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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67
    룻기를 읽은 사람은 모압 여인, 룻이라는 과부가 보아스라는 유대 사람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동네 여자들은 룻의 득남을 축하하며, 그 아들의 이름을 “오벳”이라고 지어주고,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고 축복하는 사실을 의아해 할 것이다. 오벳은 며느리 룻이 낳았는 데, 사람들은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났다고 축하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나오미는 베들레헴에서 훙년을 피하기 위하여 남편, 엘리멜렉을 따라 두 아들과 함께 모압 땅으로이민을 갔다. 거기서 그는 그의 아들 말론과 기룐을 장가 보내어 모압 여자, 오르바와 룻을 며느리로 얻었다. 그러나 잘 살기 위해서 찾아온 이방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두 며느리만 남아 한 집에서 세 과부가 살게 되었다. 이러한 나오미가 이방 땅에 정을 붙이고 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봇짐을 싸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맘 먹었다. 다행이 이제 베들레헴의 흉년도 지나가고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도 들렸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데리고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으나 두 며느리 때문에 발길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래서 며느리들에게 친정으로 돌아가 새 남편을 얻어서 잘 살라고 간곡하게 타일렀는데 큰 며느리 오르바는 오던 길을 돌아갔지만 작은 며느리 룻은 시모인 나오미를 끝까지 따라 가겠다고 떨어지려고 하지를 않았다. 특히 시모의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심지어 시모인 나오미가 가는 곳이면 무덤까지도 같이 가겠다고 시모를 붙들었다. 할 수 없이 나오미는 룻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그러나 고향에 돌아온 그들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나이든 나오미는 일을 할 수 없고, 할 수 없이 룻이 밖에 나가 일하여 생활비를 벌어야 할 상황이었다. 마침 보리 추수하는 때인 만큼 룻은 보리타작하는 농부들의 밭에 나가, 떨어진 이삭을 주우러 나가게 되었다. 룻이 보리 이삭을 주우러 간 곳은 뜻 밖에 자기의 고엘 (), 곧 유업을 물어줄 사람, 보아스의 밭이었다. 그는 나오미의 가까운 친족으로 나오미의 불행을 도와주어야 할 법적인 의무를 가진 자였다. 보아스는 룻을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다른 사람의 밭에 가지 말고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고, 점심 식사도 자기의 일꾼들과 같이 하라는 배려도 해 주었다. 룻이 주워온 보리나 보아스의 일꾼들과 먹다 남겨 온 음식을 먹고 지내는 나오미에게는 두 가지 짐이 있었다. 첫째는 죽은 남편 엘리멜렉의 대를 잇는 것과 둘째는 며느리 룻에게 남편을 얻어 주어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나오미는 이 두 문제를 자기에게 남겨진 남편 이름의 밭을 팔아 해결하려고 한 것 같다.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 토지는 다 하나님의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각 지파에게 나누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 땅은 지파의 경계를 넘어 다른 사람에게 그 소유가 넘어가는 것을 금한다. 다른 사람에게 밭을 부득이 팔아야 할 경우, 그의 “고엘”(, 유업 무를자)이 대신 사주거나 팔려간 땅을 되 사서 원 주인에게 돌려주고, 땅 주인은 후에 여유가 있을 때에 그 땅 값을 그의 고엘에게 돌려주어야 했다(레 25:23-55). 또한 근동 세계에서 여자와 자식들은 땅과 더불어 남편의 소유이며, 딸과 달리 아내는 남편의 소유를 상속받을 수 없었다(민 27:1-11).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만일 보아스가 룻의 죽은 남편 보아스의 땅을 사서 그 소유권을 차지 하게 될 경우, 보아스는 엘리멜렉에게 속한 모든 재산, 나오미와 룻과 그리고 나오미 남편의 땅이 다 그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룻 4:5).여기서 한 가지 더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이스라엘 안에서 시행되고 있었던 시형제 결혼, 혹은 계대결혼 (levirate marriage)이다. 나오미는 그가 말한대로 당장 남편을 얻어서라도 아들을 잉태하여 기룐을 대신하여 룻에게 남편으로 주어야 맞다(룻 1:12-13). 이미 유다는 과부가 된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둘째 아들, 오난을 주었던 것과 같이 셋째 셀라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다말이 창기로 변장하여 그의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하여 유다의 큰 아들, 엘의 대를 잇게 하는 것이지만 실상은 유다의 대를 이은 것이 되었다.나오미는 그의 남편의 엘리멜렉의 밭을 팔려고 내놓았는데, 밭을 사게되는 고엘은 나오미와 동침하고 나오미는 고엘의 아이를 낳아, 엘리멜렉의 대를 이어야 하며, 그 아이가 룻의 남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오미는 아이를 낳을 수 있을 만큼 젊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오미는 땅과 룻과 더불어 고엘의 소유가 되는 길을 택한 것 같다. 나오미는 룻을 타작마당에서 밤잠을 자는 보아스에게 보내며 보아스가 그들의 친족, 곧 고엘 임을 주지 시킨다(3:1). 그리고 룻은 보아스의 발치에 누워있다가 잠이 깬 보아스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룻은 “저는 어르신의 여종 룻입니다. 어르신의 날개로 이 여종을 덮어 주십시오. 이는 어른께서 저희 유업을 물어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3:9)라고 말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보아스는 룻의 고엘이 아니라 나오미의 고엘인데, 보아스에게 그의 고엘이 되어 달라고 청하고 있는 것이다. 룻이 보아스에게 그의 날개로 자기를 덮어 달라는 표현은 고대 근동세계에서 널리 사용하는 결혼을 청하는 관용어구이다(겔 16:8). 보아스는 자기를 찾아온 룻을 칭찬하며 그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보아스가 룻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는 자기보다 순서상 더 가까운 고엘이 있기 때문에 그와 담판이 필요했다.보아스는 자기보다 가까운 친족을 만나 성읍의 장로들과 사람들을 증인으로 세우고, 나오미의 고엘로서 나오미가 팔려고 내놓은 밭을 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나오미의 밭을 살 경우에 룻도 함께 아내로 맞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손해나기 때문에 나오미의 고엘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결국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밭을 삼으로 엘리멜렉의 소유인 나오미와 룻을 그의 소유로 삼게 되었다.이러한 과정 가운데 베들레헴의 장로들과 성읍 사람들은 보아스에게 의미있는 두 가지 축하의 말을 한다(룻 4:11-12). 첫째는 이 나오미와 룻이 야곱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와 같이 되고, 둘째는 룻에게서 낳게 될 후손이 다말이 유다에게서 낳은 베레스의 집과 같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선뜻 이해가 안되는 말들이다. 야곱은 라헬과 레아 두 자매를 아내로 맞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이루었다. 그러나 나오미와 룻은 자매 간이 아니라 고부 간이다. 그런데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소유의 밭을 삼으로 나오미와 룻은 이제 보아스의 여자들이 된 것이다. 보아스에게 이들은 다같이 라헬과 레아처럼 자매 간이 되고, 둘 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있다. 또한 유다와 다말은 관계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시형제 결혼은 형제간 끼리의 관계이다. 다말은 엘과 오난에 이어 셀라와 동침해야지 그의 시아버지인 유다와 동침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보아스는 나오미와 동침해야지 룻과 동침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보아스와 유다는 서로 반대되는 경우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관계는 용납이 되고 있다.그렇다면 룻이 낳은 아들이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어떤 사람은 나오미가 룻이 낳은 자기 손자, 오뱃을 아들로 입양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마치 야곱이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자기 아들로 삼은 것처럼…. (창 48장). 그러나 나오미의 경우는 그렇게까지 확대 해석해야 필요가 없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9-29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66
