 투명하고 깨끗한 집행이 되어야 한다. 교회 재산과 재정의 많고 적음을 가늠하여 목회자의 능력과 성공여부를 판가름하는 세속적인 기준이 우리 교계에는 만연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교회는 매주 교회 재정상황을 주보에 게재하여 헌금이 바로 사용되는 것을 확인 시켜준다. 교회는 철저한 재정 감사 제도를 시행하여 교회 구성원 중에 어느 누구도 의혹이 없도록 깨끗하고 투명해야 한다.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위대한 미국을 만들자."고 했다. 한 해를 보내는 이 세모에 우리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고, 교회는 형제가 연합하여 사랑과 헌신이 살아있어 '위대한 대한민국'을 세워가는 새해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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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21
  • 특별기고/ 신유목민시대의 교회
    진리의 복음은 변할 수 없지만, 선교방법은 변해야 한다 우리는 현기증 나는 가속의 시대에 살고 있다. 거대한 사막의 모래폭풍처럼 하나님을 떠난 문명의 태풍이 지구촌을 휩쓸고 있다. 통신과 교통의 발달로 세계는 하나의 평평한 작은 지구촌마을로 변화되고 있다. 국경과 거리는 의미가 없으며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은 실시간으로 서로 대화하고 광속으로 온라인상에서 세계를 여행하고 있다. 오프라인상에서도 교통의 발달은 지구촌의 삶을 일일생활권으로 가능케 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의 모든 국가는 상호의존적 관계 속에 살 수 밖에 없다. 세계화시대의 첫 번째 단계는 1800년경부터 시작된 제국주의 식민통치시대로부터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때까지로 국가가 세계화를 주도하던 시대다. 두 번째 단계는 1989년부터 2001년 9.11사건 때까지로 국제기업이 주도하던 시대다. 세 번째 단계는 2001년 이후 신유목민시대의 능력 있는 개인이 주도하는 시대다. 이제는 AI 인공지능의 디지털세계화의 가속화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유목민의 특징은 이동하는 것이다. 이런 신유목민들의 온라인상에서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가치관은 오프라인상에도 그대로 적용되면서 그동안 농경사회로부터 형성된 가정과 사회적 제도를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있다.신유목민사회의 핵심적 가치는 속도다. 기술의 차이는 바로 속도의 차이일 뿐이다. 어떤 신제품도 지구촌 한마을에서는 순식간에 모방된다. 따라서 속도의 능력이 기술의 능력을 지배하고 있다. 속도는 반드시 빠른 변화를 수반하게 된다. 그리고 금메달과 동메달이 함께 공존하는 넘버원(number one)의 사회가 아니라 지구촌마을의 한시장 안에서 유일한 특성화로 존재할 때만 생존하는 온원(only one)의 사회다. 따라서 특성화, 차별화, 전문화의 경쟁은 스피드라는 신유목민사회의 특성상 더더욱 빠르게 변할 수밖에 없다. 변화는 신유목민사회의 생존조건인 셈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건물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회공동체가 땅을 벗어나 광속으로 움직이는 지구촌마을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 내에 신유목민의 주역인 청소년 인터넷세대가 급격히 줄어드는 현상은 바로 이런 신유목민사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변할 수 없는 진리인 복음과 변해야 하는 선교방법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진리는 변할 수 없다. 변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어떤 형태의 시대에든 복음은 변할 수 없는 영원한 진리다. 그러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세상이 변하기 때문에 선교의 방법은 변해야 한다.첫째, 변할 수 없는 것-성경은 일점일획도 변할 수 없는 완전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다. 성경은 예수에 관한 하나님의 두 가지 질문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계시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은 바로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반응이요 고백이다. ① 성경의 두 가지 질문은 “예수가 누구신가?”, “예수가 무엇을 하셨는가?”이다. 이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서만 성경의 천지창조도 종말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② 성령이 오신 목적도 예수가 누구시며, 예수가 무엇을 하셨는지를 우리 개개인에게 계시하시고 경험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성령은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시며, 예수가 우리를 성결케 하시는 분이시며, 예수가 우리의 치료자이시며, 예수가 우리에게 성령세례 주시는 분이시며, 예수가 다시 오실 왕이심을 증거 하시는 분이시다. 성령은 성도로 하여금 예수를 알게(to know)하시고, 예수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to be), 예수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는(to do)분이시다. 이 또한 변할 수 없는 진리다. 