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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26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26. 반종교개혁 세력-제수이트 오랜 세월동안 견고한 터를 닦아놓은 가톨릭 세력에 저항하면서 그들이 만들어 놓은 그릇된 교리와 관행들을 바로잡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여파로 가톨릭의 세력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고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된 것이 사실이다. 개혁자들과 개혁신앙을 추종하던 사람들의 피 값으로 얻어진 열매였다. 그러나 그 막대한 권력을 소유한 로마 교회가 개혁 세력을 방치할 리가 없다. 수많은 방법을 동원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개혁을 저지하고 개혁 세력을 박멸하기 위하여 집요한 노력을 기울이던 중에, 종교개혁의 흐름에 치명타를 입힌 사건 중에 하나가 바로 제수이트 단체의 출현이다. 제수이트(예수회)가 조직됨‘제수이트’라고 하는 단체는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의 로욜라(Loyla)라는 성에서 1491년에 태어난 ‘이니고 로페즈 드 레깔데’(Inigo Lopez de Recalde)에 의해서 창설되었다. 후에 가톨릭식으로 개명한 이름이 이그나시우스(Ignatius)이기 때문에, ‘이그나시우스 로욜라’라고 부르게 되었다. 로욜라 출신 이그나시우스라는 의미일 것이다. 최초 6명의 단원으로 이 단체가 창설된 것은 1534년이지만 그 당시 활동에는 상당한 제한이 있었고 종교재판소의 제약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540년 교황청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복종을 맹세하고 교황 바오로 3세의 승인을 받은 후부터 가톨릭의 확고부동한 단체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저명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이그나시우스는 독특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경건하면서도 처세술에 매우 능했고, 금욕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속적인 지식도 풍부한 사람이었다. 신비주의 성향이 농후하였고 아주 냉정하고 냉혹한 성격으로 매사를 철저하게 계산하는 사람이었다. 이그나시우스의 이러한 성격이 제수이트의 특징과 정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전해진다.제수이트의 목적과 정신제수이트를 조직하게 된 주요 목적은 첫째는 종교개혁의 여파로 약화되고 있는 로마 가톨릭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함이었고, 둘째로는 가톨릭 안에서 교황청의 권력을 옹호하는 것이었으며, 셋째로 개신교를 핍박하고 견제하며 더 나아가 박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경제적으로 세계의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제수이트 단원들은 철저한 세뇌교육과 혹독한 영성훈련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오직 교회에 충성해야 하기 때문에 가정을 갖지 말아야 하며 평생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들의 정신은 상부 권위에 대한 ‘절대복종’과 ‘비밀유지’였다. 다음은 교육과 훈련을 마친 다음 제수이트 단원들이 서약하는 내용의 한 부분이다. “나는 기회가 되면 비밀리에 혹은 공개적으로 모든 이교도들, 프로테스탄트들, 자유주의자들과 무자비한 전쟁을 일으키고 싸울 것이다. 지구상에서 그들을 전멸시키고 근절시키라고 지령받은 것들을 실행함에 있어 나이, 성별 혹은 조건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악명 높은 이교도들을 목 매달고 불태우고, 쇠약하게하며, 끓여죽이고, 채찍으로 치고, 가죽을 벗기고, 산 채로 매장해 죽일 것이다” (New World Religion에 게재된 ‘예수회의 최종적인 선서와 입단식’Oath of the Jesuits 내용 중에서).제수이트의 반종교개혁운동이와 같은 정신으로 무장한 제수이트가 종교개혁의 현장에서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저지른 끔찍한 사건들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두려울 만큼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것이었다. 종교전쟁을 일으켜 독일 국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입혔고 정치를 무력화 시키고 정신적인 타락과 도덕적 부패를 초래하였고 이로 인한 인구 감소와 함께 나라가 황폐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제수이트가 국민의 1/7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고, 1572년에는 성 바돌로매 축일에 개신교도들의 대학살을 주동하였다. 축일 전날 밤의 종소리를 신호로 하여 그곳에 모여들었던 위그노(프랑스의 개신교도들)들 무차별 공격하여 죽이기 시작하였다. 파리에서의 위그노 학살은 7일간 계속되었는데, 처음 3일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잔인하였다. 그런데 그 학살 사건은 파리 시내를 넘어 신교도들이 거주하는 모든 도시와 촌락으로 확대되어 남녀노소 불문하고 어린아이, 노인, 농부들 귀족들에 이르기까지 무차별 살해하는 대살륙이 2개월동안 자행되었다. 국가의 귀중한 인적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유망한 인재들을 포함하여 7만 여 명이 떼죽음을 당하는 전대미문의 끔찍한 사건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로마 교황청은 매우 기뻐하였고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축하 행렬이 이어졌고 그 대학살을 기념하는 메달이 주조되었고 기념벽화도 그려졌다. 이 외에도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헝가리, 스위스, 폴란드, 영국, 아일랜드 등 유럽 각지에서 제수이트는 집요하게 그 세력을 확장하면서 개신교도들을 위협하였고 수많은 인명을 파리 목숨처럼 쉽게 살해하였다. 제수이트의 선교활동제수이트는 단지 교황의 권위를 세우면서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는 일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다. 세계 각처에 진출하여 그들이 전개한 천주교 선교활동도 대단히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교도를 천주교로 개종시키는 것도 제수이트의 매우 중요한 사명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선교지역을 과감하게 해외로 확장하여 동양권에 포교하는 일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이그나시우스의 절친한 친구였던 프란시스 싸비에르(Francis Xavier)는 아시아대륙 선교의 선구자였다. 싸비에르는 인도로부터 시작하여 일본, 중국에까지 진출하여 천주교 선교에 목숨을 걸고 헌신한 백절불굴의 투사였다. 동양권의 천주교 포교에서 그가 큰 업적을 남긴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닦아 놓은 길을 따라서 후일에 천주교 선교가 확장된 것은 사실이다. 얼마 후 제수이트는 아시아 보다는 활동하기가 훨씬 수월한 한 대륙을 발견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아메리카 대륙이다. 특히 중미와 남미에서 제수이트의 선교활동은 매우 적극적이었고 무력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살륙하면서까지 포교활동을 전개하여 중남미 대륙을 가톨릭화 시키는 일에 성공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제수이트는 목적 달성을 위하여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종교개혁 세력을 박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약 5000만 명 이상을 살해하였고 중남미에서는 포교하는 과정에서 그 이상의 사람들을 죽였다.(조인선, 기독교 죄악사, 상권, 320,332).이러한 전력을 가진 제수이트는 지금도 2만 여명의 회원들이 세계 각처에서 정치계, 종교계, 경제계, 언론계, 과학계, 교육계 등 각 분야에 침투하여 조직적이고 집요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전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여 통치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으며, 그것은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예수회의 두 가지 최종 목적이 있는데 그 첫 번째 목표는 세계정치권력의 장악이며, 두 번째 목표는 세계종교의 통합이다. … 그들은 지금 막강한 권력, 세계적인 조직망, 정밀한 정보, 막대한 금력을 가지고 마치 첩보기관을 방불케 하는 치밀한 전략을 사용하여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을 장악하고 세계의 종교들을 가톨릭 안에 묶는 일을 줄기차게 진행하고 있다.”(마지막 신호, 209, 225). 향후 언젠가는 제수이트를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의 세력이 세계를 장악하여 통제할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하고 있다.
