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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⑭ 지역사회 섬김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한국교회가 지역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외면과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먼저 이런 상황이 생긴 이유부터 규명할 필요가 있다.교회에 따라 그 이유가 다르겠으나 공통된 것은 교회의 이기주의와 나눔과 배려의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사회와 함께 가야 할 교회가 지역을 무시하고 이른바 ‘방주의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탐색초대교회는 지역중심이었고 영적인 면만 아니라 삶의 전영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래서 그 지역 기둥이었고 도덕적 푯대였다.이런 신령한 감화를 다시 찾을 수 없을까? 지역사회를 섬기며 신·불신 간에 강한 영향력을 나타내는 교회들이 되어졌으면 한다.필자가 경험한 일이다. 전주에 있는 제자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에 ‘사경회’(부흥회가 아님)를 한 주간 인도한 일이 있다. 하루는 낮공부 후 점심을 먹으려고 길을 가고 있는데 유치원생 같은 동리 꼬마들이 목사님을 향해 배꼽 인사를 하였다. 만나는 꼬마들 거의가 그랬다. ‘교회 유치부 아이들이냐?’고 하니 아니란다. 이 동리 아리들이란다.가슴이 찡했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아이들이 목사님께 배꼽 인사를 하는 광경, 그 교회가 그 지역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지를 볼 수 있었다. 사례의 탐구보수적 칼라가 강한 대구 시내에 장년 2백 명이 채 모이지 않는 교회가 있다. 교회 개척 12년의 어린 교회이다. 이 교회는 지역 사회와 더불어 나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옛 대구역사 뒤편에 칠성동에 소재한 온세상교회의 박노진 목사를 만났다. 그는 연구하는 목회자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시인이기도 하다.2007년 12월에 대구 동천동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2009년 4월에 칠성동 예배당을 구입하여 입당하였다.김남식(이하 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사역하지만 지난 10여년동안 ‘우리들의 행복한 고민’이라고 하니 감사하다. 여러 가지 할 이야기들이 많지만 지역사회를 섬김의 일에 집중해보자.박노진(이하 박): 풍족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받은 은혜와 복을 이웃과 함께 하는 ‘섬기는 본’을 보이고 싶어 우리들의 정성을 모았다.김: 구체적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하였는가?박: 칠성동 예배당으로 옮겨 와서 맞은 첫 가을에 우리는 ‘들국화가 있는 가을음악회’를 열었다. 이웃들에게 이사 와서 떡을 돌리는 마음으로 온세상교회의 존재를 알리고 이웃들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전하기 위한 자리였다. 노래의 가사처럼 ‘10월의 마지막 날’에 우리는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교회당 옆 공터에 무대를 꾸몄다. 여러 종류의 국화들을 전시하고 좋은 공연을 준비했으며, 함께 먹고 마실 음식을 마련했다. 특히 저녁으로 소머리국밥을 끓였는데 국화나 음악만큼 국밥 맛에 반했다.김: ‘들국화가 있는 가을음악회’라는 지역을 위한 섬김의 잔치에 어려움이 없었는가?박: 그 날은 바람이 많이 불고 무대 뒤로 오가는 자들이 많아 좋은 공연을 하기엔 불리한 환경이었다. 그러나 밤을 세워 무대와 잔치를 준비하는 우리들의 얼굴은 즐거움으로 가득찼다. 무엇보다 많은 이웃들이 마실 나오듯 찾아와 즐겼으며 공연은 그 내용과 분량에서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적절했다. 이미 동천동에서 가을을 맞을 때도 우리는 국화축제를 열었다. 가을에 어울리게 국화와 더불어 시화전을 열었다. 칠성동으로 오면서 우리는 음악회까지 더하여 그 규모를 보다 확장했다. 지역사회속으로 들어가려는 우리의 마음이 그만큼 더 간절해진 셈이었다. 화분은 교우들이 가져왔다. 교회당 안팎을 국화 화분으로 가득 채웠더니 칠성동의 가을이 온세상교회를 통해 퍼져나가는 듯했다.김: 교인들의 반응은 어떠했나?박: 들국화축제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무엇보다 행사에 드는 모든 비용을 교우들의 특별헌금으로 채운다는 점이다. 그리고 준비하는 시간이 잔치만큼이나 즐겁고 은혜스러웠다. 축제의 목적은 이웃들을 섬김으로써 교회의 문턱을 낮추는 데 있었다. 음악회를 하기 전에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며, 군밤 고구마 은행 등을 구워 먹으면서 축제의 분위기를 만들어간다.김: 어떻게 이런 계획을 하였나?박: 우리 온세상교회는 무엇보다 우리가 자리한 지역을 소중한 터전이라 여겨왔다. 교회는 모름지기 지역과 함께 호흡해야 한다. 지역의 기반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우리 지역의 이웃들이야말로 온세상교회의 존재 목적이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온세상교회의 지경이기도 하다.김: 이런 행사는 문제가 없으나 바자회 같은 것은 이웃 상권에 피해를 주지 않을까 우려도 된다.박: 그렇다. 바자회를 오랫동안 해왔으나 이웃 가게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공산품은 취급하지 않고 음식들을 주로 바자회 품목으로 정한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다. 그리고 이웃들에게 좋은 것을 드리고자 애썼다. 무엇이든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이어서 우리는 진짜를 가져다 팔고자 했다. 온세상교회를 통해 진짜의 맛을 본 사람들은 온세상교회가 진짜라는 인식도 더불어 가져주었다. 그랬다. 적어도 교회는 진짜를 줄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주고자 하는 복음은 진짜 중의 진짜가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믿을 만한 농산물만을 취급했고, 비싸게 사와 시중보다 싸게 팔았다.여름에는 들국화축제를 열던 공터에서 ‘한여름 밤의 영화’를 상영하는데 이때는 팝콘을 튀겨서 대접하니 이 또한 인기가 좋다. 기본에의 복귀많은 돈을 들여서 거창한 행사를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이웃을 섬기며 진짜 좋은 것 즉, 복음을 주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지역사회와 마찰하면서 교회가 성장하기 어렵다. 더불어 살고, 섬기고 나누며 사는 교회가 되기 위해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지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에 믿지 않는 이웃들에게 ‘떡 한 접시’ 돌리는 사랑의 실천이 그리워진다.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06-28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90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의 북왕국은 이미 아시리아에게 망하였고, 이제 바빌로니아가 남왕국 유다를 공격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예레미야 17장은 이러한 배경을 두고 여호와께서 유다의 죄를 지적하며 유다에게 내릴 심판을 기록하고 있다. 유다의 죄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부요 아들인 자들이 바알에게 제사하고, 여호와를 떠난 것이다(1-4).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죄악을 그들의 마음 판과 제단 뿔에 다이야몬드 촉으로 새겨 놓으시고, 유다에게 주셨던 유업의 땅을 빼앗고 이들을 이방 땅의 종으로 보내시겠다고 선언하신다.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갈 것을 미리서 선고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유다의 죄 목록을 나열하시며 이들이 받을 죄 값을 시의 형식으로 선언하신다. 5-11절은 그 형식과 주제가 시편 1편과 유사하다. 시편 1편이 의인과 악인을 각각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바람에 날리는 겨에 비유한 것이라면, 예레미야 17:5- 11은 여호와를 떠난 자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를 각각 사막의 가시덤불과 물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한다. 시편이 인생들의 현재 삶을 주로 다루는 것이라면 예레미야서의 시 귀는 인생들의 결말을 다루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들에서 흐르는 신학적 주제는 시편이나 예레미야서나 다같이 관계에 대한 것이다. 시편에서 시인은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를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하며, 그는 결국 여호와께서 아시지만 악인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아서 결국은 망할 것이라고 말한다. 개역 성경에서 “인정하다”고 번역하는 히브리어 “야다”()라는 말은 우리 인간들 사이에 가장 가까운 관계, 부부 간의 성관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항상 묵상하는 사람과 마치 부부와 같은 관계를 가지시겠지만,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시류를 따라 사는 사람은 결국은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씀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의인은 하나님과 인격적이며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사는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악인은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뿌리가 없다. 정함이 없다. 자기의 분명한 인생철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시류를 따라 떠도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예레미야서는 1-4절 서론에서 여호와께서는 유다와 맺어 온 그동안의 관계를 하나님께서 끊겠다는 것을 선언하신다. 유다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더불어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언약의 백성이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이나 노예생활을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출하여 홍해를 건너 시내 산으로 데려와 이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는 언약을 맺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언약을 통하며 하나님과 백성,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관계로 비유하고, 해석하고, 그러한 관계를 염두에 둔 생활을 해왔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왕이신 여호와의 백성, 여호와의 신부, 여호와의 아들이 된 셈이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고 보호하시는 일을 하셨으며, 이스라엘을 신부로 맞았기 때문에 신랑이 신부에게 살 거처를 마련해 주는 것처럼 가나안 땅을 그들의 새로운 거처로 주셨으며, 또한 바로의 노예, 이스라엘을 아들로 삼으셨기 때문에 마치 아버지가 자식에게 자기 유산을 물려주듯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유산, 상속 재산으로 물려주시고 그들을 유업의 백성 (기업의 백성), 가나안 땅을 유업의 땅(기업의 땅)이라고 부르셨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관계를 잘 유지하고, 더 돈독하고 견고하게 발전시켜야 할 의무를 가진 사람이 된 것이다.