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연지골
Home >  연지골

실시간뉴스

실시간 연지골 기사

  • 피 뿌린 옷을 입은 하나님의 말씀
    ◇사도 요한은 계시 중에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공의로 심판하는 백마 탄 자를 보았다. 그는 피로 얼룩진 옷을 입고 있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계 19:11-14). ◇그는 또 그의 입에서 나온 날카로운 검으로 만국을 치며,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고 쓰여 있었다(15-16). 여기 ‘피 뿌린 옷을 입은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인가? 요한복음 1장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1-5)고 했다. 그 안에 생명을 가진 이 하나님의 말씀은 곧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인간으로 오시고, 유월절 어린양으로 인류의 대속을 위해 십자가에 자기 몸을 희생제물로 드린 예수 그리스도이다.◇예수 그리스도는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가 흘린 피는 모든 인류의 생명을 대속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빌립보서는 그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굻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8-11)고 했다.◇또 골로새서는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고 했다. ◇요한은 그가 피로 얼룩진 옷을 입고 만국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심을 보았다. 니케아 신조는 “그는 고난을 받으시고, 장사함을 받으셨으나, 제 삼일째 되는 날,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따라서 살아나셨고, 하늘에 올라가시사, 성부의 오른편에 앉으셨으며, 장차 산 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 사실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 연지골
    • 연지골
    2015-05-14
  • 이상한 아동학대죄-이 광 호 목사
    어린 아동을 학대하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 아동학대죄는 어른이 자라나는 아동에게 가혹한 체벌을 가하거나 심하게 괴롭힘으로써 아동의 일상적인 안전한 삶을 저해하는 모든 행위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아동학대자가 있다면 국가는 당연히 그를 엄벌에 처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육부는 아동학대죄의 정의에 대하여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적극적인 신앙 교육조차 학대죄로 간주한다. 즉 자녀가 신앙을 수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적극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것을 일종의 범죄행위로 본다. 이는 부모의 지나친 신앙 교육은 아동의 정서를 크게 해치는 악행이라는 인식에 연관되어 있다. 그런 논리라면 우리 주변에는 여기저기 아동학대죄가 존재한다. 아이들이 공부하기 싫어하는데 열심히 공부하라고 강조하는 것은 아동학대죄가 아닌가?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아동에게 억지로 학교에 가라고 떠미는 것은 아동학대가 아니라 할 수 있는가? 또한 죽어도 싫은 영어와 수학 과목을 강제로 공부시키는 것이 아이들의 정서에 해롭지 않은가? 자기 자녀에 대한 부모의 적극적인 신앙교육이 아동학대라고 한다면 한국의 상당수 학교에서는 이미 교사들로부터 심각한 아동학대 행위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공부로 인해 억압받는 아동들을 하루 종일 교실에 가둬두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교사들은 학부모들을 설득해 아동들을 강제로 학교에 보내는 일을 중단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어리석은 정책입안자들은 아동들을 학대하고 있는 그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뿐 아니다. 예를 들어 차별금지라는 명분을 앞세워 아이들에게 동성애가 별 문제될 것이 없다는 듯이 교육시키는 것은 아이들의 정서를 엄청나게 해치고 있다. 그것은 아동들에 대한 교사들의 무서운 학대죄에 해당되는 것이다. 2015년 4월 17일자 국민일보에는, 지난 달 중순 교육부가 서울시교육청 등 각 교육청에 ‘아동학대 및 신고의무자 교육 실시’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는 기사가 났다. 