    • 지난 칼럼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12-15
  • 연재를 끝내면서…
    2015년 1월 11일자에 인사말을 시작으로 2017년 12월 10일자에 이르기까지 장장 만 3년에 걸쳐, 제1회 총회장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로 시작해 제100회 총회장 박무용(朴茂用) 목사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 것은 교회연합신문의 적극적인 지원과 독자 여러분의 따뜻한 성원에 의한 것이었다. 총회장을 역임한 분들 중 3회를 역임한 이자익 목사(李自益 13회, 33회, 34회), 2회씩 역임한 김윤찬 목사(金潤餐 49회, 52회)와 한상동 목사(韓尙東 45회, 46회)가 있어 100회 총회를 맞이 했으나 전체 총회장 수는 97명된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해명하고 지나야 할 사안이 있다. 숫자상으로는 정확하게 96명이지만, 총회장에 추가된 분이 한 분이 있는데, 전북 김제 출신의 고성모 목사(高聖模 45회, 3개월간 총회장 역임) 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1959년 제44회 총회가 통합측과 분열한 후, 1960년 9월 22일~24일 사이 서울 승동교회에서 제45회 총회가 모였는데, 총회장이 고성모 목사였다. 그러나 총회가 끝나자마자 당시 예장고신측과의 합동문제가 제기되어 급물살을 타고 합동과 고신 양교단이 합동하게 되어 같은 해 12월 13일~15일 같은 장소인 숭동교회에서 합동총회로 모일 때 고신을 영입하면서 총회장 자리를 한상동 목사에게 주기로 해 이루어진 일이다. 자세한 사항은 필자가 확인하지 못했으나 아마 고신교단을 영입하면서 합동측에서 예우상 총회장 자리를 고신의 한상동 목사에게 준 것으로 파악된다. 필자는 여기 총회장 열전을 기술하면서 장로교 뿐만 아니라 여러 교단들의 내분으로 분리될 때 가장 큰 이유는 교권 때문에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교계 사정의 와중에서 고성모 총회장은 대의(大意)를 위해 교단 수장의 자리를 3개월만에 선뜻 내놓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 가야 할 사항은 인간 고성모 목사의 성직자로서 교단을 위하고 크게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모처럼 선출된 교단 수장의 자리를 선뜻 내놓은 대인(大人)다운, 또 성직자다운 면모를 엿볼 수 있어 고성모라는 새로운 지도자상을 찾을 수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기회가 닿으면 인간 고성모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기술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다음의 숙제로 삼고자 다짐해 본다. 모처럼 다가온 자리를 아무리 교단을 위하는 일이라 할찌라도 정말 순전하고 깨끗한 마음과 신앙의 덕목의 소유자가 아니면 3개월만 하고 총회장직을 선뜻 내놓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필자는 총회장 열전을 마감하면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이 있다면 97명의 총회장 가운데 가장 뛰어난 한 인물을 발견한 것이 큰 소득이었다고 자부해 본다. 제100회 총회까지 총회장 숫자는 총 96명이자익 3회·김윤찬 2회·한상동 2회 연임제45회 고성모 총회장 3개월 만에 한상동 목사에게 자리 넘겨원로·은퇴 목회자들 개교회나 지역교회 역사기록 남기길필자가 처음 예장합동 총회장 지도자 열전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된 동기가 있다. 첫째는 예장통합측 한국교회사연구원장으로 있는 교회사가 김수진 박사가 2005년 9월 한국장로교출판사에서 90회 총회장(통합측)까지를 다루어 ‘총회를 섬겨온 일군들’이란 책명으로 간행된 것을 접하고서 자극을 받았고, 둘째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소속 백수복 목사가 2013년 8월 서울신학대학교출판부를 통해 ‘한국성결교회를 빛낸 사람들’이란 이름으로 성결교회 총회장 열전 간행을 보고 더 늦기 전에 내가 속한 예장합동 총회장들의 역사를 정리해야겠다는 교회역사를 연구 소명감이 불타올라 결심을 하게 되었다. 막상 집필을 하기로 결심을 하기는 했으나 당장 대두되는 문제가 총회장 개개인의 인적사항과 사역의 여정 그리고 교계 및 대사회적으로 역사한 자료수집의 문제가 가장 큰 문제였다. 100여명의 개인사와 경력을 파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다행이었던 것은 필자가 성결교회 역사와 문학연구회(대표 백수복 목사)의 위촉으로 대구 경북지방의 지도자 17명에 이르는 개인사를 정리해, 제6집부터 17집에 이르기까지 매호에 성결교회 인물전을 집필 발표한 경험이 있어서 약간의 자신감도 있었고, 이미 간행된 김수진 박사의 책 전반부(1회~44회까지)는 김 박사의 양해를 얻어 약간 보충하며 개고(改稿)하는 것으로 기술하게 되었던 것이다. 역대 총회장 집필순서는 1회로부터 계속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어 총회 횟수는 순서에 매이지 않고 들쭉날쭉 해야만 했지만, 후일 단행본으로 묶을 때는 순서대로 하기로 하고 자료가 준비되는대로 총회장들의 열전을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은 아니었으나 교회연합신문 발행인 강춘오 목사의 제의로 집필 연재가 시작된 것이다. 처음엔 기사가 나갔지만 별반응이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미 작고한 인사들의 기사였으니 조용할 수 밖에 없었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생존해 있는 인사들의 글이 나가기 시작하고 부터는 여기저기 전국에서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사가 나간 후에 전화제보가 들어왔다. 연대가 틀렸으니 정정해 달라거나, 어디에 그분의 자료가 있으니 참고하라거나, 또 어떤 독자는 노상에서 필자를 만나 당신의 글이 재미있어 버리지 못해 스크랩을 하고 있다는 인사를 받기도 했고, 어떤 분들은 필자를 만날 때마다 그 다양한 자료들과 이야기들을 어떻게 수집하느냐고 격려하는 독자들도 있어 집필하는 동안 큰 힘이 되었고 더욱 소명감을 느끼기도 했다.한 가지 아쉬운 것은 집필대상자의 자녀들이 비협조적인 경우가 있어 난감했다. 전화상으로, 때로는 직접 울먹이며 쓰지 말아달라는 질타를 받을 때였다. 그러나 반면에 전남 광주에 있는 C총회장이나 대전에 거주하고 있는 K목사, 수원에 있는 A목사 같은 분,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J목사, L목사는 필자에게 따뜻한 조언과 격려를 해주어 집필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집필 중에 생긴 에피소드도 없지 않았다. 필자와는 생소한 분이었으나 자기 어른에 대한 글을 아들된 자기보다 더 세밀히 알고 집필해줘 고맙다고 필자를 불러 식사를 한 바도 있고, 자기 장인에 대한 글을 읽고 연락한다며 만나자고 해 융숭한 대접을 하며 생각지도 못한 연구비 명목의 격려금을 받기도 했다. 이 연재물의 인연으로 전혀 안면도 없는 분들이 경영하는 군소교단으로부터 자기들의 교단 신학교인 ‘총회신학연구원’에 한국교회사를 가르쳐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와 지난 9월부터 인천과 서울 두 곳의 교회사 강의까지 하게되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총회장 열전 집필의 연으로 생긴 즐거운 나의 비명이다. 글을 쓰면서 필요한 자료가 모자라면 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으로 있는 역삼동의 김남식 박사와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을 이끌고 있는 장영학 목사에게 도움을 받았다. 이 란을 통해 두 분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또 교단지 ‘기독신문’ 전 사장 이재천 장로와 현 사장 남상훈 장로와 총회 기획실 박영 집사, 출판부 김귀분 팀장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이 열전을 연재하는 중 또 다른 과제가 생겼다. 