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아내로서 정절을 지키며, 아들로서 아버지의 명예를 더욱 영광스럽게 했어야 했다.그러나 본문의 서론을 보면 이들은 하나님의 명을 거절하고, 높은 산 푸른 나무 아래 제단을 만들고, 아세라 기둥을 세웠다. 아세라는 가나안의 가장 영향력이 큰 바알 신의 아비, 엘(El)의 아내이다. 이들은 모두 가나안 땅의 번식을 주장하는 신으로 알려졌다. 유다는 그의 신랑 되신 여호와를 버리고 아세라를 따라 간 것이다. 신부로서 음행을 저지르고 반역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가 유다에게 준 유업을 빼앗고, 그들이 알지 못하는 땅으로 쫓아내서, 그곳에서 종노릇하게 할 것을 선언하신다(17:3-4).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으로부터 땅, 곧 유업을 뺏는다는 것은 시내 산에서 유다와 맺은 언약을 철회하여 신부에게 주었던 거처를 빼앗고, 그들에게 주었던 유업, 곧 유산을 철회한다는 의미이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는 이혼서를 가지고 아비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며, 입양 관계가 깨진 아들은 그의 본 신분인 종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선택하시기 이전의 상태로 돌려보내시는 것이다.이러한 신학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본문 예레미야서를 보면 여호와께서는 그를 떠나 아세라를 섬기는 자들을 향하여 저주를 받고, 사막의 가시덤불 같이 되며, 소금 땅에서 살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시내 광야나 네게브 지역은 광활한 모래 자갈밭이다. 식물이 살 수가 없다. 나무도 없고, 풀도 없다. 몇 키로 사이에 사방 2-3m 넒이의 가시덤불이 듬성듬성 나 있을 뿐이다. 이런 곳에는 어떤 생물도 살기 어렵다. 소금 땅이란 사해 근방의 땅이 암염으로 이루어진 계곡, 절벽 등을 말한다. 사해는 빗물에 소금이 씻겨 그 염도가 유지되고 있다. 앞으로의 유다의 운명이 바로 이러한 가시덤불과 같이 되고, 소금 땅에 사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들이 여호와께서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며 자기의 온갖 욕심을 다 채웠지만 그들을 여호와를 떠났다. 시류를 따라 자기 욕심을 채우고 산 사람들이다.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자고새에 비유하신다. 자고새는 가을이면 사해에 몰려드는 꿩과의 새인데 알을 많이 낳아서 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새가 남의 알을 훔쳐다 품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의 재산이나 재물을 빼앗아 부자가 된 자를 바로 이 자고새에 비유하는 데, 자고새의 새끼들이 자라면 품어준 어미의 품을 떠나 버리듯이 불의한 자들의 재물도 결국은 다 빠져 나갈 것이라는 말씀이다. 사막의 가시덤불과 같은 인생들의 말로를 가리키는 말씀이다.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신실하게 충성된 사람은 어떤가?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했다. 그 뿌리를 시내까지 뻗어 더위가 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잎사귀가 푸르고 가문 해에도 염려 없이 열매를 맺기를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17:7-8). 시편에서는 이러한 사람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비유하고, 궁극적으로 여호와께서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시편이나 예레미야서나 다같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시류를 따라 사는 사람은 결국 사막의 가시덤불이나 소금 따에서 죽어가는 인생들처럼 망하게 될 것이며, 반면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께서 그를 알고, 그가 하나님을 아는 깊은 언약적 관계 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 아세라 상을 세워두고, 자고새처럼 살아간다. 시류를 따라가며, 죄를 사모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심장을 살피는 자라고 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이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부패하다고 선언하신다(9, 10). 우리는 우리의 속마음을 감출 수 없고, 우리의 깊은 생각을 숨길 수 없다. 무엇이든지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밝혀지지 않을 것이 없다. 비밀이 있을 수 없고, 죄가 들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운명이 마치 사막의 가시덤불 속에서 살아가는 인생 같다. 언젠가는 소금 땅에 버려져 썩지 않는 송장이 될 것 같다. 이러한 절박한 가운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시여 저를고치소서!”하고 매달린다(14). 여호와 하나님만이 병들고 부패한 우리를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기에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간구한다(14). 시편의 의인은 궁극적으로 말씀이신 예수님께 뿌리를 내리고 예수님과 띠를 띠어 새 언약적 관계에 들어간 자를 의인이며 복 있는자라고 했다. 예레미야도 여호와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 말하자면 시류를 따라 아세라를 따르지 않는 자를 복 있는 자라고 말한다. 예수님과 언약적 관계를 맺고 그 안에 거하는 자만이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열매 맺기를 그치지 않을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6-21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⑬ 교육선교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130여년전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여 헌신적으로 사역하였다. 초대 선교사들은 교회를 세워 복음을 전파하고,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며, 병원을 세워 병든 자를 치료하였다.이 세 가지 선교방법론은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모델이 되었다. 교회 외에도 선교사들이 세운 이른바 ‘미션 스쿨’(Mission School)은 한국 근대 교육의 발판이 되었다.이러한 모습이 그리워지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 교회들이 폭넓은 사역보다 자체 교회에만 집중하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문제의 탐색한국교회가 개교회주의에 빠져 교회당 건축에 힘을 쏟고, 그 다음에는 교육관, 수양관의 건립 등에 온 정성을 쏟느라고 교육이나 이웃을 돌보는 일에 외면한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몇몇 교회들이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학교를 설립하여 성공적인 열매를 거두고 있음을 본다. 동산교회나 광주동명교회가 대표적 사례이다.일반 교육이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교육에 집중하고 있고 그 부족한 부문을 채우기 위해 학원교육 이른바 사교육이 교육을 주도하고 있다.이러한 여건으로 인해 이른바 미션 스쿨은 창학이념을 상실하고 일반교육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반작용으로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학교들이 세워지고 있다. 그것도 큰 규모가 아니라 소규모의 대안학교 형태로 세워지고 교육선교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사례의 탐구큰 교회도 아닌 곳에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가고 있다. 경기도 안양에 있는 은혜교회(정진모 목사)에서 2013년에 그레이스국제크리스천학교(Grace International Christian School·이하 GICS)를 세웠다. 그 교회 정진모 목사를 만났다. 김남식(이하 김)):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학교를 운영하느라고 고생이 많을 줄 안다. 먼저 교회의 배경부터 설명해 달라.정진모(이하 정): 부산 브니엘고등학교를 나오고 고신대학교와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의 길에 헌신하였다. 1980년에 평촌 들판에 15평 비닐하우스에서 교회를 개척하였다. 이 일대가 모두 들판이었고 교회가 없는 무교회 지역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배당을 건축하고 성장해 나갔으나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그 일대가 개발되어 교회당이 수용되었다. 1993년에 종교부지를 분양받아 지금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김: 교육선교에 언제부터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정: 교회 개척 때부터 어린이 집을 운영하였다. 신학교 때 제자훈련을 받기도 하고 전도운동을 실천하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새세대를 바로 키워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고, 교회, 가정, 학교가 하나가 되는 산교육을 하고 싶었다.김: 이 학교의 교훈이 ‘Coram Deo’ 즉 ‘하나님 앞에서’인데 여기에 학교의 정신이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기독교 세계관을 통한 바른 성경적 교육이라고 보는데 학교의 교육방향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정: GICS의 교육방향은 세 가지로 정의된다. 첫째, 지성교육이다. 우리나라 언어와 역사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국어, 국사 과목과 예체능을 제외한 모든 과목을 영어로 집중 교육하고 있으며, 영어학습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튜터링을 마련하고 있다. 비인가 학교지만 대학 진학과 해외유학을 위한 교육과정은 미국 대학 입학 사정요소 13가지를 모두 갖춰 준비돼 있다.둘째, 전인적인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한 영성교육이다. 매일 채플시간, 수요 저녁예배, 주일성수를 가장 기본 수칙으로 내세우면서 별도의 바이블 클래스를 마련해 성경과 교리교육에도 힘쓰고 있다. 이 밖에도 매일 개인 말씀묵상은 물론, 주 1회 새벽기도회, 매일 그룹 저녁기도회, 목요일 학교기도회, 연2회 국내외 비전트립을 통해 장·단기 선교훈련, 매 학기 시작과 종료 시 외부강사 초청 부흥회 등 다양한 영성교육 프로그램으로 학생의 영성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셋째, 인성교육 역시 중요시하는 부분이다. 