그 공문에는 ‘보호자의 종교행위 강요’를 아동학대의 한 유형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 학교에서는 상부 기관의 요구에 따라 가정통신문을 발송했다, 거기에는 ‘보호자의 종교에 대한 강요행위는 아동 학대에 해당되고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사실이 명기되어 있다. 학교 홈페이지에는 그와 같은 내용을 공지하고 교직원회의를 통해 연수교육까지 마쳤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할 수 있는가??이런 현실을 보면 지금의 우리나라가 점점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않을 수 없다. 자녀의 동의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부모가 적극적인 신앙 교육을 시키면 아동학대죄가 적용된다는 것이 말이라도 될 법 한가? 건전한 교회와 성도들은 이에 연관된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어쩌면 앞으로 아이들이 아동 학대죄에 관한 학교의 지침을 핑계대어 교회에 가지 않으려는 일들이 많이 생겨나게 될지도 모른다. 언약의 자녀들이 신앙 문제에 대하여 부모에게 강력하게 저항하게 되면 어떻게 할 방도가 없어진다. 아이들은 그것을 빌미로 삼아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이 생겨날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와 같은 국가 정책이 진행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교회에 속한 부모들이 언약의 자녀들에게 건강한 성장을 위해 신앙 교육을 시키는 것은 학대가 아니라 도리어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다. 그것을 아동학대죄로 간주한다는 것은 건전한 신앙을 기초로 한 가정을 포기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분명한 점은 이와 같은 이상한 사태가 우리 주변에서 구체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견지하지 못하면 장차 상상을 초월한 부작용이 일어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언약의 자녀들을 말씀으로 올바르게 양육하는데 엄청난 장애가 생겨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성도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 악한 정책에 강력하게 저항함으로써 자녀들에게 올바른 신앙을 상속해 주어야만 한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5-05-08
  • 한국인의 행복순위
    작금의 한국인은 어느 때보다 좋은 집에다, 집집마다 자동차를 한두 대씩 가지고 있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고 살지만 행복하지 않다.미국여론조사 기관인 갤럽이 지난달 유엔지정 ‘세계 행복의 날’(3월 20일)을 맞아 세계 143개국의 행복 순위를 공개했다. 한국인의 행복감은 59점으로, 이스라엘과의 긴장으로 매일 불안에 떠는 팔레스타인과 같은 115위였다. 오히려 매일 폭탄테러가 벌어지고 있는 이라크(101위)보다 훨씬 낮았다.이번 갤럽이 조사한 개인의 행복감은 ① 어제 잘 쉬었는가. ② 존중받았는가. ③ 자주 웃었는가. ④ 재미있는 것을 배우거나 했는가. ⑤ 얼마나 즐거웠는가 등을 물어 이 답에 점수를 매겨 수치를 산출한 것이다. 이 물음은 지극히 소시민들이 느끼는 감정이다.그런데 왜 한국인들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사람이 적었을까. 이유는 경쟁심 때문이다. 경제발전으로 잘 먹고 잘 살면 국민행복지수(GNH)도 높아질줄 알았는데, 왜 2만5천불 시대에 이른 개인은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우리사회 구성원의 경쟁심이 경제를 발전시키고 물질적 풍요는 가져왔지만, 개인의 행복감을 충족시키지는 못한 탓이다.개인의 행복감은 종교적 신념에서부터 온다. 그러나 한국인의 종교는 철저히 기복주의여서 종교가 오히려 개인의 욕망을 부추길 뿐, 소시민의 욕망을 억제하면서 구원의 이상을 추구할 수 있도록 인도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 4분의 1이 기독교인이지만, 기독교 역시 세속적 성공을 추구하는 기복주의에 빠져있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언제나 인도하신다’는 확신에 찬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 국가인 부탄이 행복한 나라이고, 철저한 인종적 계급사회를 이루고 있는 인도인들이 더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저들의 신앙의 힘이다.어느 사회나 가정이 행복하고 자식이 잘되고 무병장수하며, 재물과 부귀와 출세를 바라는 현세적인 기복행위는 있다. 그러나 종교는 이 현세적 삶의 조건을 떠나 구원한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곧 주님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한 의미이다. 한국교회 6만 강단에서 기복주의를 몰아낼 때, 비로소 한국인의 행복순위가 높아질 수 있다.