성령으로 세례 받은 성도의 삶의 목적은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세상문화의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 또한 불변의 진리다. ③ 지상의 교회형태가 어떻게 변화되든 교회는 예배, 사랑의 교제, 헌신과 봉사, 교육, 그리고 선교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온라인상에서 설교를 들으며 성경공부를 하고 헌금하는 것은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로 오프라인상에서 모일 때 가능하다. 이 또한 불변의 진리다.둘째, 변해야 하는 것-복음은 변할 수 없어도 선교방법은 변해야 한다. ① 교회도 전문성이 필요하다. 지금은 전문화와 차별화의 온리원의 시대다. 또한 정보가 힘이 되는 사회다.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이 모인다. 정보는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정보라는 자원을 성도들에게 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정보화사회에서의 교회는 영적인 문제뿐 아니라 문화적 자원인 정보를 나눌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출 때 교회가 영육 간에 사회적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② 평신도 전문목회자 중심의 교회로 변해야 한다. 중세시대의 천주교의 영향 때문에 성직자와 평신도들로 구분한 것부터 비성서적이다. 교회의 직분은 기능(function)이지 지위(office)가 아니다. 지금은 평신도의 전문성을 살린 여러 형태의 평신도 전문 소그룹교회를 교회 내에 조직하고 담임목사로 하여금 그 전문 소그룹교회를 총괄하는 평신도 전문교회가 되어야 한다. ③ 교회는 전문성과 함께 연합의 정신이 필요하다. 장애인 전문교회, 청소년 전문교회 등과 같은 최고의 전문성을 구비한 교회가 서로 연합해서 팀 선교를 해야 할 때이다. ④ 교회 내에 인종별 지도자가 필요하다. 과거와 같이 국가별 지역별 지도체계보다는 인종별(ethnic group)지도자를 세워 세계의 지구촌마을에서 빠르게 이동하는 신유목민성도들을 보살필 필요가 있다. ⑤ 순위(number one)사회에서 특성화(only one)사회로 지구촌이 개편되고 있다. 순위사회는 1등 2등 3등이 상급의 순위로서 서로가 우열관계로 공존하는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일등은 순위에 불과하다. 그러나 평평한 작은 지구촌에서는 일등은 순위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다. 1등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특성화의 사회이다. 다시 말해서 순위의 사회가 아니라 특성화의 사회인 것이다. 순위의 경쟁시대에서 특성화와 차별화의 경쟁시대가 된 것이다. 교회도 예외일 수 없다. 교회가 세상의 문명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갈등 속에서 별처럼 빛나는 구원의 유일한(only one)방주가 되어야 한다.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많다.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는 길은 많다. 그러나 산 정상에서 하늘로 가는 길은 예수뿐이다.“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지구촌의 교회들아! 문화에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 충만함을 받아 종말론적 문화의 늪에 빠진 지구촌을 구하자.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뜻이니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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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21
  • 임시목사 임기 개선에 관한 소고
    임시목사 임기는 체제상 불가피한 희생양 ‘목사’ 회원 평등의 원칙은 회장과도 동등장로회정치란 “지교회 교인들이 장로를 선택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그 당회로 치리권을 행사하게 하는 주권이 교인들에게 있는 민주적 정치이다. 당회는 치리장로와 목사인 강도장로의 두반으로 조직되어 지교회를 주관하고, 그 상회로서 노회 대회 총회, 이같이 3심제의 치리회가 있다…”(정치총론 5).“교회 각 치리회에 등급은 있으나 각회 회원은 목사와 장로 뿐이므로, 각 회가 다 노 회적 성질이 있으며, 같은 자격으로 조직한 것이므로 같은 권리가 있으나 그 치리의 범위는 헌법에 규정하였다(정 제8장 제2조). 즉 장로회정치는 같은 자격, 동등한 권리를 가진 목사들과, 같은 자격, 동등한 권리를 가진 장로들로 구성된 치리회(당회, 노회, 대회, 총회) 회의정치 체제요, 다만 치리회 구성요원인 목사와 장로들의 오실(誤失)을 범할 인간적인 약점과 분리될 수 없으므로 당회의 잘못은 노회가 바로잡고 노회의 잘못은 대회가 바로잡는, (도리계정 사건과 헌법계쟁 사건 등 노회를 1심으로 하는 목사관계 사건에서는 대회가 2심이 되고, 대회의 잘못은 총회가 바로잡는) 3심제도를 원용하는 체제이다. 그리고 민주적인 회의정치 체제에는 회원평등의 원칙이 전제되니, 결국 모든 회원은 모두 한표의 권리요,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는 말이다. 회장도 한표의 권리, 임원도 한표의 권리, 연조가 깊은 노련한 회원도 한표의 권리, 방금 안수임직을 받은 새회원도 한표의 권리이다. 위임목사도 한표의 권리, 임시목사도 한표의 권리, 부목사도 한표의 권리이니, 결국 치리회 안에서는 부목사도 위임목사와 동등하며, 임시목사도 위임목사와 동등하며, 부목사도 노회장과도 동등하다.회원 평등의 원칙은 성직 평등의 원칙으로 이어진다. “…같은 자격으로 조직한 것이므로 같은 권리가 있으나, (정 제8장 제2조)라고 하였는데, 장로교회에서 목사가 되려고 하면 우선 당회장의 추천으로 노회에서 목사후보생고시에 합격해야 하고, 소속교단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대학부 4년, 신학대학원 3년 과정을 졸업해야 하고, 총회가 시행하는 강도사(혹은 준목)고시에 합격하고, 강도사 인허를 받은 후 1년 이상 실습목회 후에도 청빙을 받아야 목사고시자격을 얻고, 합격하면 노회에서 안수임직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그 담임한 시무와 형편에 따라, 위임목사, 임시목사, 부목사, 원로목사, 전도 목사, 교단기관 목사, 종근목사, 교육목사, 선교사, 은퇴목사 등 11개 칭호의 목사가 되니, 우월감을 가지기 쉬운 위임목사도 경멸감을 가지기 쉬운 임시목사 부목사도 위임목사와 똑같은 자격이요, 이 자격 이상도 이하도 있을 수가 없다. 