    히브리서 12장에 나오는 성도들의 “징계”에 대한 말씀은 항상 우리 신자들이 두고두고 되새겨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어쩐지 부담스럽고, 뭔가 마음이 편하지 않다. “징계”라는 말 때문이다. 우리는 죄인이고, 시류를 따라 살다 보면 유혹에 넘어가 실수하고, 그래서 자책하고 좌절하고, 그때마다 징계를 받는다 생각하면 징계라는 말에 대한 거부감이나 부담감이 없지 않다. “징계”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허물이나 잘못을 뉘우치도록 나무라며 경계함” 혹은 “부정이나 부당한 행위에 대하여 제재를 가함”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나무라며, 경계하고, 제재를 가하는 것이다. 본장에 8번이나 사용되고 있다.그러나 헬라어 “파이듀오”(παιδευ’ω)라는 말은 사전에서 “어린 아이들이 성장하도록 인도하고, 지도하고, 훈련하고, 교육하다”라고 정의한다. 그러니까 bringing up(기르다), instruct(지시하다), train(훈련하다), educate (교육하다) 라는 말을 쓰고 있으며, 대부분의 영역본에서는 “훈련하다”(discipline)로 번역하고 있다. 반대로 한글 역본에서는 “징계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훈련을 마치 무엇을 잘 못하여 처벌을 받는 것처럼 이해하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파이듀오”라는 말은 “교정하다”(to correct), 혹은 “죄인에 대한 법적 처벌”(legal punishment of transgressor)에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어휘의 제1차적 의미는 “훈련하다”이며, “징계”나 “교정”의 의미는 그 사용빈도가 낮다. 뿐만 아니라 본문의 전후 문맥은 “징계”라는 의미보다는 “훈련’ 혹은 “교육”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옳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자식을 훈련하듯이 그 사랑하는 자를 하신다고 하는 훈련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죄를 짓고 매를 맞는 처벌을 받드라도 “징계’라는 말보다는 “훈련”이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정한 본문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 징계라는 말은 번역상 합당하지 않다.모든 생물은 이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어미로부터 생존을 위한 각종 훈련을 받아야 한다. 먹고 살기 위한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훈련, 조직 사회나 주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남기 위한 훈련, 각종의 특별한 전문적인 분야에서 지도자나 책임자가 되기 위한 전문인으로서의 훈련 등등 다양한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특별히 영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아들같이 대우하신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대우하시는 징표가 바로 훈련이다. 따라서 훈련이 없는 자는 참 아들아 아니고 사생자라고 선언하셨다(8). 사생자란 헬라어로 “노도스”(νοθο、V, illegitimate child), 곧 불법적인 자식, 아비가 없는 자식을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볼 때에 하나님의 그의 백성에 대한 훈련은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훈련을 징계라고 한다면 그의 백성을 아들로 여기시고 그의 자녀답게 살도록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400년 동안이나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을 구출해내어 시내 산으로 데리고 와서 이들과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맺고 이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신랑이 되시고, 왕이 되셨다. 그리고 시작하신 일이 바로 40년 동안 광야에서 아들을 훈련시키신 것이다. 400년이나 노예생활을 해왔던 이 백성이 자력으로 해방을 쟁취한 것도 아니고, 자기들은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해방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여 산다고 가정해보면 이들이 과연 살아남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뼛속까지 베인 노예의 근성을 씻어내고 뽑아내기 위하여 광야에서 훈련을 시작한 것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훈련은 먹는것과 쉬는 것이었다. 먹고 쉬는 일은 어린 아이 때에 부모들이 가정에서 제일 먼서 가르치는 일이다. 노예들은 먹고 쉬는 것이 항상 절실한 문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매일 일정한 시간에 정량의 만나를 먹는 것이다. 그리고 안식일이 되면 일손을 놓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이 40년 동안 여호와께서 주신 율법을 가르쳐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 “여호와의 도”를 가르쳤다(창 18:19). 선별적으로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훈련을 시키셨다. 이러한 훈련은 분명 감당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훈련은 웃어가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심적으로 낙심이 되는 경우가 많다(3). 그래서 11절에 보면 “모든 훈련이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고통스러워 보인다”고 했다. 아마도 이렇게 하나님의 훈련이 힘든 것이기 때문에 “징계”라는 말을 사용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그럴수록 하나님의 훈련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참고, 복종하라고 권면한다(5,7,9). 그러면서 하나님의 훈련과 육신의 부모의 훈련을 비교한다. 육신의 아버지는 자신들의 생각대로 잠깐 동안 훈련하지만 영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의 거룩하심에 참예하도록 훈련하신다고 했다(10). 육신의 아버지는 자식을 훈련을 시키지만 훈련의 목표나 훈련 프로그램이 없다. 자식을 위하기 보다는 자기를 위하여, 자기의 기분에 따라 즉흥적이고 강압적으로 훈련을 한다. 다분히 징계성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영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훈련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예하도록 훈련하신다. 하나님의 훈련의 목표는 분명하다. 우리가 거룩하고 성별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마치 온갖 죄에 오염되고, 시류를 따라 자기 살길 찾기 위해 눈치만 예민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먹는 훈련, 쉬는 훈련, 그리고 말씀 훈련으로 그의 백성답게 살도록 훈련을 시키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시류를 따라 살지 않고 여호와의 도를 따라 성별되고,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도록 말씀으로 훈련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고, 성별된 사람이 되도록 훈련시키시는 것이다.“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예하는 사람” 이것이 하나님의 훈련의 목표이고 이것이 우리를 궁극적으로 위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3년동안 제자들과 합숙하시며 훈련시키셨다. 말씀으로 말씀의 지도자가 되도록 훈련시키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겠다.” (요 15:4)고 명하시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성별된 생활을 하고, 우리의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거룩하게 될 때,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그와의 교제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피흘리기까지 죄와 더불어 싸워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4). 궁극적으로 우리의 훈련은 죄와 싸우기 위하여 힘을 기르는 것이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께서 어떻게 죄와 더불어 싸우셨는지 우리는 항상 바라보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스스로 훈련하여 성별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먹을 것 가려 먹고, 때를 구별하여 적절하게 쉬고, 말씀을 가까이 하고 묵상하는 훈련이 우리 성도들을 성별된 삶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9-22
  • 기획 /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 -7- 목사와 신도간의 소통을 가로막는 교권적 권위주의