    • 연지골
    • 사설
    2015-05-08
  • 바른 신앙
    기독교는 하나님의 인류 구원사역에 있어 만세와 만대에 감취었던 비밀이다. 이 비밀이 때가 차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인류의 정신세계를 논하는 세속적 종교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복음’이고 ‘생명’이다.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룬 십자가의 구속을 믿는 것이고, 이 믿음을 우리의 삶의 실천으로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신행(信行)의 일치라 한다. 여기에서 신(信)은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 하는 고백, 즉 교리의 문제이고, 또 행(行)은 우리가 믿는 그 교리를 어떻게 실천하는가 하는 삶, 즉 가치관의 문제이다. 이 둘이 바르게 나타날 때 그 신앙은 올바른 것이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교리는 바른데, 신도들의 생활이 바르지 못하다는 말을 듣는다. 이는 그가 믿는 신앙은 정통이라 하더라도 삶의 실천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종교는 힘을 잃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반면에 성도들의 삶은 도덕적이나 그 교리가 바르지 못하다면 그 역시 사이비 종교가 되어 오래지 않아 소멸해 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신행의 일치를 이룰 때 건강한 신앙이 된다.혹자는 신앙실천을 강조하면 ‘행위 구원’ 운운하며 비난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은 정통을 지킨다고 자부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나라나 사회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머리와 입으로만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론신앙만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오히려 신행이 바른 신앙인들을 비난한다. 이는 모순이다.기독교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고,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결과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그 믿음은 삶의 현장에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 내가 믿는다 하면서도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 없다면 그 믿음은 허상일 가능성이 많다.성경은 말한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2-25).
    • 연지골
    • 사설
    2015-05-08
  • 이년아, 하나님 들을라
    ◇어떤 교회 권사님이 집안에 문제가 생겨 점집을 다녀왔다. 그 집 대학생 딸이 ‘엄마는 교회의 권사이면서 왜 점 치러다니냐’고 힐난했다. 이 소리를 들은 권사왈, ‘야 이년아, 조용히 해라. 하나님 들을라’라고 했다. 이 말은 한국 기독교인의 기복주의적 신앙의식을 꼬집으려는 조크일 것이다. 그러나 이 한 마디 조크 속에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평소에 점집을 찾는 손님 중에 약 30%가 기독교인이거나, 이전에 교회에 다닌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기독교인이라도 집안의 대소사가 생기면 교회가 가르치는 ‘기도’만으로는 어딘가 불안하여 점집을 찾는다는 것이다.◇점집을 찾은 교회 권사에 대한 또 다른 버전도 있다. 일찌기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와 같이 사는 그 권사는 어느날 주일예배가 끝난 후 목사님을 상담했다. “목사님, 우리 아들 아시죠. 그 애가 사업을 한다며 그동안 돈을 많이 썼어요. 이제 살고 있는 집 전세가 전부인데, 이번에 마지막으로 또 한번 더 사업을 해보겠다고 저러는데 어떤 사업을 하면 성공할 수 있겠는지 목사님이 하나님께 좀 알아봐 주세요”라고 했다. 난감한 목사님이 한참 머뭇거리다가 “기도해 봅시다. 주일 잘 지킬 수 있는 사업을 하면 좋지 않겠어요”라고 대답했다.◇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그 권사는 성경가방을 든 채 평소에 지나다니면서 보아 둔 하얀 깃발 달린 집을 찾아갔다. 복채를 올리자 그 점쟁이는 단번에 속시원한 점괘를 내 주었다. 당신이 사는 집에서 북쪽으로 나무 목(木)자 성을 가진 사람의 가게를 얻어 물장사를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가게를 찾아 헤맨 끝에 과연 임(林)씨 성을 가진 사람의 가게를 얻어 물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기도’와 ‘점괘’는 다르다. 기도는 그것이 이루어질 때 응답된 것이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응답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는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내 기도의 내용이 합당해야 응답되는 것이다. 만약 내가 하는 기도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오히려 나를 해(害)하는 것이 돨 수도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기도는 오로지 선하신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맡기는 것이다. 그러나 점괘는 그것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상관없이 이미 그 답이 시원하게 나온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초기 한국교회는 미신타파운동을 전개해 교인들이 점집을 찾는 것을 철저히 금지했다. 특히 장로, 권사, 집사 등이 점을 쳤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권징도 행했다. 한국교회에는 그때보다 더 많은 목회자가 있고, 신학자도 있는데, 어쩌다가 한국교회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알 수 없다.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겔 13:9).