예장(합동)에서 1979년 대구 동부교회 총회시에 갈라져 나갔던 개혁측이 26년 만에 총회100년을 기해 귀환한(재합동) H목사로부터 전 개혁측 총회장 열전 집필의뢰를 받게 된 것이다. 26명의 구 개혁측 총회장 열전 집필을 위해 자료를 취합 중에 있음을 여기에 밝혀둔다. 또 필자의 총회장열전 탈고 소식을 들은 부산 고신대학교 이상규 박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총회장 열전 탈고 소감을 써달라며 아울러 새해 벽두에 개최되는 부산경남기독교역사학회에 와서 회원들을 대상으로 좌담 겸 발표를 한번 해주면 고맙겠다는 요청이 들어왔다. 이 자리를 빌어 우리 한국교회 은퇴동역자들과 현직에 있는 지도자들에게 제의하고 싶은 필자의 소망이 있어 권하고 싶다. 원로·은퇴 동역자들의 사역회고록을 남기고 현역 교역자들께는 자신들이 섬기고 혹은 개척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꼭 남겨달라는 점을 역사를 연구하는 한 학도로써 연구자로써 꼭 요청드리고 싶다. 역사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분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교회사를 써보거나 교회가 속한 노회나 연회 혹은 지방회 역사를 정리해보라고 제의를 하면서 필자의 소회를 끝낸다.아울러 독자 여러분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격려와 애독에 다시 한번 감사 드리며, 그동안 악필로(연필) 기록한 원고를 컴퓨터에 입력해 멋있는 모습의 글로 탄생시켜준 교회연합신문 기자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고마웠다고 인사를 드리며 이 글을 맺는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12-14
  • 예수 삶의 길
    한글개역성경에 누가복음의 9장 본 문에서 주님의 ‘제자 됨’의 길을 생각해 본다. 누가복음 전체의 ‘제자’라는 말이 누가복음 9장에만 11번 나온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흔히 제자 됨으로 사역이나 목회를 위한 수단으로 생활하는 제자가 아니라 제자 됨의 삶의 길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본문 9장을 살피게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삶은 주로 3권의 공관복음서에서 주로 나타난 그 제자가 누구인가를 알게 한다. 제자됨의 선한 의도나 받은 영광보다 더 귀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살피게 한다. 제자 됨의 생활은 문화생활의 일부나 시간이 남으면 사역하는 생활이 아니라 제자 됨은 나이(연령) 여하를 막론하고 예수님의 삶이나 하나님의 나라 일을 위해 최우선 순위에 두는 그런 삶으로 생활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 예수께서 친히 보여 주시듯이 들짐승이나 날것들보다 못한 노숙자 신세가 되는 길도 열어 보이신다. 57절- 58절에서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제자의 사역(使役) 길을 위해 거처도 없는 생활수단도 없는 그의 삶을 확실히 보여 주심에 인지(認知)하게 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신다. 예수님의 삶은 가르치기 위한 삶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삶의 스승이요 그 분이 내안에 사심을 사실로 인정하고 순간마다 자기를 인도하시고 해야 할 바를 깨닫게 하신다. 예컨대 바로 그 순간 부싯돌에 부딪치듯이 섬광과 같이 빛나는 광채를 본다. 이는 생명의 삶은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의 자아, 그분의 인격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게 하신다. 그리하여 디트리히 본 회퍼는 삶을 말하면서 항상 “그분께서 제 안에 계심을 느낍니다. 그분은 순간마다 저를 인도하시고 제가 말하거나 행해야 할 바를 알려주십니다”라고 한다. 아직도 우리 인간들은 생명에 대하여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생명은 삶의 명령을 받아 자기의 삶을 책임 질 줄을 안다. 하나님의 창조는 살아있는 인간을 통하여서 삶을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한다. 이 삶의 에너지는 창조 그 자체에 의해서 의지하고 이 삶 조각의 에너지는 우주 에너지에 의해 흡수된다. 창조는 인간에게 어떤 명령도 요구하지 않고 그들의 삶에서 그들의 모양새에서 그의 말씀과 질서를 통해서 창조의 삶의 목적을 갖게 한다. 이 창조는 어떤 모습으로 한정되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의 모습은 자유롭고 기쁘게 삶을 살아간다. 생명은 여타 생명과의 서로 생명작용에 의한 고유한 살림살이가 가능한 개체물질의 총칭으로 정의하고 생명은 모두가 창조적인 삶을 스스로 꾸려 갈 수 있는 무한하고 신비로운 능력인 영 혹은 영성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생명을 대할 때는 목적으로 상관하여야 하지 수단으로 대해서는 아니 된다. 생명은 서로 간에 사랑에 의한 나눔으로 모두가 평등한 생명공동체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생명들이 추구하는 보편타당한 진리는 ‘아름다운 살림살이’이다. 이 ‘살림살이’는 생명의 살림을 조화롭고 건강하게 꾸리는 모습, 그 모양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자기부인은 정상적인 생명으로 생명공동체적 삶을 사는 것이다. 이는 생명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배려가 전제되는 살림의 생명이다. 이 삶은 자신의 삶을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에만 집착한 암적 존재로서 이를 죽임의 생명을 말하게 한다.베드로는 당시에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였고, 그리하여 수제자까지 되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잘못된 메시아관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말렸고 그리하여 사단과 관련된 책망까지 받게 되었다. 예수님은 육체의 구원자가 아니라 전인의 구원자였고, 이를 위하여 혼연히 먼저 죽음의 길을 가셨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치르게 하시는 시험은 예수님께서 행하심으로 가르치신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시기 위해 오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고통당하시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그분께서 당하실 일에 반대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하시려고 오셨다는 것과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 자신에 대해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음에 주목한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12-14
  • 이상국 장로