문제는 청빙이 목사의 칭호를 정하게 된다. 즉 청빙이 조직교회에서만 할 수 있는 위임목사 청빙이었으면, 노회위임국이 주관하는 목사위임식을 거쳐 종신까지 시무권을 가지는 (지금은 정년까지) 담임목사가 된다. 그러나 청빙이 임시목사 청빙이었으면 안수임직 후 다른 절차 없이 1년간만 시무권을 가지는 목사로 교회를 섬기게 되니, 계속해서 그 교회를 시무하려고 하면 만기가 될 때마다 즉 해마다, 처음 청빙 때와 동일한 절차(즉 공동의회에서 투표수 3분의 2 이상의 가표와 재적입교인 과반수의 찬동을 가리킨다)에 의한 계속청빙 청원이 노회에서 허락되어야 계속해서 그 교회를 시무할 수 있고, 공동의회에서 투표수 3분의 2 이상의 가표를 받지 못하면 그 교회를 떠나가야 한다. 위임목사에게는 그런 일이 없으니 오직 목회에만 열중하면 그만이지만, 임시목사에게는 목회도 목회이려니와 만기 후 공동의회의 심판을 받아야 하니, 안정된 목회가 어렵지 않겠는가?뿐만이 아니다. 미조직교회 목사들은 노회에 혼자 나가야 하나, 조직교회 목사들은 장로와 함께 노회에 나가게 되고, 더욱이 교인수가 많은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교인수 비례로 장로 4인까지 함께 나가게 되니, 노회는 위임목사들과 위임목사와 함께 나온 장로들이 노회를 좌우하고, 임시목사들은, 소수는 다수에게 복종하는 체재대로 복종, 또 복종이 있을 따름이다.노회가 선택하는 총회총대도 노회를 좌우하는 위임목사들에 의해 선출되어서 그러한지 임시목사가 총회총대로 선출되는 일은 사실상 찾아보기가 어렵고, 모든 노회들이 깡그리 위임목사와, 위임목사들이 시무하는 지교회 장로들이 총대가 되니 총회도 역시 위임목사 천지가 되고, 임시목사는 그 곁에도 다가갈 수가 없게 된다.필자는 이를 가리켜 임시목사들에게 대한 체제적인 구박이라고 단정하고 싶다. 위임목사가 시무하는 조직교회는 치리장로와 함께 당회를 조직하고, 그 당회로 치리권을 행사하게 하는 주권이 교인에게 있는 민주적 정치 그대로이지만, 임시목사가 시무하는 장로 없는 미조직교회는 불가불 목사가 홀로 다스릴 수 밖에 없고, 그러면서도 독재가 되지 아니해야 하겠으니, 홀로 다스리는 기간은 1년으로 최소화할 수 밖에 없다고 본 것이 통상적인 현행규정이었다.그런데 근간 각급 치리회에서 주도권을 쥔 위임목사들이 1년직 임시목사를 안쓰럽게 여겼는지, 임기를 3년으로 신장하였는데, 고맙기는 하나 이는 3년독재를 용인하자 함이니, 독재정치를 배격하는 장로회정치 체제에는 반하는 것이 된다. 그런즉 임시목사 1년 규정은 장로회정치 체제 하에서는 불가변조(不可變條)라 할 것인즉 그것은 그냥 두되, 만기후 청빙절차 (공동의회에서 투표수 3분의 2 이상의 가표가 재적입교인 과반수의 찬동을 가리킨다)와 동일한 절차에 의한 해임청원이 노회에서 가결되지 않는 한 종신토록(정년까지) 시무할 수 있게 한다면 위임목사와 같은 자격으로 임직을 받은 위상에 버금가는 대우가 되지 않겠는가? 그 후 해임청원은 아무 때든지 할 수 있게 열렸으니, 3년 내에는 잠자코 따르게 한 현행 3년독재(3년임기) 규정보다 낫지 않겠는가? 만기 후 바로 그 다음날이라도 해임청원을 할 수 있고, 그런 상황이 되었는데도 그 교회를 계속 시무욕을 가지겠는가? 종신까지 그런 상황이 일어나지 아니하여 계속 시무해 왔는데도 혼자 교회를 다스렸다고 독재의 딱지를 붙여야 하겠는가? 위임목사들아! 임시목사들을 체제적 압박에서 해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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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기고
    2018-12-14
  • 합동측 헌법의 오·낙자 등 오류(10)
    ‘시무목사’로 바꾼 칭호, 관련규정 3개 처나 방치‘이상’은 …부터 그 위, ‘이하’란 …까지 그 아래란 뜻 (승전) 제6조 성례 1. (신앙이 독실하고 학습인으로 6개월간 근실히 교회에 출석하면 세례문답할 자격이 있다)⇒ 학습교인으로 6개월 이상 근실히 교회에 출석한 자로서 그 믿음이 진실하게 여겨지는 자는 세례문답에 참가할 수 있다.4. 교회가 성례를 1년에 2회 이상 거행함이 적당하고, 성례 거행하기 1주일 전에 (교회에 광고하는 준비 기도회로… 2000년판의 오류)⇒교회에 광고하고 준비기도회로…제7조 교회의 선거투표 3. 연기명(連記名) 투표에 있어 계표(計票)함에 대하여 투표 정원수(定員數) 이상을 기록한 표는 무효로 인정하고, 정원수 이내를 기입(記入)한 표는 유효표로 인정한다.)⇒ 한표에 정원수를 연기명(連記名)하는 투표에서 기명된 수가 정원수(定員數)에 미달된 표는 유효표로 하되, 정원수를 초과한 표는 무효표가 된다.제8조 무임집사 안수집사가 다른 교회로(이거하여 무임집사인 경우에 그 교회가 투표로나 당회의 결의로나 서리집사의 임무를 맡길 수 있고, 안수집사로 투표를 받으면 위임예식만 행하고 안수는 다시 하지 않는다)⇒ 이거하면 무임집사가 된다. 그러나 그 교회에서 집사로 투표를 받으면 집사위임식을 통해 그 교회의 집사가 된다. 단, 무임집사 때에 당회의 결의로 서리집사의 직무를 맡길 수 있다.제9조 무임장로 2. 성찬예식을 거행할 때에 필요하면 (무임장로에게 성찬 나누는 일을 맡길 수 있다)⇒ 무임장로에게도 배병위원이나 배잔위원이 되게 할 수 있다.제10조 권찰 1. 제직회원 외에(권찰을 세워 교인 심방하는 일을 맡길 수 있으니, 신앙이 독실한 남녀 교인 중에서 목사나 당회가 권찰을 임명하되, 그 임기는 1개년 이요, 혹은 제직회원으로 권찰의 임무를 겸무하게 할 수도 있다)⇒ 제직회 회원 외에 신앙이 독실한 남녀 교인 중에서 목사나 당회가 임명하여 그 지도대로 1년간 교인가정을 심방하는 요원이니, 형편에 따라 혹 서리집사에게 겸하게도 한다.제12조 병자에게 안수 교회에서 헌법에 (의지하여 성직을 받은 자 외에 병자를 위하여 함부로 안수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의하여 성직을 받은 자 외에는 병자를 위하여 함부로 안수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성경은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 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 5:14)고 교훈한다.제13조 문서 비치 3. (공동회의록)⇒공동의회 회의록, 5.