    • 연지골
    • 연지골
    2015-05-07
  • 한국교회의 세 가지 죄
    ◇세월호 참사와 관련, 한국교회가 저지른 세 가지 죄가 있다고 한 신학자가 주장했다. 첫째는 세월호 참사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려는 ‘이기성의 죄’, 둘째는 세월호 참사를 신정론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뜻으로 설명하려는 ‘책임전가의 죄’, 셋째는 세월호 참사같은 거악을 보고 침묵을 강요하는 ‘침묵의 죄’라고 했다. ◇그는 ‘이기성의 죄’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자 ‘가난한 집 애들’이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다가 생긴 일이라며 개인의 문제로 치부한 조ㅤㅉㅜㅅ작목사의 예를 들었고, ‘책임전가의 죄’는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이 이대로는 안되니 꽃다운 어린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말한 김ㅤㅉㅜㅅ환목사의 설교를 예로 들었으며, ‘침묵의 죄’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설왕설래 하지 말고 침묵할 것을 설교한 이ㅤㅉㅜㅅ수목사와 김ㅤㅉㅜㅅ호목사를 예로 들었다.◇그는 세월호 참사는 해운회사와 그 해운회사를 지도 감독하는 국가기관, 그리고 정부 등 모두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참사로서 한국사회가 총체적으로 저지른 범죄이고 국가적 범죄인데도, 단원고 학생들을 ‘가난한 애들’이라고 폄하하고 이들이 분에 맞지 않게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다가 난 사고라며,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으로 이해한 태도는 이웃의 아픔을 간과하지 말라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태도라고 규정했다.◇또 세월호 참사를 전통적 신정론에 의거 ‘하나님의 뜻’ 혹은 ‘하나님의 이유’에서 원인을 찾아 설명하려 한 태도는 인간의 책임을 회피하는 대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려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역사적 맥락에서 하나님이 인지하지 않으시는 사건은 없다. 그러나 가해자의 폭력으로 인해 피해자들이 슬픔과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인지하신다는 의미이지, 세월호를 대한민국을 회개시키는 도화선으로 사용하시기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은 어리석고 무지한 태도라고 비판했다. 세월호 참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악용한 사악한 인간들의 잘못에 불과하다는 것이다.◇또 세월호 사건이 온 나라를 뒤덮자 “침묵해야 한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록 입을 닫아야 한다. 함부로 남을 정죄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범죄행위예요. 하나님께 회개하고 나가야 한다”며 침묵을 강요한 설교는 타인의 고통을 ‘하나님의 침묵’으로 읽고 이해하는 태도로 인간의 무기력함을 전제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하나님은 현재의 악의 문제를 관망하시거나 관망케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며, 악에 대해 침묵하거나, 무력함을 핑계 삼아 침묵하는 태도는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를 ‘값싼 은혜’로 이해시키는 태도에 불과하다고도 말했다. ◇그는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 비유를 세월호 참사로 읽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세월호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삶의 소망을 상실한 유가족으로 찾아오셨고, 살아남기는 했지만 너무 불안하고 힘들어서 삶의 지표를 상실한 생존자로 찾아오셨다”고 설명했다.