방과후 활동을 통해 1인 1악기, 스포츠, 서예, 예절교육 등 학생의 재능 계발과 정서 안정을 도모하고 있으며, 인근 양로원 등 지역사회 봉사활동도 매주 진행되고 있다.김: 이런 교육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남다른 노력이 있어야 할 줄 안다. 교육을 해보니 실제적으로 무엇을 절감하는가?정: 지성·영성·인성 교육이 조화롭게 이뤄질 수 있는 까닭은 교사와 학생 간 멘토링·코칭이 가능한 소규모 학습지도다. 교사 한 명이 5명 내외의 학생을 지도하다보니 사제지간을 넘어 가족 같은 수업 분위기가 조성되고, 남모를 고민도 수이 털어놓을 수 있는 영적 가족이 된다.그야말로 학교가 교회가 되고, 가정이 되는 것이 목표이다. 실제교육을 담당하는 정성 교장은 “학교는 시설도 중요하고, 커리큘럼도 중요하지만 결국 선생님이 전부인 것 같다. 어떤 선생님이 어떤 마인드로, 얼만큼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아이들을 대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며 “GICS의 교사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이며 삶이 전수되는 기독교 교육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김: 학교를 운영하기 위해서 시설도 중요하다. 지금 보니 학교가 교회이고 교회가 학교인 것 같다.정: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고, 더 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학교를 꾸려가고 있다. 현재 학교 시설들도 그가 담임하고 있는 은혜교회 건물을 활용하고 있고, 심지어 주일 예배가 드려지는 예배당은 마루바닥을 시공해 농구장 겸 체육관으로 꾸며놓았다.교회 성도들도 다음세대를 위해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하고 있다. 특히 일주일에 한 번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한 예배당을 리모델링해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고 운동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어 감사하다.김: 실제로 학생들의 변화와 성장이 있어야 대안학교로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정: 아이들이 학교에 와서 전반적으로 좋아졌다. 공부를 못하던 아이는 공부에 흥미를 갖게 되고, 함구증을 앓던 아이는 학교에 와서 금세 마음의 병을 고쳤다. 공교육에서 1, 2등을 도맡아 했지만 삶에 희망이 없던 아이도 이곳에서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긍정적인 변화는 “오직 예수님 덕분”이다.아이들의 믿음이 자라고, 학습태도가 변하니 따로 홍보하지 않아도 학부모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돌았다. 특히 외국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기독교 교육을 위해 자녀들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GICS는 전문사역자와 연결하여 인근 지역인 안산 다문화가정 자녀들에게도 기독교 교육의 기회를 나누고자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다.김: 삼 형제가 모두 목사인 정 목사의 사역은 귀한 도전이다. 이 꿈이 이루어지기 바란다.정: “목회를 하면서 다음세대에 대한 꿈을 꾸었다. 한국교회에 교회학교가 사라지고 미래가 없어진다는데 어떻게 하면 조국의 교회를 살리고 인재를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끝에 GICS를 설립하게 됐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관심이 필요하다(WWW. gicshool.org). 기본에의 회귀초대 선교사들처럼 우리도 진정한 기독교 학교를 세워보자. 우리 교회의 웅장한 예배당과 교육관은 한 주에 몇 번 사용하는가? 한 교회가 아니면 지역교회들의 힘을 모아 학교를 세우자. 대안학교 형태로 시작하여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이루게 하자.이것이 하나의 꿈일까? 옛 개혁자들의 정신, 초대 선교사들의 비전을 오늘의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시대적 사명이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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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기획
    2018-06-20
  • 학술/ 한복협 6월 월례회 ‘남북/북미 정상회담 이후 통일선교 방향’
    본고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지난 6월 8일 서울 영락교회에서 진행한 6월 월례회에서 박종화 목사가 발제한 ‘새로운 통일선교전략 방향’의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 1. 평화의 때 도래기독교인들은 역사적 상황의 변화를 단순히 예측가능한 시대사적 내지 역사현실의 변화의 틀에서만 보지 않는다. 역사의 궁극적인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믿는 신앙고백의 입장에서 시대사의 흐름과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개입의 징조(Kairos)를 간파한다. 1988년 하계 올림픽이 서울에서 평화의 축제로 열렸었다. 그 이전 1984 LA 올림픽은 미국과 소련을 정점으로 하는 동서 양진영의 핵무장 경쟁을 비롯한 냉전대결이 최고도에 처한 상황에서 동구권 국가들이 집단으로 불참한 반쪽축제였었다. 하지만 88 서울올림픽에는 전 세계 각국이 모두 참여했다. 이 올림픽이 지나고 1989년부터 시작하여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이 집단 몰락했고, 분단된 독일은 통일을 성취했다. 이를 우연의 특이한 역사발전 정도로 평가하기에는 역사적 반등과 반전의 폭과 깊이가 너무도 컸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개입의 현상을 목도한다. 독일통일은 바로 이런 역사변혁의 물결에 능동적으로 동승한 결과이며, 급기야 지루했던 적대적 냉전구조는 세계사적 차원에서 일단 종식되고 말았다. 2. 독일통일에 기여한 독일교회의 교훈 동서독 교회는 지역단위 또 개 교회별로 자매결연을 맺고 동독교회의 예산의 거의 절반정도를 서독 측 교회가 지원했다. 17년간 총 56억 DM(약 33조원)을 지원한 셈이다. 절기만 되면 버스나 트럭에 온갖 선물꾸러미를 가득 싣고 서독 측이 동독 측을 방문했다. 이미 라디오와 TV 시청이 양 독 정부 간에 합의된 터라 동독 사람들은 서독의 현실을 알게 되었고, 특히 매체들의 가전제품이나 각종 문명의 이기들에 대한 상품광고가 호기심도 자극했다. 동독 땅을 지나 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고속도로를 서독측이 닦아주고도 통행료는 동독 측이 꼬박꼬박 챙기는 실리를 주기도 했다. 물론 통행의 주인공은 거의 서독인들 이었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서독의 침묵하는 손길이 동독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사실이다. 서독 사람들의 동독방문은 자유로웠다. 하지만 동독인들의 서독방문에는 상당한 제한이 있었다. 일례를 들면 동독에서는 연금과 생활보조를 줄이려고 노인 이산가족의 서독방문을 허용하면서 가능하면 동독에 돌아오지 말고 서독에 계속 머물러 살라는 분부까지 했다는 말을 당사자들한테 직접 들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노인들은 두고 온 식구들이 그리워 거의 다 동독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하지만 노동력이 활발한 젊은이들은 어쩌다 귀한 서독 방문기회를 얻으면 서독에 주저앉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방문 전 반드시 돌아온다는 서약을 했는데도 말이다. 1989년이 시작되면서 동독 측에도 변화의 물결이 급격하게 생겨났다. 라이프치히 시내의 복판에 있는 <니콜라이 교회>(Nicholaikirche)를 중심으로 월요일 저녁마다 촛불을 손에 들고 평화기도회를 개최했었다. 점점 인파가 불어나기 시작했다. 동독의 비밀경찰과 안보요원들의 이상한 기류를 직감하고 감시와 방해공작을 했다. 그런데 방해하면 할수록 인파가 늘었다. 충돌하면 할수록 더 늘어났다. 당의 핍박은 이들을 오히려 강한 의식화와 단결로 내몬 것이다. 이 소식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동베를린을 비롯한 큰 도시의 교회들을 중심으로 평화촛불 기도회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까지 엄청난 속도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촛불집회가 계속되었다. “우리가 독일민족”(Wir sind das Volk)이라는 구호로, 곧 분단 속에서도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닌 민족으로 출발하더니, 나중에는 “우리는 이제 한 민족”(Wir sind ein Volk)이라는 통일지향의 민족적 일체감을 표출하는 것으로 발전되기 시작했었다. 독일주변 4강 점령국들이 나중에는 통독에 합의하는 쾌거가 있었지만, 동서독 국민들의 마음속에 이미 내적통일이 싹으로 자라나기 시작한 셈이다. 평화에의 열정이 뜻하지 않게 등장한 통일이라는 그릇을 채운 셈이다. 사실 필자는 무너진 베를린 장벽을 중심으로 인산인해를 이룬 양독 시민들이 운집한 가우데 독일인들이 사랑하는 음악가 베토벤의 교향곡 9번에 나오는 “기쁨의 노래”(Ode zur Freude)를 “자유의 노래”(Ode zur Freiheit)로 가사를 바꾸어 오케스트라와 합창으로 천지를 울리던 장면을 기억한다. 통일 자체도 반갑지만 통일이 가져다준 “자유”가 더 반가웠던 가보다. 1989년 12월 24일 성탄절 전야제의 광경이었다. 3. ‘평화 공존’ 살기 평화공존 시대의 선교와 교류협력에는 몇 가지 견지해야 할 것들이 있다. 먼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말은 북한에는 주체 사상적 공산체제가 지배하며, 남한에는 자유민주체제가 지배함을 부정하지 말고 인정하자는 것이다. 공존은 바로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는 바로 남한교회의 공식적인 접촉의 파트너인 <조선 그리스도교인 연맹>이 남한 교회와 성격과 구성이 “다름”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동독교회는 과거에 스스로를 사회조의 체제에 “귀속되는” 교회(church of socialism)도 아니고, 사회주의 체제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church for socialism)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사회주의 체제 “속에 몸담고” 살지만 정체성은 주님의 몸으로 산다는 (church in socialism) 자기고백을 천명했고, 서독을 비롯한 세계교회는 이를 수용했다. 북한의 <연맹>도 또는 어떤 형식의 미래교회도 이런 성격으로 이해함이 바람직하리라고 본다. 다만 남한교회에도 해당하지만, 북한교회의 경우에도 일단 교회의 모습을 띠고 사는 한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 자신의 구원의 역사를 자신의 방식대로 이루어 가시리라는 확신은 공유해야 한다고 믿는다.이렇게 보면 북한을 향한 남한교회의 선교계획은 평화 공존적 틀로 바뀌어야 한다. 그것은 남한교회 식의 교파분열은 결코 북한에 유입되거나 추천될만한 틀이 아니라는 점이다. 교파교회가 아니라 북한식의 “연합교회”가 가능하며 또 바람직함 모델이다. 교파중심의 분열된 선교방식 역시 불식되어야 한다. 분단 자체도 불식의 대상인데, 분단 속의 또 다른 교파분열은 당연이 불식과 극복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사회적 현실에 적합한 선교 모델은 북한이 외형과 체제상으로 갖추고 있는 “마을별 복지체제”를 선교협력의 실천적 장으로 삼자는 것이다. 