    한국 기독교는 지금 물밀듯이 밀려오는 세속주의적 도전으로 위기의 시대를 맞고 있다. 이런 역사 현실 앞에서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바로 세우고 지킬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특히 목사의 교권적 권위주의가 신도들과의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의 극복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목사의 기복주의적 권위주의 신앙을 극복해야 한다금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500년전 미신화된 로마교회에서 성경적 기독교 신앙을 회복한 교회개혁은 만인제사설에 바탕하고 있다. 부름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똑같이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목사와 신도간의 차별이 없다. 성경은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라고 명확히 선언하고 있다. 여기에서 '너희는' 직책상의 차별이 없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보여주는 기복주의적 권위주의는 마치 목사가 신도들과는 다른 존재들인양 행세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인양 '축복권' 운운하며 권위주의를 드러낸다. 이는 교회와 교인들로 하여금 사회에 대해서는 우민화(寓民化)하고, 목사에게는 절대권위를 강요하여 영적 무장으로 세상과 싸워 이겨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을 유리시킨다.목사에게 교권적 권위주의가 존재해선 안된다목사에겐 오로지 지도자로서 신도들이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영적 권위와 말씀의 능력만이 인정되어야 한다. 단지 목사라는 직책만을 앞세워 신도들에게 군림하려는 것은 교회에 분쟁만 야기하게 된다. 지금 전국에서 분쟁하는 교회는 대부분 목사의 어줍잖은 교권적 권위주의 때문에 생긴 것들이다. 더우기 교권적 권위주의는 개교회의 목회현장을 넘어 노회나 지방회 또는 총회에까지 영향을 미쳐 '패거리'를 만들어 동료를 억압하고 교단에 분쟁을 야기한다.특히 개교회선 목사와 장로간에 누가 교회의 주도권을 가져야 하는가를 놓고 다투고, 교인들에겐 자신이 '하나님의 사자'라는 이름으로 절대순종을 강요한다. 그리스도인이 절대순종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뿐이다. 세속의 온갖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를 맛보려고 교회를 찾아온 지성인들은 그런 꼴 보기 싫어 교회를 떠나 노미날리티가 된다. 이것이 오늘의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사회를 향한 봉사나 섬김이라는 화두는 찾아볼 수 없다.오늘날 한국교회는 목사와 장로간에 분쟁이 왜 그렇게도 많은가? 목사도, 장로도 그리스도의 양떼를 돌보는 것이 그 사명이다.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 외에 아무도 없다. 다만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 대한 의무와 책임만 있을 뿐이다. 목사와 장로간의 불신에서 비롯된 자존심 싸움은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누가 손해고 누가 이익이고를 따질 필요가 없다.목사의 교권적 권위주의는 교회에 세속화와 인본주의를 부추긴다한국교회는 이미 지성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다른 종교와 차이 없이 기복신앙을 팔고 있고, 세속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우대한다. 심지어 그 사람의 신심이나 도덕성과는 상관 없이 돈이 좀 있다고, 또는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하여 교회에 얼굴을 내밀자 말자 집사도 세우고 장로도 세워 중직을 맡긴다. 교회에 수십년 충성하고 봉사한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은 단지 가진 것이 별것 없고, 사회적으로 내세울 만한 신분이 없다는 이유로 외면당한다. 신앙논리에 따라야 할 교회의 중직이 돈에 팔려 좌자우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로인한 악영향은 그 교회 역사에 고스란히 축적되고 한국교회 전체에 파급된다.이런 이유들로 인해 교회가 지닌 고유한 도덕성이 상실되어 교회의 권위가 떨어진다. 교인도, 사회도 교회의 권위를 우습게 본다. 거기에다가 세속 상업언론들조차 한국교회를 얕잡아보고 언론의 자유와 비판의 자유를 내세워 기독교를 끊임없이 공격한다. 거기에다가 아이러니 하게도 기독교 주변의 특정매체들이 '교회개혁'을 앞세워 한국교회를 부패한 집단인양 매도하는데 한 몫을 더하고 있다. 과연 어떤 목사가 성공한 목회자이고 어떤 목사가 그렇지 못한 목회자인가? 물량적으로 크고 화려한 목회만이 성공은 아니다. 복음을 잘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하려는 가치관에 서 있는 목사는 모두 성공한 목회자이다. 성공한 목회와 교권적 권위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 해설/기획
    • 기획
    2017-09-22
  • 학술/ 은퇴자로 후배 목회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
    본고는 지난 9월 8일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진행한 9월 월례회 ‘은퇴자로 후배 목회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 중 이정익 목사가 발제한 ‘열정과 합리적인 목회를’을 편집한 것이다. -편집자 주이 정 익 목사(한복협 부회장, 신촌성결교회 원로)목회를 마치고 지난 시간 사역들을 되돌아보니 만족한 마음보다는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모든 은퇴자들의 한결같은 마음일 것이다. 모두가 부족하고 아쉽다는 마음이 절실하게 떠오른다. 본 주제를 가지고 은퇴자들에게 질문해 보았는데 한결같이 만족하는 마음보다는 아쉬운 마음이 더 많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어떤 말이 있느냐는 질문도 여러분이 모두 대동소이했다. 그 제안들과 본인의 마음을 포함해서 몇 가지로 제시한다. 1. 소명에 충실 하라 무슨 일이나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의 소명은 중요한 문제이다. 소명으로 말하자면 목회에 대한 소명처럼 소중한 것은 없을 것이다. 목회가 힘든 분야이지만 그래도 기쁨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소명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이 부름 받음의 소명이 너무나 확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도됨에 대해서 모든 서신서 첫머리에 반드시 “주께로부터 부름 받아 사도된 나 바울은 ....”이라는 전제를 잊지 않았다. 또 고전 2:2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했다. 얼마나 확실하고 분명한가. 소명이 이렇게 분명한 목회자는 열정적으로 목회사역을 이룰 수 있다. 오늘 후배 목회자에게 이 소명을 분명히 하라고 강조하고 싶다. 목회는 주께로부터 위임된 사역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성심껏 수행해야 할 사역이다. 이 부분이 분명하면 목회사역은 행복한 마음으로 수행할 수 있다. 2. 하나님 목회를 하라 본질에 충실 하라는 말이다. 오늘 목회현장에는 목회 외적인 비본질적인 요소들이 너무 많다는 지적들이 있다. 제왕적 목회, 물질주의적 목회, 소통 없는 목회, 기복신앙적인 목회, 프로그램 중심목회 등이다. 너무 수단적이고 방법론적이고 인간적인 부분이 너무 많다는 지적이다. 이것은 본질에서 목회가 너무 많이 이탈했다는 말이다. 즉 자기중심적인 목회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 오늘 목회가 너무 자기중심적이라는 생각이 많아진다. 너무 과시적이다. 너무 인간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이다. 그래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 말은 본질에서 너무 많이 이탈해 있다는 말이다. 교회성장이 좀 늦고 경쟁에서 발전이 좀 늦어질지라도 본질은 잊지 말아야 한다. 목회는 하나님 목회이기 때문이다. 3. 영성에 충만 하라 목회가 하나님의 사역이라면 영성에 의해 사역을 수행하여야 한다. 오늘은 대부분 지성위주의 목회를 한다. 지식과 정보와 이론이 너무 앞선다. 영성이 없는 목회에는 변화와 회심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기도와 성경 연구에 몰두하라. 영력을 구비하라. 목회에서 영성이 부족하면 수단이나 방법이나 프로그램에 의존하게 된다. 왕상 22:의 미가야 선지자를 참조하는 것이 좋겠다. 거짓 선지자들이 왕 앞에서 영혼 없는 말을 할 때 미가야 선지자는 네가 골방에 들어갈 때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고 했다. 영성 없는 목회는 영혼들을 떠나가게 만들거나 가나안 성도들을 양산하게 된다. 4. 상식이 있는 목회를 하라 한국교회가 말이 많고 갈등이 많은 이유는 목회현장에 합리성이나 상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목회자들의 금전거래의 불투명성은 비상식적 행태 중 가장 두드러진 형태이다. 목회자들은 마음대로 돈 쓰는 것을 권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재정에 대한 합리성이 없으면 반드시 불분명의 폐해를 겪게 되고 마침내 지도력의 상실로 이어진다. 행 20:33절을 보면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였다”고 했다. 무조건적으로 크게 교회를 건축하는 일, 건축 후 채무로 인한 교회파산, 각종 소송행위, 재정 스캔들, 모두 상식이 결여된 목회에서 기인되는 부작용들이다. 원로목사와 후임목사 간의 갈등도 마찬가지이다. 원로들의 끊임없는 욕망과 후임자의 지나친 견제는 비상식적인 관계로 발전하여 교회를 병들게 한다. 모두 상식을 무시해서 나타나는 병폐들이다. 5. 지도자성을 발휘하라 목회자는 너무 좌우에 지나쳐 편향되거나 지역감정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목회 지도자는 먼저 이 편협함부터 극복을 해야 한다. 목회자는 먼저 내 교회, 내 교단, 내 신학의 도그마에서 극복되어야 한다. 생각이나 의식 그리고 교계 관계나 신학 등에서 영혼의 그릇이 컸으면 좋겠다. 오늘은 교단주의, 교단신학주의, 지역감정, 좌우파 의식이 너무 강해 예수는 그 다음이 되었다. 목회자들이 지도자성을 발휘하려면 먼저 이 편견들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영혼의 커야 하고 긍정적이어야 한다. 오늘 세종대왕의 지도력이 재조명되고 있다. 세종은 영혼이 크고 넓고 따뜻했다. 그의 통치이념은 위민으로 압축된다. 세종은 만삭된 노비가 노동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산후 휴가제를 창안 실시하였다. 자신의 세자책봉을 끝까지 반대했던 황희를 임금이 되자 정승으로 18년 동안 봉직하게 했다. 백성들의 민족자긍심을 위하여 한문이 있었지만 훈민정음을 창제 하였다. 세종 12년에 조세개혁을 할 때 5개월 동안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반대자 17만 명을 끝까지 설득하여 무리 없이 세법개정을 완성하였다. 노비출신인 장영실을 정사품 호군으로 등용하여 자격루인 해시계를 발명하게 만들었다. 그는 쇠약한 몸으로 새벽 5시에 기상하여 정사를 시작하였고 집현전 학자들로부터 올라온 각종 문서들을 결제하였다고 한다. 이 지도력이 통합의 지도력이다. 이런 세종의 미래지향적인 마음을 백성들이 알고 세종은 진정한 우리의 스승이라 하여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날이 세종의 생일날이다. 이 같은 지도력을 발휘하려면 우선 영혼의 그릇이 커야 가능하고 그 의식이 미래지향적이어야 가능하다. 오늘 이 시대의 목회자 상은 미래지향적이어야 하고 정체성이 분명하고 세종이 위민이 통치철학이었다면 오늘 목회자들의 이상은 하나님 사랑이고 그 사랑을 목회현장에서 구현하는 일이라 하겠다.