    • 연지골
    • 연지골
    2015-05-06
  • ‘장로’기업인들의 수난
    ◇요즘 사정정국의 부패척결 대상에 올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일광그룹의 이규태 회장과 경남기업의 성완종 전 회장은 둘 다 기독교회의 장로이다. 여기에 또 역시 성결교 장로인 신원그룹 박성철 회장이 탈세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방산 비리로 군검 합수부의 수사를 받고 있는 서울 돈암동 ㅤㅉㅙㅍ성결교회 시무장로인 이규태 회장은 비자금 조성은 물론,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돈세탁 창구로 활용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그로인해 그 교회는 합수부로부터 교회장부까지 압수수색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또 해외자원개발 비리로 검찰특수부의 수사를 받던 성 전 회장은 서산ㅤㅉㅙㅍㅤㅉㅙㅍ감리교회의 시무장로이다. 그는 점집을 찾아 점도 치고, 요로에 구명을 호소하다가 그것이 여의치 않자, 끝내 기독교인이 선택해서는 안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한국교회에는 ‘장로’가 하나의 사회적 호칭이 되고 있다. 유럽이나 미주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장로’는 사회적 신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교회의 평신도를 대표하는 장로를 어떤 세속적 기업이나 사회적 조직 안에서도 그대로 ‘장로님’이라고 부르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또 한국의 커피솝이나 시장통에서도 ‘장로님’이라고 부르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교회의 직제에 불과한 장로를 교인들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그대로 호칭하는 것은 교회의 ‘장로’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이 묻어 있음을 의미한다. 교회의 장로직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교회 직제에서의 본래 장로는 목회자였다. 초대교회 직제에는 사도, 장로, 집사가 있었고, 사도 시대가 끝난 후에는 이를 감독, 장로, 집사로 부르다가, 이후 감독은 ‘주교’로, 장로는 ‘사제’로, 집사는 ‘부제’로 불렀다. 이것이 가톨릭교회의 직제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러 성례전 신학이 바뀜에 따라 목사, 장로, 집사로 되돌아 갔다. 이것이 개혁교회의 직제이다. 그러나 그 중심은 장로이다. 이 때의 장로는 모두 교회를 전임하는 ‘목회장로’였다. 그래서 개혁교회의 목사는 장로반에서 나온다. 목사는 설교와 치리를 겸하는 직분이고, 장로는 목사와 더불어 교회의 치리를 맡은 직분이다. 그런데 산업사회로 들어오면서 세상에서 엿세동안 일하고 주일날 하루 교회에 나와 교회를 치리하는 ‘세속장로’제가 도입되었다. 현대교회의 장로제이다.◇오늘의 기업인들의 천국이 된 자본주의는 장로제로 대변되는 칼빈주의 개혁교회의 청지기 정신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중직들이 세상에서 기업을 이끄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교인들이 하는 기업이 탈세를 하거나 그 기업을 키우기 위해 뇌물을 제공하는 등 비리에 휘말리는 것은 세상에서 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범죄이다. 성경은 속이는 저울의 추를 비난한다. 이번에 자살한 성완종 전 회장은 정관계 인사들에게 150여억원의 불법자금을 뿌렸다고 한다. 이는 기독교인의 기업윤리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우리사회에서 최소한 장로들이 하는 기업은 비리가 없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 연지골
    • 연지골
    2015-04-23
  • 전 세계가 이슬람의 만행을 규탄해야 한다
    지금 전세계 이슬람교도들이 곳곳에서 기독교인들을 참수하거나 박해하고 있다는 소식이 꼬리를 문다. 이번에 또다시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인 ‘이슬람국가’(IS)가 리비아에서 에디오피아 기독교인 30명을 무더기로 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리비아의 이슬람 무장단체는 지난 2월에 이집트 기독교인 콥트교도들을 살해했다. 이에 앞서 또 리비아에서 출발한 난민선에서 이슬람교도들이 나이지리아와 가나 출신 기독교인 12명을 산채로 지중해 바다에 던져 익사시켰다.수단과 나이지리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여러 곳에서는 이슬람교도들의 습격을 받아 수많은 교회가 불타고 기독교인들이 무참히 살해되고 있다. ‘평화의 종교’라고 말하는 이슬람이 명분없는 타종교 박해를 자유와 인권이 최고조로 신장된 21세기에 버젓이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인권을 말한다는 세계 어떤 인권기구에서도 이슬람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불법과 불의에 맞서 정의를 구현한다는 세계언론들은 기껏 사실보도만을 짧게 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또 기독교는 ‘하나’라면서 서방 기독교세력은 왜 침묵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기독교가 왜 이렇게 무력해졌는가? 