예컨대 200여개의 군마다 있는 보건소를 실제로 주민건강을 돌볼 수 있는 내실 있는 보건소로 회복시켜주는 디아코니아 선교 말이다. 여기에 탁아소, 모자보건 진료소, 유치원, 학교 등등의 복지시설의 내실을 채워주고 운영을 지원함으로서 진실로 민생중심의 선교봉사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연관 속에서 영적 보살핌과 훈련을 담당할 소위 “복지 중심의 교회”를 북한 지역과 합의하여 거부감 없이 다양하게 설치해 갈 수 있으리라 본다.또 하나 대북 선교지원의 문제이다. 적어도 지역단위별 선교지원이 기본적인 틀이라면, 지원의 기본정신은 공여자의 뜻이 아니라 수혜자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그동안 모든 지원과 협력에 있어서 갑을관계 내지 주객도식은 과거의 식민주의적 방식으로 의롭지도 않고 효율성도 없음이 판명되었다. 이것이 바로 북한과의 교류협력에서 특히 중시해야할 요목이다. 동시에 지원은 그 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현금이 아닌 “현물” 내지 “물품”으로 해야 옳다는 점이다. 동시에 비상의 고난 상황을 고려하여 “물고기”를 제공하는 것은 좋으나 가능하면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고 지원하는 “기술”과 “자본”의 투자가 더욱 중요하다는 점이다. 지원이 의존을 낳기 보다는 자립을 지원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지원 속에 “평화 만들기”가 실체화 되며, 통일을 부분적으로나마 부분적으로 나마 미리 맛보고 나누는 것이 된다. 곧 인도주의 차원의 교류협력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설령 정부 당국끼리의 부정적 대결과 갈등의 상황에서라도 인도주의 지원은 “단절 속의 연속”의 모습으로 지속되어야 한다. 이 교류협력은 상대가 북한의 백성이다. 북의 체제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에도 “체제”의 희생양인 백성을 도와 마음을 사고 결국에는 통일을 위한 협력 축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눅 25-37)에 나오듯이 “강도만난 동포”를 돕되, 이념과 교조주의에 충실한 레위사람이나 제사장처럼 “체제가 싫기 때문에 ‘골치 아파!” 하며 도피하지 말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체제갈등에도 불구하고, 또는 체제는 싫지만, “희생당한 동포의 사정이 너무도 가슴 ‘아파’!” 하며 선을 베푸는 신앙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 해설/기획
    • 학술
    2018-06-20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89
    한국의 5월은 온통 축제가 몰려있는 달이다. 어린이 날, 어머니날, 어버이날, 그리고 부부의 날 등 가정과 관련된 기념일 내지 축제일이 다 5월에 있다. 그래서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정에 대한 기독교적 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바른 가정, 바른 사회를 이루려면 무엇보다 가정이 바로 서야 한다. 가정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고, 성경적인 가정관을 바로 확립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만드시고 가장 나중에 가정을 창조하신 것을 보면 가정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 가운데 그 크라이막스요 그 종결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을 창조하기 위하여 세상을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 같다. 첫째, 가정은 하나님께서 창설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인이시다. 창세기를 보면 가정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만드신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이들을 짝지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이들이 하나가 되도록 묶어 가정을 이루게 하신다. 따라서 가정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정의 주인기 때문에 거룩하고, 소중한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가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면서 꼭 전제하고 믿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정을 나의 것이다. 혹은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나게 되었든지, 또 어떤 배경의 사람과 만나서 가정을 이루었든지 그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맺어 주시기 위하여 예비하시고 준비하신 섭리의 손길이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만나서, 우리가 좋아해서, 우리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결혼은 하나님이 맺어주시고, 짝지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맺어 주시기 때문에 아무리 저 사람과는 결혼 안해야겠다고 맹세해도 결국 그 사람하고 결혼하게 되고, 저 사람 아니면 못 산다고 아무리 매달려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결혼은 안 되는 법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세우셨다고 믿는 믿음으로 가정생활을 해야 한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가정을 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또한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남의 가정에 손을 대고, 가정을 위태롭게 하고, 위해를 가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가정 파괴범이 하나님을 대적한 가장 큰 죄인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러기 때문에 거룩하게 지키고, 소중하게 가꾸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가정만은 지키고 남의 가정만은 손을 대서는 안 된다.둘째, 가정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언약적 구조를 가진 유기적 조직체로 만드셨다. 가정은 남자와 여자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혼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남녀가 하나님 앞에서 서로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살 것을 약속하고, 계약을 맺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동성애의 결혼이란 있을 수가 없다. 동성애나 동성결혼은 동물의 세계에도 없는 일입니다. 동성연애는 성경에도 언급되고 있지만 그러한 자는 다 죽이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죄악 중에 죄악이 동성연애이고 동성 결혼이다. 세상의 윤리와 도덕과 창조의 질서를망치고, 가정을 망치고, 나라를 망치고,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짓이다. 스스로 망한는 짓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짓이다.남녀가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어 가정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 가정은 바로 언약적 체계와 구조를 가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에 위로 하나님이 계시고, 사람이 있고, 그리고 다음에 만물이 있어서 이 안에 언약적 대표성과 연대성이 이루어지듯이 가정에도 이러한 조직과 질서가 있다. 가정의 주인이 하나님이기 때문이 제일 높은 자리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리고 남편이 아담처럼 하나님의 가정에서 하나님을 대신한 가정의 대표자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남자를 여자의 머리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대신한 가정의 주인이 바로 남편이고 아버지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아버지가 대표자가 된다. 여자나 어머니가 하나님 앞에서 가족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언약적 구조상으로 볼 때, 여자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돕는 배필로서의 역할을 잘 못 했을 때 온 세상이 하나님의 언약적 저주와 심판을 받게 되었듯이 가정에서도 여자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여자는 남편과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에 남편과 함께 가정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정에 두 머리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남자가 머리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질서이다. 가정의 비극은 여자가 남자의 머리가 되려고 할 때 시작된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만드셨다. 그리고 여자의 창조는 가정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여자는 가장 나중에 창조된 존재이다. 말하자면 창조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의 크라이막스이고 창조의 완성이다. 그래서 여자는 중요하고, 특별하고, 신비로운 존재이다. 그러나 그 역할은 다르다. 그래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아담은 그 아내를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라고 했다. 사람이 살이 없고 뼈가 없는 데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살과 뼈는 불가분리의 유기적 조직체이다. 따라서 부부는 살과 뻐처럼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라는 이 같은 일체성을 나누어서 생각하고, 나누어 대하고, 나누어서 취급하려는 자체가 잘 못이다. 남녀의 우열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 못이고 죄이다. 가정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하는 언약적 유기체이다. 그래서 위에서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대리로서 주인 역할을 하는 아버지가 있고, 그 밑에 자녀들이 있다. 하나님은 아버지에게 주인의 역할을 위임했다. 부모와 자식들은 하나님 앞에서 언약적 연대성을 이룬다. 부모는 자식들을 양육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도록 훈련을 시키고 가정의 질서를 지키도록 지도해야 한다. 어머니의 역할은 이 점에서 중요하다. 아버지와 남편의 역할은 가정의 주인으로서 모든 면에서 가정을 지키는 것이다. 생계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책임은 남자에게 있다. 자녀들의 훈련은 어머니에게 있다.