    기도와 큐티로 하루 시작, 기드온협회 일로 매주일 타교회 방문 이상국 장로(77세, 예장고신 서울 서부노회 등촌교회)는 매일 새벽기도를 마치고 큐티와 성경 말씀을 읽고 하루를 시작한다. 국제기드온협회 (서울 양천캠프)에서 20여 년간 헌신해 왔으며, 기드온협회 성경 나누어주기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복음사역으로서 기드온 사역은 많은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는 이 장로는 “나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복음사역인 이 일을 지금까지 하게 된 것은 너무 감사한 일”이라며 건강이 허락하는 대로 계속해서 헌신하겠다고 한다. 일주일간 하루 정도 집에 있게 되지만 너무나 분주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기드온협회 일 외에도 노회 남전도회 원로로서 회의에 참석해야 하고, 초청이 있을 때 마다 교계연합 모임에도 참석을 하고 있다. 또 시간을 내어 걷기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으며, 추운 날씨에는 집 안에서 자전거타기를 한다. 그리고 젊을 때부터 해온 골프는 요즘에는 극동방송 주관으로 열리는 안산 아일랜드 골프장에 나가 ‘후원회골프 모임’에 참석한다고 한다. “제가 건강을 이만큼 유지하는 데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지만 걷기운동과 골프모임으로 건강을 유지하면서 열심히 일합니다.”이 장로는 매주일 아침 1부 예배를 드리고 기드온협회 순회예배를 위한 사역허락을 받기 위해 교단을 초월하여 여러 교회를 방문, 담임목사님을 만나는 일을 하고 있다. “기도하고 목사님들을 찾아가면 대부분 허락을 받게 되는데 이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며, 기도하면 모든 일이 성취된다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라고 한다. 이 장로는 등촌교회가 내년에 교회설립 50주년을 맞게 되는데 창립멤버로서 감회가 남다르다. 특히 등촌교회는 이 장로의 장모 박혜운 권사가 중심이 되어 개척설립 된 교회로서 지금까지 많은 시련을 극복하고 교회가 3천여 명의 성도가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다. 이 장로는 음악에 대한 실력과 애착이 남다르기 때문에 본 교회에서 찬양대장과 테너 파트 대원으로 15년여 충성을 다했고, 등촌교회의 오케스트라를 만드는데 중심역할을 하였다. 지금의 교회건축에도 이 장로의 역할과 손길이 깊이 담겨져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등촌교회는 고신교단에서 비교적 규모가 큰 교회로서 앞서가는 교회이다. 온화하고 겸손한 이 장로의 리더십은 전 성도들에게 아름다운 영향을 끼쳐 교회가 은혜롭고 평온한 가운데 성장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때 교회가 네 편 내 편으로 갈라져 갈등할 때가 있었는데, 이 장로는 그때가 마음이 가장 괴롭고 힘들었다고 말한다. 이 장로는 교단 유지재단 이사를 비롯하여 수도권장로회협의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전국장로회연합회와 전국남전도회연합회에서도 임원으로 일했다. 또한 교단이 어려울 때에 서울 대표로 모금운동에 앞장서 기도했다. 또 이 장로는 교계 평신도연합기관에서도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연합과 일치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본 교회뿐 아니라 교단과 노회에서도 친교하고 참여하는 모습이 귀감이 되고 있다. 이 장로는 부인 백영미 권사(76세)와의 사이에 남매를 두었고, 젊을 때 5년여동안 직장생활을 하였으며, 이후에는 한일전기 대리점을 운영하면서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의 선한 사역에 진력해 왔다. “나는 연합사역을 하는 것이 참 좋았어요. 교파 따지지 않고 함께 만나서 교제하고 협력하여 교회를 위한 노력을 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모습이 저에게는 참 좋은 인상을 주었어요. 더욱 더 발전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요,”라며 교계연합사역을 회고했다. 이 장로가 좋아하는 성구는 에베소서 2장 18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즐겨 부르는 찬송은 ‘나 어느 곳에 있던지 늘 맘이 편하다. 주 예수 주신 평안함 늘 충만하도다.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 악한 죄 파도가 많으나 맘이 늘 평안해’이다.
    • 지난 칼럼
    • 신앙으로 초대
    2017-12-14
  • 성육신한 예수교회-65
    인류의 문명을 앞당긴 것이 있다면, 그중 하나가 자동차 문화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국가의 흥망성쇠도 이와 함께 하였다. 지난 한 세기동안에 우리의 자동차와 관련된 노사 관계나 사회적 시스템은 선순환 방식으로 학습되질 못하였고, 그 결과 우리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도 남아공과 같은 가장 밑바닥 수준이 된 것이다. 이러한 좀비현상은 사회 전반에 걸쳐 서로 맞물려 있어서, 베네수엘라 같은 국가적 디폴트 현상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 우리국가의 사회적 갈등은 너무나 많은 곳에서 소진되어서 많은 비용을 탕진하다 보니, 이미 힘을 잃고 추락하고 있는 베네수엘라를 뒤이어,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형편이다. 같은 배를 타고 있는 교계도 이와 다르질 않다. 지난날 세월호가 전복될 당시, 그 배에는 아이들만 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기독교교리에서 빗나가긴 했어도, 기독교란 이름을 가진 단체가 운영하는 선박이었다. 뚜렷하게 들어나진 않았어도 교회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 전복되자, 저들 중에 지휘 책임을 가진 자들은 아이들을 구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도망가기 바빴던 것이다. 교계의 스피커들이 오로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방송사에 출연해서 ‘우리가 안했다’고 하는 사오정 이야기처럼, 이 회사는 우리와 전혀 관계없는 단체라고 꼬리를 자를 뿐이었다.히브리서를 읽노라면 당시 교회는 외형적인 오늘의 교회처럼 형성되진 못하였어도, 누가 보더라도 교회라 할 만큼의 공동체 형태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지중해 주변의 이러한 교회들에게 전반적으로 위기가 들이 닥친 것이었다. 신도들이 다시금 유대교로 합류하려는 조짐이 있었고, 복음의 중심 가치가 흐려져서 슬그머니 기본적인 신앙생활에서 도덕적으로 이탈하는 자들도 눈에 보일만큼 증가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정황을 재빠르게 인식한 한 지도자는 각 곳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에게 서신으로써 처방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교회들은, 맨 처음 복음을 전해주었던 분들은 거의 돌아갔고, 복음을 전해 받은 후대들이 교회를 책임 맡았을 즈음이었다(히 2:3). 이 서신의 저자는, 서신의 서두에서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 송영을 올려드리고, 온 우주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 만물을 확실하게 붙드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등극하셨음을 선포하였다. 이 하나님 우편의 보좌에, 통치자로서 오른 손에 홀을 붙잡고 등극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분이신가? 저는 친히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이 지상으로 내려와 마리아의 몸에서 적신으로 태어나, 몸소 인간의 고난을 모두 몸으로 체휼하심으로서 인류의 대표성을 가지시고,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해, 친히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놓아, 죽음으로서 세상의 죄 값을 모두 치르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아들이시다. 