    • 해설/기획
    • 학술
    2017-09-21
  • ‘95개조 반박문’에 녹아있는 루터의 분노
    1500년 넘게 유럽 전역을 지배했던 가톨릭의 심장에 개혁의 깃발이 꽂은 마르틴 루터. 그가 일으킨 종교개혁은 단순히 종교를 넘어 사회, 경제, 문화, 인권, 교육 전반에 걸쳐 이 세상을 뒤집었다. 종교가 곧 법이자, 삶의 전부였던 시대. 그런 종교를 무기로 삼아 자신의 탐욕을 채우던 이들에게 던져진 루터의 반박문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서막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시대의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종교의 중심에 들어 온 평범한 민중이었다. 사제들만의 특권으로 여겨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류 전체로 퍼져나갔으며, 무엇보다 누구나 성경을 읽고 기도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됐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올해 한국교회 역시 학술행사와 기념식, 기념메달 발간 등 다양한 방식으로 종교개혁을 기념하고 있다. 수많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중세 가톨릭의 타락과 루터의 신학을 재조명하며, 한국교회의 나아갈 바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마르틴 루터의 신학과 종교개혁을 접하며, 한 가지 사실을 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바로 민중을 사랑하고 아꼈던, 그들을 보호하고자 했던 인간 루터이다. 마르틴 루터의 분노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교회 정문에 한 장의 대자보가 붙는다. 바로 마르틴 루터가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에 반발해 쓴 ‘95개조 반박문’으로 종교개혁의 시발점이자, 우리 인류사의 가장 위대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에 대해서는 이미 익히 알려진 역사적 사건으로 로마에 성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해 사람들에게 ‘영혼 구원’을 미끼로 돈을 받고 판매한 문서다. 세상 그 어떤 죄를 지어도, 심지어 죽은 자신의 조상들마저도 돈을 내고 면죄부만 산다면, 그 모든 죄는 사해지며, 영혼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완전한 방어권이다. 그리고 이 면죄부는 발매와 동시에 유럽 전역을 휩쓸 듯이 엄청난 판매고를 올린다. 면죄부에 따른 구원의 진위에 대한 의심은 결코 있을 수 없었다. 신의 사제들이 행하는 일을 의심한다는 것은 신을 의심하는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당시 교황청으로 판권을 얻은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독일 전역에 면죄부 판매인을 보내, 돈을 거둬들이는데 열을 올린다. 그 판매인은 바로 도미니크 수도회 수사인 요한 테첼, 그는 가는 곳마다 민중들을 향해 “성모 마리아를 강간해도 면죄부만 있으면 깨끗이 용서받을 수 있다” “헌금함에 넣은 동전이 땡그랑 소리를 내는 순간 조상들이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말하는 등 엄청난 상술을 선보이며, 승승장구한 인물이다. 하지만 단 한 곳, 마르틴 루터가 신학교 교수로 일하고 있던 비텐베르크만은 들어오지 못했다. 엘베 강이 가로지르는 비텐베르크는 당시 면죄부 판매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던 탓이다. 그러던 추운 어느 겨울 날 요한 테첼은 비텐베르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인근 마을에 자리를 펴고 면죄부를 판매하고 이 소식은 삽시간에 비텐베르크 전역으로 퍼져 나간다. 그리고 그 날 밤 비텐베르크 민중들은 면죄부를 사고자 감시를 피해 몰래 얼어붙은 엘베 강을 건넌다. 하지만 제대로 얼지 않았던 얼음판은 곳곳이 깨져 나갔고, 수백명의 민중들이 얼어붙은 강에 갇혀 죽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루터는 엄청난 슬픔과 함께 극한 분노를 토해낸다. 시민들을 지켜내지 못한 스스로를 원망하며, 그 길로 성 교회로 가 면죄부 판매를 맹비난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붙인다. 라틴어로 쓰여진 이 ‘95개조 반박문’은 단 2주만에 각종 언어로 번역되어 독일 전역으로 퍼지게 된다. 루터, 만인을 말하다 오늘날 종교개혁을 있게 한 ‘95개조 반박문’의 실제적 발단은 면죄부에 눈 먼 민중의 떼죽음을 목도한 루터의 분노였다. 수많은 신학적 이유와 중세 가톨릭의 타락이 있었지만, 루터를 직접 행동으로 옮기게 만든 결정적 매개는 바로 민중들이었다. 위에서 언급했던 당시 종교는 삶의 모든 것, 아니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종교 지도자들, 사제들은 이를 민중들에게 직접 허락하지 않았다. 신의 대리를 맡은 자신들을 거쳐야만 가능했다. 이들이 이러한 종교 관습을 일반화 시킬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은 한정된 교육이었다. 당시 최고의 교육이었던 ‘신학’은 위에서 언급했듯 오직 사제들에게만 허락됐으며, 일반인은 결코 접할 수가 없었다. 성경은 감히 읽는 것조차 허락되지도 않았지만, 배우기 어려운 라틴어로 쓰인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는 자연스레 민중의 우민화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런 우매한 민중들은 다루기 상당히 편했다. 신의 이름만 앞세운다면, 그 어떤 일도 용납 됐으며, 심지어 죽음조차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면죄부 판매는 바로 민중의 우민화를 이용한 대표적인 사건이다. 구원을 빌미로 한 저급한 협박이었지만, 우매한 민중들이 이를 의심할 리 만무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성스러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 순수한 민중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탐욕에 대한 분노 가득한 일갈이었다. 그 후 루터는 성직과 세속직에 차이를 두지 않고, 모든 기독교인들은 영적 직분을 갖고 있다는 만인제사장설을 외친다. 그리고 이는 모두를 위한, 만인을 위한 교육으로 이어진다. 한국교회 제2의 종교개혁 핵심은 ‘이웃’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서 과연 무엇을 배울 것인가? 루터를 포함해 얀 후스, 존 위클리프 등 종교개혁의 선진들이 목숨까지 내걸고 성경을 번역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교회가 위기에 빠진 바탕에는 스스로의 권위를 너무도 높여버린 까닭이 크다. 모두에 평등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며 겸손히 사회와 국민을 섬겨야 할 교회가 그들과 맞서려고 하고 있다. 여기에 교회의 각 직분은 새로운 형태의 계급이 되어, 교회 조직을 철저히 상하 관계로 계급화 하고 있다. 교회는 국민들과 맞서야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을 대변해야 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나님의 위로를 전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제2의 종교개혁을 말하며, 교회 회복을 부르짖지만, 무엇보다 국민을 위한, 소외된 이웃을 위한 교회로 먼저 거듭남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의 수많은 주제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교회는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500년 전 루터가 민중을 위해 분연히 일어섰듯 오늘날 한국교회의 종교개혁은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웃과 반드시 함께해야 한다. 또한 교회 내 계급을 타파하고, 성도들에 대한 수준 높은 교육을 통해 성도들 개개인의 자율성을 높여야 한다. 더 이상 목회자 말에 무조건 ‘아멘’만을 외치는 성도가 좋은 성도라고 가르칠 게 아니라, 지식과 경험에 바탕한 현명한 판단으로 교회를 올바르게 이끌어 갈 수 있는 역량있는 성도를 길러내야 한다. ‘95개조 반박문’을 있게 한 루터의 분노는 그 내용만큼이나 오늘날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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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
    2017-09-21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65