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가정이 바로 하나님의 것이고, 실제적으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의 주인 노릇을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 가정은 바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을 항상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성전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있어야 한다. 가정에는 가정 예배가 있어야 한다. 아버지는 바로 제사장이다. 아버지가 되려면 먼저 가정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노아, 아브라함, 욥,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 등등 무릇 성경의 경건한 사람들은 다 하나님께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고대 근동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여호와를 섬기지 않았더라도 집안의 특별한 곳에 신상을 놓고, 그들이 섬기는 신에게 매일 아침이나 저녁에 절하며 제사나 예배를 드렸다. 야곱의 외삼촌 라반의 집에는 가신 드라빔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우리 가정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아버지가 하나님을 대리한 가정의 머리이고, 우리가 모두 한 가정의 피를 나눈 가족이자 하나님 앞에서 언약적 유기체라는 것을 확인하며,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며,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 가정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음을 고백하고 함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가정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 가정을 다스리며, 지키시고, 인도하신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그 속에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신다는 의미에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정이 바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가정은 구별되어야 하는 성전이다.셋째로 가정은 사랑의 도가니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가정을 창조하신 목적은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생육이라는 것은 낳고 기른다는 말이다. 자식을 낳고, 길러서 온 땅에 번성하라는 것이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들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하여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사랑의 씨를 주시어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게 하셨다. 그래서 가정의 1차적인 목적은 자식을 낳는 것이다. 자식을 낳되 많이 낳으라고 하셨다. 온 땅에 충만하게 낳아야 한다. 부모는 자식을 낳기만 하면 안 되고, 낳고 길러야 한다. 생육하라는 말씀은 낳고,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고, 훈련시켜 사람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사람은 교육이 없으면 짐승보다 못하게 된다. 짐승들도 다 자기 자식들 먹이고, 훈련하고, 교육시킨다. 사람은 자식을 육신적으로 성장하고,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훈련을 시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서 자라게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훈련시키는 것이다. 부모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연습을 시키고, 훈련을 시켜야 한다. 따라서 가정은 사랑의 훈련원이요, 사랑의 샘, 사랑의 도가니라고 할 수 있다. 가정에는 든든하 아버지의 울타리가 있다. 그리고 가정에는 항상 감싸주시고 품어주시는 어머니의 사랑이 있다. 곰 새끼들이 잠자는 어미 곰의 품 안에서 함께 잠자고 있는 모습이 바로 우리 가정의 모습이다. 아무리 밖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집에만 들어오면 맺었던 분노와 한과 상처와 좌절 등이 눈 녹듯이 녹아버리고 평안이 스며드는 곳이 바로 어머니가 계시는 가정이다. 그래서 마음이 새로워진다. 가족들의 사랑 때문이다. 가족들의 사랑이 사람을 살리고 새롭게 한다.우리가 가정을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살 때 우리는 가정에 대한 소중함과 거룩함과 책임감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다. 가정은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성과 연대성 가운데 이루어진 유기적 조직체이다. 따라서 가정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동거하고 계심을 의식하고 살아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6-08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⑫ 미자립 교회 전도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한국교회의 70% 정도가 미자립 교회라는 통계에 우리는 당혹하고 있다. 수많은 교회들이 개척되고 있으나 자립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야기들을 자주 듣는다.어느 개척교회 목사는 그의 꿈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란다. 눅눅하고 곰팡이 냄새나는 지하 예배당에서 벗어나 햇빛을 맞을 지상으로 올라가는 것이 그의 소원이 되고 있는 우리의 우울한 현실이다.문제의 탐색수많은 미자립 교회를 우리는 외면할 것인가? 사람들의 관심은 초대형 교회에만 쏠리고 교회의 규모와 재정 상황이 목사의 등급과 직결되는 세태 속에 미자립 교회의 몸부림을 볼 때 마음 아프기 그지없다.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작은 교회 살리기’라는 주어진 현안에 대해 땀과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형편은 그리 녹녹하지 않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미자립 교회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 누가 여기에 정답을 줄 수 있을까? 이 사역을 위해 몸부림치며 헌신하는 한 전도자를 만났다.사례의 탐구미자립 교회를 돕는다고 하면 도시의 큰 교회들이 매달 얼마를 지원하는 정도로 이해하고, 더 나은 것은 여름방학에 대학부나 청년부 회원들이 농어촌 교회를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하는 정도이다.이러한 여건 속에서 지방 소도시의 작은 교회가 자기들 보다 더 어려운 교회들을 지속적으로 돕는 헌신적 사역을 하고 있는 교회가 있다.전남 여수시의 변두리에 있는 참소망 교회 이양희 목사를 만났다. 그 교회의 사역을 들어본다.김남식(이하 김): 귀한 사역을 하고 있다. 교회가 크지 않는 상태에서 더 어려운 교회들을 위해 ‘미자립 교회 전도’를 하고 있는 데 감사한다. 교회의 규모부터 소개해 달라.이양희(이하 이): 우리 교회는 여수 변두리에 있는 작은 교회이다. 출석교인이 장년 150명 정도이고, 학생이 100명 정도이다. 겨우 자립하는 정도이다.김: 이 목사는 그 교회에 언제 부임하였으며 그 전에 꿈꾸던 것이 무엇이었나?이: 저는 2011년 1월에 이 교회에 부임하였고, 2014년 4월에 현재 예배당을 구입하였다. 원래 통합측 교회였는데 다른 데 큰 예배당을 신축하여 이사하였기에 그것을 인수하였다. 우리 교회는 ‘전도의 생활화’를 목표로 삼고, 저부터 시작하여 어린 주일학생까지 이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김: 이 목사의 신체가 탄탄한 데 무슨 운동을 하였나?이: 저는 태권도 선수 출신으로 태권도 8단이다. 덕소고등학교 태권도부 감독을 하였다. 믿지 않는 가정에서 처음으로 믿은 것이 감사하여 태권도 선교사로 외국에 가서 헌신하고 싶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전도자로 부르셔서 사용하여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외삼촌이 합동측의 박호봉 목사(예수제자훈련원)인데 집안 어른이 목회자여서 감사하다.김: 이렇게 전도사역에 헌신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명이겠지만 교회에서 스승에게 전수받은 것도 있지 않는가?이: 내가 무엇을 알겠는가? 신학 공부를 하고 합동측 신일교회에 전도사를 시작하여 여러 교회를 섬겼다. 다들 감사하고 소중한 스승이지만 안양 동부교회 김동권 목사님 아래서 12년간 부교역자를 하면서 ‘전도의 생활화’를 배우고 그것을 흉내내어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김: 미자립 교회 전도를 시작한 계기가 무엇인가?이: 여수에 부임해서 보니 너무나 어려운 교회들이 많았다. 교회가 영세하고 교인들의 노령화 현상이 심화되니 교회 유지도 어려운 상태이다. 이들을 도와야 되는데 우리도 가진 것이 없으니 우리 몸으로 돕자고 하여 미자립 교회 전도를 시작하였다.김: 구체적으로 어떻게 추진하고 있는가?이: 우리 주변의 대상 교회를 지정하고 그 교회와 또 다른 협력교회와 함께 사역한다. 매월 1차 월요일에 그 대상 교회 주변에 예비 전도활동을 한다. 그 다음 2차 월요일에도 예비 전도를 계속한다. 3차 주간에 1박2일로 그 지역에 집중 전도를 실시한다. 그러니 이 일을 매월하고 있다.김: 1박2일의 전도사역에 참석하는 인원과 경비는 어느 정도인가?이: 우리 교회에서 전도팀에 참석하는 사람은 매회 20〜30명 정도이고 동참교회까지 합하면 40〜50명 정도가 된다. 전도지는 교회가 준비하고 숙식비는 자비량으로 한다.김: 이런 전도사역에 대해서 반응은 어떠한가?이: 농어촌 지역에 40〜50명이 집중 전도를 하니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전하는 것이 복음뿐이고, 결신자들을 지역 교회로 인도하니 지금은 전도팀을 요청하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다.김: 참으로 귀한 사역을 하고 있다. 이 목사의 사역은 ‘작은 교회도 전도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계속하여 이 일을 하기 바란다.이: 우리는 가진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으나 복음전도는 가능하리라고 본다. 하나님이 힘주시는 한 계속하여 이 사역에 충성할 것이다.기본에의 회귀미자립 교회는 힘이 부족하다 보니 의기소침하여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좌절하거나 다른 곳의 도움을 바라보게 된다.‘어려운 교회가 어려운 교회를 돕는 사역’은 가능하다. 이것은 물질로서가 아니라 복음전도로서 가능하며 여수 참소망교회가 이것을 실천하고 있다.수많은 미자립 교회를 살리는 길은 물질적 지원이 아니라 복음전도에 있다. 다른 교회의 전도 지원은 그 교회를 깨우는 각성제가 된다. 그리하여 누구의 도움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나게 된다.‘미자립 교회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전도를 통하여 영혼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며, 지역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전도는 우리의 사명이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전파하자. 생명의 주님을.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06-08
  • 특별좌담회 : 한국교회 평신도운동 어디로 가고 있나?