제직회록과 (각 단체기관 회록)⇒교회소속 각 회의 회의록 <이유>정 제20장이 「교회소속 각회…」라고 규정 하였으니 말이다. <총결론>오자(誤字), 낙자(落字), 탈자(脫字)를 가려냈으면 그만이지 무슨 결론이 있겠는가? 그저 교정을 보면서 느낀 소감을 말한다면 본란에서 본 교정은 일반서책이 아니고 교회를 통치하는 최고 규범인 교회헌법이다. 교회정치와 헌법적규칙과 교회권징이 도합 4.6판 88면에 불과한 아주 작은 책자인데 여기에 오·낙자 등 오류가 대충 헤아려 200여 군데가 된다고 하면 일반서책이라고 해도 오·낙자 투성이라고 불릴 터인데, 이것이 교회헌법이니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그리고 이 오류가 사실상의 원헌법인 1922년판은 희소하기는 해도 그것이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져 왔으니 해 수로는 95개년이요, 그 다음은 1930년판의 오류이니, 해 수로 87개년을 오류 그대로 이어져 왔다는 결과이다.국한문(國漢文) 병용 시대에 쓰인 한자어가 한글을 전용하는 세대에는 국한문의 뜻을 옳게 헤아리지 못해 ‘법에 의해 송달한 증거’를 뜻하는 「의식송달(依式送達)」을 「의식송달(意識送達)」로 하다가, 기독신문 보도(2017년 10월 10일 <화요일>자 8면)에 따르면 이 오류를 바로잡는다는 개정안에 「의식송달(衣式送達)」이라니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근간 목사의 칭호에서 「임시목사」를 「시무목사」로 개정하였는데, 본래 「시무목사」란 노회의 허락으로 시무하는 목사 즉 위임목사, 임시목사, 부목사, 전도목사, 선교사 등의 통칭으로 100년을 이어왔는데, 갑자기 임시목사만 「시무목사」라니, 그 밖의 목사는 모두 시무목사가 아닌 게 되어, 정 제10장(노회) 제3조 회원자격에 의하면 “지교회 시무목사와, 정년 이전의 원로목사와 총회나 노회가 파송한 기관 시무를 위임한 목사는 회원권을 구비하고 그 밖의 목사는 언권회원이 되며…” 하였으니, 이 규정대로면 위임목사는 「그 밖의 목사」 일 수 밖에 없으니, 노회에서 “…언권회원이 되며, 총대권은 없다”가 되었는데, 이럴 수가 있겠는가? 더욱이 임시목사를 시무목사로 바꾼다면 부목사(정 제4장 제4조 3)도 임시목사인데 그것은 왜 임시목사를 그대로 두었으며, 제10장 제8조 노회가 보관하는 각종 명부는 임시목사만 시무목사라고 바꾼 후에도 그냥 두어 시무목사(임시목사)만 있고 위임목사는 노회가 보관하는 명단에서도 빠졌으니 이것이 옳은가? 법의 체계와 구조 등 법의(法意)를 올바로 터득하기는커녕, 단 한번의 정독(精讀)도 없이 법을 인용하며, 적용하며 치리권을 행사해 온 것이 사실이라면 과연 터무니없는 악평이라 하겠는가?헌법 수정 연구위원, 헌법수정위원, 개정위원 등등에게 그 노고는 비난의 대상일 수 없으려니와, 200여 처의 오자, 낙자 등 오류투성이의 헌법책은 누가 바로잡아야 하겠는가? 누가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겠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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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기고
    2018-12-03
  • 특별기고 / 합동측 헌법의 오·낙자 등 오류(9)
    ‘사면(辭免)’ 뺀 헌법에 무임 장로·집사 규정 웬 일교인은 누구나 청원·소원·상소할 권리 있다 (승전) 제2조 제직회 3. 재정처리 제직회는 (교회에서 위임하는)⇒ (공동의회에서 위임하는…) X. <이유>공동의회는 의결기관이요 집행기관이 아니니, 현행대로가 옳다.제3조 연합제직회 2. 직무 “…보고를 접수하며 남녀 전도사와 전도인을 선정하되 전도사는 노회의 승인을 받는다. 1930년판의 오류)⇒ 남녀 전도사와 전도인을 임용하되 소속당회의 승인을 받는다. <이유> 전도사의 자격고시권은 노회에 있으나 선정하여 임용하는 일은 당회권에 속했으니, 노회의 승인 대상이 아니다.제22장 총회총대 제3조 언권회원 3. 본총회의 증경총회장⇒ (본총회의 증경총회장과 부총회장) O. 4. (단 총회에서 허락을 받아야 발언할 수 있다) X. <이유> 어느 회든지 회장의 언권허락 없이는 발언할 수 없는데, 굳이 이를 규정하여 교회헌법의 품격을 손상케 할 이유가 있겠는가?제4조 총대 여비 총대 여비는 (그 노회에서 지급한다)⇒총대 여비는 총회에서 지급한다. <이유> 총회가 상회비를 받으니 총회가 지급함이 당연하고 그래서 그같이 관례화 되었는데, 왜 이것을 노회로 떠넘기는가?제23장 헌법 개정 제1조 (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 교회정치, 교회권징, 예배모범을… 그 결과를 공고 실행한다. 1930년판의 오류)⇒ 그 결과를 공고 시행한다. <이유> 법령을 공포한 후 그 효력의 발생은 실행 아닌 시행(施行)이 옳다.제2조 신조와 요리문답을… 노회 중 3분의 2와 모든 투표수 3분의 2의 가표를 받고 1922년판의 오류)⇒ 노회 3분의 2 이상과 모든 투표수 3분의 2 이상의 가표를 받고…제3조 …그 위원은 1노회에 속한 회원(2인 이상됨을 금한다. 1922년판의 오류)⇒ 2인을 초과하지 못한다. 헌법적 규칙 제1조 미조직교회 신설립…신봉하며 (교회 신설(新說)을 원하는 때에는… 2000년판의 오류)⇒ 교회 신설(新設)을 원하는 때에는… 그 구역 시찰회 경유로 (노회에 청원하여 인가를 받는다. 1964년판의 오류)⇒그 구역 시찰회를 경유하여 관할 노회에 청원하여 인허를 받는다. <이유> 조문대로라면 아무 노회든지 청원하게 되었으니 그 지역을 관할하는 노회로 명시함이 옳고, 인가와 인허를 같이 쓸 수는 있다고 해도 그 사이 「교회신설 인허청원」으로 신설해 온 관행대로 함이 더 좋아 보인다.제2조 교인의 의무 2. 교인은 노력과 협력과 거룩한 교제로 교회발전에 진력하며… 1964년판의 오류)⇒ 2. 교인은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하여 함께 노력하며 피차 협력하며 거룩한 교제와 사랑과 선행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4.성경도리를 힘써 배우며, 전하고 성경말씀대로 실행하기를 힘쓰며,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우리 생활에 나타내어야 한다…. 1964년판의 오류)⇒ 힘써 배우며, 성경말씀대로 실행하기를 힘써 생활화하며 전파해야 한다.6. 교인은 진리를 보수하고 (교회법규를 잘 지키며 교회헌법에 의지하여 치리함을 순히 복종하여야 한다.)