    우리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성경의 순서와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천주교도들이 사용하는 성경의 순서는 다르다. 우리 개신교도들은 구약성경을 흔히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라고 말하지만 히브리어 성경, “타나크”는 창세기부터 역대하라고 말한다. 말라기서가 구약성경의 마지막책이 아니다. 말라기는 성경의 어느 부분에도 언급된 이름이 아니고 우리에게 알려진 이름도 아니기 때문에 학자들 간에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나의 사자”(my messenger)라는 의미의 보통명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전통적으로 말라기는 선지자의 이름으로 그 의미가 “여호와는 나의 사자이시다” 혹은 “나의 사자”라고 알려져 왔으며, 그의 저작 연대도 에스라나 느헤미야 이전의 주전 475년에서 450 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말라기서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의 논쟁으로 구성된 특이한 양식의 책이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 하십니까?” 혹은 “어찌하여 너희가 ... 하느냐?” 라는 여호와의 문책성 질문과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 하였습니까?” 라는 이스라엘의 대응 질문과 각각 그들의 대답이 핵심을 이루는 책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선지자 말라기를 통하여 지적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경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에서가 형이지만 그의 동생,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으로 선택한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이스라엘도 여호와를 사랑하며 공경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멸시한 백성이다.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고, 여호와의 율법을 무시한 것이다. 율법을 무시한 것은 바로 여호와와 맺은 언약을 무시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것은 그들이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2:5).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언약을 충성스럽게 지키는 것이 여호와의 백성으로서의 도리이다.그러나 그들은 언약을 배반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혼 문제이다.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은 이혼을 생각 없이 하면서, 이 역겨운 일을 하는 이들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시는 여호와를 향하여 “무엇 때문입니까?”(2:14)하고 대들지만 실상 이들은 결혼의 의미를 깊이 모르는 것 같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시고, 하나님 앞에서 결혼했으므로, 하나님께서 두 사람 사이에 맺은 언약의 증인이 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는 너와 네가 젊어서 얻은 네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시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네가 언약을 맺고 맞아들인 아내이며 짝인데 너는 그 여자를 배신하였다”(14)고 말씀하신다. 결혼은 두 사람이 만나는 순간부터 결혼 예식을 마치고,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는 전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결혼이란 계약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당사자는 반드시 계약서를 쓰도록 법으로 규정했다. 계약서를 쓰지 않으면 그 관계는 결혼으로 인정되지도 않았으며 법적 구속력도 없었다 (하무라비 법전 128조, 에수눈나 법전 27조). 성경에서도 이혼을 할 때 이혼증서를 써주도록 규정하고 있다(신 24:1-4; 참조 마 19:7, 막 10:4). 선지자 예레미야는 시내 산에서 여호와와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결혼 예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한다(렘 31:32). 말하자면 여호와와 이스라엘은 출애굽 후 시내 산에서 결혼 관계를 맺는데, 이 때 하나님께서 돌판에 써주신 계명은 일종의 결혼 계약서로 주신 것이다. 따라서 말라기서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혼의 문제는 남녀부부 당사자만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한 모독이고 배신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젊어서 얻은 아내를 배신하지 마라”(15)고 명하신다. 그리고 계속하여 “나는 이혼하는 것과 자기 옷으로 포악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한다.”(16)고 말씀하신다. 한글 개역개정은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한다” 고 번역하고, 한글 새번역은 “나는 이혼하는 것을 미워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아내를 학대하는 것도 나는 미워한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바른 성경이나 개역개정은 다같이 옷으로 포악이나 학대를 은닉하고 감춘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으며, 새번역은 아예 “옷”이라는 말을 빼버렸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의 문자적인 번역은 “그가 그의 옷위에 폭력을 덮었다”이다. ESV, JPS, NAS는 히브리어 본문을 따라 “covers his garment with violence”로 번역하고 있으나 NET “and the one who is guilty of violence”(그라고 폭력의 범죄가 있는 사람)으로, NIV는 “does the violence to the one he should protect”(보호해야 할 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라고 번역한다. KJV은 한글 성경처럼 “one covers violence with his garment”으로 번역한다. 이들을 살펴보면 KJV이나 바른성경, 개역개정 등은 분명 오역이라고 해야 할 것 같고, NET, NIV는 해석적인 번역이다. 그렇다면 이혼과 관련하여 “옷 위에 폭력을 덮었다.” 혹은 “옷을 폭력으로 덮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고대 근동의 아라비아나 이스라엘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청혼할 때에 자기 옷을 여자에게 던지는 풍습이 있었다 (손석태 『여호와, 이스라엘의 남편』 46). 성경에서 “옷을 덮는다” (룻 3:9; 겔 16:8)는 말은 결혼을 청하는 말에, “옷을 벗긴다”(렘 13:25-27; 겔 16:37, 39; 23:10, 26; 호 2:3)는 말은 이혼의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레위기 18장에서 다루고 있는 성범죄에 대한 말로 “하체를 범하다”고 번역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다같이 “벌거벗음을 드러내다”는 말을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옷이란 결혼과 이혼을 표현하는 데 사용하는 은유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남자가 여자에게 옷을 던져 청혼을 했으면, 언약하고 가정을 꾸미고 그에게 의식주를 공급하며 사랑해할 터인데, 이혼을 하는 것은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혼은 남편이 아내에게 행하는 폭력이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이혼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고, 부부 당사자들의 언약 관계를 깨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역겨운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2:11). 젊은 사람들의 이혼율의 증가는 말할 것도 없고, 젊은 날에 결혼하여 함께 고생하며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을 기른 부부들의 황혼 이혼이 증가하는 이 시대에, 이혼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며, 하나님이 보실 때 역겨운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진심으로 자기 심령을 지켜서 너희가 젊어서 얻은 아내를 배신하지 마라”(2:15)는 말씀을 새겨 들어야 한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9-08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64