이 서신의 가르침에서 가장 무겁게 다루는 죄악은 사람들이 침상을 더럽히는 것들이었다. 간음 같은 범죄는 늘 상 이방인의 종교 제전에서 행사의 하나로 있어온 것이었다. 오늘 우리 사회와 좀 다른 면은, 당시 사회는 사회적 윤리가 오늘 같이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한 가정에 다수의 부인들이 있었고, 종교 행사에서는 참여자 모두가 너나할 것 없이 구분이 되질 않았다. 이런 사회적 환경에서 예수의 복음으로 가르침을 받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신도들이었지만, 주변의 문화에서 자유롭질 못하였다. 신도 개개인들이 누차 순결이 더럽혀지고, 공공연하게 죄악들이 들어나자, 부담을 덜 느끼는 종교로 마음을 돌렸던 것이다.교회 지도자들은 신도들에게 거룩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몸단장을 갖추도록 도덕적인 표준을 제시하였지만, 저들은 이겨내질 못하고 부끄러움만 가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을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다뤄주는 지도력이 부재하다 보니, 죄책감이 조금은 덜하고 상대적으로 대충대충 무늬만 있는 신앙인들로 전락한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 서신의 지도자는 교회론적인 가치로 도전하기 보다는 그리스론적인 도전을 시도하였다. 오직 복음의 근본적인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고, 개개인이 저마다 그리스도를 대면하도록,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여 나갔다. 하늘의 지성소에 자신의 피를 가지고 직접 들어가셔서, 우리의 부끄러움과 죄악을 모두 씻어내시고, 천국시민권자로 끌어 올리신, 대제사장이신 예수만 바라보게 하였다. 더욱이 신도들에게, 인도하는 자들의 본을 받으라고 한 것을 보아서, 지도자들은 비록 가난하였지만 순결을 잃지 않았고, 신도들이 복음을 구체적으로 학습하며 적용할 수 있도록, 지도자들은 그들의 삶으로 본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 지난 칼럼
    • 영성논단
    2017-12-14
  • 기독교인의 행복론 - 61
    발자크의 <사라진>(1830)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어느 날 밤, 란티 가문의 대저택 안에서는 파티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밖으로 솟아나온 창문턱에 걸터앉아 비단커튼 주름 뒤로 몸을 감추고 서술자는 시끄러운 파티의 한가운데서 몽상에 빠집니다. 밖에는 죽음의 춤이 어른대는 어둡고 앙상한 정원이 보이고, 안에는 파리 최고의 가문과 재산을 자랑하는 상류사회 사람들의 호화스런 파티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오른쪽엔 춥고 음울한 영상과 왼쪽에는 호사한 삶의 영상이 공존하는 가운데 서술자는 한쪽 발은 추위에 떨리고 다른 쪽은 열기에 차 있음을 느낍니다.무도회의 넘치는 풍요와 미, 그리고 마담 란티의 두 자녀의 교양과 미모에 대한 찬사 속에서 사람들은 란티 가문의 근거와 재산에 대해 의문을 던집니다. 이때 딸 마리아니나가 지독히 늙고 추한 모습의 노인을 앞세우고 나타납니다. 차가운 불협화음을 몰고온 노인은 좌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나의 파트너인 마담 로체피트를 두려움으로 떨게 합니다. 노인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아도니스의 초상화는 아름다웠습니다. 그 초상화에 경탄을 금치 못하는 서술자의 파트너에게 서술자는 알려 줍니다. 서술자는 그 초상화가 원본이 아닌 어느 여자의 조각을 본뜬 것으로 그 여자는 마담 란티의 친척이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니나는 노인을 뒷문으로 내보냅니다. 젊음과 미모로 나를 애태운 마담 로체피트는 노인에 대한 비밀을 당장 알고 싶어하지만, 서술자는 다음 날 그녀의 방에서 단둘이 된 후에야 이야기를 꺼냅니다.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난 사라진은 공부를 많이 하여 훌륭한 법관이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바람에 걸맞지 않는 괴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어릴 적부터 반항적이고 몽상적이었던 그는 언제나 복잡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차 있었다. 그리고는 두 개의 서로 상반되는 성향이 야성적으로 폭발되는 충동적인 성격이었다. 공부 시간에는 선생의 모습을 벽에 그려 놓기 일쑤였고 예배 시간에는 괴상한 조각을 새기곤 했다. 드디어는 방자한 그리스 도상을 새긴 죄로 학교에서 추방된다. 그의 예술적 재능과 폭발적 열정은 마침내 파리에서 유면한 스승을 통해 갈고 닦여 22세에 대상을 받고 로마로 유학을 가게 된다.조각만이 삶의 모든 것이었기에 세상사나 사교에는 어두웠던 사라진이 로마의 어느 극장에서 쟘비넬라의 노래를 듣게 되는 것은 그의 운명에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한다. 그녀의 미모는 조각가가 평생을 찾아 헤매던 이상이었고 그녀의 노래는 예술가의 열정에 기름을 붓는 신비 그 자체였다. ‘그녀의 사랑을 얻든지, 아니면 죽으리라!’ 고통과 기쁨이 교차되는 열정으로 그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 속에서 수없이 그려내며 조각으로 새긴다. 매일 극장에 출근하다시피 하며 쟘비넬라의 모습과 노래에 도취되던 사라진의 열정은 드디어 인정을 받은 듯, 그는 그녀의 파티에 초대된다. 그날 밤 사라진의 구애를 거절하는 쟘비넬라의 말과 행동은 역설적으로 더욱 그를 자극한다. 그녀를 납치할 계획을 세운 사라진에게는 로마 왕자가 귀띔하는 진실조차 귀에서 멀었다. 그녀는 여자 역할을 하도록 길러진 거세된 남자 배우라는 것이다. 납치한 쟘비넬라의 입에서 사라진은 처음의 만남이 그의 순진성을 놀려 주려 한 주위 사람들의 계획에 그녀가 동의한 데서 비롯되었음을 듣는다. 절망 속에서 그는 그녀의 동상을 쳤으나 실패했고 다시 그녀를 죽이려 할 때 후견인이 보낸 잠복자들에 의해 살해된다.사라진이 죽자 쟘비넬라의 후견인은 그녀의 동상을 가져다 대리석에 새겼다. 란티 가문은 화가 비엔으로 하여금 그것을 다시 본떠서 아도니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쟘비넬라는 바로 그 늙고 추한 노인으로 마담 란티의 아저씨이다. 그래서 란티 가문은 그들의 과거를 숨기는 것이다. 여기까지 들은 마담 로체피트는 충격 속에서 돌연 세상을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시선으로 봅니다. 오늘날엔 더 이상 그런 불행한 연애는 없다는 의도로 들려 주었노라는 서술자의 달램도 그녀를 혐오감에서 건지지 못합니다.이 소설에서 인지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아도니스의 초상화’의 진실을 모른 채 그 표면만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자크는 발단 부분에서 빛과 어두움, 창의 안과 밖 등 양 면을 다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쟘비넬라가 거세된 남자 배우였음이 밝혀지는 것은 한 인간의 겉과 속이 다를 수 있는 양면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양면성을 알지 못한 채 어느 한 쪽만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발자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어느 한 쪽만을 편향되게 바라보지 말라는 얘기겠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의 편견을 불식시키는 일도 하셨습니다. 그것은 행복이 권력자나 부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받는 자에게도 있다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모든 인간의 근본적인 불행은 죄의 굴레에 갇혀 있다는 것이지요.