    각종 직장선교회 등과 교류… 친목단체 넘어 선교공동체로 지향돼야 한국교회에서 ‘평신도’는 언제나 조연이었다. 철저히 목사가 중심된 한국교회에서 평신도의 역할은 늘 목사를 보좌하고, 목회활동을 지원하며, 일방적인 존경을 보내야 하는 군중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스스로 주인공을 자처하는 목사들이 이끈 한국교회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하다. 불과 100여년만에 교단은 300여 개로 분열됐고, 근래 이르러서는 분열된 교단을 하나로 모아 연합활동을 하자는 취지로 만들었던 연합단체들도 줄줄이 분열하기에 이르렀다. 이 모두를 목사들의 탓으로 떠넘길 수만은 없지만, 한국교회 역사가 철저히 목사들 중심으로 써내려왔고, 분열도 통합도 모두 그들이 결정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 평신도운동의 회복을 통해 한국교회의 분열을 치유하자는 목소리가 있어 관심을 모은다. 한국교회가 목사들에 의해 숱한 분열을 하던 와중에서도 그 뒤에서 여전히 연합과 일치를 끊임없이 펼치는 평신도운동이 한국교회 대통합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아니 적어도 교계에 평신도의 역할이 충분히 존재하고, 이를 존중하는 풍토가 조성된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넋놓고 교계 분열을 바라봐야 하는 최악의 상황은 면할 것이라는 기대다. 이런 맥락에 최근 평신도운동에 대한 매우 의미있는 좌담회가 열려 관심이 요구된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평신도단체인 한국교회평신도단체협의회(대표회장 김우제 장로/ 이하 평단협)와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대표회장 강무영 장로/ 이하 평지협)의 두 대표와 현재까지 교계에서 평신도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대표적 평신도 인사인 김형원 장로(평지협 전 대표회장), 김우신 장로(한국찬송가공회 전 총무) 등이 한 자리에 모여 평신도운동의 어제와 오늘, 현실과 대안에 대해 심도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 6월 4일 서울 연지동 본보 사무실에서 열린 이번 좌담회는 강춘오 목사(본보 발행인)가 좌장을 맡아 진행됐다. 강춘오 목사: 오늘 우리가 좌담회에 앞서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평신도라는 용어에 대한 정의다. 사실 개신교에는 평신도라는 말이 없었다. 평신도는 가톨릭교회가 만든 용어로, 가톨릭에서는 사제를 제외한 모든 신도를 평신도로 정의했다. 우리 개신교에 평신도라는 용어가 생겨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다. 헨드릭 크레머라는 가톨릭 출신 신학자가 평신도 신학이란 책을 펴냈고, 이것이 WCC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교회에서 평신도에 대해 조금 터부시하는 면이 있다. 한국교회가 목사 외에 모두를 평신도로 부르고 있지만, 엄밀히 장로, 집사, 권사 등은 교회의 중직자다. 하지만 이들 모두를 평신도의 범주에 넣고, 목사와 구분하다 보니 오늘날의 편견이 생겨난 것이다. 김우신 장로: 평신도라는 용어에 대해 사실 한국교회도 많은 거부감이 있었다. 내가 속한 예장통합측에 존재하는 남선교회전국연합회의 원래 명칭은 평신도전국연합회였다. 그런데 ‘평신도’라는 용어에 대해 당시 상당히 못마땅해 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이를 바꾸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남선교회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이다. 이는 중직을 가진 장로, 집사들이 “왜 자신들을 평신도로 불려야 하느냐”라는 문제 제기로, 평신도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자는 일종의 결단이었다. 강 목사: 한국교회 내에서 평신도라는 용어에 대한 정리는 다시금 필요해 보인다. 오늘 좌담회에서 중요한 것은 평신도운동이다. 두 대표님들께서 단체의 역사와 지향점에 대해 말해 달라.김우제 장로: 우리 평단협은 각 교단의 전국남전도회나 장로회연합회 대표들이 참여하는 단체다. 처음에는 5개 교단으로 시작했는데 현재는 34개 교단으로 늘었다. 과거에 비해 회원 숫자가 늘어 큰 성장을 이뤘다고도 볼 수 있지만, 교단 분열로 교단 숫자가 늘어난 측면도 있기에 어느 정도 감안이 필요하다. 강무영 장로: 평지협은 1988년에 창립됐다. 평신도들의 개인구원운동을 통한 역사를 도모하고,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뤄가자는 취지로 창립됐다. 위에서도 지적됐지만, 평신도운동이 축소된 데에는 한국교회가 점차 목사위주로 재편되며, 평신도의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한국교회는 목사는 이끌고, 장로는 따라가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그리고 그것을 미덕이라 생각하며, 교회는 물론이고 교계를 주도하려 한다. 문제는 혹여 그 목사의 생각이 잘못됐을 시 전체 교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평신도도 공부를 해야 한다. 체계적인 성경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 평신도운동도 전개할 수 있다. 김형원 장로: 평신도운동이 약화됐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과거 80년대까지 평신도들은 사회의 경건, 절제 운동, 과소비추방운동 등을 이끌었으며, 교계 내에서도 연합과 일치운동을 주창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과연 평신도단체가 아직 남아있느냐 할 정도로 활동이 약화됐다. 평신도 입장에서 분명한 역할이 있을진대 이것을 제대로 감당치 못하고 있다. 강 목사: 그렇다. 80~90년대의 평신도단체 활동은 실로 대단했다. 대사회적 문제가 있을 때마다 가장 앞장서 교계의 목소리를 내고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 평신도단체였다. 이는 목회자단체와 그들의 목소리와 구분되는 평신도 고유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오늘날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인가? 오늘날 세계교회는 평신도가 최소 30~50%는 참여토록 제도화가 되어 있지만 막상 한국교회에서는 평신도들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게 사실이다. 김형원 장로: 교계에 평신도가 나설 자리가 없다. 한기총, 한기연 등 연합단체가 주관하는 행사들을 보면 전부 목사 중심이다. 그 곳에 평신도는 없고, 가끔 구색으로 한 두명 끼울 뿐이다. 이를 놓고 한기총에 항의한 적도 있다. 평신도가 배제된 행사에 한국교회 이름을 붙이지 말라고 말했다. 이것은 평신도 위상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김우제 장로: 한국교회가 부흥하던 80년대에는 탁월한 평신도 지도자들도 많이 나왔다. 그런데 교회가 물량화가 되면서 목사님들 사이에 평신도들이 똑똑하면 안되겠다는 인식이 생긴 것 같다. 평신도들이 나가서 연합활동을 하고, 교계를 주도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성도들이 와서 헌금 드리고, 그저 남아서 교제하는 정도를 평신도의 문화로 굳어졌다. 문제는 통제된 평신도의 생활이 결국 신앙적 나태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더 이상 교회에 나올 때 성경책을 반드시 챙기려 하지 않는다. 그게 편하기 때문이다. 강 목사: 그것이 한국교회의 폐단인 우민정책이다. 목사들이 철저히 잘못한 것이다. 교계가 제대로 평신도운동을 일으키려면 목사들 의식구조부터 개혁해야 한다.김우제 장로: 여기에 교회에서도 오직 목사만 중심이 되다보니, 목사들의 활동은 교회의 활동으로 보지만, 평신도의 활동은 개별활동으로 치부한다. 당장 목사들이 연합활동에 참여할 때 재정을 지원하지만, 평신도들의 활동에는 어떠한 재정도 지원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적인 부분이 평신도운동이 자연스레 쇠퇴를 불러오게 된 것이다. 강 목사: 이럴 때 일수록 평신도의 신학적 무장이 필요해 보인다. 체계적인 성경공부가 이뤄져야 하고, 분열한 교계 연합단체들의 통합에도 평신도들이 나서서 목소리를 내야하지 않겠나? 강무영 장로: 이미 우리 단체에서 바이블아카데미를 하고 있다. 범교단적으로 훌륭한 목사님들이 성경 66권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이를 영상을 통해 배포되고 있다. 30분 1타임으로 일주일에 한번 모여 총 2시간동안 4타임을 공부한다. 성경공부를 하면서 정말 많은 변화가 생긴다. 김우신 장로: 사실 평신도들이 성경과 말씀을 공부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정이 회복되어야 한다. 현재 상태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많이 늘어나야 할 것인데, 이 마저도 줄고 있는게 현실이다. 초창기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로 출발했던 평신도운동의 핵심은 역시 성경이였다. 성경에 대한 열의를 회복하지 않는 한 평신도운동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강무영 장로: 이제 평신도들의 목소리가 나올 때도 됐다. 그만큼 한국교회가 심각하다. 얼마 전에 교계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목사님들이 교계를 분열시키며 온갖 경비를 소모하는데, 그 돈이 다 평신도의 주머니에서 나온 눈물어린 헌금이란 것을 아냐고 물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린 예물이다. 목사들이 이를 함부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김형원 장로: 냉정한 말이지만 한국교회 분열은 철저히 목사들의 책임이다. 한국교회가 분열되는데 평신도가 앞장선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김우재 장로: 목사들에 의해 분열이 이뤄지지만 그 책임이 우리 장로들에게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교계와 교단이 분열할 때 장로들은 방관을 하지 않았나? 영향력이 없다 할 수 있지만, 평신도 지도자로서 영향력이 미진한 것 또한 책임을 통감해야 할 부분이다. 김형원 장로: 지난 1948년 감리교 분열 당시 문창모 장로, 박현숙 장로가 나서서 교단 분열을 막았다. 우리 평신도에게 주어진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행동하지 않는 것은 평신도의 연약함이다. 이미 평신도들은 하나가 되어 있다. 그렇기에 더욱 행동할 필요가 있다. 김우제 장로: 합동, 통합, 고신 등 주요 장로교단의 평신도들은 교단 분열이나 교계 분열과 관계없이 꾸준한 협력과 교류를 진행해 오고 있다. 얼마 전 독도 수련회도 다녀왔다. 이뿐 아니라 예성, 기성의 장로들도 성결교가 분열한 뒤에도 계속적으로 함께하고 있다. 평신도들은 이미 교단분열을 뛰어넘어 계속적인 교류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김우신 장로: 한국교회가 하나님 중심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의 교회는 전부 개인주의이다. 어디를 가든 누가 대표를 할 것인지만 관심을 갖는다.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기 위한 대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강 목사: 결국 성경을 바로 알면 깨달을 수 있다. 지금 한국교회는 과도기다. 하지만 평신도가 이미 하나가 되어있다는 것은 매우 큰 희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평신도운동이 좀 더 힘을 내야 한다. 흩어져 있는 교계의 연합과 일치를 도모해야 한다. 그리하여 평신도운동이 친목단체를 넘어 선교공동체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김우제 장로: 과거 활발했던 활동이 지금은 형식적으로 바뀐지 오래다. 이제 변화와 개혁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다시 한 번 평신도들이 80~90년대와 같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적극적 활동을 해야 할 것이라는 결의가 생긴다. 강무영 장로: 바이블아카데미가 전국 평신도들에 퍼져 나가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또한 평신도단체의 활동과 동정을 적극 언론들에 어필할 생각이다. 지금 언론들에 보도되는 기사의 90% 이상은 목사들의 일이다. 이제 평신도단체들이 더 적극 나서겠다. 언론에서도 평신도들의 선한 사역이나 일들에 관심을 갖고 보도해 달라. 김형원 장로: 한국교회의 선교트렌드도 변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해외선교에 퍼붓는 엄청난 돈의 일부를 언론, 문화, 예술 등의 영역에 지원해야 한다. 평신도운동 역시 선교차원에서 지원되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재정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평신도운동의 부흥은 쉽지 않다. 강 목사: 한국교회가 1200만 성도를 자축하고 있지만, 이는 반대로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3800만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들이 우리의 선교를 기다리고 있다. 각종 직장선교회와도 교류하며, 40~50대의 젊은 장로들을 평신도운동에 적극 끌어들여야 한다. 평신도운동이 좀 더 젊고, 역동성 있게 퍼져 나가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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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08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88