    히브리어와 우리 한국어는 서로 언어의 계통이 달라서 그것을 발음하거나 음역하는 데 상당한 고충이 따른다. 히브리어에 있는 자모음이 한국어에 없는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히브리어 “알렙”이나 “아인”은 음가가 없다. 발음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한글로는 이 글자를 바꾸어 쓸 수가 없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알렙”은 [a]로 “아인”은 [u]로 쓰고 있다. 비록 음가가 없어서 발음은 안 되지만 이를 기호로 정하여 글자의 유무를 알 수 있게 했다. 가령 “빛”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올”이라는 단어는 [’or]로 음역한다. 그러나 우리 한글로 “일”을 히브리어 음역하면 ([’or] 빛)인지, (‛or) 피부)인지, 혹은 ([‛ol] 멍에) 인지 알 수 없다.특히 “S”를 주축으로 하는 히브리어 글자는 “삼멕”(s), “싸대”, “신” , “쉰”, 등이 있다. 이들을 음역할 경우 “삼멕”(s, samekh)은 “s”, “싸대”(,.sadhe)는 “”, “신”(, sin)은 “s、”, 그리고 “쉰”(, shin)은 “sˇ”으로 쓰고 있다. 여기서 한국의 학자들은 (sadhe)의 한글 음역을 “싸대”가 아니라 “차대”로 쓰고 있다. 말하자면 정확한 음가를 한국어로는 표기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문제는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이 네 글자를 모두 [ㅅ]음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혼란을 가져온다. 가령 선지자 이사야는 “아모츠”의 아들이다(사 1:1). 그러나 선지자 아모스는 “아모스”이다. 전혀 다른 이름인데 개역 성경은 다같이 “아모스”로 표기하고 있다. 바른성경은 이를 구별하여 이사야를 “아모츠”의 아들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 자신도 “”(s)과 “쉰”을 구별하여 발음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사사기 12장에 보면 입다가 사사로 있을 때 길르앗 사람들과 에브라임 사람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길르앗 사람들이 요단 나루를 점령하고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길르앗 사람인지 에브라임 사람인지 신원을 확인하며 “쉽볼렛”을 발음해 보라고 해서 “쉽볼렛”이라고 하면 살리고, “십볼렛”이라고 하면 죽였다. 에브라임 사람들이“쉰”발음을 하지 못하고 “신”으로 발음한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도 “살”과 “쌀”을 구별하여 발음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다. 개역성경에는 이를 구별하기는 했지만 “십볼렛”을 “씹볼렛”이라고 음역하고 있다. 음가 “s”의 “삼멕”을 “ㅆ”으로 표기하고 있는 데 이는 너무 거리가 멀다.이뿐 아니라 성경에는 신 광야와 친 광야가 나온다. 영어 음역으로는 sin 과 zin으로 음역하고 있다. 신 광야는 출 16:1에 엘림과 시내산 사이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흔히 만나 이야기(Manna Narrative)라고 불리우는 출애굽기 16장은 이집트를 빠져 나온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자 이집트에서의 풍족했던 생활을 그리워하며 여호와를 원망하자, 여호와께서는 이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다. 바로 이곳이 신 광야이다. 이집트 나와서 처음으로 진을 친 곳이다. 출 17:1에 보면 신 광야를 떠나 이스라엘은 르비딤에 이른다(민 33:11, 12). 그러나 “친” 광야는 신 광야의 동북쪽 네게브 밑에 있다. 홍해를 건너 신 광야에 도착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여호와의 도움으로 르비딤에서 아멜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내 산에서 여호와와 언약을 맺는다. 여호와와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는 사건은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 언약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이후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을 향해 출발하여 바란 광야에 도착하게 되는 데 모세는 이곳에서 각 지파별로 한 명씩 12명의 대표를 뽑아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한다. 이때 이스라엘의 12지파 지도자들이 가나안 정탐을 위해 출발한 곳이 바란 광야이며, 그들의 첫 기착지가 바로 “친”광야이다(민 13:21; 20:1; 27:14; 33:36; 34:3, 4; 신 32:51; 수 15:1, 3.). 따라서 신광야와 친 광야는 지명 뿐만 아니라 실제 지역도 전혀 다른 곳이다. 그러나 개역성경, 표준 새번역, 그리고 개혁개정판 모두 신광야와 친광야를 “신광야”로 표기함으로 마치 신 광야와 친 광야가 같은 곳으로 오해를 갖게 한다. 영어에서는 “wilderness of [Sin]” 과 “wilderness of Zin”으로 구별하여 표기하고 있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8-25
  • 기획 / 한국교회 무엇이 문제인가? -6- 기독교의 보편성을 위협하는 개교회주의
    개교회주의는 교회론의 일탈이다기독교에는 개교회주의가 있을 수 없다. 교회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하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2-47).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한 성찬에 참여하는 공동체이다. 여기에는 개인주의가 존재할 수 없다. 하나의 기독교가 있을 뿐이다.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개교회주의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을 보는 시각과 그것을 해석하는 방법의 차이로 교파가 생길 수는 있다. 장로교 헌법정치 원리의 '교회의 자유'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집단의 신학적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교단이 갈라질 수도 있지만 그 믿음의 원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교회는 보편성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주의 또는 개교회주의는 교회론의 정통성을 일탈하는 것이 된다.모든 교회는 그 교구 안에 속해 있었다기독교가 예루살렘에서 생긴 이래 모든 교회는 사도들의 지도 아래 하나로 있었다. 교회가 늘어남에 따라 처음에 교구가 나뉘었다. 전 로마 안에는 5대 교구가 있었다. 예루살렘 교구, 안디옥 교구, 알렉산드리아 교구, 로마 교구, 콘스탄티노플 교구가 그것이다. 또 신학이 나뉘어 교회가 분열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양성론(兩性論)과 단성론(單性論)으로 나뉘었다. 그 다음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로 나뉘었다. 그럴지라도 모든 교회는 그 지역의 나뉘어진 교구 안에 속했다. 가톨릭교회는 가톨릭 교구 안에, 그리스교회는 정교회 교구 안에, 동방교회는 동방 교회의 교구 안에, 단성론파는 단성론파 교구 안에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개교회’나 ‘독립교회’란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도 ‘개인주의’는 용납되지 않았다.중세 종교개혁 시대에도 각기 신학을 달리하는 교파들이 줄줄이 일어났다. 그 때도 신학과 신앙고백을 같이 하는 교회끼리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루터주의는 루터교 안에, 칼빈주의는 개혁파 안에, 환원주의는 침례파 조직 안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 조직을 떠난 독자적인 개교회는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다.장로교의 경우에는 ‘노회’라는 지역 단위의 조직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었다. 개교회를 돌보는 목사는 노회가 양육하고, 그 목사가 돌보는 교회는 노회의 지교회가 된다. 따라서 노회에 속하지 않은 장로교회는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장로교회의 간판 아래 장로교 정치체제를 가진 교회도, 감리교 간판을 단 교회도, 침례교회도, 오순절 교회도 ‘독립교회’라는 개교회주의가 판을 친다. 이것은 현대 교회의 교회론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적 역사적 교회론에서 볼 때 ‘이단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개교회주의는 세속화의 한 단면이같은 교회론의 개교회주의적 태도는, 오늘날 한국교회를 사도성의 계승권을 가진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기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봉하는 종교인들의 친목단체쯤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개교회주의는 교회간 지체의식이 사라지고, 목회자 간에 동료의식을 약화시킨다. 그리하여 한국 기독교로 하여금 수준미달의 종교로 변질 시킨다.작금에 회자되고 있는 목회자들의 신앙윤리와 도덕성 상실은 개교회주의가 낳은 세속화의 한 단면이다. 개교회주의는 어디로부터도 감시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곧 교회가 지닌 고유한 도덕성의 상실로 이어지는 것이다.결론적으로 한국교회는 지금 세속주의적 도전으로 위기의 시대를 맞고 있다. 이런 역사 현실 속에서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바로 세우고 지킬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 중 하나가 개교회주의의 관행을 극복하는 일이다. 한국 기독교는 장로교회가 67%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개교회주의는 교회들의 연대와 사귐이라는 장로교회의 조직원리마저도 허구화(虛構化) 시킨다. <강>
    • 해설/기획
    • 기획
    2017-08-25
  • 해설/ 새로운 연합단체 ‘한기연’ 무엇이 문제인가?