    • 지난 칼럼
    • 기독인의 행복론
    2017-12-14
  • 목회는 쉬운 것이다·48
    우리는 화려한 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보시기 원하십니다. 선교나 전도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 자리에서 삶을 말씀하십니다.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 만물까지도 우리가 마구 대할 대상이 아닙니다.행사나 축제를 위한 도구들이 아닙니다. 목사가 목회 성공을 위한 소모품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양심적인 자기 한계를 느끼는 것입니다.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나의 신앙적 보상이 아닙니다.사람들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와 관계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마태복음 6장 1절부터는사람들 앞에서 기도하지 말라.사람들 앞에서 구제하지 말라.사람들 앞에서 금식하지 말라.이런 사람은 이미 세상에서 상을 받았다.이들에게 이어서, 선지자 노릇을 했고, 귀신을 쫓아냈고, 권능을 행했고, 내가 한 것을 자랑하였고, 23절에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율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율법은 자기 자신의 완벽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아닙니다.예수님처럼 살아가면 보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조건 관계에서 오는 인간의 죄성에서 출발된 대가를 기대하는 그런 보상이 없습니다.조건에 의한 목회는 목회가 아닙니다. 목사의 목적 달성을 위한 명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불안은 자기 행위가 보상을 목적으로 한 결과일 뿐입니다.목회자의 불안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는 상 받으려고 축복받으려고 건강해지려고 잘되려고 성공하려는 이방 종교가 말하는 조건에 의한 열성이 아닙니다. 내가 열심히 했더니 지금 같은 보상을 누리는 것이다고 간증한다면 그 즉시 예수님께 내어 쫓김을 당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한다”라는 것입니다.이어서 31절에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왜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나 신학적으로 전통이라고 하는 사람들 눈에 왜 지극히 작은 자가 보이지 않을까요. 목회가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지극히 작은 자. 너무 흔한 대상이요 발에 채일 정도로 깔려있는 작은 자인데 보이지 않을까요?작은 자를 찾아 헤매는 목회자는 고통입니다. 자기 집 추녀에 걸린 파랑새의 노랫소리를 듣지 못하고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헤매는 자들의 삶은 어렵습니다.아주 쉬운 일인데 왜 고통이요 고난이라고 했을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하나님은 목회에 대한 큰 기대와 기적 같은 역사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돈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있지만, 가난으로 하시는 일도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을 통해서 하시기도 하지만 바보를 통해서도 하십니다.하나님의 일 중에 세상에서 대접받는 일도 있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일도 있습니다. 목회는 많은 군중 앞에서는 신나게 할 수 있지만, 사람의 숫자가 적은 데서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보이는 사람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쪽팔림’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목회자가 많은 사람에게 신뢰받고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주 작은 가정이나 자녀에게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불신을 받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런 실제적이고 가장 문제의 근본임에도 불구하고 관심도 없는 것이 한국적 보이려는 시각중심의 사회 속에서 사는데 아무 부담을 느낄 수 없도록 단련된 모습이다. 목회 성공이란 가치관에 대한 문제가 목회를 더 어렵게 만드는 이유일 수 있습니다.
    • 지난 칼럼
    • 허광재 칼럼
    2017-12-14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 / 개혁하는 교회 :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는다 25
    2부 중세 종교개혁의 발단과 그 결과25. 프랑스와 스위스의 개혁자들 칼빈의 활동이 시작됨가톨릭의 오류와 성경의 올바른 진리를 깨달은 칼빈은 이제 잠잠히 있을 수 없었다. 칼빈은 성격이 내성적이고 조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단 한적한 도시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우선 가정들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였다. 가난한 집, 부잣집, 큰 집, 작은 집 가리지 않고 개혁의 복음을 전하며 진리의 증인들을 만들어 놓았다. 기쁜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그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였고 그것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복음은 이웃에서 이웃으로 전해지고, 더 나아가 그 주변에 있는 다른 촌락과 도시까지 복음의 물결이 스며들었다.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칼빈이 다시 파리로 돌아왔을 때, 파리에서는 부자들과 유식하고 유력한 사람들 사이에 성경을 연구하며 토론하는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로마교회와 배치되는 진리를 발견한 학자들은 가톨릭의 지지자들에게 저항하며 투쟁하는 일까지도 전개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칼빈은 여전히 집집을 방문하면서 성경의 진리를 가르쳐주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구원의 도리를 전해주었다. 당시 프랑스의 황제였던 프란시스1세의 누이인 마가레트도 개혁신앙을 받아들이고 그 신앙을 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는데, 나중에는 왕궁을 개방하고 설교자를 초청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까지도 감행하였다. 그러나, 가톨릭의 성직자들과 지도자들의 반격과 선동의 결과로 무지하고 미신적인 신앙을 가진 평민들이 개혁신앙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프란시스 왕도 이에 동조하게 되므로 교황측에서는 다시 세력을 회복하여 개혁자들과 그 신앙에 동조하는 자들을 화형시키는 일을 재개하였다. 칼빈도 의심을 받게 되었고 그를 체포하려는 계획이 진행되었는데, 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파리를 탈출하여 포티어(Poitiers)라는 곳으로 가서 개혁사업을 전개하였다. 얼마 후 다시 파리로 돌아왔으나 프랑스는 이미 개혁의 문이 닫힌 것을 감지하고 일단 독일로 들어갔다. 생지옥이 된 프랑스이러한 와중에 개혁운동에 찬 물을 끼얹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날 하루 밤 사이에 로마교회의 미사 제도를 반박하고 공격하는 격문(檄文) 벽보가 전국 각처에 붙여졌다. 심지어는 왕의 거실 출입문에도 그 격문이 붙었다. 이에 격분한 왕은 개혁신앙을 가진 모든 자들을 박멸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개혁교도들을 체포하여 화형을 시키는 일이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심지어는 왕까지도 이 일에 적극적인 동조자가 되어 그 일에 직접 참여하고 간여하였다. 개혁을 주도하던 지도자들과 개혁신앙을 동조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화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화형을 당하면서도 그들의 얼굴에 나타난 조용한 기쁨과 관용과 용서의 정신은 그것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저항할 수 없는 복음의 능력이 되어 민중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많은 학자들과 부자들과 유력한 자들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심중으로는 개혁 신앙을 지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개혁신앙자들에게 대한 철저한 박해가 시작되자, 자신들도 언젠가는 신분이 노출되고 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 대학교수들, 학자들, 저술가들, 고급기술자 등 국가의 존경받고 인정받는 유력한 인물들이, 심지어는 왕궁의 신하들 중에도 프랑스를 떠나 다른 나라로 자취를 감추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로 인해 왕과 신부들은 더욱 분노하게 되었고 개혁의 복음을 믿는 자들을 샅샅이 찾아내어 징벌하는 화형장의 검은 연기가 프랑스의 하늘을 뒤덮었다. 프랑스에서 개신교도들에게 자행된 이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행위는, 장차 프랑스 혁명과 함께 닥쳐올, 무신론자들이 가톨릭교도들에게 저지르게 될 무시무시한 단두대 만행의 씨앗이었다. 