    성령세례의 반복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성경 본문은 첫째는 요한복음 20:19-23이고, 둘째는 사도행전에서 고넬료의 가속들이나 에베소 제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방언이라고 주장한다. 방언은 오순절 성령세례 때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사도들이 복음으로 전하는 곳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반복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심지어 오순절 성령 세례 사건은 요한복음 본문에 이은 두 번째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찾아오시어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하신 본문의 사건을 자세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그 주간 첫날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이때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문을 잠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방안에 들어오셔서 제자들 가운데 서셨다. 그리고 이들에게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다시 한 번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 계속하여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신 것과 같이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을 보낸다고 말씀하신 후, 그들에게 “숨을 내 쉬시며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본문은 역사적으로 학자들 간에 다양한 해석과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들의 해석은 대략 다음 네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다. 특히 오순절과 관계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 본문을 ”요한의 오순절”(Johannine Pentecost)라고 지칭한다. 필자도 편의상 여기서 그렇게 부르고자 한다. 첫째는 두 오순절 이론이다. 요한의 오순절과 누가의 사도행전 오순절은 같은 성령 세례인데 이 사건이 일어난 시간과 장소가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누가의 성령세례와 요한의 성령세례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반복된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성령세례는 계속 반복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순절 계통의 사람들이나 은사주의자들, 그리고 웨슬레의 신앙을 따르는 자들이 이에 속한다. Finny 나 로이드 죤스와 등이 적극적으로 이 주장을 한 사람들이다. 요한복의 오순절에는 하늘로부터 온 소리나 불처럼 갈라진 혀가 임한 것도 아니고, 제자들 이외는 다른 사람도 없었고, 방언도 없었고, 세례받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도 없었다. 오로지 예수께서 숨을 쉬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는 기록뿐이다. 둘째는 모형론적인 해석이다. 요한의 오순절을 비유적으로, 혹은 모형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Ladd는 요한의 오순절과 누가의 오순절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여기며, 예수께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사건을 “오순절에 성령의 실제적 오심에 대한 약속과 예상에 대한 실제적 비유”라고 말한다. 학자들 간에는 “숨을 내쉬다”라는 헬라어 “엠푸사오”와 창세기 2:7, 하나님의 사람 창조시에 동일하게 사용되는 “나파흐”() 사이의 의미상 유사성에 착안하여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선언하는 사건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한의 오순절”과 누가의 오순절은 서로 모형과 실형을 이루는 비유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없는 서로 다른 실제적 사건이다.셋째는 “요한의 오순절”을 이어지는 누가의 오순절 사건에 대한 맛보기로 해석한 사람들이 있다. 즉 “요한의 오순절” 사건을 그리스도의 선물이 오순절에 완전히 주어지게 될 성령의 부분적인 수여로 보는 것이다. “칼빈은 ‘여기에서 성령은 제자들에게 그의 은혜와 함께 살짝 뿌려지듯이 주어진 것이지, 그 완전한 능력으로 제자들을 흠뻑 적신 것은 아니다.’라고 보았다. 요한의 오순절과 누가의 오순절이 그 본질에 있어서 같은 것이라고 말하지만 “요한의 오순절”이 누가의 오순절 사건에 대한 예비적인 사건이라는 가르침은 결국은 두 번의 오순절존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로는 “요한의 오순절”과 누가의 오순절은 같은 한 사건을 각각의 다른 관점에서 서술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요한은 부활과 성령세례,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을 서로 연합된 사건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 세례는 부활 기간 어느 때에라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성령세례를 예수님의 부활과 묶어서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합리적으로 보이는 듯하다. 보체르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요한의 의도가 당시에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신성을 변증하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는 데 있어서 아들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람이라고 주장한다.이상의 요한의 오순절에 대한 해석을 종합해볼 때 이들의 해석과 주장은 본문에 대한 세심한 주석과 구속사적인 이해가 결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본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정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제자들의 불신과 불안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잠그고 있는 상황 가운데 갑자기 나타난 예수님도 두려운 대상임에 틀림없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고 말씀하시고, 그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주님을 보고 기뻐했다고 했다. 그런데 21절에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 요한은 “다시”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들이 얼마나 마음 속에 두려움이 가득 차 있는 가를 반영하는 대목이다.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평안이 필요한 상태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두 번이나 이들의 평안을 주시고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신 것 같이 예수님도 자신도 제자들은 보낸다는 사명의 말씀을 주신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아라.’”하셨다. 자세히 이 절의 헬라어 본문을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본문을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한다면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숨을 내쉬었다 (Ind. aorist active 3ms, 부정과거형). 그리고 말씀하신다(현재형). ‘성령을 받으라.’” 이 번역에 의하면 예수께서 숨을 내 쉰 것과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의 사이에는 시간적인 간격이 있다. 결코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한 것도 아니고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 쉰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예수께서 숨을 내 쉰것과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의 시제가 일치하지 않는다. 물론 이 점은 헬라어 문법의 시제나 용례 등에 대해서 많은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저자 요한 자신이 연이어 다른 시제를 쓰고 있다는 것은 의도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 의도는 분명 예수께서 숨을 쉬시고 멈추었다는 것은 뒤에 이어지는 성령을 받으라는 명령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숨을 내 쉬셨을까? 어떤 사람은 “숨을 내 쉬다”는 의미의 헬라어 “에네퓌세센"이 창 2:7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사람을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게 하셨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새 창조의 개시를 선언한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든 사람의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셨다. “숨을 내쉬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헬라어 “엠푸사오” 히브리어 대응어 “나파흐”()의 목적어로 “생명의 호흡”()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불어 넣은 것이 어떤 것인지, 어디에 불어 넣으셨는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경우는 “생명의 호흡”이라는 말이 없고, 단순히 숨을 내쉬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숨을 제자들을 향하여 내 쉬었다는 말도 없고, 숨을 어디를 향하여 내 쉬었다는 방향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숨을 내 쉬셨다는 말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부활하여 제자들과 같이 살아있는 몸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고 확신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사람이 숨이없으면 시체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었다 부활한 살아아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주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여기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앞으로 이들이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위로부터 성령을 받아야 할 것을 지시하시는 말씀이다.뿐만 아니라 이들의 주장대로 예수께서 이들에게 성령을 불어 넣어 주셔서 새 사람들이 되었다면 8일 후에 제자들이 문을 잠그고 집안에 있을 때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시어 도마에게 그의 손을 만지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라고 말씀하시며 믿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아직도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 더구나 21장에는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대로 용서와 화해의 복음을 들고 나가서 전하기는커녕 오히려 고향에 내려가 물고기를 잡는 옛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을 보면 이들이 새로워지기 보다는 오히려 더 후퇴한 사람들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소위 “요한의 오순절”은 누가의 오순절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키고, 나아가서 앞으로 보냄을 받은 자로서 해야 할 일로서 성령을 받아야 할 절차를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오순절의 성령세례는 개인의 구원이나 성화를 위한 것도 아니고, 반복될 일도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새언약의 선지자로 세우는 위임 의식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 세례를 받으며, 새 언약의 선지자로서의 직분을 위로부터 받는다. 그래서 물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며, 그는 선지자의 직임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명령대로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선지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6-01
  • 특별기획/ 기본으로 돌아가자 ⑪ 원주민 선교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들이 팽배해 있다. 이런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가장 원시적인 대답으로. 김남식 박사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특별기획으로 싣는다. (편집자 주) 한국교회는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를 전 세계에 파송하고 있다. 인구 비율이나 교세로 보면 우리가 더 많이 파송했다는 계산이 나온다.오대양 육대주에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물질로 후원하고 있다. 선교사들의 헌신과 수고를 격려하고 위로한다.문제의 탐색해외 선교라고 하면 대형교회나 도시 교회가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농어촌 교회는 자체의 존립도 어려운 여건이기에 해외 선교란 ‘꿈같은 이야기’로 치부된다.이러한 인식을 깨고 전남 무안의 시골 교회가 해외 선교, 그것도 원주민 선교의 선봉장이 되고 여러 교회들이 이 사역에 동참하는 아름다운 소식이 있다. 이들은 “농어촌 교회도 복음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 사역에 기쁨으로 동참하고 있다.사례의 탐구이 시리즈를 위해 먼 길을 찾아갔다. 목포까지 KTX로, 거기서 무안까지 승용차로 달려 예드랑그리스도교회 서규석 목사를 만났다.교회 목회와 대안학교를 운영하면서 농어촌 교회에 선교의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서 목사의 이력이 이색적이다. 한국구화학교 교사로 6년간 일했고, 5년간 극단 ‘선교무대’를 이끈 사람이다.김남식(이하 김): 남들이 보면 전원생활을 한다고 할지 모르나 실제로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지나온 줄 안다. 이곳에 온 계기가 무엇인가?서규석(이하 서): 신학을 마치고 문화선교를 위해 극단 ‘선교무대’를 만들어 5년 동안 32회 공연하였다. 내가 제작·연출한 ‘새역사의 창조’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 사역 그리고 부활까지를 다룬 작품이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사역에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 교회가 없는 전남 무안으로 왔다. 