    한기연이 수많은 잡음을 뒤로하고, 창립총회를 결국 개최했다. 지난 1일 창립총회가 한차례 불발되며, 새로이 16일로 예고되기는 했지만, 내부적인 관측은 올해 안에 힘들 것이라는 매우 비관적인 전망이었다. 이는 아직 세부적으로 조직 구성, 정관 조율, 교단 간 안배 등 구체적인 부분에 대한 논의가 부족했기에 창립총회 자체가 무리하다는 판단이었으며, 무엇보다 대형교단과 군소교단간의 형평성에 대한 내부적 불만이 만만치 않은 탓이 큰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당초 교단 크기에 따른 형평성 문제가 흘러나온 한교연 내부 뿐 아니라, 한교총 내부에서도 이같은 불만의 목소리가 제기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립총회를 강행하게 된 것은 각 교단들이 오는 9월 총회에서 반드시 한기연 가입과 관련해 승인을 얻어야 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각 교단 9월 총회, 혼란 예고 한기연이 한교연과 한교총이라는 두 단체를 통합해 창립총회까지 개최하기는 했지만, 스스로 밝혔듯 아직까지는 임시 조직에 불과하다. 이는 대부분의 회원 교단들이 이와 관련해 어떠한 허락도 한 바가 없으며, 그렇기에 실질적으로 한기연은 아직 회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교단이 없는 상태다. 엄밀히 말하면 아직까지는 각 교단 총회장들의 개별적 혹은 임시 가입이라고 보는게 정확하다. 이런 상황에 한기연이 제대로 된 단체의 요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먼저 참여 교단들이 각 교단 총회에서 한기연 가입을 허락받아야 하는데 사실 이 자체도 현 상황에서는 매우 애매하다. 만약 한기연이라는 새롭게 창립된 단체에 가입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교단 총회에서 가입을 허락 받으면 되지만, 한기연이 새로운 창립 단체가 아닌 한교연과 한교총의 통합 단체라고 하면 한기연에 대한 개별적 가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기연이 통합 단체라 할 때는, 각 교단은 한기연이 아닌, 통합 대상 단체들인 한교연 혹은 한교총 가입에 대한 허락을 득하는게 정상적인 과정이다. 즉 각 교단은 개별 가입이라는 직접적 결정이 아닌 단체들 간의 통합이라는 간접 결정을 통해 한기연에 함께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올 1월 출범한 한교총은 대부분의 교단들이 총회의 허락을 받은 바 없으며, 이들은 한기연을 논하기 전에 한교총 단계에서 가입을 허락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번에 열린 총회는 분명한 창립총회였다. 앞서 설명했듯 창립총회와 통합총회는 완전히 의미가 다르다. 그리고 한교연 일부에서는 창립총회는 한교연의 역사를 인정치 않는 것이라며, 창립이 아닌 통합을 주장하고 있다. ‘창립’과 ‘통합’에 따른 의미와 이후의 교단적 대처가 완전히 다른 상황에 한기연은 이날 총회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못했다. 결국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9월 총회에서 무엇이 결정되든 논란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통합·합동, 총회 승인 쉽지 않아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각 교단은 이번 총회에서 한기연에 관해 어떠한 결론을 내릴 것인가? 먼저 감리교는 올 초 의결권이 있는 총회실행위원회를 통해 한교총 가입을 허락받았으니 논외라고 쳐도, 핵심 교단인 예장통합과 예장합동은 아직 총회에서 한교총이든 한기연이든 허락한 바가 전혀 없다. 통합측과 합동측은 이날 한기연의 임시 공동 대표로 추대되는 등 한기연의 핵심임이 분명하지만, 이들의 의지가 교단 총회로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일부에서는 이를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크다. 먼저 통합측은 총회장 이성희 목사가 이번 한기연 창립에 중심 인물로 활동하고는 있지만, 이 목사의 의지가 총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총회에서 이 목사의 총회장으로서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차기 총회장을 선출하는데 까지다. 한기연 관련 논의는 현 부총회장인 최기학 목사가 총회장으로 올라선 이후 의장으로 논의하게 된다. 하지만 최기학 목사가 과연 이성희 목사만큼이나 한기연 가입에 적극적이지는 않을 것이라는게 내부적인 관측이다. 특히 최기학 목사는 교단장회의 활동이나, 한기연 창립 등에 있어서 별다른 개입을 하지 않았으며, 오직 이성희 목사의 주도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최 목사의 생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물론 중요한 것은 누가 의장이냐가 아닌 총대들의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통합측 내부에서는 한기연과 관련해 적극적인 환영보다는 우려섞인 부정적인 목소리도 다소 흘러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통합측의 교계 연합 포지션에 대한 문제제기가 크다. 통합측은 이미 진보 진영의 교회협과 한기총에 가입해 활동해 왔으며, 이후 한기총에서 분열해 한교연을 창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현재는 한교연에 소속해 있으면서, 한기연이라는 새로운 단체를 창립하는데 앞장서고 있는데, 이를 달리 보면 통합측이 교계 연합단체의 반복되는 분열과 창립, 지속적인 혼란에 가장 핵심이 되어왔다는 의미다. 이미 오래 전부터 정체성에 대한 내부적인 지적을 받아온 통합측의 총대들이 한기연이라는 또 다른 단체 창립에 대해 그리 쉽게 허락하지는 않을 것으로 예측된다. 합동측은 단순한 부정을 넘어 적극적인 반발도 예상이 가능하다. 합동측 총대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WCC라는 교단의 정체성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가 달려있다. 한기연에는 WCC 회원교단인 통합측 뿐만 아니라 감리교도 가입이 되어 있다. 여기에 또다른 회원교단인 기장을 향해서도 꾸준히 가입을 권유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합동측 입장에서는 WCC 문제는 교단 분열까지 겪으며, 지켜냈던 정체성의 문제이기에 WCC에 대한 아무런 신학적 합의나 새로운 연구 없이 무작정 이들 교단과 다시 하나로 활동한다는 것은 내부적인 반발에 부딪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를 의식한 듯 이날 창립총회에는 합동측 WCC반대대책위원장인 서기행 목사를 순서자로 내세웠으나, 이러한 노력이 합동측 총대들을 설득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반대로 합동측 총회장 김선규 목사는 한기연 가입과 관련해 “이미 지난해 총회에서 한국교회 연합과 관련해 전권을 위임받아 총회장의 결정으로 가입은 완료된 것이며, 총회에는 보고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지난 총회에서는 한기총 복귀와 관련해서 논의했을 뿐, 한국교회 연합에 대한 전권을 임원회나 총회장에게 준 일이 없다”면서 적극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형교단 위주 정관, 군소교단 반발 클 것 이번에 새롭게 발표된 정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상임회장단이라는 새로운 조직체다. 교계의 일반적인 조직체계는 총회라는 최고의 회의체 아래, 실행위원회, 임원회가 존재하는데, 한기연은 이 중 실행위원회가 생략하고, 주요 안건을 상임회장단 회의에서 결정토록 했다. 문제는 상임회장단이 철저히 대교단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이다. 정관에 따르면, 상임회장은 ‘1천교회 이상 되는 교단의 현직 교단장과 1천교회 이하 현직 교단장 중 5명, 단체협의회 대표 1명’으로 구성된다. 즉 1천교회 이상의 대교단 교단장은 자동 상임회장이 되며, 이하 군소교단 교단장들 중에서는 상임회장단이 5명을 선임하는 구조다. 그렇기에 상임회장단의 인원은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군소교단에서 선택받을 수 있는 상임회장은 오직 5명 뿐이라는 점이다. 군소교단 교단장들 중 상임회장 5인에 들지 못한 나머지는 공동회장에 오르는데, 정관에 따르면 공동회장의 역할을 ‘상임회장을 보좌한다’고 되어 있다. 이를 달리 말하면 군소교단의 교단장들은 1천교회 이상 대교단 교단장들의 보좌역이라는 뜻이 될 수 있다. 상임회장단의 권한은 매우 막강하다. 정관에 따르면 상임회장단은 △대표회장, 임원, 감사, 법인이사의 총회 추천 △상임위원장 및 특별위원장, 임원인선위원, 사무총장인선위원 임명 △사업계획 및 예산안, 결산 심의 및 총회 상정 △사무총장의 임명 결의 △회원교단 및 총회대의원의 징계 결의 및 총회 상정 등의 권한을 갖는다. 이 중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대표회장, 임원 등에 대한 추천 권한이다. 이에 대해 실무자는 불법선거를 막겠다는 특단의 조치라고 설명하지만, 이는 반대로 상임회장단의 권력을 증가시켜 줄 매우 막대한 권한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여기에 사업계획, 재정, 결산 등의 단체의 중심 운영에 있어서도 임원회가 아닌 상임회장단이 이를 결정하게 된다. 결국은 임원회가 아닌 상임회장단이 단체 운영을 이끌어 나가게 된다는 뜻이다. 또한 회원들에 대한 치리권 역시 상임회장단에 부여했다. 이는 대표회장 추천권과 더불어 가장 실제적인 권한으로 상임회장단에 위상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애초 군소교단들은 한국교회의 통합이라는 대명제에 찬성하면서도, 대형교단 위주로 진행되는 새판짜기 행태에 큰 우려를 보인 바 있다. 이런 상황에 공개된 한기연의 정관에 군소교단들이 과연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관심이 모이고 있다.