개혁사업의 거점이 된 스위스의 제네바프랑스 종교개혁의 초기에 괄목할 만한 개혁자였던 러페브르의 제자였던 파렐은 매우 강직하고 용감한 개혁의 선두주자였다. 그는 한 때 스위스로 가서 츠빙글리의 개혁사업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는 조국의 종교개혁사업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개신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진행되고 있는 중에도 프랑스의 국경 근처에서 자국의 신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면서 독일의 개혁관련 서적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문서전도자들을 통하여 조국의 여러 지역에 보급하였다.파렐은 한 때 스위스의 한적한 지역으로 가서 아동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는 아동들을 교육하는 과정에 성경도 함께 가르쳤고, 그 영향이 부모들에게 확대되어 부모들 가운데 개혁신앙을 받아들이는 자들을 얻게 되었다. 얼마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신부들이 미신적인 신앙을 하는 시골 사람들을 충동하여 파렐은 더 이상 그 사업을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옛날 예수의 제자들처럼 이 마을에서 핍박을 받으면 저 마을로, 이 도시에서 박해가 오면 저 도시로 옮겨가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한 그의 집념과 노력의 결과로 가톨릭 신앙의 요새로 알려진 몇몇 도시들이 복음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로마교회의 의식을 포기하고 우상을 버리는 일들이 일어났다. 파렐은 특별히, 제네바에 개신교의 깃발을 꽂으면 프랑스와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위한 개혁사업의 거점이 될 것을 예상하고 제네바로 들어가 개혁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현지 가톨릭 세력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개혁의지는 여전히 제네바에 머무르고 있었고 파렐의 개혁정신은 계속 불타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개혁신앙을 가지고 있는 비천한 신분의 한 연약한 젊은이가 아동교육을 하면서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아이들이 그 복음을 부모들에게 전하여, 부모들이 이 프로멘트(Froment)라는 교사의 성경강해를 듣기 위하여 학교로 모여들었다. 그 수가 점점 증가하여 나중에는 교실이 차고 넘쳤다. 프로멘트는 이 과정에서 신약성경과 다량의 전도용 소책자들을 보급하였으며, 그 서적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퍼짐으로 제네바에 개혁사업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기 시작하여 마침내 그곳에서 개신교 사업이 견고해졌다. 이 무명의 한 청년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칼빈이 바젤로 가는 길에 제네바에 들렀다. 칼빈을 만난 파렐은 하나님께서 이 젊은이를 제네바로 보냈다고 확신하여 그를 설득하여 제네바에서 자기와 함께 개혁사업을 할 것을 강권하였다. 소극적이고 조용한 성격의 칼빈은 과격한 성격을 가진 제네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자신이 없어서 회피하려고 했지만, 파렐의 강권하는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기 때문에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칼빈은 이곳에서 30년간 개혁사업을 주도하였다. 그의 개혁의 목표는 첫째, 성경상 원칙을 고수하는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고 둘째는 전 유럽에 종교개혁을 촉진시키는 일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제네바에서 칼빈이 주도하는 개혁운동은 가톨릭의 세력을 저항하며 개신교의 원칙을 고수하는 보루가 되었고, 개혁신앙과 관련된 많은 책자들이 만들어져 각국으로 전파되었다. 그 시대에 세상이 요구하는 진리가 이곳으로부터 방방곡곡으로 펴져나갔다. 각처에서 핍박받던 개혁자들이 제네바로 돌아와서 피난처를 삼았고, 다시 힘을 얻어 각국으로 나갔다.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 영국의 청교도들, 네델란드의 신교도들, 프랑스의 위그노들이 이곳 제네바에서 진리의 횃불에 불을 붙여서 들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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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500주년 특집
    2017-12-08
  • 97. 제100회 총회장 박무용(朴武用) 목사
    경북 경산 출신박무용(朴武用, 1949. 8. 15~) 목사는 경북 경산시 평산동 437번지에서 박태규 장로와 김정자 권사 사이에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평산동은 대구 도심에서 그리 멀지않은 전형적인 농촌으로서 하늘 높고 물 맑은 개천이 흐르는 산촌이었다. 인근에 있는 대구에는 미국 북장로교 소속 배위량(Rev. Wn. M. Baird 1862~1931) 목사에 의해 대구선교지부가 설치되어 있었고, 오늘의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교회가 된 대구제일교회를 비롯, 일제 당시에만 해도 대구읍내에는 서문교회, 산격교회, 범어교회, 남산교회에 이어 경산지역에도 사월교회, 경산읍교회, 자인읍교회, 봉화교회 등이 설립되어 있었다. 박무용 소년이 태어난 당시에도 이미 여러 교회들이 설립되었고, 드디어 무용 소년이 살고 있는 평산에도 장로교회가 설립되었다. 무용 소년이 태어난 시대는 갑자기 닥친 8.15 광복이 지난지도 10년이 다 되어 혼란한 사회 분위기는 어느 정도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무용은 기독교 신자였던 부모로부터 자연스럽게 구원의 복음을 접할 수 있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광복 후 국가적으로 체제가 서서히 잡혀가고 있었으나 8.15이후 전개된 좌·우 이념 대립의 영향이 아직도 남아서인지 사회분위기가 안정적이진 못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무용 소년은 부모들의 손에 이끌리어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배울 때마다 이 세상삶만이 아니라 새롭게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도 모르게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과 주님을 위해 일해야겠구나라는 소명감이 주어졌다.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육을 받고서 해방 후에 기독교 이념으로 새로 출발한 신설학교인 대구 성광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성광학교는 미션계에서 교과목 중에 성경과목도 있고 일주일에 한 두 차례 예배하는 채플도 있어 무용 학생에게는 신앙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고 학교생활에 만족하였다. 그는 성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신대학교 신학과로 진학해 교단을 위한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는 대신대학교를 마치고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학업을 계속하면서 같은 노회 내에 있는 농촌교회(미자립)인 달성군 다사면에 있는 세천교회에서 전도자로서 영성을 쌓아 갔다. 가옥 이래야 30여호도 채 되지 않는 시골 교회였지만 가족적인 분위기여서인지 외로운 줄 모르고 즐거운 하루하루가 전개되었고 목회가 무엇이며 사람 키우는 일, 제자삼는 일이 어떤 것인가를 스스로 터득해갔다. 대구 대신대학교 졸업소련연방 무너진 직후 러시아 선교사 파송기독교방송·한국찬송가공회 이사 역임미국 새들백교회 소그룹 모임 도입“교단탈퇴 목사 재가입시 전소속 노회로만 가능” 결의박무용 목사는 이후 때때로 고된사역을 하면서도 그때를 회상하며 새 힘을 얻곤하였다. 그는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1979년 2월 3일 대구시 상동 498번지 2층 건물(약25평)을 전세로 얻어 도시목회를 처음 시작했다. 1979년 11월 17일 상동(上洞)에서 현재의 황금동 567-6번지로 교회를 이전하여 교회명을 황금교회(黃金敎會)라 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목회하면서도 배움에 갈급하여 총회가 운영하는 목회신학원으로 진학하여 목회석사학위(M.M.)를 취득했고, 대구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교육학석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그가 황금교회를 개척 선교하기에는 이미 언급한 세천교회 외에 반야월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대구 성도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사역한 것이 전부이지만, 그의 황금교회 목회에 밑거름이 되었던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박무용 목사는 교회 개척 후 40년만에 대형교회를 이루었고 지역에서만 아니라 교단의 수장자리인 총회장이 되지 않았는가? 그는 목회사역을 교회 안에서만 이룬게 아니다. 1992년에는 러시아에 강승규, 박선자 선교사를 파송하여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으며 우리가 전해 받은 복음을 다시 나눈다는 차원에서 앞으로도 지속하겠다고 다짐한다. 그의 활동범위는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에장총회 군선교회장으로 전군신자화 운동에도 앞장섰고, 지역 내에 있는 대구 수성경찰서 경목실장으로 경찰복음화 사역에도 열의를 다하고 있다. 