그때가 1975년이니 벌써 43년이 되었다. 그러니 무안 사람이 되었다.김: 교회 개척을 어떻게 하였나?서: 연고지도 아니어서 처음에는 비닐하우스에서 예배를 드렸다. 또 내가 소속한 교단이 그리스도교회협의회여서 이곳 사람들에게는 생소하였다. 비닐하우스를 졸업하고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김: 연극 연출 겸 제작자에서 농촌교회 목사로 놀라운 변신을 하였는데 목회의 중심적 꿈이 무엇이었는가?서: 교회가 세계 선교의 중심지가 되게 하자고 꿈꾸었다. ‘땅끝까지 증인되라’ 하신 말씀대로 선교 모델 교회가 되고 싶었다. 또 농촌교회도 해외선교를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불어넣고 함께 힘을 모았다.김: 그러니 시작부터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를 지향했다. 그때는 선교적 교회라는 이론도 없는 시대인데 선견적 이해가 있었는가 보다. 어려움이 많았을 줄 아는데 그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해 달라.서: 교회 개척 10년이 되는 1984년부터 선교사 훈련을 시작하고, 1988년 해외선교 시작, 1989년에 선교사 파송을 하였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믿고 나아갔다.김: 선교학에서 신앙선교(Faith Mission)란 개념이 있다. 전략이나 방법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는 사역이다. 이것을 어떻게 전개했는가?서: 선교학의 이론이나 무슨 전략도 알지 못하고 ‘기도하고 선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세 단계로 발전한 것 같다. 첫 단계는 지역 선교로 지역 전도에 집중하여 교회 성장을 도모하였다. 다음 단계로 해외 선교였는데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를 선교지로 삼았다. 셋째 단계로 교육선교였다. 무안에 대안학교를 세우고 선교지마다 현지인을 육성하는 교육기관을 세웠다.김: 필리핀 선교부터 묻겠다. 그 이야기들이 한 권의 책이 되고도 남겠지만 필리핀 사역을 말해달라.서: 우리는 선교사의 직접 파송보다 현지인을 육성하여 자신의 동족에게 전도하는 정책을 쓰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세 지역에 집중하고 있다. 산지족(山地族)을 위해 부족선교신학원을 세워 현지인 사역자를 양성하고 있다. 평야지대 사역을 위해 방가신학교라는 국제선교신학교를 세웠다. 주목할 만한 것은 26년 전에 민다나오에 고아원을 설립했는데 지금은 필리핀 최고의 고아원이 되어 있다. 필리핀 일반 고아원들은 교사 학생 비율이 1:25인데 우리는 1:7로서 가정형태 사역을 하고 있다. 이 아이들을 대학까지 교육시키고, 현지인들이 설립한 교회가 350개다. 목회자 재교육을 위해 한국에 초청하여 3개월 교육 후 재파송한다. 이 사역에 20여 교회가 동역하고 있다.김: 귀한 사역을 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어떤가?서: 슬라웨시에서 사역한다. 이들은 한글을 국어로 채택한 부족이다. 이곳에 15만 평의 땅을 구입하여 〈예수마을〉을 만들었다. 법인 이름이 ‘예뜨랑’인데 한국에서는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한다’의 약자로 만들었는데 인도네시아어로 ‘예뜨랑’은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란 뜻이란다. 이곳에서 제자훈련원, 농촌지도자훈련원, 고아원, 선교기념관을 세우려고 하고 현지인 스탭들이 사역하고 있다.김: 인도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서: 인도도 세 지역에 집중하고 있다. 이팔에 샬롬신학교를 세웠고, 나가랜드에 예뜨랑 아카데미를 세워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세우려고 단계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또 시킴이라방다에도 아카데미를 세워 교육선교를 하고 있다. 시킴은 시킴불교본부가 있고 세계에서 제일 큰 부처가 있다. 현지인들이 학교를 세워주기를 요청하고 있다.김: 어려운 여건 속에서 귀한 사역을 하고 있다. 선교의 표어가 무엇인가?서: 우리는 “주인(현지인)으로 주인되게 하라”는 것을 표어로 삼고 있다.기본에의 회귀농촌교회들이 하나님만 의지하여 ‘신앙선교’(Faith Mission)를 할 때 이런 결실들이 나타나고 있다. 기도하고 전파하니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적절하게 채워주신다는 참으로 ‘원시적’이고 ‘기본적’인 전략이다.해외 선교는 도시 대형교회만의 사역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역이다. 연극인에서 목회자, 그것도 농촌에서 43년간 사역한 한 목사를 만나고 돌아오는 KTX안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감탄하였다.
    • 해설/기획
    • 특별기획
    2018-05-31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87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기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신 것을 보시고 이들에게 자기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배척당하여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알려 주시기 시작하셨다(막 8:31). 그리고 그의 발걸음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이적을 행하셨다(요한 11:38-44).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소식을 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공회를 소집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이 민중들의 소란이 자칫하면 로마 당국을 자극하여 땅과 민족을 빼앗기는 빌미를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염려한 것이다. 이때 대제사장 가야바가 일어나 의미 있는 발언을 했다.“‘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멸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스스로 말한 것이 아니라, 그가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여 죽으시고, 그 민족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들은 그 날부터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요 49-53)대제사장, 가야바의 발언은 예수님을 속죄양으로 삼아 나라와 민족이 망하는 것을 구하자는 것이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구체적인 작전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요한은 가야바의 이 발언이 자기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예언이라고 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백성들을 대표하여 속죄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대속이라는 개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바치는 속죄양이 자신들의 죄를 대신한 속죄물이라는 것은 이미 상식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을 속죄양으로 삼아 나라와 민족을 살리게 하겠다는 생각은 특별한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이 단순한 개인의 죄 값으로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왔다.”(막 10:45)고 하신 말씀대로 나라와 민족을 살리기 위한 희생적이고 대속적인 죽음이라는 것을 대제사장을 통하여 해석하고 예언적인 선포를 하게 하신 것이다.하나님께서는 아담이 그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타락한 후 그와 그의 연대성 안에 있는 피조물들을 살리기 위한 계획을 세우신다. 아담을 대신한 “새아담”을 세워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려는 것이었다. 창조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그의 대리 통치자로 세우고 그의 모든 피조물을 그의 수하에 맡기셨다. 언약적 연대성의 원리를 아담과 그 수하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적용하여 그들을 상대하신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담의 반역과 범죄도 아담의 통치권에 아래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똑같이 적용하신 것이다(창 3:17). 그리하여 우리 인간은 모두 아담과 함께 하나님께 불순종한 반역자가 되었고, 그 결과 죄와 죽음의 종노릇을 하게 되었다. 아담 한 사람이 문제였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와 똑 같은 원리로 아담의 연대성 안에서 죄와 죽음이라는 언약적 저주 아래 있는 그의 피조물들을 살리려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아담을 대신한 “새아담”을 세우고 그의 모든 피조물들을 그의 통치권 아래 맡기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들이 그를 순종하고 경외하는 새아담과 더불어 새로운 연대성을 형성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 하는 것이다(롬 5:12, 15-19). 따라서 바울은 아담을 가리켜 “오실 분의 모형”이라는 말을 쓴다(롬 5:14). 그렇다면 “새아담”은 누가 될 수 있는가? 새아담은 어떠한 자이어야 하는가? 첫째로 새아담은 “여자의 아들”이어야 한다(창 3:15). 이 말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로 뱀을 조종하여 여자를 유혹하게 했던 사단의 머리를 짓밟을 수 있는 신적 존재여야 한다. 따라서 새아담은 인성과 신성을 겸한 존재여야 한다. 셋째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에 매여 있는 피조물들을 구원하려면 아담의 죄 값을 지불해야 한다. 그것은 죽음이다(롬 6:23). 따라서 새아담은 아담을 대신하여 죄 값을 치르기 위하여 성전에서 제물로 드리는 허물없는 속죄양처럼 그 자신을 속죄물로 바쳐져야 했다. 넷째는 새아담은 아담과 그의 연대성 아래 있는 피조물의 죄 값을 온전히 치렀다는 증거를 보여야 했다. 죄 값을 치렀으니 더 이상 죄가 아담과 그의 연대성 아래 있는 피조물들을 죄와 죽음으로 가둬둘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새아담부터 살아나야 하는 것이다(고전 15:13, 17, 21-22). 부활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아담처럼 모든 만물 위에 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고후 4:4; 5:17)골 1:15; 2:10)그러나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아담과의 연대성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로 심판아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아담을 만들어도 안 되고, 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도 안 되는 일이었다. 신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이 되어야 이 조건들을 충족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로 성육신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원리를 제사제도를 통하여 미리서 이스라엘 그의 백성들에게 모형적으로 가르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때가 되어 이 땅에 오셨고, 이제 그 자신을 모든 사람을 위한 속제물로 드리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미리서 반복적으로 가르치신 것이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많은 사람들의 속죄물로 드리고 부활을 해야만이 새아담으로서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그런데 본문을 보면 대제사장 가야바가 바로 예수께서 나라와 민족을 구할 속죄양으로 죽어야 할 필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가야바가 하는 말은 예수께서 로마를 대항하여 모여든 반 로마 세력의 우두머리로 이스라엘 나라와 민족을 위한 희생양이 되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이 명분없는 정치범이나 잡범의 죽음이 아니라 적어도 나라와 민족을 위한 죽음임을 미리서 알게 하고 인정하게 한 것이다. 대제사장은 자기들이 살기 위하여 백성들의 소요에 대한 책임을 예수께 떠넘기는 발언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죽음이 나라와 민족을 살리기 위한 희생적이고 의로운 죽음임을 공회 앞에서 대제사장으로서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점에 대하여 요한은 대제사장이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여 죽으시고, 그 민족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으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해석한다(요 11:52).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예수님의 죽음을 만민을 위한 속죄적 죽음이라는 것을 공회 앞에서 선언하고, 공회는 이를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제사장은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체 나라를 살린답시고 예수님을 죽이자는 제안을 했지만 그것은 민족을 위한 짐승의 희생이 아니라 사람을 통한 속죄를 언급하고 예언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은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부활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루실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염두에 둔 말이다. 예수님의 죽음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었음을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선포하고 공회가 공인했다는 것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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