이슬람교도들의 저 만행을 언제까지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지금 한국교회도 배부른 논쟁만 일삼고 있을 때가 아니다. 똘똘 뭉쳐서 교회를 보호하고, 타종교의 부당한 도전을 막아야 할 기독교가 몇 사람의 자리 보전을 위해 사분오열하고, 자기네 교파와 교단을 보호하려는 정통성 시비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한국에도 언제 이슬람의 만행이 우리사회와 기독교를 공격해 올지 아무도 모른다. 이슬람연구가들은 이슬람은 무슬림 인구가 국민의 7%만 넘으면 타종교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낸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속담에 ‘우선 먹기는 곳감이 달다’는 말처럼 지금 당장의 필요성에 의해 이슬람교도들을 무차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그들 가운데 자살폭탄을 든 테러분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슬람을 차별화 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슬람이 기독교도들을 적으로 삼고 명분없는 살상행위를 하는 만행을 중지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 세계 기독교단체들은 두말할 것도 없고, 유엔을 비롯한 세계평화기구들이 저들의 만행에 대한 규탄 대열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 연지골
    • 기자수첩
    2015-04-23
  • 헤롯왕과 히틀러, 그리고 세월호/임 영 천 목사
    예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을 때 헤롯왕(대헤롯)이 그(아기예수)를 잡아 처치하려고 하였다. 미래에 자기의 권좌를 위협할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부모와 함께 피신해버려 그를 잡아들일 수 없게 되자 헤롯은 두 살 아래의 어린아이들을 모두 잡아 죽이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을 저질렀다. 표현컨대 대학살(大虐殺)이었다. 그 아이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어린 양과 같은 힘없는 존재들이었는데, 마치 세렝게티 대평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던 영양(임팔라)들이 갑자기 달려드는 맹수들에 의해 속절없이 물려가 목숨을 잃는 경우처럼 학살당하고 말았다. 약육강식의 원리, 곧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가 연약하고도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자를 희생시키고 자기 자리(권좌)를 지키는 일이 서슴없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권력의 잔인무도(殘忍無道)함과 후안무치(厚顔無恥)함의 진면목이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권력자에 의해 이런 대학살의 만행이 자행된 역사적 사실 중의 가장 큰 것은 독일 제3제국의 최고권을 장악하고 있던 히틀러에 의해 저질러진, 유대인들에 대한 홀로코스트(대학살 사태)였다. 대헤롯의 자리에 히틀러가 들어앉고, 학살된 어린아이들의 자리에는 유럽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던 허다한 유대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헤롯이 합당한 이유로 어린이들을 죽인 게 아니었고, 또 어린이들은 무슨 잘못이 있어서 학살당한 것이 아니었듯이, 히틀러는 정당한 이유도 없이 유대인들을 모아다 가스실의 희생양으로 보냈으며, 또 유대인들은 무슨 마땅한 죄목도 없이 인종소탕(人種掃蕩)이란 미명 아래 가스실의 연기와 함께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 희생자들의 숫자가 많게 잡아 무려 6백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히틀러가 제2차세계대전의 말기에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어버려 종전 이후의 전범자 재판에 그가 출석하지 않아도 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 전범 재판에 상당히 많은 수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독일 책임자들이 출석해 재판을 받고 또 처벌을 받은 것을 보면, 홀로코스트의 책임이 단지 히틀러 1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최고권자는 그 신하와 막료들의 지원에 의해 그 막강한 자리가 유지되고, 또 막료나 부하들은 그 최고권자에 충성(?)