⇒ 교회법규를 준행하며, 교회헌법에 의한 치리에 순복해야 한다.제3조 교인의 권리 1. 교인은 교회 헌법대로 순서를 따라 (청원, 소원(所願), 상소할 권리가 있다. 1993년판의 오류)⇒ 순서를 따라 청원, 소원(訴願), 상소할 권리가 있다.2. …그러나 무고히 6개월 이상 계속 출석치 아니한…)⇒그러나 특별한 사고(事故)없이 계속 6개월 이상 계속 출석치 아니한…4. 교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분량(分量)에 따라 봉사할 특권이 있다.)⇒분수(分數)에 따라 봉사할 특권이 있다.제4조 주일 예배회 1.(종용히 묵도로 예배를 시작하며…)⇒ 조용희 묵도로 예배를 시작하며… <이유> 일상용어는 ‘조용히’이지 ‘종용히’가 아니니,2. …예배의 신성함을 감손(減損)하게 하지 말 것…)⇒ 신성함을 훼손(毁損)케 하지 말 것.4. (주일 예배시간에 어떤 개인을 기념, 축하, 위안, 치하하는 예배를 행하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께만 예배하여야 한다)⇒주일은 온전히 하나님께만 예배하는 성일이니, 어떤 개인을 기념, 축하, 위안, 치하하는 일을 겸하지 못한다. <이유>조문대로라면 개인을 기념, 축하, 위안, 치하하는 예배가 다른 날에는 해도 무방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에.5. (주일에 음식을 사 먹거나 모든 매매 하는 일은 하지 말며, 연회나 세속적인 쾌락을 삼가며, 힘써 전도, 위문, 기도, 성경과 종교서적 열람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주일에는 매식하는 등 매매하는 일을 하지 못하며, 연회나 세속적인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사 59:13~14), 전도, 위문, 기도에 힘쓰며 성경과 교회관계 서적을 열람 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제5조 학습⇒ 학습교인 1.(연령이 만 14세 이상이 되고 믿은지 6개월이 경과되어 신앙이 독실한 자는 학습인 고시를 받을 자격이 있다. ⇒ 6개월 이상 계속 본교회에 출석한 자로 그 믿음이 진실하게 여겨지고, 연령이 만 14세 이상이면 당회의 학습문답을 거쳐 학습교인이 될 수 있다. <이유> 원입교인에게 신앙이 독실하다는 표현은 일러 보이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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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16
  • 특별기고/ 탈북민 선교 사례 : 부산 ‘장대현학교’
    1. 남북 대치 상황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평화논의에 대한 기대“남북 분단 72년 현실”은 김정은과 트럼프 두 사람이 만나서 악수하고 사진 몇 장 찍고 구두 약속 몇 가지 했다고 해서 결코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불행한 말일지 모르겠지만, 김정은은 자기 자신이 우선 평화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이다. 그는 그런 환경에서 태어났고 또한 그렇게 자랐다. 그러기에 그와 함께 평화를 이야기 한다는 자체가 위험한 일이고 모순이다. 신격화 우상화된 절대 독재자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칭송하면서 자란 그는, 3대째 세습한 독재권력 DNA를 보유한 자이다. 독재권력을 어떻게 유지하고 누리는 지를 잘 학습한 자이다.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자는 형제나 친척이나 친구나 누구도 가차없이 처형하거나 숙청하는 그의 포악하고 잔인함은 그가 철저한 독재자 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생명은 자신의 독재권력 유지를 위해서만 가치 있는 것이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 북한 관영TV 속의 사진 뒤에 숨어 있는 그의 본래의 모습이다. 최근, 싱가포르 북미회담에서 트럼프와 마주 앉아 비핵화를 약속하고 돌아온 후, 북한 안에서, 더 이상 핵과 미사일을 만드느라 허리띠를 졸라맬 필요가 없어져서 좋겠다고 말한 어느 간부를 김정은은 곧 바로 처형했다. 놀랄만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김정은이 비핵화를 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보여준, 그리고 보편 타당한 인류 평화를 이룰 마음이 전혀 없음을 보여준, 김정은의 잔혹함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2. 국내에 거주하는 탈북민의 숫자와 그들의 실상2018년도 6월 현재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의 숫자는 총 31,827 명이다. 여성이 22,776 명이고, 남성이 9,051 명으로 여성비율이 72%에 해당한다. 10세에서 19세까지의 초중고생게 해당하는 청소년이 3,599명이며, 9세 미만의 어린이가 1,262 명이다. 만 7세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학령기 아동 및 청소년은 약 4,000명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교육부가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2017년 12월 현재 대안학교를 포함하여 초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탈북청소년 학생들은 2,538 명으로서 약 1,500 여명의 학생들이 한국의 어느 학교에도 재학하지 않고 있다는 보도가 나와 있다. 탈북민들은 이 땅에 미리 들어온 통일이요, 민족공동체의 일원이요, 통일의 자원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통일을 준비시키시려고 통일연습 파트너로 이 땅에 미리 보내주신 자들이다. 