한편 모교인 경산에 있는 대신대학교 재단이사로, 기독교방송(CBS) 교단대표 이사, 한국찬송가공회 파송이사로, 총회 세계선교회(G.M.S) 부이사장으로, 총회(102회) 선거관리위원장으로도 심혈을 기울여 봉사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그에겐 항상 젊음과 열정이 넘친다. 그의 생김새가 듬직하고 남성다운 호상이어서 만은 아닌 것 같다. 그에겐 어떠한 어려움이나 역경에서라도 박차고 일어서겠다는 용기와 확신에 믿음의 열정이 그의 모습에 가득차 있다. 그는 황금교회 30년사 가운데 교회개척의 어려움과 이를 극복한 이야기를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황금교회30년사, 같은책 p.157~158).“황금동 가정집 사글세 기한이 다 되어 안이자 사모의 퇴직금 100만원으로 천막 40평짜리를 사서 천막교회를 세웠는데, 수성구청 직원 20~30명이 달려들어 그 천막교회를 부술려고 하는 긴박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내일 주일예배를 드려야 한다), 구청장을 찾아가 사정사정을 해 일주일 간의 말미를 얻었다. 또 전두환 정부가 환경을 정화한다고 하면서 천막교회를 뜯으려고 할 때 길에 주저 앉을 정도로 눈앞이 캄캄했다. 이때 우씨라는 복덕방 주인이 지산동 954~3에 교회부지가 있다고 했다. 나는 용기를 내어 40만원을 주고 계약을 했는데 사실 중도금 줄 돈에 대한 대책도 전혀 없었다. 나는 가창 골짜기에 있는 갈멜산기도원에 올라가 하나님께 온 힘을 다해 기도했다. 그리고 돌아왔는데 기적이 일어났다. 동생인 박삼용과 대구노회 여전도회연합회 김숙애 회장, 수산교회 조응대 장로 장모님이 가지고 있는 금패물을 합해 500만원의 거금을 모아 보내주었다. 이 헌금으로 계약한 땅값을 다 치루고 등기까지 완료하는 기적을 체험했다.” “또 교회당 건축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데 박주열 장로와 김우선 권사님이 집을 담보로 농협에서 500만원을 차용할 수 있어서 건물을 신축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는 훈련을 시키시는 주님께 늘 감사했다.” 그는 다시 읊조린다. “나의 목회철학은 폐결핵으로 사선을 넘은 나를 일사각오 정신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기 위해, 중국선교와 지역 복음화를 위해 전도와 기도하는 것이었다. 교회 분위기는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여 매우 정겹고 가정적이었다. 지금도 피곤하고 고달플땐 그때를 회상하며 새 힘을 얻곤 한다. 박 목사는 계속 전도프로그램을 정착시키기 위하여 네비게이토선교부에서(대구지회 주관) 6개월 과정, 대학생성경일기회(UBF)에서 6개월 훈련을 받고 시도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다시 미국 L.A에 있는 새들백교회 랄프네이버 목사의 교회성장세미나에 참가 교회에서의 제자 양육훈련의 중요성을 깨닫고 교회에 정착을 위해 소그룹 모임과 교인양육프로그램에 전력을 다한 결과 정착에 성공하게 되었다.오늘까지 그는 자신의 목회철학을 하나님께서 내게주신 ‘목적을 따라 세워져 가는 황금교회’라고 고백한다. 소그룹 활성화 교인의 제자화 운동이 교회성장의 밑거름이란 진리를 터득한 것이다. 그가 재임했던 예장총회 제100회기의 중요 결의안을 보면, ① 총회 감독권 강화를 위해 규칙 제3장 8조 신설을 보완하고 산하기관 정관에 조항을 삽입토록 하다. ② 총회헌법, 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 예배모범은 노회에 수의하기로 하고 정치와 권징조례를 한 해 더 연구하기로 하다. ③ 상설위원회로 총회정책연구위원회, 총회역사위원회, 교단연합교류위원회, 통일준비위원회, 세계교회교류협력위원회를 설치하다. ④ 교단을 탈퇴한 목사나 교회가 재가입할 경우 소속되었던 노회로만 가입할 수 있다(제100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 이승희, 김창수편 예장총회 출판부 서울 p.43 참조).박무용 목사는 2015년 9월 14일부터 18일까지 대구 반야월교회에서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00회 총회에서 영광스러운 총회장에 선출되었고, 그는 1년간 대과없이 총회장 직임을 완수했다. 박무용 목사는 사모 안이자와 슬하에 2남의 자녀가 그의 뒤를 이어 믿음을 대를 이어가고 있다.<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장 열전은 97. 제100회 총회장을 끝으로 마감한다.>
    • 지난 칼럼
    • 합동총회장 열전
    2017-12-07
  • 생명의 의미
    생명은 시간이고 역사이며 기억이고 연대이다. 땅의 진화의 오랜 시간이 축적되어 ‘나’라는 생명이 있는 것이고 내가 존재함으로 조상과 후손이 연결된다. 여기에 생명의 지혜를 깨닫는 것이 바로 생명의 길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다.”는 이 창조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는 신앙한다. 사도신경 역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이렇게 사도신경 신경을 고백한다. 이 창조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핵심적인 고백이다.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오늘의 삶을 살기 위하여 변화를 요청하는 시대에 허황되게 살고 있다. 그러므로 참으로 사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가야 한다. 그렇다면 생명의 윤리를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생명의 의미를 알고 생명과 관계되는 요인들을 드러내고 역사, 공동체, 환경 등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예컨대 생명은 변화하는 조건의 유동성 속에서 그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는 개인이나 집단의 자발적 활동과 경험을 알아야 한다. 생명은 정체성의 힘(the power of identity)이며 인간의 구체적인 실존을 가리킨다. 그리고 생명은 본질적으로 순수하게 물질적 존재를 초월하여 신령적(numinous)이다. 즉 생명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이지 인간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러한 전제를 수용하면 여기에 나 생명은 하나님을 위하여 살도록 운명 지어진 것을 믿음으로 알게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인간의 책임을 묻게 된다. 생명은 인간이 스스로 즐기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진 것을 아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육신의 생명은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한편 성서의 말씀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모든 생명을 다스려라” 명령했기에 흔히 인간이 만물의 지배자라고 오해하여 자연을 훼손해도 좋은 냥 인간 중심으로 착각하여 이 시대의 문명권을 지배하고 왔음을 부인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에 ‘다스림’의 위치만을 착각했다는 점을 깨닫고 오만 방자한 태도를 버리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다스림이란 사랑과 정의, 돌봄과 섬김에 근거한 다스림이지 결코 지배와 억압에 의한 다스림이나 오만 불손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임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창조함을 받은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기를 학수고대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신음하고 있음을 본다.로마서에서 바울의 회심을 통해 아는 것은 로마통치하의 세계는 피조물조차 ‘사멸의 종살이’에 시달리는 모습을 알게 한다. 당시 세계는 로마의 폭력이 두려워 잠잠한 상태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생명은 전적으로 ‘허무를 만드는 힘’으로서 로마의 무력을 인정하는 대가로 보장되는 것이었다.이러한 평화, 즉 ‘죽음과 같은 고요’를 이룩한 로마 황제에게 지고의 존재로 숭배되었다. 이러한 세계에 당시 바울의 회심은 ‘부정의 부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여기에 당시 바울의 ‘다시 삶’은 ‘죽음의 죽음’이었다. 이같은 바울의 회심은 ‘부정의 부정’으로 이해한다. 이는 바울의 중생, 또한 이 ‘다시 삶’은 죽음의 죽음이었다.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이해와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체험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살리는 생명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잘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이 생명운동은 자연의 착취와 파괴로 인한 생태계의 위기를 ‘죽어가는 생명’으로 보며 바로 그러한 위기의 원인으로서 인간, 인간중심주의로 더 나아가 근 세대적인 욕망의 위기를 보는 것이다. 예컨대 당시 로마의 도처에 일어난 만연한 죽음의 문화에 대응하기 위해 죽음 그 자체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죽임의 체제 곧 팍스로마나(Pax Romana)의 본질에 접근 하며 바울은 생명운동에 자연의 착취와 파괴로 인한 생태계의 위기를 ‘죽어가는 생명’으로 보는 삶의 태도에 ‘생명을 살리는 삶을 보이신다.
    • 지난 칼럼
    • 배성산
    2017-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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