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7(화)
 
  • 강성률 목사(신촌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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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와 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8:5-6).

 

요새 자존감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사전적인 의미는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다른 분들에게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다가오는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신앙적이지 않아 보입니다. 한자만 놓고 볼 때 자존감이나 자존심은 자기를 높이는 마음으로 별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신앙인들만큼은 자존감이 아니라 주존 감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존 감을 굳이 해석하자면 신앙인들이 주님을 존중히 여김으로 생기는 긍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은 높일 것이 없지만 주님을 높임으로써 자연스럽게 생기는 마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자존감이 하늘을 찌를 때 그것은 교만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존감이 무너질 때 열등감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자존감과 열등감은 옷만 바꿔 입은 일란성 쌍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은 날씨와 같아서 수시로 변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고, 우리에게 사랑으로 하신 약속 또한 변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도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높임으로 갖게 되는 신앙인들의 힘과 신앙인들의 긍지는 믿음을 더욱 굳게 하고 무슨 일이 잘될 때 교만하지 않은 원동력이 되며, 설령 일이 잘 안 될지라도 주님을 바라봄으로 다시 일어설 힘이 됩니다.

 

본문의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8:5a) 말씀은 여인들이 술람미 여인에 대하여 합창하는 내용입니다. 비록 술람미 여인은 미천한 신분의 여인이지만 왕의 힘을 의지하고 자신의 환경, 자신의 위치를 떨치고 일어섭니다. 술람미 여인에게는 주존 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만 바라보면 일광에 쬐어서 검고(1:6), 오라비들의 분노로 포도원 지기 신분이었지만 자신의 신분에 낙심하지 않고 왕의 사랑을 의지하고 힘차게 솟아오릅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게 다음과 같이 청합니다. “당신은 나를 인장 반지처럼 마음에 간직하고 도장처럼 팔에 세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며 질투는 무덤처럼 잔인하여 맹렬한 불처럼 타오릅니다.”(8:6 현대인의 성경). 아가서가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사랑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게 인장 반지처럼 자신을 마음에 간직해달라고 하였는데 우리 주님은 이미 벌써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구약시대 제사장들이 입는 옷은 대략 이러했습니다. 속옷이 있고 그 위에 입는 겉옷이 있었고, 겉옷 위에 앞치마처럼 걸치는 에봇이 있었습니다. 이 에봇은 청색 자색 홍색과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들었습니다. 에봇의 양어깨 위에는 호마노 보석 두 개가 있었는데 한 개에 여섯씩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에봇에 부착한 흉패 역시 열두 보석으로 달려 있었습니다(28:1-14).

 

제사장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열두 지파는 주님 안에 있는 다양한 종파의 기독교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정 교단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 모두 가슴에 새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게 인장 반지처럼 마음에 새겨달라고 했지만, 우리 주님은 이미 벌써 오래전에 성도들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네 자녀들은 속히 돌아오고 너를 헐며 너를 황폐케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49:16). 이스라엘 백성들을 손바닥에 새겼기 때문에 절대 잊어버리지 않고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 주존 감으로 인하여 그들은 비록 흩어졌으나 멸망하지 않고 70년 만에 포로 생활에서 귀환하게 됩니다.

 

우리는 바울의 말처럼 아무것도 아닌 자들입니다(고전3:7). 또 지렁이 같은 존재들입니다(41:14). 그러한데 자신을 높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주님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석으로 여기고 또 가슴에 새기고, 팔에 세기고 계십니다. 절대로 잊지 않으십니다. 오직 성도들의 존재 의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높일 때 우리의 믿음이 굳어지고 거기에서 생기는 힘과 긍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존감이 아니라 바로 주존 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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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독연 칼럼] 강성률 목사의 ‘자존감이 아니라 주존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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