그러나 한편, 그들은 동시에 한국사회와 문화와 풍습을 떠나서 70여년을 전혀 다른 체제 아래서 살다가 왔다는 점에서 우리와 많은 차이를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으로 들어오는 여정가운데 중국과 제3국을 거치면서 심신에 말할 수 없는 많은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정부도 나름대로 이들의 정착을 돕기 위해 정책적으로 애쓰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갈수록 복잡해지는 탈북민들의 가족 상황을 충분히 뒷받침하기에는 역부족인 실정이다. 예를들어, 최근 국제결혼 성격의 가족형태를 지닌 탈북민들 입국이 증가하면서, 가정 내에서 세대간, 나라간, 체제간 가치관이나 문화 충돌이 빈번해지고 있으나, 이들 가족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컨텐츠나 프로그램이 부족해 가족해체나 범죄 등으로 내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출생의 비보호아동을 동반한 탈북여성들의 입국이 증가하고 있어, 비보호 아동에 대한 문화적 충격 완화 및 제도권 교육체계로 편입시키는 방안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지만, 이에 대한 법적 대책마련도 충분하지 못한 형편이다. 한편, 탈북학생들의 공통적 특성으로서 첫째, 학교 교육과 관련한 부모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기 힘들다는 점. 둘째, 남북한 교과 용어, 교육제도, 학교 문화 등의 차이에 의해 혼란을 경험한다는 점, 셋째, 탈북 신분 미공개 시 학교생활에 대해 적극적인 도움을 구하지 못한다는 점. 넷째 처해있는 상황에 비해 부모가 자녀의 학업에 거는 기대가 매우 높아 탈북학생들 역시 한국학생들 만큼이나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가 엄청나다는 점 등을 말할 수 있겠다.3. 탈북민의 복음화율전체 탈북민들의 기독교 신자율은 35% 정도로 보고 있다(2015.7.17., 기독일보 참고). 35%는 전체 탈북민 가운데 11,200 명이 기독교인이라는 말과도 같다. 한국 기독교인을 전체 인구 20%로 보는데, 탈북민들의 기독교복음화율이 한국사람들 보다 더 높은 셈이다.4. 탈북자 선교를 하게 된 동기?2003년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한인장로교회 담임으로 사역하던 중, 탈북여성을 만나 교회에서 간증집회를 초청하면서 북한선교는 탈북민을 복음화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같은 뜻을 품은 캘리포니아 얼바인베델한인교회 손인식목사님과 2004년 9월 북한자유를 위한 통곡기도회(KCC)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역이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15년 째 이 사역을 섬기고 있다. 5. 탈북민을 위한 장대현교회를 설립하게 된 계기와 과정?2006년 2월, 10년 동안의 이민목회를 접고 한국 고신대학교 교수로 재부임하게 되었다. 2007년 1월 첫 주부터 탈북민들이 가장 많이 밀집되어 살고 있는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을 중심으로 개별적 상담과 돌봄을 시작하였다. 모임이 발전되고 수도 늘어나게 되자 2007년 7월 1일, 어느 식당건물에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당시가 마침 평양장대현교회 부흥 100주년 기념의 해여서, 교회이름을 부산장대현교회라고 지었다. 개척당시 성인 6명 아이들이 3명이었다. 이것이 부산 장대현교회의 시작이다. 올해로 설립 11년이 되었으며, 현재 아이들까지 포함하여 매주 90여명이 출석하고 있다.6. 장대현학교의 역사와 현황장대현교회 성도들의 일부 청소년자녀들이 한국학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여 등교거부를 하고 집에 은둔하거나, 어떤 아이들은 서울 경기지역의 탈북대안학교로 보내기도 하였는데, 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도권 지역에 거의 밀집되어 있는 탈북학교를 보면서, 지방에도 탈북학생들을 위한 대안학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기회가 닿는대로 방송국과 각 교회에서 계몽하고 다니던 중, 2012년 9월, 어느 집사님 한 분이 양로원으로 사용하던 현재의 건물을 무상으로 기증해 주었다. 이 건물을 중심으로 정부로부터 재단법인을 허가받아 탈북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인 장대현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학교시설로 리모델링하고 교사를 모집하고, 장대현교회 성도들의 자녀들이 중심이 되어 첫 입학생 12명이 들어왔다.현재는 22명 전원 무상으로 학업을 받고 있으며, 학교 기숙사에서 기숙하며 공부를 하고 있다. 전임교사가 10명이며, 이 중 4명이 원어민 영어교사이다. 두 명은 3년 째 장대현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한 원어민 선교사 부부이고, 한 명은 미국무성 풀브라이트장학재단에서 1년간 파견한 원어민영어교사, 나머지 한 명은 개인적으로 장대현학교에 일년간 자비량으로 자원하여 온 원어민 영어교사이다. 그 외에 40여명의 자원봉사자 시간제 교사들이 방과 후 수업을 맡아 탈북학생들에게 눈높이 맞춤교육으로 헌신하고 있다. 북한동족을 사랑하는 교사들이 자원하여 매일 방과후 봉사를 하고 있다. 2016년도에는 8명 모집에 54명의 학생들이 지원하였고, 올해 현재도 6명 모집에 80명넘는 학생들의 입학문의가 쇄도하고 있는 중이다. 향후 50명 수용 가능한 기숙사를 학교 옆에 증축하기 위하여 기숙사 부지를 확보해 둔 상태이다. 이 역시 북한선교에 헌신된 교회와 성도들의 헌금으로 세울 것을 목표로 기도 중에 있다.지금까지 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한 명은 사회로 진출하여 회사 정직원으로 근무 중에 있고, 한 명은 미국 보스톤 소재 기독교인 대학인 Gordon College 국제관계학과에, 다른 두 명은 국내 대학(고려대 정외과, 고신대 아동복지학과)에 각각 입학하여 잘 적응하고 있다. 장대현학교는 규모는 작지만, 부산광역시 교육청으로부터 중고등과정 위탁교육기관으로 학력이 인정된 영호남 유일 탈북 대안학교이다. 대한변호사협회로부터 2년 연속 올해의 학교로 선정되었고, 미국국무성으로부터 주목해야 할 탈북학교로 선정되었고, 미국 플브라이트장학재단 원어민 영어교사 파견 지정 한국 유일의 탈북학교이다. 