    • 해설/기획
    • 해설
    2017-08-16
  • 성경의 바른번역, 바른해석, 바른적용 63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 이야기의 중심 주인공을 누구로 설정하 느냐에 따라 성경의 이해와 해석과 적용이 달라진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 사람이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성경 이야기의 감독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성경 이야기 가운데 등장하 는 인물이나 주인공은 감독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용하는 도구이거나 대리인, 혹은 행위자 (Agent)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주인공을 지나치게 의식하다 보면 감 독자나 제작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경우를 보게 된다. 누가복음 5장은 사람 낚는 어부, 예수께서 고기 낚는 어부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감독자이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게 해주셨을 때, 즉석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자기를 떠나 달라는 청을 한다. 흔히 이 경우 우리들 가운데는 베드로가 예수께 불손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그 불손한 태도에 대한 용서를 빈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꽤 많다. 베드로는 나름대로 갈릴리 바다의 물길과 물고기들의 생태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 것 같다. 예수께서 그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으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눅 5:5)라고 대답했다. 베드로의 이 말에는 은근히 “어부인 우리가 밤새도록 노력하였어도 고기를 못 잡았는데 목수인 당신이 어업에 대해서 뭐 알아요. 그러나 선생님 말씀이니 한번 해보지요.”하고 마지못해 그물을 내려 그의 체면이나 세워 주겠다는 투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씀대로 그물을 내렸을 때 상상을 초월한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자기보다 훨씬 물고기를 잘 잡은 위인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자신을 책하고,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낮추고, 떠나주실 것을 구했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자신의 복음 사역에 있어서 편의를 제공해달라고 부탁하고, 그를 도와 준 베드로에게 감사의 표시로 물고기를 잡아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 들었을 때 예수께서는 호숫가에 계셨다. 말하자면 예수께서는 일찍부터 고기잡이를 갔다가 돌아와서 그물을 씻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배 두 척을 눈여겨 보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접근하여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어 육지에서 떼어주기를 청하셨다. 예수께서는 거기에 있는 두 척의 배 가운데 베드로의 배를 지목하시고, 베드로의 배에 올라 그의 도움을 청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그의 배를 선택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주심으로 그가 보통 인간이 아닌 초자연적인 존재, 말하자면 신적인 존재,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성경을 잘 해석하고 가르치는 선생, 병든 자기의 장모를 치료해 준 의사,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대중적인 인기와 리더쉽을 가진 지도자, 그리고 넓고 깊은 호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 그래서 자기와는 도저히 비교가 될 수 없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초인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베드로는 그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자기 앞에 계신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출애굽 후 여호와 하나님과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고 그들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기 위하여 간청하는 가운데 여 호와께 그의 영광(“카보드” )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출 33:18). 여호와께서는 이 말을 모 세가 자신의 참 모습을 보여 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나를 보고서는 살 사람이 없으니,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20)라고 대답하신다. 따라서 칠십인역(LXX)은 여기서 “주의 영광을 보여주소서”를 “주님 자신을 보여주소서”라고 읽고 있다. 이때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바위틈에 두시고 하나님께서 지나가실 때에 그의 손으로 모세를 덮으셔서 모세는 여호와의 뒷모습만 볼 수 있게 해주신다. 모세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을 산에서 만나고 온 모세의 얼굴은 여호와의 영광을 반사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보기조차도 힘들어 모세는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가려야 했다(출 34:29-35). 이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볼 때, 베드로는 지금 “선생”이 아닌 “주님”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한 말은 자기의 불손한 행동에 대한 죄의 고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말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예수 께서는 베드로를 선택하시고, 그의 신적 권능을 과시하여 베드로가 현재 하나님을 직접 대면 하고 있음을 알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시기에 당당하게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고, 베드로도 또한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신했었기 때문에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 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하여 자기를 떠나라고 말씀하였지만 오히려 예수께서는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며, “이제부터 너는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분명 물고기를 낚는 베드로에게 앞으로는 사람을 낚는 사람이 되게 해주시겠다는 뜻일 것이다. 물고기를 낚는 일은 베드로의 생업이다. 물고기를 낚아서 그와 그 가족들이 먹기도 하고, 팔기도 할 것이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물고기를 낚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낚는 일은 먹고 사는 일과 같을 수는 없다.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바다에 빠진 무리로 간주하시고, 낚시꾼이 물고기를 낚시로 낚아 올리듯이, 베드로를 사람을 낚아 올리는 어부로 비유하는 것이다. 이 일은 생업과 달리 사람을 살리는 일이 될 것이다. 생업은 사람이 생활을 하기 위하여 하는 일이겠지만 사람을 낚아 살리는 일은 분명 사명이 없이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예수님처럼 이른 아침에 바닷가에 나와야 고기를 낚든, 사람을 낚든, 낚시질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택하시고, 베드로에게 자신의 신적 정체성을 계시하시고, 그에게 사람을 살리는 사명인으로 살도록 인생의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시고, 새로운 인생길의 전기를 마련해 주신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 낚는 법을 배우고, 먹고 살기 위한 생활인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사명인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실상 이날 아침에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베드로라는 대어를 낚으신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신 것이다.
    • 해설/기획
    • 손석태
    2017-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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