하면서 그 자리, 이를테면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위치 같은 것을 지키게 된다는 일반적인 사실로 볼 때 그 두 계층의 사람들은 상호 공범의 관계에 있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바로 이 비정하고 무자비한 공범자들의 만행으로 인해 세계의 역사, 아니 인류의 역사는 먹칠로 점철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무솔리니와 그 부하들의 상호 관계가 그러했으며, 일본 천황과 ‘아시아의 히틀러’ 도조 히데키[또는 현 아베 수상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연합 세력 역시 그러했다고 보겠다. 중국인 수십만 명을 학살했다고 하는 난징(南京) 대학살의 참혹상은 아우슈비츠에서의 대학살을 무색케 한 것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우리는 저 지난주로 4·16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보냈다. 학생들을 비롯한 일반인 수백 명의 목숨들이 이때 수장되었다. 유럽의 타이타닉호 침몰 사건이 보여주듯이 해상에서의 조난 사건은 예기치 않게 발생할 수 있다. 천재지변이나 인력으로 어쩌지 못하는 불행한 선박 사건이 많이 일어난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국민들이 이 세월호 사태를 타이타닉호 사건처럼 하나의 불가피했던 사건으로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위기에 처한 인명을 모두 구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더 많은 수의 인명을 구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지 않았다고 그들은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배가 침몰해 가고 있던 시점부터 줄곧 TV의 실황 방송을 지켜본 많은 시청자들이 어떻게 이런 식의 조난구조가 행해질 수 있단 말인가 하고 강한 의문을 공통적으로 품고 있었던 정황과 관련된다.대헤롯에 의해 죽은 아이들이 무구(無垢)했듯이, 그리고 히틀러나 아사아의 히틀러에 의해 죽어간 많은 이들이 무죄했듯이, 세월호 사태로 인해 죽어간 이들도 그러한 불행에 처해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고의적으로 그들을 수장시킨 것은 아니라고 보더라도, 결과적으로 그들이 수장이란 대학살의 지경에 처하게 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의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정부는 반드시 수행해야 할 것이다.
    • 연지골
    • 토요시평
    2015-04-23
  • 안식일교회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교회에는 삼위일체 교리나 교회론 등이 다르지 않은 데도 이단으로 몰리는 교회들이 있다. 정통파 교회 제도나 운영 형태를 반대한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교주우상주의나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를 달리 해석하는 집단이 아닌 한, 그 교회의 제도나 예배 형식 따위를 문제 삼아 이단이라 할 수는 없다.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거룩한 성찬이 행해지며, 성도의 교제가 있으면 그것은 곧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밖으로 드러나는 교회 운영 형태가 다르다고 하여 이단이라 하는 것은 옳지 않다.지난 주 안식일교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포럼이 있었다. 발제자들은 안식일교회가 성경과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를 부정하지 않는다며 이단이라 할 수는 없다는데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오히려 안식일교회가 기독교의 가장 보수적 교회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교회는 역사적 보편적 기독교의 역사를 대체로 부정한다. 로마교회가 교황주의를 채택한 이후 교리를 왜곡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안식일교회)는 역사적 기독교의 ‘일요주일예배’를 부정하고 ‘토요안식일예배’를 채택하고 있다. 또 전통적 보편적 기독교가 믿어온 ‘영혼불멸설’을 부정하고 ‘영혼멸절설’을 따르고 있다. 이는 가톨릭의 비성경적 교리를 개혁한 개신교도 아니고, 초대교회로 돌아간 환원파도 아닌, ‘제3의 교회’임은 분명하다.그러나 예배일을 주일을 중심으로 하든, 안식일을 중심으로 하든, 그것은 별 문제가 안된다. 그리고 영혼불멸설이냐, 영혼멸절설이냐 하는 것도 ‘부활신앙’에서 서로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적 논쟁의 대상일 뿐이다.그런데 안식일교회의 문제는 가톨릭교회는 두말할 필요도 없고, 개신교회마저도 형제로 여기지 않는 듯한 위험한 발언을 많이 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론에서 볼 때, 이것이 더 큰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피 아래 있는 자는 모두 ‘하나’의 형제이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범죄이다. 성경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마 5:22).
    • 연지골
    • 사설
    2015-04-23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