북한동족을 사랑하는 많은 기독청년들이 장대현학교를 찾아와 교사가 되고, 수백명의 기도후원자들의 기도가 이어지고 있다.신앙공동체로서의 장대현학교는 아침저녁의 큐티생활, 금요채풀, 금요기도회, 주일에는 전원 장대현교회에 출석하여 신앙을 훈련받는다. 물론 교사 전원이 모두 신실한 기독교인들이다. 탈북청소년들을 신앙으로 치유시켜, 글로벌 시야를 지닌 실력 있는 통일세대로 양육하여 장차 통일한국 시대에 복음으로 무장된 일군들로, 현지선교사 후보생들로 세우는 것이 장대현학교 교사들과 장대현학교의 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것은 한국교회의 꿈이라고도 믿는다. 장대현학교의 지금 기도제목과 꿈은 하루속히 기숙사를 세워, 2년 전부터 장대현학교에 들어오고 싶은데 자리가 없어서 발을 동동구르며 들어오지 못하는 탈북청소년들을, 적어도 50명까지는 더 받아, 질 높은 신앙교육과 통일대비 통합교육을 시켜, 복음통일한국의 일군들을 키워내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전국 교회와 성도들이 힘을 모아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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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기고
    2018-11-16
  • 특별기고 / 합동측 헌법의 오·낙자 등 오류(8)
    소원(訴願)을 소원(所願)으로 표기하는 세대 정원 수 이상에는 정원 수도 포함되는게 맞나 (승전) 제15장 목사 선교사 선거 및 임직 제1조 (목사 자격 1930년판의 오류)⇒목사 임직의 요건 <이유>한 헌법 (교회정치)에 「목사의 자격」 (정 제4장 제2조), 「목사자격」 (정 제15장 제1조)이 중첩되었으니 본 조문의 칭호를 바꾸는 일이 옳다고 보아서…, …강도사고시에 합격되어 1개년 이상 교역에 종사하고 노회 고시에 합격되고 청빙을 받은 자라야 한다. 1955년판의 오류)⇒강도사고시에 합격하고 1개년 이상 교역에 종사한 후 청빙을 받고, 노회의 목사고시에 합격한 자라야 한다. <이유>목사고시에 합격했다고 청빙이 없이 안수하겠는가? 그래서 강도사라고 모두 목사고시 자격을 주지 않고 청빙을 받은 자에게만 목사자격을 주어 온 전통적인 방도를 바꿀 이유가 없으니…제3조 청빙준비 투표하여 3분의 2가 가라 할지라도 1922년판의 오류)⇒공동의회에서 투표하여 투표수 3분의 2 이상이 가(可)라 할지라도…제4조 청빙서식 …귀하를 본교회 (담임목사 (혹 임시목사))⇒담임목사 (혹 전임목사)로 청빙…제7조 서약변경 (…약속한 목사의 봉급을 1930년판의 오류)⇒ 약속한 목사의 생활비를… <이유> 제4조 「청빙서식」에서 생활비라고 한 규정과 부합되게…제8조 다른노회 사역자 청빙 (지교회가 청빙서를 노회서기에게 송달한다. 노회서기는 즉시 해 노회에 통보하며, 노회는 해당 사역자의 이명서를 접수하고 청빙을 허락한다. 1993년판의 오류)⇒다른 노회에 속한 목사나 강도사를 청빙코자하면 청빙서를 본노회에 제출하고, 본노회가 가합한 줄로 알면, 청빙서를 그 노회로 송달하고, 피빙자가 응락하면 청빙서를 피방자게 전달하고, 이명(이거)증서로 이적한다. <이유>목사, 강도사 청빙건을 노회서기가 전권처결케 된 것은 부당하니, 1934년판의 원규정을 손보아 그대로 규정함이 옳다고 여겨지니.제11조 위임예식 (노회는 예정한 날짜와 장소에서 1964판의 오류)⇒노회는 예정한 시일과 장소에서…5. (공포 1964년판의 오류)⇒3.공포(…이같이 서약을 마친 후에)⇒이같이 서약과 공포를 마친 후에…제12조 (시무목사 권한 2014판의 오류)⇒전임목사의 권한 …노회의 결의로 (당회장 권을 줄 수 있다 1955년판의 오류)⇒노회에 결의로 당회권을 줄 수 있다. <이유> 교회 통치는 치리회장이 하는 것이 아니고 치리회가 하니, 치리권이 회장 아닌 치리회에 있으니, 당회권을 줄 수 있다가 옳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당회장될 목사가 없을지라도 재판사건과 중대사건 외에는 당회가 사무를 처리할 수 있다” (정 제9장 제 4)는 규정과 대비된다.제17장 목사 사면 및 사직 제1조 자유사면 …그 교회는 허위(虛位)교회⇒<이유>거짓을 뜻하는 허위(虛僞)와 음이 같아 한자 받힘이 필요하다고 보이니 제18장 선교사 제1조 선교사 (…선교사의 봉급과 기타비용 1922년판의 오류)⇒선교사의 생활비와 정 제15장 제4조의 청빙서식을 비롯해서 제7조, 제11조 2의 ④ 등과 같이 봉급보다는 생활비가 옳아보여서 같은 용어로 통일.제2조 외국선교사 6의 ⑥ 귀하는 (신앙보수는 의논이나 체계적일 뿐 아니라 1964년판의 오류)⇒신앙은 이론이나 체계적일 뿐 아니라제19장 회장과 서기 제4조 …기록하고 (일체 문부 서류를 보관하고 1930년판의 오류)⇒일체 문부와 서류를 보관하고…제21장 의회 제1조 공동의회 2. 공동의회는 당회가 필요로 인정할 때와 (제직회의 청원이나 무흠입교인 3분의 1 이상의 청원이나 상회의 명령이 있는 때에 당회의 결의로 소집한다 1930년판의 오류)⇒제직회의 청원이나 무흠입교인 3분의 1 이상의 청원이나 상회의 명령이 있는 경우에는 당회장은 지체없이 이를 소집해야 한다. <이유> 규정대로라면 당회가 필요로 인정할 때만 공동의회가 소집되게 하였으니, 이는 주권이 교인에게 있는 민주적 정치인 장로회정치 체제에 어긋난다. 그래서 당회는 “목사가 없는 경우에는 장로 과반수로 당회를 소집”하게 했고 (정 제19장 제7조), 노회도 “각 다른 지교회 목사 3인과 각 다른 지교회 장로 3인이 노회를 소집”할 수 있게 했으며 (정 제10장 제9조), 대회도 “2개 노회의 목사, 장로 각 3인의 청원에 의해서도 회집하게 하고 있다” (정 제11장 제5조). 그런데 공동의회는 왜 소집권자인 당회 독점인가? 사실상 원 헌법의 규정대로 “…소집을 청구할 때에도 당회는 그대로 (필자 주: 소집을 청구한 그대로) 행할 수 밖에 없느니라”로 바로잡을 일이다.4. 당회는 개회할 (날짜와 장소 의안을… 1964년판의 오류)⇒시일과 장소, 의안을…5. 회의 …목사청빙 투표에는 투표수 3분의 2의 가와 입교인… 1930년판의 오류)⇒목사청빙 투표에는 투표수 3분의 2 이상의 가표와 입교인… (재산권 변동은 지교회의 규정(정관)대로 하고, 규정이 없는 경우에는 공동의회 회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결정한다.) X. <이유> 현행대로가 좋다. “교회헌법은 지교회의 독립성과 종교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구속력을 인정한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례가 교회헌법을 무력화 하고 있는데, 그것이 옳다고 맞장구를 치자함인가? 교회는 교회헌법이 최고 규범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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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09
  • 특별기고 / 양심적 병역 거부 대법원 판결을 보고-조 영 엽 박사
    양심적 병역거부, 과연 ‘양심의 자유’인가?병역거부자들은 본인 개인의 소신에 의하여, 또는 종교적 신념과 확신에 의하여 양심적 병역거부·집총 거부· 대체복무를 주장한다. 그들은 헌법 제19조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와 같은 법조문들을 근거로 내세워 병역거부를 정당화 한다.여호와의증인은 “생사문제라고 해서 하나님의 법을 어겨도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생명을 하나님의 법보다 더 앞세우는 것은 치명적이다”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은 ‘하나님의 법’이라고 하며, 세상의 어떤 법보다도 우선하고 중요하다는 허황된 궤변을 토한다.그들은 자신들이 여호와의 왕국과 하늘나라 군대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나라에나 군대에도 충성을 바치지 않으며, 살육하는 일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한다.1. 병역을 거부하는 양심 자체가 잘못된 양심이다.양심은 선과 악, 옳고 그릇됨을 판단하고, 옳은 것은 행하도록 명령하는 도덕적 의식이요, 주체다. 원인(原人) 아담과 하와의 최초 범죄(교만죄, 불신앙죄, 불순종죄)의 결과로 원인(原人)과 그의 모든 후손은 인간 성질의 전적 타락과 부패를 가져왔다. 그 결과 사람의 양심이란 철저하게 병들고, 불구가 되고, 뒤틀리고, 비정상적이고, 타락 부패하였다.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의 타락한 양심을, ‘화인 맞은 양심’(딤전 4:2), ‘어두워진 마음’(롬 1:21), ‘더러워진 양심’(딛 1:15), ‘굳어진 마음’(엡 4:18), ‘완고한 마음’(마 13:15), ‘악한 마음’(마 9:4), ‘속이는 마음’(렘 17:9)이라고 정의했다.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양심의 정의인 것이다. 따라서 양심적 병역거부란 잘못된 양심에 의한 병역거부·병역기피이다. 양심 때문에 병역을 거부한다면 여호와의증인과 같은 병역을 거부하는 자들의 양심은 다 옳고 군입대자들의 양심은 비양심적이라는 말인가?2.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현실 상황에서 병역의 의무는 절대 필수다.현재 우리나라는 북한 공산정권이 1950년 6월 25일(주일 새벽) 남침을 감행한 이래 반세기가 넘도록 38선을 분계선으로 남북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위 양심적 병역거부나 “양심의 자유” 운운하며 그것이 옳다고 판결하는 판사의 양심은 도대체 무슨 양심인가? 양심 운운하면서 소위 양심의 자유가 국토방위의 신성한 임무인 병역의 의무를 거부할 수 있다는 논거는 묵인·용납할 수 없는 역설이요, 궤변이다. 그러면 묵묵히 병역의 의무를 감당하는 절대 다수 국민들의 양심은 비양심적이란 말인가?3. 소위 양심적 병역거부의 실상은 병역기피이다.헌법 제39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대체복무는 평등의 원리와 병역의 형평성에 위배된다. 소위 양심적 병역거부란 양심을 빙자한 병역기피이며, 조국과 민족에 대한 반역행위이며, 여호와의증인 같은 이단들의 궤변이다.병역은 대한민국의 건아(健兒)로서 신성한 의무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과 재산, 또 국가의 안보를 지키기 위하여 군에서는 군사교육, 집단 병영생활을 통하여 자기계발과 더불어 절제·극기·협동심·안보관 등 일반 사회생활에서 경험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병영문화를 통해 체험하고 배우게 되므로, 군 복무는 자기 자신과 사회와 국가의 큰 유익이 된다. 군 복무를 마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모든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양심적 병역거부는 국가의 안보를 위태롭게 하며, 국민의 불안감을 조성시키며, 국론을 분열시키며, 군의 기강과 사기를 저하시키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그럼에도 이처럼 중대한 문제를 이번에 대법원이 “양심의 자유”를 앞세워 무죄판결을 한 것은 중대한 과오이다. 6. 결론△ 소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나, 평화주의자를 자칭하는 병역거부자들이나, 반정부자들의 활동들은 법으로 엄격히 제재해야 마땅하다.△ 군 병역을 기피하기 위하여 몸에 상처를 가하거나, 문신(文身)을 하거나, 여성 호르몬을 주입하여 성적 정체성을 모호하게 하는 자들은 국가가 엄한 형벌을 가하여야 한다.△ 군인의 임무는 국토방위와 국가안보에 있다. 국토방위·국가안보는 국력과 국군의 정신무장과 신체단련과 무기의 현대화에 달려 있다. 힘의 우월만이 외부로부터 침략을 물리치고 안보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대 한민국 헌법 제11조는 평등권을 보장하고 있다. 종교의 자유는 어떤 종교를 선택하는가의 여부의 문제이지 종교의 자유를 빙자하여 군 복무를 거부하는 것은 종교의 자유가 아니다.끝으로, 사법기관들은 소위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미진한 법들은 개정·보완하고, 새로운 법안들을 제정하며, 검사와 판사 등 사법부에서는 투철한 법집행으로 법질서를 확립하여, 애국심과 도덕심으로 건전하고 튼튼한 사회·국가로 재건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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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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